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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2

그래도 난다 — 일본 에즈원커뮤니티(as one community) 방문기 - 사람의 본성에 맞는 사회, 작은 변화가 일어나는 곳

그래도 난다 — 일본 에즈원커뮤니티(as one community) 방문기 - 사람의 본성에 맞는 사회, 작은 변화가 일어나는 곳



일본 에즈원커뮤니티(as one community) 방문기 - 사람의 본성에 맞는 사회, 작은 변화가 일어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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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다산 소식지 <몸살>에 실린~

사람의 본성에 맞는 사회, 작은 변화가 일어나는 곳

- 일본 as one community(에즈원 커뮤니티) 방문기


처음부터 관심이 있진 않았다. 1월17일부터 20일까지 3박4일 간 일본으로? 마을공동체 방문? 오 좋다, 재미있겠다, 정도로 생각했다. 전북 장수에 위치한 논실마을학교에서 공동체운동을 고민하고 실천하는 분과 다산인권센터가 연이 닿아 운 좋게 나도 함께 하게 된 것인데, 그래서 그곳에 다녀오기 전까지는 ‘야마기시즘’이나 ‘as one community(에즈원 커뮤니티)’나 그 밖의 마을공동체 등등에 대해 알지 못했다.(지금도 잘 아는 건 아니다 ^^;) 하지만 다녀온 이후, 내가 아는만큼, 그리고 내가 느낀만큼, 많은 사람들과 그곳에서의 기억을 나누고 싶었다. 글을 쓰는 지금은 에즈원 커뮤니티를 방문한 지 한 달이 다 되어간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지금의 떨림은 그 당시와는 약간 거리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2013년을 멋지게 시작하게 해준 근사한 경험이었다.



‘~하지 않으면 안 되는’규칙이 없는 사회, 일하고 싶은 만큼 일하는 회사



우리가 방문한 에즈원 커뮤니티는 일본 미에현 스즈카시에 있다. 나고야 공항에서 1시간 정도 배를 타고 이동한 후, 배에서 내린 곳에서부터 3~40분 정도 차로 더 들어가면 스즈카시에 도착할 수 있다. 도착하자마자 많은 사람들의 모임공간이자 우리들이 숙소로 사용했던 <연수소>에서 에즈원 커뮤니티의 대략적인 소개를 들었다. ‘야마기시 공동체’라는 마을 공동체를 처음부터 함께 한 몇몇 사람들이 야마기시 공동체의 한계를 느끼고 새로운 공동체-커뮤니티를 만들기 위해 그 곳을 나왔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다시 모여 2001년부터 12년째 여러 가지를 만들어가고 있는 곳이 에즈원 커뮤니티다. 존 레논이 부른 Imagine의 가사 중, “...and the world will live as one”에서 가져온 이름이라고 한다.

몇 가지 팜플렛을 보면서 설명을 들었는데, 대체로 이 에즈원 커뮤니티에 깔린 기본적인가치는 이런 것이다. “하고 싶을 때 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 그래도 괜찮은 사회를 만들고 싶다”. 그래서 그 곳에서는 실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규칙도 없고, 상하 관계가 없는 회사인 <에즈원 커뮤니티 컴퍼니>, <엄마손 도시락> 등을 만들어서 그것을 실현하고 있다. 그렇게 했을 때 사업이 제대로 굴러가는지 확인해 보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 여러 가지 것들을 연구하며 실천할 수 있는 <사이엔즈 연구소>도 만들어서 실제로 활동을 하고 있었다.

“하고 싶은 사람은 하고,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하지 않는다”라니, 이 얼마나 꿈같은 혹은 너무나 뚱딴지같은 이야기인가? 사실 에즈원 커뮤니티에 도착하기까지 나는 의심을 한보따리 안고 있었다. 예를 들면 "어떻게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아?“ , ”분노가 없는 게 어떻게 가능해?“, ”고정관념이나 틀이 없어지는 게 자연스러운거야?“ 같은, 기존의 마을공동체를 겉으로 봤을 때 느낀 것들에 대한 의심 비슷한 것들이다. 과연? 정말? 하는. 지금도 모든 질문이 시원하게 풀린 것은 아니지만, 에즈원 커뮤니티의 사람들에게는 어떤 기운이 있었다. 사람을 옭아매는 규칙을 만들지 않고, 편안하고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그 기운은 말로 전해지거나 결과물로 보이는 것이 아니어서 더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한



에즈원 커뮤니티에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한 사람 한 사람” 그 다음은 “슬슬”이다. 조직/회사/사회(더 나아가 국가)를 위해 어떤 사람들의 존재가 묻히거나,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되거나, 함부로 대해도 상관없다 여겨지는 것. 그리고 그런 일이 당연스러운 것.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일까, 에즈원 커뮤니티에서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를 소중하게 여기는 일, 한 사람 한 사람이 편안한 삶을 사는 것,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어떤 조직 또는 사회에서 실현해야 한다고 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사회. 그 사회를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살려주고, 자기를 자기답게 만드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회를 에즈원 커뮤니티에서 만들어 가고 있었다.

“슬슬”은 그 곳의 느긋함을 표현하는 듯 했다. 몇몇 분의 말버릇이기도 했는데 “슬슬 합시다.” “슬슬 갈까요?”라는 말과 몸짓은 그 곳에서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주기에 충분했다.



소소한 발견



어쩌면 자꾸만 내 속에서 꼬리를 무는 질문과 의심들이 내 안의 ‘규칙성(?)’때문인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 개인을 보면 규칙적이거나 반듯한 사람은 전혀 아니지만)규칙이 없으면 불안하고 뭔가 질서가 있어야 될 것만 같은. 그것에서 비롯되는 고정관념과 규정. 내 마음 가는대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마음껏 사는 삶을 상상하기엔 너무나 틀에 박힌 교육과 사회. 그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나 자신도 그 중 하나.

에즈원 커뮤니티에서의 일정은 고작 3박4일이었지만 꼭 일주일은 머물렀던 것 같았다.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면서 내 머릿속도 여러 가지 복잡다양한 생각들로 꽉 들어찼던 시간이어서 그랬을까? 처음부터 모든 개념과 단어를 하나하나 되짚어 보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원래 그런 것은 없었던’것처럼. 그 생각의 흐름은 마치ㅡ세상을 다른 관점에서 볼 때, 기준을 뒤집어보고 새로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할 때, 중심이 아닌 주변을 볼 때ㅡ인권이 시작되고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라는. 인권을 떠올렸던 그 때와 닮은 것이었다. 자꾸만 두근두근했다. 많은 생각을 곱씹을 때마다. 설렘일까, 깨달음일까, 두려움일까? 무엇이었을까?



해오던 거니까-해야 하니까, 보다는, 무엇이 나와 우리를 행복하게 할까? 어떤 사회를 무엇으로 만들어갈까? 라는 구체적 구상, 그리고 현실을 딛고 현실의 영역을 넓혀가려는 발걸음이 역시나 필요한 일이다. 실감 나지 않고 또 여전히 의심하는 마음도 한편에 있지만 조금씩 그 보따리를 열어가려는 마음을. 길을 다시 준비하고 걸어온 길을 단단히 하는 용기를. 그 동안 우리가 “완전히 잘해온 건” 아닐 수도 있겠다, 라는 고백을. 나 혼자 사는 사회가 아닌 우리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마음 깊숙한 곳을 건드리는 깨달음을. 별로 대단할 게 없는 이야기이기에 위의 모든 것들은 ‘소소한 발견’이다.

아마 앞으로도 우리 모두가 이미 다 알고 있는 소소한 발견들은 계속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소소한 발견을 놓치지 않고, 다시 말하고, 듣고, 다시 생각해보고, 전달하고, 외치는 것. 지금 이 순간 우리들의 목소리에 마음을 보태고, 삶을 덧붙이고, 반복하는 것이 결국 사회를 흔들고 기준을 뒤집는 작은 사건들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여러 사건과 시간들이 모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행복함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에즈원 커뮤니티 방문으로부터 얻은 깨달음은 이것이다. 에즈원 커뮤니티를 소개하는 팜플렛에서 발췌한 글을 전하며 방문기를 마친다. 더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은 다산인권센터나 저에게 연락하시면~ 한바탕 수다방을 만들어볼 수도 있을 것 같다.ㅋ_ㅋ



“ 「그렇게 되면 좋겠네. 그렇지만 현실은 어렵기 때문에」라는 식으로 해왔지만, 여기에서는, 「그렇게 되면 좋겠다. 한번 시험 삼아 해 볼까!」라고 하는 기풍이 넘쳐나는 것처럼 느껴져. 그리 말해도, 결코 ‘완성된 것’은 아니고, 실패도 많고, 쌓거나 무너뜨리거나의 연속이지만, 우리들이 만들어가고 있는 분위기가 재미있어. 지금의 세상, 집이나 토지를 아무리 남길 수 있다고 해도, 아이들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아닌 듯한 생각이 든다. 그런 “유적”의 귀찮음을 자손에게 맡기는 것보다는, 살아있는 몸의 인간이, 어떤 사람이라도 생기있게 살 수 있는 사회 기풍을 남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서, 만들어가는 과정 중의 커뮤니티이지만, 한 번 보러 와서 너의 눈으로 확인해 주지 않을래? 그럼 안녕. “


야마기시즘 실현지 ‘행복낙원촌’사람들 : 신동아 2001년 4월호

일체생활·무소유로 이상세계를 만든다 : 신동아 신동아 2001년 4월호



일체생활·무소유로 이상세계를 만든다

야마기시즘 실현지 ‘행복낙원촌’사람들곽대중 < 자유기고가 >
입력2005-04-21

이런 곳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네 집 내 집 따로 없이 언제나 문을 열어놓고 사는 마을, 담도 없고 문턱도 없는 집들, 맛있는 음식은 서로 나눠 먹고, 필요한 물건은 네 것 내 것 없이 마음껏 가져가는 마을, 동네 모든 어른이 내 부모고 고을의 모든 어린이가내 아들딸이 되는 마을, 밤이 되면 마을 사람들이 둥그렇게 모여 앉아 대소사를 의논하고, 기쁜 일은 마을 전체의 경사가 되고 슬픈 일은 서로 덜어 주는 사람들…. 아름다운 동화책에 등장하는 ‘마음 착한 난쟁이들의 마을’에나 그려질 법한 이런 이상세계를 직접 실천하며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서울에서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서해대교 쪽으로 달리다 보면 발안 인터체인지를 지나게 된다.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구문천 3리에는 1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조그만 농장이 하나 있다. 그런데 이 마을은 입구부터 약간 색다르다. ‘효의 고장’ ‘범죄 없는 고장’이라고 동네를 자랑하는 선전물은 시골 도로를 지나는 길에 드문드문 볼 수 있는 광경이지만, 이곳은 ‘돈이 필요 없는 사이 좋은 마을’이라는 푯말을 마을 입구에 세워놓았다. 바로 이곳이 무소유, 무아집의 삶을 몸으로 보여주며 살아가는 ‘야마기시즘 경향(京鄕) 실현지(實現地)’이다.

마을을 한 바퀴 빙 둘러보면 겉모양은 여느 시골마을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10여 동의 양계축사가 늘어서 있고, 그 옆에 커다란 생활집과 식당, 작업공간, 마을회관 등이 모여 있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이 사는 방식은 다른 마을 사람들의 그것과 상당히 다르다.

“우리는 한 식구”

먼저 이곳 사람들은 공동생활을 한다. 물론 각 가정이 쓰는 방은 따로 있지만 한 지붕 밑에 11가구가 모여 산다. 그리고 식사도 함께 한다. 식사시간이 되면 사람들은 마을 가운데에 있는 식당에 모여 앉는다. 흡사 대학기숙사 같다.

처음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이런 광경을 보고 대개 공산주의를 연상한다. 그러나 공동생산, 공동분배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달리, 이곳 사람들은 공동생산은 하되 공동분배는 하지 않는다. 공동소유도 아니다. 이곳 사람들은 단지 ‘무소유’라고 이야기한다. ‘공동생활’이라고도 하지 않는다. ‘일체생활’이라고 한다. 서로 다른 식구들이 모여 사는 공동생활이 아니라, 모두 한 식구로 일체가 됐다는 뜻이다. 그래서 마을 사람에게 몇 가구가 모여 사느냐고 물으면 “우리는 한 식구”라고 대답한다.



이 ‘평범하지 않은’ 마을을 이해하려면 우선 야마기시즘에 대해 알아야 한다. 일본식 이름에 무의식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야마기시즘이라는 표현은 왠지 좋지 않은 느낌을 준다. 일본의 한 종교집단 정도로 오해하는 사람도 종종 있다. 그러나 우선 야마기시즘은 종교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을 밝혀둔다. 이곳 사람들은 오히려 종교에 의존하고 종교적 가치판단에 의지하는 삶을 멀리한다.

그럼 야마기시즘이란 도대체 뭘까. 야마기시즘은 ‘-ism’이라는 말에서 느낄 수 있듯이 야마기시주의, 즉 야마기시라는 사람이 제창한 일종의 사상적 지향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상적 지향이라고 해서 무슨 거창한 체계나 이론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야마기시즘은 ‘어설픈 이론화’를 경계한다.

야마기시즘을 소개한 책자를 보아도 야마기시즘의 취지를 “자연과 인위, 즉 천(天) 지(地) 인(人)의 조화를 도모하여, 풍부한 물자와 건강과 친애의 정으로 가득 찬, 안정되고 쾌적한 사회를 인류에 가져오는 것”이라고만 간략하게 밝히고 있다. 결국 야마기시즘이란 야마기시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제안하여 유례가 된 ‘행복일색(幸福一色)의 이상사회’를 지칭하는 다른 표현일 뿐, 야마기시라는 주창자를 숭배하는 의미도, 정연화된 사상체계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야마기시즘 운동을 처음으로 주창한 사람은 일본인 야마기시 미요조(山岸已代藏 ; 1901 ∼1961). 그는 청소년 때부터 어떻게 하면 모두가 하나 되어 사이 좋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상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고 한다. 그래서 젊은 시절에 잠깐 사회주의 운동에도 관심을 가졌던 것 같은데, 가진 사람의 재산을 억지로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다든지 모든 사람이 노동의 생산물을 똑같이 나누는 방식은 ‘악평등(惡平等)’이라 생각하여 관심을 갖지 않았다.



독특한 양계법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야마기시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1950년 9월의 태풍 ‘젠’ 때문이었다. 당시 태풍으로 들판의 벼가 다 쓰러졌는데 한쪽 논에서만 벼가 쓰러지지 않고 꼿꼿이 서 있는 것을 한 농촌 보급원이 발견한 것이다. 신기해서 누구 논인지 알아보니 그곳이 바로 야마기시의 논이었고, 그의 농사법과 양계법이 독특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 농촌 보급원은 야마기시를 설득하여 농사법에 대한 강연회를 개최하게 했다. 강의를 들은 사람들은 처음에는 야마기시의 양계법에 공감하다가 점차 이러한 양계법을 낳은 독특한 사고방식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 이른바 ‘연찬회(硏鑽會)’다. 이 연찬회를 통해 사람들은 밤을 새워 이상사회와 인간성 회복 등을 논의하기 시작했고, 1956년 교토의 어느 절에 162명이 모여 야마기시즘 특별 강습 연찬회(약칭 특강)를 처음으로 개최했다.

특강(特講)은 매월 2회씩 개최돼 현재 전세계에 걸쳐 2000회를 넘었다. 1958년 7월 야마기시즘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일본 미에현 가스가야마(三重縣春日山)에서 일체생활을 시작함으로써 ‘야마기시즘 실현지’라는 것이 처음 만들어졌다. 현재 야마기시즘 실현지는 일본을 비롯하여 한국, 스위스, 브라질, 타이, 독일,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등 8개국 50여 곳에 있다.

한국에서 야마기시즘 특별강습연찬회가 시작된 것은 1966년. 1984년엔 실현지가 탄생했다.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에 자리잡고 있어 경기도의 경, 향남면의 향을 따 ‘경향(京鄕) 실현지’라고 부르며, 산안(山岸, 야마기시) 마을, 혹은 산안농장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행복한 마을’이라고 부른다.

마을의 촌장 노릇을 하는 사람은 윤성렬씨(58). 그는 아버지에게 야마기시즘에 관해 들은 후 이상사회의 뜻을 품고 한국에 실현지를 처음 가꾼 사람이다. 윤씨의 부친 윤세식씨(타계)가 1965년 일본 가스야마 세계중앙실현지에서 연수를 받은 것이 한국에 야마기시즘이 전파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당시 야마기시즘은 당국으로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받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여러 사람이 모이면 일단 조사 대상이었습니다.특히 자꾸 모여서 이상사회 무소유 등을 이야기하니 이상하게 볼 만도 했습니다.”

윤씨의 전직은 교사다. 그는 젊은 시절 이상적인 공동체 마을을 만드는 데 모든 노력과 시간을 투자했다. 실패를 거듭한 끝에 1984년 지금의 자리에 실현지를 마련했다. 야마기시즘을 더욱 깊이 알아보려면 그 실현지인 산안마을 사람들의 생활을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 말 그대로 이곳은 이상을 ‘실현’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산안마을의 주 수입원은 양계다. 야마기시즘 양계법이라는 특별한 방법으로 닭을 키운다. 일반 양계장에 가면 역겨운 닭 냄새 때문에 접근하기도 어려운데, 이 마을의 양계장에서는 냄새가 거의 나지 않는다. 닭들도 닭장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수탉과 암탉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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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에게 사료를 줄 때는 “사료 왔습니다”, 달걀을 가지러 갈 때는 “집란하러 왔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 닭을 사람 대하듯 기르는 것이다. 아니, 기르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닭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는 표현이 옳을 것 같다. 야마기시즘 양계법의 핵심은 닭들을 억지로 키우고 억지로 알을 낳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닭들이 자라기에 가장 적합한 환경을 제공함으로써 스스로 크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암탉들이 ‘낳아 주시는’ 고급 유정란은 서울 경기 대구 전주 등 전국 각지로 직접 배달된다. 백화점이나 기타 소매점에서는 판매하지 않는다.

이곳 사람들은 다들 맡은 일이 있다. 양계부, 공급부, 생활부, 학육부, 채소부 등에 속해 있는데, 이것을 직장이라고 부른다. 이외에도 식당, 이·미용, 육아, 사진, 보건·위생, 세차, 소방 등 각자 하는 일이 정해져 있다. 세탁하는 사람도 따로 있어 그가 다른 사람의 속옷까지 다 처리해준다. 그러나 이러한 일에는 강제나 규율이 없다. ‘너는 무슨 일을 하라’고 지시하는 사람도 없고, 빈둥빈둥 논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다. “그래도 노는 사람은 없다”는 게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다.

마을 안에서는 화폐를 사용하지 않는다. 농장 안에서 생산하지 못하는 생필품은 모두 공동으로 구매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생활비는 들지 않는다. 마을 한가운데는 조그만 창고가 하나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식품, 면도기, 학용품, 과자류 등이 가득 쌓여 있다. 군대 보급 창고를 연상케 하는데 이곳에는 열쇠가 채워져 있지 않다. 필요하면 누구든지 꺼내 쓰면 된다. 창고에 없는 물건이 필요하면 ‘연찬을 통해’ 결정해 사온다. 마치 우리가 어머니에게 옷 사달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낭비하고 욕심을 부리는 사람은 없느냐고 물으면, “여태 그런 사람은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어찌 보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필요한 만큼 갖다 써라

특별히 쉬는 날이 정해져 있지도 않다. 각자 함양일(涵養日)이라는 것을 정해놓고 쉬고 싶을 때 쉰다. 무소유를 지향하지만 그래도 각자 돈이 필요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성인들은 월 5만 원씩을 받는다. 젊은 부부들은 이 돈으로 함양일에 영화를 보러 가든지 외식을 하기도 한다. 돈이 남으면 저축을 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런데 이쯤 되면 묻는 사람이 부끄러워진다. ‘개인적으로 저축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빙그레 웃기 때문이다. 돈이 부족하면 어쩌냐는 질문에도 “더 필요한 적이 없고, 만약 더 필요하면 달라고 해서 쓰면 된다”고 대답한다. 우문현답(愚問賢答)이 따로 없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 마을은 무슨 특별한 정신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런 측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간혹 산안마을을 생태마을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유기순환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자연과 인위의 조화를 지향하지만 생태마을은 아니다. 도인(道人)들이 모여 뜻 모를 이야기만 나누면서 사는 곳은 더더욱 아니다. 현재 산안마을에는 아이들 15명을 포함해 44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전직 교사, 사회운동가, 직장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그저 네 것 내 것 없이 살고 있을 뿐이다.

실현지에 거주하는 데 특별한 자격은 필요없다. 하지만 일단 야마기시즘 회원이 되기 위해선 무소유의 삶에 동의해야 한다. 그들은 이것을 참획(參獲)이라고 하는데, 마을에서 거주하려면 자신의 모든 재산을 야마기시즘회에 내놓아야 한다. 이곳에서 살다가 간혹 나가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자신이 가져온 재산을 다시 내놓으라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산안마을 아이들에게는 동네 어른들이 모두 자기 부모나 같다. 아이들은 동네 아주머니를 부를 때 현주엄마, 유끼엄마 하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현주’ ‘유끼’라는 이름은 그 아주머니의 아이 이름이 아니라 본인의 이름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해서 이름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어른들도 서로 ‘서혜란씨’ 하는 식으로 이름을 부른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대할 때도 하나같이 자기 아이들처럼 대한다. 아기가 태어나면 아이 이름을 마을 사람들이 함께 짓는다. 유아들은 마을 안에 있는 태양유치원에서 자란다. 결국 여기서는 모두가 엄마 아빠 삼촌 언니 동생이 되는 셈이다.

“더 좋은 곳 찾지 못했다”

산안마을 사람들은 명절에도 자기 가족을 찾아 고향집으로 가는 경우가 별로 없다. 명절 때면 마을 사람들 모두 곱게 한복을 차려 입고 마을회관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생일이 되면 마을 사람들이 함께 축하해주고 생일 떡을 나눠 먹는다. 그야말로 대가족이 아닐 수 없다.

사람 사는 동네에 특이한 이력을 갖지 않은 사람이 있으랴만, 산안마을에도 독특한 삶의 길을 걸어온 사람이 많다. 경북대 농대 77학번인 황형섭씨(44)는 농민운동을 하려다 산안마을에 들어왔다. 대학에서 농촌문제연구소라는 서클 활동을 했던 황씨는 대학 동기들과 함께 각자 농촌 마을에 들어가 농민운동을 부흥시켜보려는 계획을 세우던 중 양계법을 배울 요량으로 야마기시즘회를 찾게 됐다.

“처음 특강에 참석했을 때는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소리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특강에는 일본인도 참여하고 있었는데, 우선 야마기시즘이라는 말 자체가 거리를 느끼게 했습니다. 그런데 자꾸 듣다 보니 어느 날은 세상을 저렇게 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뭔가 어설프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실현지에 들어오게 됐습니다.”

혹시 마을에서 나갈 생각은 해보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황씨는 “지금도 매일 하고 있는 생각”이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왜 나가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더 좋은 곳을 찾지 못해 나가지 못하고 있다”며 웃는다. 총각으로 들어왔던 황씨는 산안 마을에서 변정희씨(40)를 만나 딸 둘을 두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야마기시즘의 특징 중 하나는 국경을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긴 모든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지향하는 사람들이니 국경이나 인종 같은 것은 전혀 따지지 않으리라. 그래서 전세계에 있는 실현지를 옮겨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한국은 일본과 가까워 특히 왕래가 잦다. 양국의 실현지에 있는 청년들이 서로 찾아가 잠시 살다 오기도 하고, 결혼을 하여 아예 눌러 앉는 경우도 있다. 윤성렬씨는 이를 보고 “청년들의 자유로운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다”고 흐뭇해한다.

나가오 유끼(28)는 1994년 산안마을에 어린이 낙원촌 학생 스태프로 참여했다가 유상용씨(38)를 만나 결혼했다.

“처음엔 한국이란 나라에 호기심이 있어 찾아왔는데, 사람들이 너무 좋고 한국이 마음에 들어 다시 찾게 됐습니다. 그때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했지요.”

유끼는 이제 한국말을 굉장히 잘한다. 현재 산안마을에는 유끼 이외에도 5명의 일본인이 있다. 이들은 모두 일본 실현지에서 나서 자란 사람들로 지금은 산안마을 사람들과 한 식구가 되어 오순도순 살고 있다. 물론 한국의 청년이 일본의 실현지에서 결혼해 살고 있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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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곡씨(57)는 사회운동을 하다가 야마기시즘 실현지를 찾은 경우다. 서울대 법대 졸업 후 고등학교 교사를 하던 그는 1970년대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으로 4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한국불교사회연구소 소장을 역임했고, 끊임없이 새로운 이상사회를 모색하던 중 1994년 가족들과 함께 산안마을 식구가 됐다.

산안마을 사람들이 자주 쓰는 용어 중 하나가 ‘연찬(硏鑽)’이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면 ‘연찬을 통해 결정한다’고 이야기한다. 산안마을 사람들은 실현지의 삶을 ‘연찬하는 삶’이라고 이야기하고, 실현지에서 생활하는 의미를 ‘계속되는 연찬’에 두고 있다. 과연 연찬이 무엇이기에 그럴까. 연찬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의 도리를 깊이 연구함’이다. 야마기시즘에서 연찬이란 하나의 의문이나 주제에 대해 여러 사람이 모여 앉아 자신의 의견을 내놓고, “과연 그럴까”를 생각하며 의견을 모으는 과정이다.

그저 회의라고 해도 좋고 토론이라고 해도 좋지만,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고집을 부리는 일도, 화를 내며 덤벼드는 일도 없는 것이 특징이다. 자신이 진리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원점에 되돌려놓고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라고 할 수도 있겠다.

산안마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상당히 차분해지고 때론 깜짝 놀라기도 한다. 먼저 이곳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대화하는 태도가 ‘되어 있다’. 그래서 처음 만난 사람이라도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또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문제, 혹은 감정적으로 즉각 반응하는 문제들에 대해 ‘왜 그럴까’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2월3일 밤 8시. 야마기시즘회 회원들이 한 달에 한 번씩 실시하는 회원 연찬회에 참석했다. 연찬회 시간이 가까워 오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실현지에서 생활하는 사람 몇 명과 치과의사, 대학교수, 약사, 주부, 노동자 등 사회에서 생활하는 회원들이 모여 인사를 주고받으며 떠들썩하다. 오늘 연찬의 주제는 ‘진보의 길 - 타(他)를 침범하는 것의 천박함과 어리석음을 깨닫는 것!’ 벽에 붙은 연찬 주제를 보면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다. 다른 사람을 침범하는 것이 왜 천박하고 어리석으며, 나아가 이것을 깨닫는 것이 진보의 길이라니, 도대체 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마치 불교의 화두를 받은 기분이었다.



참석자들은 먼저 돌아가며 자신의 근황을 소개했다. 그 동안 특별했던 일, 재미있었던 일, 후회하는 일 등을 자연스럽게 털어놓는다. 가정생활, 자녀교육, 회사나 학교 이야기가 오가면서 즐거운 분위기 속에 연찬이 진행된다. 사회자가 있기는 하지만 특별히 발언권을 준다든지, 회의를 이끌고 있다는 분위기는 풍기지 않는다. 상대의 이야기에 웃고,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이 경험한 다른 사례를 이야기하다 보면 사람의 따뜻함이 저절로 느껴진다. 이러한 연찬회는 특별한 결론을 유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연찬을 하다 보면 새로운 사실을 깨닫는 경우가 많다.

화를 내지 않고 사는 법

야마기시즘회에는 두 달에 한 번씩 실시하는 ‘특별강습연찬회’를 통해 입문할 수 있다. 특강 주제는 ‘화를 내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누구와도 사이좋게 즐겁게 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우리는 상대를 바꿀 수는 없어도 자신의 삶을 스스로 바꿀 수는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붙들어 매는 것이 무엇인지 가려내 그 밑에 숨어 있는 본래의 자신을 깨닫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야마기시즘 특강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회입니다.”

야마기시즘에서 설명하는 특강의 의미다. 이신홍씨(31·김포공항 근무)는 최근 특강을 받았다. 꽉 짜인 회사 분위기에 답답해하던 이씨는 우연한 기회에 야마기시즘을 소개받았다.

“아는 분의 소개로 찾아가기는 했지만 처음 며칠간은 혹시 무슨 종교집단은 아닐까, 어디로 잡아가는 건 아닐까 생각하며 무섭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5일쯤 지나자 아주 마음이 편해지면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깨닫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

이제 이신홍씨는 화내지 않고 살려고 애쓴다. 대학생 기자 교수 사회운동가 스님 목사 신부 등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이 특강을 거쳐갔다. 2001년 2월 현재까지 195회의 특강을 통해 2000여 명의 사람들이 대안적 삶을 느끼고 돌아갔다.

‘사랑의 전화(대표 심철호)’ 사회조사연구소는 최근 한국인의 ‘행복도’에 대한 조사결과를 내놓았다. 10세부터 50세 사이의 남녀 487명을 대상으로 전화조사를 실시한 결과, 조사대상의 64.9%가 ‘행복하다’고 응답한 것이다.

그런데 ‘행복하다’와 ‘행복하지 않다’의 이유를 뜯어보면 무척이나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행복의 원인을 ‘가정의 화목’(63.9%), ‘미래에 대한 희망’(15.8%)에서 찾았다. ‘경제적 여유로움’을 행복의 이유로 꼽은 사람은 5.1%에 불과했다. 반면 ‘나는 행복하지 않다’고 대답한 사람들은 행복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경제적 어려움’(41.5%)을 가장 먼저 꼽았다.

불행한 사람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불행의 요인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행복한 사람들은 그 이유를 ‘경제적 여유로움’에서 찾을 법도 한데, 경제적 여유를 행복의 조건으로 꼽은 사람은 왜 5%에 불과할까? 우리는 여기서, 경제적 어려움은 불행을 느끼게 하는 요인은 될 수 있어도, 일정한 경제적 수준에 오르면 결코 돈이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확인하게 된다.

“한번 들어 보세요”

또한 행복이란 스스로 마음먹기에 달린 문제라고 볼 수도 있다. 영국 LSE 대학은 전세계 54개국 국민들의 행복도를 조사한 결과, 제일 가난한 나라로 꼽히는 방글라데시 국민들이 도리어 가장 행복을 느끼며 산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산안마을 사람들은 식사할 때 자기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의 접시에 반찬을 놓아준다. “이거 맛있겠지요? 한번 들어 보세요” 하면서 말이다. 받는 사람은 또 상대방의 접시에 그가 좋아할 만한 음식을 골라준다. 스스로 행복한 마을, 사이좋은 마을이라 자랑하는 산안마을 사람들은 이렇게 식사 때도 서로 아껴주고 나눠주는 삶을 자연스레 실천하면서 무소유와 무아집의 일체생활을 보여준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내가 옳다고 강변하며 화내지 않는 삶 속에서, 그들은 새로운 이상사회를 그려내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산안마을을 바라볼 때마다 고개를 드는 우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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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스즈카의 도시공동체를 방문한 강화의 딸들 - 인터넷 강화뉴스

일본 스즈카의 도시공동체를 방문한 강화의 딸들 - 인터넷 강화뉴스



일본 스즈카의 도시공동체를 방문한 강화의 딸들
유상용
승인 2012.03.20 11:20
조회수 3,014
* 공동체 실현을 위해 경기도 화성에 있는 야마기시 농장에서 18년을 살았다. 2009년 강화로 이주해 현재는 양도면 삼흥리에서 펜션을 하면서 지역 사회를 위한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2월, 20살 전후의 강화의 딸들 4명이 약 2주간 일본 미에(三重)현의 스즈카(鈴鹿) 시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지역 공동체인 'AS ONE COMMUNITY'를 다녀왔다. 내가 ‘강화의 딸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 친구들이 강화에서 나고 자라거나 20년 가까운 강화 지역사회 만들기의 혜택을 받고 자라난 첫 세대로서 ‘강화의 딸들’이라고 불릴만한 대표성(?)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윤여군 목사의 딸 승민이, 밝은마을 이광구 이사장의 딸 나리, 산마을 고등학교 노광훈선생의 딸 해원이, 장진영 화백의 딸 해인이, 네 명은 스즈카에서의 체험을 강화에서도 살려가고 싶다는 희망을 가지고 일본으로 출발했다.

스즈카 시의 AS ONE COMMUNITY는 사람과 사회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사람을 위한 경영을 지향하는 회사, 생활과 가계 등 인간생활 전반을 되돌아보고 새롭게 창조하는 지역 사회, 개인의 지적 정서적 건강을 지원하는 심리센타 등이 네트워킹된 ‘도시 공동체’이며 사회활동체이다. AS ONE COMMUNITY는 성인들을 위한 인생탐구학교인 ‘사이엔즈 스쿨’과 인간-사회 연구를 위한 ‘사이엔즈 연구소’와 연결되어 PIESS 란 NPO단체의 한 구성 요소이기도 하다.

내가 이곳을 오랜 친구인 이광구 군과 지역 분들께 청년들의 체험의 장으로 소개한 것은, 이 공동체를 시작한 분들이 내가 20년 가까이 몸담고 있던 곳과 이어진 일본공동체 출신들이고, 생활공동체의 한계를 넘어 본질을 사회 전반에 보편화해갈 수 있는 길을 찾아 10년을 모색해 온 결과 이제 그 성과를 세상에 내놓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한 나로서는, 인간사회 전반을 향한 거대 담론이 사라진(?) 요즘, 사람과 사회의 이상적인 존재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돌이켜보고 한국의 (지역)사회운동의 방향을 찾는데도 조금의 보탬이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서, 특히 다음을 준비해갈 청년들이 미리 맛보기를 바라며 제안을 했던 것이다.

이번 교류는 작은 일이지만 가기까지의 과정과 의미에 대해 나대로 생각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써본다. 앞부분은 나의 사적인 과정인데 ‘강화를 공동체’로 생각하고 살아가려는 나의 생각을 적어보았고, 뒷부분은 애즈원 공동체를 체험했던 청년들의 교류체험기를 싣는다.



작년 4월초였다

나는 밝은마을의 황선진 선배 덕분으로 양사면에 있는 빈집을 빌려 우선 필요한 짐만을 옮겨놓고 강화 생활의 첫발을 내딛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내가 자리를 잡는 대로 여름까지는 다 같이 이사를 올 생각을 하고 아직은 꽃샘추위가 남아있는 봄 4월의 강화에 선발대로서 왔던 것이다.

내가 그때까지 몸담고 있던 곳은 야마기시즘 실현지(일명 산안마을)라고 하는 곳으로 7가족 30여명이 함께 사는 공동체이다. 일본에서 시작되었고 일본 각지에는 30 군데 정도의 공동체가 산재하여 서로 연결되어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는 60년대 후반에 농촌운동의 하나로 소개되어 유정란 양계의 보급을 위주로 활동하다가 80년대 중반에 공동체를 결성하여 부침을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시기가 지나갈 무렵 그간의 10년을 돌아보며 나는, “사람과 사회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삶의 방식’이 뿌리에서부터 바뀌어야 하겠다. 나 스스로가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고 그 바탕에서 새로운 사회를 구성해가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생태주의, 공동체, 자연농업 등의 관련 책을 읽고, 실천하는 곳을 찾아다니며 탐구의 시간을 보내던 중에 경기도 발안에 위치한 산안마을을 만나게 되었고 28살의 청년으로 마을에 합류하여 결혼하고 아이 기르고 여러 활동들을 해오다 18년간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작년에 이사를 나오게 되었다. 초기에 시작한 분의 생각과 변화를 필요로 하는 세대들의 뜻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반 이상의 식구들이 1년 사이에 나오게 된 것이었다.

누구의 생각을 옳다하고 맹신하여 따르거나, 자신의 생각도 고정하여 굳어지지 않고 ‘무고정 전진’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물심양면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자고 한 야마기시즘도 다시금 고정의 길로 접어 들어가 더 이상 변화의 힘을 상실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다.

원인은 역시 그 것을 구성하는 사람의 ‘질’을 높이는데 실패한 것이라 생각한다. ‘자신의 생각이 옳고 그것이 야마기시즘이다.’라고 하는, 고정관념이라는 해묵은 인간문제에 당면하여 우리들 역시 좌초한 것이다.

산안마을을 나오기 전까지의 5~6년간 나는 새로운 세대들이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기 위해 청년활동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것은 몇 가지 목적을 가지고 한 것인데 하나는 물론 청년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적 성장과 차세대의 육성이고, 다른 하나는 그 당시 산안마을에서 해오던 방식이 아니더라도 더욱 유연하면서도 목적에 맞는 방식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또 하나 개인적인 관심으로서 한일-아시아 교류라는 것이 있는데 그 것은 앞으로의 시대를 염두에 두고 아이들의 관점이 국경의 울을 넘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기를 바라면서 시작한 것이었다. 일본과의 교류가 많은 산안마을의 장점을 활용하려 한 것이기도 하였다.

5년 정도 지속된 활동이 본 괘도에 오르자 나는 야마기시 씨가 생각한 이상사회를 구성하는 방법에 대해 몇 가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유의지를 가장 소중히 한다.’ ‘기구와 제도를 잘 정비해 놓고 그 다음은 사람의 성장에만 힘을 쏟으면 사람의 성장에 따라 사회의 성장은 자동적으로 따르게 된다.’ ‘ 어떠한 속박도 규제도 없이 무수히 이합집산하고 무한히 성장하도록 장치한다.’ 등이다. 야마기시가 본 세계는 개인과 사회, 정신과 물질 등이 대립이 아닌 조화 - 합일된 세계이고, 마음의 문제와 사회의 문제가 분리되지 않고 함께 해결될 수 있는 길을 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마기시즘’이란

‘야마기시즘’이란 일본인 야마기시 미요조(1900~1963) 씨의 사상으로서 한국에서는 산안마을이라는 공동체의 정신이나 유정란 양계의 생산방식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인간의 지적, 정신적 각성을 바탕으로 인간사회를 근저에서부터 변혁하여 이상사회를 이루어 가려는 혁명사상이다. 60년대 후반부터 40년 정도 한국사회에 알려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과 가치에 대해서 공개적이고 명확하게 일반에 알려져 있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 나에게도 일부 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동안은 자신도 그 사상에 대한 이해가 얕고 체험으로 터득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정도가 못 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면이 있고, 앞으로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나의 표현방식으로 하자면 야마기시즘이란 ‘후천개벽을 과학적, 합리적으로 인류사회에 실현하기 위한 진리적 사회구성방식’ 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국근대 종교사상의 가장 큰 주제인 후천개벽이란, 지구와 인류가 일정단계의 성숙기에 이르렀기에 지금까지 발달시켜온 물질문명을 바탕으로 정신의 계발이 더욱 진전되어 물질과 정신이 고루 발달한 참된 문명사회가 이룩된다는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한국 사상들은 그 ‘실현방법’이 구체적이지 않아 종교로 되었으나 야마기시 씨는 “이상은 방법에 의해 실현될 수 있다.”는 데 주목하여 ‘사회실천 사상이며 활동’임을 분명히 하게 된다.



2000년 일본에서는

최근 한국의 산안마을에서 40대 남자들과 그 가족들이 나오게 된 과정과 비슷하게, 2000년도 일본에서도 ‘실현지’ ‘야마기시즘’ 등에 대한 고정된 생각에 의문을 가진 40대들이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 몇 차례의 시도와 실험을 하였다가 그 제안들이 당시의 리더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자 결국 대거 실현지를 나오는 일이 발생하였다. 가족을 포함하여 약 200명 가량 되는 많은 인원이 실현지 주변이나 대도시 토쿄에 살면서 사람과 사회에 관한 실험들을 지속해 왔었고, 그 중에서도 ‘스즈카’라고 하는 인구 20만 정도의 도시에 집중적으로 모여서 활동을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스즈카 시는 일본에서는 F1 자동차 경기장이 있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고, 혼다자동차의 부품공장이나 근처에 파나소닉 TV 액정공장이 있다. 농업도 발달하였고 북쪽으로는 스즈카 산맥이 자리를 잡고 동남으로는 일본 동해안이 인접해있다. 그래서 일자리 등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도시이고 자연조건도 좋아서 최근에는 시정의 방향이 지속가능한 생태친화형 복합도시를 지향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스즈카에 모인 일단의 사람들은 ‘야마기시 공동체’가 굳어지고 변화의 힘을 상실하게 된 근본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함께 모여 연구-연찬하는 기회를 만드는 데 힘을 쏟았다. 초기 5년간은 여러가지로 연구하고 시도해보았지만 제대로 줄기를 잡지 못하고 있다가 2005년 즈음이 되어서 ‘고정’의 원인을 발견하게 된다.

그 내용에 대해서 여기에서 다루기는 힘들지만 그런 정신적인 진척을 바탕으로, 본질적인 주제를 탐구하는 연구소, 성인들의 의식계발 역할을 하는 교육센타,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면서 동시에 사회실험의 장이 되는 몇 개의 회사, 그리고 스즈카 지역에 점재해 있으면서 서로 네트워킹하여 이루어가는 가정과 개인들이 모인 커뮤니티 등으로 점차적으로 활동을 넓히게 되었고 2008년 겨울 즈음부터는 이것을 사회에다 내놓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내가 스즈카 지역의 지인들과 다시 연락을 취하기 시작한 것이 2008년의 12월이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스즈카의 사람들이 “한국 실현지의 40대들은 요즈음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한 번 연락을 해볼까?” 하던 그 무렵에 전화를 했다. “모시 모시! 오노 상?”



다시 강화의 이야기로 돌아와

아내와 아이들이 모두 강화도로 이사를 온 것은 작년 6월 24일이었다. 이삿날 기억에 남는 것은, 며칠 전부터 이사올 집 2층 처마에 제비가 집을 짓고 있었는데 그 날에 제비집도 완성이 되어서 함께 입주를 하게 된 것이었다. 전 주인도 전셋집 때문에 아직 이사를 못가서 전 주인, 새 주인, 제비부부 세 식구가 함께 생활을 시작하였다. “공동체 생활의 꼬리가 길구나.” 하고 웃었다.

4월부터 석 달간, 새로운 생활을 준비하는 데는 강화지역에 오래 전부터 정착하여 살고 있는 여러 선배, 친구들의 도움이 컸다. 우선의 거처를 마련해준 황선진 님은 마침 마리학교의 새로운 정착지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살 곳을 찾아야하는 내 상황과도 맞아서 여러 곳을 함께 다니며 돌아보고 그 과정에서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서도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또 10여 년 전부터 강화에 자리잡은 친구 이광구 군과도 많은 부분에서 공감이 있어서 내가 강화생활을 시작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그 때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은 “산안마을이라는 작은 공동체에서 나왔으니 강화지역 전체를 나의 공동체로 삼아 오랜 시간을 두고 지역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가자.”는 것과 “지역에서 자라고 배출된 청년들이 지역에서 자신의 삶을 실현해갈 수 있도록 경제적 사회적 조건을 만들어가자.”는 것이었다.

‘무소유 일체생활’을 지향하여 소유도 분배도 따로 없이 모든 물자와 생활을 공용으로 해가는 산안마을의 생활을 20년 가까이 해오면서 나는 생활비와 돈 계산도 해보지 않았고, 은행통장이나 카드도 사용해본 적이 없고, 더구나 몇 억이 넘는 집에 대한 감각은 전혀 없는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거꾸로 지금의 한국사회에서 느끼는 문제들을 더욱 민감하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몇 개월간의 새로운 생활에서 가장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집 문제였다. 사는 데도 거액이 들지만 전세를 얻는 데도 만만치 않은 금액이 든다는 게 새롭고 놀라웠다.

더욱이 새 출발을 하는 청년들이 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 이상으로 많은 시간과 수고를 들여야 하는 것이 내 눈에는 헛된 일로 보였다. 그래서 장기적인 일이긴 하지만 저렴하고 안정적인 주택을 공급하는 것이, 청년들이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출발하려 할 때 최소한의 바탕이 되고 사회 전체의 안정을 위해서도 중요한 과제로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거기에 이어지는 큰 주제로 “대안교육은 있어도 대안사회는 없다.”는 것이다. 지역의 대안학교를 출발하여 그 지역에 살려고 하거나 뜻을 가지고 지역에 정착하려는 젊은이들이 ‘기존의 사회에 적응하여 사는 것만이 현실적이라는, 자포자기에 빠지지 않도록’ 다음 세대들이 능력을 기르고 마음을 바쳐 살만한 지역사회의 대안을 마련하여야 하는 것이다.

하루는 이광구 군과 이야기를 나누다 “나리를 스즈카에 보내보면 어떨까? 강화지역 단체에서 일을 하고 있기도 하고 지역사회 만들기에도 뜻이 있으니…,” 하고 서로 말을 꺼내기 시작했고, 얘기가 진척되는 중에 “강화에서 함께 자라온 아이들을 같이 보내서 함께 체험하도록 하면 더욱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고 전개되어 방학기간을 이용한 2주간의 교류체험을 4명이 함께 가는 것으로 정하게 되었다. 일본의 지역공동체를 체험하고 지속적인 교류의 물꼬를 틈으로서, 강화에서 자란 우리의 아이들이 자신의 삶의 터전으로 다시 강화를 선택하고 자신과 모두를 위해 마음도 물질도 풍성한 사회 만들기를 해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또 그 과정에서 부모들도 다시금 자신의 삶의 터전을 아름답게 가꾸고 참된 사회의 모습을 정립하는데 작은 계기가 되기를 희망하면서….



'AS ONE COMMUNITY'는

몇 개의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처음 시작한 사업들은 이사, 리모델링, 설비 등을 하는 ‘ 애즈원 홈’, 지역의 안전 식자재를 사용하여 만들고 배달하는 도시락 가게인 ‘오후쿠로상 벤토(어머니도시락)’, 도시락 자재 공급을 위한 농장인 ‘애즈원 팜’ 등이었고, 점차 인재파견사업, 부동산업과 소규모 건축업 등으로 사업이 전개되고 있다. 그 사업들은 어느 것도 기존의 이미지와는 다른 내용을 지향하여 전개되고 있는데, 목적은 일하는 사람이 자신의 능력과 적성을 최대한 발휘하면서 풍성하고 쾌적한 지역사회 만들기에 집중되어 있다.

사람을 회사에 맞추지 않고 사람의 성장을 최우선으로 위하고 사람의 심리, 생활적 필요에 사회가 맞추어가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그 실태는 이상과 차이가 있겠지만 개인과 전체,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간사회의 과제에 어느 정도 해결점을 제시하고 있는지 주목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딸들은 2주일간의 교류기간 동안, 때론 도시락 가게에서 반찬을 담으며 때론 농장에서 채소 가꾸기를 하며 일에도 참가하고, 주말에는 지역의 청년들과 관광을 가거나 가정에 초대받아 저녁식사를 함께 하며 지역 사람들을 느끼고 공동체의 의미도 배우는 시간을 보냈다. 이번에 뿌려진 씨앗들이 아이들 각자의 생활에서도 예쁜 싹을 틔우기를 바라고, 강화지역의 풍성한 삶으로 꽃피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2주간 본 일본 - 이나리



처음 간 곳은 이곳의 시작점이었다. 안 되는 일본어로 이것저것 얘기 들어보니 음식물 쓰레기 관련된 회사였다. 이 회사가 가장 궁금했지만, 일본어로 물어볼 용기도 없었고 대답을 해석할 용기도 없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 회사를 만들고 여는 과정에서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을 것이고, 거기서 많이 얻었을 것 같다. 처음이란 것은 피곤함과 해냈다는 뿌듯함, 그리고 실패와 재도전, 이런 여러 가지 것들이 섞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엔 제대로 된 얘기를 들어보고 싶다.

그 다음은 미유키 상이 일하는 회사. 이곳의 중심인 것 같은데, 이때만 해도 일본 초창기여서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그리고 가까운 곳의 ‘오후쿠로상 벤또’! 이름 뜻을 듣고선 할머니들이 만들어 보자기로 싸주는, 그런 소박한 느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일하러 가서, 그리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소박하지만은 않다는 걸 알았다. 요리를 하고, 음식을 담고, 그것을 배달하고, 그릇을 닦고, 다음 식사를 준비하고. 하루 종일 일하지도, 일주일 내내 일하는 것도 아니다. ‘요리는 역시 즐거운 것이고, 노동이란 건 정말 즐거운 것이고, 그 중에 최고는 역시 이렇게 살아간다는 거 아니겠어?’ 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욕심이 났다. 내 비록 요리는 못하지만 강화에 돌아가서, 농번기 때 바쁜 농민들과 독거노인을 위한 도시락 배달을 하는 건 어떨까? 예전에 엄마를 따라 독거노인 도시락 배달을 간 적이 있다. 아주 작은 거지만, 그리고 잠시지만 안부를 묻고 얘기를 나누는데 마음이 따뜻했다. 그 후에 도시락 싸는 걸 도와주러 갔는데, 그 넓은 강화의 독거노인 도시락을 단 두 분이서 만들고 있었다. 그 분들과 함께, 독거노인들과 농민들을 위해 도시락을 배달하는 것은? 가끔 마을회관이나 넓은 들에 배달을 가서 할머니, 할아버지, 아이들과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 쌀도, 야채도, 고기도, 모두 다 강화 것으로! 아아- 그래도 역시 문제는 요리구나.

그리고 ‘농장’. 커다란 토마토 하우스, 아직은 잠자고 있던 넓은 밭, 그리고 마트. 농장은 생긴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정겨웠다. 우리 집 사랑방은 아궁이에 불을 붙인다. 처음에 불을 붙이기 위해 나무와 종이를 공기가 통하도록 쌓는다. 이것도 나름의 노하우가 필요하다. 그리고 꾸깃꾸깃 구긴 종이에 불을 붙여 부채질도 하고 나무를 다시 쌓아주기도 하고, 실패하면 다시 도전한다, 불이 붙을 때까지.

이름에 ‘코’가 들어가는 농장팀은 나무와 종이를 적절히 쌓고 있었다. 지금은 겨울, 봄이 오고 있다. 이곳에 불이 붙고 공기가 드나들기 시작하면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다. 언젠가 다시 오게 되거나 유상용 아저씨를 통해 듣게 될 땐, 지금의 인원보다 몇 배는 불어 있겠지. 코니시 상 공책은 빼곡할 테고, 코스케 상은 앨범을 하나 더 냈을까? 어쩌면 사랑스러운 채소들의 노래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나도 갯벌의 생물들을 보면 흥얼흥얼거리게 되는 걸.

농장과 도시락가게, 이 두 커다란 바람을 타는 중간에도 바람은 계속 우리를 이곳저곳에 데려다 주었다. 정말 감사하게도 여기저기서 초대해 주셨고, 그리고 우리의 식성도 바람을 타고 여기저기 널리 퍼졌다. 하하하. 그리고 이 바람은 내게 물을 듬뿍, 햇살도 듬뿍 주었다. 바람은 우리에게 마을 사람들과 만남의 자리를 주었다.

내게 가장 크게 와 닿았던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장한다는 것이다. 미유키 상이 첫 날 우리에게 이것저것 보여주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곳에 와보지 않고 말로만 들었더라면, 갸우뚱 했을 것이다. 대체 어떻게? 노동으로? 공동체를 중요시 하는 곳에서 개인을?

하지만 얘기를 듣다보니 한국의 공동체들이 왜 망한지 알 것 같았다. 마을 공동체든, 학교든, 무조건 ‘공동체’만 외쳤다. 그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세계보다, 공동체란 산을 가꾸는데 온 힘을 다한 것 같다. 산의 생태계보다 산의 땅을 전부 모으기에 급급했던 사람처럼. 공동체란 이름 아래 독재정치도 있었을 것이다.

세상은 이렇게 넓다. 식물도 동물도, 플랑크톤도 같은 류라고 해도 전부 다르고 각기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그들의 삶도 서식지도 먹이도 전부 다르고, 그들이 모여 생태계를 만든다. 그 중 한 가지가 빠져도 혼란이 찾아온다. 왜 이렇게 간단한 걸. 그래서 연구를 하고 공부를 한다는 건 내 마음에 콕 박혔다. 얘기를 듣고 슬프기도 했다. 이렇게 당연한 걸, 왜. 이곳처럼 이렇게 모여서 함께 하고 공부하려면 우린 얼마나 걸릴까.

괜찮아. 내 주위엔 이렇게 친구들이 있고, 좋은 분들이 많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가진 씨를 아끼고, 거름을 주고, 키워 나가야지! ‘무엇보다 내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자, 진심으로.’라고 하던 테루코 상의 말처럼.

그래서 나와 같은 아이들을 위한 라이프 센터가 생긴다고 해서 반가웠다. 건물도 새로 짓고! 알면 알수록 부러워진다. 아이들도 부모도 전부. 다음 번에는 제대로 공부하러 와야지.

그 동안 내 안의 씨는 빗물을 따라 지하에도 가보고 논과 밭도, 바다에도 가보았다. 지금도 여전히 바람에 흔들린다. 하지만 언젠가 커다란 느티나무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될 거다. 난 그렇게 믿고 내 씨를 심을 것이다. 이게 내가 바람을 타고 일본에서 배워 온 이야기다.



스즈카에서 보낸 2주 - 윤승민



지난 2월에 나는 내 스무 살의 가장 특별한 기억 중 하나가 된 여행을 다녀왔다. 일본의 스즈카 시로 다녀온 교류 여행. 태어나서 처음 가 본 해외여행도 중학교 1학년 때 일본으로 간 것이었고, 그 이후로도 한 번 더 다녀온 적이 있었다. 첫 번째는 영 아니었고 두 번째로 갔을 때는 처음과 달리 정말 기억에 남는 경험도 많이 하고 배운 것도 많았지만 세 번째의 일본은 아예 출발 목적부터 돌아온 후의 느낌까지 그 전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 글에서는 인상 깊었던 것들을 몇 가지 주제로 나누어 써 보고 싶다.

첫 번째, 우리가 만난 사람들이다. 이것은 가장 첫 번째로 생각해야 하고, 가장 깊이 되돌아봐야 할 주제다. 이번 교류에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나라 사람이 적은 상태에서 외국에 머무르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드문드문 함께 했던 유상용 아저씨를 제외하면 근처에 한국인이라고는 늘 우리 네 명뿐이었으니까.

그 때문인지 스즈카 공동체의 여러 사람들과 더 직접적으로 만나고 대화할 수 있었다. 얼마 전에 텔레비전의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이 초청을 받아 일본에 방문하는 내용을 보았다. 중학교 때나 고등학교 때도 일본 사람들과 교류를 해 본 경험이 몇 번 있었고 특히 스즈카에 다녀온 일이 있어서 참 인상 깊게 보았는데, 제일 아련하게 떠오르는 것이 바로 스즈카 공동체 사람들과의 기억이었다. 가족처럼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신경 써주신 모든 분들이 사진과 함께 기억에 남아있다.

함께 공동체에 대한 질문과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삶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또 그 분들의 모습에 깊은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유카짱이나 히로토 군 등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과도 친해질 수 있어서 정말 기뻤다. 이번 교류 여행에서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지낸 것은 다른 어디에 가서도 쉬이 얻지 못할 귀한 보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 우리가 했던 일들이다. 우리는 정말, 도와드렸다는 말도 민망할 정도로 도움이 되었는지도 의심스럽지만 하여튼 오후쿠로상 도시락 가게와 농장에서 며칠 간 일을 했다. 도시락 가게에서 반찬을 담거나 설거지를 하고, 농장에서는 식물에 물을 주고 죽순을 캐는 등 정말 지루할 틈 없이 다양한 일들을 했다. 아마도 도와드린 것보다는 우리가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았다는 표현이 더 적당할 것 같기도 하다.

도시락 가게와 농장에서 일을 하면서 일본 사람들이 일을 할 때 얼마나 위생에 신경을 쓰고 일하는 태도가 좋은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또 한국에서 식품 가공업을 하는 우리 집이나 전에 다녔던 학교에서 농사일을 했던 것을 떠올리면서 이리저리 비슷한 점들을 보기도 했다. 다른 것도 있었지만 배울 점은 역시나 많았다. 몇 번 말한 적이 있지만, 일하는 과정에서 모두가 뒤처지는 일 없이 함께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세 번째, 우리가 갔던 곳들. 일정 속에 틈틈이 여러 곳에 갈 기회가 많았다. 자전거를 타고 다녀왔던 일본의 길거리들, 또 무언가를 사러 갔던 가게들(환상적인 북오프!), 게스트하우스 식구들과 함께 갔던 온천! 모두 즐거웠다. 또 교토라던가 나고야 등등, 평소 가보고 싶었던 곳들을 친절한 분들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다녀올 수 있었다. 나 같은 경우에는 언니들과 달리 체력이 약해서 막바지에는 조금 힘들기도 했지만, 금각사나 일본 전통 정원 등 정말 잊지 못할 곳들을 눈에 담고 올 수 있어서 기뻤다.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초대를 받아 갔던 스즈카 공동체 사람들의 집이다. 저녁을 먹고 돌아오기도 하고 하루 신세를 지기도 했는데, 정말 한 군데도 빠짐없이 감동을 받을 만큼 친절하게 대해 주셨다. 일본에서는 집에 초대하는 게 한국에서보다 드물고 가볍지 않은 일이라고 들었는데, 그런 귀한 기회를 많이 갖게 되어서 좋았다. 지금도 우리를 초대해 주시고 대접해 주셨던 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

이렇게 여러 곳을 다니면서 그만큼 많은 음식을 먹었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먹었던 정말 한 끼도 빠짐없이 맛있었던 덕에 배 터지게 먹었던 음식들부터 초대받아 간 집에서 먹었던 음식, 또 교토와 나고야에서 사먹었던 음식들까지 어쩜 그렇게 맛있는 것만 2주간 주구장창 먹을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꿈만 같다. 한국에 와서 아직도 살 빼느라 고생하고 있다.

벌써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뒤늦게 이렇게 글을 쓰면서 되돌아보니 아직도 농장의 비닐하우스와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길거리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아침에 일어나 마주하던 이요다상과 세츠코상의 모습부터 노에짱과 줄넘기를 하던 것, 유카짱에게 장난을 치던 때의 기억까지 어제 일 같다. 한국에 돌아와 첫 대학생활을 하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스즈카 공동체 분들과 메일도 주고받을 생각을 못하고 그저 시간을 흘려보낸 것 같아 죄송한 마음도 크고 나 자신도 아쉽다. 이제부터라도 좀 노력해 봐야겠다. 어렵게 맺은 좋은 인연은 계속 이어가야 하니까.

스즈카 공동체 마을에서 2주를 보내면서 정말 그 곳에 사는 것처럼 여유로운 마음이 들 때가 있어서 좋았고, 일본어 실력이 좋아진 것도 큰 수확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또 가고 싶다. 스즈카 공동체 사람들이 보고 싶고, 그곳만의 분위기를 다시 한 번 느끼고 싶다. 아, 그 전에 꼭 강화에 오셨으면 좋겠다. 산책하기 좋은 해안도로변의 예쁜 나들길도 걷고 우리 집에 초대도 하고 싶다. 어디에서든, 꼭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사람과 사람의 이어짐 - 노해원







처음 유상룡 아저씨한테 나리, 혜인이와 일본에 갈 생각이 있느냐는 제안을 받고 설레는 마음으로 일본에 다녀온 지 벌써 6개월이 다 되어간다. 지금 생각 해 보면 일본에 가기 전부터 별에 별 우여곡절이 많았다. 출발하자마자 공항에서 지갑을 잃어버리고, 승민이와 도시락공장으로 출발 하는 첫날 늦잠을 자고, 돈이 모자라 미유끼상한테 돈을 빌리고, 집으로 돌아오기 전날 서로에게 그동안의 서운함을 이야기하며 울고…. 하지만 그보다 더한 따뜻함과 즐거움과 추억, 그리고 배움이 있었으니 나에게는 더없이 좋은 경험이었다.

우리가 일본에 갈 수 있었던 것은 유상룡 아저씨의 권유 덕분이었다. 나리네 아저씨와 우리 부모님과 유상룡 아저씨가 함께 있는 자리였다. 우연히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우리들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강화에서 만나 함께 자라고 앞으로도 함께 공동체를 꾸려가려는 생각이 있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다 기회가 되면 유상룡 아저씨가 계시던 일본 공동체에도 가면 좋겠다는 부모님들의 바람이 생겨났다. 그리고 마침 아저씨도 일본의 공동체와 강화 공동체의 교류를 계획하고 있던 차에 우리가 가게 된 것이다.

외국에 다녀 온 경험이 별로 없기 때문에, 일본에 가기로 정해졌을 때 비행기를 타고 멀리 간다는 설렘이 제일 컸다. 하지만 유상룡 아저씨와 미팅을 통해 우리가 가는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부터 새로운 사람들, 그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설렘에 마음이 부풀었다. 일본에 가기 직전까지 설을 쇠러 강원도에 가랴, 가방 한가득 짐 챙기랴 새벽까지 짐 싸랴 분주했지만 항상 ‘어떤 사람들을 만날까? 우리가 가서 하는 일은 어떤 걸까? 어떤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늘 마음속에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지내는 동안 어려움은 없을지,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가 힘이 들거나 우리들 사이에서의 문제는 없을지 걱정도 됐다.

그렇게 설렘 반 걱정 반 떠난 일본에서 밤늦게 도착한 우리들을 미리 연습 해 둔 한국말로 밝게 맞아 주시던 오노상 부부와 앞으로 우리와 게스트하우스에서 함께 지낼 이요다상 부부를 만나니 왠지 마음이 놓였다. 무엇보다 처음 도착해서 가장 기뻤던 것은 방안에 고타츠가 놓여 있고 목욕탕에서 온천식 욕조를 발견했을 때다. ‘만화에서만 보던 그 고타츠를 앞으로 계속 쓸 수 있다니! 매일 온천 같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글 수 있다니!' 감격 그 자체였다. 아울러 세쯔꼬상의 엄청난 요리솜씨, 그리고 우리가 무척이나 좋아했던 고타츠와 욕조만큼 스즈까시 사람들이 새롭고 따뜻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무척이나 행복 했다.

우리가 간 곳은 야마기시즘에 한계를 느끼고 스즈까시에 모인 사람들이 에즈원 컴퍼니라는 공동체를 만들어 그 속에서 도시락공장, 펜션, 농장, 리모델링 등의 일을 나누어 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도시락 만드는 일과 농장 일을 하게 되었다. 자전거를 타고 도시락 공장에 가서 일을 돕고 아침에 코우타 아저씨의 차를 타고 농장에 가서 일을 도왔다. 네 명이 한꺼번에 이동하기는 힘들어 둘씩 짝을 지어 2주 동안 1주일 씩 도시락공장과 농장을 번갈아 가면서 다녔다. 그 외에 저녁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세쯔꼬상이 만들어주신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우리를 초대해 주신 분들의 집에 찾아가 상상도 못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온천도 가고, 쇼핑도 하고, 주말에는 교토와 나고야에서 관광도 하며 하루하루 즐거운 생활을 했다.

일본에 있는 동안 출퇴근 시간을 비롯해 중간에 쉬는 시간과 밥 먹는 시간까지 10분 이상 늦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덕분에 우리도 아침 일찍 하루를 시작하고 시간이 되면 밥을 먹고 돌아와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하면서 부지런하고 꽉 찬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꽉 찬 하루를 보내면서도 전혀 서두름이나 분주함 없는 여유 있는 생활에 기분이 좋았다. 아침, 저녁 자전거를 타고 돌아올 때, 대나무 숲에서 타케노코(죽순)를 찾던 그 상쾌함, 늘 그런 기분 이었다.

도시락공장과 농장에는 우리 또래 고등학생, 아줌마, 아저씨, 동네 할아버지, 뮤지션,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아주머니 등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후에 이야기를 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일 하는 사람들은 에즈원 컴퍼니를 함께 만들어 온 사람들, 혹은 공동체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만 모여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나 아는 사람의 소개를 받고 오게 된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리고 후에 이곳 이야기를 더 깊이 나누면서 ‘따로 하는 모임도 없고, 경계도 없으며 마음이 중요하기 때문에 시 전체가 공동체 일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공동체라는 경계를 두지 않고 함께 어우러져 사는 모습이 대단하달까? 앞으로 지역운동, 혹은 공동체 운동을 하기위해 꼭 배워야 할 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 도시락 공장의 일회용 용기들이었다. 도시락 통을 사용하기에는 정기적으로 사 먹는 사람들이 많지 않고 비싸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하지만 좀 더 환경을 배려해서 잘 썩는 용기나 재활용 용기를 사용 하면 더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음식 재료도 그 지역에서 재배되는 음식이나 유기농 음식을 사용하면 더 없이 좋지 않을까.

일본어를 미리 공부 해 온 혜인이와 열심히 일본 만화를 봐왔던 승민이 말고는 대화의 절반은 정상적으로 오갈 수 없었다. 짧은 단어들의 조합이나 영어, 한국어, 일본어, 몸어를 모조리 섞어 쓰거나 혜인이의 도움을 열심히 받았다. 하지만 생활에 필요한 대화는 적당히 이루어 졌다. 그리고 오히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단점 덕분에 말이라는 것에 휘둘리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야 할 때가 많았다. 때문에 여러 가지 일들을 말이 아닌 실천으로 해결해야 했고 평소 말에 비해 실천이 부족했던 나에게는 큰 자극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개인적인 장점은 둘째 치고 생활 대화만 하다 보니 좀 더 전문적인 단어가 필요한 궁금증이나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속에만 담아 두었던 이야기 들은 유상룡 아저씨가 오신 뒤부터 해결 됐다.

이곳 공동체는 사람과 사회에 대한 연구, 그 중에서도 인간 성장에 대한 것을 중심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사람과 사람의 이어짐, 무엇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성찰을 중요시 한다. 이곳에서도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으면 서로가 각자의 의견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모으는 것이 가장 힘들었지만, 결국엔 한 사람 한 사람의 성장에 힘을 쏟으니 좋아졌다고 한다. 스스로의 깊어짐이 중요하다는 생각과 자신의 행복, 자신과의 소통, 즉 본심으로서의 생활과 소통을 통해 자기 자신을 알아가면서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 하고 있었다. 진실에 대한 탐구, 자신의 실체, 한 사람 한 사람으로의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 이 공동체가 가장 중요 하게 생각 하는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일이든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며 후에 있을 결과에 있어서도 하나의 결과가 아닌 그 때 그 때에 대한 결과가 중요하다. 이를 통해 일과 삶에 대한 탐구를 하면서 직장을 위한 삶이 아닌 삶을 위한 직장을 만들어 가는 것이 이곳의 목표다. 이런 목표와 서로에 대한 이해를 엿볼 수 있는 간단한 예로, 도시락 공장의 월급이 정해져 있기는 하지만 가족상담(예를 들어 가족 수나 개인 사정)을 통해 맞춰준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며 ‘자기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생각하며 사니 재밌다.’고 말하는 이분들을 보면서 ‘투쟁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이런 공동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 )상의 이야기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내가 한국에서 보았던 공동체는 전체 이념이나 사상에 개인들이 맞추어 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스즈까시에서 만들어 가고 있는 공동체는 공동체를 위한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공동체라는 점이 그동안 내가 보아오고 생각했던 한국의 공동체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우리가 일본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가지 것들을 배우고(채소 자르기, 다케노코 캐기, 세쯔꼬상께 배운 음식, 좋은 생각 등) 얻어 가는 것들에 비해 한 일이 너무 적어 죄송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이 한 가득이다. 늦게까지 잠도 잘 안자는 데다, 엄청나게 먹어대는 우리들을 늘 즐겁게 보살펴 주던 이요다상 부부와 오노상 부부, 코우타 아저씨, 오벤또야 사람들, 농장 사람들… 그분들을 생각하면 늘 마음이 따뜻해진다. 내가 그 곳에서 가장 크게 얻은 것은 바로 이런 분들과의 따뜻한 관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따뜻한 관계야 말로 따뜻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제일 첫 번째가 아닐까.



























도시락 가게에서





















타케시 아저씨와 쿄코 아주머니 집에 초대 받아서. 좌로부터 해원, 나리, 승민, 해인





















모토야마상 댁에서 중간 미팅 겸 저녁식사





















지역의 청년들과

게스트 하우스의 주인 이요다상 부부와 함께







- 강화시선 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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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스즈카의 도시공동체를 방문한 강화의 딸들
  •  유상용
  •  승인 2012.03.20 11:20
  •  조회수 3,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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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체 실현을 위해 경기도 화성에 있는 야마기시 농장에서 18년을 살았다. 2009년 강화로 이주해 현재는 양도면 삼흥리에서 펜션을 하면서 지역 사회를 위한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2월,

20살 전후의 강화의 딸들 4명이 약 2주간 일본 미에(三重)현의 스즈카(鈴鹿) 시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지역 공동체인 'AS ONE COMMUNITY'를 다녀왔다. 내가 ‘강화의 딸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 친구들이 강화에서 나고 자라거나 20년 가까운 강화 지역사회 만들기의 혜택을 받고 자라난 첫 세대로서 ‘강화의 딸들’이라고 불릴만한 대표성(?)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윤여군 목사의 딸 승민이, 밝은마을 이광구 이사장의 딸 나리, 산마을 고등학교 노광훈선생의 딸 해원이, 장진영 화백의 딸 해인이, 네 명은 스즈카에서의 체험을 강화에서도 살려가고 싶다는 희망을 가지고 일본으로 출발했다.

스즈카 시의 AS ONE COMMUNITY는 사람과 사회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사람을 위한 경영을 지향하는 회사, 생활과 가계 등 인간생활 전반을 되돌아보고 새롭게 창조하는 지역 사회, 개인의 지적 정서적 건강을 지원하는 심리센타 등이 네트워킹된 ‘도시 공동체’이며 사회활동체이다. AS ONE COMMUNITY는 성인들을 위한 인생탐구학교인 ‘사이엔즈 스쿨’과 인간-사회 연구를 위한 ‘사이엔즈 연구소’와 연결되어 PIESS 란 NPO단체의 한 구성 요소이기도 하다.

내가 이곳을 오랜 친구인 이광구 군과 지역 분들께 청년들의 체험의 장으로 소개한 것은, 이 공동체를 시작한 분들이 내가 20년 가까이 몸담고 있던 곳과 이어진 일본공동체 출신들이고, 생활공동체의 한계를 넘어 본질을 사회 전반에 보편화해갈 수 있는 길을 찾아 10년을 모색해 온 결과 이제 그 성과를 세상에 내놓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한 나로서는, 인간사회 전반을 향한 거대 담론이 사라진(?) 요즘, 사람과 사회의 이상적인 존재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돌이켜보고 한국의 (지역)사회운동의 방향을 찾는데도 조금의 보탬이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서, 특히 다음을 준비해갈 청년들이 미리 맛보기를 바라며 제안을 했던 것이다.

이번 교류는 작은 일이지만 가기까지의 과정과 의미에 대해 나대로 생각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써본다. 앞부분은 나의 사적인 과정인데 ‘강화를 공동체’로 생각하고 살아가려는 나의 생각을 적어보았고, 뒷부분은 애즈원 공동체를 체험했던 청년들의 교류체험기를 싣는다.

 

작년 4월초였다

나는 밝은마을의 황선진 선배 덕분으로 양사면에 있는 빈집을 빌려 우선 필요한 짐만을 옮겨놓고 강화 생활의 첫발을 내딛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내가 자리를 잡는 대로 여름까지는 다 같이 이사를 올 생각을 하고 아직은 꽃샘추위가 남아있는 봄 4월의 강화에 선발대로서 왔던 것이다.

내가 그때까지 몸담고 있던 곳은 야마기시즘 실현지(일명 산안마을)라고 하는 곳으로 7가족 30여명이 함께 사는 공동체이다. 일본에서 시작되었고 일본 각지에는 30 군데 정도의 공동체가 산재하여 서로 연결되어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는 60년대 후반에 농촌운동의 하나로 소개되어 유정란 양계의 보급을 위주로 활동하다가 80년대 중반에 공동체를 결성하여 부침을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시기가 지나갈 무렵 그간의 10년을 돌아보며 나는, “사람과 사회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삶의 방식’이 뿌리에서부터 바뀌어야 하겠다. 나 스스로가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고 그 바탕에서 새로운 사회를 구성해가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생태주의, 공동체, 자연농업 등의 관련 책을 읽고, 실천하는 곳을 찾아다니며 탐구의 시간을 보내던 중에 경기도 발안에 위치한 산안마을을 만나게 되었고 28살의 청년으로 마을에 합류하여 결혼하고 아이 기르고 여러 활동들을 해오다 18년간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작년에 이사를 나오게 되었다. 초기에 시작한 분의 생각과 변화를 필요로 하는 세대들의 뜻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반 이상의 식구들이 1년 사이에 나오게 된 것이었다.

누구의 생각을 옳다하고 맹신하여 따르거나, 자신의 생각도 고정하여 굳어지지 않고 ‘무고정 전진’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물심양면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자고 한 야마기시즘도 다시금 고정의 길로 접어 들어가 더 이상 변화의 힘을 상실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다.

원인은 역시 그 것을 구성하는 사람의 ‘질’을 높이는데 실패한 것이라 생각한다. ‘자신의 생각이 옳고 그것이 야마기시즘이다.’라고 하는, 고정관념이라는 해묵은 인간문제에 당면하여 우리들 역시 좌초한 것이다.

산안마을을 나오기 전까지의 5~6년간 나는 새로운 세대들이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기 위해 청년활동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것은 몇 가지 목적을 가지고 한 것인데 하나는 물론 청년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적 성장과 차세대의 육성이고, 다른 하나는 그 당시 산안마을에서 해오던 방식이 아니더라도 더욱 유연하면서도 목적에 맞는 방식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또 하나 개인적인 관심으로서 한일-아시아 교류라는 것이 있는데 그 것은 앞으로의 시대를 염두에 두고 아이들의 관점이 국경의 울을 넘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기를 바라면서 시작한 것이었다. 일본과의 교류가 많은 산안마을의 장점을 활용하려 한 것이기도 하였다.

5년 정도 지속된 활동이 본 괘도에 오르자 나는 야마기시 씨가 생각한 이상사회를 구성하는 방법에 대해 몇 가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유의지를 가장 소중히 한다.’ ‘기구와 제도를 잘 정비해 놓고 그 다음은 사람의 성장에만 힘을 쏟으면 사람의 성장에 따라 사회의 성장은 자동적으로 따르게 된다.’ ‘ 어떠한 속박도 규제도 없이 무수히 이합집산하고 무한히 성장하도록 장치한다.’ 등이다. 야마기시가 본 세계는 개인과 사회, 정신과 물질 등이 대립이 아닌 조화 - 합일된 세계이고, 마음의 문제와 사회의 문제가 분리되지 않고 함께 해결될 수 있는 길을 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마기시즘’이란

‘야마기시즘’이란 일본인 야마기시 미요조(1900~1963) 씨의 사상으로서 한국에서는 산안마을이라는 공동체의 정신이나 유정란 양계의 생산방식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인간의 지적, 정신적 각성을 바탕으로 인간사회를 근저에서부터 변혁하여 이상사회를 이루어 가려는 혁명사상이다. 60년대 후반부터 40년 정도 한국사회에 알려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과 가치에 대해서 공개적이고 명확하게 일반에 알려져 있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 나에게도 일부 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동안은 자신도 그 사상에 대한 이해가 얕고 체험으로 터득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정도가 못 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면이 있고, 앞으로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나의 표현방식으로 하자면 야마기시즘이란 ‘후천개벽을 과학적, 합리적으로 인류사회에 실현하기 위한 진리적 사회구성방식’ 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국근대 종교사상의 가장 큰 주제인 후천개벽이란, 지구와 인류가 일정단계의 성숙기에 이르렀기에 지금까지 발달시켜온 물질문명을 바탕으로 정신의 계발이 더욱 진전되어 물질과 정신이 고루 발달한 참된 문명사회가 이룩된다는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한국 사상들은 그 ‘실현방법’이 구체적이지 않아 종교로 되었으나 야마기시 씨는 “이상은 방법에 의해 실현될 수 있다.”는 데 주목하여 ‘사회실천 사상이며 활동’임을 분명히 하게 된다.

 

2000년 일본에서는

최근 한국의 산안마을에서 40대 남자들과 그 가족들이 나오게 된 과정과 비슷하게, 2000년도 일본에서도 ‘실현지’ ‘야마기시즘’ 등에 대한 고정된 생각에 의문을 가진 40대들이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 몇 차례의 시도와 실험을 하였다가 그 제안들이 당시의 리더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자 결국 대거 실현지를 나오는 일이 발생하였다. 가족을 포함하여 약 200명 가량 되는 많은 인원이 실현지 주변이나 대도시 토쿄에 살면서 사람과 사회에 관한 실험들을 지속해 왔었고, 그 중에서도 ‘스즈카’라고 하는 인구 20만 정도의 도시에 집중적으로 모여서 활동을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스즈카 시는 일본에서는 F1 자동차 경기장이 있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고, 혼다자동차의 부품공장이나 근처에 파나소닉 TV 액정공장이 있다. 농업도 발달하였고 북쪽으로는 스즈카 산맥이 자리를 잡고 동남으로는 일본 동해안이 인접해있다. 그래서 일자리 등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도시이고 자연조건도 좋아서 최근에는 시정의 방향이 지속가능한 생태친화형 복합도시를 지향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스즈카에 모인 일단의 사람들은 ‘야마기시 공동체’가 굳어지고 변화의 힘을 상실하게 된 근본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함께 모여 연구-연찬하는 기회를 만드는 데 힘을 쏟았다. 초기 5년간은 여러가지로 연구하고 시도해보았지만 제대로 줄기를 잡지 못하고 있다가 2005년 즈음이 되어서 ‘고정’의 원인을 발견하게 된다.

그 내용에 대해서 여기에서 다루기는 힘들지만 그런 정신적인 진척을 바탕으로, 본질적인 주제를 탐구하는 연구소, 성인들의 의식계발 역할을 하는 교육센타,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면서 동시에 사회실험의 장이 되는 몇 개의 회사, 그리고 스즈카 지역에 점재해 있으면서 서로 네트워킹하여 이루어가는 가정과 개인들이 모인 커뮤니티 등으로 점차적으로 활동을 넓히게 되었고 2008년 겨울 즈음부터는 이것을 사회에다 내놓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내가 스즈카 지역의 지인들과 다시 연락을 취하기 시작한 것이 2008년의 12월이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스즈카의 사람들이 “한국 실현지의 40대들은 요즈음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한 번 연락을 해볼까?” 하던 그 무렵에 전화를 했다. “모시 모시! 오노 상?”

 

다시 강화의 이야기로 돌아와

아내와 아이들이 모두 강화도로 이사를 온 것은 작년 6월 24일이었다. 이삿날 기억에 남는 것은, 며칠 전부터 이사올 집 2층 처마에 제비가 집을 짓고 있었는데 그 날에 제비집도 완성이 되어서 함께 입주를 하게 된 것이었다. 전 주인도 전셋집 때문에 아직 이사를 못가서 전 주인, 새 주인, 제비부부 세 식구가 함께 생활을 시작하였다. “공동체 생활의 꼬리가 길구나.” 하고 웃었다.

4월부터 석 달간, 새로운 생활을 준비하는 데는 강화지역에 오래 전부터 정착하여 살고 있는 여러 선배, 친구들의 도움이 컸다. 우선의 거처를 마련해준 황선진 님은 마침 마리학교의 새로운 정착지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살 곳을 찾아야하는 내 상황과도 맞아서 여러 곳을 함께 다니며 돌아보고 그 과정에서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서도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또 10여 년 전부터 강화에 자리잡은 친구 이광구 군과도 많은 부분에서 공감이 있어서 내가 강화생활을 시작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그 때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은 “산안마을이라는 작은 공동체에서 나왔으니 강화지역 전체를 나의 공동체로 삼아 오랜 시간을 두고 지역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가자.”는 것과 “지역에서 자라고 배출된 청년들이 지역에서 자신의 삶을 실현해갈 수 있도록 경제적 사회적 조건을 만들어가자.”는 것이었다.

‘무소유 일체생활’을 지향하여 소유도 분배도 따로 없이 모든 물자와 생활을 공용으로 해가는 산안마을의 생활을 20년 가까이 해오면서 나는 생활비와 돈 계산도 해보지 않았고, 은행통장이나 카드도 사용해본 적이 없고, 더구나 몇 억이 넘는 집에 대한 감각은 전혀 없는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거꾸로 지금의 한국사회에서 느끼는 문제들을 더욱 민감하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몇 개월간의 새로운 생활에서 가장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집 문제였다. 사는 데도 거액이 들지만 전세를 얻는 데도 만만치 않은 금액이 든다는 게 새롭고 놀라웠다.

더욱이 새 출발을 하는 청년들이 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 이상으로 많은 시간과 수고를 들여야 하는 것이 내 눈에는 헛된 일로 보였다. 그래서 장기적인 일이긴 하지만 저렴하고 안정적인 주택을 공급하는 것이, 청년들이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출발하려 할 때 최소한의 바탕이 되고 사회 전체의 안정을 위해서도 중요한 과제로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거기에 이어지는 큰 주제로 “대안교육은 있어도 대안사회는 없다.”는 것이다. 지역의 대안학교를 출발하여 그 지역에 살려고 하거나 뜻을 가지고 지역에 정착하려는 젊은이들이 ‘기존의 사회에 적응하여 사는 것만이 현실적이라는, 자포자기에 빠지지 않도록’ 다음 세대들이 능력을 기르고 마음을 바쳐 살만한 지역사회의 대안을 마련하여야 하는 것이다.

하루는 이광구 군과 이야기를 나누다 “나리를 스즈카에 보내보면 어떨까? 강화지역 단체에서 일을 하고 있기도 하고 지역사회 만들기에도 뜻이 있으니…,” 하고 서로 말을 꺼내기 시작했고, 얘기가 진척되는 중에 “강화에서 함께 자라온 아이들을 같이 보내서 함께 체험하도록 하면 더욱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고 전개되어 방학기간을 이용한 2주간의 교류체험을 4명이 함께 가는 것으로 정하게 되었다. 일본의 지역공동체를 체험하고 지속적인 교류의 물꼬를 틈으로서, 강화에서 자란 우리의 아이들이 자신의 삶의 터전으로 다시 강화를 선택하고 자신과 모두를 위해 마음도 물질도 풍성한 사회 만들기를 해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또 그 과정에서 부모들도 다시금 자신의 삶의 터전을 아름답게 가꾸고 참된 사회의 모습을 정립하는데 작은 계기가 되기를 희망하면서….

 

'AS ONE COMMUNITY'는

몇 개의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처음 시작한 사업들은 이사, 리모델링, 설비 등을 하는 ‘ 애즈원 홈’, 지역의 안전 식자재를 사용하여 만들고 배달하는 도시락 가게인 ‘오후쿠로상 벤토(어머니도시락)’, 도시락 자재 공급을 위한 농장인 ‘애즈원 팜’ 등이었고, 점차 인재파견사업, 부동산업과 소규모 건축업 등으로 사업이 전개되고 있다. 그 사업들은 어느 것도 기존의 이미지와는 다른 내용을 지향하여 전개되고 있는데, 목적은 일하는 사람이 자신의 능력과 적성을 최대한 발휘하면서 풍성하고 쾌적한 지역사회 만들기에 집중되어 있다.

사람을 회사에 맞추지 않고 사람의 성장을 최우선으로 위하고 사람의 심리, 생활적 필요에 사회가 맞추어가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그 실태는 이상과 차이가 있겠지만 개인과 전체,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간사회의 과제에 어느 정도 해결점을 제시하고 있는지 주목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딸들은 2주일간의 교류기간 동안, 때론 도시락 가게에서 반찬을 담으며 때론 농장에서 채소 가꾸기를 하며 일에도 참가하고, 주말에는 지역의 청년들과 관광을 가거나 가정에 초대받아 저녁식사를 함께 하며 지역 사람들을 느끼고 공동체의 의미도 배우는 시간을 보냈다. 이번에 뿌려진 씨앗들이 아이들 각자의 생활에서도 예쁜 싹을 틔우기를 바라고, 강화지역의 풍성한 삶으로 꽃피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2주간 본 일본 - 이나리

 

처음 간 곳은 이곳의 시작점이었다. 안 되는 일본어로 이것저것 얘기 들어보니 음식물 쓰레기 관련된 회사였다. 이 회사가 가장 궁금했지만, 일본어로 물어볼 용기도 없었고 대답을 해석할 용기도 없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 회사를 만들고 여는 과정에서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을 것이고, 거기서 많이 얻었을 것 같다. 처음이란 것은 피곤함과 해냈다는 뿌듯함, 그리고 실패와 재도전, 이런 여러 가지 것들이 섞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엔 제대로 된 얘기를 들어보고 싶다.

그 다음은 미유키 상이 일하는 회사. 이곳의 중심인 것 같은데, 이때만 해도 일본 초창기여서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그리고 가까운 곳의 ‘오후쿠로상 벤또’! 이름 뜻을 듣고선 할머니들이 만들어 보자기로 싸주는, 그런 소박한 느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일하러 가서, 그리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소박하지만은 않다는 걸 알았다. 요리를 하고, 음식을 담고, 그것을 배달하고, 그릇을 닦고, 다음 식사를 준비하고. 하루 종일 일하지도, 일주일 내내 일하는 것도 아니다. ‘요리는 역시 즐거운 것이고, 노동이란 건 정말 즐거운 것이고, 그 중에 최고는 역시 이렇게 살아간다는 거 아니겠어?’ 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욕심이 났다. 내 비록 요리는 못하지만 강화에 돌아가서, 농번기 때 바쁜 농민들과 독거노인을 위한 도시락 배달을 하는 건 어떨까? 예전에 엄마를 따라 독거노인 도시락 배달을 간 적이 있다. 아주 작은 거지만, 그리고 잠시지만 안부를 묻고 얘기를 나누는데 마음이 따뜻했다. 그 후에 도시락 싸는 걸 도와주러 갔는데, 그 넓은 강화의 독거노인 도시락을 단 두 분이서 만들고 있었다. 그 분들과 함께, 독거노인들과 농민들을 위해 도시락을 배달하는 것은? 가끔 마을회관이나 넓은 들에 배달을 가서 할머니, 할아버지, 아이들과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 쌀도, 야채도, 고기도, 모두 다 강화 것으로! 아아- 그래도 역시 문제는 요리구나.

그리고 ‘농장’. 커다란 토마토 하우스, 아직은 잠자고 있던 넓은 밭, 그리고 마트. 농장은 생긴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정겨웠다. 우리 집 사랑방은 아궁이에 불을 붙인다. 처음에 불을 붙이기 위해 나무와 종이를 공기가 통하도록 쌓는다. 이것도 나름의 노하우가 필요하다. 그리고 꾸깃꾸깃 구긴 종이에 불을 붙여 부채질도 하고 나무를 다시 쌓아주기도 하고, 실패하면 다시 도전한다, 불이 붙을 때까지.

이름에 ‘코’가 들어가는 농장팀은 나무와 종이를 적절히 쌓고 있었다. 지금은 겨울, 봄이 오고 있다. 이곳에 불이 붙고 공기가 드나들기 시작하면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다. 언젠가 다시 오게 되거나 유상용 아저씨를 통해 듣게 될 땐, 지금의 인원보다 몇 배는 불어 있겠지. 코니시 상 공책은 빼곡할 테고, 코스케 상은 앨범을 하나 더 냈을까? 어쩌면 사랑스러운 채소들의 노래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나도 갯벌의 생물들을 보면 흥얼흥얼거리게 되는 걸.

농장과 도시락가게, 이 두 커다란 바람을 타는 중간에도 바람은 계속 우리를 이곳저곳에 데려다 주었다. 정말 감사하게도 여기저기서 초대해 주셨고, 그리고 우리의 식성도 바람을 타고 여기저기 널리 퍼졌다. 하하하. 그리고 이 바람은 내게 물을 듬뿍, 햇살도 듬뿍 주었다. 바람은 우리에게 마을 사람들과 만남의 자리를 주었다.

내게 가장 크게 와 닿았던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장한다는 것이다. 미유키 상이 첫 날 우리에게 이것저것 보여주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곳에 와보지 않고 말로만 들었더라면, 갸우뚱 했을 것이다. 대체 어떻게? 노동으로? 공동체를 중요시 하는 곳에서 개인을?

하지만 얘기를 듣다보니 한국의 공동체들이 왜 망한지 알 것 같았다. 마을 공동체든, 학교든, 무조건 ‘공동체’만 외쳤다. 그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세계보다, 공동체란 산을 가꾸는데 온 힘을 다한 것 같다. 산의 생태계보다 산의 땅을 전부 모으기에 급급했던 사람처럼. 공동체란 이름 아래 독재정치도 있었을 것이다.

세상은 이렇게 넓다. 식물도 동물도, 플랑크톤도 같은 류라고 해도 전부 다르고 각기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그들의 삶도 서식지도 먹이도 전부 다르고, 그들이 모여 생태계를 만든다. 그 중 한 가지가 빠져도 혼란이 찾아온다. 왜 이렇게 간단한 걸. 그래서 연구를 하고 공부를 한다는 건 내 마음에 콕 박혔다. 얘기를 듣고 슬프기도 했다. 이렇게 당연한 걸, 왜. 이곳처럼 이렇게 모여서 함께 하고 공부하려면 우린 얼마나 걸릴까.

괜찮아. 내 주위엔 이렇게 친구들이 있고, 좋은 분들이 많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가진 씨를 아끼고, 거름을 주고, 키워 나가야지! ‘무엇보다 내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자, 진심으로.’라고 하던 테루코 상의 말처럼.

그래서 나와 같은 아이들을 위한 라이프 센터가 생긴다고 해서 반가웠다. 건물도 새로 짓고! 알면 알수록 부러워진다. 아이들도 부모도 전부. 다음 번에는 제대로 공부하러 와야지.

그 동안 내 안의 씨는 빗물을 따라 지하에도 가보고 논과 밭도, 바다에도 가보았다. 지금도 여전히 바람에 흔들린다. 하지만 언젠가 커다란 느티나무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될 거다. 난 그렇게 믿고 내 씨를 심을 것이다. 이게 내가 바람을 타고 일본에서 배워 온 이야기다.

 

스즈카에서 보낸 2주 - 윤승민

 

지난 2월에 나는 내 스무 살의 가장 특별한 기억 중 하나가 된 여행을 다녀왔다. 일본의 스즈카 시로 다녀온 교류 여행. 태어나서 처음 가 본 해외여행도 중학교 1학년 때 일본으로 간 것이었고, 그 이후로도 한 번 더 다녀온 적이 있었다. 첫 번째는 영 아니었고 두 번째로 갔을 때는 처음과 달리 정말 기억에 남는 경험도 많이 하고 배운 것도 많았지만 세 번째의 일본은 아예 출발 목적부터 돌아온 후의 느낌까지 그 전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 글에서는 인상 깊었던 것들을 몇 가지 주제로 나누어 써 보고 싶다.

첫 번째, 우리가 만난 사람들이다. 이것은 가장 첫 번째로 생각해야 하고, 가장 깊이 되돌아봐야 할 주제다. 이번 교류에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나라 사람이 적은 상태에서 외국에 머무르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드문드문 함께 했던 유상용 아저씨를 제외하면 근처에 한국인이라고는 늘 우리 네 명뿐이었으니까.

그 때문인지 스즈카 공동체의 여러 사람들과 더 직접적으로 만나고 대화할 수 있었다. 얼마 전에 텔레비전의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이 초청을 받아 일본에 방문하는 내용을 보았다. 중학교 때나 고등학교 때도 일본 사람들과 교류를 해 본 경험이 몇 번 있었고 특히 스즈카에 다녀온 일이 있어서 참 인상 깊게 보았는데, 제일 아련하게 떠오르는 것이 바로 스즈카 공동체 사람들과의 기억이었다. 가족처럼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신경 써주신 모든 분들이 사진과 함께 기억에 남아있다.

함께 공동체에 대한 질문과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삶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또 그 분들의 모습에 깊은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유카짱이나 히로토 군 등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과도 친해질 수 있어서 정말 기뻤다. 이번 교류 여행에서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지낸 것은 다른 어디에 가서도 쉬이 얻지 못할 귀한 보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 우리가 했던 일들이다. 우리는 정말, 도와드렸다는 말도 민망할 정도로 도움이 되었는지도 의심스럽지만 하여튼 오후쿠로상 도시락 가게와 농장에서 며칠 간 일을 했다. 도시락 가게에서 반찬을 담거나 설거지를 하고, 농장에서는 식물에 물을 주고 죽순을 캐는 등 정말 지루할 틈 없이 다양한 일들을 했다. 아마도 도와드린 것보다는 우리가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았다는 표현이 더 적당할 것 같기도 하다.

도시락 가게와 농장에서 일을 하면서 일본 사람들이 일을 할 때 얼마나 위생에 신경을 쓰고 일하는 태도가 좋은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또 한국에서 식품 가공업을 하는 우리 집이나 전에 다녔던 학교에서 농사일을 했던 것을 떠올리면서 이리저리 비슷한 점들을 보기도 했다. 다른 것도 있었지만 배울 점은 역시나 많았다. 몇 번 말한 적이 있지만, 일하는 과정에서 모두가 뒤처지는 일 없이 함께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세 번째, 우리가 갔던 곳들. 일정 속에 틈틈이 여러 곳에 갈 기회가 많았다. 자전거를 타고 다녀왔던 일본의 길거리들, 또 무언가를 사러 갔던 가게들(환상적인 북오프!), 게스트하우스 식구들과 함께 갔던 온천! 모두 즐거웠다. 또 교토라던가 나고야 등등, 평소 가보고 싶었던 곳들을 친절한 분들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다녀올 수 있었다. 나 같은 경우에는 언니들과 달리 체력이 약해서 막바지에는 조금 힘들기도 했지만, 금각사나 일본 전통 정원 등 정말 잊지 못할 곳들을 눈에 담고 올 수 있어서 기뻤다.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초대를 받아 갔던 스즈카 공동체 사람들의 집이다. 저녁을 먹고 돌아오기도 하고 하루 신세를 지기도 했는데, 정말 한 군데도 빠짐없이 감동을 받을 만큼 친절하게 대해 주셨다. 일본에서는 집에 초대하는 게 한국에서보다 드물고 가볍지 않은 일이라고 들었는데, 그런 귀한 기회를 많이 갖게 되어서 좋았다. 지금도 우리를 초대해 주시고 대접해 주셨던 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

이렇게 여러 곳을 다니면서 그만큼 많은 음식을 먹었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먹었던 정말 한 끼도 빠짐없이 맛있었던 덕에 배 터지게 먹었던 음식들부터 초대받아 간 집에서 먹었던 음식, 또 교토와 나고야에서 사먹었던 음식들까지 어쩜 그렇게 맛있는 것만 2주간 주구장창 먹을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꿈만 같다. 한국에 와서 아직도 살 빼느라 고생하고 있다.

벌써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뒤늦게 이렇게 글을 쓰면서 되돌아보니 아직도 농장의 비닐하우스와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길거리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아침에 일어나 마주하던 이요다상과 세츠코상의 모습부터 노에짱과 줄넘기를 하던 것, 유카짱에게 장난을 치던 때의 기억까지 어제 일 같다. 한국에 돌아와 첫 대학생활을 하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스즈카 공동체 분들과 메일도 주고받을 생각을 못하고 그저 시간을 흘려보낸 것 같아 죄송한 마음도 크고 나 자신도 아쉽다. 이제부터라도 좀 노력해 봐야겠다. 어렵게 맺은 좋은 인연은 계속 이어가야 하니까.

스즈카 공동체 마을에서 2주를 보내면서 정말 그 곳에 사는 것처럼 여유로운 마음이 들 때가 있어서 좋았고, 일본어 실력이 좋아진 것도 큰 수확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또 가고 싶다. 스즈카 공동체 사람들이 보고 싶고, 그곳만의 분위기를 다시 한 번 느끼고 싶다. 아, 그 전에 꼭 강화에 오셨으면 좋겠다. 산책하기 좋은 해안도로변의 예쁜 나들길도 걷고 우리 집에 초대도 하고 싶다. 어디에서든, 꼭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사람과 사람의 이어짐 - 노해원

 

 

 

처음 유상룡 아저씨한테 나리, 혜인이와 일본에 갈 생각이 있느냐는 제안을 받고 설레는 마음으로 일본에 다녀온 지 벌써 6개월이 다 되어간다. 지금 생각 해 보면 일본에 가기 전부터 별에 별 우여곡절이 많았다. 출발하자마자 공항에서 지갑을 잃어버리고, 승민이와 도시락공장으로 출발 하는 첫날 늦잠을 자고, 돈이 모자라 미유끼상한테 돈을 빌리고, 집으로 돌아오기 전날 서로에게 그동안의 서운함을 이야기하며 울고…. 하지만 그보다 더한 따뜻함과 즐거움과 추억, 그리고 배움이 있었으니 나에게는 더없이 좋은 경험이었다.

우리가 일본에 갈 수 있었던 것은 유상룡 아저씨의 권유 덕분이었다. 나리네 아저씨와 우리 부모님과 유상룡 아저씨가 함께 있는 자리였다. 우연히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우리들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강화에서 만나 함께 자라고 앞으로도 함께 공동체를 꾸려가려는 생각이 있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다 기회가 되면 유상룡 아저씨가 계시던 일본 공동체에도 가면 좋겠다는 부모님들의 바람이 생겨났다. 그리고 마침 아저씨도 일본의 공동체와 강화 공동체의 교류를 계획하고 있던 차에 우리가 가게 된 것이다.

외국에 다녀 온 경험이 별로 없기 때문에, 일본에 가기로 정해졌을 때 비행기를 타고 멀리 간다는 설렘이 제일 컸다. 하지만 유상룡 아저씨와 미팅을 통해 우리가 가는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부터 새로운 사람들, 그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설렘에 마음이 부풀었다. 일본에 가기 직전까지 설을 쇠러 강원도에 가랴, 가방 한가득 짐 챙기랴 새벽까지 짐 싸랴 분주했지만 항상 ‘어떤 사람들을 만날까? 우리가 가서 하는 일은 어떤 걸까? 어떤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늘 마음속에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지내는 동안 어려움은 없을지,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가 힘이 들거나 우리들 사이에서의 문제는 없을지 걱정도 됐다.

그렇게 설렘 반 걱정 반 떠난 일본에서 밤늦게 도착한 우리들을 미리 연습 해 둔 한국말로 밝게 맞아 주시던 오노상 부부와 앞으로 우리와 게스트하우스에서 함께 지낼 이요다상 부부를 만나니 왠지 마음이 놓였다. 무엇보다 처음 도착해서 가장 기뻤던 것은 방안에 고타츠가 놓여 있고 목욕탕에서 온천식 욕조를 발견했을 때다. ‘만화에서만 보던 그 고타츠를 앞으로 계속 쓸 수 있다니! 매일 온천 같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글 수 있다니!' 감격 그 자체였다. 아울러 세쯔꼬상의 엄청난 요리솜씨, 그리고 우리가 무척이나 좋아했던 고타츠와 욕조만큼 스즈까시 사람들이 새롭고 따뜻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무척이나 행복 했다.

우리가 간 곳은 야마기시즘에 한계를 느끼고 스즈까시에 모인 사람들이 에즈원 컴퍼니라는 공동체를 만들어 그 속에서 도시락공장, 펜션, 농장, 리모델링 등의 일을 나누어 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도시락 만드는 일과 농장 일을 하게 되었다. 자전거를 타고 도시락 공장에 가서 일을 돕고 아침에 코우타 아저씨의 차를 타고 농장에 가서 일을 도왔다. 네 명이 한꺼번에 이동하기는 힘들어 둘씩 짝을 지어 2주 동안 1주일 씩 도시락공장과 농장을 번갈아 가면서 다녔다. 그 외에 저녁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세쯔꼬상이 만들어주신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우리를 초대해 주신 분들의 집에 찾아가 상상도 못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온천도 가고, 쇼핑도 하고, 주말에는 교토와 나고야에서 관광도 하며 하루하루 즐거운 생활을 했다.

일본에 있는 동안 출퇴근 시간을 비롯해 중간에 쉬는 시간과 밥 먹는 시간까지 10분 이상 늦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덕분에 우리도 아침 일찍 하루를 시작하고 시간이 되면 밥을 먹고 돌아와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하면서 부지런하고 꽉 찬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꽉 찬 하루를 보내면서도 전혀 서두름이나 분주함 없는 여유 있는 생활에 기분이 좋았다. 아침, 저녁 자전거를 타고 돌아올 때, 대나무 숲에서 타케노코(죽순)를 찾던 그 상쾌함, 늘 그런 기분 이었다.

도시락공장과 농장에는 우리 또래 고등학생, 아줌마, 아저씨, 동네 할아버지, 뮤지션,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아주머니 등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후에 이야기를 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일 하는 사람들은 에즈원 컴퍼니를 함께 만들어 온 사람들, 혹은 공동체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만 모여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나 아는 사람의 소개를 받고 오게 된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리고 후에 이곳 이야기를 더 깊이 나누면서 ‘따로 하는 모임도 없고, 경계도 없으며 마음이 중요하기 때문에 시 전체가 공동체 일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공동체라는 경계를 두지 않고 함께 어우러져 사는 모습이 대단하달까? 앞으로 지역운동, 혹은 공동체 운동을 하기위해 꼭 배워야 할 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 도시락 공장의 일회용 용기들이었다. 도시락 통을 사용하기에는 정기적으로 사 먹는 사람들이 많지 않고 비싸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하지만 좀 더 환경을 배려해서 잘 썩는 용기나 재활용 용기를 사용 하면 더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음식 재료도 그 지역에서 재배되는 음식이나 유기농 음식을 사용하면 더 없이 좋지 않을까.

일본어를 미리 공부 해 온 혜인이와 열심히 일본 만화를 봐왔던 승민이 말고는 대화의 절반은 정상적으로 오갈 수 없었다. 짧은 단어들의 조합이나 영어, 한국어, 일본어, 몸어를 모조리 섞어 쓰거나 혜인이의 도움을 열심히 받았다. 하지만 생활에 필요한 대화는 적당히 이루어 졌다. 그리고 오히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단점 덕분에 말이라는 것에 휘둘리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야 할 때가 많았다. 때문에 여러 가지 일들을 말이 아닌 실천으로 해결해야 했고 평소 말에 비해 실천이 부족했던 나에게는 큰 자극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개인적인 장점은 둘째 치고 생활 대화만 하다 보니 좀 더 전문적인 단어가 필요한 궁금증이나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속에만 담아 두었던 이야기 들은 유상룡 아저씨가 오신 뒤부터 해결 됐다.

이곳 공동체는 사람과 사회에 대한 연구, 그 중에서도 인간 성장에 대한 것을 중심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사람과 사람의 이어짐, 무엇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성찰을 중요시 한다. 이곳에서도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으면 서로가 각자의 의견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모으는 것이 가장 힘들었지만, 결국엔 한 사람 한 사람의 성장에 힘을 쏟으니 좋아졌다고 한다. 스스로의 깊어짐이 중요하다는 생각과 자신의 행복, 자신과의 소통, 즉 본심으로서의 생활과 소통을 통해 자기 자신을 알아가면서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 하고 있었다. 진실에 대한 탐구, 자신의 실체, 한 사람 한 사람으로의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 이 공동체가 가장 중요 하게 생각 하는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일이든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며 후에 있을 결과에 있어서도 하나의 결과가 아닌 그 때 그 때에 대한 결과가 중요하다. 이를 통해 일과 삶에 대한 탐구를 하면서 직장을 위한 삶이 아닌 삶을 위한 직장을 만들어 가는 것이 이곳의 목표다. 이런 목표와 서로에 대한 이해를 엿볼 수 있는 간단한 예로, 도시락 공장의 월급이 정해져 있기는 하지만 가족상담(예를 들어 가족 수나 개인 사정)을 통해 맞춰준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며 ‘자기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생각하며 사니 재밌다.’고 말하는 이분들을 보면서 ‘투쟁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이런 공동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 )상의 이야기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내가 한국에서 보았던 공동체는 전체 이념이나 사상에 개인들이 맞추어 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스즈까시에서 만들어 가고 있는 공동체는 공동체를 위한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공동체라는 점이 그동안 내가 보아오고 생각했던 한국의 공동체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우리가 일본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가지 것들을 배우고(채소 자르기, 다케노코 캐기, 세쯔꼬상께 배운 음식, 좋은 생각 등) 얻어 가는 것들에 비해 한 일이 너무 적어 죄송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이 한 가득이다. 늦게까지 잠도 잘 안자는 데다, 엄청나게 먹어대는 우리들을 늘 즐겁게 보살펴 주던 이요다상 부부와 오노상 부부, 코우타 아저씨, 오벤또야 사람들, 농장 사람들… 그분들을 생각하면 늘 마음이 따뜻해진다. 내가 그 곳에서 가장 크게 얻은 것은 바로 이런 분들과의 따뜻한 관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따뜻한 관계야 말로 따뜻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제일 첫 번째가 아닐까.

 

 

 

 

 

 

 

 

 

 

 

 

도시락 가게에서

 

 

 

 

 

 

 

 

 

타케시 아저씨와 쿄코 아주머니 집에 초대 받아서. 좌로부터 해원, 나리, 승민, 해인

 

 

 

 

 

 

 

 

모토야마상 댁에서 중간 미팅 겸 저녁식사

 

 

 

 

 

 

 

 

 

 

지역의 청년들과

게스트 하우스의 주인 이요다상 부부와 함께

 

 

 

- 강화시선 2호 -

 

유상용

유상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