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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8

히메로스 통신 "의식과 본질" 해독 - 이즈쓰 도시히코 연구 [1-18]

히메로스 통신 "의식과 본질" 해독 - 이즈쓰 도시히코 연구 [1-18]


1-3, 8 miss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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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에세 ④ 이통 슌히코 『의식과 본질』 해독. 「후지일 원론적 베단타 철학」
2012년 07월 03일 | 이츠키 슌히코 연구
이츠키 슌히코 『의식과 본질』 해독.

고바야시 미나리

연재/제4회


 전회에서는, 「본질」부정의 생각이 넓게 동양 사상의 기저에 있는 것을 알았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일절의 언설은 가명으로 하여 실망스럽게 망념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이츠키 씨는 유작이 된 '의식의 형이상학'에서 더욱 깊이 추구하고 있다.


나가루지나(류수)의 중관 사상
존재자는 실재성이 없고, 단지 「연기」라는 상관관계에 있어서 존재성을 유지한다.


선의 사고방식
     「본질」을 제외한 존재분절을 실증적으로 인지하려고 한다.
     「본질」을 환기하는 코토바를 「본질」을 빼고 사용한다.


위와 같은 것들을 '의식과 본질'(이와나미 문고)을 텍스트로 하여 검토했다.


이번에는 샹카라의 후지일 원론적 베단타 철학부터 시작해 보자.


P26-P29
후지일 원론적 베단타 철학
 불교와 마찬가지로 '본질' 부정으로 시작하여 마지막에는 그것과 정반대의 결과에 도착한다는 후지일 원론이란 어떤 생각인가. 불교에서는 형이상학의 극점에 「하늘」이나 「무」가 놓여지는데 대해, 여기에서는 그 극점에 브라프만(梵)이라고 하는 최고도에 리얼한 실재를 둔다고 이츠키씨는 설명한다. 현실의 세계가 분절된 '존재'로 넘쳐나고 있지만, 진정한 모습으로는 결코 없고, 절대 무분별한 것이 우리의 표층의식을 통해 굴절하고, 왜곡으로 나타난 거짓 모습, 허망의 영상 라고 하는 점에서는, 불교와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한다. 실제로는 없는데 있다고 보이는 것은 '이름'이 의미적으로 지시하는 '본질'을 망념하고 그대로 세우기 때문이라는 생각까지는 불교의 생각과는 다르지 않다. 그러나 샹카라는 절대 무분별의 실재자(블러프만)가 한정된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즉 '우리의 경험세계는 우리 자신의 의식의 '불탁'(무언가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것을 소속되어 있는 것처럼 밀어넣는 것)적 작용에 의해 여러 가지로 분절되어 나타나는 브라프만의 "가상적 형태 모습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라고 이통씨는 해석한다.


어디에도 분절선이 없는 절대 일자가 분절된 형태로 우리의 표층 의식에 비치는 것이다. 절대 일자가 객관적으로 자기분절하는 것은 아니다.
                         『의식과 본질』Ⅰ


 우리가 심층의식으로 내려가서 분절된 형태가 불식되었다면, 절대 무분별자의 실재자가 나타난다. 심층 의식으로부터 감시하면 현실의 모든 사물은 허망에 지나지 않고, 브라프만의 「이름과 형태」적인 변형(변형)이며, 브라프만의 한정적 나타나는 한, 경험적 사물에 일종의 실재성 가 인정되면 이츠키 씨는 이 후지일 원론을 설명한다. 매우 이해하기 어렵지만, 이통 씨는 다른 각도에서 다시 말하고있다. 즉, 「개별 별개의 사물의 개별 별개의 「본질」은 허망이지만, 그 대신 그(샹카라)는 모든 경험적 사물에 유일하게 절대의 「본질」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본질'의 무성을 따라가면서 최종적으로는 '형이상학적 절대유'에 도착한다. 불교 철학과 이 베단타 철학, 종착하는 곳은 전자는 절대 무분절적 무인데 반해 후자는 절대 무분별적 유와 헤어지는 것이다.
이츠키 씨는 『초월의 말』에서 더욱 논의하고 있다. 그 중 Ⅴ 마야적 세계인식에서 '존재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의미적 '환영'(마야)이다'라는 샹카라를 포함한 고전적 후지일 원론이 있으며, '동양적 주체성의 본래의 근원적 현성 형태」로서의 「마야적 의식의 기저 구조」를 「그 본래의 철학 논리적 정합성에 있어서 해명해」, 「그 사상 내용을, 동양적 언어 철학의 근원 형식에 관련시켜, 읽어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을 주제로서 논술한다고 한다.
「마야적 주체가 되는 것」은 보편적인 사상이지만, 특히 동양에서는 「무상관」으로서 받아들여져 왔다. 세계나 존재를 허망으로 하는 감성은 정서적인 기분을 만들어 내고 통속적(속체적) 철학을 낳았다. 그러나 베단타의 후지일 원론은 '마야 철학'으로서 통속적 철학에 대립한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존재의 허망성은 의식의 단계에 따라 보이는 방법이 달라진다고 한다. 사건 사건이 「자기 동일하게 그 자체」라고 파악되는 속속적 단계로부터, 「철학적 사색의 진전에 따라」 존재성의 기반을 빼앗겨, 「상호 상관적」이 되어 「꿈 환적 성질을 띠고 온다. 대승불교에서는 최고위에 이르면 “모든 존재가 공화되고 무화된다”고 이통씨는 설명한다. 후지이치 원론에서도 불교와 마찬가지로 속체에서 진체(철학적)로의 이행을 추적한다고 한다. 그러나 불교와 다른 점은, 베단타에서는 경험적 세계의 존재적 타인은 속체적 단계에서 이미 꿈환화되고 있다는 것, 또한 불교에서의 '진체적 지식의 극한'에서는 '존재가 일거에 "공화된다"가, 베단타에서는 "진실적 지식의 극한에 있어서 존재는 절대화되어 유화된다"는 것이라고 이통씨는 말한다. 그것(유)은 속체적 단계에서 경험하는 「유」가 아니다. 절대적 부정에 있어서 각지되는 「유」이며, 「유성의 극」을 「브라프만」이라고 베덴타에서는 부른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이츠키 씨는 후지이치 원론을 해석해 나가지만, 더 이상 여기서 진행하지는 않는다. 관심 있는 사람은 『초월의 말』을 읽는 것을 권한다. 『의식과 본질』의 해독으로 돌아가자.


불교 철학에서는, 「본질」은 어디까지 쫓아도 「무」이며, 「현상계의 존재자는 길기만 있음」이지만, 한편에서는 「일체의 존재자에게 공통되는 절대 유일한 「본질」이라고 하는 사고방식 하지만, 동양철학의 본질 일반에 있어서, 하나의 전형적인 사유형태를 제시하고 있다”라고 이통씨는 주장한다. 이슬람의 이븐 아라비의 존재 일성론도 그 중 하나라고 한다.


(다음 제5회에 계속한다) copyright 이심사 무단 전재를 금지합니다


5]
연재 에세 ⑤ 이츠키 슌히코 『의식과 본질』 해독. 이븐 아라비 '존재 일성론'
2012년 07월 06일 | 이츠키 슌히코 연구
연재 에세 ⑤ 이츠키 슌히코 『의식과 본질』 해독.



연재 / 제 5 회
고바야시




미나리 P29-P33
이븐 아라비의 「존재 일성론」


 경험계의 사물을 진실재자의 나타나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하고, 경험적 존재자를 표층 의식의 개념 사유적인 허구로 하고 부인하는 것은 베단타 철학과 다르지 않다.


 이븐 아라비에 의하면, 세계 즉 전 존재계는 유일무이의 진실성인 절대 무분절의 「존재」가 다양한 「한계선」에 의해 분절된 형태로 우리의 표층 의식에 나타난 것.
                         『의식과 본질』Ⅰ


 베단타 철학과의 차이는 "절대 무분절 실재로서의 한자와 현실계에서 보이는 분절적 다자와의 연결이 직접적이지 않고 간접적이다"는 점에 있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실제로, 한 자와 다자 사이에 「유무 중도의 실재」라는 중간 영역을 설정한다. 분절적 다자성을 순수한 "존재" 그 자체의 문절적 자기 전개라고 생각한다. 즉, "한 사람이 거기에 내재하는 자기 분석적 성향에 촉구되어 적극적으로 분절 전개하고, 다자가 되어 존재적으로 현현한다"는 것이라고 이통씨는 분석한다. 중간 영역으로서 설정하는 「유무중도의 실재」에 있어서는 내적으로 가능성으로서 이미 분절된 단계이며, 분절의 방향성을 결정한다. 그것이 존재 "한계선"의 원형, 즉 "본질"의 원초적 형태라고 이츠키 씨는 말한다. 표층 의식에 나타나는 사물의 「본질」은, 유로가 아니고 무도인 「존재범형」이 속체적으로 유로서 퇴색해 현현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이통씨는 설명한다. 즉 「절대 일자의 간접적 자기현현」으로서 볼 수 있는 사람에게는, 「본질」도 또 실재적인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순수 '존재'의 분절적 자기 전개라고 생각하는 것이며, 샨카라처럼 '마야의 일로 마치 다자인 것처럼 우리에게 보인다'와는 다르다고 이츠루 씨는 지적한다.
이븐 아라비의 본질론은 '본질' 비유설과 '본질' 실재설의 중간에 있지만 현상적인 경험계의 사태로서는 '본질'은 진정한 의미에서는 실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태도가 보인다. 그렇다면 이츠키 씨는 생각한다고 한다.


 좀 더 이븐 아라비의 철학에 밟아 보자.
이슬람 문화에 내재하는 신비주의를 수피즘이라고 일반적으로 부른다. 전혀 관계가 없는 두 개의 조류인 철학과 수피즘이 대립과 접근을 반복하여 마침내 융합하여 이슬람적인 철학이 탄생했다.
수피즘과 철학의 융합은 기원 12세기 후반부터 13세기 전반이며, 그 시기에 출현한 두 명의 위대한 사상가가 이란의 철학자 스프라와디와 위에서 말한 아라비아의 철학 자 이븐 아라비라고 한다. 이븐 아라비는 스페인의 코르도바에서 태어나 자란 아랍인으로, 나중에 코르도바를 떠나 여행을 하고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서 죽었다. 수프라와르디는 이란 사람으로 아라비와 마찬가지로 시리아로 옮겨 살아 알레포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시리아가 이슬람 문화의 일대 중심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통씨의 저작 『초월의 말』(Ⅲ 존재와 의식의 심층)에 따르면, 그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수피즘은 신플라톤파의 철학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이론을 성립시키고 있었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를 프로티노스풍으로 해석하는 과정을 통해" 신비주의로서의 새로운 플라톤주의와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슬람 철학은 처음부터 신비주의를 접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신비주의와 철학은 오랫동안 적대 관계에 있었다고 이츠키 씨는 해석한다.
 수피즘은 본래 사상이 아니라 금욕수업의 길이었다.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주류였다. 이슬람 세계에서 말하는 팔사퍼(철학)는 “그리스 철학을 이슬람적 컨텍스트에서 일신교적인 교리, 혹은 일신교적 신앙에 적합한 것 같은 형태로 전개한 것”이라고 이통씨는 말한다.


 이슬람 철학의 발전사를 이통씨의 「초월의 말」로부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제1기――11세기부터 12세기
 이븐 시너(이란의 철학자, 서양에서는 아비센나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와, 이븐 루시드(아라비아의 철학자, 서양에서는 아베로이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가 있다. 이슬람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그리스어에서 아랍어로 번역하는 작업으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아비센나가 새로운 플라톤파의 강한 영향이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그의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이 현저하게 새로운 플라톤파 이었기 때문에, 아베로이스에서 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왜곡되어 이슬람에 도입된 책임은 아비센나에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이통씨는 지적한다.
아비센나의 수피즘적 경향에 비해 철저하게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였던 아벨로이스는 수피즘에 정면에서 대립하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고 이츠키 씨는 말한다.
아빌로이스의 사상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고, 그 후 로마 교회 내부에 큰 파문을 던졌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제2기――12세기 후반부터 13세기 전반
 이미 논의한 스프라와르디와 이븐 아라비이다. 이븐 아라비에서 신비주의와 사변 철학은 융합 일체화되어 이슬람 신비 철학의 출발점이되었다고 이츠키 씨는 말하지만, 이슬람 신비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비주의 그 자체를 깊이 이해해야합니다. 합시다. 이통씨에 의하면, 신비주의의 특징으로서 리얼리티의 다층적 구조가 있다고 한다. 경험적 세계는 존재의 외측, 앞면 또는 표층에 불과하며 여러 층이 수직 방향으로 퍼져 있습니다. 존재 영역의 다층 구조입니다. 아래로 갈수록 어둡고, 지각이나 지성으로는 어둠에 헤매어 버릴 뿐이다. 이처럼 표층에서 심층까지의 전체를 현실 리얼리티라고 생각하는 것이 신비주의의 초보적 단계라고 이통씨는 말한다.
 두 번째 특징으로 언급되는 것은 위에서 본 다층 구조에 대해 보는 인간의 의식에도 다층 구조가 있다는 것이다. 객관적 현실의 다층과 주관적 의식의 다층에는 대응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의식과 현실, 즉 주체와 객체를 구별하는 것은 신비주의의 입장에서는 생각하지 않고, 주체적 세계와 객체적 세계의 존재질서가 구별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표층적 사건이며, 심부로 나누면 구별은 희미해 마지막은 없어진다고 이통씨는 지적한다. 객관적 현실과 주체적 의식이 혼돈되어 일체가 되고 있어, 역점의 두는 곳에 의해서 개체적 현실이 되거나, 주체적 현실이 되거나 해서 나타나고 있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의식의 심층이 열리면 현실의 심층이 열린다고 하는 것이지만, 감각이나 지성에 근거하는 인식 형태는 뿌리 깊고, 수행이 필요하게 된다. 이것이 제 3의 특징이라고 이통씨는 말한다. 의식을 일상적 상태에서 관상(명상)이라고 불리는 상태로 이끌기 위한 특별한 수행 방법을 필요로 한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명상상태에 있을 때 자아의식의 소멸, 자신이라는 주체의 소멸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경험적 자아는 거짓 자아이기 때문이다. 자아를 소멸시키면 진정한 어둠이 찾아온다. 신비주의에 있어서는, 이 어둠이야말로 진정한 빛이며, 모든 존재가 모든 우주가 빛나는 빛의 바다가 된다. 그것이 진아, 진정한 주체로 자각된다. 불교로 말하면 무와 하늘에 해당하면 이통씨는 해석한다.
 수피즘은 샤머니즘과 마찬가지로 의식의 심층의 이마쥬화가 특징이라고 이통은 분석한다. 의식의 기능이 내면화되고 심화되고, 수피 자신의 말로 말하면, 영혼의 거울이 닦아져 갈수록, 생각도 못하는 이마주가 나타난다.
 “인간을 육체와 영혼의 결합으로 생각하고 영혼의 구제에 그 종교성의 모든 것을 건다”라는 셈적인 일신교의 형태를 이슬람은 중요시한다. 이슬람 철학의 영혼관과 수피즘의 영혼관의 차이는, 전자는 영혼은 인간 자아의 자리인 반면, 후자는 영혼은 인간의 실존을 하나님의 자기 실현의 장소, 하나님이 자기를 나타냅니다 장소로서 자각시키는 것이라고 이통씨는 말한다.
 앞서 말한 아비센나는, “우리”의 의식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모든 의식의 작용이 생기고, 그 전체가 영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즉 영혼과는 자아 의식의 장소라고 생각했다고 이통씨는 해석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수피즘은 부정한다. 자아의 위험성에서 탈출하기 위해 수피즘의 수행이 있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수피적 의식 구조에 대해 이츠키 씨는 『초월의 말』에서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으므로 관심이 있는 분은 끈 풀리면 좋다.
여기에서는 심층 의식의 수피적 구조와 유식적 구조를 비교하여 끝내고 싶다. 수피즘에서는 5개의 층으로 나뉜다. 나프스 암마라, 나프스 라우워마, 나프스 무트만나, 지붕, 실과 점차 심층으로 내려간다. 각각 다른 영혼이 있다. 불교의 유식에서는 제1단에, 표층 의식의 영역에 5개의 식(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 있어, 그것보다 깊은 곳에, 제2단째에 5개의 감각 기관을 통합한다 , 물건에 대해 사유하는 일이 있는 곳, 그 한단 아래에, 즉 제3단째에 제7말 나식, 여기가 자아 의식이며, 그 일단 아래에 아요야식이라는 잠재 의식의 영역이 있다. 정연한 4계층적 의식의 구조 모델이라고 이통씨는 해설한다. 수피즘의 의식 구조 모델은 자아 의식의 소멸의 과정으로서 세워지는 것에 대해, 유식의 구조 모델은, 번뇌의 작용 그 자체의 구조화라고 이통씨는 말한다. “의식의 표층을 지배하고 있는 번뇌의 뿌리를, 보다 깊고 더 깊게 헤쳐나가면, 그 궁극의 장소로서의 아요야식에 도달한다.” 가 있어 그것이 노출되기 때문에 그것을 더 깨달음으로 전환시킬 가능성이 성립된다. 의식이 소멸하고, 자아의식에 의해 야기되는 존재적 망상도 사라질 수 있게 된다”고 이통씨는 해석한다. 수피즘에서는 최심층으로 내려가면 스스로 자아의식이 소멸하는 것이며, 그 절대무가 하나님의 현현으로 이어진다. 인간적 의식의 「무」에서 심적 의식의 「유」로 전환해 나가는 곳에 수피즘의 특징이 있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이 수피즘적 주체인 '신적되다'의 절대 경지에서 인간적 이성의 차원으로 내려와 철학적으로 사유하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되는지를 이통씨는 고찰한다. 철학적 사색에는 가지 않고, 수피즘에 머물러 문학의 길로 나누는 사람도 많지만, 체험을 바탕으로 철학을 시작하는 사람도 있고, 그 가장 위대한 철학자가 앞서 이름을 든 이븐 아라비 그리고 스프라와르디였다.
「의식의 제로 포인트에 희미하게 나타나는 실재의 제로 포인트」는, 수피즘에서는 「해킹」이라고 불리고 있어, 대승 불교의 「진여」나 「하늘」, 선의 「무」와 비교할 수 있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이븐 아라비는 "존재"라고 부른다. 「절대무」로서의 존재이며, 존재자가 아니다. 하이데커적으로 말하면, 「자인」이고 「다스・자이엔데」가 아니라고 이통씨는 설명한다. "존재는 그 제로 포인트에서만 진상을 공개한다"라고는 해도, 일반인들에게는 현상학적 형태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거기에 보이는 것을 정말로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라비는 예를 들면 꽃 가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있을 뿐이라고 한다. 즉 "존재 에너지가 여기서 꽃이라는 형태로 임시 결정하여 자기를 나타내고 있다고도 말해야 한다"이며, "절대 무한한 존재(절대적 일자) 그 자체를 정점에서 그 자기 한정 , 자기분절의 형태로서 존재자의 세계가 전개한다」라고 된다고 이통씨는 해석한다. 정점이 존재하는 제로 포인트에서는, 절대의 무이면서, 일체의 존재자가 나오는 궁극의 근원이며, 대승 불교에서 말하는 「진공이 묘유로 바뀌는 곳」에 해당한다고 이츠키씨는 말한다.
 존재 모델로서의 삼각형을 생각했을 때, 삼각형의 전체를 생명적 에너지로서의 「존재」의 자기 전개의 유기적 체계라고 볼 수 있고, 정점에 그 「존재」(절대적 일자)를 두고, 이 삼각형을 2개의 저변으로 자르면 3개의 대, 중, 소의 삼각형이 정점을 공유해 겹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삼각형의 정점을 아하드라고 하고, 작은 삼각형의 저변을 워히드라고 부른다. 아하드를 '절대 일자'라고 하면, 워히드는 여전히 혼자이지만 외적으로는 혼자이지만, 내적으로는 더 이상 빈 종이가 아닌 한 사람, 즉 모든 수를 가능하게 포함했다 하나이며, 이븐 아라비의 철학적 체험에서는 이 워히드가 '알라'에 해당하면 이츠키 씨는 해석한다. 이것에서 알 수 있듯이, 아라비는 알라 위에 신 이전의 상태를 두고 있다. 맨 위의 저변으로부터 다음의 저변까지의 사다리꼴 부분을 워히디야라고 부르고, 신의 자의식의 세계, 존재가 잠재적으로 분절되고 있는 영역이라고 이통씨는 말한다. 게다가 아래 사다리꼴 카스라에게 불린 지역은 수많은 세계, 신의 세계 창조의 세계이다. 앞서 말한 워히디야의 영역은 존재에너지가 결정점을 발견하고 있지만 아직 현실에 존재하는 사물이 아닌 존재원형이 나타나는 영역이며, 아라비는 이 존재원형 혹은 하나님의 의식의 내적분절을 「유무중도의 실재」라고 부르고 있다고 이츠루씨는 말한다. 아라비가, 이러한 「유무중도의 실재」는 고정한 것이 아니라, 유동성을 가진 존재의 주형, 사물의 근원적 이마주를 낳는 것으로서 표상하고 있어, 「유무중도의 실재」라고 한다 주형을 통해 '존재'라 불리는 영원불멸의 상상에너지가 우리의 경험적, 현상적 세계로 실현된다고 생각한다.


 이븐 아라비의 사상은 오랜 역사의 과정에서 텍스트 해석상 다양한 철학적 학파를 낳았지만, 위에서 소개한 것은 이븐 아라비에 연원하는 '존재 일성론' 학파의 사상이다. 라고, 이통씨는 말한다. 아라비는 엄청난 양의 책을 남겨두었지만 그 난해함 때문에 속인에게는 닫힌 세계였다. 이성적으로 사상체계를 마무리하고 아라비의 비교적 교설에 형이상학적 구조를 준 문하의 새돌 딘 쿠나위가 있어 그는 이븐 아라비파의 최고 권위가 되었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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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에세 ⑥ 이츠키 슌히코 『의식과 본질』 해독. 물건이 보이는 빛, 바쇼와 본질론
2012년 07월 12일 | 이츠키 슌히코 연구
연재 에세 ⑥ 이츠키 슌히코 『의식과 본질』 해독.

고바야시 稔


연재/제6회


『의식과 본질』Ⅰ이 끝나고, 여기에서 Ⅱ의 기술이 시작된다. Ⅰ에서는 동양적 사고에는
어떻게 '본질' 부정의 개념이 철저히 있는지를 살펴왔다. 이통씨는 이 '의식과
본질'을 세상에 발표한 1982년 뒤에 '본질' 부정에 대해 좀 더 깊게 추구
한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이 블로그에서 소개하려고 했지만, 막대한 분량이 되기
때문에 할애했다. 그러나 전회 이븐 아라비에 대해서는 약간 상세하게 해설해 보았다. 언젠가
새로운 플라톤주의와의 관계를 파헤쳐 논의해 보려고 생각하고 있다.
자료로는 아래의 서적이 있다. 「 의식


 의 형이상학」  「  Ⅲ
 존재와 의식의 구조」 「초월의 말」본질』Ⅱ을 읽어보자. P34~39 「물건의 마음을 한다」  이통씨는, 동양 철학의 전통에는, 지금까지 논해 온 「본질」부정과는 반대로, 「본질」의 실재성을 전면적으로 긍정하는 사상 조류가 있다고 한다. 『의식과 본질』Ⅱ 에서 논의될 것이다.  혼이 선장은 중국 사상에서 볼 수 있는 추상 개념을 '굉장히 흥미롭다'며 극도 로 싫은 것을 이통씨는 지적한다. '타마 카츠 마'의 ''카노 송 유의 격물 도착 궁리
























시오이코, 사토모토모토를 해내라”며, 추상 개념의 기초가 되는 보편자, 즉
“본질” 등은, 생명이 없는 사물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이통씨는 말한다.
중국적 사고의 추상적·개념적에 대해 “선장은 철저한 즉물적 사고법을 설했다”며
, 그 예로서 “물건의 어우러짐”이 있다고 이통씨는 지적한다. 무슨 일이야.
이통씨의 설명에 의하면, 물건에 가만히 닿는 것, 그리고 물건의 마음을 안쪽에서 잡는, 그것이
올바른 인식 방법이라고 선장은 생각했다고 한다. 「마음 있는 사람」이라고 선장이 말하는
것은, 개념적 「본질」의 세계는 죽음의 세계인 것에 대해, 눈앞에 있는 사물은, 살아
약동하는 생명 넘치는 실재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실존적 감동'
을 '깊게 느끼는 것' 의외로 없다는 것이라고 이통씨는 해석한다.
 눈앞의 「전객체화적 고체」(멜로 폰티), 인식 이전의 「원초적 실재성에
있어서의 개인」의 마음을 포착하는 것은 「언어적 의미 이전의
실재적 로 폰티) )를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라고 이통씨는 말하지만, 「개인의 실재적
핵심을」 「객관 대상적으로 인지할 수 없다고 한다.」 「x를 꽃이라고 하는 것
, 자신에게 대립 하는 개체로서 인지하는 것 그 자체로 이미 '꽃'이라는
말의 의미분절작용을 통해 x를 보편화하는 조작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 「본질」이라고 부른다」라고 한다. 이런 견해
쪽에서 생각하면, 선장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본질」회피이며, 직접 무매개적
직관지(비「본질」적 직관지)라고 해도 될까라고 이통씨는 해석한다. 그러나 '물의
마음'을 사물의 '본질'로 하는 또 다른 입장도 생각할 수 있다고 이통씨는 지적한다. 즉
두 가지 다른 의미의 '본질'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1. 자연스럽게 사람이 찾아내는 원초적 사물의 개체적 실재성으로서의 「본질」.
 둘째, 의식의 분절 기능에 의해 보편화되고 개념화된 형태로 사물이 제시하는 '본질'.


 '1'을 개체적 '본질', '2'를 보편적 '본질'로 하고, 이통씨는 '본질'의
구별을 고찰해 나간다. 이슬람 철학에는 이 두가지 '본질'을 술어적으로 구별하여 생각하는
전통이 있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P40~45
'마히야'와 '후위야'
 이슬람 철학자 조르자니(15세기)의 '존재의 계층'에 대한 주석을 이통
씨는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어떤 것도 그 자체를
갖고 있는 리얼리티가 있다
. 이것을
술어로 후위야라고 한다.다른 하나는 보편적 리얼리티로 이것을 마히야 라고  부른다
. 적의 의미에서의 본질(머히어)라고 불리고 있다.




"특수적 의미에서의 본질"로서의 마히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그것은
무엇인가)을 아랍어로 옮긴 것이며, 그 대답으로 주어진 것은
"x의 영원 보편의 자기 "동일성을 규정하는 것"으로서 "본질"은 정위된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이것이 완전히 추상화된 '보편자', '일반자'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본질」로서의 「후위야」는 「일체의 언어화와 개념화를
가로막는 진정으로 구체적인 x의 즉물적 리얼리티」이며, 「후위야」는 「이것
인 것 라고 하는 의미라고 이통씨는 말한다.
 '잘라내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실재성으로 존재시키고 있는 것은 '개체적 리얼리티
'뿐, 즉 후위야뿐이라고 하는 생각이 있지만, 우리의 표층
의식이 거기에 시선을 향했을 때 , 실재성의 퇴색한, 공동적인 형태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는, 그것이 보편자로서의 「본질」, 즉 마히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이통씨는 지적한다.
또 보편적 「본질」이야말로 구체적, 개체적으로 성립시키는 존재 근거라고 생각하는 사람
도 있다고 한다. 경험적 세계에 존속시키는 근거로서의 개별의 리얼리티를 「개인
독자적인 개인적 실재성에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거기에 개개인 형태로 현현하고 있는 보편적 「
본질 」에 인정하는 사람들, 「 본질은 보편적이면서 게다가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P47~50
후사르 현상학에 있어서의 「본질」
 이통씨에 의하면, 마히어(「본질」의 보편성)와 후위야(「본질」의 개체성
)의 불안정성은, 후사르의 현상학의 「본질」이해의 모호함에 노출하고 있다고
한다. 푸사르의 현상학적 환원과 형상상환원의 이중조작을 거쳐 본질직관적으로 파악한
'본질'은 위 어느 쪽의 '본질'이었을까라고 당황한다고 말하고
있다. 무슨 일일까.
 우리의 의식경험에 나타나는 구체적인 사건은 '본질'을 찾아 '유화'나 '
형식화'를 넘어뜨리면 '구체적 삶의 현실에서 멀리 벗어난 무색 투명한 보편자
이다 . "이게 되려고 이통씨는 말한다. 후사르의 후예자는 그 추상성에서 탈출하려고
해석적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엠마누엘 레비나스가 있거나
멜로 폰티가 있다. 폰티는 '이탈된 본질'이란 언어화된
'본질'이지만, 현상학적 환원에 있어서의 '본질'은 살아있는 현실의 역동적
이라고 말하고 있다고 이츠키 씨 네.
 불교에 있어서의 코토바의 의미 분절 기능이 미치는 「망념」의 일을 고찰한 이츠루씨는,
심층 의식에 있어서의 의미적 아라야식을 생각하면, 표층 의식에 나타나지 않은 「종자」
의 기능이 있는 것을 지적한다. 후사르의 「본질 직관」은, 전언어 분절적 의식이
말하는 무언가를 현전시키는 것이라면 폰티의 해석에서 말할 수 없는 일도
없다는 애매함을 남겨 버린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P50~53
릴케의 「본질」
 마히야와 후위야라는 두 가지 본질을 생각했을 때, 릴케와 같은 실존적
체험을 중시하는 시인은 후위어, 즉 '개체적 리얼리티'에 강한 관심을 보인다는 것을 이통
씨는 지적한다. 경험적 사건이야말로 시의 자기장인 것은 현대에서
시인이 되는 나에게도 공통되는 것이다. 경험의 일회성은 중요한 의미
작용을 가진다. 게다가 거기서 감수한 형상을 시인 자신의 내면 세계에 끌어들여 가자
. 「그 자체의 순수한 형상을 일상 언어보다 한층 고차의 시적 언어에 그대로 현존
시키려고 한다」라고 이통씨는 말한다. 말을 바꾸면, 후위아에서 마
히아로의 과정이 창작 행위라고 생각하지만, 반대는 사실이 아닐 것이다.
릴케에게 머히어를 통해 물건을 보는 것은 "물건의 본원적 개체성을 최대 공약수
적 평균 가치 속으로 해소해 버리는 것"이라고 이통씨는 주장한다. 그러나 문제
는 언어적 의미 분절에서, 즉 릴케가 시적 언어로 표현할 때 일어나는 어려움
이다. 이통씨에 의하면, 후위야(개체적 리얼리티)는 표층 의식에는 자기
자신을 공개하지 않는 것을 릴케는 알고 있었다고 한다. 노라에게 보낸 릴케의 편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부의 심층 차원에서, 물건은 시작해도
그 자체의 현실을 공개한다"고. 이것은 사물의 진정한 내적
리얼리티가 모든 것을 언어 의미적으로 보편화하는 표층 의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이 말과 표층 의식과 다른 의식의 차원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고
이츠키 씨는 말한다. 그 심층 영역에 있는 후이야(개별적 리얼리티)를 언어
화하는, 즉 「후위아를 비분절적으로 분절해 내야 한다」이며,
「표층 언어를 내적으로 변질시킴으로써 밖에 해소된다」이다 브로시, 「이상한
실존적 긴장에 충만한 시적 언어, 일종의 고차 언어가 탄생한다」가 된다고 이통씨는
결론한다.


P53~61
바쇼의 '본질'
 선장의 관심이 있던 시적언어는 릴케의 고차언어와는 달리 '머히어의
현재적 인지에 근거한 코토바'라고 이통씨는 말한다. 그것은 「와카의 언어」이며,
「일체의 사물, 사상이 각각 그 보편적 「본질」에 있어서 정착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편 「본질」적으로 규정된 세계에 질리지 못한 시인들이 있었다고 이통씨
는 지적한다. 헤이안 아침의 「전망」을 그는 해설한다. ‘신고지마’적 유현추구에 있어서
‘전망’의 의식은 ‘이막한 정취공간 속에 존재의 깊이를 감득하려고 하는 의식
주체적 태도가 아니었을까’라고 이통씨는 묻는다. 눈앞의 구체적인 사물을 인지했다고 하면
, 보편적 '본질'이 보인다
.
 
나가무라면 내 마음에 빠지지 않고, 가기에도 모르는 달의 그림자일까
                          식자우치 친왕 이츠루씨


 에 의하면, 「시인의 의식은 사물에 날카롭게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 그들은 먼
그분에게, 한없이 먼 곳에 끌려가고 있다」라고 한다. 시선 앞에서 사물은
"본질"적 한정을 넘어 거기에 존재 심층의 개현이 있다고 한다. 이 '전망' 의식은
사물의 마히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하기 때문에 흐리게 하려고 한다고 이츠키
씨는 지적한다.
 
 그런데 바쇼에 대한 고찰에 들어간다. 바쇼는 위와 같은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후
이야를 추구하는 격렬함에 있어서 릴케와 수염을 취하는 일은 없고, 시적 실존의 모든
것을 걸어 추구했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그러나 보편적인 본질인 마히어의 실재성
을 부인하는 것은 없었다고 한다. 사물의 후이야는 마히야와 동일하다고
생각했다. 보편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이 구체적인 존재자의 현전에서 연결되어
있게 된다. 즉 '개념적 보편자가 아니라 실재적 보편자로서의 '본질'이 어떻게
실재하는 고체의 개체적 '본질'이기도 하는가. 이 아폴리아를 다음과
같이 이통씨는 해독한다.
 보편적 「본질」을 보편적 실재 그대로가 아니라, 개인의 개인적 실재성으로서 직관
할 것을 바쇼는 설했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바쇼의 하이쿠에서는, 마히야가 후위
야에 갑자기 전성하는 순간이 시적 언어로 결정한다는, 실존적 긴박이 가득한 순간의
포에지였다고 이통씨는 주장한다.


  물건이 보이는 빛, 아직도 마음에 사라져야 하는 가운데에 한동안
                            바쇼
 영원불이의 「본질」, 그것은 사물의 존재 심층에 숨은 「본질」이라고 이통씨는
지적한다. '물'과 '우리'가 분열하고 주체(물)가 자기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객관적
으로 밖에서 바라볼 수 있는 존재 차원을 존재 표층이라고 한다면 존재 심층이란
존재 표층을 넘어 "인식적 이극 분열 이전의 근원적 존재 차원"이라고 이통은
분석한다. 이 사물의 보편적 「본질」, 마히야를 바쇼는 「본정」이라고 부른 것이다
.
 이통씨에 의하면, 바쇼가 말하는 「본정」은 표층 의식으로는 파악되지 않고, 직접 접촉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변질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변질을 바쇼는 「사의를 할 수 있다」
라고 표현해 , 이러한 미적 수련을 「풍아의 마코토」라고 불렀다고 한다. 게다가 「
본정」은 부단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것을 앞에 두고 갑자기 「・・・의 의식」이 사라지는 순간
이 있어, 그러한 순간이야말로, 「본질」이 깜빡 빛나는 것이라고 이통씨 말한다.
「물이 보이는 빛」이다.
 한층 더 이통씨의 해석에 따라 요약해 가자. 사람이 물건을 만나는 순간에 사람
과 사람 사이에 하나의 실존적 자기장이 현성되고, 사람의 의식은 사라지고, '본정'이 자기를 공개
한다는 것이다. "물건에 들어가서 그 미세한 표정"이다.
 즉, 영원불변의 「본질」이, 바쇼적 실존 체험에 있어서, 갑자기, 순간적으로,
생생한 감각성으로 변성되어 나타난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보편자가 순간적으로 자기를 감각
화하는 이 감각적인 것이 그 자리에 있는 그 자체의 개체적 리얼리티이며,
마히야가 후위어로 변모하는 순간이라고 한다.


 후위어만을 의식하고, 마히어를 개념적 허구로 하는 릴케와 마히어의
형이상적 실재성을 인정하고, 감성적 표층으로 변성하는 후이야의 순간을 포착하려고 하는
바쇼와의 차이는 명확해졌다. 이 두 가지 유형에 공통적이라는 것은 "즉물적 직시"일
것입니다. 그러나 '즉물적 직시'를 배제하고 머히어를 아이디어적 순수성에서 직관하려고
하는 시인이 있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두드러진 예로 말라루메를 들 수 있다. 철학적으로
는 보편적 '본질'의 실재론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하며, 이츠루 씨는 '의식과 본질'Ⅲ
에서 마히야 실재론을 동양철학에 탐구하게 된다.


다음번에 제7회에 이어 copyright2012 이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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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에세 ⑦ 이츠키 슌히코 『의식과 본질』 해독. 말라루메의 절대 언어. 「나는 꽃!이라고 말한다…
2012년 07월 16일 | 이츠키 슌히코 연구
연재 에세이 이츠키 슌히코 『의식과 본질』(정신적 동양을 가르쳐) 해독.

연재/제7회 말라 루메 의 절대

 언어, 「내가 꽃!이라고 한다・・・」라고 하는 시대는 「본질」 및 「존재」라고 하는 존재론의 기초 개념이 확립된 시기였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거기서 펼쳐진 철학상의 수술어가 근대철학에서 현대철학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세계적인 세계의 흐름이 '일본인의 철학사고'에 융합하고 서양화하고 있는 현대적 상황에서 우리가 이 '의식과 본질'을 이미 논의하고 있지만, 이렇게 '본질'을 논의 하는 경우조차 서양 중세가 흔들리고 있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그리고 서양 중세 철학에 반입된 이슬람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 동양 사상의 광대한 영역을 앞서 언급한 '공시적 구조화'를 목표로 이츠키 씨는 횡단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츠루씨는 『의식과 본질』의 Ⅰ, Ⅱ라고 써 와서 Ⅲ을 시작하는 이 지점에서 우리 독자에게 스스로의 사상의 입각점을 밝혔다고 할 수 있다. 즉 그의 사용하는 「본질」이라는 술어는 서양 중세 철학의 그것인 것, 그리고 중세의 스콜라 철학적 개념에 비교 철학을 도입해, 동서의 사상의 「지평 융합」의 실현을 향한 한 걸음이 되는 것을 바란다는 것이 표명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슬람 스코라 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서양의 스코라 철학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슬람의 신비주의가 그리스의 철학과 대립해 이슬람의 철학을, 11세기부터 12세기 의, 아비센나, 가자리, 아베로이스들이, 「신플라톤주의적으로 해석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그리스 과학과 신플라톤파의 주석이 차례차례 아랍어로 번역되었다고 이통씨는 지적)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있다. 그리고 그들의 저작이 라틴어로 번역되어 중세 카톨릭 교회에 도입되어 중세 스코라 철학이 형성되어 유럽 철학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고 현대에 이른다.
 여기서 알았던 것은 이슬람 철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 개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영향을 받은 서양 스코라 철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스콜라 철학에 있어서, 「본질」은 「존재」와 대립해 상관하는 개념인 것에 주의가 필요하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무슨 일을 이통씨의 설명으로 쫓아보자.
 X가 현전하고 있다. 그것을 인식할 때, 「・・・의 의식」이 생긴다. 「X의 의식」이란 X가 현전하고 있다고 가정한, 「X의 존재의 의식」, 「존재하는 X의 의식」이라고 이통씨는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X의 지각이 성립하기 이전의 원초적, 분석적 이성의 일을 하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의 「X의 의식」을 생각해, 「무분절적으로 뭔가가 우리에게 의식을 향해 자신을 제시하고 있을 뿐” 상태를 조치한다. 다음 단계에서 이성이 갈라져서 '본질'과 '존재'로 나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시작하여 X가 존재하는 무언가로서 의식된다. 이성의 본원적 분할작용이야말로 스콜라 철학상의 존재론의 첫걸음이라고 이통씨는 말한다. X는 존재하는 것에 의해 예를 들면 「꽃」인 것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원리의 작용이 있다, 그것이 「본질」이라고 이통씨는 말한다. 그러나 「본질」은 「존재」를 보증하지 않고, 양자가 일체가 되어 X는 존재하는 「꽃」이 된다고 한다. 
 "본질"는 일반인이어야 한다. 모든 꽃에 공통적 인 일반적인 특성으로 제시합니다. 꽃은 개별성을 박탈되어 무기적인 것이 된다. "모두 존재하는 것은 개체라는 것은 스콜라 철학의 대원칙이다"라고 이통씨는 지적한다. 「이 꽃」은 단순한 꽃과는 근원적으로 다른 무언가가 현성되어 있다는 생각이 일어났을 때, 거기에 있는 것은, 보편적 「본질」과는 다른, 또 하나 다른 「 본질이 아니어야 한다는 존재감각이 생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슬람의 스콜라 철학은 이런 생각에서 두 가지 '본질'을 조치한다.
 동양철학에서 볼 수 있는 '본질' 부정의 입장이 강하게 있는 가운데, 다른 한편으로 존재하는 사물의 실재성의 핵심으로 인정하는 '본질' 긍정의 입장이 된다는 것을 이통씨는 Ⅲ에서 논하려 하고 있기 때문에 있다.
 존재하는 사물의 실재성에만 리얼리티를 보는, 개인의 독특한 독자성을 유지하는 리얼리티를 「본질」로 하는 후이야를 밀어 추진하면, 다른 한편의 보편적 「본질」은 개념적 일반자가 된다 실재성을 박탈당한다. 그런데 이 보편적 「본질」은 농후한 존재감을 가지고 실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옛날 동양에도 서양에도 존재했다고 이통씨는 지적한다. 게다가 일반인의 「본질」은 물건의 이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머히어 긍정론의 세 가지 유형을 이통은 분류한다.
1. 보편적 「본질」머히어는 존재의 심부에 존재한다. 그것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심층의식을 볼 수 있을 필요가 있다.
둘째, 샤머니즘과 일종의 신비주의를 특징짓는 근원적 이마주의 세계. 존재자의 보편적 「본질」이 농후한 상징성을 띤 아키 타입, 원형으로서 나타난다. 예를 들면, 이븐 아라비의 '유무중도의 실재', 아프라와르디의 '빛의 천사', 용이한 64가지, 밀교의 만다라, 유대교 신비주의 카바라의 '세피로토' 등이 있다.
셋째, 하나의 형태가 심층의식적 체험에 의해 파악되는 보편적 「본질」을, 여기서는 표층에서 이지적으로 인지하는 곳에 성립한다고 생각하는 사상. 고대 중국의 유학, 공자의 정명론, 고대 인도의 니야야 바이슈시카파 특유의 존재범주론 등이 있다.




여기에서 『의식과 본질』Ⅳ에 들어간다.


P74~80
마랄메와 ​​언어적 의식의 극북.


「본질」실재론의 제1타입의 예로서, 동양철학전에 서양의 근대시인 마랄메를 이통씨는 다루고 있다. 개체적 '본질'에 리얼리티를 요구한 릴케의 의식이 내린 곳은, 그러나 일종의 심층 의식 영역이었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릴케와 대성적인 입장에 서는 것이 말라루메이다. 말라루메가 요구한 '본질'은 '개인의 개체성을 무화하고 무화해 버린 곳에 냉혹하게 반짝반짝 빛나는 별빛처럼 떠오르는 보편적 '본질'의 굉장한 모양이다 이토우 씨는 설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본질'을 언어적 의식의 극북지대에 요구했다고도 한다.
 언어적 의식의 극북과 무엇인가. "불교를 알지 못하고, 나는 허무(le Néan)에 도달했다"는 카자리스에게 편지에 쓰고 있듯이, 이통씨에 의하면, "일상적 사물은 일을 스스로를 무화하고 소멸" 그리고 이 만물 무화의 체험은 정신 착란에 빠질 정도의 광기를 느끼게 하지만, 말라루메는 허무를 뚫고, 미(le Beau)를 발견한 것이라고 이통씨는 말한다.


「미」―일체의 경험적, 현상적 사물이 꿈 속에서 사라지는 허무, 「망각」(l´oubli)의 향 측에, 그가 발견한 이 「미」(le Beau)야말로 그에게 보편 적 '본질', 영원한 아이디어,의 절대미의 실재 영역이었다. 각 원시 있는 것의 사라지는 죽음의 세계. 하지만 그는 기뻐했다. 상식적 인간의 눈으로 보면, 죽음과 멸종 이외의 아무것도 있을 수 없는 이 '미'의 영역을 존재의 영원성의 차원(l'Eternité)이라고 그는 불렀다.
                           '의식과 본질' P76


 마랄메가 자신의 시인으로서의 사명으로 한 것은 경험적 사물로부터 영원한 '본질'을 구출하는 것, 시간의 지배를 마히야의 실재성의 차원으로 사물을 승화시키는 것 이츠이 씨는 주장한다. 현상적 세계는 우연(le Hazard)에 지배되고 있다. 부단하게 변화해 일순간 머무르지 않는 경험적 사물의 거침없이, 영원불이의 「본질」의 직시를 방해하는 일체의 현상적 존재 요소를 말라르메는 우연이라고 부른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이상 없이 순수한 빙하지대」라고 카자리스 앞의 편지에서 스스로 말하는 바와 같이, 「만물이 무생명성 속에 얼어붙어 결정화한 얼음의 세계」라고 이통씨는 표현하는 것이었다. 말라루메를 여기까지 몰아넣은 포에지의 필연은 고민되어야 한다. 보드레일의 요소 중 무엇이 이렇게 그를 비인간적 세계로 데려왔는가. 앞으로의 내 과제이다. 그러나 이통씨는 구원을 발견하고 있다. 존재무화와 우연성 파기의 그분에게 “순수하게 빛나는 새로운 모습으로, 그 사물은 일어나고 있다”라고 이통씨는 말한다.
 물건의 보편적 「본질」을 실재적으로 호출하는 「절대 언어」(le Verbe)란 무엇인가.
 
 "내가 꽃!"라고 말한다. 그러면 내 목소리가 어떠한 윤곽을 그 안에 닦아 버리는 망각의 그분에게 우리가 평소 사냥하고 친해지고 있는 꽃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로서 어느 꽃다발에도 부재의, 즐거운 꽃의 이데 그 자체가, 음악적으로 출현해 온다.                       
           마랄메 『시의 위기』


 시인이 절대 언어적으로 「꽃」이라고 하는 말을 발할 때, 일상적으로 감각적 실체로서 나타난 '꽃'이 일단 사라지고 꽃을 보고 있던 시인의 주체성도 사라진다. 삶의 흐름이 멈추고 모든 것의 모습이 사라지면 사라진 '꽃'이 형이상적 실재, 즉 영원한 꽃이 되어 굉장히 모습을 드러낸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절대 언어라고는 해도 시인이라고 해도 사용하는 것은 보통 언어 이외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절대 언어적으로 사용한다」라고 이통씨는 말한다.
 이것은 이츠키 씨가 제창하는 「언어 아라야식」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의미 에너지가 표층 의식에 부상하고 말이 초래되지만, 표층에 있어서는 반대로 이름을 부르는 것에 의해 존재가 개시된다. 유사와 차이를 명확히 하고 싶다는 테마이다. 코토바는 경험적 사물의 기호가 아니고, 지시 언어도 아니다.
 여기에는 플라톤의 아이디어의 세계를 방불케 하는 것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에서의 「본질」을 더욱 거슬러 올라 플라톤에 이르게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츠루 씨도 말하고 있는, 마라루메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우주 창조에 비해야 할 하나의 근원적 창조 행위였던 것이 아닌가, 이 본질 탐구의 과정을 마라루메는 수도원에서 신을 요구하는 수도사의 이토나미 에 비해 있는 것은 의미 깊은 것이 아닐까.

다음 번 제8회에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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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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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리와 아베로이스의 논쟁, 연재 에세이 ⑨이 통 슌히코 '의식과 본질' 해독.
2012년 08월 13일 | 이츠키 슌히코 연구
연재 에세 ⑨이 통 슌히코 「의식과 본질」(정신적 동양을 가르쳐) 해독.
연재/제9회

고바야시




치즈 가자리와 아벨로이스의 논쟁.
그리스의 철학적 사고와 일신교의 신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






P99-P105
의식의 수직 방향으로부터의 고려와 수평 방향으로부터의 고려.


 의식에 표층·심층이라는 이중구조를 조치하고, 전회 본 송유의 「탈연 관통」이나 선의 설 메타 의식으로서의 무의식을 생각하게 되면, 의식이라는 단어의 의미 영역을 확대해 , 의식이 없어져 버리는 곳까지 밀어 나가지 않으면 안되지만, 의식의 의미 영역으로부터 배제하지 않고, 그것을 포함해 의식(,,)을 종합적(,,,)에 구조화(,,,) 덧붙임으로써 처음으로 새로운 동양 철학의 의식론이 기초가 된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물론 이것은 의식의 수직 방향으로부터의 고찰이다. 예를 들면, 선의 설득하는 "무심". 그것은 소극적인 부정론이 아니라 오히려 '유심'의 극한이라고 한다. 의식과 존재의 궁극적 원점. '의식과 본질'을 읽어 진행함에 따라 선의 고찰이 깊어지는 기색을 느끼고 기대하는 곳이 크다.
 또 이츠키씨는 의식의 수평 방향으로부터의 고찰으로서 문화의식의 문제를 다룬다. 문화공동체가 근원적으로는 하나의 공통언어에 뒷받침된 언어공동체라고 한다. 즉 문화텍스트 간의 차이에 따라 인간의식도 다양한 유형학적 차이를 나타내며, 어떠한 각도에서 어느 단위에 인식증명을 주는가가 문화마다 다르다고 이통씨는 설명한다. 예를 들어 이슬람 '원자론' 논쟁을 '본질' 이론의 관점에서 말하고 싶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이슬람 의식의 두드러진 특징은 "신 중심적인 의식이다." "꾸란"에 그려진 알라는 만물의 창조주, 천지의 주재자이며, 그것을 부정하는 이슬람 철학은 없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만약 지난번에 설 송의 '이'체계를 셈적 일신교의 문화구조에 반입하면 매우 위험사상이 될 수 있다고 이츠루 씨는 말한다. 실제로 ‘이’ 체계에 대응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 체계의 사상이 이슬람에 유입되어 왔을 때 ‘원자론’ 논쟁이 일어난 것이다. 즉 다신교의 문화로 자란 그리스의 철학이 이슬람 철학의 형성에 준 문제이다. 문화간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P106-116
Gazary의 우연성 철학과 아벨로이스의 인과율의 존재


 이슬람의 '원자론'이 고대 그리스의 '원자론'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자료를 읽지 않으면 지금 나에게는 이해할 수 없지만, 이츠키 씨에 따르면 보편적 '본질 '의 실재성을 인정할지 여부라는 입장의 대립에 귀착한다고 한다. 즉 이슬람적 의식이 그리스 철학의 '본질' 개념과 어떻게 저촉되는가 하는 것이다. 송유의 ‘이’ 체계는 사물의 하나하나에 보편적 ‘본질’이라는 존재 근거가 있다는 것과 그리스 철학은 받아들여질 것이다. 이 점에서 이슬람에게는 문제가 되었다고 이통씨는 지적한다. 이슬람의 사상가가 그리스 철학을 도입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통해서였다. 그 첫 번째는 인과적 사고 방법이지만, 인과율로 통일된 존재질서로서의 코스모스가 일단 이슬람의 의식에 반입될 때 종교적 세계상에 큰 문제를 던지는 것이다. 즉 인과율적 존재관은 천지의 창조주, 주재자인 전능하신 하나님의 부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인과율의 세계는 영원불변의 우연성을 부정하는 움직임이 없는 세계와 이슬람의 원자론자는 생각하고 하나님의 개입을 허락하지 않는 세계로 비친 것이다. 이슬람의 원자론자는 우연주의의 입장을 취해 “전 존재계는, 서로 날카로운 단절에 의해 분리된 무수의 개체의 일대 집적으로서 표상된다”라고 이통씨는 말한다. 무한한 세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 물론 원자론자라고 불리는 이상, 경험계의 일체의 사물을,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불가시의 미립자로까지 분해한다. 그러나 그 복합체로서 현상하는 모든 경험적 사물들 사이에 공간적·시간적인 인접이라는 것 이외에 연결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통씨의 지적을 생각하면 그리스 철학의 원자론자들과는 자신과 다르다.
 "원자"는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실체"를 의미하며, 그 "무특질성"이란 불변의 성질이나 속성을 가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며, 그것에 의해 구성된다고 생각하는 경험적 사물도 또한 무기적이고 불변의 성질이나 속성을 가지지 않는다고 이슬람의 원자론자는 생각했다고 한다. 일체 존재자의 무작용성, 무력성이라는 사상을 전개하고, 그 위에서의 경험계의 인과율의 무효를 주장했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즉 「본질」부정에 직결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통씨는 거기에 이어지는 기원 12세기의 가자리(원자론을 철학적으로 대성한 사람)과 아벨로이스 대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우선 가자리의 생각을 이통씨의 기술로부터 이해해 보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사물 고유의 일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불을 만지면 종이가 타오른다"는 왜? 그것은 "자연의 관습"이고 "우연한 사건"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왜 그런 관습은 있는가, '하나님의 자의', '굉장히 어라!'로 결정된다고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적인 인과율이라는 것은 없다. 인과율은 없고 관습에 불과하다. 그것을 깨는 것이 기적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존재계는 우연성의 세계이다. 인간으로부터 보면 그렇게 보일 뿐이며, 우연히 지배된 것처럼 보이는 이 세계가 존속가능한 것은 '하나님의 순간적 창조' 덕분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순간적 창조가 끊임없이 연쇄하기 때문에 존재는 존속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가자리는 생각하고 있었다고 이통씨는 설명한다. 가자리의 인과율 부정은 '본질' 부정은 아니었지만, 아베로이스는 '본질' 부정의 아무것도 아니라고 비판한 것이다.
 아벨로이스란 어떤 사람인가. 이츠키 씨에 의하면, 아베로이스는, 가자리의 인과율 부정은 「본질」부정과 직결해, 그것은 「이성적 동물」이라고 정의되는 인간의 간화에 틀림없다고 하는 주장이며, 인간이란, 본래 자신 의 이성(로고스)을 자유롭게 행사하여 사물의 이리(로고스)를 파악하는 '존재'라는 주장이다. 아베로이스는 기성이 심한 사람이었다고 이츠키 씨는 저서 「초월의 말」이라고 말한다. 양쪽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계승하고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왜곡하고 비판하는 가자리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한 사람으로부터 어떻게 다자가 나오는가", 그리고 그 절대일 자가 어떻게 '세계를 창조하는가'라는 이슬람 사상의 핵에 해당하는 부분을 네오플라토니즘의 '유출'론에 요구하는 철학적 해석에 아벨로이스는 비판적이었다고 이츠키 씨는 지적한다.
"원래 어떤 구체적인 사정으로 이슬람 속에 갑자기 '철학'이 생기고, 흥융하고, 이윽고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해 중세기 서양 철학자들을 경탄시킬 정도까지까지 합점했을까" 라고 이통씨는 문제 제시를 하고, 가자리와 아베로이스의 전 세대의 아비센나라는 인물을 생각하지 않으면 이 논쟁의 실상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초월의 말」을 참조해 주세요. 아비센나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이슬람과 철학의 본래적인 관계를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이슬람에게 철학은 전혀 이질적인 세계였다. 그리스의 '지중해적 인간의 사유감각'의 '그리스적 로고스의 철학'과 '인격적 일신교의 종교사상'과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8세기 중반의 이슬람 세계의 통일이라는 어퍼스 아침의 흥융에 따라 그리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심으로 하는 고전 그리스의 철학서가 차례차례로 아랍어 어역되어 갔다. 이슬람 문화의 그리스화의 이 경향은, 제7대의 교황 아마문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다"라고 이통씨는 “ 초월의 말」로 기술한다. 게다가 계속해서, 「830년, 아마문은 바그다드(어퍼스의 수도)에 그리스 학술 연구 센터 「치의 집」을 창설한다. 여기서는 그리스 철학과 과학의 기초적 연구가 주로 원전 번역이라는 형태로 강력하게 추진되었다고 한다. 이는 중국에서 이루어진 불전 한역 상황에 필적할 정도의 ‘놀라운 조직성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이슬람적 종교성의 컨텍스트 내부에서” “그리스적 사유를 독창적인 이슬람적 철학으로 변모시켜 갔다”고 이통씨는 해석한다. 이러한 이슬람 철학 창출의 동향은 10세기 팔러비라는 철학자의 출현으로 현저해진다. 이츠키 씨에 의하면 그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형이상학을 기초로 하여 플라톤의 사상을 거기에 협조하는 형태로 해석하면서 양자의 합일점에 자신의 입장을 정하고 더욱 이슬람의 전통적 종교 사상에 맞는 방향으로 전개시켰다. 그것
 이츠키 씨의 '이슬람 철학'에 따르면, 아비센나는 이슬람의 스콜라 철학을 처음으로 체계화한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는 교육에 열심히 인물로, 아들의 뛰어난 천분을 발견하면 산술, 대수, 기하학을 어린 시기에 습득하고 그의 집에 이스마일파의 사상가가 출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 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파라비의 저서를 통해 그리스 철학을 배우고 나중에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여러 번 읽고 그래도 이해했다는 신경이 쓰이지 않았지만, 아비센나는 파라비의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기본 개념을 읽고 완전히 이해했다. 그의 후반생은 파란 속이었다. 정치적 세력에 휘말려 감옥, 감금, 음모 등으로 가득한 생활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동란의 시기 이후에 그의 철학은 대성했다. 전기적인 일은 이츠키씨의 책에 맡기고, 여기서는 그의 사상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생각해 보자. 물론 그것도 이츠키 씨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지만. 『초월의 말』에서 이츠키 씨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네오플라토니즘적 사유가 전면적으로 혼입되어 있는 것이 제일의 문제라고 한다. 즉 '한사람'으로부터 경험적 존재세계의 계층적 발출을 설명하는 전형적인 네오플라토니즘적 '유출' 철학이었고, 오히려 이슬람적 종교사상의 철학적 재구축을 적극적으로 가능하게 한다 이로써 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가더리에게 있어서는 「유출」론적 세계상은, 신의 절대 자유의지에 의한 세계 창조와 전면적으로 대립하는 것이며, 아벨로이스에 있어서는 아비센나의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왜곡으로서 비친 것이다. 양쪽 모두 아비센나를 비판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전 존재세계에는 시간적인 시작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이슬람의 세계 창조설을 부정하게 된다. '꾸란'에서는 특정 시점의 한 점에서 세계가 존재하기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특정 한 점"을 생각하는 것은, 그 이전의 시간이,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시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것처럼 시간은 운동의 척도로 움직이는 것의 전혀 없다, 즉 신학이 상정하는 세계의 존재 이전의 상태에 있어서는 시간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세계의 창조 이전의 시간이 있다면, 그것은 시간 이전의 시간이라는 것이 되자”. 철학자로부터 하면, 신과 세계 사이에 시간관념을 도입하지 않고 원인론적, 즉 인과관계적 전후관계여야 한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체계에서 하나님은 만물의 제일 동력인으로 자리매김하며,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고 다른 일체의 존재자를 충동시키는 궁극의 원인이며, 아비센나는 하나님을 이 아리스토텔레스적 제일 동력인을 존재현출의 절대원인, 혹은 제1원인으로 하여 다시 파악했다고 이통씨는 해석한다. 또 이와 같이 파악한 신은 시간과는 무관하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그러나 이슬람의 입장에서 하면 어려운 결론을 이끈다. 왜냐하면, 신이 있다, 그 때 세계는 이다. 조금의 어긋남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영원한 존재자라면 세계도 영원한 존재자이다. 그렇다면 '창조'는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가. 무시간적 사태 밖에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존재 그 자체가 절대적 필연성의 결과로서 세계를 존재시킨다. 이처럼 철학자는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무시간화하고 변질하여 '창조'의 사실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가더리는 "창조"의 형태에 고집하는 한 시간 개념의 도입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신은 있었다, 그러나 세계는 아직 없었다"라는 창조 이전의 상태를 말하는 명제에는, A의 유와 B의 무, 이외에 C라는 시간의 제3요소가 불가피하다. 세 번째 요소가 없으면 "존재했다"는 "존재할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가더리의 이 소론에 아베로이스는 찬성한다. 그러나 A를 세계, B를 세계라고 생각하는 곳에 바자리의 생각에 실수가 있다고 아베로이스는 말한다. 하나님은 원래 무시간적 존재이며 시간 안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계 없이 존재했다"나 "하나님은 세계와 함께 존재했다"는 경우에 무시간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아베로이스는 말한다. 그러나 가자리는 시간과는 전혀 순수하게 주관적인 형식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존재의 객관적 사태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한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이에 대해 아베로이스는 “시간적 선행·후행을 하나님과 세계 사이의 관계에 적용할 수 없다”고 그의 책에서 말한다. 즉, 시간은 준 주관적인 직관의 형식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존재론적인 기초를 가지는, 리얼한 것이라고 하는 입장을 취한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창조 이전의 시간」도 객관적 실재성을 가지는 이상, 신학자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창조」를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무시간적 사태로서의 '창조' 이외에 '창조'되는 것을 아벨로이스는 인정할 수 없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일반적으로 일신교에서는 '무로부터의 창조'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존재세계가 창출된다. 유의 출현의 소재가 되어야 하는 것의 절대적 부재를 의미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계의 이슬람 철학은 철저하게 부정한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에서는, 무언가가 생성하는 것은, 반드시 무언가로부터 생성한다고 생각한다. 절대적 무로부터는 생성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창조」가 행해지려면 선행하는 무언가가 없으면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거기서 철학자는 상대적인 무를 생각해, 「질료」라고 부르고 있다. 이 "질료"(소재)를 아벨로이스는 "상대적 무 상태에서의 유", 즉 "잠세태에 있어서의 존재"(존재 가능성)로 규정한다. 따라서 "창조"는 잠세태에서의 유를 현세태에서의 유로 이행되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을 생성이라고 부른다. 「질료」를 현세적 유로 전환시키는 것이 「형상」이라고 이통씨는 아벨로이스의 생각을 요약한다.
이와 같이 「무를 상대적 유로 생각하고 창조를 가능한 존재자(질료)의 현실적 존재자로의 전환이라고 생각한다」아베로이스의 생각은, 「꾸란」적 존재 생성관과 본질적으로 상용할 수 없는 것 이츠이씨는 지적한다.
 아베로이스의 사상은 중세 유대 최고의 철학자 마이모니데스의 라틴어 번역과 통하여 12세기 서구 가톨릭 사상계에 반입되어 큰 파문을 일으켰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그 영향은 크고 가톨릭 교회는 1277년 아벨로이스에 대해 이단 선고를 했다. 사물이 각각 '본질'을 갖고 내재적 로고스의 지시대로 작용한다면 역사적 전개 과정에 하나님의 자유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없어진다는 것으로 이슬람의 원리주의자들로부터 위험 시정된 것이라고 이통씨는 해설한다.
 철학이 일신교의 신학에 융합할 때 생기는 문제를 논해 왔지만, 신학이 신앙으로서의 종교를 마무리하고, 과학적 사고를 촉진해 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생각한다.
어쨌든, 이츠키 씨가 여기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본질」의 유무가 문화적인 틀에 달려, 중대한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또 문화적 패러다임에 있어서의 의식의 본연의 방법에 의해 「본질」의 문제성이 다양하게 변한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의식은 여러가지 방식으로 의식일 수 있다"는 멜로 폰티의 말을 이 장의 시작 부분에 가져온 의미가 이해되는 것이다.


(제10회에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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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츠키 슌히코 연구 “신비 철학” 재독 제10회 고바야시 미노루
2016년 01월 15일 | 이츠키 슌히코 연구

제4장 지성의 여명


호메로스는 하늘에 가깝고 헤시오도스는 땅에 가깝습니다.

소름 끼치는 괴물이 맹위를 휘두른 시대에 막을 내린 빛 넘치는 신들의 지배하는 세계는 지성의 탄생을 말하는 세계이기도 했다. “그리스가 정신적으로는 확실히 한 번 이런 청징의 고층권을 통과한 것을 사람은 잊지 말아야 한다”고 이통은 주장한다. 혼돈으로부터 신들의 세계의 빛을 낳은 것은 이후의, 예를 들어 플라톤 철학에서 볼 수 있는 그리스 문화의 성숙의 한 걸음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헤시오도스라는 시인으로서 사상가의 특징은 현실주의라는 것이다. 세계의 실상을 단순히 그릴 뿐만 아니라 인과적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근본 원인을 설명하기 위해 신화를 선택한다. 이통에 의하면, 절실한 인생 문제에 신화에 의해 사상적 해답을 하는 것은 신화의 메타모르포제라고 한다. 그는 예언자이자 현실의 구제를 명심한다. 그의 『신통기』는 신들의 계보에 있어서의 질서이다. 세계 개조와 생성을 이성적 통일에서 설명하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현실의 세계악을 세계선으로 전성시키는 종교적 윤리적 추축으로서 '정의'의 사상을 둔다. "정의"는 제우스의 의지와 동일하다. '정의'의 사상은 호메로스에 이미 있었다. 애녀로서 새롭게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스어 말씀시의 선구자 헤시오도스

 헤시오도스에는 호메로스에 없는 반성적 사유와 인간 및 인간을 둘러싼 세계에 대해 개인적 판단을 내리려는 지성적 욕구를 겸비하고 있다고 이통은 말한다. 헤시오도스에는 '나의 자각'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극도로 추진해 시화로 개화시킨 것이 기원전 7세기부터 6세기 말의 정정시였다는 의미에서 헤시오도스는 그리스어 정정시인 이들의 선구자였다고 할 수 있다고 한다. 발정시의 태어난 배경에는 현실 비판을 하는 개인적 지성 활동의 시작이 있었지만, 드디어 헤시오도스의 세계관조차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자연신비사조에 의해 초개인주의로 번전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제5장 허망의 신들

 이성적 비판의 눈

 기원전 7세기 초반에는 그리스인은 현저하게 자각적 자의식적이 되고, 즉 이성적 반성기에 들어가 인생의 궁극적 문제에 진지하게 대처하기 시작하게 되었다고 이통은 말한다. 이전 장에서도 언급했듯이, 현실주의적인 헤시오도스는 호메로스 신들의 모순이 많은 전래 신화를 정리하고 질서화하려고 시도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본래 순수한 예술의 신으로 감상되어야 한다고 이통은 주장한다. 그러나, 그 예술의 신으로서 숭배하는 자에게는 완벽의 지미를 공개하는 신들이, 종교로서 전 그리스 민족에게 수용된 곳에, 호메로스의 숙명이 있었다고 이통은 말한다. 따라서 오룽포스의 무질서성은 본질적이다. 통상의 종교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적이고 해방적이며, 애증의 열정, 방관성욕은 관능의 향락에 빠져들기 때문에 그들 신들을 인간과 구별하는 것은 불로불사의 한마디라고 이통은 지적한다. 의인적 성격은 현저한 특징이다. 이런 오룽포스 신들에게 이성적 비판의 눈을 돌리는 것 자체가 엄청난 모순이며, 모순을 지적하면 모든 것을 파괴하지 않는 한 끝나지 않는다. 헤시오도스적 신학은 결과적으로 개악조차 있다.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를 일괄하여 '호메로스 헤시오도스적' 신들이라고 부르고 익숙해지며, 이성적 반성기에 들어간 그리스인에게 어떻게 투영했는지를 생각하고 싶다. 하고 대립한 신종교 사조에 직접 끝을 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통은 말한다. 이오니아의 철학자들의 굉장한 오룽포스 신규탄은 신들의 불합리와 모순에 있었다. 이오니아의 철학자들은 종교를 풀지 못하는 합리주의자가 아니라 깊이 종교를 이해하기 때문에 어리석고 저급한 류포스 신에게 참을 수 없었다고 이통은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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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적 세계의 사물의 「본질」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이츠키 슌히코 『의식과 본질』 해독. 제11회
2012년 09월 24일 | 이츠키 슌히코 연구


연재/제11회

고바야시


煔Ⅶ P139-153
 경험 세계의 사물의 「본질」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통은 “본질”을 매개로 하지 않는 사물의 분절인 것, 즉 무 “본질”적 분절을 형이하적, 형이상적 전체적 측면에서 구조화하여 선적 분절론의 전체적인 구조 안에 정확 에 자리매김해, 「선다운 생명의 약동」을 드러내려고 한다.
 토마스 마톤의 선의 정의, "선은 주체와 개체의 그분이 되는 순수유의 존재론적 의식이며, 그대로의 존재를 직접 무매개성에 있어서, 가만히 포착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기술은, 근본적으로 정적이고 역동적이지 않다고 이츠키 씨는 말한다. 깊은 명상에 가라앉은 의식의 관조성에 궁극한다. 주체로서의 나도 없고,객체로서의 것도 없고, 탈자적 의식의 지평에 현현해 오는 순수 존재, 존재 그 자체, 에 당연히 볼 수 있는 무심의 눈, 마톤의 뇌리에는 프로티노스적 일자 관조의 황홀의 추주적 형상이 떠올랐을지도 모른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선의 경험의 일부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전체가 아닙니다. 이통씨는, 전체적으로 다이나믹한 인식론적·존재론적 과정, 혹은 사건으로서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수행도로서의 선은 견성 체험을 정점으로 삼각형으로 형상화된다. 저변의 경험적 세계, 정점을 향하는 향상도(미오)와 경험적 세계를 향하는 하강도(已悟). 이 과정에서 「본질」은 변모되어 나타나고 있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그는 이 미오→고→已悟라는 형태로 조치한 것을 분절(Ⅰ)→무분절→분절(Ⅱ)이라는 형태로 대체해 본다. 분절(Ⅰ)과 분절(Ⅱ)은 같은 세계이지만, 무분절을 하고 있는지 여부에 따라 내적 양상을 달리한다고 한다. 분절(Ⅰ)은 유「본질」적 분절, 분절(Ⅱ)은 무「본질」적 분절이기 때문이다.




 "이야마의 산수는 고불의 길 현성이 된다. 모두 법위에 살고 궁진의 공덕을 이루게 된다. 하지만 그러므로 현성의 일탈이라. 산의 여러 공덕이 높아지면서 승운의 도덕, 반드시 산보다 능숙하다. 미치모토 선사




 이지마의 산수(지금 눈앞에 하는 산수)는, 경험적 세계에서 보는 산수(분절Ⅱ)와는 같고 동일하지 않다. 이에의 산수는 “모두 법위에 살고”(일정한 존재적 위치를 차지하고) “궁진의 공덕을 이루며(전체 노견적인 일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러므로」, 「朕花미붕의 자기가 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도모토는 말한다. 「이에 지금의 산수」는, 산과 강으로서 분절되어 있으면서 산인 것, 강인 것으로부터 초출해(「본질」에 속박되지 않고) 자유자재로 일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것에 그러자 이츠키 씨는 말한다. 즉 분절(Ⅰ)은 유「본질」적으로 분절된 산이나 강인데 반해, 분절(Ⅱ)은 무「본질」적으로 분절된 산이나 강인 것이다. (괄호 안의 해설은 이통씨에 의한




다 ) (마미) 그렇게 개입처 있음에 이르러에 이르러 (뛰어난 스승을 둘러싸고, 그 지도하에 수행하고, 조금 깨닫는 곳 있어), 산을 보러 꼭 산에 있지 않고, 물 를 보러 꼭 물에 오지 않고.이에 지금, 개의 휴게(큐카츠)의 처득하고(드디어 깨달음이 깊어져, 안심의 경지에 침착할 수 있었던 지금에서는), 여전히(또 제일 처음의 무렵과 똑같이), 산을 보는데 그냥 꼭 산, 물을 보기에 그냥 꼭 물이 되어」(『속전등』22, 『고등회원』17).


 기요하라 유신이 선자로서 자신의 생애를 되돌아보고 세 단계로 나눈다. 첫 단계는 선의 길에 들어가기 전의 시기. 평범한 사람으로서 자기 밖의 세계를 바라본다. 세계는 유 「본질」적으로 분절되어 있다. 두 번째 단계는 참선하여 모든 사물이 '본질'의 유금을 잃는다. "본질" 결정체가 녹아 흘러 나온다. 분절선이 닦아진다. 보는 주체는 거기에 없다. 모두가 무 "본질". 세 번째 단계는 다시 유의한 세계. 무화된 사물이 유화되어 나타난다. 제1단계와 마찬가지로 분절된 세계이다. 그러나 본질은 돌아오지 않는다. 산이나 강에는 본질이 없다. 이와 같은 산수를 「이야마 지금의 산수」라고 하는 것이다. (이통씨의 해석). 본질(Ⅰ)에서는 언어 아라야식에 숨어 있는 '씨앗'이 만들어내는 '본질'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상식적 세계, 존재적 불투명성의 세계이다. 이런 '본질' 결정은 누가, 무엇이 결정하는지가 문제가 된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상식적 세계에서는 본질은 처음부터 각 사물에 갖춰진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조치하는 일신교적 세계에서는 '본질' 결정은 하나님이 한다. 이슬람 철학에서는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했을 때, 우선 「존재」라고 하는 무제한의 리얼리티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본질」에 의해 여러가지로 한정해 갔다고 하는 이론과, 아니면 첫째로 다양한 ‘본질’을 만들어 두고 나중에 거기에 존재성을 주었다는 논란에 헤어져 스코라 철학상의 큰 문제가 되었다고 이츠루 씨는 지적한다. 13세기 이후의 그노시스 철학에서는 하나님 그 자체를 무한한 「존재」리얼리티로 하고, 그것의 여러가지 다른 자기 한정태로서 사물의 존재를 생각하고, 그렇게 한정된 형태로 추상적으로 파악해 가구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슬람도 불교에 가까워진다는 이통씨의 주장하는 곳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괄호 안의 해설은 이통씨에 의한다)
 


 불교는 하나님의 창조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본질'을 갖추고 있다. 그렇다면, 사물의 「본질」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이통씨)


 불교에서는 인간의 꼬인 의식의 작용에 의해 「본질」은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본질」은 가구이며 허구이다. 이러한 표층의식의 기능을 망념이라고 부른다. (이츠키 씨)


 
 「유일한 망념에 따라 차별


 
 있음 존재는 부서지는 분절의 양상을 지우고, 그 본질적인 '일'성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기도 하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분절(Ⅰ)에서 무분별하게 향하는 향상도로의 첫걸음은 경험계의 사물의 모두는 정말 무'본질'이라고 깨달을 때이며, 거기에서는 의식의 어떠한 심층 차원이 타쿠 어떠한 존재 풍경이 현출될 것인가를 이통씨는 고찰해 나가고 싶다고 말한다.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다음 번부터 선의 본격적인 해명에 들어간다. 마음으로 향해야 할 것이다.








다음 번, 제12회에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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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아라야식의 의미적 '씨앗'과 절대 무분절자. 연재 에세 제12회·
이통 슌히코 “의식과 본질” 해독.
2012년 11월 01일 | 이츠키 슌히코 연구
언어 아라야식의 의미적 「종자」와 절대 무분절자


연재 에세이 통 츠시히코 「의식과 본질」 해독
연재/제12회


Ⅶ P153-166


 경험적 세계의 모든 존재자가 무「본질」이라고 알 것이 좌선수행자의 향상도에의 첫걸음이며, 사물의 무「본질」성을 대승불교에서는 「하늘」이라고 부르고, 「본질」에 해당하는 단어는 불교 전반에서 「자성」( 지쇼)라고 부르기 때문에, 무「본질」성의 의미에서의 「하늘」을 「무자성」이라고 한다고 이통씨는 설명한다.
 "경험적 세계에서 표층 의식의 대상이 되는 일체 사물의 실상은 "하늘"이며, 그 공성은 이론적으로는 일단 인연 소생으로 설명된다. 원시 불교의 인기 철학으로 이어지는 매우 역사의 긴 사고 방식이다. 」라고 이통씨는 말한다. 그러나 '무'의 이성적 이해가 아니라 '인간의 실존적 양해이며 의식 그 자체에 있는 근본적 차원 전환을 예상하는 선인간적 양해이다'라고도 말한다. 즉, 선의 실천도를 거쳐 현성하는 「무」인 것이다. 이론으로 이해할 뿐이라면 표층 의식의 영역 밖으로 밟을 수 없다. 표층 의식으로 양해된 것은 이미 유 "본질"적으로 분절되어 버리므로 무분절은 "표층 의식이 완전히 타파 되게 한 곳에 처음 나타나는 심층 의식적 사태"라고 이통 씨는 지적한다 . 무분별이 심층 의식 사태로서 현성하는 것을 선에서는 「무」라고 부른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부정적 표현의 「무심」과, 긍정적 표현의 「마음」이 동의어로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선의 특징이며, 「무심」의 절대성을 설설하면서, 「마음」이라고 하는 긍정적 표현을 사용은 절대 무분절자가 본원적으로 내장하는 존재 에너지에 대한 시사가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또한 이러한 사태의 형이상학적·존재론적 측면을 「진공묘유」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것이 나타내는 실재 타견의 중심축을 「무분절에서 분절(Ⅱ)」로 좋게 고치자고 한다. 절대적 무분절자는, 부단하게 자기분절해 가는 창조적인 「무」이며, 우주에 쏟아지는 생명의 원점, 세계 현출의 태원이라고 이통씨는 말한다.
 도산 료센 807-869년, 중국의 당대의 선승으로 조동종의 개조.
그는 전체적 무분절이 현성하는 의식·존재의 경위를 '정위', 분절(Ⅱ)의 경위를 '편위'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정위는 즉 공계로 하고, 본래, 물건 없고, 편위는 즉 색계로 해 만상의 형태가 있어 「어록」


 「정위」와 「편위」는 동시에 성립한다고 하는 것이 정편설의 눈길인 이통씨는 말한다. 이것을 동산은 농밀한 시적 형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은혼에 눈을 담아 내일에 독수리를 창고 하는 '보경 미카 노래'


 소산칸보의 '고등회원' 6에서는
 독수리 날아 가게공(쇼칸) (대공)은 하얗고, 산 멀어서 색심청
 
하얀색의 전체 속에 하얀 것이 찌그러져, 한 없는 깊은 푸른 퍼짐 속에 깊은 푸른 것이 복재한다. 아무것도 구별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무이고 무분절이지만, 거기에 무언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몸(절대 무분절의 의식)은 허공처럼 유사하고, 상모 있는 것도 없고, 향기롭게 부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그렇다고 해도, 단지 부정적으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오도 보지 못해)라는 황두 선사의 말(『앞릉록』)이 어울리면 이츠키 씨는 말한다.
무분절 안에 분절선이 그려져 있지만 아니다.분절선은 어디에 비틀거리고 있는 것인가.
언어 아라야식적 심층의 안쪽에, 의미적 「종자」로서 숨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언어마다 미묘한 차이가 있다는 것도 지적한다. 산스크리트의 사물(존재분절)과 중국어의 사물(존재분절)은 다르다. 그러나 존재분절은 근원적 무분절자의 자기분절이며, 분절되어 현출해 온 모든 사물의 총체는 같은 하나의 전체적 존재세계를 제시한다고 이통씨는 지적한다.


존재세계를 구성하는 일절의 분절을, 각각의 언어의 아라야식적 의미 「종자」를 통해서, 가능하게 포함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라고 이통씨는 말한다. 무분절에서 분절Ⅱ의 향하도로 체험적으로 각지하는 것은 문절Ⅰ에서 무문절에 이르는 향상도보다 어렵다.
「야마가와 대지를 돌려 자기에게 돌아가는 것은 즉 쉽고, 자기를 돌려 야마가와 대지로 돌아가는 것은 즉 어려워」라고 하는 장사 경사의 말이 의미하는 곳이라고 이통씨는 말한다. 분절을 일단 무화하고 '무'의 경지에 서서 다음에 무화한 사물을 '본질'을 조치하지 않고 경험적 차원으로 재건립해야 하는 것이다. 존재의 무 '본질'적 분절이라고 부른다.
안에 숨겨진 「무」의 존재 에너지는, 경험적 차원에서 사물을 분절해 가지만, 무분절의 경계(의식・존재의 제로・포인트)를 추적해 온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마치 별개로 보이면 이통씨는 지적한다.
절대 무분절자의 자기분절은 인간의 의식에 현성할 뿐이다. 의식의 장에서 코토바의 본원적 의미작용을 통해 분절세계는 현출한다. 분절Ⅱ는 무'의식'에서 일해 오는 의식이기 때문에 언어 아라야식의 의미분절 기능에 있어서도 두 가지 의미분절과는 다르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즉, 분절 Ⅰ은 유 "본질적 분절"이며, 분절 Ⅱ는 모든 존재자가 서로 투명하다. 꽃이 꽃이면서, 꽃으로서 현상하면서, 시코도 꽃인 것이 아니라, 꽃과 같이,이라고 한다. 다른 일체에 대해 스스로를 연 꽃,이라고 이통씨는 말한다.


「물 맑게 해 바닥에 철저히 한다. 물고기의 가는 것 늦게. 』)
물고기는 물고기로, 새는 새로서 분절되면서, 새와 물고기 사이에는 존재융화가 있다, 즉, 분절되고 있는 것의 사태, 이것이 존재의 「진여」라고 불리는 것이라고 이통씨는 말한다. 「진여」란 절대 무분절, 즉 「무」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깊은 의미에서의 「무」라는 그에 의해 「유」인 것이다. 존재분절인 한에 있어서, 서로 상통하고, 투명하고, 무능하다고 이통씨는 해설한다.
분절Ⅱ의 존재 투명성과 개방성은 분절Ⅱ의 무「본질」성에 의한 것이며, 「본질」로 굳어 버리지 않는 한, 분절은 것을 응결시키지 않고, 물건을 융합시키는 것이다 . 화엄철학이 말하는 ‘사물 무리’라는 것이라고 이통씨는 지적한다.


(다음에 제13회에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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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미치모토 「산수경」에 보는 「물의 현성」
2016년 01월 26일 | 이츠키 슌히코 연구
연재 / 열세 번째 장

고바야시 미노루


"물, 물을 본다". 미치모토가 「산수경」에 설하는 「물의 현성」이란.



무「본질」적 분절되는 것이, 어떻게 해서 「본질」을 빼고 성립하는 것인가.

이하, 이통씨의 언설을 쫓아 보자. (P168~180) 

「본질」이란 원래 존재의 한계부이다. 존재계를 하나의 전체로 보고 이것을 현실이라고 부른다. 그 중 한 부분을 다른 곳에서 분리하여 독립적으로 간주합니다. 이것이 "본질"이다. 이렇게 국소적으로 조치된 '본질'을 둘러싸고 하나의 것이 조립된다. 코토바가 지칭하는 것은 이런 식으로 우리의 의식에 현전한다. 이것이 분절 Ⅰ이다. 이러한 경험적 세계를 대승 불교는 망념의 세계, 공화,라고 부른다. 분절Ⅱ를 진정한 현실(真如)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분절 Ⅱ가 분절 Ⅰ로 분배하는 것은 무분절이다. 존재의 궁극적 무분절태는 존재(존재=의식)의 제로 포인트이며, 의식과 존재의 양방향으로 분기하여 전개하는 창조적 활동의 출발점이다. 게다가 무분절자가 최고도의 존재 충실하다.

 '무'로 질만한 존재 에너지가 발산하여 물건을 현출시킨다.

 분절 Ⅱ에서 그 자체를 각지한다. 이 차원의 의식에 있어서, 경험적 세계(현상계)의 사물의 하나하나가 무분절자의 전체를 들고 있는 자기분절인 것이다. 「무」전체가 그대로 꽃이 되어 새가 된다. 국소적인 제한이 아니라 현실 전체가 꽃이고 새이다. 즉 무「본질」적인 것이라고 이통씨는 말한다. 이 존재의 차원전환(분절Ⅰ과 분절Ⅱ의 전환)은 순간적 사건이기 때문에 무분절과 분절은 이중사본이 된다. 즉 「꽃의 곁들임」이다.

 모든 것이 무분절자의 전체적인 드러내기 때문에, 분절된 것은 다른 것을 포함한다.

 「시루베시, 해탈로 해 결박 없음이라고 해도, 제법 주위 세리」(도모토)

 물은 물의 존재적 위치를 차지하고, 산은 산의 존재적 위치를 차지하고, 각각 완전히 분절되고는 있지만, 이 물과 이 산과는 「해탈」했다(무「본질」적) 물과 산이며, 「본질」에서 유래하는 일체의 연결에서 벗어나고 있다. 그런데 분절 Ⅰ에서도 물이 저소쪽으로 흐를 뿐이라고 보는 것은 편향된 견해이다. 지중을 유통하고, 하늘을 유통하고, 위로 흐르고, 아래로 흐르고, 강이 되어, 깊은 연못이 되어, 하늘로 떠오르면 구름이 되고, 내려서는 흐름을 멈추고 어지러워진다. 그러나 이러한 분절Ⅰ의 경지에 머물고 있는 한, 물의 진정한 리얼리티는 잡지 않는다. 분절Ⅱ에서는 무분절자가 전체 에너지를 들고 자기를 물로 분절한다. 

"물이 없는 곳이 있다고 하는 것은, 소승성문교가 된다. 어느 사람은 외도의 사교가 된다. "

'일부 중생, 유유불성'이라는 근본 명제의 존재론적 의미이다. 한 방울의 물 속에도 무량의 불국토가 현성한다고도 한다. 그러나 물속에 불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물 즉 불토인 것이다. 물의 소재는 과거, 현재, 미래의 별을 초월하여 어떤 특정한 세계에도 관계가 없다. 그러나 물은 물로 존재한다. 따라서 "불조의 모든 곳에는 물은 꽤 많다.

「정법 안장」 제29 「산수경」 중에서, 미치모토는 무「본질」적 분절의 자유성을, 그 독자적인 첨예한 논리로 고궁하고 있지만, 「산수경」의 주제 는, 유 「본질」적 분절 때문에 고갈하고 있는 존재를, 무「본질」적 차원으로 옮겨, 본래의 생생하게 약동하는 모습으로 되돌리려 하는 것에 있다. 무분절자가 자유롭게 부단하게 분절해 간다. 우리 인간이 감각기관의 구조와 코토바의 문화적 제약성에 속박되어 행하는 존재분절은 분절양식의 하나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천인의 눈이 되어, 물고기의 눈이 되어, 새롭게 분절 다시 해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을 도모토는 말하고 있다고 이통씨는 해석한다. 그러나 도원의 존재분절론은 더욱 이어져 앞서 꼽은 것과 같은 시점을 포함한 고차의 시점에 나타나는 「수류의 제견 부동」을 넘어, 「물, 물을 보는」곳에 점프 해야 한다고 도모토는 말한다고 이통씨는 설명한다.

「물이 물을 본다」에 이르고, 분절Ⅱ는 유현스러운 깊이를 드러낸다. 물이 물 그 자체의 코토바에서 스스로를 물이라고 한다. 물의 자기 분절. 물이 물 자체를 무제한적으로 분절하는, 이것이 물의 현성이지만, 물이 물 자신을 물로까지 분절한다는 것은 분절하지 않는 것과 같고, 분절하면서 분절하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무「본질」적 존재분절의 성실하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이통씨는, 「본질」부정론에 대립하는 「본질」긍정론의 제1형인, 송유의 「격물 궁리」를 설명하는 김에, 정반대의. 선의 무 '본질' 이론을 다루고 보다 명확하게 하려고 했지만, 그 외 앞으로 이츠키씨가 말하고자 할 긍정론의 제2형에 있어서도 갈등을 명확히 한다는 이유가 있었던 것 그렇다고 한다.

그럼, 그 긍정론의 제2형이란 무엇인가. 이츠키 씨의 말을 아래에 인용하면,

{시적 상상력 혹은 신화형성적 상상력에 의해 심층 의식이 있는 특수한 차원에 나타나는 원형(아키타입)적 형상을 사물의 실재하는 보편적, 「본질」로서 인정하는 일종의 상징주의적 「본질」 론의 입장이다. 그노시스, 샤머니즘, 탄트라, 신비주의 등. 동양 철학의 영역에서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하고 그 확산은 크다. 어디에서나 솟아오르고, 의식의 어두운 심층에 우울하면서, 거기에 이상한 심상의 그림 모양을 그려내는 원형적 「본질」. 그 세계를 무'본질'주의의 선은 전혀 모른다. 혹은 알고 있어도, 전혀 문제로 하지 않는다. }

ⅧP180~

 여기에서 제2형의 긍정론에 들어간다. (제1형의 긍정론은, 송유의 「격물 궁리」였다.)

 인간의 표층의식에 출몰하는 괴물들의 서식지는 심층의식 내이다. 평소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 이 내적 괴물들이 심층 의식 영역에 머무르는 한, 어떤 형태로 일하는 한, 각각의 역할이 있고, 때로는 귀찮은 회화가 되어 감동적인 시가를 낳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이통씨는 지적한다. 티베트·라마교 미술의 소름 끼치는 공간에 떠오르는 이형의 것들, 태장계 만다라의 외연, 외금강부원을 충당하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등 윤회의 중생. 본래의 심층의식의 관상지역을 떠나 표층의식에 출몰하여 일상세계를 뒤집어 돌리게 될 때 인간에게 심각한 실존적, 혹은 정신의학적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고 이통은 해설한다. 심리학에서는, 이마주 형성이야말로, 인간의식의,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설명할 수 없는, 가장 본원적인 기능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여기서 이통씨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마주의 장소는, 심층 의식뿐만 아니라, 표층 의식에도 있고, 이마주의 성격도 일하는 방법도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하는 것이며, 어떻게 다른가, 앞으로의 논점이 된다.



이하, 제14회에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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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샤먼적 실존」 고바야시 치평 논집
2016년 01월 30일 | 이츠키 슌히코 연구
연재/14회

샤먼적 실존. 「본질」실재론 제2형에 대해서.


고바야시 稔


P180~





「본질」실재론 제2형, 원형적 「본질」론에 대해.


인간의 의식은 이마주 생산적이며, 심층 의식뿐만 아니라 표층 의식에 있어서도 지금 이마주로 가득 차 있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심층 의식에서는 경험적 세계의 구체적인 사실에서 자유롭게 일한다는 특성을 나타내지만, 표층 의식에서는 경험적 사실에 밀착한 즉물성을 특징으로 한다고 이통씨는 지적한다. 이통씨에 의하면, 표층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외계의 사물의 감각적 인지를 제1차적인 기능으로 하기 때문에, 이마주의 대부분은 실재하는 사물에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에, 감성적 이마주의 개재를 의식 할 일은 없다고 한다. 눈앞에 나무가 있으면 나무의 의식이 성립한다. 이마쥬의 참여를 눈치채지 못하지만, 나무의 실재하지 않는 장소에서 의식적으로 나무가 현상할 때, 거기에 일하는 나무의 이마주를 눈치채는 것부터, 처음부터 나무의 이마주는 존재하고 있었다고 한다. 외적 사물을 인식하고 의식하는 것이, 근원적으로는 코토바(내적 언어)의 의미 분절 작용에 근거하는 것이며, 내적 언어의 의미 「종자」의 장소를, 언어 아라야식이라는 이름으로 심층 의식에 정위한 것이다. 언어학에서 랭이라고 부르는 언어학적 기호의 체계의 그 밑바닥에, 복잡한 가능한 의미 연쇄의 ​​심층 의식적 공간을 조치하는 것이 정확하다면, 표층 의식적으로, 눈앞에 실재하는 하나의 나무를 의식하는 경우에도 인식 과정에 언어 아라야식에서 솟아오르는 이마주가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려고 이통씨는 말하고, 말의 의미작용과 이마주는 연결되어 있다. 단어의 의미작용이란 이마주의 환기작용에 다름없다고 한다.


 눈앞의 X를 보고 나무로서 의식하는 것은 X의 본연의 자극을 받아 나무라는 하나의 의미 '씨앗'이 언어 아야야식 내에서 발동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즉, 이 의미 「종자」의 현세화가 이마주를 낳는 것이다. 직접 무 매개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의식은 「상상적 투기」(에드워드 케이지)에 충당된다고 할 수 있다고 이츠키 씨는 지적한다. 언어 아라야식 내에서 하나의 '씨앗'이 자체적으로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다른 '씨앗'과 어떤 연관에 서 있는지에 따라 현출하는 이마주도 달라진다. 같은 일본어를 말하는 일본인의 언어 아라야식에서 솟아나는 나무의 이마쥬에는 공통 형상이 있어 일정한 형태가 인정되어 그 형태가 고정될 때 나무의 「본질」이 성립하면 말한다.


이통씨의 「언어 아라야식」의 조치는 이통철학의 기축의 하나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리고 내가 확립하려고 하는 「시학」에 활용할 수 있는 중심 개념일 것이다.


 이통씨의 기술을 다시 인용해 본다.


"어떤 자극을 받아 아라야식적 잠재성에서 깨어난 의미 "씨앗"이 표층의식을 향해 발동하기 시작할 때 반드시 그것은 하나, 혹은 일련의 이마주를 환기하는 것"이다. “개별어(코토바)의 의미작용과 이마주 사이에는 거의 숙명적인 긴밀한 연결이 있다.” “의식과 본질”(p184)


 '어떤 자극을 받고'란 무엇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경험이 언어 아라야식의 심층 의식 내에 축적되어 '몰래 발동' 의미 '씨앗'이 현세화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어떠한 신호를 받아, 이마주를 형성할 때, 언어(랭)의 일정한 형태를 수반하여 현세화한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이통씨가 「본질」실재론의 제2형의 존재의 유 「본질」적 분절에 대해서, 여기서 설명하고자 하고 있다. 유 「본질」적 분절이라고 해도, 모두는 심층 의식적 사태이기 때문에, 기초가 되는 이마쥬의 성립 영역이나 이마쥬의 성질도 다양하다고 이통씨는 강조한다.


더 읽어 보자.


우리의 일상적 의식은 일상적으로 일하는 한 근원적 이머지성이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다. 거울에 찍힌 사물을 그대로 보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거울을 깨고'라는 선의 말을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표층 의식 내에서 작용하는 이마주의 즉물성, 사물 밀착성이 강고하기 때문이라고 이통씨는 말한다. 하지만 일상적 의식 속에서 갑자기 현실적 사물과의 결합을 벗어나 현실성에서 유리한 이마주가 어디서나 나타나 의식 일면을 기묘한 색으로 물들어 버리는 일이 있다고 이통씨 네. "어떤 자극으로" 의식이 흥분하거나 이완하거나 했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난다. 이런 이마주에는 현실적인 뒷받침이 없기 때문에 무상한 상태로 끌어들인다. 이통씨에 의하면, 동양 사상의 정신적 전통에서는, 샤마니즘이 대표적인 예로서, 이러한 이마주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표층 의식의 입장에서는 망상이나 환상으로 볼 수 있어도, 심층 의식의 영역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실이라고 이통씨는 지적한다.


상식적 인간의 일상 의식에 사물성에서 유리한 이마쥬가 모습을 나타내면 이상 현상이나 병적 현상이 되지만, 샤만이나 탄트라의 달인과 같이, 심층 의식의 초현실적 차원을 방법적으로 개척한 사람들만이 이런 종류의 이마주를 활용할 수 있는 수술을 획득하고 있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표층 의식에서 심층 의식으로의 추이를 가장 원초적, 가장 명료한 형태로 나타내는 것은 샤머니즘이라고 이통씨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샤마니즘은 일상적 의식과 샤만적 의식이 희연하게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이츠루씨는 고대 중국의 샤마니즘 문학의 최고봉인 '초사'를 고찰하게 된다. 함께 추적하자.


이통씨는 『초사』에 나타나는 샤먼적 실존에는 자아의식의 3개의 층, 혹은 차원을 달리하는 3개의 단계로 이루어지는 의식 구조체가 생각된다고 한다.


첫째, 경험적 자아를 중심으로 하는 일상적 의식.


둘째, 「자기신화」의 과정에서 점차 열려가는 탈현실적 주체성의 의식.


셋째, 순연한 샤먼적 이마주 공간에 놀아주는 주체성의 의식.


『초사』의 주인공인 굴원은 뛰어난 인물이지만, 한 단계에서는 보통의식을 가진 보통 사람이다. 그러나 비범한 자질을 갖기 때문에 사회에서 소외된 인물이라는 자각이 있다. 스스로를 비극적 실재로 의식한다.


 


……(약)


 세상 모두 탁


혼자 깨끗함


모두가 취한


혼자서 깨우다


……(약)


어부 쾅


성인은 물건에 응집하지 않고


능히 세상에 추이하다


세인 모두 탁하면


어쩐지 그 진흙을 탁하고 그 파도를 튀기지


……(약)





굴원 쾅


吾之 듣기


새로 낀 사람은 반드시 왕관을 연주합니다.


새로 목욕하는 사람은 반드시 옷을 흔든다.


이즈 군이 능숙하게 몸을 검찰하기 때문에


물건의 문장을 받지 마라.





닝로 쇼류에 가서


강어의 배에 묻혀도


이즈 군이 능숙한 硈硈의 흰색을 따라


세속의 먼지를 蒙らやや





어부 관자로 웃음


 (카이)를 고르고 떠나십시오.


노노 노래하고 쾅


浄浪의 물 맑은 눈꺼풀


그래서 고가 흠을 헹구고


浄浪의 水濁らば


그래서 고가 다리를 헹구고


마침내 떠나고 돌아온 흥(모두)에게 말하지 않고





 전체를 인용하는 것은 피하지만, 세속에 타협을 허락하지 않는 굴원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어부는 말할 수 없는 특이한 자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회에서 소외되고 있다고는 해도 보통의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살아있는 세계도 경험적 세계이다. 시인이라고는 해도 세속의 흔적을 따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최후는 도덕의 문제가 되어, 사실로부터 유리한 이마주는 문제시되고 있지 않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의식의 3단계로 생각한다면, 우선 제1단은, 경험적 자아를 중심으로 하는 일상적 의식, 제2단에서는 일상적 인간의 주체로부터 샤만적 주체성으로 변모해, 「거룩한 것」으로 가까워짐에 따라 성화되어 가는 의식의 주체적 변모가 그려져 있다고 이통씨는 지적한다. 그 신부림 상태가 계속되는 한은 하나님 자신이 샤먼의 입을 빌려 제1인칭으로 ​​말하지만, 하나님이 떠난 후에는 샤먼의 인간의 1인칭으로 ​​바뀐다. 즉 샤먼과 신은 2개의 독립된 페르소나이므로, 종종 신과 사람의 '정사'까지 발전하기도 한다고 이통씨는 지적한다.


 느슨한 하나님이 떠난 직후의 샤먼, 하나님 매달리기 직전의 샨에게는 비정상적인 흥분 상태가 되어, 경험의 주체는 신적 주체이지만, 직전과 직후는 경험의 주체는 인간적 주체라고 이통씨는 풀린다. 인간적 주체가 사는 곳은 당연히 인간적 세계이다. 의식의 두 번째 단계에서도 익숙한 일상 세계는 눈에 비친다. 따라서 제2단계의 의식에서는 산이나 나무나 물은 명상하기 어려운 유원한 양상을 띤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신현전 전후 중반 신화된 의식상태에서는 눈앞의 자연적 사물의 현실에 촉발되어 현실에 있으면서 이차원적으로 유리한 이마주, 즉 심층에서 나타난 '상상적' 이마주로 그려져 심상 풍경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경험적 존재와는 별차원으로 활동하는 이마주가 나타날 것이라고 이통씨는 설명한다.





「구가」「쇼부인」의 시작 부분의 일설을 이츠키 씨는 인용한다


 테이코, 호쿠시요 (하쿠시요)


 눈, 眇眇 (비비)로 예 (우)를 괴롭히다


 嫋嫋嫋 (조수 조, 가을 풍)


 동정, 파도 서서 나뭇잎 아래 (치)





(이통씨의 번역)


쇼부인이란 쇼수의 여신, 여기서는 「제자」천제의 아들이라고 한다. 쇼부인은 그리워하는 샤먼이 마련한 제당으로 내려가지 않고 북쪽의 나기사에 내린다. 먼 그쪽으로 빛나는 여신의 모습. '신인합일'의 기대가 벗어나 샤먼은 인간적 실존의 차원에 남는다. 그의 마음은 어두운 슬픔에 빠진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인간의 눈이지만, 의식은 이미 샤먼적 탈자 상태에 있다. 그런 그의 눈에 비치는 자연은 위의 시구의 마지막 두 줄이 그것이다. 이것은 보통 자연 묘사가 아니다. 중반 '신화'된 샤만시인의 의식에 비친 심상 풍경이다.


 이처럼 보이고 말로 바뀐 풍경 묘사가 시의 말이 되어 있지만, 포에지(라는 신과 아나로지컬한 것)가 시인의 마음에 내려 탈자적 상태를 만들어 말( 표현)을 창출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나에게는 생각되지만, 그것은 어쨌든, 이통씨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외계에 존재적 근거를 가지는 보통의 사물도, 경험적 현실에 뒷받침되지 않는 신들과 요귀 등과 같은 자격으로 등장하는 것이며, 샤먼과는 무관한 일반인으로부터 보면 환상 풍경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샤먼의 의식은 경험적 세계의 현실이 이 두 번째 단계에서는 연결되어 있다. 샤먼의 눈에 보이는 것에 의해, 경험적 사물은 「상상적」이마주로 변모해, 이차원의 이마주 공간으로 옮겨진다고 이통씨는 지적한다.


 샤먼 자아 의식의 세 번째 단계는 순수한 샤먼 이머지 공간에서 놀고있는 주체성의 의식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처음부터 「상상적」이머주이므로 이마주화의 과정은 필요가 없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경험적 세계에서 보는 사물은 모두 있다. 산은, 백신이 살고 산상에는 현지라고 불리는 신원을 숨기는 崑崙山이며, 와카기라고 불리는, 높이 수천장, 크기 2천여 둘레의 신목인 와카기(자쿠기)라고 불리는 수목 도 있다고 하는 경험적 세계의 사물의 질료성의 무게를 느끼게 하지 않는 것 뿐이라고 이통씨는 말한다. 즉 '상상적' 이마주의 독자적인 방식으로 존재하고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진짜 샤먼은 '인간의 영혼에 걸쳐서는 ​​위대한 전문가'(에리어 데)이며, 몸을 빠져나온 '영혼'이 여행하는 이마주 나라의 지리를 알고 있다. 이 '먼 나라'를 향해 영혼을 내보낸다. 이 일시적으로라도 육체를 탈출한 그의 '영혼'이야말로 샤먼적 의식 주체라고 이통씨는 지적한다.


 '원유'인 하루카 이마쥬 공간의 여로는 거기서의 체험을 말로 옮겨 샤만적 서사시가 된다고 이츠루 씨는 말한다. 첫 단계에서는 샤먼은 사람들의 불의를 분개하고 우리 몸의 불운에 눈물을 주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 그가 여기에서는 신화적 세계의 영웅이 되어 등장한다.


그러나 순수한 이마주 세계의 세계는 샤머니즘뿐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서양의 그노시스, 동양의 탄트라, 밀교의 만다라 공간이 있지만, 만다라의 이마주 공간은, 밀교적 수행 주체의 탈자적 의식인 점이, 제3단계의 의식 상황에 부합한다고 이통씨는 지적한다. 직업적인 샤먼은 자신의 이마주 체험의 철학적 의미를 묻지 않고, 초현실적 세계에 '영혼을 놀게 한다'뿐이지만, '영혼의 놀이'로서의 이마주 체험은 시적 창조의 원천에서 있어 자연스럽게 전개되어 신화가 된다. 이 신화야말로 샤먼적 체험의 언어적 전개의 장소라고 이통씨는 말한다. 이러한 초현실적 비전에 철학적 의의를 인정 신화를 상징적 우화로 바꾸고 존재론적, 형이상학적 사상을 짜내기 위해서는 제3단계의 샤먼 의식을 넘어 철학적 지성의 제 이차적 조작이 필요하다고 이통씨는 지적한다. 예로서, 장자의 철학이 있다. 샤마니즘의 지반에서 출발해 샤마니즘을 넘은 사람의 사상이라고 이통씨는 주장한다. 또 장주라고 하는 사상가의 「무무한 유(무카이)의 마을」의 거주자는 원초적 샤마니즘을 초탈하고 있다고 이통씨는 좋은 의 넓이 수천리, 수천의 구름의 날개 날개에 3천리의 물을 쏘고, 9만리의 높이에 올라 천지로 향하는 펭의 우주비유는, 「이소」 샤먼적 비행의 끊임없이 모르는 철학적 상징성이 있다고 이통씨는 주장한다.


중국을 거쳐 일본에 도착한 밀교적 불교 역시 '상상적' 이마주 체험을 바탕으로 웅대한 철학적 세계관으로 발전시킨 정신적 전통이라고 이통씨는 말한다. 예를 들면 공해, 금태 양부 만다라는 의식과 존재의 심층에 현성하는 '상상적' 이머지 공간의 구조적 제시이며, 이와 같이 이마주 공간으로서 자기현현하는 존재 리얼리티 그 자체의 형이상학적 비밀을 사상가 공해는 탐색하려고 했다고 이통씨는 해석하고 있다. 또한 유대교 신비주의, 캬바라나 이슬람 사상의 스프라와르디계의 조명철학 등이 있다고 그는 지적한다.


샤마니즘의 이마주 체험은, 일반적으로 시작에 행해지는 산발적으로 나타나는 이마주를 현실적 세계의 일부로 하는 사고방식과는 달리, 현실 세계 그 자체의 전체가, 하나의 혼잡한 세계 이마주적 세계로서 현현하는 것을 이통씨는 주장한다. 즉 이마주 체험은 일종의 실제 체험이라는 것이다. 의식도 세계도 이마주 공간으로 전성해 버리는 것이라고 이통씨는 말한다. 만약 경험적 사물의 실재성 이상의 실재성을 인정한다면 독특한 존재론이 태어날 것이라고 이통씨는 말한다. 스프라와르디는 "형상적 유사의 세계"라고 불렀다고 한다. "상상적"(이마지널)인 존재 차원에서는, 경험적 사물의 이마주, 혹은 유사하다는 의미에서, 우리의 일상적 세계에서 견문해, 행위한 경험이 기반에 있는 것이 나에게는 매우 흥미롭다 느껴진다. 왜냐하면 시인이 상상의 세계를 표출할 때 경험적 현실의 세계가 그려지지 않고 관념적으로 달리고 있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경험적 세계의 사건을 주제로 한 시는, 독자의 공감이 용이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지만, 시가 철학적 사유로부터도 고찰하는 것에 필적하는 것으로 생각된다면, 이츠키씨의 논술은 시의 실제 체험에서 매우 시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신화에서 상징적 우화로 변성시키고, 거기에 존재론적, 형이상학적 사상을 포함시키기 위해서는 철학적 지성을 필요로 한다는 이통씨의 지적은 중요하다. 이슬람의 신비가 스프라와르디는 '상상적' 이마주를 경험계의 사물과 닮았지만, 물질성이 전혀 부족하기 때문에, 피지컬한 대담한 사물이 아니라, 그들과는 비슷하게 존재하는 존재자 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이통씨는 풀린다. 이러한 '닮은 모습'(아슈바하)을 '공중을 떠오르는 은유'라고 부른다고 한다. 언어 표현상의 은유가 아니라 존재 차원의 이동에 의해, 물질적, 질료적인 경험계의 존재 차원으로부터, 비질료적인 존재 차원으로 "운송되어" 거기서 이차원적으로, "공중에 떠 '있는 존재자라고 이츠키 씨는 풀린다. 그의 철학적 신념에서는 경험적 사물이 경험 세계에서 '비유'라고 부르는 것의 비유이며, 경험적 세계에 실재하는 사물보다 훨씬 더 존재성이 짙은 것으로 나타난다고 이통 씨는 지적한다. 그 외, 샤머니즘, 그노시스, 밀교 등의 정신적 전통을 대표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현실 세계의 사물이야말로 그림자와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이통씨는 말한다. 이 「닮은 모습」 「히유」라고 명명한 것은 「이마쥬」라고 말해 온 것이지만, 스프라와르디에게 있어서는 선명한 실재라고 이츠키씨는 말한다. 게다가 이츠키 씨는, 그들은 질료적 사물의 「조대」성에 대해, 「미세」라고 이슬람 철학에서는 표현한다. 인도 철학의 산키야 철학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상상적」이마주는 심층의식적 이마주이며, 사물의 「원형」(아키타입)을 심층의식에 형상화로서 드러내게 한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원형'의 생기와 활동이 심층 의식적 사건인 것은 융 분석 심리로 이론적으로도 실험적으로도 명시되고 있다고 이통씨는 지적해, 다음의 설명으로 상세하게 해설해 나간다 .





(다음에 제15회에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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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원형」이마주와 언어 아라야식
2016년 01월 21일 | 이츠키 슌히코 연구
연재/열다섯 번째 장
「원형」이마주를 낳는 언어 아라야식 영역과 중간지대(M)


 고바야시 稔




 샤먼의 초현실적 비전에 철학적 의의를 인정하고, 샤먼적 신화를 변성시키고 거기에 존재론적, 형이상학적 사상을 포함시켜 가기 위해서는 제3단계의 샤먼 의식을 더욱 넘은 철학적 지성 의 2차적 조작이 필요하다. 고대 중국의 사상계에서는 장자의 철학이 샤마니즘의 지반에서 출발하여 샤마니즘을 넘은 사람의 사상이라고 이츠키 씨는 말한다. (P199)

 "상상적"이머지는 심층 의식적 이마주이며, "본질"론의 연결에서는 사물의 "원형"(아키 타입)을 형상적으로 제시하는 곳에 성립, 즉, "원형"의 형상화를 통해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이통씨는 지적한다.

이번은 『의식과 본질』의 Ⅸ(P205)에서 읽어 풀어 가자.

 「원형」이란 인간의 실존에 깊게 먹어들인 생생한 보편자라고 이통씨는 말한다. 필립 윌라이트는 괴테의 '근원 현상에 묶여 진정한 시적 직관만이 세계 내 사물을 그 '원형'에서 파악하는 '구상적 보편자'라고 불렀다고 한다. 개별적으로 사물을 개별 사물로서가 아니라 '원형'으로 파악한다. 풀다. 칼 융은 그의 '집단적 무의식'이 '원형'으로 규정된 구조를 가진다고 한다고 한다는 것을 이통씨는 지적하고 '원형'이란 집단 '적 무의식' 또는 '문화적 무의식'에 깊이 숨어 있는 일정한 방향성을 가진 심층의식적 잠재 에너지라고 한다.

 「원형」이마주는 인간의 존재 경험의 방향을 미리 규정하는 것(원초적)이며, 사물의 「본질」이어도, 어떤 이마주로서 나타나는지는 누구에게도 모르는 것이고, 이런 '원형' 이마주적 '본질'과 플라톤의 아이디어적 '본질'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이통씨는 말한다. 문화마다 현현형태가 다른 것은 물론, 동일문화 내에서도 복수의 이마주군이 태어나지만, 그래도 하나의 「원형」방향성을 감득할 수 있고, 「본질」을 상징적으로 제시하면 이통 씨는 풀 것이다. 고대 중국의 '이'의 전체 구조는 전지 사이에 퍼지는 존재세계의 '원형'적 진상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하여 제시하는 하나의 거대한 이마주적 기호 체계라고 이통은 읽는다 . 그리고 성인의 심층의식에 비추어지는 존재세계는 일체 사물과 사태의 '원형'적 형상의 만다라로 현성한다고 한다.

이통씨는 심층 의식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P214). 최하의 한점은 의식의 제로 포인트이며, 그 위의 층이 무의식. 심층 의식 영역은 전체가 무의식층이지만, 의식화를 향하는 단계를 고려하여, 이 영역을 무의식의 영역으로 한다. 게다가 의식화에 점차 향하는 태동을 보이는 영역이다. 여기가 언어 아라야식의 영역이라고 이통씨는 말한다. 의미적 "종자"(비야)가 잠세성에 숨어 있는 장소이다. 유식철학에서 이통씨가 차정한 것이다. 융의, 집단적 무의식의 영역이며 「원형」성립의 장소라고 한다. 그 위의 영역에 「상상적」이마주가 생기고 신화와 시의 상징화 작용의 기능을 발휘하는 영역이다. 그러나 이츠키 씨에 의하면, 이 영역은 상징화뿐만 아니라 다른 기능도 있다고 한다. 티벳 밀교 전문가라는 라우프의 분석에서는 심층 의식의 이마주 현상을 세 가지 프로세스로 풀고 있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①「원형」→②「근원형상」→③ 심볼로 한다.

 무의식의 영역에 성립하는 「원형」은, 무의식과 경험적 의식의 중간지대에서 「근원형상」, 즉, 「상상적」혹은 「원형」적 이머지가 되어 형상화하는 영역이며, 「 "원형"적 이머지가 표층 의식의 영역에 나와 기호로 결정한 것이 "심볼"이다. 즉, '심볼'은 본래 강렬한 에너지가 충만한 심층의식영내에서 생기지만, 여기서 '상상적'에너지를 유지한 채 '심볼'은 경험적 세계로 온다. 이 에너지의 조사를 받으면 평범하게 보였던 일상적 사물이 곧 상징성을 띠게 된다. 꽃은 더 이상 꽃이 아니다. 이통씨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원형」이마쥬의 제2차적 기능이 아니고, 「원형」이마쥬의 그 자체의 제1차적 기능이라고 한다.

 무의식의 영역 바로 위에 있는 것이 언어 아라야식의 영역인 것은 이미 언급했지만, 거기에서는 여러가지 이마주를 만들어내고 있지만, 그 대부분은 경험계에 실재하는 사물의 이마주라고 이통 씨는 말한다. 이들 외계에 대응물을 가진 이마주는 경험계의 현실 사태에 자극을 받아 발생하며 그대로 표층의식으로 상승하여 거기서 사물의 지각적 인지를 유발한다. 그러나 '원형' 이마주는 외계에 직접 대응물을 갖지 않는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예를 들어, 신화의 주인공의 영웅의 이마주나 불교의 이마주 공간에 피는 꽃은 현실의 꽃과 '닮았다'가 현실의 꽃의 직접적인 이마주가 아니다. 따라서 '원형' 이마주는 표층의식까지 도달하지 않고 언어 아라야식과 표층의식의 중간지대에 머무른다. 여기가 「원형」이마쥬의 본래의 장소라고 이통씨는 설명한다. 선에 있어서는, 여기에 나타나는 이상한 것은 허망으로 근거가 없는 것으로 한다. 선종 제5조, 히로노부(601-674)는 좌선하는 초보자를 향해 갔다는 좌선하고 있다고 명상 상태에 있는 너의 눈앞에, 있을 때는 거대한 빛이 쇳연하게 빛나면서 너 의 신체에서 발출, 어떤 때는 불가가 육신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또 많은 신기한 것이 맹렬한 스피드로 서로 변융하는 유양이 보이지만, 조용히 마음을 유지해, 결코 주의를 기울여 하지 말아라, 그들은 모두 허망하고 무근거이므로, 너 자신의 망념의 일로 보일 뿐이니까. (『수심요론』)

 샤마니즘이나 밀교에서는 이런 이마주에 의의를 인정한다는 정반대의 입장이라고 이통씨는 말한다. 그러면 그들은 언어 아라야식과 표층의식의 중간지대, 의식의 M영역에서 완수하는 역할이란 무엇인가를, 이통씨는 다음 장, (P220)에서 고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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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에세 ⑯ 존재의 심층 의식적 언어 철학 이론 그 중 이통 슌히코 『의식과 본질』 해독. 고바야시 稔
2013년 01월 11일 | 이츠키 슌히코 연구
연재/제16회
존재의 심층 의식적 언어 철학 이론 1


고바야시 稔




 전회(연재 제15회)에서는, 이즈쓰씨가 고안한 심층 의식 영역의 구조 모델을 추적해 보았지만, 여기에서 복습해 한층 더 이즈쓰씨의 설명을 읽어 진행해 보자.

 심층 의식 영역 전체를 원통과 그 바닥에 거꾸로 붙인 원뿔로 나타낸다. 콘의 정점은 의식의 영점이다. 거꾸로 된 원뿔의 바닥면과 접하는 그 위에있는 원통의 맨 아래 층은 언어 아라야식의 영역입니다. 불교의 유식철학에서 이통씨가 차용해 설명하는 영역이다. 의미적 「종자」(비야)가 「그것 특유의 잠세성에 있어서 은재하는 장소」이며 융이 말하는 집단적 무의식 혹은 문화적 무의식의 영역에 해당해 「원형」성립의 장소라면 이통 씨는 해석한다. 이 언어 아라야식의 층 위에 "상상적인 이마주의 장소"가 있다. 게다가 표층 의식의 영역이기 때문에, 언어 아라야식 영역과 표층 의식의 영역의 사이에 있기 때문에, 이즈쓰씨는 중간적 의식 공간을 M 영역, 혹은 M지대라고 부르고 있다.

 언어 아라야식 영역의 원형이 M지대에 있어서, 근원적 형상, 즉 「원형」이마주가 되어 표층 의식 영역(경험적 세계)에 나와 심볼이 된다. M지대는 강렬한 에너지가 충만한 내부공간으로 '창조적' 에너지를 유지한 채 심볼은 경험적 세계로 온다. 이 에너지의 조사를 받으면 평범한 일상적 사물이 곧 상징성을 띠고 지금까지 본 물질적 사물이 단순한 물질적 사물이 아니게 된다고 이즈쓰씨는 말한다. 그러나 이즈쓰씨는, 이러한 「원형」이마쥬의 기능은 2차적인 것이며, 언어 아라야식이 만들어내는 이마주는 경험계에 실재하는 사물의 이마주가 압도적으로 많지만, 본래, 「 '원형' 이마주는 외계에 직접 대응물이 없다. 즉, 표층 의식에 오르지 않는다. 우연히 표층 의식에 나타나도 환상이 되어 버린다고 한다.

 이런 '원형' 이마주가 본래의 장소인 M지대에서 완수하는 역할이란 어떤 것인지를 X(P220~)에서 이즈쓰씨는 고찰하고 있다. 이번에는 거기를 읽어 가고 싶다.

 

심층 의식적 세계상 

「원형」의 이마쥬의 「상상적」에너지가 표층 의식에까지 올라갈 때, 표층 의식의 차원에 있어서의 사물이 이상한 광채를 띠고 상징화되지만, 세계의 사물의 모든 것을, 즉 경험 적 현실 전체를 상징화하는 것이 아닌 것에 이통씨는 주의를 환기한다. 부분적, 국소적이며 존재세계를 똑같이 하나의 상징적 체계로 변모시키는 일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M영역에서는 하나의 상징체계를 이루고 있으며, 현실의 존재세계가 낯선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경험적 세계와 같은 사물이 있어도 존재분절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존재시각을 전혀 다르게 하고 성질도 기능도 다르기 때문에 그것이 심층의식적 세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존재분절의 기초단위가 「원형」이마주라고 이즈쓰씨는 말한다. 표층의식과 무의식의 중간지대인 심층의식이며, 존재론적에는 물질적, 물리적적 리얼리티와 순수정신적 리얼리티의 중간에 위치한 제3의 리얼리티라고 한다. 언어 아라야식에 숨어있는 의미 「종자」의 잠재 에너지의 발동에 의해, 무분별한 존재 리얼리티가 분절되어 사물이나 사건이 현출한다. 그렇게 일어나는 이마주 중 즉별성을 가지는 것과 비즉물성을 가지는 것으로 나뉘어 전자는 표층의식에 나와 사물의 유 "본질"적인지에 참여하고 후자는 경험적 사실 성에 뒷받침되지 않는 이마주로 M영역에 본래의 장소를 찾아내게 된다고 이즈쓰씨는 설명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눈앞의 사물을 이마주 빼고 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후자의 이마주가 표층 의식에 나타났을 때 꿈 투성이로서 처리해 버리지만, M 영역의 존재 구조를, 만다라와 같은 심층 의식적 회화를 봐도 표층의식적으로 보고 있는 것만으로 심층의식적으로 감응하는 일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심층의식적 사태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후자에게 비중을 두고 있다. 이론적 전개를 해 언어 철학을 낳을 가능성이 있다고 이즈쓰씨는 말한다. 그것은 일반 언어 철학이 아니라 심층 의식적 언어 철학이라고 한다. 공해의 아자 진언이나 이슬람의 문자 신비주의 등이다.



"천사학"angelologie

 힐만(미국의 융파심리학자)이 '코토바의 놀라운 천사학'이라는 말을 사용해 심층의식적 언어철학을 발전시켰다. 코르반 (프랑스의 이란 학자)의 영향하에 서술했다. 힐만에 의하면, 코토바 되는 것에는 「천사적 측면」이 있어, 보통 일반의 의미 외에 이차원적 이마주를 환기하는 의미가 있다. 이 이차원적 가능성을 말의 「천사의 측면」이라고 명명했다.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 언어 철학을 전개시킨 사상가가 동양에도 있다고 이즈쓰씨는 말한다. 샤마니즘이 하나의 예이지만 널리 주문, 기도, 달라니, 만트라 등으로 발음된 말에 영력을 상정하는 곳은 어디에나 언어주술은 살아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유대인이 하느님의 진정한 이름인 '야하베'를 입으로 삼는 것을 피하는 이유는 발음된 말에 촉구되고 언어 아라야식에서 떠오르는 '상상적' 이머지가 의식의 M영역에 서서 , 사람을 위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코토바의 주술적 힘을, 심층의식을 표층의식과 혼동해, M영역에 출현하는 「상상적」이머지를, 즉시 외계의 존재 현상과 동일시해 버리는 곳에 문제가 있다고 이즈쓰씨 풀다. 그러나 동일시해 버리는 것이야말로, 코토바의 주술적 특징인 것이다. 이성적이라 할 근대인에게는 언어주술언어는 미개인적 현상으로밖에 비치지 않는다. 동양 사상의 전통 속에서 그것을 '원형'적 '본질' 관상에 근거한 언어 철학까지 발전시킨 사상가들에게는 위의 두 가지 존재 차원의 혼동은 없다고 이즈쓰씨는 말한다. 즉, 언어주술이란, 1차적으로는, 심층 언어 공간에의 「상상적」이마주, 즉 「원형」이마쥬의 환기이며, 제2차적으로는, 표층 의식의 인식 기능에 작용해 , 표층 의식의 세계상을 「원형」이마주적으로 변모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즈쓰씨는 말한다.

 유대 신비주의 커버러의 "세피로트"라고 불리는 것은 근원적 이머지의 구조체계를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내부에 존재하는 존재구조의 형상화이며, 경험적 세계의 존재구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고, 경험적 세계와의 연결은 경험적 사물의 '원형'적 '본질'을 형상적으로 제시하는 것에 있다고 이즈쓰씨는 말한다. 즉 "세피로트"는 상징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유무중도의 실재」를 설득하는 이븐 아라비의, 그것을 신의 자의식의 내 부분절로 하는 입장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공해는 코토바의 심층 의식적 기능을, 주술적 측면과 존재론적 측면을 동시에 주목해, 마침내 「진언」의 철학에 이르고 심층 의식적 언어 철학을 확립한 것이며, 그들은 대근에서는 동일합니다 있다고 이즈쓰씨는 파악하고 있다.

 이츠키 씨는 '세피로트'나 만다라의 '원형' 이머주적 구성을 말하기 전에 P220부터 이마주의 생체 자체를 둘러싼 심층 의식적 언어 이론을 더욱 자세히 말하게 된다.



 다음 번, 제17회에서는 본서의 산장을 맞이한다.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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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에세 ⑰ 존재의 심층 의식적 언어 철학 이론 그 둘, 이통 슌히코 『의식과 본질』 해독. 고바야시 稔
2013년 02월 23일 | 이츠키 슌히코 연구

연재/제17회

"시간을 넘은 곳에서 시간의 흐름을 따라 일어나는 부단한 세계 창조."
심층 의식적 언어 철학 이론 2


고바야시 稔

 「원형」이마쥬의 「상상적」에너지가 표층의식에 도착했을 때, 상징 기능이 작동하지만 경험적 현실 전체를 똑같이 그대로 상징화하는 것은 아니다는 이즈쓰씨의 지적을 전회에서 말했지만, 한편 , M영역(중간지대)에서는 전 존재세계가 하나의 상징체계를 구현화한다. 경험적 세계에서는 유 「본질」적 분절에 의해서 인식 밖에 맞지 않는 무수한 사물일지라도, 존재분절의 뿌리는 더 깊고, 의식이 깊은 곳에서 일어나고 있어, 표층 의식으로 보는 사물의 분절은, 심층에서의 제1차적 분절의 결과의 제2차적 전개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즈쓰씨는 말한다.

 공해는 그러한 존재분절의 과정을 거꾸로 추적해 가고, 의식의 본원에 도착한 곳을 그의 저작 '십주심론'에서는 '자심의 원저'(법신)라고 부르며, 다이치 여래 로 형상화한다. 따라서 공해에 있어서는 존재계의 일체가 궁극적이고 근원적으로는 대일여래의 코토바라고 이츠키 씨는 설명한다.



「이름의 근본은 법신을 근원으로 한다. 그보다 유출해, 잠시 돌려 세류포의 말이 될 뿐」 공해 「성자 실상의」



 이츠키 씨에 의하면, 대일 여래의 코토바로서 전개하는 존재 리얼리테는, 절대적 궁극의 한점에 있어서 「하늘」이며, 류수 이래의 대승 불교에 속하지만, 다른 파파들에 대해서, 공해의 「하늘」 "는 "긍정적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다. 대승불교의 '하늘', 즉 '절대 무분절자'는 형이상학적 '무'의 측면과 현상학적 '유'를 향하는 측면으로 나뉜다. 공해에 있어서는, 「법신」 즉 「무」는 「유」의 충실의 극이며, 「유」의 에너지는 밖으로 발출하려고 한다고 한다. 그 생기의 시작점에서, 「법신」은 근원적 코토바이며, 절대 무분절의 코토바이며, 모든 존재자의 의미의 의미, 모든 존재의 「심비의 의미」이며, 무수한 의미로 나뉜다 심층 의식 내에 현현하지만, 그 일시적 의미 분절의 장이 언어 아라야식으로 한번 분절되면, 「상상적」형상으로서 현현하는 장이 의식의 M영역이라고 이즈쓰씨는 말한다. 「심비의 의미」가 언어 아라야식에 직결하는 최초의 일점, 코토바의 기동의 일점을 진언 밀교에서는, 절대 무분절자가 분절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는 첫걸음, 「아」음으로 파악한다. 「아자 진언」 「아자 본생」이라고 이통씨는 설명한다. 「아」소리는 대일 여래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오는 목소리이다. 그 목소리와 함께 의식이 태어나 전 존재계가 현출한다고 한다.



「범소 처음 입을 여는 소리에, 모두 아의 글자 있어. 만약 아의 소리를 떼면, 즉 일절의 언설 없음. 이름에 따라 이름은 글자에 달려 있습니다. 편향 "공해"대일경집"



 이러한 심층 의식적 언어 철학이라는 것은 보편적 현상은 유대교 신비주의와 카바라(12세 말경부터 유럽에 일어난 유대교 신비주의)의 언어 철학과 근본적 비전은 동일하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코토」는 말이며 일이다, 즉 코토바와 사물을 동일시하는 것은 일본어뿐만 아니라, 히브리어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실존 세계의 "심비" 구조를 생각한다. 표층의식의 경험적 세계를 존재세계로 보지 않고 심층의식이 보는 심비의 세계로서의 존재세계를 하나님의 코토바의 세계, 신적언어의 자기전개로 한다. 코토바야말로 하나님을 하고 창조주가 하는 비밀의 존재에너지라고 생각한다고 이즈쓰씨는 설명한다. 커버리스트의 사상은, 기본 텍스트 「조하루의 책」에서는, 하나님의 절대적 창조성이 「무」의 심연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코토바의 에너지로서 포착되고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코토바의 원천에서 어느 '무'가 하나님 자신 안에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고 이즈쓰씨는 말한다. '무'를 하나님 밖에 둘지 아니면 하나님 안에 놓을 것인지는 큰 문제를 일으켰다. 커버러에서는 하나님의 내적 구조 그 자체 안에 「무」의 심연을 보고, 그 「무」가 「유」로 전환한다. 그 전환점이 코토바라고 한다. 단어의 구성 요소로서 자음과 자음의 조합에 존재 분절적 기능을 인정한다. 자음만을 단어의 1차적 형성소(어근)로 하는 것은 셈계 언어 일반의 통칙이며, 이것을 하나님의 세계창조, 혹은 하나님의 자기현현의 통로로 생각하고, 거기에 상징적 언어이론 를 세우는 것은 캇바라의 특징이다라고 이즈쓰씨는 지적한다.



“태시(처음)에 말씀이 있고,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있고, 말씀은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서』

 카바리스트에게 있어서 일체 만물의 시원에 코토바가 있었던 것이며, 코토바는 신이었다고 ​​하는 말 그대로의 의미이지만, 「처음에」라고 하는 코토바는 시간적 시작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우리에게는 "시간"이지만, 커버리스트에게는 어떤 점을 취해도 "시작"이며, 하나님의 창조의 사업은 때때로 새롭고 동일한 과정을 통해 우리 자신의 내부 에 실현하고 있다고 한다. "시간을 넘은 곳에서 시간의 흐름 속을 향해 일어나는 이 부단한 세계 창조의 과정을 신적 코토바의 자기 전개로 한다"커버러의 존재론과 진언 밀교의 그것은 코토바가 근원 적으로 존재분절의 동력이라는 점에서 공통된 특징이 있다고 이즈쓰씨는 주장한다.

 

 이즈쓰씨의 설명에 의하면, 커버러에 있어서는, 「알레프」의 한 문자가 자기 전개해 다른 21개의 「문자」가 되어, 서로 조합되어 무한수의 단어를 만들어낸다고 한다. 공해의 아자 진언은, 「아」는 한 개의 모음이지만, 「아레프」는 「아」라고 하는 모음 그 자체의 발음을 일으키는 개시의 자음이라고 한다. "알레프"에서 단어에 이르는 코토바의 자기 전개의 전체 과정이 하나님 자신의 자기 전개이며, 하나님의 내부 깊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 신의 내부에서 형성되는 「문자」결합체의 의미를, 카버리스트는 의식의 M지대에 나타나는 「상상적」이마주로서의 추체험, 혹은 동시 체험해 갈 뿐이라고 한다. 코토바의 자기 전개 과정의 첫 단계에서 경험적 세계 성립 이전에 하나님의 이름의 세계가 현성된다. 그것은 존재 '원형'만으로 구성된 독자적인 초현실적 세계이며, 그 '원형'을 '세피로트'라고 부른다고 한다. '세피로트'란 경험적 현실의 세계 속에서 만나는 모든 사물의 영원불이의 '원형'이라고 한다.



 랍비 유대교와 커버러

 이즈쓰씨에 따르면 랍비들의 사상은 '구약' 시대 이후의 주류였다. 하나님을 절대적 초월성으로 쫓아 절차화하려고 했다. 즉, 지상적, 인간적 냄새가 붙는 일체의 신화적 표상을 하나님으로부터 없애려고 율법에서 신화적 형상, 상징적 이마주를 닦아내려고 노력했지만, 거기에 반항하도록 하여 12세기 후반, 프랑스의 랑그독 지방의 유대인 사이에 일어나, 13세기에는 남프랑스, 스페인을 중심으로 정신주의적 일대 운동을 형성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커버리스트들은 랍비들의 합리주의에 반항하고 심볼의 범람 중에 하나님의 실재성을 읽으려고 했다. 심볼이란 커버리스트들의 '하나님의 내면이 외면에 나타날 때 취하는 근원적 이마주 형태라고 한다.

 하나님은 절대 무한한 존재에너지로, 내에서 밖으로 발출되는 몇개의 발출점이 있으며, 그 충만은 발출점에서 무제한의 에너지가 한정된다. 그것이 커버리스트가 보는 「원형」이라고 이통씨는 설명한다. 「원형」은 다양한 이마주를 만들어낸다. 그 신의 내적 구조를 원초적으로 규정하는 그 '원형'이 그들이 말하는 '세피로트'라고 이통씨는 풀린다. 무제한의 에너지가 한정되는 「원형」의 수는 누구에게도 모르지만, 편의상, 10개로 한정한 「세피로트」야말로, 상호 연관 형태를 취해 신적 생명의 자기 표현의 형태를 제시한다고 한다. 언어적으로는, 「세피로트」는 「세피」의 복수형으로 「수」를 의미하고, 「세피로트」는, 유대 신비주의의 기본 문헌 제1의 「우주 형성론」(기원 3세기, 작자 불명) 그래서 존재 형성적 능력을 내장하는 신비적 수를 의미했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십이세기에 '청명의 책'으로 완전히 캬바라화되어 신적 '원형'이라는 의미에서 '세피로트'로 전개되었다고 이즈쓰씨는 설명한다.



 10의 「세피로트」의 해설(P261)

첫 번째는 '케텔'(왕관이라는 의미). 존재 유출의 궁극적인 시원. 순수 '유', 절대적 '하나'이다. 불교로 말하면 「하늘」, 즉 「진공 묘유」의 「묘유」적 측면에 있어서, 일체의 「다」를 무분절적으로 내장한다.

둘째는 「호쿠마」 즉 「지혜」. 불교의 '반청'에 해당한다. 카바라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자의식으로 한다. 끝없는 공간에 혼자 찬란하게 빛나는 거대한 태양. 태양으로부터의 광선이 결정되어 경험적 사물의 「원형」이 된다. 모순되어 상용할 수 없는 것도, 이 「원형」중에서는 하나가 된다. 하나님은 독자로서 스스로를 각지한다.

셋째는 비너. 하나님이 스스로를 비추고 내면을 그대로 관상한다. 하나님은 스스로 다자를 본다. 첫 번째 존재 분절이 발생합니다. 신적 실재의 일자성 그 자체 속에 일어나는 사태로, 하나님의 내면 사태로서는 다자도 하나이다. 여기서 성립하는 존재론적양태는 밀교의 차원에서는 '씨앗'이다. '호쿠머'가 아버지인데 비해 '비너'는 어머니이다. 신의 내면의 여성적 요소로 한다.

넷째는 ‘헤세드’ 즉 ‘자애’이다. "비너"를 어머니로하는 첫 아이. 하나님의 창조성의 긍정적 측면. 율법의 영역에서는 「…하라」라는 명령이 된다. 인간의 본질에서, 선. 물질계의 원소에서는 물. 이상적인 인간상에서는 아브라함에 해당한다.

다섯째는 「게브라」 즉 「엄정」. 하나님의 존재부여에는 엄정한 제한이 부과되기 때문에 존재에너지의 억지력으로 나타난다. 율법적으로는 「… 하지 말아라」라고 하는 부정 명령. 인간의 본질에 나타나면 악. 물질 원소 중에서는 불의 이마주. 이삭이 원형을 구현.

여섯 번째는 "티후엘레토" 즉 "미". 일체의 사물은 "원형"적 존재의 차원에서 융합과 조화를 이룬다. 선의 무 '본질'적 분절 사태와 매우 비슷하다. 모든 "세피로트"의 에너지가 여기에 모인다. "하느님의 심장".

일곱 번째는 "네차하" 즉 "파지". 영원한 부단의 지속성. 존재 유출의 연속성. '티후엘레토'에 유입되어 융화되어 있던 '원형' 에너지의 충만이 '네차하'라는 새로운 '원형'이 되어 나타난다.

여덟째는 "호드" 즉 "영광". 신에게 근원을 발하는 존재 에너지는 '호드'의 이 굴절력을 통해서 처음으로 만물을 '원형'으로 분절한다.

제 9는 '예소드' 즉 '근경'. '티후엘레토'에서 발출해 이분하고 존재 유출의 남성적 측면을 구현하는 '네자하'와 여성적 측면을 구현하는 '호드'가 다시 결합해 생기는 새로운 '원형'. 성질은 철저하게 남성적이고 형상적으로는 남근. 우주에 편만한 역동적인 생식력.

제10은 「마르쿠트」 즉 「왕국」. 하나님이 지배하는 왕국. 하단에 위치한다. 모든 '세필라트'의 에너지가 하나가 되어 여기로 흘러든다. 이 아래에는 피조계가 전개된다. 하나님의 나라에 오르는 오르막, 또는 하나님의 집의 문. 하나님 안의 여성적 원리로 여겨진다. 하나님 자신의 내면에서 일하는 근원적인 여성 요소. 그 비전은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의 내면에서 하나님 자신과 결혼한다는 '거룩한 결혼'이라는 비전으로 전개한다. 이 점에서 힌두교의 성력파 탄트라, 시바신의 탄트라, 도교의 성애적 측면에 현저하게 접근한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결혼하는 여성은 유대인의 영성 공동체로서 이스라엘로 변모하여 나타난다.

 이 십 개의 "원형"은 서로 연관되어 생성되는 전체 시스템 (유기 체계)에 의해 드러납니다.



 다음 번, 연재 제18회에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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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츠키 슌히코 「의식과 본질」해독 제18회・「본질」긍정론 제3형・고바야시 稔
2013년 08월 13일 | 이츠키 슌히코 연구
「본질」긍정론 제3형·이통 슌히코 “의식과 본질” 해독·연재 제18회(최종회)


고바야시 稔

「본질 긍정론」을 이통씨는 3개의 형태로 나누어 말한다.

제1형

  보편적 「본질」(마히야)은 실재한다는 입장. 동양철학에서는 송학의 '격물 궁리'가 이 영역에 들어간다. 이미 이 연재로 소개했다. (제8회 참조)

제2형

  샤머니즘과 신비주의의 근원적 이마주 세계. 상징성을 띤 아키타입(원형)으로 나타난다. 이븐 아라비의 「유무 중도의 실재」(제5회 참조)나, 스프라와르디의 「빛의 천사」, 밀교의 만다라(공해의 진언), 유대교 신비주의 카바라의 「세피로트」(전회 에 소개했다).

제3형

  제 1 형, 제 2 형이 심층 의식 영역 내에서 발생하는 반면, 제 3 형은 의식의 심층뿐만 아니라 표층에서, 지식적으로 인지하는 곳에 성립한다. 구조를 분석하고 표층 의식적으로 "본질"의 존재를 확인한다. 고대 중국의 유학, 특히 공자의 정명론, 고대 인도의 니야야 바이셰시카파 특유의 존재범주론 등이 있다.


이 '의식과 본질' 해독에서는 제2형까지 읽어낸 것이다.

이번부터, 제3형을 읽어 풀어 가자.

p.293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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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질」긍정론의 제3형은, 보편적 「본질」을 심층 의식이 아니고, 외적으로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믿는 사람의 입장이라고 이통씨는 말한다. 우리가 보는 꽃들의 뒤에 유일한 보편적인 꽃 자체가 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추상적인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감각적 사물 뒤에 보편적인 "본질"이 있다는 생각이다. 이통은이 지역의 첫 번째 사람으로 플라톤을 언급합니다. 「이데아」란 실재하는 보편적 「본질」이라고 한다. 실재하는 보편자, 경험적 세계의 사물을 내재적으로, 혹은 초재적으로, 규정하는 보편적 「본질」이 아이디어이며, 끊임없이 정의에 의해 보편자를 언어적이고 이성적으로 정착하려고 하면 이통 씨는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에서 언급했듯이, 소크라테스의 관심 영역은 윤리, 도덕에 관한 것이며, 자연적 세계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정의의 탐구는 본질의 탐구이며, 감각적 사물의 비감각적 본질을 찾아서 멈추지 않는 집요한 열정의 사람이었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모든 개인에게 공통된 아이디어가 있다면, 아이디어는 윤리적 사태, 도덕적 가치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대한 아이디어를 인정해야 한다. 플라톤의 아이디어론은 보편적 「본질」실재론으로까지 발전했다고 이통씨는 주장한다.

 동양철학을 살펴보면 우선 공자의 정명론이 떠오른다고 한다. 이통씨의 설명을 쫓아보자. 플라톤 철학과는 사유방법이 현저히 다르지만, 영원불이의 보편적 '본질'의 실재성을 믿고 그에 의해 분란하는 감각적 사물의 세계를 구조화하고 질서화하려는 근본적 태도에서 이데아론과 정명론은 하나라고 이츠키 씨는 주장한다.

제자백가시대로 불리는 고대 중국 시대에는 '명실론'이 발달하고 있었다. 「이름」은 언어, 「실」은 단어의 지시 대상인 실재하는 사물을 말한다. 모든 단어는 일정한 지시대상이 있어, 이 「이름」과 「실」의 관계를, 즉 어떻게 둘이 본래 연결되는지, 혹은 연결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것이, 「명실론」의 중심에서 있다. 공자는 「정명론」으로서 「명실론」의 근본 문제를 제기했다고 이츠키 씨는 말한다.

「이름을 바로잡는다」란 「이름」과 「실」에 맞추어 「이름」을 사용하는 사회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이지만, 공자에게 있어서 「실」이란 개체로서의 것이 아니다. 물건의 "본질"을 의미한다. 모든 사물에는 보편적이고 영원한 불편한 "본질"가 있다. 「이름」은 「실」에 대해 지향적으로 제정된 것이기 때문에, 본래는 일대일의 관계가 있지만, 인간 생활의 현실에 있어서는 「어긋남」이 생긴다. 즉 「이름」과 「실」의 부정합은 공자에게 있어서 사회질서의 혼란을 의미하고 있었다. 공자의 눈에는 「본질」상실의 시대가 비추어져, 그러한 시대의 조류를 막기 위해서는 「이름」과 「실」의 사이에 꽉 찬 상태로 되돌릴 수밖에 없다, 「반드시 이름을 정 씨인가」라고 하는, 「정명」의 의미론적 이념이 태어났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예를 들어 '왕'이라는 단어는 왕이라는 '본질'을 구현하는 개인에게만 적용되어야 한다. 왕의 '본질'을 구현하지 않은 사람을 '왕'이라고 부를 때 '이름'과 '실'의 관계가 흐트러진다. 그렇다고 하는 것은 「왕」이라고 불리는 인물은, 왕인 것의 「본질」을 자각해, 「본질」의 체현자로서 존재해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는 사회생활뿐만 아니라, 가정내에서도, 개인의 내면에서도 「이름」과 「실」의 불일치를 도처에 목격한다.

공자의 '정명론'은 젊은 시대의 플라톤의 '이데어론'과 마찬가지로 주된 관심은 윤리적 가치이다. 즉 인간의 윤리적, 도덕적 속성의 '본질'만을 공자는 제일의적 문제로 했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중기 이후의 플라톤과 같이 모든 것에 「본질」, 아이디어를 보려고 한 플라톤과는 관심의 본연의 방식이 달랐다. 그러나 공자 이후 명실적 사상의 발전에 있어서 윤리적 가치뿐만 아니라 영원불변의 '본질'을 인정하는 보편적 '본질' 실재론에 전개해 갔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장자는 공자의 '정명론'을 부정했다. 노자를 포함한 장로의 반 '본질'주의는 선의 무 '본질'적 존재분절과 같은 형태에 속하지만, 장로의 '본질' 부정은 의식적으로 충돌한다는 점에서 반대로 정론을 뒷면 로부터 보설하는 것이 되고 있다고 이통씨는 지적하고 있다.

 그럼 장자와 공자의 '정명론'의 차이는 어떠한 것이었는지 살펴보자.

 불변 부동의 '본질'을 윤리주의적 계급조직에 ​​조립함으로써 존재세계를 하나의 영원적 가치체계로 만들어 버린 공자의 세계상 앞에서 장자는 불편한 세계라고 한탄했다. 원래, 물건의 「이름」은 사회적 관습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우연히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고, 그래도 것이 「본질」적으로 고정되어 버리는 세계에 자유 아니. 세계를 그렇게 보는 것은 왜곡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존재의 진상은 혼돈이라고 장자는 주장한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바깥쪽은 분할되어 있지만 정말로 한 장 바위와 같은 것으로, 표의 복잡한 구정은 모두 보이는 것이다. 그 겉보기 구의 선을 코토바가 그린다. 그것을 사람은 무슨이라고 부른다. 그 후의 의미가, 그러나 「본질」이라고 실수된다. 코토바의 의미가 지시하는 「본질」도 또한 항상적이고 고정된 것이 완성되지만, 장자는, 말에 항상성은 없다고 한다.

"남편, 길은 아직 시작보다 봉하지 않고. 말은 아직 시작보다 끊임없이"

                          (「제물론」 제2)

(존재 진상에는 경계선 등 전혀 없고, 말에는, 원래, 의미의 항상성 등 전혀 없다)

언어적 의미에 의하여 「혼돈」의 표면에 그려진 의미의 구선을 존재적 구선이라고 생각하며, 항상적인 「본질」에 의해 고정된 것의 실재를 거기에 환상한다. 정말은 모두 「존재의 꿈」이다. 「존재의 꿈」밖에 없는 사물에, 정사, 선악, 미묘, 등의 구별을 공자처럼 마련하면, 「본질」적으로 옳다고 생각해 버리게 된다. 장자의 말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지상에 사람들이 거기를 잘 걷는 것에 의해, 스스로 길이 완성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 즉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에 지나지 않고, 그러한 세계에 인간은 살고 있다는 것. 이통씨에 의하면 공자와 장자의 차이는 사상 전개의 원점이 각각 다른 의식층에 있는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한다. 표층의식과 심층의식의 대치, 일상적, 경험적 의식의 존재관과 심층의식체험의 존재관의 대치라고 한다.

 장자의 「혼돈」은 존재가 일체의 「본질」적 구별을 잃어 무차별성을 드러낸다, 즉 관조한다고 하는 것이라고 이통씨는 설명한다. 선의 무의식의 성립 과정을 말했을 때 이통씨는 삼각형을 사용했다. 삼각형의 정점에 위치하는, 모두가 무중에 소멸하는, 존재의 무「본질」적 분절의 경위이다라고 이통씨는 말한다. 따라서 공자의 정명론은 삼각형의 저변부에서 성립하는 입장이며, 그 것의 내부에 「본질」을 본다. 즉 "코토바의 지향성 방향의 첨단에 실재하는 영원불이의 보편적 본질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공자의 경우에는 윤리적 관점에서 독특한 가치관과 얽혀 있기 때문에, 일반의 「본질」의 실재성의 주장과는 다르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공자의 정명론을 보다 순수하게 보편적 「본질」의 실재론을 주장하는 것에, 인도 사상의 바이셰시카파 및 그것의 자매학파 니야의 제설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외부 세계에 내재하는 사물을, 우리의 감각 기관은 직접, 무 매개로 인식한다. 바이셰시카에 있어서 보편자도 외적으로 실재하는 것으로, 사람은 개별자에게 내재하는 보편자를, 개별자와 함께 지각한다고 한다.

상식적인 아이디어에서는, 외부에 있는 각종 꽃, 각각이 유일한 점에서 동일하. 이 표층 의식적 인식 체험에서 꽃이라는 추상적 개념(개념적 보편자)을 꺼낸다.

바이셰시카에서는, 「부정 지각」이라고 하는, 꽃으로서 인식하기 전의 단계를 상정한다. 꽃을 보고 있지만 꽃으로 보지 않는다. 그것이 현존하고 있을 뿐이다. 이 단계에서는 이것과 그 구별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꽃으로서의 이것이 나비로서의 그것과 구별되지 않는다. '꽃'이라는 고토바가 의식에 떠오르지 않는다고 한다. 부정적, 무한적으로 가 나타나고 있을 뿐이며 '본질' 규정을 받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인식의 첫 번째 단계는 와의 언어 이전의 신체적 접촉이었고, 다음 단계에서 반성하면.

두 번째 단계에서 처음으로 언어적 인식이 된다. "꽃"이라는 코토바가 의식에 떠오르고, 그것이 의식에 떠오르고, 그것이 와 결합 는 꽃인 것으로 나타난다. 즉 는 「본질」한정을 받는다. 그렇게 받아들인 는 주관적 체험으로서 개인이지만, 구조적으로는, 보편성에 얽힌 개인, 보편자의 내재하는 개체이다. 「니야야 수트라」에서는 단어의 의미대상이란 개체와 형상과 보편자의 3면을 하나로 한 것이다. 개체로서의 꽃의 인식은, 거기에 내재하는 보편자 「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이통씨는 설명한다. 게다가 이통씨가 주의를 촉구하는 것은, 바이슈시카의 인식론에서는, 제1 단계의 「부정 지각」도 제2 단계의 「한정 지각」도 표층 의식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사태라는 것이다.

 앞서 열거한 제1단계에 있어서 「다음 단계부터 반성하면」이라는 설명으로부터, 경험적 「유」의 미정태로부터의 비약은 어떻게 행해지는지 흥미있는 곳이다. 나에게는 시인의 경험과 비슷한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한정 지각」의 단계에서 나타나는 「본질」이 표층 의식 내에서 의식되어, 외계에 실재하는 것으로 보이는 곳도 시인의 경험과 공통된 곳이 느껴진다. 이통씨는 「본질」긍정론 제1형과 구별하고 있지만, 플라톤의 이데아론도 제3형으로 하고 있다. 아이디어론을 형이상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외부적인 실재자로 본다. 그러나 아이디어를 알기 위해서는 현실에서 표층 의식이든 심층 의식이든 체험적 프로세스가 필요하다. 이통씨가 말한 릴케 체험, 즉 「의식의 피라미드」의 심부에 존재자의 심부를 찾아내려고 하는 것과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일까. 「심층 체험을 표층 언어로만 해소된다」라고 해도. 한때 이츠키 씨는 초기 논문 '신비 철학'에서 플라톤에 대해 뜨거운 말로 말했다. 아이디어로의 향상도와 하강도가 있다고 설했다. 아이디어는 감각적 세계의 이 세상에서 먼 영원한 세계에 성립하는 것이며, 거기에 도착한 것은 거기에서 감각적 세계로 내려서 완성된다. 우리가 보는 사물은 이데아의 가상이라고 파악하지만, 이데아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이 세계에서의 경험 없이 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공자의 정명론도 플라톤의 아이디어론도, 또 바이셰시카의 인식론도 이통씨는 제3형에 넣고 있다. 그들은 심층 의식적 「본질」을 요구하지 않고, 외계에 실재하는 보편자를 상정하기 때문이다. 외계에 객관적으로 실재한다는 생각은 개념적 보편자로 변성해 나갈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그리고 표층적으로 일하는 사유는 존재론과 개념론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고 이통씨는 말한다. 이츠키 씨의 유서가 된 『의식의 형이상학』의 뒤에, 이츠키 씨의 향후의 연구 테마를 나타내는 메모가 게재되고 있다. 거기에서는 플라톤 철학에 대해 한층 더 발전되는 의향이 엿볼 수 있지만, '의식과 본질'을 쓴 시점에서는 동양철학에 있어서의 인식과 의식과 존재의 얽힘은 복잡하고 다층적이며 구조를 추구하면 아무래도 「본질」의 실재성의 문제에 착착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개념론으로 전환할 것이라고 이통씨는 말하고 있다. 그것은 "개념 구조 이론"으로서 새로운 한 장을 필요로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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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회에 걸쳐 이츠쓰 슌히코 『의식과 본질』 해독을 게재해 왔습니다만, 다음 번부터 새롭게 『의식의 형이상학』 해독을 해 갑니다.

동양 사상 이즈쓰 도시히코 『의식과 본질』을 읽는다(후편)

동양 사상 이즈쓰 도시히코 『의식과 본질』을 읽는다(후편)



도요 사상 이츠키 슌히코 「의식과 본질」을 읽는다(후편)사상·철학
사상·철학







전회의 기사 에 이어, 이츠키 슌히코 「의식과 본질」을 읽어 갑니다.










의식과 본질 - 정신적 동양을 탐구 (이와나미 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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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통씨는 보편적 본질(머히어) 긍정론을, 이하의 3 타입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중국송대의 유학(이학)의 「격물 궁리」
"원형"적 본질론
플라톤의 아이디어론, 공자의 정명론



이번에는 이것을 순차적으로 확인합니다.

목차


보편적 본질(마히어) 긍정론 ①

우리가 인식하는 리얼은 우리가 오관에서 느끼는 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외계는 소립자의 소용돌이치는 혼돈이며, 우리는 의식의 본질인식작용과 언어의 분절작용에 의해 리얼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덧붙여서, 이러한 표층 의식의 작용을 불교에서는 망념 이라든지 망상 분별 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p151).


어쨌든, 서모그래피처럼 굉장한 외계를 분리한다――즉, 분절하는 것이 언어의 역할이며, 이통씨는 「태양」이나 「인간」이라고 하는 공통 개념에 보편적 본질을 인정하는 입장을 3 타입으로 분류 하는 거군요.


이통씨는 그 제일의 타입――중국 송대의 이학 「격물 궁리」 로 대표되는 입장을, 말라루메의 시작 스타일에 통과시키는 것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격물 궁리」라고는 엄청나게 가서, 선의 형제 같은 것. 이학은 「정좌」와 「궁리」에 의한 실천철학이며, 「좌선」에 의해 내관을 단련해 가는 곳까지는 선과 같다. 우리의 내적 세계는 오관과 의식을 구사해 외계를 해석한 것――리얼 그 자체이기 때문에, 내관의 단련은 그대로 다이렉트에 현실 세계에 반영됩니다.



오컬트가 아니고, 자신이 바뀌면 세계도 바뀐다 고 말하고 있을 뿐이야.


멘탈이 진정되면 리얼도 진정된다. 정신이 흐트러지면 리얼도 흐트러진다. 이통씨는《동양철학의 대부분에 공통되는 현저한 특징》으로서, 내외의 밀접한 상관관계 중, 우선 정신을 단련하는 경향을 들고 있습니다(p 82 ).


이학의 이론적 기초가 되고 있는 「나카조」 (4서 중 하나: 작자는 공자의 손자로 여겨진다)에서는, 정신이 플랫한 정태를 「미발」, 여기에서라도 이것 해석하려고 움직이는 정태를 "뷸발"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조용하고 움직이네요.


우리의 주위에 일어나는 일에는 원래 플러스도 마이너스도 없습니다. '기쁘다'라든가 '슬픈'이라든가 '미남'이라든가 '키모오타'라든지 우리가 마음대로 레텔을 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레테르를 치기 전――나마 그대로 물건을 받아들이는 정태가 「미발」, 레텔을 치려고 하는 정태가 「뷴발」이라고 파악해 문제 없습니다.


우리는 대체로 레테르 장력의 정태에 있는 것입니다만, 「정좌」 내지 「좌선」에 의해 이 레텔을 벗겨 가고, 동:정= 8 : 2 였던 밸런스를 동:정= 2 : 8 정도에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조용함을 기반으로 한 동이라는 달인 같은 심경에 도달합니다. 내관은 수평 방향에서 수직 방향으로 시프트해, 희로애락을 낳는 심층에의 탐구가 시작됩니다.


심리학에서는 희로애락을 2차 감정 으로 합니다. 제1단계에서 물건을 남마 그대로 받고, 제2단계에서 거기에서 희로애락의 레텔을 치기 때문에 2차 감정. 이학과 선의 차이는 이 감정을 만들어내는 원천에 본질을 찾아내는지 아닌지의 차이입니다. 선은 본질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학은 그러나 여기에, 무와 유를 겸비한 본질――우주의 근원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우주의 근원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원래를 추적하면 하나라는 것이 됩니다.



이봐, 뭔가 위험한 방향으로 말하니?



이학을 다하면 인류 모두 형제, 전 우주와 조화를 이룬 성인 같은 심경이 될 것 같습니다. (노라는 완전 무시)


이통씨는 주자학에서 말하는 「무극으로 대극」( 무극이대극 )이라는 개념을 끌어내고 있습니다. 음양 대극도 있어요. 대극·무극이란 우주의 본체·모리라 만상의 근원이기 때문에, 그 소용돌이 같은 마크는, 무한의 생성을 상징한 것이라고 나는 포착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꽤 씹었지만, 이학에 관한 여기까지의 내용은 본서 p81-86당에 해당합니다.

송유들에 의하면, 경험적 세계에서 우리의 표층 의식(번발)의 대상이 되는 일체의 사물을 심층 의식의 극점(미발)에 있어서 여분없이 무화하고, 무화하면서, 게다가 그들을 궁극 유일한 사람으로서 기초를 둔 (무극이대극) 유일하게 절대적인 형이상적 "본질"이 있고, 그것이 천천히 나뉘어져 특수화되어 존재의 형이하적 차원에서 무수한 "본질"을 형성한다. 그들 아래 차원의 '본질'을 하나하나 철저히 고찰하고 경험계에 확산하는 모든 사물을 각각의 '본질'로 환원하면서 그들을 유일하게 절대의 '본질'까지 추구하려고 하는 것이 '궁리'의 길이다. 이렇게 해서 '정좌'는 '궁리'에 직결된다.


대승 불교의 「진공 묘유」 라는 개념을 생각하는 방향도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진공”이라고 있는 대로, 이쪽은 우주의 근원 등 인정하지 않습니다. 《「본질」에 의거하는 응고성의 분절이 아닌, 「본질」누키의, 유동적인 존재분절 을, 우리 각 사람이 스스로 실천적으로 인증하는 것을 선은 요구한다. >>(p25)

 새가 새인 것이 아니라, 조류와 같다고 한다. 게다가 그 '새의 놀이'가 무한히 멀리 하늘을 날아간다. 새로서의 「본질」이 조치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새는 새라는 "본질"에 묶여 있지 않다. 하지만 '본질'이 없는데 이 새는 새로서 분절되어 있다. 선의 존재 체험의 기미에 속하는 이 사태를 선 독특한 무"본질"적 존재 분절 이라고 나는 부르고 싶다. 【※방점부, 밑줄로 변경】


여기까지 도달하면, 외계의 윤곽은 흐릿하다고 합니다. 새 같은 것, 물고기 같은 것, 로서 구별되면서도, 각각이 융합하고 있다. 선의 도달 지점은 본질에 의해 응결되지 않습니다 (p 165-166 ). 이학은 모든 것의 본질을 인정하고 그 대본에 무극이대극이라는 원천을 조치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은 되지 않는 것입니다(p 98-99 ).

보편적 본질(마히어) 긍정론②


말은 사고이며, 우리가 리얼(이라고 믿고 의심하지 않는 현상)을 구성하는 요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만, 세계에는 여러가지 언어가 존재합니다. 그렇다고 하는 것은, 언어의 차이에 의해, 구성되는 사고 내지 리얼에도 차이가 생기는 것일까요. 생기는 것 같네요.

크게 보면 하나의 통일체이지만, 세세하게 보면 복잡하게 착綜하는 다극적 유기체로서 나타나는 문화의 틀 구조 를 각각 기호학적으로 하나의 텍스트로서 이해했을 경우, 그 구체적 맥락 속에서 태어난다. 자란 인간의 의식이, 일일의 텍스트에 고유의 가치 연관의 촉발하는 농밀한 분위기 속에서, 인간 의식 일반인 것으로부터 벗어나 미묘하게 특수화해, 색칠해져, 그 일도 또 저절로 특이한 경향 성을 가진 것일 것이 당연히 생각된다. (……) 즉 여러가지 다른 의미 연관체계에 근거해, 여러가지 다른 문화적 텍스트가 성립한다. 이들 문화적 텍스트 간의 차이에 따라 인간의식도 다양한 유형학적 차이를 보인다 는 것이다.


언어의 차이에 의해, 의식의 심층 부분에 있어서의 본질 파악의 작용에 차이가 생기기 때문에 재미 있습니다.

어느 하나의 문화 공동체에서 태어나 자라, 그 공동체의 언어를 배우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것과 자각하지 않고, 그 문화가 정하는 「본질」체계를 섭취해, 그것을 통해 존재를 어떻게 분절하는지를 배운다 . 배운 '본질' 체계는 전체적으로 '문화적 무의식'의 영역에 침전하여 그 사람의 현실인식을 규제한다.


이통씨는 이것을 “언어 아라야식” 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나무를 보았을 때, 일본어 특유의 문화적 무의식(언어 아라야식)으로부터 나무의 본질이 환기됩니다. 의식은 이렇게 혼란스러운 외계로부터 본질을 인식하고, 언어에 의한 분절화를 실시해, 리얼을 구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하면, 이통씨는 언어의 망목(랭)의 심층에 언어 아라야식을 조치해, 거기로부터 환기되는 본질에는 이마주가 수반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이 이마지는 언어에 따라 다르다고합니다 (p 185-186 ).



다음과 같은 이미지가 됩니다.


언어의 메쉬(랭)

↑↑↑이마주↑↑↑

문화적 무의식(언어 아라야식)


이마주니까 당연히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魑魅魍魎이라든지 신화적·신비적인 본질이 형상화되기도 합니다. 《직업적(혹은 천재적) 샤만이나 탄트라의 달인과 같이, 심층 의식의 초현실적 차원을 방법적으로 개척한 사람들만이, 이런 종류의 이마주를 올바르게 활용하는 방법을 마음껏 얻고 있다. >>(p 188 )


이통씨는 샤만이 취급하는 이마주를 ' 상상적' 이마주로 하고 만다라나 세피로트 등을 '상상적' 이마주 공간의 구조적 제시 로 고찰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도 세피로트의 나무, 조금 등장했구나!



흥미있는 분은 본서를 손에 들여 보면 좋을지도. 라고인가, 너, 아무리 좋아하는 거야 『에바』.

(……) 「상상적」이마주는, 「원형」의 형상화 로서 사물의 「원형」적 「본질」을 심층의식적으로 노출시킨다. '원형'의 생기와 그 활동이 심층의식적 사건이라는 것은 이수에게 융의 분석심리에 의해 이론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매우 설득적인 형태로 명시되었다.


윤의 제창한 「원형」(아키타입) 이란 우리의 심층 심리에 공통되는 형(타입)을 가리키고 있습니다만, 어쩔 수 없이 말해, 모든 신화에 공통되는 이미지라고 해석해 그리고 문제 없습니다. 예를 들어 태양신의 이미지는 아마테루 오카미와 라 같은 느낌으로, 달리 본질은 공통되어 있습니다. 즉, 원형이란 보편적 본질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p206).

 개개의 사물을 개개의 사물로서가 아니라, 그 「원형」에 있어서 파악한다고 하는 것은, 사물을 그 존재 근원적 「본질」로 보는 것에 틀림없다. 「원형」은 「본질」이다. 하지만, 그것이 심층의식에, 「상상적」이마주로서 자기를 개시하는 「본질」인 점에 특징이 있다.


언어의 메쉬(랭)

↑↑↑이마주↑↑↑

상상적 이머지 공간

문화적 무의식(언어 아라야식)



이런 느낌이 드네요. 이 책에서는 심층 의식의 구조 모델이 정확하게 도시되어 있습니다.


상상적 이마주 공간은 문화적 무의식에 숨어 있는 창조적 에너지라고도 할 수 있지만, 반복이 되지만 그 구조적 제시가 만다라나 세피로트가 되는 것이다.

이슬람 철학자 이븐 아라비의 「유무중도의 실재」나 스프라와르디의 「빛의 천사」를 비롯해, 쉬운 육십사경, 밀교의 만다라, 유대교 신비주의 카바라의 「세피로트」 등, 그 예는 많고 다양한 형태로 동양철학의 여러 전통을 화려하게 물들인다.



다만, 이하와 같은 특징이 있는 것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원형」은, 「본질」이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의식의 심층 영역에서 생기고, 거기서 일하는 「본질」이다. 표층 의식으로 이성이 파악하는, 보통의 의미에서의 「본질」과는, 말하자면 소성이 다르다. (……) 심층의식을 떠나면, 「원형」은 「본질」로서의 자격을 상실한다. 표층의식에서는, 「원형」은 단지 판타지에 지나지 않는다.

보편적 본질(마히어) 긍정론③



마지막 입장은 가장 간단. 요점은 플라톤의 아이디어 이론입니다.




미인에게는 미인의 이데, 돌 무렵에는 돌 무렵의 이데가 있고, 이데아를 요구하는 사랑이 에로스라고. 공자의 정명론 이란 명실론이며, 명실론이란 간결하게 말해, 이름은 몸을 나타내는 생각이다. 어떤 이름에도 실(본질)이 있다는 생각이기 때문에, 아이디어론과 대응하고 있는 것이군요(p294-298).


플라톤은 삼분절이나 사원덕이라는 개념의 연장에 이상 국가가 어떠한 것인지 정의하고 있었습니다만, 공자도 이런 윤리적 가치·도덕적 속성을 중시하고 있었습니다 (p304). 어느 쪽인가라고 하면, 「례」를 중시하는 공자 쪽이 결벽한 인상입니다.


이 주제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은 공자를 정면에서 부정하는 장자의 사상과의 비교입니다. 이통씨는 정명론의 특징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 장자의 입장으로부터 공자에 대해 이하와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선은 어디까지나 선, 악은 어디까지나 악으로, 움직임을 취할 수 없다. 애초에, 물건의 「이름」등이라고 하는 것은, 사회적 관습이 아닌가. 사회적 관습에 의해, 우연히, 이 「이름」으로 불리고 그 「이름」으로 불려, 그래도 것이 「본질」적으로 고정해 버리는 듯한 세계에, 인간의, 그리고 존재의, 자유는 있다 그럴 리가 없다. 게다가 세계를 그렇게 보는 것 자체가 존재 리얼리티의 왜곡 이외의 아무것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방점부, 밑줄로 변경】

언어적 의미에 의하여 「혼돈」의 표면에 그려진 의미의 구 격선을, 실재하는 존재의 구 격선이라고 생각해, 항상적인 「본질」에 의해 고정된 것의 실재를 거기에 환상한다 . 사실은 모두 '존재의 꿈'이다. 공자의 때에 있어서는, 게다가, 이 「존재의 꿈」의 세계의 사물, 사태의 각각에 정 부의 마크를 붙여, 이것은 아름다움이라면 추, 이것은 선이라면 악, 등 라고 말한다. 그리고, 일단, 그렇게 결정해 버렸기 때문에는, 올바른 것은 만고불이에, 「본질」적으로 올바른, 사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면, 정사, 선악, 미묘, 그 밖의 일체의 구별은 인간 생활의 사회적 역사적으로 조건화된 관습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지금까지 아무것도 없었던 지상에, 사람들이 거기를 잘 걷는 것에 의해, 스스로 길을 완성하는 것과 같다고, 소코는 말한다.


이통씨는 이 대립을 《표층의식의 존재관과 심층의식의 존재관과의 대치인 것이다. >> (p308)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근현대 문학에서는 서양 사상만 존중되고, 동양 사상에 듬뿍 잠기면 이단 취급되는 싫음이 있습니다만, 거기에 순문학 쇠퇴의 일인이 있다고 할까… 현대사상도 몰두하면 서양신학이나 동양사상 빠듯한 곳까지 다가가기 때문에, 그쪽에 주목한 비평을 전개하는 것이 문학의 재평가뿐만 아니라 시대 폐색의 현상을 타파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 는 내 지론입니다.



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 논고』에서 거기까지 밟아서는 안 된다는 대명제를 세워 버리기 때문에 좀처럼 어려운 것일까요.



또 시작했다… 뭐라고 하는지, 전혀 모르겠어…



글쎄, 그 중 기사로 할게 (웃음) 끝까지 읽어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2022/07/06

Kabbalah - Wikipedia Sephirot

Kabbalah - Wikipedia

Sephirot[edit]

Scheme of descending Sephirot in three columns, as a tree with roots above and branches below

The Sephirot (also spelled "sefirot"; singular sefirah) are the ten emanations and attributes of God with which he continually sustains the existence of the universe. The Zohar and other Kabbalistic texts elaborate on the emergence of the sephirot from a state of concealed potential in the Ein Sof until their manifestation in the mundane world. 

In particular, Moses ben Jacob Cordovero (known as "the Ramak"), describes how God emanated the myriad details of finite reality out of the absolute unity of Divine light via the ten sephirot, or vessels.[2]: 6 

Comparison of the Ramak's counting with Luria's, describes dual rational and unconscious aspects of Kabbalah. Two metaphors are used to describe the sephirot, their theocentric manifestation as the Trees of Life and Knowledge, and their anthropocentric correspondence in man, exemplified as Adam Kadmon. This dual-directional perspective embodies the cyclical, inclusive nature of the divine flow, where alternative divine and human perspectives have validity. The central metaphor of man allows human understanding of the sephirot, as they correspond to the psychological faculties of the soul, and incorporate masculine and feminine aspects after Genesis 1:27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He created him, male and female He created them"). Corresponding to the last sefirah in Creation is the indwelling shekhinah (Feminine Divine Presence). Downward flow of divine Light in Creation forms the supernal Four WorldsAtziluthBeri'ahYetzirah and Assiah manifesting the dominance of successive sephirot towards action in this world. The acts of man unite or divide the Heavenly masculine and feminine aspects of the sephirot, their anthropomorphic harmony completing Creation. As the spiritual foundation of Creation, the sephirot correspond to the names of God in Judaism and the particular nature of any entity.

Ten Sephirot as process of Creation[edit]

According to Lurianic cosmology, the sephirot correspond to various levels of creation (ten sephirot in each of the Four Worlds, and four worlds within each of the larger four worlds, each containing ten sephirot, which themselves contain ten sephirot, to an infinite number of possibilities),[66] and are emanated from the Creator for the purpose of creating the universe. The sephirot are considered revelations of the Creator's will (ratzon),[67] and they should not be understood as ten different "gods" but as ten different ways the one God reveals his will through the Emanations. It is not God who changes but the ability to perceive God that changes.

Ten Sephirot as process of ethics[edit]

In the 16–17th centuries Kabbalah was popularised through a new genre of ethical literature, related to Kabbalistic meditation

Divine creation by means of the Ten Sephirot is an ethical process. They represent the different aspects of Morality. Loving-Kindness is a possible moral justification found in Chessed, and Gevurah is the Moral Justification of Justice and both are mediated by Mercy which is Rachamim. However, these pillars of morality become immoral once they become extremes. When Loving-Kindness becomes extreme it can lead to sexual depravity and lack of Justice to the wicked. When Justice becomes extreme, it can lead to torture and the Murder of innocents and unfair punishment.

"Righteous" humans (tzadikim plural of Tzadik) ascend these ethical qualities of the ten sephirot by doing righteous actions. If there were no righteous humans, the blessings of God would become completely hidden, and creation would cease to exist. While real human actions are the "Foundation" (Yesod) of this universe (Malchut), these actions must accompany the conscious intention of compassion. Compassionate actions are often impossible without faith (Emunah), meaning to trust that God always supports compassionate actions even when God seems hidden. Ultimately, it is necessary to show compassion toward oneself too in order to share compassion toward others. This "selfish" enjoyment of God's blessings but only in order to empower oneself to assist others is an important aspect of "Restriction", and is considered a kind of golden mean in kabbalah, corresponding to the sefirah of Adornment (Tiferet) being part of the "Middle Column".

Moses ben Jacob Cordovero, wrote Tomer Devorah (Palm Tree of Deborah), in which he presents an ethical teaching of Judaism in the kabbalistic context of the ten sephirotTomer Devorah has become also a foundational Musar text.[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