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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4

한국의 교토학파 연구 현황: 종교계 연구를 중심으로 (1,2,3) 에큐메니안

왜 교토학파인가 - 에큐메니안


왜 교토학파인가한국의 교토학파 연구 현황: 종교계 연구를 중심으로 (1)

이찬수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 승인 2019.03.07 


앞으로 이어질 이찬수 교수님의 “한국의 교토학파 연구 현황: 종교계 연구를 중심으로”는 지난 2월16일 한국문화신학회ㆍ기독교통합연구소ㆍ난잔종교문화연구소가 공동으로 주최한 동계학술회의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글의 게재를 허락한 주신 일본 난잔종교문화연구소 김승철 소장님과 이찬수 교수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 편집자 주


교토학파(京都學派, Kyoto School)는 불교적 입각점 위에서 서양철학을 창조적으로 소화해냄으로써 지금까지는 없거나 미미했던 새로운 논리를 창안해냈다. 그로 인해 서양 철학자의 눈에는 가장 대표적인 동양철학 학파로 자리매김했고, 일본의 철학 수준을 세계적 차원으로, 보기에 따라서는 그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단순히 철학자들의 순수한 연구 모임으로 그친 것은 아니다. 본의든 본의 아니든, 교토학파 사상가들은 20세기 초반 일본의 군국주의 혹은 침략전쟁의 정당화에 기여했다는 비판적 평가도 받고 있을 만큼, 이들의 사상은 일본 및 동아시아 근대의 정치 지형의 변화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정치적 영향에 대한 분석도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교토학파의 사상적 흐름

하지만 교토학파는 어디까지나 학자들이 이끈 철학적 ‘학파’이다. 따라서 그 학문적 넓이와 깊이에 대한 분석과 사상적 영향력에 대한 평가가 더 중요한 작업이라는 뜻이다. 교토학파의 사상적 특징부터 요약해보자.

교토학파는 서양의 존재(Being) 혹은 실체(essence/substance) 중심 논리의 한계 내지 불철저성을 비판하면서, 불교적 공(空, Emptiness) 혹은 절대무(絶對無, Absolute Nothingness)의 입장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논리를 만들어냈다. 『반야심경』(般若心經, Heart Sutra)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Form is Emptiness, Emptiness is Form)에 담긴 “즉(卽)의 논리”(Logic of Soku)를 서양철학의 언어로 규명해낸 셈이라고도 할 수 있다. 특히 교토학파의 개조로 일컬어지는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 Nishida Kitaro, 1870-1945)는 “공(空)의 장(場)”(Field of Emptiness) 안에서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이른바 “장소적 논리(場所的 論理, Logic of Place)”를 창안했다. 이러한 니시다(西田)의 언어와 사상이 제자들에게 계승되면서 일단의 학문적 흐름이 형성되었다.

▲ 교토학파의 개조로 일컬어지는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 Nishida Kitaro, 1870-1945) ⓒGetty Image


니시타니 케이지(西谷啓治, Nishitani Keiji), 타나베 하지메(田邊元, Tanabe Hajime), 히사마츠 신이치(久松眞一, Hisamatsu Shinichi) 등 후학들은 스승인 니시다(Nishida)의 사유를 계승하면서도 저마다 독특한 입장을 펼쳤다. 이들의 입장을 한 마디로 획일화시킬 수는 없지만, 각자의 사상적 특징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니시타니(西谷, Nishitani)는 니시다의 철학적 틀을 이용해, 니체(F. Nietzsche)의 허무주의가 도달하지 못한 그 극단의 지점을 “공의 장”(Field of Emptiness)이라는 이름으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그는 세계가 허무주의적 방랑에 머물지 않고 도리어 허무를 관통해 철저하게 긍정될 수 있는 논리를 확보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선사(禪師, Zen Master)이자 학자인 히사마츠(久松眞一, Hisamatsu)는 일체의 유신론적 형태를 거부하고 자신의 깨달음 체험에 근거해 철저한 무신론을 확립하고자 했다. 그는 세상만사의 근원이라고 여겨지는 최후의 의지처를 타파함으로써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선사상-“萬法歸一歸何處”(『碧巖錄』 第45則)-의 현대적 표현이 철저한 무신론이라고 해석했다.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는 『금강경』(金剛經, Diamond Sutra)에서 따온 표현인 “즉비”(卽非, Sokuhi)의 개념을 활용해 “즉비의 논리”(Logic of Sokuhi; Logic of self-identity in self-negation)를 창안했다. 이를 통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대립과 차별[非]을 넘어선 절대긍정의 세계, 다시 말해 ‘즉(卽, 긍정, identity)’이 그대로 ‘비(非, 부정, negation)’인 세계를 규명하고자 했다.

이들이 대체로 선(禪의, Zen) 입장에서 서양철학을 포섭하고자 했다면, 타나베(田邊元)는 정토진종(淨土眞宗, Jodo Shinshu)의 시각을 중시했다. 그는 공(空)과 역사를 직접 동일시하기보다는, 공이라는 보편적 진리와 역사적 구체화 사이의 ‘매개’(媒介, mediation)를 통해 인간의 사회적 실천을 부각시켰다. 공이 그대로 색(空卽是色)일 수 있는 근거, 절대 진리의 세계와 구체적 현실 세계 사이의 상즉성(相卽性, inter-identity)은 인간의 자기부정적(自己否定的, self-negational) 개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매개’의 철학(philosophy of mediation)을 전개했다. 그의 입장은 제자 타케우치 요시노리(武內義範, Takeuchi Yoshinori)를 통해 계승되었다.

교토학파의 사상적 기반, 선불교

이들 간에 강조점의 차이는 다소 있지만, 전체적으로 교토학파는 불교적 입각점, 특히 공(空)의 입장에서 서양 사상을 창조적으로 수용하면서 세상과 역사의 존재 원리를 긍정적으로 규명하고자 했다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하다. 서양철학의 언어를 사용해 불교적 세계관을 살리면서 동·서양을 아우르는 철학을 시도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 방식으로 서양철학 안에서 불교적 정신을 찾기도 했다.

니시타니(西谷, Nishitani)와 우에다(上田, Ueda) 등 많은 이들이 에크하르트(M. Eckhart)의 신비주의와 같은, 선(Zen)과 통할 수 있는 부정신학적(否定神學, negative theological) 흐름을 중시하고, 성서를 자주 인용하는 것도 그 일환이다. 서양 사상의 근간에 있는 그리스도교 전통의 ‘배후’(背後)를 드러내면서, 그곳에서 동양 전통과의 유사성을 보되, 동양 사상의 우월성, 그리고 일본 철학의 보편성을 강조하려는 내심도 들어 있다. 서양적 정신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논리의 바닥까지 내려가 보지 못했음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경향이 컸다.

그런 까닭에 이들이 종횡무진 사용하는 서양의 언어 속에서도 빛나는 것은 언제나 동양적, 불교적, 특히 선적(禪的) 정신이다. 그것도 좁혀 말하면, 일본 안에 흐르고 있는 대승불교적 정신이다. 공(空, Emptiness)의 철학을 통해 현실세계, 즉 색(色, Form)의 세계를 긍정하는 논리를 현대화시켰다는 데에 이 학파의 사상사적 의미가 지대하다.

이찬수(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chansuy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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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교토학파 연구, 입체적이지 못하다한국의 교토학파 연구 현황: 종교계 연구를 중심으로 (2)
이찬수(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 승인 2019.03.22 


지난 글에서 언급했듯이 교토학파는 존재 중심의 서양적 논리가 전제하고 있는 그 최종적인 지점을 서양철학의 언어로 타파했다. 그리고 현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 있는 동양적 논리를 정립했다. 서양의 종교 및 철학자들은 교토학파 사상가들이 서양철학의 언어로 구체화시킨 동양적 논리를 통해 특히 불교철학의 심원함을 다시 보게 되었다.

교토학파의 철학은 불교의 사상적 영향을 지대하게 받아오던 한국의 일부 종교학자들에게도 한국의 사상적 전통을 계승하면서 서양적 세계관까지 통합할 수 있는 한국적 논리를 고민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문제의식을 진지하게 가진 한국의 연구자는 아직 소수에 그칠 뿐만 아니라, 교토학파 수준의 논리가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지는 못한 상태이다. 존재 중심의 서양적 사유와 존재에 매이지 않는 동양(특히 불교철학적)의 사유가 별도의 장에서 공존하고는 있지만, 공존의 ‘논리’가 충분히 성립되었거나 온전한 ‘융합’의 단계에까지 이르지는 못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교토학파의 연구 분야, 종교계가 압도적

이 글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서, 교토학파가 한국 종교 및 종교철학 관련 학계에 어느 정도 소화되고 있는지, 연구의 전망은 어떤지, 그리고 교토학파 연구와 관련하여 어떤 과제에 직면해 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가늠해보고자 한다. 정치학 및 문학자 등에 의한 교토학파 관련 논문들도 일부 출판되어 있지만, 한국에서의 교토학파 사상에 대한 연구는 종교 관련 학자들에 의한 연구가 상대적으로 많다. 실제로 관련 단행본들은 대부분 종교 및 종교철학적 저술이나 번역서들이다. 이것은 교토학파가 기본적으로 종교 혹은 종교철학의 언어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한국 내 교토학파 연구는 신학적 배경을 지닌 연구자들의 작업이 불교적 배경을 지닌 연구자들에 의한 것보다 더 많다. 한국에서 교토학파 연구는 ‘종교간 대화’에 관심을 두던 신학자들이 먼저 시도했고, 신학적 지평을 불교적 세계관에 어울리도록 확장하면서 ‘한국적 신학’을 확립하려는 의도의 표현이기도 했다.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형식과 언어를 넘어서는 더 보편적인 언어를 추구하는 이들에 의한 모험적 시도들도 있었다.

교토학파의 난해한 언어 이해가 관건

그렇기는 하지만 교토학파 연구가 충분히 이루어졌다고 할 수는 없다. 한국에서 교토학파 연구는 질과 양 모두에서 여전히 초보 단계이다. 무엇보다 교토학파를 입체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한국인 전문 연구자는 몇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이다. 아직 한국인에 의한 교토학파 전반에 대한 종합적 연구는 나오지 못하고 있으며, 여타의 일본 사상 연구에 비해, 교토학파에 대한 한국인의 연구 성과나 연구자들은 소수에 머물고 있다.

▲ Nishida Kitaro with staffs and students around 1913(K. Nishida, Nishida Kitaro Zensyu, Vol.14 [Tokyo: Iwanami Syoten, 1951]) ⓒhttp://www.kyoto-u.ac.jp/cutting-edge/cutting_edge/page32.html


이것은 순수한 종교철학 연구가 학계의 주류에서 더 주변으로 밀려나는 상황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교토학파 사상가들의 심층적이고 종합적이며 난해한 언어를 이해하기 쉽지 않다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서양의 철학적, 불교적, 신학적 이해가 종합되지 않고서는 교토학파의 논리의 심층을 이해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불교적, 신학적, 순수 철학적 연구들이 점점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류에 편승한 실용주의적 연구가 주류를 형성해가고 있으니, 앞으로도 교토학파 전문 연구자들이 더 등장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물론 교토학파의 사상사적 의미가 종교나 철학 분야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교토학파의 일본 및 동아시아의 정치사적 의미가 적지 않고, 전술했듯이, 한국에서도 일부 정치학 혹은 문학자들이 이 부분에 관한 연구를 내놓고 있기도 하다. 교토학파의 시대적 의미와 정치 사회적 영향력을 고찰하는 연구도 그 자체로 중요한 작업들이다.

하지만 교토학파는 기본적으로 종교 및 철학적 연구 체계로서, 이 학파의 철학 및 논리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그런 영향력의 근원을 간과하는 표층적 연구에 머물 수밖에 없다. 교토학파의 종교철학적 논리와 학문적 종합성 및 정치사회적 영향력까지 두루 소화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의 교토학파 연구에 부족한 점

그런 척도로 본다면, 한국에서의 교토학파 연구는 여전히 그 심층까지 들어가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일부의 영역에 머물고 있거나 각종 연구들이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중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 종교 관련 연구자조차 교토학파의 내밀하고 심오한 철학적 언어를 충분히 소화하기는 간단하지 않은 마당에, 종교 관련 연구자들이 교토학파의 일본 및 동아시아의 정치사적 의미까지 입체적으로 파악하기는 현실적으로 힘에 부치는 일이다.

일본의 정치사적 언어에 익숙한 정치학자가 대승불교의 공(空)사상을 서양철학의 존재론과 일치시키는 교토학파의 논리와 섬세한 언어를 충분히 따라가기는 더욱이나 어려운 일이다. 이 글에서 한국 내 종교 관련 연구자들에 의한 연구를 중심으로 보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종교철학자 중에서도 대체로 신학적 배경을 지닌 이들에 의한 연구가 좀 더 많다. 일부 불교학자들이 교토학파에 관심을 가지기도 하지만, 불교학자는 교토학파의 서양철학적 혹은 신학적 언어를 충분히 소화하기 힘들어하는 경향이 있다. 기독교 신학자는 대승불교적 세계관에 입각한 교토학파의 엄밀한 언어를 충분히 수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런 저런 이유로 한국에서의 교토학파 연구는, 연구자의 관심에 따라 단편적으로 계속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종합적이고 심층적으로 정리한 본격적인 단행본 출판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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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내 교토학파 연구의 시작과 토대한국의 교토학파 연구 현황: 종교계 연구를 중심으로 (3)
이찬수(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 승인 2019.03.29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한국 기독교권에서(아마 전 영역에 걸쳐서도) 교토학파를 다루었던 최초의 인물은 최태용(崔泰瑢, 1897-1950)으로 보인다. 그는 1920년부터 일본에 유학하면서 기독교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內村監三)에게 큰 영향을 받았으며, 1924년 귀국 후 한국의 기성 교회를 개혁하기 위한 운동을 했다.(1)

▲ 최태용 목사는 명시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일본 교토학파의 사상을 수용하고 이론화 하기 시작한 최초의 인물이다. ⓒGetty Image


최태용의 교토학파 수용

1928년에 다시 도일해 메이지 가쿠인 대학(明治學院大學)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교토학파에 대해 알게 되었다. 1932년 귀국 후에 썼던 그의 글에는 니시다 기타로(Nishida Kitaro)가 말하는 장소론을 차용해 “아담의 장소에서 그리스도의 장소에로의 옮김”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그가 전개하는 논리의 구조가 니시다의 장소론 혹은 행위론과 거의 같다. 1936년도에는 니시다의 “절대모순적 자기동일”의 논리에 기대서 “다수와 한 개체는 부정적 관계”에 있으며 “한 개체 즉 다수”라는 논리를 통해 여러 ‘교파들’과 전체로서의 ‘기독교’의 관계를 해명하고자 했다.

나아가 1946년 해방 정국에서 한국적 국민운동론을 만들고 실제로 국민운동을 펼치는 과정에 교토학파 사상가들의 제국이론을 차용하기도 했다. 최태용이 자신의 논리가 교토학파 철학자들에게서 왔다고 명시하고 있지 않고, 그가 교토학파 자체를 연구했거나 체계적으로 소개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국민운동에 뛰어든 1940년대 후반의 강의록 『新國家觀』에 스즈키 시게타카(鈴木成高), 타나베 하지메(田邊元), 미키 기요시(三木淸) 등을 인용하고 있는데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사상 안에는 분명히 교토학파의 세계관이 들어있다.

이미 1930년대에 교토학파의 논리를 일부 소화해 ‘국민’과 ‘국가’, ‘교파’와 ‘기독교’의 관계를 해명하고, 일제로부터의 해방 이후 국민 통합을 통한 국가 구성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구체적으로 농촌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던 그의 전력이 이것을 잘 보여준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홍정완, “해방 이후 남한 ‘국민운동’의 국가·국민론과 교토학파의 철학”(2010)에 잘 소개하고 있다.

감리교신학대학교 변선환 교수의 본격적인 교토학파 연구

한국 전쟁기를 지나 이른바 근대적 학문이 본격 시작될 때까지 한국에서 교토학파에 관한 연구는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들어 교토학파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선구자는 변선환(邊鮮煥, 1927~1995)이다. 토착화 신학 및 아시아 신학의 확립을 위해 종교간 대화를 시도했던 변선환은 스위스 바젤대학(University of Basel)에 늦은 나이에 제출한 박사학위논문(1976)에서 자신보다 젊은 일본의 신학자 야기 세이이치(八木誠一, 1932~)의 신학을 다루었다.

▲ 일본 교토학파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작고하신 고 변선환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Getty Image


귀국 후 감리교신학대학에 재직하면서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 니시타니 케이지(西谷啓治), 아베 마사오(阿部正雄) 등의 사상 전반을 한국 신학계에 소개했다. 그 영향력 하에서 최범철(崔範澈)이 석사학위 논문을 기반으로 “절대무와 한스 발덴펠스의 겸허신학”(1986)를 발표했다. 또한 김광원(金光源)은 “발덴펠스의 생애와 사상”(1988)이라는 제목으로 불교와 소통할 수 있는 신학적 입장을 소개한 소논문을 출판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변선환의 직·간접 제자인 김승철( 金承哲), 이찬수(李贊洙) 등이 교토학파 사유체계를 중심으로 불교와 그리스도교간 대화를 시도하면서, 점차 한국어로 된 본격적 연구 결과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교토학파 관련 서적들의 번역과 출판

▲ 변선환 교수의 제자로 교토학파의 서적을 번역·출판하는데 가장 공을 쏟은 일본 난잔대학의 김승철 교수 ⓒ에큐메니안


한국에서의 교토학파 연구와 관련하여 가장 획기적인 일은 1990년대 초·중반 불교계 출판사 ‘대원정사’(大圓精舍)가 후원하고 변선환(邊鮮煥), 김승철(金承哲) 등 기독교 신학자가 번역에 참여한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 총서’가 발행되었던 일이다.

이 때 교토학파 관련 주요 저술들, 특히 
  • 니시타니 케이지(西谷啓治)의 『종교란 무엇인가』(1994), 
  • 한스 발덴펠스(Hans Waldenfels)의 『불교의 空과 하나님』(1993)이 번역되었다. 
또한 히사마츠 신이치(久松眞一)의 『無神論』(1981)을 
야기 세이이치(八木誠一), 타키자와 카츠미(瀧澤克己), 오다가키 마사야(小田垣雅也) 등의 신학적 응답과 엮어서 번역한
  •  『無神論과 有神論』(1994)이 번역된다. 

그리고 아베 마사오(阿部正雄)가 20여 년에 걸쳐 쓴 주요 논문들을 묶어 번역한
  •  『禪과 現代哲學』(1996), 
  • 『禪과 現代神學』(1996), 
  • 『禪과 宗敎哲學』(1996)이 출판된다.

마지막으로 야기 세이이치(八木誠一)의 『바울과 정토불교, 예수와 선』(1998)이 번역되어 모두 8권의 주요 책들이 출판되었다. 이로 인해 한국에서 교토학파가 본격 연구될 수 있는 기초가 놓이기 시작했다. 필자도 이 가운데 아베 마사오(Abe Masao, 阿部正雄) 저술의 한국어 번역에 참여하기도 했고, 그의 글들에서 사상적 도전을 제법 받기도 했다.

이 가운데 위 8 권의 책의 절반 가량을 한국어로 소개한 이는 김승철(金承哲)이다. 김승철의 노력으로 교토학파(京都學派)가 한국의 일반 종교 관련 연구자들에게 인식되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김승철은 교토학파의 논리를 매개로 불교와 그리스도교간 대화의 이론적 심층을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데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출판사 사정으로 이 시리즈가 폐간되면서(2) 교토학파가 더 많은 이들에게 좀 더 깊게 소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크게 위축되었다. 하지만 이 출판물들은 한국의 연구자들에게 교토학파의 사상적 중요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고, 소규모지만 후속 연구로 이어졌다.

▲ 변선환 교수와 김승철 교수 등에 의해 번역된 출판된 교토학파 관련 서적들. 하지만 출판을 맡았던 대원정사의 폐간되면서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다. ⓒ에큐메니안


미주
(미주 1) 이것은 1935년 ‘기독교조선복음교회’(Korea Evangelical Church)라는 교단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미주 2) 불교전문 출판사에서 기독교 및 신학과 연관된 책을 내는데 대한 교단 내부의 오해 및 수익이 발생하지 않는 데서 오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었다.


이찬수(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chansuy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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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0

「교토학파와 일본 기독교의 문화내개화의 시도」대한 리뷰(야규마코토) : 콜로키움 -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교토학파와 일본 기독교의 문화내개화의 시도」대한 리뷰(야규마코토) : 콜로키움 -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교토학파와 일본 기독교의 문화내개화의 시도」대한 리뷰(야규마코토) 관리자 2017.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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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학파와 일본 기독교의 문화내개화의 시도」에 대하여2 MONTHS AGO BY 무영 정 IN 다시 개벽이다 TAGGED: 개벽, 개벽신문, 개벽신문 63호, 개벽하는 사람들, 원광대학교, 콜로키움


* 이 글은 개벽신문 63호에 게재되었습니다.

– 제5회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대학중점연구 콜로키움

야규 마코토(柳生眞) |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대학중점연구소 연구교수

지난 3월 17일,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의 제5회 대학중점연구 콜로키움이 개최되었다. 이번 콜로키움에서는 <교토학파와 일본 기독교의 문화내개화(文化內開花)의 시도>라는 제목으로 일본 난잔대학(南山大學) 난잔종교문화연구소의 김승철(金承哲) 교수를 발표자로,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의 이찬수 HK연구 교수를 토론자로 모시고 일본을 대표하는 철학 학파인 교토학파(京都學派)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의 일본에서의 토착화, 일본 문화와 기독교 사상과의 조화·융합 시도, 기독교와 불교사상 혹은 자연과학과의 대화에 대해 논의했다.

교토학파(京都學派)는 교토대학(京都大學)을 중심으로 활약한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郎, 1870~1945)와 그의 제자들로 서양의 사상·철학·종교와 동양(혹 일본)의 융합을 시도한 학파로 잘 알려져 있다. 교토학파는 크게 그 내용이 다양하고 종교색이 강한 우파(右派)와 마르크스주의에 접근한 좌파(左派)로 나뉘는데 이번 발표에서는 교토학파 우파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사상의 일본 토착화, 기독교와 불교의 사상적·철학적 융합 시도에 대해 다루어졌다. 김승철 교수가 발표에서 문화 내 ‘개화(開花)’라고 쓴 것은 일본이라는 ‘토양’에서 바깥에서 들어온 기독교라는 ‘씨앗’을 어떻게 뿌리내리게 하고 키우고 꽃피우게 하는가라는 문제의식을 나타낸 것이다.

일본 기독교의 특수성
일본의 기독교 포교는 1549년 성 프란시스코 자비엘이 전국시대 일본에 와서 로마가톨릭 선교를 시작한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금교령을 내린 이래로 도쿠가와 막부는 에도시대를 통틀어서 기독교 포교를 하지 않기로 약속한 네덜란드를 제외한 모든 서양국가와의 외교·통상 관계를 전면 금지시키고 철저한 기독교 탄압정책을 취했다. 1853년에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국 함대의 내항으로 인해 도쿠가와 일본이 개국했다. 그 이후 일본에 오는 서양인이 개인적으로 기독교를 믿거나 서양인끼리 성당·교회를 가지는 것은 허락되었으나 일본인이 기독교를 믿거나 일본인에게 포교하는 것은 계속 금지되었다.

심지어 유신 초기의 메이지정부(明治政府)도 애당초 기독교 탄압 정책을 계승했고 가쿠레 키리시탄(숨은 기독교신자. 몰래 가톨릭 신앙을 지키던 사람들)을 강제 이주시키기도 했다. 서양 각국의 압력과 비판을 받고 메이지정부가 기독교 탄압을 중지한 후에도, 또 대일본제국헌법(1889년 공포, 1890년 시행)으로 신앙의 자유(제국헌법제28조)가 보장된 이후에도 일본 기독교는 늘 반일본적이고 반국가적인 종교라는 이유로 사회 지도층, 보수층의 반발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 사이에 기독교에 입신한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기독교를 일본의 문화적 토양에 뿌리내리게 하는 시도가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1945년의 패전 후 일본국헌법에서는 “국가의 안녕질서에 위배되지 않는 한”이라는 규정이 없어지고 완전한 신앙의 자유가 인정되었다(일본국헌법 제20조 제1~3항). 그 후 옛날과 같은 기독교에 대한 시기와 적대감, 경계감은 거의 없어졌다. 하지만 기독교(가톨릭, 성공회 등도 포함해서) 신자 수는 일본 인구 약 1억2천만 명 중 불과 1%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 혼합적인 일본의 풍토를 가리켜 흔히 “일본인은 연초에 신사(神社)에 참배하고, 기독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절에서 장례식을 지낸다.”고 농담처럼 말해진다. 기독교가 운영하는 학교나 대학, 병원도 많다. 크리스마스나 밸런타인데이와 같은 기독교 유래의 연중행사가 정착된 지도 오래다. 이러한 현상을 보면 오늘날 일본에서 기독교는 표면적, 주변적, 부수적인 것은 잘 받아들여졌다고 할 수 있다. 그 반면에 가장 핵심적인 유일신(唯一神) 신앙, 혹은 하나님과 1대1로 맞서는 강렬한 자아의 개념은 여전히 서양적인 것, 또는 비일본적인 것으로, 다시 말하면 일본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 몇 백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낯선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기독교계 내에서는 다수파의 일본인에게 어떻게 유일신 신앙을 수용시키느냐가 계속 고민거리가 되고 있다.

한편 일본을 거울삼아 기독교 스스로를 보았을 때, 기독교의 유일신 신앙이 너무 비타협적이고 불관용적이어서 다른 문명·문화·종교와에 갈등, 대립을 빚지 않았을까, 다종교·비기독교문화에 대해 너무 억압적이고 패권주의적이며 제국주의적으로 임하지 않았을까, 너무 인간중심주의가 아니었을까 하는 반성도 제기되었다. 일본, 더 나아가 아시아의 종교와 사상, 특히 불교와의 대화는 그러한 기독교의 자기반성의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교토학파의 기독교와의 대화
종교 간 대화를 추진해 온 신학자인 얀 반 브라흐트(Jan Van Bragt)는 기독교가 불교와 대화해야 할 동기에 대해 다음 세 가지를 들었다.

첫 번째는 토착화의 동기, 즉 너무 서구 기독교를 직수입한 일본 기독교를 “일본인의 마음의 금선(琴線)에 와 닿는 예수의 얼굴을 찾아서” 한 명이라도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알리게 한다는 동기이다. 가톨릭 문학자인 엔도 슈사쿠(遠藤周作)는 일본인 기독교도로서 영성, 죄와 구원, 그리고 “예수란 누구인가”라는 문제에 나름대로 답을 제시하려 했다. 최근에 영화화된 『침묵(沈默)』에서 그려진 예수의 모습, 탄압을 견디지 못해 후미에(踏畵)1를 밟고 기교(棄敎)하려 한 선교사로 도리고 신부 앞에 예수가 나타나 “밟아라. 너에게 밟히기 위해 나는 왔다.”고 말한 “동반자로서의 예수”의 모습에는 교회 내에서도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두 번째는 대화의 동기, 즉 소수파로서의 기독교인들 주변에 있는 대다수의 불교도와 대화하고 신학적 통로와 중계를 마련하려는 동기이다.

세 번째는 탈 서양적 형이상학의 동기이다. 이것은 지상적 존재를 정초(定礎)하려고 형성된 그리스 철학의 논리가 종교적 사실, 특히 셈족(유태)적 사고방식에 그 근원을 둔 기독교를 표현하는 데 어울리지 않는다는 자각과 함께 그 희랍적 범주나 논리를 가지고 표현된 신학(과 그것에 의해서 만들어진 “신앙과 이성”의 대립)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서구적 기독교 신학의 발목을 잡고 있는 신앙과 자유와의 갈등, 대립을 불교철학의 논리를 도입함으로써 풀고자 하는 것이다.

혼다 마사아키(本多正昭)는 기독교인으로서 불교의 “즉(卽)의 논리”와 만나면서 기독교에의 입신이 단순한 불가역성(不可逆性)이 아니라, 그것과 동시에 사랑과 자유와 신뢰와 사귐은 가역성의 지평에서 피어나는 꽃이기 때문에 저 불가역성이 이러한 가역성의 인(因)이라고 해야 된다고 말했다. 또 가톨릭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오노데라 이사오(小野寺功)는 가톨릭 신학과교토학파의 총수인 니시다 기타로 철학의 “장(場)의 논리” “절대무(絶對無)의 장소”를 접목시킴으로써 일본적 영성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는 “니시다의 ‘장소’론은 기독교적인 ‘삼위일체가 거기에 있는 장소’(三位一體のおいてある場所)로서 파악할때, 실로 의미 깊은 해결책이 마련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볼 때 “일본적 영성의 실존적 자각의 논리인 ‘절대무의 장소’의 사상과, 성서와 교회의 신앙적이고 계시진리의 근본적인 논리 구조를 나타내는 삼위일체론은 가장 깊이 상접(相接)하는 하나의 진실의 사태가 된다.”고 말했다.

오노데라는 일본적 영성(靈性)을 “대지적 영성”, “대지성(大地性)”이라고 설파한 불교학자이자 일본 선불교와 선문화를 영어로 외국에 소개한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와도 친교가 두터웠다. 그는 “우리들의 이성에 있어서 절대무인 근원은 기독교적인 신앙 의식에 있어서는 삼위일체적 구조를 취한다. 그리고 니시다가 말하는 절대무의 장소는 절대와 상대가 교류하는 장소, 또는 참된 신성과 참된 인성이 탄생하는 ‘장소’인 어떤 대지적(大地的) 영성(靈性)의 이념화의 시도이고, 성경의 ‘거기에 있어서 있는 장소’로써 절대자의 자기사영점(自己射映點)이라고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다시 말하면 절대무의 근원이 기독교적인 신앙의식으로는 삼위일체론이 되고, 니시다가 말하는 절대무의 장소는 대지적 영성의 이념화임과 동시에 절대자가 스스로를 투영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의 철학은 가톨릭 신학과 니시다 철학, 스즈키 다이세츠의 철학을 아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신학자인 야기 세이이치(八木誠一)도 기독교인으로서 불교를 배우고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를 시도했다. 그는 “구원이란 인간의 개인적·사회적인 본래성, 전체성의 회복이고, 그 중심은 원래 자기·자아인 인간이 자기·자아로써의 자신을 자각하는 것이지만, 이 ‘자각’은 기독교적 메시지의 중심임과 동시에 불교적 깨달음(覺)과 본질적으로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또 야기는 “… 예수는 사람이 어떠한 교단에 속하는 어떠한 교의를 받들고 있는가가 아니라, 사람의 존재방식이 사실상 무엇에 의해서 결정되고 있는가가 문제라고 가르쳤다.”고 하면서 기독교의 배타성을 비판했다.

교토학파를 비롯한 일본의 종교철학자·신학자·사상가들의 기독교와 불교와의 대화, 접목 시도는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를 시도한 반 브라흐트나 종교다원 주의를 주장한 존 힉(John Hick)과 같은 기독교 절대주의와 배타성에 반대한 종교 철학자·신학자와도 호응하면서 니시다의 “절대무의 장소”, 스즈키의 “대지적 영성”, 그리고 불교의 “깨달음”(覺)의 논리 등을 통해 기독교 신학과 불교와의 접목, 서구기독교의 배타성(排他性)·독선성(獨善性) 배제, 그리고 일본의 지적 풍토에의 기독교 토착화를 시도했다.

한국적 상황에서 보는 교토학파와 기독교와의 대화
일본이 근대화한 이래로 기독교 또는 서양문명·철학을 수용하거나 그것에 대응·대결할 때에는 불교사상 중에서는 특히 선불교(그리고 그것에 유래하는 니시다의 장소론, 스즈키의 대지적 영성론)를 내세웠다. (유교사상을 내세울 때는 양명학(陽明學)을 내세워 기독교나 독일관념론과 대비시키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김승철 교수는그 배후에 서구 근대적 사유의 근간이 되는 근대적 자아에 대한 일본 지식층의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지적한다.

다만 종교다원주의의 사상적 전통과 시도는 일본만의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인도, 중국, 한국 등에서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졌던 범아시아적인 사상적 맥이다.
동서양의 사상적 대화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고, 또 계속되어야 하겠지만 그때 한국이나 중국에서는 어떤 사상이 주로 서구사상 또는 기독교를 맞이할 “호스트” 역을 맡느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김승철 교수는 불교의 경우 한국에서는 한용운(韓龍雲)이 화엄사상(華嚴思想)을 내세웠고, 중국에서는 유식사상(唯識思想)이 여러 사상가들에 의해 주목을 받았다고 지적했다.

이찬수 교수는 “김 교수님의 발제 내용은 한국적 상황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고 논평하면서 “두 가지 생각거리”를 제시했다. 하나는 교토학파의 니시다의 수제자이자 니시다철학의 비판자인 타나베 하지메(田邊元)의 사상이다. 타나베는 니시다의 “즉(卽)”의 논리에게는 “매개”가 결여되고 있어서 불충분하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면『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고 할 적에 공(空)을 색(色)과 “즉(卽)”하게 해주는 매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매개를 중시하지 않고서는 절대무가 자기를 한정해 사물의 세계로 나타나는 과정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식의 근저에서 “인식하려는 의지(Willezur Erkenntsis)”가 도덕적 실천을 통해 인간적 오성과 신적 직관을 연결하는 매개로 적용한다고 지적했다.

타나베는 일본 정토진종(淨土眞宗)의 개조인 신란(親鸞)의 사상을 들어서 아미타불(阿彌陀佛), 그리고 그 본원(本願), 중생의 신심(信心)의 세 가지를 중요한 요소로 요약할 때 “신심”은 바로 매개에 해당된다고 한다. 아미타불은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 극락정토에 인도하지 않는 한 성불하지 않겠다고 하는 본원을 세우셨고, 아미타불의 은총과 중생의 신심은 별개의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신심이야말로 아미타불의 본원을 구체화시켜주는 매개임은 틀림없기 때문이다(신심이 없는 중생은 아미타불의 본원을 인식하고 깨달을 수 없다). 타다베는 신란의 사상에서 니시다가 보지 못했던 “매개”의 구조를 발견한 뒤 이것을 진리 체험의 타력적 차원에서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면 그는 교토학파이면서 니시다적인 “절대무의장”이론에 부족한 “매개”에 주목하여 독특한 구제론(救濟論)을 전개한 것이다.

또 이찬수 교수는 불교와 기독교의 관계를 그림으로 표시하면서 양자 사이에는 서로 겹치는 공통성의 겹치지 않는 문화적 차이의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기독교만이 아니라 불교에도 역시 일종의 도그마성이 있고, 또 불교 자체가 기독교나 서양철학과 만나서 변화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제 “문화내(文化內)”가 아니라 서로가 문화의 틀을 뛰어넘는 것이 필요할 거라고 덧붙였다.

남은 과제들
종합토론에서는 “왜 한국 사람으로서 종교다원주의라고 말하고 종교회통주의(宗敎會通主義)라고 말하지 않는가?”라는 지적이 나왔다. “종교다원주의”는 오히려 하나의 신성(神性)이 다양한 모습(종교)으로 표현된다는 생각이기 때문에 “다원(多元)”이라는 말은 어색하다. 그것보다 오히려 원효(元曉)의 화쟁회통(和諍會通) 이래 흔히 쓰여 온 “회통”이라는 말이 더 바람직하다는 느낌이 든다. 또 조선 시대에도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청나라에서 많은 서학(西學) 서적들을 가져와 동서 회통을 시도한 적이 있고, 19세기의 최한기(崔漢綺)와 같이 자타(自他)의 통(通), 동양전통의 기철학과 서양과학과의 통, 정치의 통, 사회경제의 통, 심지어는 교(敎)와 교 사이의 통까지 포괄적으로 논리화한 사상가도 있었다. 그리고 동학(東學)의 최제우(崔濟愚)는 “내유신령(內有神靈), 외유기화(外有氣化)”라고 하는 기독교와도 불교, 또는 유교와도 완전히 다른 영성론을 주장했다. 이렇듯 한국에는 깊고 오래된 사상적 전통이 있고 서구 기독교와의 대화도 충분히 가능한 역량과 내용이 있기 때문에 그쪽에 더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또 이번 회의에 청중으로 참석한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은 26년간 교토포럼을 주재해 온 경험에서 “대화할 때 대화자가 어떤 입장에 서 있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면 가장 일본적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야 일본과 대화했다는 말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화 내 개화”라는 대목에 대해서도 일본은 외부의 문화·사상을 받아들여서 자기 토양 속에 끌어들여서 “개화”시키는 것은 잘 해왔기 때문에 이제 문화의 문화 사이의 “문화 간 개화”로 나아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교토포럼을 하면서 교토학파의 학자들과 늘 논쟁을 벌여온 것이 바로 니시다 철학의 “절대모순(絶對矛盾)의 자기동일(自己同一)”의 논리였다고 한다. 이 논리는 필경 동화(同化)의 논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지금 필요한 것은 한사상·한철학이 지니는 “절대모순의 자타상생(自他相生)”의 논리, 즉 자기와 타자가 모순이 있어야 오히려 서로, 함께 산다는 논리를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주석
1 후미에는 예수 또는 성모마리아를 부조한 동판을 가리킨다. 에도시대에 몰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천

2023/06/04

이찬수 지음 (메이지의 그늘)을 읽었다

불교평론 2023
[불교평론(2023년 여름 94호) 목차]
종교와 일본 국가주의 관계를 파헤치다
-이찬수 지음 (메이지의 그늘)
이명권 코리안아쉬람 대표, 비교종교학자

•일본의 사상과 문화, 동아시아의 종교와 평화 연구자. 서강대학교 화학과를 거 동 대학원 홍교하과에서 박사와 위를 받았다. 강남대 교수, 서울대 통일평화연구 원 1연구교수, 코세이 가쿠린 객원교수, 일본 중앙학술연구소 객원연구원, 임 본 난산대학 객원연구원, 성공회대 대우교수 등을 지냈다. <일본정신><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 교토학파와 그리스도고> <사회는 왜 아픈가> 등 에어 컨의 단행본(공저서, 번역서 포함)과 90여 편의 논문을 출판했다.

이찬수 교수의 책 《메이지의 그늘>을 읽었다. 부제는 '영혼의 정 치와 일본의 보수주의다. 종교학을 전공한 저자가 '평화학을 시도 하면서 일본이 근현대사에서 보여준 보수 정치가 어떻게 '영혼의 정치'와 연결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저자 이찬수*는 <영혼의 정치학: 천황제와 신종교의 접점>(2013), 〈천황제, 군국주의, 그리고 선(배): 스즈키 다이세츠로 선을 되문기>(2021) 등의 논문에서도 잘 보여주었듯이, 종교학자로서 출발한 일본 연구의 성과를 베이지 시대에 나타나는 부정적 국가 이미지에 대하여 '영혼의 정치라는 환점에서 한 권의 책으로 담아내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메이지 시대 이래 국가를 위해 죽은 이의 영혼, 이른바 '호국영령' 을 국가적 차원에서 제사하며 제사 대상의 정점에 있는 천황을 중심 으로 국가를 통합시켜 온 지난 백여 년 이상의 일본 정치문화를 정리 했다.
총 7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메이지 시대와 그 그늘을 분석하면서 한국과 일본은 왜 꼬였는지를 묻고, 일제 강점기와 임진왜란, 그리 고 그 후 메이지 천황을 내세운 메이지(매) 정부(1868-1912)는 한국에게 여전히 억압적인 영향으로 남아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조선 정벌의 정한론(44.C)을 내세운 일본 보수 세력이 정일 전쟁을 일으킨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 일본 보수주의 정치가 종교 와 관련하여서도 어떤 방식으로 작동했는지에 대해 저자는 일본 전 체에 해당하는 '정치적 종고, 혹은 종교적 정치'의 방정식을 풀어낸 다. 그것이 '호국영령과 애국주의와의 관계다. 죽은 이의 영혼을 국 가 차원에서 제사를 지내는 '제사의 정치'로 사회와 국가를 통합하 면서 정부 정책을 정당화해 간 것이다.

이 같은 군국주의의 길은 민간의 오랜 정령숭배 전통인 신도(해
30)를 환용한 것이었다. 천황(제보)은 (일본서기)의 건국신화에 나 오는 천상의 주재신 아마테라스의 자손으로 중배되고, '신도의 세 계관은 국가적 통합정책에 이용된다. 신도의 세계관은 위로받지 못하고 죽은 원형(25%)이 인간에게 것들면 불행이 생긴다는 민중적  사고방식의 일본 전통: 중고다. 그리하여 호국영령도 전물자의 원령이 국가의 수호신이 될 수 있게 하는 메이지 정부의 '종교적 정치라 는 점은 저자는 보여준다. 이러한 :종교적 정치'는 야스쿠니신사에

Amazon.co.jp: 「近代の超克」と京都学派 近代性・帝国・普遍性 : 酒井 直樹, 磯前 順一: Japanese Books

Amazon.co.jp: 「近代の超克」と京都学派 近代性・帝国・普遍性 : 酒井 直樹, 磯前 順一: Japanese Books




「近代の超克」と京都学派 近代性・帝国・普遍性 Tankobon Hardcover – November 30, 2010
by 酒井 直樹 (編集), 磯前 順一 (編集)
5.0 5.0 out of 5 stars 2 ratings
Paperback
from ¥5,580
4 Used from ¥5,580

「近代の超克」が提起した問題を、パックス・アメリカーナが揺らぎ始め、国際秩序の再編の時期に、近代性、帝国、普遍性など優れて現代的な視点から歴史的な再検討を試みる。ことに、「近代の超克」の座談会には参加しなかった三木清も含め、西田幾多郎から田邊元を経て、第三世代の三木や西谷啓治へ繋がっていく京都学派は、特に新カント派、マルクス、ヘーゲル、フッサール、ハイデッガーを丹念に読破し、西洋近代思想の受容に多大な成果を上げると同時に日本特有の文化という言説を創出していった。その壮大な経緯の批判的な検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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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版社からのコメント
アジア・太平洋戦争の最中1942年の座談会「近代の超克」をめぐる、日本、欧米、アジアの研究者による国際シンポジウム。
内容(「BOOK」データベースより)
アジア・太平洋戦争のさなか、1942年の座談会「近代の超克」をめぐる、日本、欧米、アジアの研究者による国際シンポジウム。「近代の超克」の座談会には参加しなかった三木清も含め、西田幾多郎から田邊元を経て、第三世代の三木や西谷啓治へ繋がっていく京都学派は、特に新カント派、マルクス、ヘーゲル、フッサール、ハイデッガーを丹念に読破し、西洋近代思想の受容に多大な成果を上げると同時に、日本特有の「文化」という言説を創出してきた。その壮大な経緯を批判的に再検討する国際シンポジウム。

著者について
酒井直樹(さかい なおき):1946年生まれ。シカゴ大学人文学部極東言語研究学科博士課程修了。現在,コーネル大学教授。著書に,『日本思想という問題』(岩波書店)『過去の声』(以文社)『希望と憲法』(以文社)など多数。 〈br〉 磯前順一(いそまえ じゅんいち):1961年生まれ。国際日本文化研究センター准教授。東京大学大学院博士課程中退。著書に、『記紀神話と考古学―歴史的始原へのノスタルジア』(角川学芸出版,2009年),『喪失とノスタルジア―近代日本の余白へ』(みすず書房,2007年),『近代日本の宗教言説とその系譜―宗教・国家・神道』(岩波書店,2003年),その他。
著者略歴 (「BOOK著者紹介情報」より)
酒井/直樹
1946年生まれ。シカゴ大学人文学部極東言語研究学科博士課程修了。現在、コーネル大学教授

磯前/順一
1961年生まれ。文学博士(東京大学)。現在、国際日本文化研究センター准教授(本データはこの書籍が刊行された当時に掲載されていたものです)

Publication date ‏ : ‎ November 30, 2010
Language ‏ : ‎ Japanese
Tankobon Hardcover ‏ : ‎ 368 pages

#2,221 in Introduction to Eastern Philoso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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うちのネコさん

5.0 out of 5 stars 「外縁部を持たない空間のうちにこそ余白あるいは残余といったものは見出しえるのだ」(磯前順一、P.357)Reviewed in Japan on June 6, 2020
Verified Purchase
新型コロナウイルス関連で少々。2020年6月1日(月)の朝日新聞朝刊1面、2面に「アベノマスク」関連で「布マスク「質より量」 迷走」(1面の題名)として特集記事がありました。その中で、2面に下記のような文章があります。

「マスク確保に関わった政府関係者の一人はこう振り返る。「『マスクを何とかしろ』という官邸の声の大きい人が言ったことが通り、無理に無理を重ねた」。関係者らの間では、今回の配布計画は第2次世界大戦中の日本軍による「インパール作戦」にたとえられているという。司令部がずさんな作戦を強行して多くの犠牲者を出し、「大戦中最も無謀」と呼ばれた作戦だ(中田詢子、相原亮)」

ちょっと前に、「NHKスペシャル 戦慄の記録 インパール」を2~3回視聴しました。戦闘中の死傷者よりも作戦中止が決まった後の撤退のなかでの死傷者(河での溺死、マラリア等での病死や餓死、自決した者、等々)の方が圧倒的に多く、牟田口廉也(インパール作戦の責任者?)に仕えた斎藤博国少尉の日誌も「効果的」に使われていて、その「無謀さ」が骨身にしみました、日本軍上層部の無責任さも同様に。しかし、アジア・太平洋戦争中の各種作戦に関して、「計画」&結果ともに「無謀」で無かったものがあるのでしょうか。満州事変に始まり(もっと前からでしょうが)、日中戦争、ノモンハン、ミッドウェイ、サイパン、ガダルカナル、朝鮮半島・沖縄・満州・樺太、そして、戦艦大和の「海上特攻隊」、「本土決戦」等々等々。

安倍晋三の各種政策・作った法律等々は皆「無謀」そのものです、新型コロナウイルス関連で始まっ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彼の政策は全て「大本営発表」です、つまりフェイクニュースということですが、社会に埋め込まれた「地雷」でもあります、今後、どんどん破裂して、国民に危害を加えていくでしょう、コロナ禍と同じように。過去の法律も理解せず、憲法も理解せず、「独裁」のやりたい放題です。それを許す国民が大勢いますから、処置なしではありますが。
「新学期9月開始」も撤回のようです、馬鹿丸出しで、弱ったものです。それ以外にも、補正予算のなかに、安倍一族関連企業(ex. 電通やパソナ等々)を儲からせる算段が目白押しのようです(各種「トンネル法人」(官僚の天下り先法人)もあるようです、「持続化給付金」関連で「一般社団法人サービスデザイン推進協議会」という組織とか、「幽霊会社」みたいですが)。そして、第二次補正予算のなかに、安倍晋三が「フリーハンド」で使える金を、10兆円も潜り込ませているとか、とんでもないことです、「馬鹿につける薬」です。東日本大震災の復興予算を、復興とは関係ない道路事業等々に大量に「横流し」したのと全く同じ構図です。安倍一族自民公明党の政治屋連中、「高級」官僚、経団連のいつもの「手」です、「血税」の使いたい放題です。新型コロナ専門家会議の議事録がない、という問題もあります、これも大変な問題です、証拠隠滅・改竄・焼却等々以前の問題です。

「戯言」はこれくらいにしないと、「馬鹿」に「感染」してしまいますので、止めにします。本書(『「近代の超克」と京都学派 ―― 近代性・帝国・普遍性』(酒井直樹・磯前順一編、2010年11月30日初版第1刷発行、2010年12月20日初版第2刷発行、以文社))の引用紹介をします。傍点、傍線、まるぼしは、≪ ≫で代替します。引用文全体は、【 】で囲みます。引用文中の引用は、< >で囲みます。

まずは、本書の諸論稿の題名と著者名等を下記します。

●「序 パックス・アメリカーナの下での京都学派の哲学 酒井直樹、高橋原訳」(P.3 ~ P.28)

■「1 「近代の超克」と京都学派」(P.29 ~ P.122)
●「「近代の超克」と京都学派 ―― 近代性・帝国・普遍性 磯前順一」(P.31 ~ P.73)
●「座談会「近代の超克」の思想喪失 ―― 近代とその超克をめぐる対立 藤田正勝」(P.75 ~ P.94)
●「西谷啓治と近代の超克(1940 - 1945) J.W.ハイジック」(P.95 ~ P.122)

■「2 三木清と帝国の哲学 ―― 普遍性をめぐって」(P.123 ~ P.180)
●「東亜共同体論と普遍性をめぐって ―― 主体的技術論序説 酒井直樹」(P.125 ~ P.162)
●「「近代の超克」と「中国革命」 ―― 戦後日本思想史における二つのモメント 孫歌」(P.163 ~ P.180)

■「3 「近代の超克」と「世界史的立場と日本」 ―― 帝国の役割」(P.181 ~ P.232)
●「「近代の超克」思想と「大東亜共栄圏」構想をめぐって 鈴木貞美」(P.183 ~ P.210)
●「同化あるいは超克 ―― 植民地朝鮮における近代超克論 金哲」(P.211 ~ P.232)

■「4 総合研究:日本における西洋近代の経験」(P.233 ~ P.349)
●「近代との格闘 ―― ジェイムズ・カズンズと日本・インド・脱植民地の文化 ゴウリ・ヴィシュワナータン、三原芳秋訳」(P.235 ~ P.264)
●「西洋の針路の喪失/東漸の終焉と脱ヨーロッパ化 ヘント・デ・ヴリース、苅田真司訳」(P.265 ~ P.320)
●「「西側」近代性に対する抵抗と、「東洋的」沈潜への誘惑と 稲賀繁美」(P.321 ~ P.349)

●「あとがき ―― 討議の後で 磯前順一」(P.350 ~ P.357)

●「執筆者紹介」(P.358 ~ P.359)

上記の諸論稿のうち、まず磯前順一の「あとがき」から、若干長く引用します。これが、分かりやすくまとまっていますので。それから、酒井直樹の論稿と稲賀繁美の論稿から引用します。それ以外にも引用したい文章は数々あるのですが、酒井・稲賀論稿だけでも尻切れトンボになりそうですので、致し方ありません。

半分以上の著者が、書評者にとっては初めてですし、論稿中に出てくる人物(たとえば、ゴウリ・ヴィシュワナータンの論稿のジェイムズ・カズンズ、ヘント・デ・ヴリースの論稿のワシリー・グロスマンやエマニュエル・レヴィナス、J.A.ハイジックの西谷啓治、等々。西谷啓治やレヴィナスは、名前は知っていますが、その著書は読んでいません)でも知らない人物が多数います。しかし、多少難しい内容で理解が行き届かない面も多々ありますが、それぞれ非常に勉強になり今後の書評者の「本読み」の参考になります。

では引用紹介を始めます。

●「あとがき ―― 討議の後で 磯前順一」(P.350 ~ P.357)

【 「 幕末の西洋世界への開国がもたらした不平等条約によって、植民地化という大きな圧力の下に日本は置かれていた。そういった状況の中で、日本人は一方では西洋になりたいのだが、他方では西洋に反発するといった、相反する欲求の葛藤を抱えるようになる。ただし、日本が国家の独立を達成するために西洋諸国と競わ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限りでは、こういった二重の欲求もまた基本的には西洋化によって規定された状況が生み出したものであった。このような文脈のなかで、日本あるいは東洋と西洋といった表象が相互依存的なかたちで人々に想像されるようになっていったのだ。さらに日本以外のアジア地域もまた、一方では日本によって植民地=文明化されるべきものとして、たとえば1910年の韓国併合のように、日本がアジアを侵略していった明らかな事実があるにも関わらず、アジアは日本とともに西洋に立ち向かうべきものとして、そこでも二重性を帯びた存在として表象されていった。すなわち、日本はアジアに対しては西洋であり、西洋に対してはアジアであったのだ。

こういった意味において、「近代の超克」あるいは「世界史の哲学」といった言説は、本質的に曖昧さを含むものであらざるをえなかった。しかし、それが日本帝国による他民族の包摂という政治的課題を抱えた状況のなかで生じたものであるがゆえに、これらの言説はある種の普遍性、すなわち帝国の支配下に置かれた他民族との共存を志向する性質を帯びることは避けがたいものであった。場合によっては、日本人みずからが帝国における日本民族の位置を脱中心化する契機を含まざるをえなかったのである。戦後の京都学派をめぐる議論の多くは、京都学派に属する者自身の主張も含め、戦後の日本社会が単一民族の国民国家といった装いをまとうようになったために、かつて三木清や田辺元が思考したような他民族と共存し、かれらを統合しうる帝国としての世界史規模での普遍性の論理の模索を放棄してしまったといえる。今日、イスラームとキリスト教といった異宗教間の問題だけでなく、新たな自国内への移民者や内地植民地の民として政治的に同化されてしまったマイノリティの人々といった、国内外における他者との共存の倫理が急務とされる社会においては、いま一度、戦前の京都学派が抱え込んだ普遍性の問題を、共存の倫理へと道を開くものであると同時に他者への暴力行為へと転じうる危険性として見つめ直していく必要があろう。

そして、座談会「近代の超克」のように西洋中心主義を批判するという行為は、そのアンチテーゼとして東洋という言説を固定的な実体として立ち上げることにもなりかねず、典型的なセルフ・オリエンタリズムの表象回路へと落ち込んでいく危険を孕んでいた。すなわち、西洋に対抗して、自文化を非西洋的な特殊性の論理のもとに表象することは、たしかに西洋を批判するためには有効な手段ではあり得るのだが、同時に自文化を排他的な本質主義化させることにもなり、結局は<西洋対日本あるいはアジア>といった二項対立的な表象を固定化させることになる。「近代の超克」とは、このような二項対立的思考を立ち上げる言説にはかならなかった。そのような語りのもとでは、もはや日本が西洋近代化という逃れざる空間の内部にあることが忘れ去られ、あたかもその空間の外部に独自の特殊の文化として日本文化あるいはアジアの文化圏が屹立しているかのような錯覚を生み出すのである。日本帝国の論理が結局のところ、他者による自己変革を前提とする普遍性ではなく、同質化された自己の特殊性を他者に押し付ける普遍主義に終わってしまったのは、西洋に対抗する自文化側の単位をアジア側に措定したにもかかわらず、その広域圏を同質な特殊性のもとに一元的に捉えようとする欲望が勝ったためである。

興味深いことは、このようなセルフ・オリエンタリズム的表象は、戦中期に京都学派の哲学者をはじめとする日本の知識人が西洋に対抗するなかで自ら作り上げた言説であったのだが ―― むろん、同時に西洋の知識人もまた日本を否定的な形で特殊化することで自文化を同質なものとして表象していったわけだが ―― 、戦後になると今度は西洋の知識人が京都学派の哲学を肯定的に特殊化し、自らの西洋的伝統を批判するために日本の京都学派の研究者と協調していったことである。京都学派は叡智に満ちた神秘的哲学といったふうに。それは西洋中心主義に対する批判としては一見有効に見え、論じられた当の日本人にとっては自分たちが西洋の限界を乗り越えた東洋の叡智と名指されるだけに、そのナルシシズムをくすぐられるといった効果を生み出してきた。しかし、戦中期の京都学派がそうであったように、西洋と日本が異質なものであるといった二分法をつくりあげ、実際の他者のあり方を無視した、現実離れした排他的表象を幻想的に作り上げてしまう点に根本的な問題がある。そこには自己のナルシシズムに亀裂を入れるかたちで、他社に出会うという機会がまったく逸せられてしまっているのだ。

このような日本と西洋あるいはアジアと西洋を二項対立的に捉える思考の魔力は、「近代の超克」や「世界史の哲学」といった日本人の言説を被植民者の側へと流用して、抵抗の言説に読みかえようとした朝鮮半島の知識人もまた逃れがたいものであった。しかし、おそらくは台湾や満州も含め、日本の支配下に置かれた東アジアの知識人は、近代の超克や世界史の哲学の議論を読み替えることで、日本文化の特殊性を正当化するためではなく、その支配に対する抵抗の論理として、あるいは転向と呼ばれるような積極的な同化行為を通じて、同化対象である日本帝国のアイデンティティに異質性や変容をもたらす試みをおこなっていた。その過程において、西洋と朝鮮あるいは日本と朝鮮といった二項対立的な表象の図式自体が脱臼されようとしていたことは十分に考えられよう。

安易に「近代を超克する」や「世界史の普遍性」といった言説に同化されることなく、このような近代の抱えるアポリアのなかに身を置いて思考していくこと。それはけっして西洋近代という空間の外部に自分たちが立ちえるのだ、あるいは近代を「超克」し得るのだというような幻想に陥ることなく、その内部からさまざまな二項対立的な境界線を脱臼させていく抵抗の試みを模索していくことを意味しよう。外縁部を持たない空間のうちにこそ余白あるいは残余といったものは見出しえるのだ。それが日文研の討議だけでなく、京大や立命館の企画を通じて、その参加者たちにもたらされた共通認識であったように思われる。そのなかで、普遍性と特殊性、抵抗と同化、帝国と国民国家、あるいは日常を異化する働きとしての宗教や哲学の可能性、これらの主題を考え続けていくことが、今日の思想状況にとってもなお大きな課題であり続けていることが確認されたのである。」(P.354 ~ P.357) 】

酒井直樹の論稿から3か所、稲賀繁美の論稿から3か所、引用紹介します。

●「序 パックス・アメリカーナの下での京都学派の哲学 酒井直樹、高橋原訳」(P.3 ~ P.28)

谷崎潤一郎の「陰影礼賛」の「評価」に関する文章、京都学派の「普遍性」に関する文章(2か所)、を引用します。

【 「 奇妙なことだと言ってよいと思うが、これまで「陰影礼賛」はノスタルジックな文化主義をおおっぴらに支持するものとして評価されてきた。しかし、注意深く読んでみれば、この随筆が日本文化を崇め奉る文化主義の滑稽さを描いてみせたものであることもわかる。これはいわば「立ち小便の姿勢から奏でられた日本文化論」ということになるだろう。伝統というものに期待されるようなあらゆる生真面目な特質を、古風な日本家屋の暗く汚辱な部分と結びつけ、谷崎は笑いを誘うようなちぐはぐな感じを生み出し、古きもの、不便なもの、歴史的なものを愛でるエキゾチズムを笑い飛ばしているのである。このユーモアに満ちた随筆をサイデン・ステッカーは、ご丁寧にも、日本の伝統の礼賛と読み込んだのである。他の作品にも概して見られることだが、谷崎は並外れた批判精神の持ち主であり、しばしば性的な立場性という視点から二項対立の機能を寓話化することによって、近代対伝統だとか、西洋対東洋といった包括的な二分法に疑問を投げかけることができた文学者であった。谷崎は権力関係において性がきわめて重要であることを理解していた戦前日本の数少ない文学者の一人であったといってよいだろう。」(P.6)

「 京都学派が目指しているような種類の哲学は「土着の」(ただし、そもそも私はいかなる「土着の認識論」という観念にもきわめて懐疑的であるが)知識から決定的に切り離されている。そのかぎりにおいて、京都学派の哲学を研究する際の第一の課題は、そのテキストにおける哲学的構造と概念的一貫性を理解することである。同時代の日本社会についての知識が問題となるのは、歴史的評価と社会-政治的含意の検討という第二の課題に取り組むときである。たしかに、第一の課題の領域を第二のものと区別することが困難なのは事実である。しかし、第一の課題をこなせなければ京都学派についての理のかなった研究はできない。いわゆる日本専門家と称する者たちはたいてい第二の課題を得意としているが、第一の課題に対して勤勉に取り組んでいるとは限らない。彼らのなかには第一の課題を行う能力に欠けている者が多くいるというのが実情ではないか。」(P.16)

「 私自身の教室での経験からいえば、たとえ「日本文化」について非常に限られた知識しか持たなくても、日本人でない学生が腰を据えて綿密に哲学的に読解するように指導されれば、議論の概念的連関を厳密に理解できる例は少なくない。漠然と「民族文化」に通じていることよりもはるかに重要なのは、いかに上手に辞書に当たり概念的に議論の一貫性を一歩一歩追っていけるかということなのである。どんなに日本語に習熟していても、概念的労働を行う準備のない者は、京都学派のテキストに「日本文化」や「東洋宗教」、「禅精神」などといったステレオタイプを押し付けて、京都学派の哲学者がいかに「西洋人」とは違った思惟様式をもっているかを強調しようとする。しかし、このような「東洋」や異文化を持ち上げる者に限って、西ヨーロッパや北アメリカの哲学や社会思想の概念的な構成を丹念に追う準備を欠いている場合が多い。自らを「西洋人」と自認する割には、彼らの「西洋思想」の読解力はお粗末な場合があまりに多くみられる。京都学派の哲学を批判的に理解するために決定的なのは、「東洋精神」についてのエキゾチックな空想を捨て、テキストに語られていることを、その時代にヨーロッパやその他の地域で論じられていた知的問題と関連づける能力なのである。」(P.17) 】

●「「西側」近代性に対する抵抗と、「東洋的」沈潜への誘惑と 稲賀繁美」(P.321 ~ P.349)

引用紹介する箇所は、竹内好(あるいは孫歌)、オウム真理教、伊勢神宮、等に関連する文章です。

【 「 ここでことさら柳宗悦に言及するのは、孫歌が竹内好を論ずる際に問題とする「アジア式近代の矛盾」 paradox of Asian Modernity に、柳が思わぬ照明を与えているからだ。竹内の「周作人から核実験まで」(1965)を孫歌はこう要約する。東アジアは欧州の近代を模倣することによっては、近代に達することはできない。なぜならば、ほかならぬ先生(西欧)が武力に訴えることで、学生(アジア)が自分(西欧)を模倣することを妨げているからだ。ここに竹内は矛盾を見る。その結果として、欧州は人間の尊厳を唱えるけれども、東アジアは、人間の尊厳を実現するために、その欧州と闘わねばならない運命を背負っているのだ、と。

思うに同様のジレンマは、早くも徳川時代の儒学者、山崎闇斎(1619-1682)によって定式化されていたのではなかったか。山崎闇斎は問う。もし中国が孔子を総大将に、孟子を軍師として日本に攻め込んだ場合、日本人はいかに対応すべきか。儒学の説く仁すなわち人間の尊厳の名において、日本は孔子や孟子に対して戦端を開くべきなのか。それとも儒学の教えに忠実な日本人としては、先生たる孔子と孟子とが仮に侵略者となった場合でも、鉾を交えずすなおにその軍門に下るのが、儒教への忠誠を示す行為なのだろうか。中世スコラ学にも似た机上の空論を嗤う向きもあろう。だがこの譬話は、1910年代の日本による朝鮮半島併合のあと、朝鮮で蜂起が発生した折に、柳宗悦が取り上げた問いかけだった。柳が言外に暗示しようとしたことは、明らかだろう。もし日本に孔子・孟子の軍隊を撃退する権利があるならば、これに劣らず同様の理屈で、朝鮮の民が日本に対して蜂起することも、仁義に叶った、人間の尊厳に相応しい道義となる。どちらも儒教の道に照らして義人たる振る舞いだからだ。

柳の議論に照らしてみると、竹内好のいう矛盾は、その論理的妥当性の脆弱さを晒すことになる。というのも竹内は、議論が中華人民共和国の政治的決定に抵触する地点に達するや、それより先に進むことを自らに禁ずるからだ。そもそも竹内の理屈は、事の最初から、中華人民共和国の核実験は是が非でも正当化せねばならないという、時局の要請を合理化するために構築されており、その前提ゆえの限界を免れない。イデオロギーの次元を離れ、論理の次元に限定するならば、皮肉にも竹内の中国正当化の理屈は、若き竹内が参画した大東亜共栄圏正当化の理屈を、奇妙にも反復するような軌跡を描いていることに気づかされる。」(P.329 ~ P.330)

「 だが、さらに恐るべきことは、日本がオウム真理教とその教祖を根絶やしにしようとする、その姿勢にあった、と筆者は考える。なぜなら善良な日本人たちは、麻原たちが説教したお祓い purification の理屈をそのまま踏襲して、麻原とその危険きわまりない教団を、毒蜘蛛同様に一掃し、浄化され汚染から無縁な日本の再建を望んだからだ。「祓い給へ清め給へ」の過敏性潔癖症といってもよいが、新型インフルエンザの世界的流行(2009年5月現在)という事態のもとで、これと変わらぬ浄化への強迫神経症は、健全に保存され、罪悪感もないまま順調に再生産され、完璧な無菌室よろしき日本列島の安全確保に、めでたくも貢献している。ここで「近代の超克」の討論会(1942)に戻るならば、そこにもまた、西欧列強による「文化的侵略」に対抗すべく、純粋日本の自己防御と自己閉塞に努めようとする本能が、躁鬱症的な傾向を帯びて蔓延し、大東亜共栄圏の夢想へと異常肥大を遂げた有様が窺える。」(P.339 ~ P.340)

「 純粋にして無垢、汚れなき日本という虚構の核をなすのが、伊勢神宮だろう。式年遷宮は20年の周期で社の木造構造を代替わりさせる仕来たりであり、その反復によって歴史性を否認するものだが、しかしその起源は西暦690年に確定できる。天武・持統の治世に制度化された式年遷宮は、大陸中国や朝鮮半島の圧倒的な文化的影響に対する対抗反応として、日本の古代王朝が想像上の日本的文化同一性を擬制として導入する政治的意思を表明した時点を記しづける。そしてそれが近代において象徴的に再評価されるには、ブルーノ・タウトに代表される、外からの(期待される)視線の介入が大きな役割を果たし、太古より歴史的に不変で恒常なる日本美学という神話的観念の涵養に貢献した。これまた二階建ての構造の反復だ。

古代にあっては中国や朝鮮からの使節の眼が、日本に純粋日本なる虚構の立ち上げを促進させ、近代においては西洋からの視線が、伊勢神宮の象徴的価値の確立を嵩上げさせた。さらに伊勢神宮は、西洋的な「個」や「全体性」の観念に疑義を呈する。式年遷宮は物質的な継続性を犠牲にした、精神性のみの非物質的継承の永続性に価値を授ける。これが西欧近代社会で発達した保存修理の理念とは対極をなすことに、西欧の専門家は気づかされた。すでに不在となった原型からの引用と複製のみからなる、定義からしてオリジナルを欠いた、掘っ立て柱の萱葺き小屋は、個を犠牲とした全体性を、万世一系という天皇家の家系に重ね合わせ、循環のうちに永続させる。そこにはそもそもの始めから、ヴァルター・ベンヤミンの呼ぶような意味でのアウラは存在していなかっただろう。実際、ジャン・ボードリヤールの表現を借りるなら「オリジナルなきシミュラクール」でしかない伊勢神宮は、その複製の再生反復のなかに、霊のアウラを宿す。それはヘーゲル学者コジェーフ呼ぶところの「純粋なるスノビズム」の具現として、歴史―後の楽園 post-historical paradise を生きている。」(P.340 ~ P.3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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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초극」과 교토학파 근대성・제국・보편성 Tankobon Hardcover – November 30, 2010
by 사카이 나오키 (편집), 이소마에 준이치 (편집)
5.0 별 5개 중 5.0개    2 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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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80엔부터 
4개 중고 5,580엔 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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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초극'이 제기한 문제를 팩스 아메리카나가 흔들리기 시작해 국제질서 재편 시기에 근대성, 제국, 보편성 등 뛰어나 현대적인 관점에서 역사적인 재검토를 시도한다. 무엇보다, 「근대의 초극」의 좌담회에는 참가하지 않았던 미키 키요를 포함해, 니시다 기타로로부터 타나베 모토를 거쳐, 제3세대의 미키나 니시타니 게이지에 연결되어 가는 교토 학파는, 특히 신칸트 파, 마르크스, 헤겔, 푸사르, 하이데거를 정성껏 독파하고 서양 근대 사상의 수용에 큰 성과를 올리는 동시에 일본 특유의 문화라는 언설을 창출해 갔다. 그 웅장한 경위의 비판적인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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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8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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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의 댓글

아시아·태평양 전쟁 중 1942년의 좌담회 “근대의 초극”을 둘러싼, 일본, 구미, 아시아의 연구자에 의한 국제 심포지엄.
내용(「BOOK」데이터베이스에서)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사이, 1942년의 좌담회 “근대의 초극”을 둘러싼, 일본, 구미, 아시아의 연구자에 의한 국제 심포지엄. 「근대의 초극」의 좌담회에는 참가하지 않았던 미키 기요시도 포함해, 니시다 기타로로부터 타나베모토를 거쳐, 제3세대의 미키나 니시타니 게이지에 연결되어 가는 교토 학파는, 특히 신칸트파, 마르크스 , 헤겔, 푸사르, 하이데거를 정성껏 읽고 서양 근대 사상의 수용에 큰 성과를 올리는 것과 동시에 일본 특유의 '문화'라는 언설을 창출해 왔다. 그 장대한 경위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는 국제 심포지엄.

저자 정보

사카이 나오키(사카이 나카키):1946년생. 시카고 대학 인문학부 극동 언어 연구 학과 박사 과정 수료. 현재 코넬 대학 교수. 저서에, 「일본 사상이라고 하는 문제」(이와나미 서점) 「과거의 소리」(이분사) 「희망과 헌법」(이분사) 등 다수. <이소마에 준이치(이소마에 준이치):1961년생. 국제 일본 문화 연구 센터 준 교수. 도쿄 대학 대학원 박사 과정 중퇴. 저서에 『기기신화와 고고학-역사적 시원에의 노스탤지어』(카도카와 학예 출판, 2009년), 『상실과 노스탤지어―근대 일본의 여백에』(미스즈 서방, 2007년), 『근대 일본의 종교 언설과 그 계보-종교·국가·신도”(이와나미 서점, 2003년), 그 외.

저자 약력 ( "BOOK 저자 소개 정보"에서)
사카이/나오키
1946년생. 시카고 대학 인문학부 극동 언어 연구 학과 박사 과정 수료. 현재 코넬 대학 교수

이소마에 / 준이치
1961년생. 문학박사(도쿄대학). 현재, 국제 일본 문화 연구 센터 준 교수(본 데이터는 이 서적이 간행된 당시에 게재되고 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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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 Yiwenshe, 초판 (2010년 11월 30일)
발행일 : 2010년 11월 30일
언어 : 일본어
Tankobon 하드커버 : 36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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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양이
별 5개 중 5.0개 「외연부를 가지지 않는 공간 가운데 여백 혹은 잔여라고 하는 것은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이소마에 준이치, P.357)
작성일: 2020년 6월 6일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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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 코로나 바이러스 관련으로 조금. 2020년 6월 1일(월)의 아사히 신문 조간 1면, 2면에 「아베노 마스크」관련으로 「옷감 마스크 「질보다 양」 미주」(1면의 제목)로서 특집 기사가 있었습니다. 그 중 2면에 아래와 같은 문장이 있습니다.

"마스크 확보에 관여한 정부 관계자 중 한 명은 이렇게 되돌아 본다. "'마스크를 어떻게든'이라는 관저의 목소리가 큰 사람이 말한 대로 무리하게 무리를 거듭했다".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이번 배포 계획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인 일본군에 의한 '임팔 작전'에 비유되고 있다고 한다. 사령부가 엉성한 작전을 강행해 많은 희생자를 내고, 「대전 중 가장 무모」라고 불린 작전이다(나카타 아야코, 아이하라 료)」 얼마전에, 「NHK 스페셜 전율의 기록 임펄」

을 2~3회 시청했습니다. 전투 중의 사상자보다 작전 중지가 정해진 후의 철퇴 속의 사상자(하에서의 익사, 말라리아 등에서의 병사나 아사, 자결한 사람, 등등)가 압도적으로 많아, 무타 입구야(임펄 작전의 책임자?)를 섬긴 사이토 히로쿠니 소위의 일지도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어, 그 「무모함」이 골신으로 삼았습니다, 일본군 상층부의 무책임도 마찬가지로. 그러나, 아시아·태평양 전쟁중의 각종 작전에 대해서, 「계획」&결과 모두 「무모」로 없었던 것이 있습니까. 만주사변으로 시작(더 전부터일까요), 일중전쟁, 노몬한, 미드웨이, 사이판, 가달카날, 한반도·오키나와·만주·가타, 그리고, 전함 야마토의 “해상 특공대”, “본토 결전” 등등등등 .

아베 신조의 각종 정책·만든 법률 등은 모두 「무모」 그 자체입니다, 신형 코로나 바이러스 관련으로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그의 정책은 모두 「대본영 발표」입니다, 즉 가짜 뉴스라고 하는 것입니다만, 사회에 묻힌 「지뢰」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과거의 법률도 이해하지 않고, 헌법도 이해하지 않고, 「독재」의 하고 싶은 무제한입니다. 그것을 용서하는 국민이 많이 있기 때문에, 처치 없이는 있습니다만.
「신학기 9월 개시」도 철회인 것 같습니다, 바보 돌출로, 약한 것입니다. 그 이외에도, 보정 예산 속에, 아베 일족 관련 기업(ex. 덴츠나 퍼소나 등등)을 돈으로부터 시키는 산단이 눈에 띄는 것 같습니다(각종 「터널 법인」(관료의 천하선 법인)도 있는 것 같습니다, 「지속화 급부금」관련으로 「일반 사단법인 서비스 디자인 추진 협의회」라고 하는 조직이라든가, 「유령 회사」같습니다만). 그리고, 제2차 보정 예산 속에, 아베 신조가 「프리 핸드」로 사용할 수 있는 금을, 10조엔도 잠입하고 있다든가, 터무니 없는 것입니다, 「바보에 붙이는 약」입니다. 동일본 대지진의 부흥 예산을, 부흥과는 관계없는 도로 사업 등등에 대량으로 「횡류해」한 것과 완전히 같은 구도입니다. 아베 일족 자민공명당의 정치상자 중, 「고급」관료, 경단련의 평소의 「손」입니다, 「혈세」의 사용하고 싶은 무제한입니다. 신형 코로나 전문가 회의의 회의록이 없다, 라고 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이것도 힘든 문제입니다, 증거 은멸·개축·소각 등등 이전의 문제입니다.

「희언」은 이것 정도로 하지 않으면, 「바보」에 「감염」해 버리므로, 멈춥니다. 본서(『근대의 초극』과 교토학파 2쇄 발행, 이분사))의 인용 소개를 합니다. 접점, 꺾은선, 마루는 ≪ ≫로 대체합니다. 인용문 전체는 【 】로 묶습니다. 인용문의 인용은 < >로 묶습니다.

우선은, 본서의 제논고의 제목과 저자명 등을 아래에 합니다.

● "서 팩스 아메리카나에서 교토 학파의 철학 사카이 나오키, 타카하시 원역"(P.3 ~ P.28

) 122)
●「「근대의 초극」과 교토
학파 과 그 초극을 둘러싼 대립 후지타 마사카츠」(P.75 ~ P.94)
●「니시타니 케이지와 근대의 초극(1940 - 1945) JW 하이직크」(P.95 ~ P.122)

■「2 미키 기요 과 제국의 철학 ―― 보편성을 둘러싸고」(P.123 ~ P.180)
●「동아 공동체론과 보편성을 둘러싸고―― 주체적 기술론 서설 사카이 나오키」(P.125 ~ P.162)
●「 근대의 초극」과 「중국 혁명」 ―― 전후 일본 사상사에 있어서의 2개의 모멘트 손가」(P.163 ~ P.180)

■「3 「근대의 초극」과 「세계사적 입장과 일본」 ―― 제국의 역할」(P.181 ~ P.232)
●「「근대의 초극」사상과 「대동아공영권」구상을 둘러싸고 스즈키 사다미」(P.183 ~ P.210) ●「동화 혹은
초 극 ―― 식민지 조선에 있어서의 근대 초극론 김철」(P.211 ~ P.232)

■「4 종합 연구: 일본에 있어서의 서양 근대의 경험」(P.233 ~ P.349)
●「근대와의 격투 ―― 제임스 카즌스와 일본·인도·탈식민지의 문화 고우리·비슈와나탄, 미하라 요시아키역”(P.235 ~ P.264)

● 「서양의 침로의 상실 / 동점의 종말과 탈유럽화 헨트 데 브리스, 칸다 신지역 」에의 유혹과 이나가 시게미」(P.321 ~ P.349)

●「나중에 토론 후 이소젠 준이치」(P.350 ~ P.357)

●「집필자 소개」(P.358 ~ P .359)

상기의 논고 중, 우선 이소 전 순일의 「후퇴」로부터, 약간 길게 인용합니다. 이것이, 알기 쉽게 구별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사카이 나오키의 논고와 이나가 시미의 논고로부터 인용합니다. 그 이외에도 인용하고 싶은 문장은 여러가지 있습니다만, 사카이·이나가 논고만으로도 엉덩이 끊김 잠자리가 될 것 같기 때문에, 하는 방법 없습니다.

절반 이상의 저자가 서평자에게는 처음이며 논고 중에 나오는 인물 이나 에마뉘엘 레비나스, JA 하이직의 니시타니 게이지, 등등.니시야 케이지나 레비나스는, 이름은 알고 있습니다만, 그 저서는 읽지 않습니다)에서도 모르는 인물이 다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소 어려운 내용으로 이해가 잘 안 되는 면도 많이 있습니다만, 각각 매우 공부가 되어 향후의 서평자의 「본 읽기」의 참고가 됩니다.

그럼 인용 소개를 시작합니다.

●「나중에 ―― 토의 후에 이소젠 준이치」(P.350 ~ P.357)

【 “막부 말의 서양 세계에의 개국이 가져온 불평등 조약에 의해, 식민지화라고 하는 큰 압력하에 일본은 놓여져 있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일본인은 한편으로는 서양이 되고 싶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에 반발하는 등 상반되는 욕구의 갈등을 안게 된다.다만, 일본이 국가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서 서양 제국과 경쟁해야 한다면, 이러한 이중의 욕구도 또, 기본적으로는 서양화에 의해 규정된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었다.이런 문맥 속에서, 일본 혹은 동양과 서양이라고 하는 표상이 상호 의존적인 형태로 사람들에게 상상되게 되었다 또한 일본 이외의 아시아 지역도 한편으로는 일본에 의해 식민지 = 문명화되어야 할 것으로서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시아는 일본과 함께 서양에 맞서야 할 것으로서, 거기에서도 이중성을 가진 존재로서 표상되어 갔다.즉, 일본은 아시아에 대해서는 서양이며, 서양에 대해서 는 아시아였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근대의 초극' 혹은 '세계사의 철학'이라는 언설은 본질적으로 애매함을 포함하는 것으로서 다를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일본 제국에 의한 타민족의 포섭이라는 정치적 과제를 안고 있는 상황 속에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언설은 일종의 보편성, 즉 제국의 지배하에 놓여진 다른 민족과의 공존을 지향하는 성질을 띠는 것은 피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일본인 미즈카라가 제국에서의 일본 민족의 위치를 ​​탈중심화하는 계기를 포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후의 교토 학파를 둘러싼 논의의 대부분은, 교토 학파에 속하는 자 자신의 주장도 포함해, 전후의 일본 사회가 단일 민족의 국민 국가라고 하는 옷차림을 모으게 되었기 때문에, 한때 미키 키요와 타나베 모토가 사고한 것 같은 타민족과 공존해, 그들을 통합할 수 있는 제국으로서의 세계사규모에서의 보편성의 논리의 모색을 포기해 버렸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이슬람과 기독교와 같은 이종교 간의 문제뿐만 아니라 새로운 자국 내 이민자와 내지 식민지의 백성으로 정치적으로 동화되어 버린 마이너리티 사람들과 같은 국내외의 다른 사람들과 의 공존의 윤리가 급무로 되는 사회에 있어서는, 한 번, 전전의 교토 학파가 안고 있던 보편성의 문제를, 공존의 윤리에 길을 여는 것과 동시에 타자에게의 폭력 행위로 변할 수 있는 위험성으로 재검토해 나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좌담회 '근대의 초극'과 같이 서양중심주의를 비판한다는 행위는 그 안티테제로서 동양이라는 언설을 고정적인 실체로 시작할 수도 있어 전형적인 셀프 오리엔탈리즘 의 표상회로로 우울해 가는 위험을 겪고 있었다. 즉, 서양에 대항하여, 자문화를 비서양적인 특수성의 논리하에 표상하는 것은, 확실히 서양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유효한 수단일 수 있지만, 동시에 자문화를 배타 적인 본질주의화하게 되기도 하고, 결국은 <서양 대 일본 혹은 아시아>라는 이항 대립적인 표상을 고정화하게 된다. '근대의 초극'이란 이런 이항 대립적 사고를 시작하는 언설에는 없었다. 그러한 이야기하에 더 이상 일본이 서양 근대화라는 놓치지 않는 공간의 내부에 있다는 것을 잊어 버렸고, 마치 그 공간 외부에 독자적인 특수 문화로서 일본 문화 혹은 아시아의 문화권이 불립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낳는 것이다. 일본 제국의 논리가 결국, 타자에 의한 자기 변혁을 전제로 하는 보편성이 아니라, 동질화된 자기의 특수성을 타자에게 밀어붙이는 보편주의로 끝나버린 것은, 서양에 대항한다 자문화 측의 단위를 아시아 측에 조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광역권을 동질적인 특수성하에 일원적으로 파악하려는 욕망이 이겼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셀프·오리엔탈리즘적 표상은, 전중기에 교토 학파의 철학자를 비롯한 일본의 지식인이 서양에 대항하는 가운데 스스로 만들어낸 언설이었지만―― 물론, 동시에 서양의 지식인 역시 일본을 부정적인 형태로 특수화함으로써 자문화를 동질적인 것으로 표상해 갔는데――, 전후가 되면 이번에는 서양의 지식인이 교토학파의 철학을 긍정적으로 특수화하고 스스로의 서양적 전통을 비판하기 위해 일본 교토학파의 연구자와 협조해간 것이다. 교토학파는 지혜로 가득한 신비적 철학이라고 하는 식으로. 그것은 서양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으로서는 일견 유효하게 보이고, 논의된 당 일본인에게 있어서는 자신들이 서양의 한계를 뛰어넘은 동양의 지혜로 명지되는 만큼, 그 나르시시즘을 간질거리는 효과를 만들어 왔다. 그러나 전중기 교토 학파가 그랬듯이 서양과 일본이 이질적인 것이라는 이분법을 만들어 실제 타인의 모습을 무시한 현실 떨어져 있는 배타적 표상을 환상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점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거기에는 자기 나르시시즘에 균열을 넣는 형태로 타사를 만나는 기회가 전혀 빗나가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러한 일본과 서양 혹은 아시아와 서양을 이항 대립적으로 파악하는 사고의 마력은, 「근대의 초극」이나 「세계사의 철학」이라고 하는 일본인의 언설을 피식민자의 측에 유용해 라고 저항의 언설을 읽으려고 한 한반도 지식인도 또 도망치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나 아마도 대만과 만주를 포함한 일본의 지배하에 놓여진 동아시아 지식인은 근대의 초극과 세계사의 철학 논의를 읽어 일본문화의 특수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대신 그 지배에 대한 저항의 논리로서 혹은 전향이라고 불리는 적극적인 동화행위를 통해 동화대상인 일본제국의 정체성에 이질성이나 변용을 가져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서양과 조선 혹은 일본과 조선과 같은 이항대립적인 표상의 도식 자체가 탈구되려고 했던 것은 충분히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안이하게 「근대를 초극한다」나 「세계사의 보편성」이라고 하는 언설에 동화되는 일 없이, 이러한 근대가 안고 있는 아폴리아 속에 몸을 두고 사고해 나가는 것. 그것은 서양 근대라는 공간 외부에 자신들이 서있을 수 있거나 근대를 '초극'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지지 않고 그 내부에서 다양한 이항 대립적인 경계선을 탈구시켜 가는 저항의 시도를 모색해 나가는 것을 의미하자. 외연부를 가지지 않는 공간 가운데 여백 혹은 잔여라고 하는 것은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닛분켄의 토의뿐만 아니라 쿄다이와 리츠메이칸의 기획을 통해서 그 참가자들에게 가져온 공통 인식이었던 것 같다. 그 가운데 보편성과 특수성, 저항과 동화, 제국과 국민국가, 혹은 일상을 이화하는 일로서 종교나 철학의 가능성, 이러한 주제를 계속 생각해 나가는 것이 오늘의 사상 상황에 매우 큰 과제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P.354 ~ P.357)]

사카이 나오키의 논고에서 3 개소, 이나가 시게미의 논고에서 3 개소, 인용 소개합니다.

●「서 팩스 아메리카나 아래 교토 학파의 철학 사카이 나오키, 타카하시 하라역」(P.3 ~ P.28) 타니자키 준이치로의 「음영 예찬」의 「평가」에 관한 문장, 교토 학파의 「

보편성 에 관한 문장(2곳)을 인용합니다.

【 「기묘한 일이라고 말해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지금까지 「음영 예찬」은 노스탤직한 문화주의를 오피라에게 지지하는 것으로 평가되어 왔다. 그러나 주의 깊게 읽어보면 이 수필이 일본문화를 숭배하는 문화주의의 윤활함을 그려보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말하자면 "서서 소변의 자세에서 연주된 일본 문화론"이 될 것이다. 전통이라고 하는 것에 기대되는 것 같은 모든 진지한 특질을, 고풍인 일본 가옥의 어둡고 오욕적인 부분과 연결해, 타니자키는 웃음을 초대하는 치구하구나 느낌을 만들어 내고, 옛 것, 불편한 것, 역사적 뭔가를 사랑하는 이국주의를 웃으며 날리고 있다. 이 유머로 가득한 수필을 사이덴·스티커는, 정중하게, 일본의 전통의 예찬이라고 읽어들인 것이다. 다른 작품에도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지만, 타니자키는 뛰어난 비판 정신의 소유자이며, 종종 성적인 입장성이라는 관점에서 이항 대립의 기능을 우화화함으로써 근대 대 전통이라든지 서양 대동양이라는 포괄적인 이분법에 의문을 던질 수 있었던 문학자였다. 타니자키는 권력관계에 있어서 성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던 전전 일본의 몇 안되는 문학자의 한 사람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P.6)

「교토학파가 목표로 하고 있는 종류의 철학은 「토착」(다만, 원래 나는 어떠한 「토착의 인식론」이라고 하는 관념에도 극히 회의적이지만) 지식으로부터 결정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그 중 교토 학파의 철학을 연구 할 때 첫 번째 과제는 텍스트의 철학적 구조와 개념적 일관성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동시대의 일본사회에 대한 지식이 문제가 되는 것은 역사적 평가와 사회-정치적 함의의 검토라는 제2의 과제에 임할 때이다. 분명히 첫 번째 과제의 영역을 두 번째 문제와 구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제1의 과제를 해내지 않으면 교토 학파에 대한 이론적인 연구는 할 수 없다. 이른바 일본 전문가라고 칭하는 자들은 대부분 제2의 과제를 자랑하고 있지만, 제1의 과제에 대해 근면하게 노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제일 과제를 하는 능력이 부족한 자가 많다는 것이 실정이 아닌가. "(P.16)

“나 자신의 교실에서의 경험으로부터 말하자면, 비록 “일본 문화”에 대해서 매우 한정된 지식 밖에 갖지 않아도, 일본인이 아닌 학생이 허리를 잡고 면밀하게 철학적으로 독해하도록 지도되고 그렇다면 논의의 개념적 연관을 엄격하게 이해할 수있는 예는 적지 않다. 막연히 '민족문화'에 통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어떻게 잘 사전에 있어서 개념적으로 논의의 일관성을 한 걸음 한 걸음 쫓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아무리 일본어에 익숙해도 개념적 노동을 할 준비가 없는 자는 교토학파의 텍스트에 '일본문화', '동양종교', '선정신' 등 스테레오타입을 밀어붙여 교토학파 철학자가 어떻게 '서양인'과는 다른 사유양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강조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동양'과 이문화를 들어올리는 자에 한해서 서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철학과 사회 사상의 개념적인 구성을 정성껏 쫓을 준비가 부족한 경우가 많다. 스스로를 '서양인'이라고 자인하는 것에 비해서는 그들의 '서양사상'의 독해력은 어색한 경우가 너무 많다. 교토 학파의 철학을 비판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결정적인 것은 '동양 정신'에 대한 이국적인 공상을 버리고 텍스트에 말한 것을 그 시대에 유럽과 다른 지역에서 논의되었다 지적 문제와 관련시키는 능력이다. "(P.17)]

●""서쪽"근대성에 대한 저항과, "동양적"침잠에의 유혹과 이나가 시미"(P.321 ~ P.349) 인용 소개하는 개소는, 타케우치 호(

혹은 손가), 앵무새 진리교, 이세 신궁 등에 관련된 문장입니다.

["여기서 말하자면 야나기 무네요시를 언급하는 것은 손가가 타케우치 호를 논할 때 문제로 하는 '아시아식 근대의 모순" paradox of Asian Modernity에 야나기가 생각하지 않는 조명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타케우치의 「주작인부터 핵실험까지」(1965)를 손가는 이렇게 요약한다. 동아시아는 유럽의 근대를 모방함으로써 근대에 도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다름없는 선생님(서유럽)이 무력에 호소하는 것으로, 학생(아시아)이 자신(서유럽)을 모방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타케우치는 모순을 본다. 그 결과 유럽은 인간의 존엄을 주장하지만 동아시아는 인간의 존엄을 실현하기 위해 그 유럽과 싸워야 할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비슷한 딜레마는 일찍이 도쿠가와 시대의 유학자, 야마자키 암사이(1619-1682)에 의해 정식화되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야마자키 암사이는 묻는다. 만약 중국이 공자를 총대장으로, 맹자를 군사로 일본에 몰입한 경우, 일본인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유학이 전하는 인 즉 인간의 존엄의 이름에서 일본은 공자와 맹자에 대해 전단을 열어야 하는가. 아니면 유학의 가르침에 충실한 일본인으로서는 선생님인 공자와 맹자가 만약 침략자가 되었을 경우라도 鉾을 섞지 않고 그 군문에 내리는 것이 유교에 대한 충성을 나타내는 행위일까 우카. 중세 스코라학과 비슷한 책상 공론을 우회하는 방향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봉화는 1910년대 일본에 의한 한반도 병합 이후 조선에서 봉기가 발생한 때 야나기 무네요시가 다룬 질문이었다. 야나기가 말밖에 암시하려고 했던 것은 분명할 것이다. 만약 일본에 공자·맹자의 군대를 격퇴할 권리가 있다면, 이것에 못지않게 같은 이굴로, 조선의 백성이 일본에 대하여 봉기하는 것도, 인의에 이루어진, 인간의 존엄에 적합한 도의 된다. 둘 다 유교의 길에 비추어 의인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버드나무의 논의에 비추어 보면, 타케우치 호가 말하는 모순은, 그 논리적 타당성의 취약함을 노출하게 된다. 라고 하는 것도 다케우치는, 논의가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적 결정에 저촉하는 지점에 이르자, 그보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스스로 금지하기 때문이다. 원래 타케우치의 이굴은, 일의 시작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의 핵실험은 꼭이라도 정당화해야 한다는, 시국의 요청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구축되고 있어, 그 전제 때문에의 한계를 면해 아니. 이데올로기의 차원을 떠나 논리의 차원에 한정한다면, 아이러니하게도 타케우치의 중국 정당화의 이굴은, 젊은 타케우치가 참가한 대동아공영권 정당화의 이굴을, 기묘하게도 반복하는 궤적 를 묘사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P.329 ~ P.330)

"그러나, 더 두려워하는 것은, 일본이 앵무새 진리교와 그 교조를 근절시키려고 하는, 그 자세에 있었다, 라고 필자는 생각한다.왜냐하면 선량한 일본인 이들은 마하라들이 설교한 아련 purification의 이굴을 그대로 답습하고, 마하라와 그 위험이 없는 교단을 독 거미처럼 일소하고 정화되어 오염으로부터 무연한 일본의 재건을 원했기 때문이다. 급에 청정급에」의 과민성 결버증이라고 해도 되지만, 신형 인플루엔자의 세계적 유행(2009년 5월 현재)이라고 하는 사태 하에서, 이와 변함없는 정화에의 강박 신경증은, 건전하게 보존되어 죄책감도 없는 채 순조롭게 재생산되어 완벽한 무균실 요로시키 일본 열도의 안전 확보에 힘차게 공헌하고 있다. 여기서 '근대의 초극' 토론회(1942)로 돌아가면 거기에도 서구 열강에 의한 '문화적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순수 일본의 자기 방어와 자기 폐색에 노력하려고 한다 본능이 조울증적인 경향을 갖고 만연해 대동아공영권의 몽상으로 이상비대를 이룬 유양이 엿볼 수 있다. "(P.339 ~ P.340)

"순수하고 무구, 더러워지지 않는 일본이라는 허구의 핵을 이루는 것이 이세 신궁일 것이다. 식년 천궁은 20년의 주기로 사의 목조 구조를 대체하게 하는 구조이기도 하고, 그 반복에 의해 역사성 하지만 부인하는 것이지만, 그 기원은 기원 690년에 확정할 수 있다. 일본의 고대 왕조가 상상의 일본 문화 동일성을 의제로 도입하는 정치적 의사를 표명한 시점을 기록한다. 밖에서의 (기대되는) 시선의 개입이 큰 역할을 하고, 태고보다 역사적으로 불변으로 항상 있는 일본미학이라는 신화적 관념의 풍양에 공헌했다.이것 또한 2층건물의 구조의 반복이다.

고대에는 중국과 조선으로부터의 사절의 눈이 일본에 순수 일본이 되는 허구의 시작을 촉진시키고, 근대에서는 서양으로부터의 시선이 이세진구의 상징적 가치의 확립을 부피시켰다. 또한 이세신궁은 서양적인 '개'나 '전체성' 관념에 의의를 보인다. 식년천궁은 물질적인 연속성을 희생한 정신성만의 비물질적 계승의 영속성에 가치를 부여한다. 이것이 서구 근대사회에서 발달한 보존수리의 이념과는 대극을 이루는 것에 서구 전문가는 깨달았다. 이미 부재가 된 원형으로부터의 인용과 복제만으로 이루어지는, 정의로 해 오리지날이 부족한, 파고 기둥의 萱葺 오두막은, 개를 희생으로 한 전체성을, 만세일계라고 하는 천황가의 가계에 거듭해 합치고 순환 중에 영속시킨다. 거기에는 원래 시작부터 발터 벤야민이 부르는 의미에서 아우라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장보드 리얄의 표현을 빌린다면 '오리지널 없는 시뮬라 쿨' 밖에 없는 이세진구는 그 복제의 재생 반복 속에 영의 아우라를 담는다. 그것은 헤겔 학자 코제프 부르는 "순수한 스노비즘"의 구현으로 역사-후의 낙원 post-historical paradise를 살아있다. "(P.340 ~ P.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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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6

Philo Kalia - *순수경험(감각과 감정) “레아는 눈매가 부드럽고, 라헬은 몸매가 아름답고 용모도 예뻤다

Philo Kalia - *순수경험(감각과 감정) “레아는 눈매가 부드럽고, 라헬은 몸매가 아름답고 용모도 예뻤다.... | Facebook

*순수경험(감각과 감정)
“레아는 눈매가 부드럽고, 라헬은 몸매가 아름답고 용모도 예뻤다. 야곱은 라헬을 더 사랑하였다.” (창세기 29:17-18)
아름다운 사람
눈을 둘 곳이 없다
바라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니 바라볼 수도 없고
그저 눈이
부시기만 한 사람
-나태주, 「아름다운 사람」
야곱은 아름다운 사람 라헬을 얻기 위해 주인 행세를 하는 외삼촌 라반의 권세에 눌려 14년간 노동을 했다. 야곱이 라헬의 인정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라헬의 父의 허락이 떨어져야 하는데, 그 허락을 얻어내는 데 14년이 걸렸다. 아름다움이 순일(純一)한 감각과 감정을 통해 완성되는 데 14년이 필요했다. 사람은 한 가지 일에 집중할 때 잡념 없이 몰입의 극에 도달하며 저절로 온몸으로 활동하게 된다.
감각이 객관적 요소라면 감정은 주관적 요소다. 감각이 대상을 식별 관계로 정립하는 작용이라면, 감정은 그 작용에 대한 의식적 반응이다. 인간의 일차적 욕구가 감각기관을 활성화하여 대상과 원초적 관계를 맺게 하지만 대상에 대한 ‘아름다움’이라는 판정은 예술적으로 승화된 감정이며, 사랑은 감정의 성화(聖化)이고 영화(靈化)이다.
고양된 감정이 표현될 때 참생명의 자아가 살아난다. 사랑은 라헬의 몸매, 용모, 눈빛, 말 등이 발현하는 아름다움과 그 아름다움에 의해 촉발된 감정이 상감(相感)하고 상응(相應)하는 장소이다. 사랑하고 질투하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감정이 사람을 생동하게 만들며, 참자아란 이런 감정에 진실하고 솔직한 인격이다.
야곱이 라헬에게서 얻는 에로스의 경험은 순수경험이다. 순수경험은 예술의 경험에서 생기는 경험과 같은 것이다. 예컨대, 색(色)을 보고 음(音)을 듣는 순간, 하조대의 벼랑에서 절벽에 부딪는 높은 파도의 출렁임을 보고 듣는 것, 연주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의 숙련된 행위, 동물의 본능적 동작, 이런 것들은 순수경험에 속한다. 순수경험이란 “조금도 사려와 분별을 섞지 않은, 참된 경험 그대로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개념을 통해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기 이전의 상태에서 대상과 자아가, 사물과 내가 즉각적으로 합일을 이룬다. “자기의 의식 상태를 대뜸 경험했을 때에는 主도 客도 없고, 지식과 대상이 전혀 합일되어 있다”(기타로 니시다西田幾太朗, 『善의 硏究』)
우주의 순수경험(전(前)반성적 감정)이 빛의 파동이고 그 형체가 별이라면
바다의 순수경험은 파도이고 그 형체는 물고기이며
사람의 순수경험은 존재에 대한 설렘(술렁임)이며 그 형체는 예술작품이다.
일본 철학자 기타로 니시다(Kitaro Nishida, 西田幾太朗)는 순수경험에 대하여 몇 가지로 정리한다,
순수경험은 수동이 아니라 능동이고 생명의 활동이다.
개인이 있고 경험이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이 있고 개인이 있다.
순수경험은 “색을 보고, 음을 듣는 찰나”에 성립하는 찰나의 경험이다. 따라서 직접적이며 구체적인 찰나성은 현재성, 현전성, 현실성(충만성)을 모두 포함한다.
순수경험은 하나의 ‘개체’로서 유일의 특색을 가진다.
직접 경험은 정신 현상도 물체 현상도 아닌 양자 모두 동일의 의식 현상이다.
순수경험 또는 직접 경험은 생명력의 원천이다.
+그림은 여성의 우아한 아름다움을 주로 그린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 쥘 조제프 르페브르(Jules Joseph Lefebvre), Rachel, 1888 작품이다. 당시 여성의 미관이 개입되었겠지만 르페브르는 라헬의 아름다운 몸매와 예쁜 용모를 그렸다. 성경은 야곱이 레아보다 아름다운 몸매와 예쁜 용모를 지닌 “라헬을 더 사랑하였다”고 감정의 쏠림을 솔직하게 기록한다. 성경 어디에도 인간 감정의 억압은 없다. 너무 솔직히 표현해서 과도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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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새빛
    니시다기타로 까지 공부하셨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 Philo Kalia
      김새빛 쬐끔 공부하고 있습니다.
    • 김새빛
      심광섭 교토학파 철학은
      책도 별로 없고
      강의도 없어서 공부하기 힘들더라구요
      대단하십니다
      후설의 헌상학과 비슷한 동양의 현상학이라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Philo Kalia
      김새빛 동서양의 만남에서 주체적으로 학파가 형성될만큼 긴 시간을 통해 서양철학을 돌파한 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철학도 서양철학 따라가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본보기라고 생각합니다.
  • 이정구
    야곱도 사내라고 예쁜건 알아서 에잇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