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mgok Lee
·
이인우 선생의 번역을 통해서 현대 일본의 거장(巨匠) 시라카와 시즈카 선생을 만난다.
배우는 것이 기쁜 것을 실감케하는 노년의 행운이다.
주공(周公)과 양호를 공자와 이렇게 만나게 하는 것은 물론 시라카와의 상상력이다.
나에게는 논어의 여러 구절들이 보다 생생한 상상력으로 다가온다.
【白川靜孔子傳 제1장-東西南北의 사람】 <16>
꿈과 그림자①
자료를 따라 공자의 생애를 더듬어 보면 대체로 이상과 같다. 귀국 후의 공자에 대해서는 그다지 말할 만한 것은 없다. 아들 리鯉를 잃고 이어서 안연을 잃은 공자는, ‘아,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가’(선진-역주1)라고 탄식하며 깊은 슬픔에 잠긴다. 망명 중에 고락을 함께 한 자로도 위나라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사상가로서 원숙해진 공자는 74살로 죽을 때까지 수년간을,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뜻깊고 행복감에 찬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나, 차라리 너희들의 손에 죽으련다’(자한-역주2)라고 한 공자는 말 그대로, 제자들로부터 心喪3년의 복장服葬을 받았다. 벽안의 크릴이 ‘생애 중에 3년을 이런 일로 보낸다는 것은 서양인의 머리로는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하면서도, 이 시기에 제자들의 공적인 활동이 거의 기록돼 있지 않다는 사실로 미루어 ‘기적은 역시 실제로 일어났었다고 믿어지는 것이다’(크릴 저, <공자> 중에서)라고 쓴 그대로이다.
공자의 죽음은 평온했고 평범했다. <예기> ‘단궁 상’에, 죽기 7일 전 아침 일찍 ‘태산이 무너지는가, 대들보가 쓰러지는가, 철인은 이제 시들어지는가’라고 노래하며 죽음을 예언했다고 하는 것은 물론 지어낸 이야기다. 소크라테스와 그리스도에게 죽음은, 죽는 것이 사는 것이었다. 그런데 공자에게는 죽음에 대한 기록이 없다. 물론 <춘추>의 경문에는, 애공조에 ‘16년 여름 4월 己丑, 공자 卒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애공으로부터는 弔祭辭(추도사)로 뢰誄가 내려지고 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고 하는 전승은 없다. 와쓰지 박사(역주3)는 저 ‘죽음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크릴, <공자>) 전기의 의미를 다른 이유로 중요시 한다. 분명 탁월한 지적으로, ‘삶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선진-역주4)라고 한 공자의 입장에서 보면, 산다는 것이 모두 죽음에의 의미부여였다. 더욱이 ‘삶을 구하여 인을 해치지 않고, 몸을 죽여 인을 이룬다’(위령공-역주5)라고 하듯이 죽음은 삶 속에 포함되어 있다. 공자의 죽음이 왜 위대한 죽음이었는가는 크릴이 놀라움에 가득 차 서술하고 있는 제자들의 心喪3년이라는 사실로 잘 표현되어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공자의 생애에 관한 전기적 사실의 서술은 끝났다. 그러나 사실이 반드시 진실은 아니다.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진실인 것이다. 공자를 大聖이라고 쓰는 것은 차라리 쉽다. 그것은 공자의 전기적 사실 속에서 아름다운 어록인 <논어>의 말을 적당히 보태면 구성할 수 있는 것이다. ‘공자세가’ 이래의 수많은 공자전은 대개 그런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의 의미를 푸는 것은 실로 쉽지 않다. 의식의 밑바닥에 고인 그 어떤 것에도 조명을 비추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다이몬의 속삭임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델포이의 신탁에 어째서 그토록 헌신을 필요로 했는가. 성자라 일컬어지는 사람에겐 그러한 不可解한 면이 있는 것이다. 공자의 전기 중에서도 그 행동을 설명할 무언가가 필요한 때가 있다. 공자의 언동에는 사람들이 꿈꿀 때와 같은, 무언가 아름다운 것을 느끼게 할 때가 있다. 또 어떤 때는 무엇인가 환영에 두려워 떠는 듯한 모습이 있다. 공자가 지닌 꿈과 환영에 대해 잠시 자유로이 말하고 싶다.
【白川靜孔子傳 제1장-東西南北의 사람】 <17>
꿈과 그림자②
공자는 巫女의 자식이었다. 아비의 이름도 모르는 庶生子였다. 尼山에 빌어 태어났다는 것도 일반적인 일은 아닐 것이다. 저 나사렛 사람처럼 신은 기꺼이 그런 자식을 선택한다. 공자는 선택된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나타날 때까지는 아무도 그의 前半生을 모르는 게 당연하다. 신은 스스로를 맡겨온 자에게 깊은 고뇌와 번민을 안겨주어 그것을 자각시키려 한다. 그 자각을 얻은 자가 성자가 되는 것이다.
공자는 일생 꿈꾸기를 계속했다. 꿈에 나타나는 것은 언제나 周公이었다. 殷周혁명, 西周의 창업을 이룩한 이 성자는, 明保라 불린 주나라 최고의 성직자이며 또한 그 문화의 창조자였다. 동시에 이 성자는 또한, 비극의 성자이기도 했다. 공자는 만년의 어느 날 ‘심하구나, 나의 노쇠함이여. 오래구나, 내가 꿈에서 다시 주공을 뵙지 못함이’(술이-역주1)라고 탄식하고 있다. 공자는 평생 주공을 꿈에서 보고 주공과의 대화를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주공이 공자에게 한 말이 무엇이었는 지는 알 수 없다. ‘斯文을 잃지 말라’라는 것과 같은 명령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공자는 안심하고 天命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 천명을 말하는 행위는 모독이나 다름없다.
공자에게는 또 하나의 幻影이 있었다. 그것은 다이몬으로 인식되었던 신의 소리가 아니라 현실의 인물로서 행동한다. 그러나 공자는 아마도 그 인물 속에서 다이몬과 같은 이상한 무언가의 그림자를 느끼고, 그를 두려워하고, 때로는 반발하고, 때로는 증오를 품고 있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생각된다. 그것은 양호라는 남자였다. 양호는 <논어>와 <맹자>에 양화陽貨라는 이름으로 보이는 사나이다.
<사기>에 의하면, 공자와 양호의 만남은 공자가 아직 17살도 되지 않은 때의 일이다. 계씨가 士에게 향응을 베풀 때, 공자도 문학을 닦는 사람의 하나로 여기에 참가했다. 그런데 양호가 ‘계씨는 선비를 대접하는 것이지, 감히 그대를 향응하는게 아니다’라며 공자를 물러가게 했다. 이때의 공자는 아직 어머니의 상중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사기>의 해석이다. ‘세가’ 속 출처를 알 수 없는 기사의 하나인데, 이것은 어쩌면 양호 계통 자료의 殘片이 삽입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양호는 뛰어난 文辭의 소유자였다. 그것은 ‘양화편’ 첫장에 보이는 공자와의 문답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는 또한 巫史의 学에도 통해 있었다. <좌전>‘애공9년에는 그가 <주역>을 가지고 전쟁의 길흉을 점치는 기사가 있다. 공자학파의 손으로 이뤄진 문헌에 이와같은 기사가 있는 것은 왜인가. 그것은 필시, 양호도 또한 공자와 같이 師儒에서 나와, 時政의 개혁에 나서고, 門弟를 거느리고, 당시의 귀족정치에 도전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그의 학파에 전해진 자료는 유학의 융성에 따라 소실된 것 같은데, 얼만인가는 儒家의 자료 속에 섞여 들어가 있는 것이다.
양호는 공자보다 다소 연배가 위의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는 일찍부터 계씨를 따랐지만 3가의 전제정치에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3가를 누르고 자신의 전제정권을 세운 것도 그에게는 혁명의 행동이었다. 공산불요도 그 때 양호와 한 동아리였다. 양호는 아마도 공자를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동지로 여기고 초빙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그를 경원했다. 그래도 공산불요의 초빙에는 적극 응하려고 했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비슷했을 것이다. 다만 공자는 양호를 거부했다. 양호가 전제에 성공하자, 공자는 곧바로 제나라로 망명해 古樂 연구 등을 하고 있다.
【白川靜孔子傳 제1장-東西南北의 사람】 <18>
꿈과 그림자③
양호는 3년 후 실각했다. 3가가 단결해 자기 세력을 회복하려 했기 때문이다. 양호는 노나라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보옥대궁을 훔쳐 제나라로 망명했다. 상징이 있는 곳에 君權의 정통성이 있다는 생각이리라. 제나라에서도 그는 門下를 임금 쪽에 붙이고 상당한 세력을 구축했다. 양호가 제나라로 망명해 오자 이번에는 공자가 서둘러 귀국하고 있다. 그 후, 협곡의 회담으로 제·노 양국관계가 개선되었다. 제나라는 더이상 양호를 머물게 내버려둘 수 없어 그를 잡으려 했으나, 양호는 용케 망명해 송나라로 달아났다가 晋으로 가 趙簡子 밑으로 들어간다. 양호가 멀리 가버린 뒤에는 공자의 세상이다. 자로가 계씨의 宰(가신의 우두머리)가 되고, 공자도 노나라 국정에 참여했다. 그러나 공자의 三桓억제책도, 양호와 근본적으로는 다를 게 없었다. 공자는 자로를 시켜 3환의 사읍을 무장해제시키려 한다. 처음에는 순조로왔지만 결국 실패하고 공자도 양호와 같은 운명을 맞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제나라로 갈 수 없다. 그래서 연고를 찾아 위나라로 갔다.
위나라에서는 상당한 대우도 받았고 제자들도 각각 벼슬살이를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공자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아무튼, 그럭저럭 지내기로는 그리 나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그는 환영에 시달린다. 애공2년(전493) 후원자였던 위영공이 죽자, 진나라가 그동안 송나라에 망명해 있던 태자를 위나라에 입국시켰다. 주모자는 조씨(조간자), 태자를 받들고 위나라 잠입에 성공한 사람은 진나라에 망명해 있던 양호였다. 환영은 바로 눈앞에 나타났다. 공자는 서둘러 다시 남방의 陳나라로 간다. 가는 길에 광땅에서 포위를 당하고, 송나라에서는 환퇴의 습격을 받는다. 제자들에게도 불안한 안색이 농후하다.
이 절망적인 분위기 속에서 공자는 주공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하늘이 아직 사문을 없애려 하지 않으시는데, 광인 따위가 나를 어찌하겠는가’ ‘하늘이 덕을 나에게 주셨다. 환퇴가 감히 나를 어찌하랴’. 몰래 쫓아오는 환영에 떠는 공자는 주공의 목소리에서 생기를 되찾는다. ‘양화편’에는, 양화와 공산불요의 이야기와 함께 불힐佛肹의 이야기가 수록돼 있다. 불힐은 중모中牟라는 진나라 도시의 재. 그 땅을 거점으로 진나라에 반기를 들려고 할 때 공자를 초빙한다. 자로는 이때도 강경하게 반대한다. ‘불힐, 중모로써 반란하려 합니다. 선생님, 왜 가시려 하십니까’라는 강한 어조로 반대한다. 공자는 이에 대해, ‘참으로 굳센 것은 갈아도 닳지 않는다. 진실로 흰 것은 물들여도 검어지지 않는다’며, ‘나 어찌 저 박이겠느냐. 마냥 한 곳에 매달려 사람들이 따먹지 못하게 하겠느냐‘라는, 공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투를 하고 있다(역주1). 무언가 집착하고 있는 듯한 語氣이다. 불힐의 반란은, 아마 <좌전>에 기록된 애공5년(전490) 조앙趙駚이 위나라를 치려고 중모를 포위했을 때의 일인 것 같다. 중모는 본래 위나라 땅으로, 이때 그 귀속을 놓고 晋나라와 衛나라 간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공자는 벌써 위나라를 떠나 陳나라에 가 있었다. 아마도 그곳으로 불힐의 초빙장이 날아왔을 것이다. 양화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晋나라와 衛나라의 사이가 좋지 않은 상황이라면 조씨에게 돌아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환영은 떨어져 있다. 이제 그 환영에 한 방 먹이고 싶다. 공자의 마음 속은 반발심과 증오로 들끓고 있다. 저 공자답지 않은 말투가 사실이라고 한다면, 나는 역시 그 환영을 향한 말이었다고 해석하고 싶다. 환영에 대해 한 말이므로 이것은 당연히 실현되지 않았다.
공자는 다시 남쪽 초나라로 간다. 여기서는 환영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환영이 없는 곳에는 긴장도 없었다. 공자는 뒷날의 반란자인 白公등의 무리에게 다소의 영향을 남기고 떠났다. 공자와 의견이 맞지 않았던 섭공葉公이 그 백공의 난을 평정하고 있다.
【白川靜孔子傳 제1장-東西南北의 사람】 <19>
꿈과 그림자④
모든 희망을 잃고, 공자는 다시 陳으로 돌아왔다. 이미 70에 가까운 공자에게 더 이상의 방황은 무리였고, 불가능하기까지 했다. 노나라에서는 제자 염구와 유약이 스승의 귀국 공작을 계속 벌이고 있었다. 공자 추방을 주도했던 계환자도 이미 죽고(전492), 염구도 실권자 계씨의 재가 되어 있다. 계씨에게 공자 復國의 양해가 떨어지자, 사자가 공자를 향해 서둘러 떠났다. 高師를 앙망하는 젊은 학도와 광간狂簡(뜻이 크고 진취적인 사람-역자)의 움직임도 보고되었다. 공자는 귀국을 결심한다.
공자는 위나라로 돌아갔다. <사기>에 의하면, 공자는 불힐의 반란을 도우려한 뒤에는 조간자와 만나기 위해 黃河까지 갔다가 2명의 현인이 살해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희망을 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생각하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조간자는 양호의 주인이 아니던가. 양호는 애공9년(전486)에는 아직 건재해 있었다. 만약 공자가 황하가에 갔다면, 그것은 이 귀국길의 일이었을 것이다. 공자는 처음에는 晋나라에 갈 희망을 품었던 듯 하다. 그러나 양호가 그곳에 망명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양호도 아마 죽었을 것이다. 귀국이 결정되지 않았다면, 공자는 이 황하의 물결을 건너갔을 지 모른다. 그러나 귀국하기로 한 지금, 그 기회는 이미 사라졌다. 공자는 황하의 물가에 서서 탄식했다고 한다.
아름답구나 강물이여, 양양하구나. 丘, 이를 건너지 못하는 것은, 天命이 런가.
공자는 여기서 마침내 환영과 결별한다. 그것은 하늘의 명이었다. <논어>에 ’선생님, 강가에 서서 말씀하기를, 흘러 가는 것이 저와 같구나, 낮밤을 가리지 않는구나‘(자한-역주1)라는 구절이 있다. 아마도 이때의 이야기일 것이다.
귀국하고나서의 공자는 더는 환영에 시달리는 일은 없었다. 동시에, 주공을 꿈에서 보는 일도 없어졌다. 그러나 환영은 과연 양호의 환영이었을까. 환영은 자신에게만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양호를 매개로 한 자기 자신의 그림자는 아니었을까. 자기의 理想態에 대한 否定態로서의 타락한 모습을 공자는 양호에게서 보고 있었던 게 아닐까. 공자는 항상 주공을 꿈에서 보고 있었기에, 이상태를 향한 希求를 버리지 않았다. 그것이 공자의 구원이었다. 처음의 망명 이래 22년간, 공자는 하나의 목소리와 하나의 그림자 속에 살았다. 그 목소리와 그림자 어느쪽이든, 공자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다.
사람은 누구라도 모두, 그러한 소리를 듣고 그림자를 보며 산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자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런 뜻에서, 공자나 소크라테스같은 사람은 희귀한 인격이었다. 위대한 인격이었다. 그리고 그 점에 주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위대한 인격의 생애를 꿰뚫는 리듬을 파악하기 어려울 것이다. 공자의 망명생활, 따라서 그 생애의 주요한 부분에는 긴장된 아름다운 리듬이 흐르고 있다. ‘너희들은 나에게 숨기는 게 있는가. 나는 그대들에게 숨기는 것이 없다. 나의 행한 일, 너희들과 함께 하지 않은 것이 없나니. 이것이 丘이니라’(술이편-역주2)라고 공자 스스로 말하고 있음에도, 공자의 주위에는 일종의 신비주의가 떠돈다. 제자들이 ‘숨긴다’고 느낀 것은, 아마도 그 아름다운 리듬을 움직이고 있는 무언가를 감지했다는 뜻이리라. 나도 공자의 생애 속에서 그와같은 리듬의 흐름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
==
Namgok Lee
·
안회의 죽음에 대한 공자의 절망과 통곡을 일본인 학자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1910~2006)는 그의 저서 <공자전(孔子傳)>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군요.
이인우 선생의 번역으로 소개합니다.
<안연이 죽자, 공자 슬퍼하며 말하였다. “아,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구나!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구나!”
顔淵死 子曰 噫 天喪予 天喪予 (11/8)
안연이 죽으니, 공자께서 통곡하였다. 공자를 따르던 한 제자가 말하기를, “선생님께선 너무 슬퍼하십니다.”
“아, 그렇게 보였느냐. 그 사람을 위해 통곡하지 않으면 누구를 위해 그리하겠느냐.”
顔淵死 子哭之慟 從者曰 子慟矣 曰 有慟乎 非夫人之爲慟而誰爲(11/9)>
<<공자문례(孔子問禮)②
문례설화는 <장자(莊子)>에 처음 보이며 그 창작자는 장자 일파이다. 그러나 ‘천도편(天道篇)’에 보이는 문례의 설화는, 공자에게 묵자류의 ‘겸애무사(兼愛無私)는 인의(仁義)의 정(情)이다’라고 주장하게 하는 등 장자 말류가 지어낸 것인 듯하다. 장자는 유학(儒學)에 깊어서 장자의 사상은 유가의 비판으로부터 나오는 바가 있다. 장자가 문례설화를 가지고 그 학통(學統)을 높이려고 했을 리는 없다. 장자의 유가 비판은 종종 공자와 안회의 문답이라는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안회 말하기를, “(도에) 더 나아간 것 같습니다.” 중니(仲尼) 말씀하시기를, “무슨 말이냐?” 안회가 말했다. “저는 인의를 잊어버렸습니다.” 중니가 말했다. “가(可)하다. 그러나 아직은 멀었다.”
다른 날, 다시 공자를 뵙고 말하기를, “더 나아간 것 같습니다. 공자 말씀하시기를, ”무슨 말이냐?“ 안회가 말했다. ”예악을 잊어버렸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가하다. 그러나 아직은 멀었다. “-장자 ‘대종사(大宗師)’
안회는 생각이 깊고 자득한 사람이다. 그 스승에게 고하기를 ‘인의를 잊었다’고 한다. 그러나 스승은 ‘가하다’고 평가하면서도 ‘아직은 멀었다’라고 한다. 다른날에 또, 이번에는 ‘예악을 잊었다’고 한다. 인의예악은 당시 유가의 근본 주장이다. 그러나 스승은 역시 ‘아직 멀었다’고 한다. 공자는 이 준재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설화 속의 공자는 후학에 의해 노모스화된 유가 교설의 초극(超克)을 바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다른 날 다시 공자를 뵙고 말하기를, ”더 나아간 것 같습니다. 좌망(坐忘)한 것 같습니다. 중니가 깜짝 놀라 얼굴빛을 고치며 말하기를, “무엇을 좌망이라 하는가?” 안회가 말하기를, “지체(肢體)를 버리고, 총명(聰明)을 물리치고, 형태를 벗어나고, 지(知)를 제거하고, 대통(大通)과 같아졌습니다. 이를 좌망이라고 합니다. 중니 말하기를, ”같아지면 곧 좋아함(주관)이 없어진다. 화(化)하면 곧 상(常; 고정된 상태)이 없어진다. 너는 과연 현명하구나. 구(丘)는 청컨대 너의 뒤를 따르련다. -상동
좌망이란 지각적인 것, 이성적인 것의 방기(放棄)를 말한다. 말하자면 직관(直觀)이다. 그것은 노모스적인 원리로서의 인의예악을 버리는 곳에서 생겨난다. 공자에게서 밝혀진 이데아적인 세계는 이윽고 유묵(儒墨)의 무리에 의해 노모스적인 사회적 일반자로 전화(轉化)되었다. 그것은 집단이 가진 규범성에 모든 사람이 복종해야만 하는 세계이다. 묵자와 맹자의 학설은 그 사상적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일반자는 그 집단의 초월성으로 인해 주체적인 삶이 자유롭게 숨쉬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생의 충동은 극도로 억압된다. 따라서 노모스적인 세계의 부정은 개인의 주체성 회복을 주장하는 것이 되며, 보다 근원적인 생의 해방을 주장하는 것이 된다. 생의 철학, 실존의 철학이라고 불리는 것이 생기게 되는 것은 대개 그러한 사상적 요구로부터이다. 장주의 사상이 종종 생철학이나 실존척학으로 여겨지는 것도 또한 그런 의미에서이다.
<장자>에는 공자와 안회가 토론하는 형식을 취한 것이 이밖에 8조 정도 더 있는 것으로 보아 장주는 이 두 사람을 토론시키는 것을 즐겼던 것 같다. 그것은 공자의 권위를 상징적인 것으로 하고, 우언(寓言)의 세계에서 이를 비판하는 수사적인 편의에서라기보다도, 조금 끼어드는 식으로 말하자면, 아마도 그런 형식으로 자기 사상의 초극을 바랐던 것은 사실은 공자 자신이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논어>‘공야장편’에 공자와 자공의 문답 1조가 보인다. 공자가 자공에게, ‘너와 회는, 누가 더 나은가’라고 묻는다. 자공은 물론 한 점이나 두점 정도 접고 있는 상대이다. ‘사(賜; 자공의 이름)가 어찌 감히 회를 바라겠습니까. 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압니다. 사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압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공자는 ‘아무렴. 나나 너나 모두 그와 같지 못하다’라고 한다. 자공이 아직 공자의 망명길을 함께 하고 있던 때의 일일 것이다. 그 때 벌써 공자는 이 젊은 준재가 자신을 뛰어넘을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대화는 공자가 단순히 사람의 재능에 대해 논한 것으로 봐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공자가 말한 인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설사 안회 뿐이었다고 해도, 안회가 당시 공자보다도 높은 자각에 도달해 있을 리는 없다. ‘따르고자 하여도 유(由; 방법)가 없을 뿐’(자한편)라는 것이 당시 안회의 영탄이었다. 그러나 아마도 공자는 한번 형성된 사상이 지닌 완결성은 그 완결성으로 인해 스스로 한계를 가진 것이 됨을 이미 통찰하고, 자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데아적인 완성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이데아는 영원히 그 실현을 갈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데아의 체인(體認)은 언제나 인격적인 주체의 실천에 의한 것인 이상, 그 새로운 발전은 다른 인격의 실천을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 공자는 그런 의미에서 그것을 안회에게 기대했던 것이다. 안회를 잃었을 때, ‘아아, 하늘이 나를 망치는구나’라고 길게 탄식했던 것도 그런 의미였다. 공자는 이미 새로운 이데아의 주체적 행위자를 찾고 있던 것이었다.
필시 장주는 이 공자의 원망(願望)을 간파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장주는 공자와 안회와의 토론이라는 우화형식을 통해 이를 실현해 보려고 했던 것이다. 내가 장주를 공자의 사상적 계보의 정통 계승자라고 하고, 또 안씨의 유(流)에 속한다고 하는 곽말약씨의 설에 찬성하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이다. 장주는 새로운 이데아의 탐구자였다. 그리고 노모스적인 세계 속에 살면서 이데아를 회복했다. 다만 그 회복은 노모스적인 세계의 부정을 통하여 행해졌다. 따라서 저절로 그것은 공자의 그것과는 다르게 되는 것이다. 공자에게서 인(仁)은, 전통의 모든 의미가 이데아로서 거기에서 체인(體認)되는 장(場)이어야 하는 것이었지만, 장자는 그것을 실체화하고 있다. 장자가 말하는 도란 이데아적 실재이다. 그러나 그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사상에는 분명히 계보적인 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공자를, 이 학파에 초대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장주의 후학들에 의해, 공자문례의 설화가 만들어졌다. 이것이 공자문례 설화의 사상사적 의미이다. 다만 노자의 사상은 아마도 장자보다 늦게 형성되었고, <노자>라는 책으로 정착한 것은 더욱 후의 일일 것이다.>>
==
문례설화는 <莊子>에 처음 보이며 그 창작자는 장자 일파이다. 그러나 ‘天道篇’에 보이는 문례의 설화는, 공자에게 묵자류의 ‘兼愛無私는 仁義의 情이다’라고 주장하게 하는 등 장자 말류가 지어낸 것인 듯하다. 장자는 儒學에 깊어서 장자의 사상은 유가의 비판으로부터 나오는 바가 있다. 장자가 문례설화를 가지고 그 學統을 높이려고 했을 리는 없다. 장자의 유가비판은 종종 공자와 안회의 문답이라는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안회 말하기를, 회, (도에) 더 나아간 것 같습니다. 仲尼 말씀하시기를, 무슨 말이냐? 안회가 말했다. 회, 저는 인의를 잊어버렸습니다. 중니가 말했다. 可하다. 그러나 아직은 멀었다.
다른 날, 다시 공자를 뵙고 말하기를, 회, 더 나아간 것 같습니다. 공자 말씀하시기를, 무슨 말이냐? 안회가 말했다. 회, 예악을 잊어버렸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가하다. 그러나 아직은 멀었다. -장자 ‘大宗師’
안회는 생각이 깊고 자득한 사람이다. 그 스승에게 고하기를 ‘인의를 잊었다’고 한다. 그러나 스승은 ‘可하다’고 평가하면서도 ‘아직은 멀었다’라고 한다. 다른날에 또, 이번에는 ‘예악을 잊었다’고 한다. 인의예악은 당시 유가의 근본주장이다. 그러나 스승은 역시 ‘아직 멀었다’고 한다. 공자는 이 준재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설화 속의 공자는 후학에 의해 노모스화된 유가 교설의 超克을 바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다른 날 다시 공자로 뵙고 말하기를, 회, 더 나아간 것 같습니다. …말하기를, 회, 坐忘한 것 같습니다. 중니가 깜짝 놀라 얼굴빛을 고치며 말하기를, 무엇을 좌망이라 하는가? 안회가 말하기를, 肢體를 버리고, 聰明을 물리치고, 형태를 벗어나고, 知를 제거하고, 大通과 같아졌습니다. 이를 좌망이라고 합니다. 중니 말하기를, 같아지면 곧 좋아함(주관)이 없어진다. 化하면 곧 常(고정된 상태)이 없어진다. 너는 과연 현명하구나. 丘는 청컨대 너의 뒤를 따르련다. -상동
坐忘이란 지각적인 것, 이성적인 것의 放棄를 말한다. 말하자면 直觀이다. 그것은 노모스적인 원리로서의 인의예악을 버리는 곳에서 생겨난다. 공자에게서 밝혀진 이데아적인 세계는 이윽고 儒墨의 무리에 의해 노모스적인 사회적 일반자로 轉化되었다. 그것은 집단이 가진 규범성에 모든 사람이 복종해야만 하는 세계이다. 묵자와 맹자의 학설은 그 사상적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일반자는 그 집단의 초월성으로 인해 주체적인 삶이 자유롭게 숨쉬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생의 충동은 극도로 억압된다. 따라서 노모스적인 세계의 부정은 개인의 주체성 회복을 주장하는 것이 되며, 보다 근원적인 생의 해방을 주장하는 것이 된다. 생의 철학, 실존의 철학이라고 불리는 것이 생기게 되는 것은 대개 그러한 사상적 요구로부터이다. 장주의 사상이 종종 생철학이나 실존척학으로 여겨지는 것도 또한 그런 의미에서이다.
<장자>에는 공자와 안회가 토론하는 형식을 취한 것이 이밖에 8조 정도 더 있는 것으로 보아 장주는 이 두 사람을 토론시키는 것을 즐겼던 것 같다. 그것은 공자의 권위를 상징적인 것으로 하고, 寓言의 세계에서 이를 비판하는 수사적인 편의에서라기보다도, 조금 끼어드는 식으로 말하자면, 아마도 그런 형식으로 자기 사상의 초극을 바랐던 것은 사실은 공자 자신이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논어>‘공야장편’에 공자와 자공의 문답 1조가 보인다. 공자가 자공에게, ‘너와 회는, 누가 더 나은가’라고 묻는다. 자공은 물론 한 점이나 두점 정도 접고 있는 상대이다. ‘사賜(자공의 이름)가 어찌 감히 회를 바라겠습니까. 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압니다. 사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압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공자는 ‘아무렴. 나나 너나 모두 그와같지 못하다’라고 한다. 자공이 아직 공자의 망명길을 함께 하고 있던 때의 일일 것이다. 그 때 벌써 공자는 이 젊은 준재가 자신을 뛰어넘을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대화는 공자가 단순히 사람의 재능에 대해 논한 것으로 봐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공자가 말한 인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설사 안회 뿐이었다고 해도, 안회가 당시 공자보다도 높은 자각에 도달해 있을 리는 없다. ‘따르고자 하여도 由(방법)가 없을 뿐’(자한)라는 것이 당시 顔子의 영탄이었다. 그러나 아마도 공자는 한번 형성된 사상이 지닌 완결성은 그 완결성으로 인해 스스로 한계를 가진 것이 됨을 이미 통찰하고, 자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데아적인 완성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이데아는 영원히 그 실현을 갈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데아의 體認은 언제나 인격적인 주체의 실천에 의한 것인 이상, 그 새로운 발전은 다른 인격의 실천을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 공자는 그런 의미에서 그것을 안회에게 기대했던 것이다. 안회를 잃었을 때, ‘아아, 하늘이 나를 망치는구나’라고 길게 탄식했던 것도 그런 의미였다. 공자는 이미 새로운 이데아의 주체적 행위자를 찾고 있던 것이었다.
필시 장주는 이 공자의 願望을 간파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장주는 공자와 안회와의 토론이라는 우화형식을 통해 이를 실현해 보려고 했던 것이다. 내가 장주를 공자의 사상적 계보의 정통 계승자라고 하고, 또 안씨의 유에 속한다고 하는 곽말약씨의 설에 찬성하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이다. 장주는 새로운 이데아의 탐구자였다. 그리고 노모스적인 세계 속에 살면서 이데아를 회복했다. 다만 그 회복은 노모스적인 세계의 부정을 통하여 행해졌다. 따라서 저절로 그것은 공자의 그것과는 다르게 되는 것이다. 공자에게서 仁은, 전통의 모든 의미가 이데아로서 거기에서 體認되는 場이어야 하는 것이었지만, 장자는 그것을 실체화하고 있다. 장자가 말하는 道란 이데아적 실재이다. 그러나 그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사상에는 분명히 계보적인 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공자를, 이 학파에 초대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장주의 후학들에 의해, 공자문례의 설화가 만들어졌다. 이것이 공자문례 설화의 사상사적 의미이다. 다만 노자의 사상은 아마도 장자보다 늦게 형성되었고, <노자>라는 책으로 정착한 것은 더욱 후의 일일 것이다.


All reactions:10Namgok Lee and 9 others
1 share
Like
Comment
Share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