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08

박정미 - 승려와 철학자 | 장 프랑수아 르벨 , 마티유 리카르

(1) 박정미 - 진달래가 있는 영원의 찻집에서 바라보는 정경 책을 열면 노철학자와 장년의 승려가 향그러운 차 한... | Facebook




박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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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가 있는 영원의 찻집에서 바라보는 정경

책을 열면 노철학자와 장년의 승려가 향그러운 차 한 주전자를 사이에 두고 정겹게 앉아있는 모습이 보인다.
창밖으로는 히말라야 눈 쌓인 영봉이 거대한 풍경으로 줄지어 달리고 그 위에는 시리고도 맑은 푸른 하늘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벽 한 켠에 소나무와 잣나무를 켜서 만든 땔감으로 벽난로를 지피고 있는데 거기서 나온 따뜻한 온기와 온화한 불빛이 두 사람의 얼굴을 비추고 때로 감추면서 일렁이고 있다.
바로 옆자리에 앉은 나는 두 남자의 표정을 주의깊게 살피면서 대화에 귀를 기울이다가 때로 귓등으로 흘리면서 새봄에 피어난 진달래와 창밖의 풍경을 내다보는 것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두 사람은 부자지간이다. 게다가 그 이력이 고대 전설의 현인 왕처럼 화려하고 매혹적인 인물들이다.
아버지 장 프랑스와는 문학과 철학을 전공한 대학교수 출신으로서 1970년대 일찍이 <마르크스도 예수도 아닌>을 펼쳐낸 이후 세계적으로 문명을 떨친 무신론자철학자이다.
아들 마티유 르카르는 젊은시절 분자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자를 찾아 티벳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스승의 인간됨에 반하여 티벳불교의 승려로 수행을 시작한지 20년을 넘겼다.

한국불교에서도 이런 경로로 유입된 푸른눈의 납자가 수행 끝에 불교의 진수를 체득하고 자신이 가진 분석적이고 정확한 언어/사유자산으로 이를 다시 전달해주는 경우가 많다.하지만 그가 가진 특이성은 그가 인간의 물질적 기초를 다루는 분자생물학계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뛰어난 과학자이기도 하다는 데 있다.
그리하여 아버지와 아들은 최고수준에서 동양적 사유와 서양적 사유간, 불교와 무신론간 대화의 향연을 펼치게 된다.
아들이 학문적 이력을 포기하고 승려생활을 시작한 것은 존재에 대한 갈증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갈증은 동양의 지혜로만 채워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들이 오늘날 서양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범주의 사람들, 즉 성자나 현자처럼 완벽한 존재의 이상에 부합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제가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나 고대의 위대한 현자들에 대해 품고 있었던 그러나 제게는 이미 사문화되었던 이미지였습니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튼의 강연을 듣기 위하여, 혹은 성프란체스코를 만나기 위해 제가 직접갈 수는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갑자기 살아있는 지혜의 본보기처럼 보이는 존재들이 불쑥 나타난 것입다. 그래서 저는 ‘인간의 차원에서 완벽함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저들이 그런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를 수행으로 이끈 첫 스승 칸규르 린포체를 처음 대면했을 때 그는 깊은 명상에 들었을 때와 같은 직관적 방식으로 그의 인격을 접하고 흡수했다.

“제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은 바로 그분의 인격, 그분의 존재 자체였습니다. 그분에게서 나오는 깊이, 힘, 고요함이 제 정신을 열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가슴 속의 갈망과 동경을 속속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과학은 서양에서 거둔 성공의 금자탑일 수 있지만 문제는 과학으로 충분하지 않다는데 있다는 사실을 그는 뼈저리게 확인한다. 그래서 그는 아들을 서양의 파스퇴르 연구소에서 티벳의 사원으로 빼앗기지 않았던가! 서양은 비과학적인 서양문화, 특히 철학에서는 실패하고 만 것이다.

“17세기의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에 이르기까지 철학이 생겨난 이래 철학의 이중적인 차원이 계속 존속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과학적인 차원 또는 과학적인 목표이고 또 다른 차원은 지혜의 추구, 그리고 인간의 삶, 경우에 따라서는 인간의 삶 너머에 있는 사람에 주어진 어떤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지. “
하지만 서양의 철학은 먼저 철학에서 과학의 분화가 일어남으로써 그 다음에 지혜와 의미의 추구 기능이 최종적인 실패로 귀결됨으로써 붕괴되었다는 것이 아버지의 진단이다. 정의의 추구와 행복의 추구를 동시에 담고 있는 철학의 남은 한차원마저 18세기에 들어와 정치의 영역으로 집중되어 나가고 극단화됨으로써 철학은 최종적으로 몰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철학의 남은 한 면인 정의의 추구, 행복의 추구는 정의로운 사회를 조직하는 기술이 되고, 이 정의로운 사회는 집단적 정의를 통해 그 구성원들을 행복하게 만든다. 다시 말하면 선과 정의, 행복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은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혁명이 될 것이다.

그 순간 철학에서 다루는 도덕의 모든 분야는 정치제제 속에서 실현되는 것이지. 19세기가 되면 사람들은 사회를 철두철미하게 새로 건설하길 바라는 위대한 유토피아의 시대로 들어선다.”


이러한 관점에서 철학의 도덕적 기능은 제로에서부터 시작하여 완전히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를 최초로 시도한 중요한 사례가 프랑스혁명이고, 그 다음에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앞세운 혁명론의 시대가 펼쳐졌다.

“이러한 이상에 봉사하고 사람들이 절대적인 혁명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도덕이지. 그러므로 더 이상 개인적인 도덕도 개인적인 지혜의 추구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개인적인 도덕이란 집단적인 도덕에 참여하는 것이다. 파시즘과 나치즘에서도 우리는 인간의 혁신이라는 이념을 발견하게 된다. “
“중요한 것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제로에서 무한까지 완전히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 거기에 반대한다고 의심되는 모든 것을 ‘제거’함으로써 인간을 혁신하는 것이었다. 혁명적 행위는 철학, 심지어 종교까지도 대체했다.”

그러한 전체주의적 기획, 유토피아를 향한 혁명의 이상은 나치즘과 볼세비즘, 마오이즘에서 수많은 인간살육을 초래했고, 체제의 논리를 극단까지 밀고간 폴포트의 캄보디아에서는 절대악으로 귀결되었다.

“정치 유토피아적 체제들이 실천적 측면에서 실패하고 정신적인 가치를 상실한 것은 20세기 말의 중요한 사건이 되었는데, 내가 비과학적인 부분에서 서양문명이 실패했다고 말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사회적 개혁이 도덕적 개혁을 대체해야 했고, 그러한 사회적 개혁은 재앙에 이르게 되었으며, 그 결과 우리는 지금 어찌할 바를 전혀 모르는 채 허무앞에 놓여있다.”

여기서 서양문명의 본질적 상처, 본질적 공백이 생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어떤 개인이 실현할 수 있는 지적 또는 예술적 성과와,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의 도덕적 삶 또는 간간히 그의 도덕의 빈번한 빈곤함 사이에서 생겨나는 불일치, 상충, 모순이다. 그것은 실상 철학이 개인의 지혜를 추구하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남게 된 공백을 보여주는 것이다. “

최종심급에서 서양철학이 귀결된 유토피아적이며 전체주의적인 체제의 붕괴와 도덕에 남겨진 공백을 채우기 위해 불교와 같은 동양의 지혜가 밀고 들어오고 있다.
이러한 현대 서양철학의 붕괴를 설명하는 노철학자의 분석에는 그 밀려들어오는 티벳불교의 지혜의 물결에 아들을 떠나보낸 아버지의 회한이 묻어있다.

이 책은 철학적 종교적 인식을 심화시켜준다기 보다는 두 다른 사유체계가 조우하며 그려내는 현장의 수준 높은 분위기를 보여주는 데 가치가 있다. 새로운 지식이 아니라 사상과 삶을 대하는 자세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무신론자 아버지는 우리가 신앙이나 영적 훈련에 대해서 가지는 의구심을 적확하게 포착하여 말로 표현해내는 시원함을 준다. 아버지의 산통을 깨는, 적당히 얼버무리지 않고 찔러대는 회의와 의심에 찬 질문 앞에서 영민한 아들은 최선을 다해 자신이 배우고 깨우친 불교적 진리를 방어하고 설득해낸다.
수행의 길에 한치의 의심도 없는 아들의 어조에는 아빠를 염려하는 희미한 안타까움이 배어나올 듯 말 듯 서려있다. 아마도 죽음을 자신보다 더 가까이 두고 있는 아버지의 나이를 의식하는 듯하다. 그걸 예민하게 느끼는 아빠는 살핏 아들을 비꼬고 놀리고 싶지만 다정하게 감싸안으면서 대견한 듯 놓아준다.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은 자신의 기본적인 위치에서 벗어나지 않고 확고하다. 대화는 승부를 내는 것도 결론을 도출해내기 위한 것도 아니다. 동양의 지혜와 서양의 철학이 함께 어울려 춤을 추는 이 대화는 지적향연이면서 너무나 감미로운 감성적 정서적 미학적 예술작업이기도 하다.

벽난로의 불길이 사그라든다. 두 부자는 말을 그치고 물끄러미 서로를 바라본다. 아름다운 시간을 처음부터 끝까지 펼쳐보고 나는 삼십여년 전에 펼쳐진 그 시간을 닫는다. 책장을 덮는다. 아름다운 정경의 잔상과 향그러운 여운이 아직도 내 안을 감돌고 있다.

이 책을 소개해준 박헌권변호사님, 진달래를 빌려준 고운동천 이효열님께(오해하지 마시라. 진달래가지를 꺾어온게 아니라 산책길에 꺾어진 가지를 주워와서 물에 꽂았더니 꽃이 환하게 피어났다)감사드린다.
아, 참 그런데 이 책의 제목이 뭐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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