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미
빅토리아조 어느 위선자와 그 부인의 초상
ㅡ조지 엘리엇, <미들마치>를 읽고 2
미들마치 이야기는 1829년을 기점으로 전개되지만 조지엘리엇이 이 책을 쓴 건 빅토리아조(1837~1901)가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1870년대 초다.
그러므로 이 책은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적 분위기, 생활감각과 인물군상의 심리를 그려냈다고 볼 수 있다.
뻗어나가는 영국제국주의의 심장에서 도처에 떠다니는 부를 움켜쥐고 싶어하는 탐욕과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있는 도덕의식의 칼날이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는 시대였다.
두 힘은 그 시대 인물들마다 스며들어 싸우다가 팽팽한 대치상태로 답보하거나 때로 타협을 이루어 공존하기도 하는데 그 결과 거대한 위선의 그림자가 시대를 뒤덮었다.
그로 인해 뻔뻔스레 경직되어가는 도덕감정, 불안과 초조, 신경증이 빅토리안들을 괴롭혔으니 이를 한 몸에 구현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은행가 '불스트로드'이다.
불스트로드는 이 책 미들마치에서 단연 인상적으로 생생하게 그려진 인물 형상으로서 가장 희극적이면서 비극적인 운명의 주인공이다.
그는 지역의 돈줄을 쥐고 있는 금융자본가이자 은행장이다. 상공업계를 주물럭거리는 놀라운 수완과 청교도적인 엄중함으로 지역민들의 경제생활을 심판하는 권력자이기도 했다.
불스트로드는 공평하고 정의롭게 채무유예와 대출을 결정하고 자선금을 기부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그 이후 채무자와 피기부자의 생활을 추적하여 재결정을 검토함으로써 그의 금권은 더욱 막강해졌다. 그는 돈으로써 하느님 앞에 떳떳해지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비상한 인물로 여겨졌다.
그런 그에게 심각한 걱정거리가 새로 생겼다. 젊은시절 돈을 위해 그가 저지른 추악한 과오를 함께 나누었던 옛 동료 래플스가 불시에 나타나 쉬파리처럼 들러붙어버린 것이다.
래플스는 그의 과거를 폭로하겠다는 협박을 일삼으며 끈질기게 돈을 뜯어갔다. 돈을 주어 쫓아내고 또 돈을 주어 쫓아내도 알콜중독으로 허비하고 또 다시 되돌아와 손을 내미는 래플스였다. 불스트로드는 자신의 과거가 언제 누설될지 모른다는 불안과 초조 속에서 래플스가 죽어 없어지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그런 그에게 마침내 운명의 순간이 왔다. 알콜중독으로 만신창이가 된 래플스가 그의 집에서 인사불성으로 드러누워버린 것이다.
불스트로드는 정신착란과 섬망사태에 빠진 래플스가 잠꼬대로라도 자신의 과거를 폭로할까 싶어 간호를 자청하고 밤새워 그의 곁을 지켰다.
지역의 실력있는 의사 리디게이트도 불러 환자의 상태를 알아보았지만 그의 희망은 사실 환자의 쾌유가 아니라 죽음이었다. 다만 그는 언제 어디서고 내려보시는 하느님의 엄혹한 감시의 눈초리를 의식하는 사람이었기에 꼼짝달싹할 수 없었을뿐이다.
리디게이트는 그에게 환자는 체질이 튼튼하니 곧 회복할 것이라고 자신하며 다만 "술은 절대 주지 말라"고 지시를 되풀이하여 강조했다.
의사의 지시에 순응하며 이튿날을 환자곁에서 밤을 샌 불스트로이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집사와 가정부 에이블부인에게 간호를 맡기고 자기방에 돌아왔다. 그렇게 피곤하고 지친 때 은밀하고 무서운 시험이 시작될 줄은 꿈에도 모르는 채.
ㅡ그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옷을 다 갈아입기도 전에 에이블 부인이 문을 두드렸다. 그는 그녀의 작은 목소리가 들리도록 문을 조금만 열었다.
“죄송합니다만 나리. 저 가엾은 사람에게 브랜디나 그런 것을 줄 수 없을까요? 몸이 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편 외에는 아무것도 삼키지 않으려 해요. 삼킨다 해도 기운이 날 것도 없는데요. 그런 데다 땅 속으로 가라앉고 있다고 자꾸자꾸 말하고 있어요.”
블스트로드씨에게서 대답이 없었기에 그녀는 놀랐다. 그의 내면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가면 저 사람은 기운이 없어서 죽을 거예요. 제가 전에 가엾은 주인어른 로빈슨씨를 간호할 때는 포트와인과 브랜드를 계속해서 드려야 했어요. 그것도 한 번에 큰 잔으로 말이에요.” 에이블부인은 약간 항의조로 덧붙였다.
그러나 여전히 불스트로드씨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기에 그녀는 말을 이었다.
“사람이 죽음의 문턱에 있을 때는 뭘 아낄 때가 아니고. 정말이지 나리께서도 그걸 바라시지 않겠지요. 그게 아니면 저희가 가진 럼주를 갖다주려고요. 하지만 나리께서 밤을 새워 간호하셨고, 하실 수 있는 것을 죄다 하셨으니까-----.”
이 부분에서 문틈으로 열쇠 하나가 쑥 나왔고, 불스트로드씨의 쉰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포도주 저장실 열쇠요. 거기 브랜디가 많이 있을 거요.”ㅡ
래플스는 그렇게 죽었다. 하지만 불스트로드는 평안을 찾을 수 없었다. 추문은 래플스 생전에 어느새 새어나가 래플스의 죽음으로 온 사방에 퍼지게 된 것이다.
[불스트로드의 내적고뇌가 어찌나 생생하게 그려졌던지 나는 그만 그와 하나의 의식을 이루어 죄를 함께 짓고 고통을 같이 나누는 듯 했다. 온 세상이 그를 위선자라고 단죄했지만 나는 그가 한 없이 애처롭고 불쌍하기만 했다. 그의 위선은 그를 이해하는 내 안에도 있고 이렇게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작가 조지엘리엇 안에도 있었을거라고 생각한다.]
이 사건은 그에게 구원의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그가 자신을 옥죄는 두려움을 떨치고 겸손하게 현실을 인정하고 나섰다면, 젊은시절의 공범인 래플스가 자신의 영혼의 공범임을 인정하고 불쌍히 여겨 돌봐주었다면, 그는 용서를 받았을 것이다. 세상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과 자기자신에게 말이다.
그를 괴롭히는 건 그가 언제나 자신의 선행으로 자신의 죄를 갚아달라고 거래해온 하느님이 아니었다. 하느님은 댓가없이 평화와 사랑을 주시는 분이기에 그가 내맡기기만 했으면 모든 죄를 탕감하고 그를 자유롭게 해방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어리석고 불쌍한 불스트로드는 자신을 이끌어온 이기심과 탐욕, 그로인한 거래의 습관을 한 순간도 놓아버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죄와 고통의 어둠 속에서 미들마치 지역의 가장 아름다운 사랑과 헌신의 장면이 펼쳐진다. 불스트로드의 부인 헤리엇은 점점 조여오는 주위의 이상한 분위기를 알아차리고 남편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알아보려 다니다 드디어 진실과 맞닥뜨리게 되는데.
ㅡ그 순간은 어쩌면 이후의 어떤 순간보다도 나빴을 것이다. 그 순간에 응축된 경험은 엄청난 감정적 위기에 처한 인간의 성향을 드러내고, 중간의 몸부림을 끝낼 궁극적인 행위를 예고한다. 래플스를 기억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여전히 금전적 몰락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오빠의 표정과 말에서 남편에게 뭔가 죄가 있다는 생각이 쏜살같이 머리를 스쳤고-그러다가 공포가 밀려드는 가운데 굴욕을 당하는 남편의 모습이 떠올랐고-그러고는 한순간 살을 태울 듯한 수치심 속에서 오로지 세상의 눈길을 느낀 후 그녀의 마음은 단숨에 뛰어올라 남편 옆에 서서 슬프지만 비난하지 않으며 수치와 고립의 연대감을 나누었다.ㅡ
헤리엇 불스트로드는 쓰러질 듯 위태로운 몸과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자기 방문을 잠그고 누웠다. 방문을 잠갔을 때 그녀는 불행한 남편에게 가서 그의 슬픔을 동반자로 삼고 그의 죄에 대해 “나는 슬퍼할 거예요. 비난하지 않고”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야 그 문을 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헤리엇은 삶의 모든 기쁨과 자존심에 눈물을 흘리며 작별을 고하고 이제 내려가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그 의식을 치르는 마음으로 그녀는 장신구를 모두 떼고 수수한 검은색 옷을 입었다.
도서관으로 책을 반납해야 하는데 불스트로드와 헤리엇의 이야기를 적어놓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냥 돌려줄 수가 없었다. 책의 알맹이를 빼먹고 상을 차린 듯 했기 때문이다. 추악한 남편의 과거와 세상의 멸시를 그대로 공동책임으로 떠안으며 감싸안는 헤리엇의 동지적 사랑을 진정한 부부애의 표상으로 간직하고 싶었다.
몰아치는 불행과 거기서 확인되는 이 든든한 사랑이 불스트로드의 강고한 이기심의 장벽을 녹이고 그에게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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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돈의 세계가 되었으면서 도덕의식이 강하게 남아서 작용하는 빅토리아 조 후기는 현대 한국과 비슷하군요. 그러므로 조지 엘리엇의 소설들이 한국의 독자들에게 특히 끌릴만 하기도 할 것 같습니다.
2] [불스트로드의 내적고뇌가 어찌나 생생하게 그려졌던지 나는 그만 그와 하나의 의식을 이루어 죄를 함께 짓고 고통을 같이 나누는 듯 했다. 온 세상이 그를 위선자라고 단죄했지만 나는 그가 한 없이 애처롭고 불쌍하기만 했다. 그의 위선은 그를 이해하는 내 안에도 있고 이렇게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작가 조지엘리엇 안에도 있었을거라고 생각한다.] 서평자의 이 글을 읽으며 제가 느끼는 것은 소설가의 문장력을 나도 직접 음미해보고 싶다는 것이지만, 또 한가지는 서평자의 몰입감이 괭장하구나,라는 것입니다. 과연 내가 읽어서 같은 것을 느낄까 궁금해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