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13

삶의 절벽에서 만난 스승, 공자

삶의 절벽에서 만난 스승, 공자



표지

하늘을 원망하지 않는다.

사람을 탓하지도 않는다.

아래로 사람을 배워 위로 천명에 이르고자 했을 뿐이다.

하늘만은 이런 나를 알아주시리라.

不怨天 不尤人 下學而上達 知我者 其天乎 _《논어》 <헌문> 37장

나, 이생李生은 삼가 머리를 조아려 하늘에 감사드린다. 불초한 몸으로, 한 위대한 인간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는 행복을 누렸다. 나는 본래 노나라 사람이 아니라 동쪽 바다 건너 청구 땅 동이東夷 사람이다. 이곳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지만 공자孔子께서 세상을 떠난 지 2500여 년 뒤에 태어났다. 어느 깊은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지친 몸을 공원 그네에 두고 캄캄한 하늘을 무연히 바라보다가 문득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 보니 춘추시대 말엽의 중국이었다.

나는 졸지에 미지의 과거에 떨어져 낯선 시간, 낯선 공간을 떠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상을 찾아 열국을 주유하던 공자와 조우하여 그 일행의 짐꾼이 되는 행운을 얻었다. 동행하는 동안 나는 미래에서 막연히 알던 공자라는 사람과 그 제자들의 이상을 향한 열정과 선의에 대한 믿음을 교감했다. 그때 가슴을 파고들었던 벅찬 감동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도리가 없다. 그 놀라운 기쁨에 젖어 나는 집으로 돌아가려는 열망조차 잊었다. 아! 나, 이생은 비록 짐을 나르고 교실을 청소하는 어눌한 이방인에 불과하나, 먼 미래로부터 불려 온 것은 한 위대한 사람의 생애를 증거하라는 소명召命이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이에 나는 감히 스스로 보고 들은 바를 기록하려 한다. 부디 이 죽간들이 만고풍상을 견뎌내어 인간 공자의 꿈과 뜻이 온 누리에 퍼지는 데 작은 보탬이라도 되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일러두기


1. 이 책은 공자의 삶과 사상을 소설 형식으로 쓴 것이다. 그러나 책 속의 대부분 내용은 《논어》, 《사기》 <공자세가> 등을 비롯한 원전과 후대 학자들에 의해 밝혀지고 공인된 연구결과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야기 전개상 필요한 경우에만 허구적 요소를 가미했다.

2. 이 책에 수록된 〈공자세가〉의 역문은 ‘제자백가 중국철학서 전자화 계획(http://ctext.org/zh)’의 <공자세가> 원문을 저본으로 하였으며 다음을 참고했다. 시라카와 시즈카, 《공자전》, 김하중 옮김(지인사, 1977). 사마천, 《사기 세가》, 김원중 옮김(민음사, 2007). 필요한 경우 필자가 보충한 말이나 짤막한 설명은 ( ) 안에 넣었다.

이야기를 시작하며

공자, 위대한 사상의 시작

후세에 공자, 즉 ‘공 선생님’으로 불리게 될 공구孔丘는 기원전 551년에 태어나 479년에 죽었다. 고대 중국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은 공자 사후 388년 뒤에 완성한 불후의 명저 《사기史記》에서 공자의 일생을 ‘세가世家’, 즉 제후의 전기에 포함시켰다. 그는 《사기》 <공자세가>*에서 공자 사상의 위대성과 후세에 미친 영향을 총평한 뒤, 공자를 ‘지극한 성인[至聖]’으로 결론지었다.

* 부록의 번역 전문 참조


나는 공씨의 서를 읽고 그 사람됨의 위대함을 상견했다. 노나라에 가서 공자의 묘당에 있는 수레와 의복과 예기禮器를 보았으며, 여러 유생들이 그 집에서 예를 시습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경모하는 마음에 고개를 숙인 채 배회하며 한동안 그곳을 떠나지 못했다. 천하에는 군주로부터 현인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물이 있었지만, 살았을 당시에는 영화로웠으나 죽고 나면 그것으로 모두 그만이었다. 공자는 포의布衣의 신분으로 그 덕이 십여 대에 걸쳐 전승되고, 학자는 그를 종주로 삼고 있다. 천자, 왕후로부터 중국에서 육예六藝를 말하는 자는 모두 선생을 표준으로 여기고 있으니, 참으로 최고의 성인可謂至聖이라 할 만하다.1


사마천이 공자를 성인이라고 말하고 나서 또 200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유교 문명권 밖에서도 공자는 수세기 전부터 주목의 대상이었다. 20세기 저명한 중국사가 중 하나인 미국 역사가 헤어리 글레스너 크릴Herrlee Glessner Crill은 서구 세계에 공자의 진면목을 전한 명저 《공자 : 인간과 신화Confucius, the Man and the Myth(1949)의 첫머리를 이렇게 쓰고 있다.


2500년 전 중국에서 태어난 한 사람의 일생처럼 인류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예도 없을 것이다.


사마천과 크릴이 시공과 문명의 차이를 초월해 공감한 것은 공자 사상의 위대한 휴머니즘이다. 공자가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성의 본질을 이해했으며, 인간다운 세상을 만드는 일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최초의 사상가라는 데 의견이 일치했던 것이다.

공자는 인에 대해 묻는 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愛人]2

공자의 이런 교육적 언설은 인류 평등의 본질을 고뇌해온 후세의 사람들에게는 혁명의 외침이나 다름없었다.

공자는 특정한 종교적 교리나 이념을 세우기 위해 자기 생각을 주창하지 않았다. 그는 먼저 인간을 중심으로 놓고 인간다운 세상을 만드는 데 필요한 ‘인간다운’ 덕목들을 인간성에서 이끌어내 함양하고자 했다. 그는 위정자는 덕으로 백성을 다스려야 하며, 백성은 올바른 도리로 교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배자 또는 지도자는 반드시 도덕과 예의를 갖추어야 하며, 다스림을 받는 백성들은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고 보았다. 사람은 지위나 권력이 아니라 도덕적 수양의 정도에 따라 군자와 소인으로 나뉜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생각은 단순한 개인적 수양론에 머물지 않고 현실 속으로 들어가 계급을 초월하여 도덕 중심의 인간관과 사회관을 형성했다.3

공자가 살던 때는 어떤 시대였을까? 기원전 5~6세기 지구촌 곳곳에서는 철학과 종교의 새싹이 돋고 있었다. 그리스 도시국가에서는 피타고라스학파가 처음으로 ‘철학Philosophia’이라는 말을 사용하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등장을 예고했다. 중동의 이란 고원에서는 차라투스트라가 나타나 선악의 투쟁이라는 자신의 세계상을 가르쳤으며, 팔레스타인 땅에서는 예수 신앙의 모태가 되는 히브리 선지자들이(엘리아에서부터 이사야, 예레미아, 그리고 제2의 이사야까지) 줄지어 출현하고 있었다. 또한 인도 문명권에서는 힌두경전 《우파니샤드Upanisad》의 형성과 더불어 석가모니가 공자와 거의 동시대를 살며 종국에는 종교가 될 자신의 사상을 전파한 때였다.4

이때의 중국은 이른바 춘추시대 말기에 해당한다. 이미 목가적인 부족 시대도, 왕도王道의 시대도 끝나고, 바야흐로 패권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격렬한 약육강식의 다툼은 훗날의 사가들이 전국시대라 부르는 시기의 서막이었다. 정의가 승자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긴 자가 정의를 결정하는 타락과 혼란의 시대 한복판에 공자라는 사람이 서 있었던 것이다.

노나라 곡부 동남쪽에 위치한 창평향 추읍에서 태어난 공자는 이름이 구이고 자는 중니仲尼이다. 아버지 숙량흘은 공자가 세 살 때 죽었으며, 어머니 안징재는 공자가 20대 초반 무렵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공자는 10대부터 생계를 떠맡아 창고지기, 목장지기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5 공자는 자신이 이것저것 할 줄 아는 게 많은 데 대해 사람들이 궁금해하자 미천한 출신이어서 그렇다고 담담하게 토로했다. 만년에는 자신의 일생을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로 요약했다.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에 주관을 세웠다. 마흔에는 마음의 흔들림이 없게 되었고, 쉰에 이르러 하늘이 부여한 사명을 알았다. 예순이 되니 험한 말에도 웃을 수 있었고, 일흔이 되어서는 마음이 가는 대로 하여도 도에 벗어남이 없었다.6


공자는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나 스스로 삶을 개척했다. 그의 말처럼 하늘을 원망하지도, 사람을 탓하지도 않으며,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쉼 없이 배워서 천리에 통달하려고 한 일생이었다. 그는 서른에 자립한 이래 혼란한 시대를 자신의 이상으로 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현실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의 이상은 한 사람의 추구로 실현할 수 있는 사업이 아니었다. 그는 그가 살던 시대에 비해 지나치게 미래의 사람이었고, 그의 시대는 그의 이상이 실현되기에는 아직도 먼 과거였다.

공자는 50대에 이르러 정치에 나서 노나라 개혁을 시도했다가 귀족들과 기득권 세력에 막혀 실패하자 망명길에 올랐다. 여러 나라를 떠돌며 자신의 이상을 펼치려고 했으나 그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나라가 없었다.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장기간 굶주림에 시달리는 곤경에 처할 때도 그는 자신의 이상을 버리지 않았다.

공자의 학당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민간 학교였다. 철저한 귀족 중심의 사회에서 공자가 일반 서민 자제까지를 교육 대상으로 삼은 민간 교육기관을 연 것은 실로 획기적인 일이었다. 공자가 당시까지는 귀족의 학문이었던 시·서·예·악을 가르치기 시작하자 사방에서 구름같이 사람들이 몰려와 마침내 공자의 문도가 3천 명을 넘었다는 찬탄의 소리가 천하에 퍼졌다. 그들 가운데 각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과 학문을 발휘하여 공자의 직제자로 인정된 문도는 70명이 조금 넘었다. 공자가 14년 동안 이상을 찾아 여러 나라를 유랑할 때 스승과 함께 풍찬노숙하며 간난신고를 겪었던 자로子路, 안연顔淵, 자공子貢, 재여宰予 등 열 명의 제자는 공자의 제자 가운데 특히 학덕이 뛰어난 공문십철孔門十哲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기억되었다. 만년의 공자는 제자들과 함께 시서예악의 전적들을 정리하고 노나라 역사서 《춘추春秋》를 찬술하며 위대한 고도古道를 후세에 전했다. 공자는 망명에서 돌아온 후 5년여를 더 살다가 일흔셋의 나이에 수많은 제자들의 애통 속에 곡부 북쪽 사수泗水 근처 언덕에 묻혔다. 개혁가로선 실패한 삶이었으나, 교사로서는 행복한 죽음이었다.


공자의 죽음은 위대한 사상의 시작이었다. 나는 생전에 선생님이 즐겨 신으시던 가죽신을 가슴에 품고 운구 행렬의 맨 뒤에서나마 선생님의 마지막 가는 길을 참례하는 영광을 누렸다. 제자들은 예법에 따라 스승의 묘를 3년간 지켰다. 세상에 전하는 가장 위대한 책, 《논어論語》는 시묘하던 제자들이 밤마다 각자 스승에게 들었던 가르침을 서로 확인하며 기록한 데서 기원했다. 나는 묘당으로 저녁밥을 나르며 그들이 치열하게 토론하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나는 꿈속에서 노나라로 건너왔으나, 그것이 하늘의 뜻임을 진심으로 확신하게 된 것은 나에게도 저 위대한 무덤가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자는 위대한 교사였으며, 저 문도들은 아름다운 제자들이었다. 낯선 시공을 방황하다 우연히 공자 일행의 짐꾼이 되었던 나, 이생은 지상 최대의 행운아다. 수천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선생님의 곁에서 그 말씀을 들을 수 있었으니.

노나라 정치개혁에 실패한 공자는 55세 때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나라와 임금을 찾아 망명길에 올랐다. 주유열국周遊列國은 14년간 계속됐으나 대부분의 나라에서 공자는 떠돌이 망명객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공자는 끝까지 문명의 계승자를 자임하며 이상적인 인간과 나라를 향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68세 때 노나라에 돌아와 73세에 죽을 때까지 후학을 가르치고 고전을 정리하여 자신의 사상을 후세에 남겼다.

이 최후의 20년을 같이한 자로, 안연, 자공, 재여 등의 제자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공자의 분신이었다. 그들도 자신의 시대를 인간다운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선의善意를 다 바친 사람들이었다. 스승과 더불어 저 풍찬노숙의 시간을 함께하면서 사상의 정수를 가다듬으며 후세의 동아시아인들이 경외하는 이상적 인간의 원형질을 빚어냈다. 그들이 비바람 속에 걷던 광야의 길 위에서 지금 우리가 사색하고 행위하는 사상과 도덕, 정의와 용기, 인간성에 대한 신뢰와 사랑의 씨앗들이 뿌려졌다.

군자가 유랑할 때 길은 비로소 의미를 획득한다. 이상을 좇는 그들을 반겨주는 현실의 목적지는 없다. 유랑하는 군자는 길 위에서 꿈을 꾸고 길 위에서 죽는다. 250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도 군자의 유랑은 수많은 동아시아인의 마음과 정신 속에서 계속되고 있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세상을 품는다는 것

윗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친구에게는 믿음직하며

아랫사람을 품어주는 사람이고자 한다.

老者安之 朋友信之 少者懷之 _《논어》 <공야장> 25장

공자 일행을 따라 궐리闕里*에 온 나는 공문의 일꾼이 되었다. 학당 안팎을 청소하고 공자와 주요 제자들의 수발도 거들었다. 공자의 주유천하 시절 나를 짐꾼으로 채용했던 자공이 오갈 데 없는 내 처지를 딱하게 여겨 특별히 배려해준 일자리였다. 나는 학당에서 부지런히 몸을 놀려 금세 새 문도들에게도 성실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쉬는 시간에는 귀동냥으로 들은 공부에 대해 질문해 문도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친숙해진 젊은 문도들은 그저 짐꾼에 불과한 나를 특별히 이생이라 불러주었다. 떠돌이 이방인 출신인 나로서는 과분한 호칭이었다.

* 노나라 수도 곡부曲阜의 마을 이름. 공자가 자란 곳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공자의 사당이 있다

사실상 제2의 개교를 맞이한 학당에는 가르침을 청하는 학생들이 줄을 이었다. 맹희자孟僖子 같은 노나라의 저명한 귀족들도 자식들의 교육을 맡길 만큼 공자는 훌륭한 교사로 인정받았다.1 그런 일급 교사가 유수한 제자들을 이끌고 와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소식이 사방 퍼지자 노나라는 물론 이웃나라에서도 천 리를 마다하지 않고 청년 학도들이 궐리의 학당으로 몰려든 것이다. 나는 아침저녁으로 교문 앞을 쓸면서 죽간 보따리를 짊어지고 손에는 정성스레 준비한 예물을 든 청운의 젊은이들을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찾아오는 학생들로 이처럼 문전성시를 이루자, 학당의 부교장 겸 학생회장 격인 공자의 수제자 자로는 신이 나서 온 궐리가 떠나가도록 소리치기도 했다. “누가 노나라에 현자가 없다고 하는가? 천하의 준재들이 모두 궐리에 모이고 있지 않은가!”

일찍이 공자는 “육포 한 꾸러미를 들고 오는 정도의 예[束脩之禮]를 갖춘다면 모두 가르치겠다”2고 했다. 공자의 계급을 초월한 교육 방침은 신분의 굴레에 묶여 있던 많은 젊은이들을 자극해 학문의 길로 이끌었다. 공문의 명성이 높아지자 하루는 미개하여 말조차 잘 통하지 않는 호향이라는 마을에서 한 소년이 찾아왔다. 몇몇 제자들이 이 야만족 소년을 내쫓으려 했으나 공자는 그를 만나 따스한 말로 격려해주었다. 제자들이 호향 풍속의 야만성을 들어 공자의 태도에 의문을 제기하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옳은 길로 나아가려는 사람은 그 선함을 받아들이고, 옳은 길에서 멀어지고자 하는 사람은 그 불선함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될 뿐인데, 굳이 사람에게 심하게 할 필요가 있느냐. 그 사람이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다가오면 그 깨끗함으로 받아들이고 지나간 허물은 따지지 말자.3


유가가 제자백가諸子百家 중에서 사상의 최종 승자가 될 수 있었던 데는 물론 공자 사상의 보편성이 있지만, 내가 지켜본 바로는 다른 문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수한 인재가 많았고 스승에 대한 믿음이 그 어떤 학파보다 강했던 것도 한 이유가 될 것이다.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제자들이 공문에서 많이 배출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교육에는 신분의 차별이 없다는 시대를 앞선 공자의 혁신적 교육관이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 가르침에는 신분의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된다.4


만세사표萬歲師表의 첫 출발

공자는 서른 살 무렵 본격적인 전업 교사의 길로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서른에 자립했다[三十而立]’고 한 공자의 말은 실제로 그 무렵 학인學人으로서 그리고 교사로서 독립적인 행보를 본격화했던 자신의 체험을 술회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미래에서 온 속인俗人으로서 나는 무려 2500여 년 전에 어떻게 공자가 전업 교사로 나설 생각을 했는지 궁금했다. 그것도 완고한 귀족 중심의 신분사회에서 일반 서민까지 교육 대상으로 삼았는지 말이다. 설사 민중을 대상으로 한 교육 시설을 구상한다 해도, 집단으로 사람을 교육하려면 그 시대가 요구하는 교육 목표와 내용, 교수 방법 등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데, 부유한 귀족이 아닌 가난한 사 계급의 젊은이가 사실상 최초로 그것을 실현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어느 날 나는 공자의 가장 오랜 제자로서 젊은 시절의 공자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자로를 붙잡고 참았던 질문을 던졌다.

“자로 님, 저는 이 학교의 일꾼이 된 것이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중국에 나라가 세운 관학 말고 이렇게 큰 사학이 또 있을까요?”

“단언컨대 없다.”

“우리 선생님은 어떻게 젊은 나이에 이런 멋진 학교를 세울 생각을 했을까요? 자로 님은 오래전부터 선생님과 함께하셨으니 잘 아시겠지요?”

자로가 단호하게 말했다.

“선생님은 공경대부公卿大夫도 아니고 부자도 아니셨기 때문이다.”

“네?”

“선생님은 부유한 귀족이 아니라서 정식으로 관학에 들어가 배울 수 없었다. 선생님은 배움을 원하고 배울 능력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학교에서 배울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일찍이 가지셨다.”

“그런 생각을 오로지 선생님만 한 것은 아닐 텐데요?”

“선생님은 홀어머니 봉양을 위해 여러 직업을 전전했는데, 일하는 틈틈이 예악禮樂과 역사, 시를 공부했다. 일정한 스승은 없으셨다. 그저 모르는 게 있으면 각 분야의 여러 전문인을 찾아가 예를 갖춰 질문하기를 누구보다 즐기셨다.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옛것을 좋아해 힘써 배우기를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5는 선생님의 회고는 이때의 학구열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이처럼 열심히 공부해 점차 선생님의 학문이 깊어지자 이번에는 거꾸로 선생님에게 질문하러 오는 전문인들이 생겼다. 선생님은 이들과 효율적으로 문답하기 위해 날과 장소를 정해 모임을 가졌는데, 여기에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약간의 예물을 가지고와 참석하기를 청하면서 자연스레 학당이 만들어진 것이다.”

“아, 그것이 선생님이 전업 교사로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겠군요?”

“그렇다고 봐야겠지? 사람들이 선생님에게 예물을 바친다는 소문을 듣고 내가 세금을 걷으러 갔었으니까. 하하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러자 자로가 고개를 한번 갸웃하더니 말했다.

“이보게 이생.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건가? 아니면 괜히 나의 옛일을 들춰보고 싶은 건가?”

자로의 과거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던 나는 속이 뜨끔했지만, 자로의 입을 통해 공자의 젊은 시절을 듣고 싶었다.

“세금을 걷다니요? 정말 몰라서 묻습니다.”


자로초견子路初見

자로는 솔직하고 용감하고 정의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주나라 제후국 시민권자인 국인 출신이 아니라, 토착민으로서 이류 국민 대접을 받던 야인 출신이었다. 어려서 집을 떠나 협객 무리에서 무예를 익혔다. 돈이 모이면 식량을 사서 백 리 길을 짊어지고 가서 부모에게 직접 밥을 지어드리는 효심을 발휘하는 사람이었다.6

자로는 10대 후반에 곡부 시장의 무뢰한이 되었던 것 같다. 말하자면 동네 건달 두목쯤 되었는데, 스스로는 가난한 사람들의 보호자를 자임했다. 그는 훗날 사마천이 《사기》 <유협열전游俠列傳>에 담은 유협의 원형 같은 인물이었다.

어느 날 자로는 궐리에 사는 한 남자가 자기 초옥에 학당 간판을 내걸고 사람 가르치는 일로 먹고산다는 소식을 들었다. 알아보니 공구라는 이름의 키다리인데, 나이가 자기보다 불과 아홉 살밖에 많지 않았다.

“어떤 놈이 내 허락도 없이 이 동네에서 영업을 하는가?”

자로는 부하들을 이끌고 공자의 집으로 찾아갔다. 겁을 줘서 이른바 ‘세금’을 뜯어낼 작정이었다. 자로는 사립문을 밀치고 들어가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대뜸 칼을 뽑아들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어떠냐? 키만 껑충한 위선자 같으니라고. 내 칼춤 솜씨에 기가 팍 죽지?”

자로가 의기양양하게 공자를 노려보며 칼춤을 끝내자, 공자는 태연하게 한번 웃은 뒤 정색하며 말했다.

“그래, 그대가 잘하는 것이 그것입니까?”

“그렇다. 긴 칼이었다면 더 잘했을 거다.”

“내가 묻는 건 그게 아닙니다. 칼솜씨에 학식을 갖춘다면 누가 그런 사람을 우습게 여기겠습니까?”

“네 눈엔 내가 우습게 보이냐? 공부? 그딴 거 없어도 날 우습게 여기는 놈은 이 바닥에 아무도 없다.”

“사람은 가르쳐주는 친구가 없으면 들은 것조차 잃게 됩니다. 나무도 먹줄을 받은 뒤라야 비로소 반듯해지고[木受繩則直] 사람도 충고하는 말을 잘 받아들여야 지혜로워지는 법입니다[人受諫則聖]. 그러므로 배움은 묻는 것이 중요하니[受學重問] 군자라면 배우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君子不可不學].”

무식해서는 골목대장 노릇조차 쉽지 않다는 걸 체험으로 알고 있던 자로는 공자의 말에 번개를 맞은 듯했다. ‘어라, 이건 뭐지? 저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고, 굽은 듯하면서도 탄력 있게 뿜어 나오는 저 강기剛氣는? 앎이란 저런 기품을 얻기 위함인가?’ 머리는 이리저리 안개 속인데 말은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나갔다.

“웃기고 있네. 남산의 대나무는 아무도 잡아주지 않아도 저절로 곧고, 그것을 잘라 쓰면 물소의 가죽도 뚫을 수 있다. 굳이 따로 공부를 해서는 무엇 한담?”

자로의 퉁명스러운 대답에도 공자는 이미 그의 속마음을 읽었다는 듯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해보시겠습니까? 화살 한쪽에 깃을 꽂고 다른 한쪽에 촉을 갈아서 박는다면 깊이가 더욱 깊어지지 않겠습니까? 굳이 배움을 마다할 게 무엇입니까?”7

자로는 더 이상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거참, 번지르르하게 말은 잘하네.’ 휑하니 돌아서서 나오고 말았다. 그날 이후 한동안 자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저잣거리에서는 자로가 좀 이상해졌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얼마 후 공자가 길을 갈 때면 웬 젊은이가 두 팔을 크게 휘저으며 뒤따르게 되었는데, 자세히 보니 무뢰한 자로였다.

“그날 이후 나는 한시도 선생님 곁을 떠난 적이 없다. 그런 나를 선생님은 ‘중유는 나의 수제자요, 경호대장이다’라고 늘 말씀하셨다. 암, 수석 자리가 아니면 누가 우리 선생님을 지킬 것인가? 어떤 놈이든 하늘같은 우리 선생님의 털끝 하나 건드리면 내 손에 죽을 것이다, 그랬지, 그때는. 하하하.”

나는 예순이 코앞인 할아버지 자로가 어린아이처럼 으스대며 옛일을 추억하는 모습이 어찌나 보기 좋고 부럽기도 하던지, 슬그머니 그를 좀 골려줘야겠다는 심술이 일었다. 자로의 협객 기질이 정말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난 것인지도 궁금했다.

“그래도 제가 볼 때는 안연 님이야말로 공자님의 수석 제자인 것 같습니다만…”

나는 자로가 무슨 소리냐고 되받을 틈도 주지 않고 잽싸게 말을 이어갔다.

“선생님이 안연 님을 보실 때는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 연인을 보는 듯합니다. 어떨 때는 누가 스승이고 누가 제자인지 모를 눈빛으로 안연 님을 바라보기도 합니다. 그러니 아무리 자로 님이 수석 자리를 자처하셔도 선생님의 마음속에는 안연 님이 으뜸 제자가 아닐까요?”

자로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더니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놈. 네가 나를 시험하려 드는구나, 허허. 이생아. 너는 내가 회(안연의 이름)를 질투하는 것 같냐? 그래, 말해주마. 사실 나는 회가 지겨울 때가 있다. 나는 회처럼 어디 하나 허물이 없는 그런 완벽한 사람은 솔직히 정이 안 간다. 그러나 나는 회를 미워할 수 없다. 이유는 한 가지, 네 말대로 선생님이 그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선생님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를 내가 어찌 미워할 수 있겠느냐?”


스승과 제자

해가 바뀌어 궐리 학당에 봄꽃이 만발할 무렵, 자로에게서 전갈이 왔다. 안연과 함께 선생님을 모시고 다과를 나눌 테니 준비를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얼마 전 공자의 아들 백어伯魚가 병으로 죽었다. 자로는 스승이 아들처럼 사랑하는 제자 안연을 앞세워 아들을 잃은 스승을 위로하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위안의 자리가 은근히 기다려졌다. 선생님을 가까이서 뵈며 세 군자가 나누는 대화를 직접 들을 기회가 어디 흔한가! 나는 다과는 물론 선생님을 위해 지난 가을 빚어서 고이고이 모셔둔 술을 꺼내 따뜻하게 데워놓았다.

세 사람은 학당 후원의 누각에 나란히 앉았다. 연지 옆에 세워진 이 대에서는 학당 안의 교실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스승과 두 제자는 서로 차를 따라주며 학교 일에 관해 밀린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과에 이어 준비한 술상을 내어가자 공자께서는 미소로 반기며 “자네가 빚은 술은 특히 맛이 좋으이. 고향의 술인가?” 하고 물어주셨다. 이윽고 자로가 선생님을 위해 거문고를 연주했다. 자로의 연주 실력은 별로였지만 공자께서는 즐겁게 들으셨다.

“중유仲由(자로의 이름)의 금 실력은 언제나 늘꼬? 허허.”

뒤이어 안연이 특유의 섬세함으로 거문고를 켜자 숲의 새들도 지저귐을 멈추고 연주를 듣는 듯했다.

“오랜만에 너희와 함께 금을 연주하니 연못의 잉어들도 춤을 추는 듯하구나.”

연지를 내려다보면서 혼잣말하듯 하는 공자의 목소리에서 문득 처연함이 묻어났다. 자로는 아차 싶었다. ‘백어의 이름 리는 잉어라는 뜻이 아닌가. 백어를 잃은 슬픔을 위로하는 자리가 하필이면 잉어가 헤엄치는 연지라니, 나도 참 한심한 사람일세…’ 자로가 울상을 감추며 안연에게 눈짓을 보냈다. ‘회야, 네가 좀 분위기를 바꿔보려무나.’ 안연이 자로의 뜻을 눈치 채고 공자에게 말했다.

“선생님, 저 마당 맨 앞 교실을 보십시오. 신입생 교실인데 어느 해보다 글 읽는 소리가 청아합니다.”

자로가 거들었다.

“저들이 모두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고자 불원천리不遠千里한 인재들이 아닙니까! 으하하!”

공자께서도 웃으셨다.

“유는 늘 들통날 아첨만 하는구나. 안 그러냐, 회야?”

나는 웃음이 나왔지만, 안연은 더욱 진지했다.

“선생님. 사형의 말이 지당합니다. 선생님이 아니 계시면 노나라, 아니 천하에 어찌 저런 소리가 울려 퍼지겠습니까? 들어보십시오. 제가 처음 선생님께 배우러 왔을 때 해주신 바로 그 말씀이 아닙니까?”

안연이 선창한다.


배우고 때에 맞게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자로가 흥에 겨워 큰 소리로 화창한다.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와주니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안연이 단정하게 무릎 자세로 고쳐 앉아 공자에게 읍하고, 자로는 일어서서 읍한 뒤 오른팔을 공손하게 앞으로 펼친다. 가운데 앉은 공자는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제자들에게 답례하신다. 세 사람이 미소 가득한 얼굴로 합창한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함이 없으니 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8


가장 이상적인 사람

감격에 겨운 듯 자로가 공자 앞으로 다가가 앉으며 말했다.

“선생님, 제게 좋은 생각이 났습니다. 신입생들이 공부하는 교실 이름을 지금부터 학습당學習堂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들어가는 문은 학이문學而門이라 하고, 나오는 문을 시습문時習門이라고 하고요. 하하, 그러면 모두 선생님의 가르침을 어찌 잊겠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유의 말이 나를 기쁘게 하는구나. 하지만 배움이란 실천으로 완성되는 것이니 교실 이름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다만, 유야, 회야, 나는 이제 늙었으니 저 학생들의 교육을 제자인 너희에게 맡기고 싶구나. 너희는 우리를 찾아와 문행충신文行忠信9을 연마하고자 하는 저 갸륵한 젊은이들을 장차 어떻게 이끌어줄 생각이냐?”

자로가 먼저 대답했다.

“외람되지만 제가 저자의 왈패에서 조그만 고을의 읍재까지 해봤습니다만, 사람은 일정한 물산物産이 있어야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물질은 선비로서 구할 바가 못 됩니다. 그래서 저는 저들에게 먼저 그런 모범을 보일까 합니다. 제가 타고 다니는 수레, 저의 좋은 관복이나 예복을 저들과 나눠 써서 그것이 낡고 헐어서 못 쓰게 되더라도 하나도 아쉬워하지 않겠습니다[願車馬 衣輕裘 與朋友共 弊之而無憾].”

공자가 그 대답을 듣고 흐뭇해했다.

“훌륭하다, 나의 유. 자고로 자기 가진 것을 남과 나누면서 조금도 아쉬움이 없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중유는 물질로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구나.”

안연의 차례가 되었다.

“저는 가난해 나눌 재산이 없습니다만, 지식이 약간 있습니다. 저는 그것으로 솔선할까 합니다. 저는 남들보다 학문이 높다고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깔보지 않겠으며, 공로와 업적이 넘치더라도 그것을 자랑삼지 않겠습니다[願無伐善 無施勞].”

공자가 그 말에도 흡족해했다.

“참으로 훌륭하구나, 나의 회. 높은 경륜과 지식을 갖고도 오만하지 않기란 결코 쉽지 않다. 회는 지극히 겸손하여 지식으로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구나.”

선생님은 내가 올린 술잔을 또 비우셨다. 이윽고 자로가 공손히 말했다.

“선생님,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가르침이 없으니 중요한 무엇이 빠진 것만 같습니다. 선생님이 저희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안연도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사형과 더불어 감히 가르침을 청합니다.”

공자가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말씀했다.

“유야, 회야. 내가 무엇을 더 새롭게 말하겠느냐? 나는 그저 저들에게 이런 사람이면 족하다.”


윗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친구들에게는 믿음직하며, 아랫사람들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사람이다.10


정적이 흘렀다.

뭔가 특별한 말씀이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자로는 순간 멍한 표정이었다. 두 눈을 감은 채 듣고 있던 안연의 얼굴은 어느새 붉게 물들었다. 말씀을 마친 선생님은 글 읽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학당 쪽을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셨다. 몇 초의 정적이 더 흘렀을까, 두 사람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일어나 스승에게 절을 올리고는 한참을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스승이 전하는 지극히 단순하고 소박한 가르침 속에서 두 제자는 자신들의 전 생애를 두드려오는 깊고 깊은 울림을 들었던 것이다.


열락대 아래서

나는 누각 아래서 술을 데우며 세 사람의 말씀을 잇달아 들었다. 진리란, 아름다운 사제 간이란 과연 이런 것이 아닐까? 물질로도 지식으로도 인간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이상理想, 윗사람에게는 편안한 사람이자 친구들에게는 신의로운 사람이자 후배들에게는 진실한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 도대체 더 이상 무슨 말로 사람의 도리를 요약할 수 있을까? 이 간명한 명제가 실은 얼마나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던가.

훗날 자로와 안연에게서 이날의 말씀을 전해들은 여러 제자들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이 대화를 스승의 어록에 담은 것은 이 문답이 내포한 인의 세계를 정확히 이해한 결과였다. 적어도 현장을 지켜본 나로서는 그렇게 생각한다. 밖으로 드러나는 인과 안으로 깊이 감추는 인의 화음을 그들도 분명 들었던 것이라고.

나는 그날부터 연지의 누각을 열락대說樂臺라 부르기로 했다. 그날의 대화를 기념하고 그것을 직접 들은 기쁨을 자축하는 의미였다. 그날 밤 나는 향기 나는 먹을 갈아 깨끗이 씻은 붓으로 푸른 죽간 위에 선생님의 말씀을 한 자 한 자 정성을 다해 써내려갔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선배나 윗사람에게는 뭘 맡겨도 안심이 되는 사람,

친구와 동료에게는 뭘 같이 해도 믿을 수 있는 사람,

후배와 부하들에게는 진심으로 이끌어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었으면 한다.


자로와 안연이 이 말씀을 열락대에서 듣다.

아래에서 이생, 술을 데우며 귀를 세우다.

궁핍에 맞서다

군자는 본디 궁하다.

소인은 궁하면 흐트러진다.

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 _《논어》 <위령공> 1장

꾸르륵.

옆에 누운 채나라 출신 배불뚝이 짐꾼의 배에서 소리가 났다.

“밥차 오는 소리인가?”

쪼로록.

이번엔 내 배에서 나는 소리다.

“사돈 남 말 하네.”

둘이서 마주보며 힘없이 웃는데, 발을 드리운 천막 안에선 거문고 소리가 낭랑하다.

배불뚝이가 명아주를 씹으며 심드렁하게 내뱉는다.

“너네 선생이란 작자는 이 와중에도 거문고를 타고 싶을까?”

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서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새나온다. 진나라 도읍인 완구를 출발할 때 고용된 짐꾼들은 공자에 대한 존경심이 높지 않았다. 급기야 공자는 위선자가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말까지 나왔다.

“혹시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자 아닐까? 생풀을 씹고 있는 아랫것들 생각은 조금도 안 하는 것 같아.”


전란에 휩싸인 대륙

나는 중국 땅에 떨어지기 전, 열국을 주유하던 공자 일행이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의 들판에서 식량이 떨어져 7일 동안 굶주림에 시달리며 고난을 겪었다는 이야기를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기원전 489년, 공자가 열국을 주유한 지 8년째 되던 해의 일이다. 그런데 이른바 진채지액陳蔡之厄의 고사를 바로 내가 직접 겪게 될 줄이야…

이 무렵 중국의 여러 나라들은 크고 작은 전란에 휩싸여 있었다. 당시 공자가 주로 머물던 진나라와 채나라는 강대국인 초나라와 오나라의 쟁투에 휘말려 망국에 가까운 고초를 겪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자는 북방의 강자인 진나라로 유세를 가려다 포기하고 방향을 바꿔 남방의 강자 초나라로 가려 했다. 초나라 소왕昭王은 공자도 높이 평가한 바 있는 임금인데, 그가 공자의 명성을 듣고 자기 나라에 초빙하고 싶어 한다는 소문이 돌던 차였다. 그래서 거리상으로도 가까운 초나라 동맹국인 진나라에 머물며 평소 공자를 존경해온 사성정자司城貞子*를 통해 초나라 쪽과 방문 교섭을 벌이던 중이었는데, 오나라 왕 부차夫差가 진나라를 침공했던 것이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로 잘 알려진 숙적 월나라 왕 구천句踐을 굴복시킨 부차는 초나라까지 제압해 명실상부한 패자覇者가 되고자 했다. 동맹국인 진나라를 친 것도 실은 초나라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그리하여 초 소왕도 직접 대군을 이끌고 출병하기에 이른다.

* 성의 관문 방비를 담당하는 대부

두 라이벌 간의 대회전이 진나라 땅에서 벌어질 것이 확실해지자 사성정자는 공자 일행에게 피난을 권유했다.

“일단 채나라 부함으로 가시기 바랍니다. 그곳 총독이 초나라 대부 심제량沈諸梁인데, 그라면 선생님을 잘 보살펴드릴 겁니다. 소왕과의 면담이 성사되면 그때 초나라에서 안전하게 모셔 갈 겁니다.”

이때가 기원전 489년, 노 애공 6년으로, 공자의 나이 예순셋이었다.


공자, 계략에 빠지다

공자가 초나라로 갈 것이라는 소문이 완구의 대부들에게 알려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진나라와 채나라의 대부들은 공자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겉으로 공자를 대접하는 듯했지만, 속으로는 공자를 경원했다. 공자가 노나라에서 군주권을 강화하기 위해 귀족들의 권한을 제한하는 개혁을 추진한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공자가 초 소왕을 만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앞에서도 말했지만 진나라와 채나라는 초와 오 양쪽 모두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따라서 두 나라의 권문세족들 상당수가 초와 오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는데, 이런 사정을 잘 아는 공자가 영명한 초 소왕과 친해지는 것이 결코 달가울 리 없었다.

“공구 그 늙은이가 초나라 왕에게 그동안 우리가 공작을 벌인 일들을 고해바치면 우린 어떻게 되는 걸까?”

그들은 자기 목을 쓰다듬으며 가슴을 졸였을 것이다. 그래서 두 나라 대부들은 서로 연통을 넣어 어떻게든 공자가 소왕을 만나지 못하도록 계략을 꾸미기 시작했다.

‘우리는 가병家兵을 동원해 공구 일행의 호위병을 흩어버리고 식량을 빼앗겠소.’

‘우리는 어떤 마을에서도 공구가 유숙하지 못하도록 조처하겠소.’

이런 사정을 제대로 알 리 없는 공자 일행이 초나라로 향하던 중 한 강가에서 야영을 하게 되었는데, 어디선가 일단의 무리가 들이닥쳐 일행을 포위했다.

“식량을 죄다 내놓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

자공이 이들을 달래어 식량을 내주며 우두머리인 듯한 사람에게 침착하게 물었다.

“당신들은 어디서 왔소?”

“우린 채나라 사람들인데 진나라 전투에 끌려갔다가 도망치는 중이다. 너희도 남쪽으로 가지 말고 북쪽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게다.”

그렇게 말하고는 쏜살같이 사라졌는데, 그때 나는 그자가 누더기 안에 갑옷을 받쳐 입은 것을 얼핏 보았다. 나중에 확신하게 된 일이지만, 그들은 패잔병으로 위장한 진나라 대부의 병사들이었다.

식량을 잃은 공자 일행은 그때부터 고난의 연속이었다. 맹수와 습지의 해충을 피해 이동하며 며칠째 들판을 헤맸지만, 제대로 된 식량을 구할 수 없었다. 간혹 마주친 어떤 군영이나 마을도 일행을 받아주지 않았다. 어느 마을에선가 한 선비가 귀띔을 해주는 바람에 우리는 비로소 그 이유를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윗선에서 읍재에게 낯선 대부 일행을 보면 절대 마을에 들여놓지 말라고 했답니다.”


군자는 원래 궁하다

훗날 유가들 사이에서 전설이 된 이 진채지간의 고난에서 공자를 수행한 제자는 자로, 자공, 안연, 재여 등이다. 이때 자로가 쉰다섯 살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30대 초반의 젊은이였다. 이 밖에 다른 제자들도 몇 명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자주 일행을 벗어나 왕래하였기에 누가 더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짐꾼으로는 위나라에서부터 따라온 나와 진나라에서 고용된 수레꾼을 합쳐 열 명이 채 되지 않았다.

굶주림에 시달리며 들판을 헤맨 지 이레째 되는 날, 우리 일행은 채나라 접경 마을 부근의 한 언덕에 도착했다. 그때 재여는 지치고 굶주린 상태에서 독초를 잘못 먹고 한구석에 뻗어 있었고, 안연은 나물을 다듬고, 자공과 자로는 불을 지피고 있었다. 숨겨둔 묵은 보리마저 바닥나 곡식 한 톨 없이 명아주로만 국을 끓여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짐꾼들은 그 사정을 알고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하는 게 아니냐고 수군대고 있는데, 공자가 거처하는 천막 안에서 또 거문고 소리가 난 것이다. 공자가 나지막이 시를 읊는 소리까지 흘러나왔다.11

“아니, 선생님은 우리 고통을 정녕 모르시는 건가? 모른 척하시는 건가?”

자로가 온 사방에 들으라는 듯이 소리치며 불쏘시개를 냅다 집어던졌다.

자공은 그런 자로를 제지하지 않은 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대저 선하고 의로운 자는 복이 있고, 악하고 불의한 자는 죄를 받는다고 했다. 어쩌서 평생 인과 의만을 쫓아온 우리가 이렇게 짐승처럼 굶주린단 말인가? 정녕 하늘은 착한 자의 편인가? 선생님에게 물어보고 싶다!”12

자로의 성난 불평에 우리 일행은 아연 긴장했다. 자로가 이처럼 대놓고 공자를 비난한 적은 없었다. 짐꾼들도 서로 눈치 보며 몸을 사렸다.

잠시 후 공자가 거문고 연주를 마치고 제자들을 불렀다.

“얘들아, 이리 들어오너라.”

나는 은근히 걱정이 되어 가슴마저 떨려왔다. 저러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혹여 돌이킬 수 없는 금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유야, 사(자공의 이름)야, 회야,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자로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 분한 나머지 불평을 쏟아내긴 했지만, 정작 스승의 얼굴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잔뜩 굳은 얼굴로 퉁명스레 되물었다.

“선생님, 군자가 이처럼 궁지에 빠져도 되는 겁니까?”

공자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거문고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군자는 원래 궁하다.”

옆에서 듣던 자공의 얼굴에 일순 실망의 빛이 스쳐갔다. ‘사람이 굶어죽는 판에 방책은 강구하지 않고 군자연만 하실 건가?’

안연은 나뭇가지로 바닥에 뭔가를 끼적이며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자로는 공자의 말에 억지로 누르고 있던 분노가 치밀어 오른 듯했다.

“선생님, 이 판국에 웬 궁자 타령이십니까?”

발끈하려는 자로를 공자가 똑바로 쳐다보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소인은 궁하면 흐트러진다.”13

자로가 순간 얼굴을 숙여 어이없다는 표정을 감춘 채 자공과 안연을 돌아보았다. ‘얘들아, 선생님이 지금 뭐라고 하신 거니? 그러니까 나더러 소인이라는 말인가?’ 자로가 야속하고 원망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공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공자가 말했다.

“군자는 환난에 처해서도 덕을 잃지 않는다.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르름은 서리와 눈이 내린 뒤라야 비로소 드러나는 법이다.”14

그러고는 비파를 끌어당겨 안더니 현을 뜯기 시작했다.


춤추는 자로

공자와 제자들 사이에 있던 이 아슬아슬한 ‘언쟁’에 대해 훗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다. 실제로 제자들의 항의 강도가 훨씬 셌는데, 유가들이 공자 위주로 사실을 축소 왜곡하지 않았느냐는 게 의혹의 요지였다. 자로가 공자의 따끔한 일갈에 승복하지 못한 채 ‘비파 소리에 맞서 방패를 잡고 춤을 추었다’는 이야기도 후세에 전해졌는데, 이는 반대로 반유가들이 공자와 그 제자들을 폄훼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가 잘못 전승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자로가 왜 방패를 잡고 춤을 췄는지 직접 보지 못해 말하기 뭣하지만, 자로가 춤을 춘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이 자리에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그날 그 언덕에서 내가 본 바는 이러했다. 나와 짐꾼 몇 명은 천막 앞에서 숨 막히는 일촉즉발의 사제 대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뭔가 한바탕 난리가 날 것 같던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쥐죽은 듯하던 천막 안에서 비파 소리가 나더니, 성난 얼굴로 천막 안으로 들어간 자로가 잔뜩 풀이 죽은 모습으로 걸어 나왔다.

“그럼 그렇지. 자로 같은 단순한 사람이 노련한 공구의 상대가 못 되지. 원래 군자가 궁할 궁자인 걸 여태 몰랐단 말인감? 안다고 하면 가난뱅이 신세를 면할 수 없고, 모른다고 하면 소인이니, 그동안 따라다닌 세월이 아깝도다, 흐흐.”

짐꾼들 사이에서 이런 야유가 흘러나오는데, 자로는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재여가 널브러져 있는 나무 밑으로 터벅터벅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선생님 말씀은 높아도 너무 높아…”

자로는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에이, 모르겠다. 나라도 가서 직접 식량을 구해봐야겠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곧이어 자공이 뛰어와 자로의 행방을 묻고는 자기도 식량을 구해 오겠다며 언덕을 내려갔다. 나는 안연과 함께 막 나물을 뜯으러 나서던 참이라 고갯길을 향해 가는 자로를 멀리서 볼 수 있었다. 몇십 보쯤 뒤에서 비탈에 미끄러지며 쫓아가는 자공의 모습도 보였다.

얼마쯤 지났을까? 고개 중턱을 넘어가던 자로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서 우리 쪽 언덕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돌아서서 가기를 두어 번 하더니 갑자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멀리 떨어져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히 자기 무릎을 치고, 또 자기 머리를 몇 번 치는 듯하더니 이윽고 오른팔, 왼발, 왼팔, 오른발을 번갈아 놀리며 덩실덩실 춤을 추며 가는 것이었다.

“안연 님! 저기 보세요. 자로 님이 춤을 춥니다!”

천막에서 나온 뒤 내내 말이 없던 안연이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디? 중유 사형이 춤을 춘다고?”

춤추는 자로를 발견한 안연의 얼굴에 금세 기쁨의 꽃이 피어났다.

“그럼, 그렇지!”

안연은 나물이 담긴 바구니를 내던지고 공자가 있는 천막 쪽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이 마치 오래전 집을 떠난 형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전하러 아버지에게 달려가는 막내아들 같았다.

“선생님! 중유가 춤을 춥니다!”

천막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선생님, 자로 사형이 춤을 춘다니까요!”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다. 안연이 기다리다 못해 발을 걷었다.

잠시 후 조용하던 천막 안에서 거문고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흐름결을 타던 금 소리는 어느덧 격정적인 선율을 내뿜었다.


이심전심

공자 일행이 굶주림에서 벗어나 다시 초나라를 향해 갈 때 자로가 선발대가 되어 일행과 떨어진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자로를 수행하면서 그날 일에 대해 물어보게 되었다.

“왜 춤을 추셨습니까?”

자로는 내 어깨를 감싸고 걸으면서 몰래 비밀을 털어놓는 소년처럼 속삭였다.

“이건 너한테만 하는 말인데, 그게 말이야, 이상했어. 나는 분명 잔뜩 화가 나 있었는데, 머릿속에선 자꾸 한 줄기 번개가 번쩍거리는 거야. 선생님의 그 눈빛! 목소리는 엄중하게 꾸짖고 있지만, 눈빛은 그게 아니었어! 그건 오직 우리 둘만이 알아볼 수 있는 눈빛이었어.

‘유야, 너까지 왜 이러느냐? 너마저 이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저 어린 제자와 수행자들은 또 어디에 손발을 두어야 하겠느냐? 유야, 우리는 군자다. 군자는 어려울수록 더욱 의연하고, 소인은 어려움에 빠지면 과장한다. 너와 나는 젊어서 만나 오랜 세월을 함께하며 어려운 때일수록 더욱 서로를 격려하며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군자가 어려움을 과장하면 소인이 된다는 걸 우린 잘 알고 있잖느냐? 선비가 현실과 타협하고 어려움 앞에 무릎 꿇을 때는 핑계를 찾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덕을 잃고 절개마저 꺾여 역사에서 오명을 뒤집어쓴 이가 얼마이더냐?’

언젠가 선생님이 내게 말씀하셨지. ‘이 세상에 도가 행해지지 않아 뗏목을 타고 바다 저편으로 가야 한다면, 그런 나를 따라나설 자 자로뿐이로다’15라고. 그 말씀을 듣고 내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자네는 모를 걸세. 나는 선생님의 그 눈빛에서 선생님도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오랜 세월 선생님이 가장 믿고 의지해온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확신했다네. 그 생각을 하니 어찌나 감격스럽던지 그만 저절로 팔다리가 움직이지 않겠나?”


공자의 눈물

자로가 춤을 춘다는 안연의 외침에 나머지 일행도 모두 언덕 위로 뛰어 올라갔다. 공자의 거문고 소리가 들판 가득 퍼져가는 가운데 자로가 춤을 추며 고갯마루를 막 넘어가고 있었다. 자공이 손을 흔들며 그 뒤를 따랐다. 거문고 소리가 거기까지 들렸는지 모르겠으나, 그때 내 눈에는 마치 자로가 거문고 선율에 맞춰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 안연과 나는 나물바구니를 옆구리에 낀 채 두 사람의 모습이 고개 너머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한참 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훗날 안연이 자로에게 귀띔하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그때 거문고를 켜던 공자의 눈가에도 촉촉하게 물기가 어렸다고 한다. 붉은 노을이 대륙의 지평선을 찬란하게 물들이던 어느 저녁의 일이었다.

군자는 진실로 궁한 자이니

나의 도는 하나로 꿰뚫을 뿐이다.

吾道 一以貫之 _《논어》 <이인> 15장

초나라 소왕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난 공자 일행은 이레 동안 들판을 헤매며 굶주림에 시달리는 고난을 겪는다. 공자는 그런 곤경 속에서도 시를 읊고 거문고를 타며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일부 제자들은 지치고 병이 나 일어서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공자 일행이 이 위기에서 벗어난 것은 자공의 수완 덕분이었다. 식량을 구하러 마을로 내려간 자공이 거짓말처럼 쌀을 구해 나타난 것이다.

자공의 활약으로 배고픔에서 벗어난 공자와 제자들은 모처럼 여유로운 마음으로 한자리에 둘러앉았다. 공자가 강론을 예고한 터였다. 공자의 이날 강론은 훗날 유가들 사이에서 공자 정신의 불굴성과 위대함을 증언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게 된다. 역사가의 엄정함과 작가적 상상력을 절묘하게 교직한 극적인 문체로 유명한 사마천이 이 전설적 이야기가 지닌 불멸성을 놓칠 리 없었다. 그는 수백 년 뒤의 사람임에도 마치 자기 두 눈으로 직접 본 사람처럼 이날의 모습을 상세하게 묘사해놓았다. 현장에서 직접 강론을 들은 나조차 놀랄 정도로.

아무튼 이 사건은 유가들이 스승의 사상을 전파하는 데 효과적으로 활용하면서 불후의 전설이 됐다. 기독교에서 예수가 행한 산상수훈山上垂訓이나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처럼 말이다. 그날 내 눈에 비친 공자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신중했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그가 불안과 초조감을 연륜의 힘으로 제어하고 있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으리라. 그래서 말인데,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어쩌면 그날 공자는 자신의 강론이 지니게 될 거대한 역사성을 의식했을지 모른다고.

이날 강론은 문답식으로 진행됐다. 사마천은 공자와 제자들이 각각 따로 문답한 것으로 기록했으나, 실제로는 언덕의 큰 살구나무 아래 스승과 제자들이 함께 둘러앉은 가운데 이뤄졌다. 강론에 참석한 사람들은 문답을 나눈 자로, 자공, 안연뿐 아니라 재여를 비롯해 몇몇 제자가 더 있었다. 장소가 노천인 덕분에 우리 짐꾼들도 뒷줄에 둘러앉아 자연스럽게 참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여러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이날의 강론이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회자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나 이생이 있으니 ‘거의’ 없었다고 해야 할까? 그날 청강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참석자 이름을 다 기억해주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안타까울 따름이다.


나의 도에 잘못이 있는가

선생님이 강론을 시작하기에 앞서 일행을 둘러보다가 나와 눈을 맞추며 말씀하셨다.

“들판을 걸으며 불렀던 노래를 다시 한 번 불러보겠느냐?”

나는 황송하여 잠시 어쩔 줄 모르다가 배불뚝이 채인을 일으켜 세워 진나라 짐꾼들에게 배운 노래를 함께 불렀다.


어느 풀인들 시들지 않고 배겨날까

어느 날인들 우리 행군 멈출 때 있을까

슬프다 우리 신세 사람 대접 못 받네.


외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니건만

왜 들판을 헤매는가

슬프다 우리 신세 아침저녁 쉴 틈이 없네.16


노래를 마치자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공자가 제자 중 가장 연장자인 자로에게 먼저 말했다.

“우리도 저 노래처럼 외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데, 들판을 헤매고 다녔다. 왜 이런 고생을 하는가? 과연 나의 도가 아직은 많이 부족해서인가? 아니면 뭔가 잘못해서인가? 유야, 어째서 우리가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

자로가 대답했다.

“제가 궁금한 점도 그것입니다. 선생님께서 덕을 쌓고 의를 지킨 지 오래십니다. 곤경에 처할 때도 의연히 인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보십시오. 진나라, 채나라에 여러 상하 대신들이 있음에도 선이 닿는 이가 하나도 없습니다.17 우리가 아직 인의 경지에 들지 못해서인가요, 지의 경지에도 들지 못해서인가요? 사람들이 우리의 갈 길을 이처럼 가로막으니 말입니다.”

공자가 탄식했다.

“아, 실로 덕을 안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구나!”18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유야, 내 말해주마, 그런 것이 아니다. 네 말대로 인하다고 해서 반드시 남이 믿어준다면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처럼 수양산에서 굶어죽지 않았을 것이다.* 네 말대로 지혜로운 자라고 해서 반드시 남에게 인정받는다면 왕자 비간比干이 심장이 갈라지는 화를 입지 않았을 것이다.**

공자가 이어 모두를 향해 말했다.

* 백이와 숙제는 주나라 무왕의 은나라 정벌이 적절치 못함을 간했으나 무왕이 듣지 않자, 주나라의 녹을 받은 것을 부끄럽게 여겨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만 뜯어 먹다가 굶어죽었다.

** 은나라 주왕의 숙부인 비간은 주왕의 폭정을 직간하다 죽임을 당했다.

“군자로서 학식이 넓고 뜻이 깊음에도 시대를 만나지 못한 이가 많다. 어찌 홀로 나뿐이겠느냐? 깊은 숲 속의 난초가 보아주는 이가 없다고 해서 향기를 내뿜지 않는 것은 아니다. 군자란 도를 닦고 덕을 세우다가 곤궁에 빠진다 해도 절의를 바꾸지 않는 법이다. 시대를 만나고 만나지 못하는 것은 시운時運이며, 살고 죽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군자는 오직 쉼 없이 자신을 닦으며 때를 기다리는 자이다.”19

공자가 자공을 돌아보며 같은 질문을 했다.

“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나의 도에 무슨 잘못이 있는가?”

자공이 잠시 생각하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생님의 도는 지극히 원대하여 세상의 그 누구도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차라리 선생님께서 약간 도를 낮추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공자가 한동안 말없이 자공을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너희에게 ‘군자는 본래 궁하다’고 했다. 사야, 내가 너희보다 많이 배웠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냐?”

자공이 공손하게 답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선생님이 아니라면 감히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공자가 말했다.

“사야, 네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내가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나의 도란 한쪽을 낮추어 다른 쪽을 높이고, 하나를 내주어 다른 하나를 취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나의 도는 하나로 모두를 꿰뚫을 뿐이다.”20

공자가 이어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훌륭한 농부가 씨 뿌리기를 잘한다고 해서 수확까지 잘되리란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 훌륭한 기술자가 물건을 아무리 잘 만든다고 해도 항상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다. 마찬가지로 군자가 아무리 그 도를 잘 닦아 기강과 계통을 세운다 할지라도 그것이 반드시 세상에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는 도를 부지런히 닦지도 않은 채, 스스로 도를 낮추어 세상에 받아들여지기만을 바라고 있다. 이래서는 그 생각이 원대해질 수 없고, 그 뜻이 넓어질 수 없는 것이다.”

질문이 마침내 안연에게 돌아왔다. 우리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회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의 뜻을 듣고 싶구나.”

안연이 묵상하듯 앉아 있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수줍은 듯하면서도 단호한 말투였다.

“선생님의 도는 지극히 원대합니다. 천하의 그 누구도 능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선생님께서 이미 도를 추구하고 행하고 계신데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은들 무슨 걱정이겠습니까? 군자의 참모습은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고 나서야 드러나는 것입니다. 도가 닦이지 않는 것은 그들의 치욕이요, 도덕이 높은 인재를 쓰지 않는 것은 그 나라의 수치일 뿐입니다. 그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걱정이겠습니까? 군자의 참모습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나서야 비로소 드러나는 법입니다!”

안연이 말을 마치자 공자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보아라, 여기 안씨의 아들이 있다! 만약 회가 돈을 많이 번다면, 나는 그의 집사라도 되고 싶구나.”21


한겨울 소나무가 푸르른 것은

나와 몇몇 제자들은 강론이 끝난 뒤에도 한참 동안 문답의 여운에 젖어 있었다. 화제는 단연 안연의 대답이었다. 다른 제자들도 공자와 안연의 문답을 들으며 희열로 가슴이 벅찼는데, 정작 안연은 스승의 칭찬에 얼굴이 빨개졌다. 그 모습을 보고 짐꾼들까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안연의 답변이야말로 공자가 이 굴욕의 고난 속에서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자, 자신이 직접 세상을 향해 외치고 싶은 말이었을 것이다. “보아라, 여기 진정한 군자들이 있다!” 안연은 공자에게 제자이기 이전에 같은 수행의 길을 가는 벗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안연이 저 높은 곳에서 스승과 함께 노니는 경지를 보여주었다면, 자로는 보통사람들의 심정을 대변했다. 단순하고 감정에 솔직한 사람답게 자로의 사고 회로는 늘 선악의 인과관계를 축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나는 자로의 울분에 더욱 공감했다. 하늘에 도가 있다면 선한 자에게 복을 내리고 악한 자는 벌을 줘야 마땅하지 않은가? 도대체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행한 일과 복은 반드시 일치하는 게 아니라는 것, 바로 그러하기에 천명天命이 존재한다는 걸 공자는 잘 알고 있었다.


유야, 천명과 시운은 사람의 일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군자는 학문을 함에 있어 배부르게 먹는 것과 안락한 거처를 바라지 않는다.22 군자는 그러므로 보답을 바라고 인의를 행하는 자가 아니다. 먼저 실천하고 요행히 보답이 주어진다면 따를 뿐이다.23 인격을 닦는 목적이 명성이나 부에 있지 않을 때, 그 도는 비로소 도로서 가치를 지닌다. 그리하여 군자는 한겨울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르름과 같다. 날이 추워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 시들지 않는 기상을 우리가 알게 되지 않더냐?24


자공의 질문이야말로 다들 하고 싶었으되 감히 꺼내지 못한 우문이었다. 자공은 불굴의 철인에게 역사상 가장 세속적인 질문을 던지는 악역을 맡은 셈이니, 그야말로 가장 용감한 질문자였다.

“도를 약간만 낮추면 안 되겠습니까?”

참으로 절묘한 질문이 아닌가? 명민한 현실주의자 자공은 공자의 이상이 이 비루한 세상에서는 실현될 가망이 거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공은 그래서 평소에도 이 질문을 가슴 한구석에 품고 있었을지 모른다. ‘선생님은 그저 모르는 척하십시오. 눈높이를 낮추는 일은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현실 감각 하나는 끝내주는 이 자공이 선생님을 중원 제일의 명망가로 만들겠습니다!’

이런 자공의 현실 감각을 훤히 꿰뚫어본 이가 또 누구인가? 공자는 ‘하늘을 상대로 한 장사꾼’이다. 그랬기에 ‘지상의 장사꾼’인 자공의 제안을 웃으며 일축할 수 있었다. 공자가 일찍이 자공이 내놓은 것과 같은 타협안을 수용했다면 일세의 명재상이 되었을지는 몰라도, 만세의 스승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노래를 부르는 이는 누구인가

감흥이 지나가자, 이상하게도 내 머릿속에는 공자가 안연을 칭찬하며 한 말이 눌러앉아서 한동안 떠나지 않았다. 안연이 돈을 많이 벌면 그의 집사가 되겠다는 말씀은 정말 유쾌한 극찬이지만, 정작 그 말뜻이 정확히 가슴에 와 닿지 않아서였다. 단표누항簞瓢陋巷의 청빈한 생활을 하던 안연은 팔자에 없는 부자의 길을 획책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 부자가 되는 것을 전제로 그 사람의 창고지기가 되겠다니,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일까? 반어나 역설일까? ‘네가 결코 부자가 될 리는 없지만, 비록 가난한 삶이라도 너와 함께하마.’ 아니면 비유로 해석해야 할까? ‘너의 창고에 도가 가득 쌓인다면 나는 그 도를 관리하는 창고지기가 되어도 좋으리…’ 허허, 하필이면 왜 부자였을까? 아무래도 이건 공자가 특별히 나에게만 남겨준 숙제인 듯했다. 나는 잠자리에 들어서도 혼자 실없이 웃다가 요기尿氣를 풀러 밖으로 나왔다. 어둠 저편에 긴 그림자가 하나 서 있었다. 공자였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니 안연이 함께 있었다.

광활한 평원의 검은 반구에 은하수가 가득한 밤이었다.

“회야, 왜 자지 않고 나왔느냐?”

“선생님이 겪으신 고초를 생각하니 마음이 분합니다.”

안연은 어제 거문고를 켜며 몰래 눈물을 흘리던 공자의 모습이 가슴에 화인火印처럼 박혀버린 모양이었다.

공자는 자신을 절대적 표상으로 여기는 순결한 정신의 안연이 무척 사랑스러우면서도 걱정이 됐다. 이상이 높으나 현실을 모르는 그가 혼탁한 세상과 부대끼다 상처를 입을까 우려했던 것이다.

어둠속에서 공자의 말이 들렸다. 낮은 목소리였지만 마치 거대한 강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웅혼했다.

“회야, 나는 하늘이 주는 괴로움 따위는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 그러나 네가 나에게 주는 이 행복과 기쁨은 뿌리치기 어렵구나. 고맙다, 회야, 그러나 지금 나의 슬픔을 너무 애달프게만 여기지 말아라. 하늘이 주는 시련을 참을 수 있는 자라면 사람이 주는 기쁨과 슬픔도 기꺼이 초월할 수 있어야 하리니. 회야, 너는 나를 그렇게 여기거라.”

그 목소리는 마치 거짓 없는 삶을 살아온 가난한 아버지가 이제 막 거친 세상으로 나가려는 아들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안연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한동안 흐느낌 같은 바람소리만이 어두운 밤공기를 타고 들판으로 퍼져나갈 뿐이었다. 나는 두 사람을 숲 속에 남겨둔 채 조심스레 인기척을 감추고 그 자리에서 멀어졌다.

약 200년 뒤에 쓰인 《장자莊子》에는 이날 두 사람의 심야 대화가 묘한 형태로 남았다. 기록한 이가 장주莊周 자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유가를 조롱하는 빼어난 우언寓言으로 곧잘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했던 장자 일파가 왜 이날의 대화를 자기들의 경전에 남겼는지 짐작 못 하는 바는 아니다. 장자의 우언들이 유파 간 경쟁에서 비롯된 교묘한 의미 조작에 불과하다고 해도, 적어도 이날에 대한 묘사만큼은 내가 목격한 진실과 맥이 통하는 바가 있었다. 아, 그때 나 말고 또 누가 어둠속에 숨어 있었단 말인가! 그때 내가 그 은자를 만날 수 있었다면 내 이 기록은 얼마나 더 풍요로워졌을까!

은자가 전하는 말에 따르면, 공자는 안연이 자신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슬퍼할까봐 걱정되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회야! 하늘이 주는 고난쯤이야 견딜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주는 은혜와 기쁨은 견디기 어렵구나. 회야, 잊지 마라. 세상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하늘과 사람은 하나일 뿐이니, 지금 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이가 누구이겠느냐?”25

이것이 운명이라면

어떤 사람이 자서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했다.

“아, 그 사람, 그 사람…”

或問子西 (子)曰 彼哉 彼哉 _《논어》<헌문> 10장

굶주림에 시달리는 고난 속에서도 의연했던 공자는 다시 길을 떠나 마침내 초나라 변경 지대에 이르렀다.26 멀리 성문 위로 초나라 깃발이 보이자 제자와 짐꾼들 사이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 초나라다!”

“영도*에 들어서면 초나라 왕이 버선발로 달려 나와 우리 선생님을 맞이할 테니 드디어 고생이 끝나겠구나!”

* 초나라의 수도.

모처럼 공자 일행에 웃음꽃이 만발했다.

당시 초나라는 북방의 진나라와 더불어 중국의 양대 강국이었다. 공자는 애초 진나라로 가려 했으나 진나라 대부들이 살해당하고 조정이 혼란에 빠지는 바람에 방향을 남쪽으로 돌린 것이다. 이처럼 공자가 강대국을 상대로 유세하려 한 까닭은, 자신의 정치사상을 전파하고 실천하는 데 더 효과적일 것이라는 판단에 있었다. 조국 노나라와 위나라에서 겪은 정치적 좌절의 반작용이기도 했다. 자로는 그때마다 탁자를 치며 울분을 토했다.

“이럴 바엔 중앙 무대로 직행합시다! 거기에서는 훨씬 뛰어난 임금과 대부들이 우리를 제대로 평가해줄 겁니다.”

나머지 제자들도 말은 안 했지만 자로의 주장에 공감했다. 특히 초나라 소왕은 나랏일에 헌신적인 군왕일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공자를 존경하고 있다지 않은가.

공자 일행이 저마다 부푼 기대감에 젖어 발걸음도 가볍게 초나라 국경도시를 지나갈 때였다. 긴 머리를 아무렇게나 늘어뜨리고 얼굴은 숯을 칠한 듯 검은 사내가 조용히 공자의 수레에 접근했다. 그는 수레를 따라 걸으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봉황새야, 봉황새야, 어찌 그리 덕이 쇠했느냐?


거리의 소음 때문에 노랫소리가 멀리 퍼지지는 않았지만, 쇠똥받이 삼태기를 들고 수레 옆을 걷던 나는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공자가 고개를 내밀고 수레를 모는 자공에게 물었다.

“사야, 지금 이게 무슨 소리냐? 어디서 나를 부르는 것 같구나.”

자공이 공자를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선생님, 어떤 사람이 우리를 따르며 노래를 합니다.”


봉황새야, 봉황새야, 어찌 그리 덕이 쇠했느냐?

지나간 일은 그렇다 쳐도, 다가올 일은 충분히 알 만하지 않은가.

그만두시게! 그만두시게!

지금 정치에 뛰어드는 건 위험천만이라네.


노랫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기던 공자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다. 공자가 급히 수레에서 내려서며 외쳤다.

“유야, 사야, 저분을 모셔 오너라! 내 그를 만나야 한다.”

그러나 사내는 공자를 한번 힐끗 쳐다보고는 이내 인파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사내가 모습을 감추자 공자가 길게 탄식했다.

“초나라에 올 때 내심 그와 더불어 이야기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오늘 그가 떠났으니 다시는 볼 수 없겠구나.”27

“선생님, 아는 사람입니까?”

자로가 물었으나, 공자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공자와 함께해온 자로는 짚이는 데가 있었다. ‘아마 육통陸通일 것이다.’

눈치 빠른 자공이 자로에게 물었다.

“아까 그 미친 사람을 아십니까? 감히 선생님께 덕이 쇠했다고 지껄이다니 몹시 불경합니다. 정치를 하면 위태롭다는 건 또 뭡니까? 초나라에 가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까?”

육통이라면 초나라 조정과 등진 채 미친 사람 행세를 하며 숨어 산다는 은사隱士였다. 언젠가 선생님이 “일어나 세상을 떠나간 은자가 일곱 있다”28고 하셨는데, 그중 한 사람이 육통 아니던가?* 오늘 선생님의 태도를 보니 육통과 아는 사이가 틀림없었다. 그런데 육통은 왜 굳이 여기까지 와서 선생님을 만나지 않고 가버린 것일까? 자로는 느닷없는 육통의 출몰이 왠지 불길하게 느껴졌다.

* 주자朱子, 즉 주희朱熹는 《논어집주論語集註》에서 “일곱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으니, 굳이 찾아서 채우려 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후대 학자들은 《논어》의 다른 편에 등장하는 주나라 시대의 현인 또는 은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대체로 백이, 숙제, 우중虞仲, 이일夷逸, 주장朱張, 류하혜柳下惠, 소련少連 등이다. 이 밖에 장저長沮, 걸익桀溺, 장인丈人, 신문晨門, 하조荷蓧, 의봉인儀封人 등과 더불어 육통, 즉 접여接輿가 꼽힌다.

“이보시게, 자공, 자네가 먼저 영도로 들어가 초나라 조정에 무슨 일이 있는지 상세히 알아보게. 지금은 전쟁 중이니 매사 신중하게 살펴가며 선생님을 모셔야 하지 않겠는가?”

자공을 태운 말이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쏜살같이 남쪽으로 내달릴 즈음, 운명은 엇갈리고 있었다. 초나라 소왕이 전선으로 가는 군대와 함께 비밀리에 영도를 떠난 뒤였기 때문이다. 때는 전선의 백골이 시든 풀에 덮이기 시작하는 늦가을 무렵이었다.


불구대천의 원수, 초 소왕과 오자서

초나라 소왕은 오나라가 초나라의 위성국 진나라를 침공하자 원군을 보내면서 자신도 최전방 군사도시인 성보로 갔다. 소왕은 왜 왕성을 비우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직접 출전해야 했을까? 일찍이 소왕은 오나라 왕 합려闔閭가 초나라 망명객 오자서伍子胥의 보좌를 받아 영도를 함락시킬 때 수도와 백성을 버리고 도망치는 굴욕까지 겪은 터였다.*

* 합려는 오나라 제24대 왕. 왕위가 사촌동생 요한테 넘어가자 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때 오자서와 의형제 사이인 자객 전제專諸가 생선 뱃속에 감춘 비수로 요왕을 찔러 죽였다. 쿠데타에 성공한 합려는 오자서를 재상으로 삼아 초나라를 패배시키고 남방의 패자로 군림했다. 오자서는 합려와 그 아들 부차를 남방의 패자로 끌어올린 공로로 오나라 원훈으로 추앙받았으나, 정치적으로 경쟁관계에 있던 태재 백비伯嚭와 대립하다가 부차에 의해 자결을 강요받았다. 오자서는 부차가 내린 촉루검으로 자살하면서, 자기의 두 눈을 뽑아 성문에 걸어 월나라 군대가 쳐들어오는 것을 보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훗날 부차는 월나라 구천에게 패하여 나라를 잃게 되자, 저승에 가서 오자서를 볼 면목이 없다며 보자기로 얼굴을 가린 채 죽었다.

소왕의 아버지 평왕平王은 역사에 두 가지 오점을 남겼다. 하나는 아들의 비로 맞이한 진나라 여인을 후비로 삼아 소왕을 낳은 일이고, 또 하나는 간신의 참소에 속아 충신 오사伍奢와 그의 아들 오상伍尙을 무고하게 죽인 일이었다. 이때 오사의 작은아들 오원伍員이 복수를 맹세하며 달아났으니, 그가 희대의 책사 오자서이다.

오자서는 망명지를 전전하다 합려의 쿠데타를 도운 공으로 오나라 재상이 된다. 오자서는 《손자병법孙子兵法》으로 유명한 병법가 손무孫武와 함께 오나라 군대를 천하무적의 강군으로 조련하여 망명 19년 만인 기원전 506년 조국 초나라로 쳐들어간다. 소왕은 오나라의 침공에 수도를 빼앗기고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채 도망쳐야 했고, 원한에 사무친 오자서는 죽은 평왕의 무덤을 파헤친 후 충신을 알아보지 못한 죄라며 시체에 채찍질을 300번이나 했다. 그 후 오자서는 초나라 충신 신포서申包胥가 자신의 행위를 비판하자 사과의 뜻을 전하며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어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吾日暮途遠 故倒行而逆施之]29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오자서의 죽마고우였던 신포서는 오자서가 망명하면서 “반드시 돌아와 초나라를 뒤엎을 것”이라고 했을 때, “노력하시게, 자네가 초나라를 뒤엎는다면 나는 반드시 초나라를 부흥시킬 걸세”30라고 말한 인물이다. 신포서가 진나라 궁정 뜰에서 칠일 밤낮을 엎드려 간청한 끝에 구원병을 얻어서야 소왕은 영도로 돌아올 수 있었고, 끝내는 오나라를 피해 더 먼 곳으로 도읍을 옮기는 수모를 치렀다. 소왕은 즉위하자마자 오사를 참소했던 간신 비무기費無忌를 죽여 오자서의 분노를 달래려 한 터였지만, 이로써 오나라와는 돌이킬 수 없는 원수 사이가 되었던 것이다.


공자를 가로막은 자서

국경도시에서 육통, 이른바 초광접여楚狂接輿를 만난 뒤 분위기가 어수선해진 공자 일행 앞에 영도로 먼저 떠난 자공이 헐레벌떡 나타났다.

자로가 놀라 물었다. “아니, 어찌된 일인가?”

“사형, 영도까지 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초 왕이 영도를 떠나 전방으로 갔다고 합니다.”

“그래? 어디로 갔다고 하던가?”

“제가 알아본 바로는 성보라고 합니다.”

“성보라? 차라리 잘됐다. 성보라면 여기서 가까운 곳이다.”

“그런데 그게…” 자공이 말꼬리를 흐리더니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도 소용이 없을 듯합니다. 초나라 재상 자서子西가 선생님의 초 왕 면담을 취소시켰다고 합니다.”

“무엇이?” 자로는 땅을 쳤다. “자서 그 사람, 그 사람이 우리 선생님을 음해했단 말인가?”

자서는 소왕의 이복형이자 초나라의 재상인 영윤令尹이었다. 애국심과 군주에 대한 충성심이 높고, 산전수전 다 겪은 정치 경륜으로 당시 사람들에게 명재상 소리를 듣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왜 자기 임금을 공자와 만나지 못하게 한 것일까? 전말은 이러했다.

공자가 초나라로 오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소왕은 크게 기뻐하며 공자를 제후의 예로 맞이할 결심을 했다. 자공이 들은 바로는 소왕이 초나라 서사 땅 700리를 공자에게 봉해 다스리게 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방 순시 중이던 자서가 이 소식을 듣고 일정을 취소하면서까지 급히 영도로 돌아갔다. 자서는 왕실의 맏형이자 재상으로서 오나라에 당한 치욕을 씻고 초나라를 부흥시키는 일을 필생의 사업으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의 인재 등용 기준은 오로지 부국강병이었다. 그에게 절실한 것은 오자서 같은 책사와 손무 같은 병법가였으니, 인의를 주장하는 공자는 당장 쓸모가 없어 보였으리라.

* 원래 서사書社는 영토 안의 인명과 토지를 기록한 문서를 말한다. 25가구가 사는 지역을 묶어 1사라 한다. 따라서 서사 700은 1만 7500가구가 있는 지역을 말한다. 이를 땅 700리라고 한 것은 사마천의 착오라는 것이 정설이다.

자서는 자신의 손으로 옹립한 어린 동생이자 군주인 소왕을 앉혀놓고 물었다.

“전하께서 사신으로 삼아 다른 제후에게 보낼 만한 사람으로 자공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전하를 보필할 신하로 안회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전하의 장수감으로 자로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전하의 장관감으로 재여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자서가 일어나 소왕 앞에 엎드려 말했다.

“전하! 우리 초나라 조상께서 나라를 여실 때 국토가 50리에 불과했습니다. 주나라 문왕과 무왕이 중원을 차지할 때도 그 출발은 사방 100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공자는 천하를 돌아다니며 삼황오제의 치국 방법과 주공과 소공召公의 사업을 주창하고 있습니다. 그런 공자에게 700리나 되는 땅을 하사하여 현명한 제자들과 함께 다스리도록 한다면 인심이 어디로 흐르겠습니까? 장차 전하께서는 조상이 물려주신 나라를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31

소왕은 형의 말을 듣자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가뜩이나 오나라에 눌려 자기 대에서 사직을 잃을까 심한 불안감에 시달리던 소왕은 자서의 말뜻을 금세 알아차렸다.

‘비록 공구가 성인이라 하더라도 조상이 물려준 종묘사직과 바꿀 수는 없지… 아, 과인이 어리석어 잠룡潛龍에게 날개를 달아줄 뻔했구나…’


이것이 운명이라면

사태의 전말을 알게 된 공자는 한동안 깊은 사색에 잠겼다.

‘소왕이 나를 존경한다고는 하지만 지금 그가 처한 정치 현실은 참으로 엄혹하기만 하다. 자서의 행위도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면 아주 이해하지 못할 바가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내가 초나라 왕을 만나지 못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공자는 분연히 일어나 수레에 올랐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나는 초 왕을 만나야 한다. 전쟁에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기는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보라. 나는 밝은 덕으로 정치를 아름답게 밝혀 고단한 인민들을 더 높은 선의 세상으로 이끌고자 한다.32 비록 그곳이 화살이 빗발치는 전쟁터라 해도 나는 한순간도 인을 이루는 길을 외면할 수가 없구나!’33

“가자, 성보로! 유야, 사야, 어서 성보로 가자꾸나!”

공자 일행이 다시 행로를 바꿔 성보로 향하던 중 또 다른 급보가 전해졌다. 한 번 엇갈린 운명은 갈라진 강물처럼 되돌릴 수 없는 것일까. 초 소왕이 성보 진중에서 급사한 것이다.

병이 잦았던 소왕이 어느 날 병석에 들었을 때 하늘에 불길한 기운이 나타났다. 그런데 이것을 제대로 해석하는 이가 없자, 주나라 태사에게 사람을 보내어 점을 치게 했다. 태사는 소왕에게 불길한 징조이니 제사를 지내 그 징조를 신하들에게 돌리면 화를 면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소왕이 말했다. “내 병을 없애려고 그 병을 신하에게 옮겨놓는 것이 초나라에 무슨 득이 되겠는가? 나에게 큰 잘못이 없다면 하늘이 어찌 나를 죽게 내버려둘 것이며, 죄가 있어 벌을 받는다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옮긴다고 옮겨지는 것이겠느냐?”

진중에서 소왕의 병이 더욱 깊어지자 태사가 “황하의 신이 저주하니 하신河神에게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주청했다. 소왕이 웃으며 거절했다. 신하들이 나서서 거듭하여 권하자 소왕이 말했다. “나는 초나라의 군주다. 내가 빌 곳이 있다면 우리 초나라의 강산이지, 중국의 강산이 아니다.* 내가 비록 부덕하나, 남의 나라 귀신에게까지 죄를 짓지는 않았다.”

* 황하는 초나라가 아니라 주나라에 속한 강이라는 뜻이다. 당시 초나라는 자국을 중국의 일원이 아닌 독자적인 천자국으로 여겼다.

훗날 공자도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소왕의 기개를 높이 평가했다.

“소왕이 대도大道를 알았으니 그가 나라를 잃지 않음은 실로 당연하다.”34

소왕은 임종에 앞서 자서에게 왕위를 넘기려 했다. 그러나 자서는 왕위를 사양하고 비밀리에 영도로 철군해 소왕의 어린 아들 혜왕惠王을 옹립한 뒤 소왕의 장례를 거행했다. 소왕은 군왕의 자질을 가졌으나 시운을 만나지 못한 슬픈 운명의 임금이었다. 그의 기개 어린 최후가 초나라에 전해지자 수많은 백성들이 그의 죽음을 애달파했다.

소왕의 부음을 노상에서 들은 공자는 수레를 멈추고 영도를 향해 예를 갖춘 뒤 탄식했다.

“지난번에는 북방의 황하를 건너지 못하더니 이번엔 남방의 평원을 건너지 못하는구나. 아, 이것이 나의 운명이란 말인가…”


초광접여가 노래를 부른 뜻은

공자 일행은 진나라로 돌아가는 길에 초나라 국경도시를 다시 지나가게 되었다. 수행자들은 새삼 초광접여의 노래가 떠올랐다. 그 미친 자가 부른 노래의 뜻을 이제야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초나라의 광인 접여, 즉 육통은 소왕의 등극을 반대한 가문 또는 파벌에 속했거나, 아니면 자서가 집권할 때 반대 세력에 속했던 인물로 추정된다. 집권 세력의 감시와 견제를 받는 일급 지식인이던 육통은 문둥병 환자처럼 꾸며 타인의 접근을 원천봉쇄함으로써 일신을 보존했다. 그것은 자신을 탄압하는 조정에 대한 야유의 한 방식이었을 것이다.

나, 이생이 훗날 여러 경로로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공자는 35~37세 무렵 망명지 제나라 수도 임치에서, 아니면 46세 때 주례周禮를 배우러 갔다가 노자老子를 만나게 된 주나라 도읍지 낙양에서 육통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두 사람은 금세 의기투합하여 혼란스러운 천하를 구하는 도에 관해 밤을 새워가며 토론하고, 때로는 울분에 젖어 통음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육통이 조국 초나라로 돌아간 뒤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다만 초광접여라는 은자의 이름으로 공자 앞에 딱 한 번 모습을 드러낸 일만 세상에 전해질 뿐이다.

따라서 육통에 대한 나의 추론은 어디까지나 한 구경꾼의 상상력에 불과하다. 다만 ‘초광접여의 노래’35만큼은 단순한 은자의 풍자가 아닐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나는 그가 풍자 이상의 실제적 그 무엇을 공자에게 암시하려 했다고 믿는다.

‘여보게 중니, 예전의 총기를 잃었는가? 진나라 대부 두명독竇鳴犢과 순화舜華의 죽음을 보고도 모르겠나? 지금 초나라에 가면 도를 펴기는커녕, 뼛속까지 군국주의자이자 맹목적 왕당파인 자서에게 자칫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네. 중니, 그대는 이미 세상과 서로 어긋나 뜻이 맞지 않거늘, 다시 수레를 몰아 무엇을 구하려 하는가?36 하루빨리 고향으로 돌아가 본령인 교육에 전념하시게. 천하에 도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만이 지금 자네가 실천해야 할 천명일세. 내가 아는 한 그 사업은 중니 자네 같은 봉황이 아니면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라네.’


원한과 복수의 소용돌이

위나라로 돌아간 공자는 거기서 5년여를 더 침잠한 뒤 예순여덟의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조국 노나라로 돌아가 후학 양성에 전념할 수 있었다. 공자와 초 소왕의 만남을 가로막은 자서는 공교롭게도 공자가 죽은 해에 같이 죽었다.

자서의 죽음은 복수가 복수를 낳는 원한의 굴레 속에 있었다. 초 소왕의 아버지인 평왕이 오자서의 아버지를 죽였고, 오자서는 평왕의 시체를 욕보였다. 오자서는 자기가 세운 왕의 아들 부차에게 자살을 강요당한 뒤 시체가 강물에 던져졌고, 소왕은 복수의 일념 속에 살다 진중에서 죽었다. 아버지 평왕에게 여자를 빼앗기고 쫓겨나 죽은 태자의 아들은 아버지의 한을 풀려다 이를 반대한 숙부 자서를 살해하고 자신도 진압군에 쫓기다 자살했다. 자서는 두 번이나 왕위를 마다하고 공자의 인의마저 사양하며 조국의 부흥을 도모했으나 조카의 손에 불의의 죽음을 당했다.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을 다하고자 했음에도 비극을 피하지 못했다. 이들에게도 천명은 알 수 없는 그 무엇이었을까?

일흔셋 노경의 공자는 봄볕이 짙어갈수록 종종 가뭇없는 상념에 빠질 때가 많았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문병을 하던 차에 문득 자서에 대해 묻자, 공자가 낮고 느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서, 그 사람, 그 사람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