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6일 한강, 『바람이 분다, 가라』
한강의 ‘성스러움’에 대한 새로운 사유로 성스러움의 고전적 사상가 루돌프 오토를 비롯해 멀치아 엘리아데, 하이데거와 벨테 등의 사유가 바뀌어야 할 것 같다.
한강은 “성스러움이란 뭘까?”라고 묻고 이렇게 서술한다.
이 세계에 없는 것...... 우묵하게 파이고 구멍 뚫린 윤곽으로만 가까스로 모습을 드러내는 어떤 것 아닐까. 장님처럼 우린 그 가장자릴 더듬으면서 걸어가는 것 아닐까.
그러니까, 인파에 떠밀려 지하철을 탈 때, 혼잡한 환승구간을 어깨로 헤치며 나아갈 때, 매표소 앞에서 길고 무질서한 줄이 줄어들기를 기다릴 때 난 성스러움을 느껴.
인간을 믿을 수 없어질 때, 흉폭한 모서리가 가슴을 찢고 튀어나올 때, 성스러움을 느껴.
차가운 장판 바닥에, 씻지도 않고 코트도 안 벗고 웅크리고 누어서 내 안의 마모된 부분을 드려다볼 때, 영원히 망가졌거나 부서져버린 그것들을 드려다 볼 때 성스러움을 느껴.
어떤 종교 서적에서도 아니고, 신앙 회합의 자리에서도 아니고, 예배당도 고적한 기도처도 아니고...... 너덜너덜 찢어진 이 삶 가운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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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장 모세의 소명 체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나는 “모세야 모세야” 부르는 하느님의 음성에서 전율하는 성스러움을 느꼈다.
이것은 모세의 성스러움이다.
이제 출애굽기 3장을 다시 읽는다.
모세의 성스러움이 아니라 하느님이 체험한 전율, <하느님의 성스러움>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은
하느님이 애굽에 있는 자신의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볼 때 성스러움을 느껴.
하느님이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을 분명히 듣고 성스러움을 느껴
하느님이 애굽 백성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를 분명히 보고 성스러움을 느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