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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다음 이야기들을 가장 짧은 말로 요약하면,
원불교의 개교(開敎) 구호인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일 것 같습니다.
<<공자가 위나라에 갈 때 염유가 수레를 몰았다.
공자 말하기를, “백성들이 많구나.”
염유가 말하기를, “백성이 많아졌으면 무엇을 더해야 합니까?”
“부(富)하게 살도록 해야지”
“부하게 된다면 다음엔 무엇을 더 해야 합니까?”
“교(敎)다.”
“부(富)하게 살도록 해야지”
“부하게 된다면 다음엔 무엇을 더 해야 합니까?”
“교(敎)다.”
子適衛冉有僕 子曰庶矣哉 冉有曰旣庶矣又何加焉 曰 富之 曰 旣富矣又何加焉 曰 敎之(13/9)
자공(子貢)이 “가난해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여도 교만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하고 묻자, 공자 말하기를, “좋은 말이다. 그러나 가난하면서도 도를 즐기며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다.”
자공이 “시경에 있는 절차탁마란 말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겠습니다.”하고 말하자 공자 말하기를, “사(賜)야, 비로소 함께 시를 논할 만하다. 과거를 말하면 미래를 아는구나!”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 可也 未若 貧而樂 富而好禮者 子貢曰 詩云如切如磋如琢如磨 其斯之謂與 子曰 賜也 始可與言詩已矣 告諸往而知來者(1/15)
공자 말하기를, “군자는 위로 달하고, 소인은 아래로 달한다.”
子曰 君子上達 小人下達(14/24)
사람이 동물로부터 진화한 것은 그 지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지능에 의해 동물 일반과는 다른 특징들을 갖게 되고, 지금의 문명을 이루게 된 것이다.
사람도 생명체가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자기중심성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생태계는 모든 단위가 자기중심성을 가지면서 상호 조화되어 있다. 자기 존속을 위한 조건들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생명체는 사라진다. 능력이 모자라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능력은 뛰어나나 오히려 그 능력 때문에 환경을 파괴해서 사라지게 되는 경우도 있다.
아마도 공룡의 역사도 그렇지 않을까 추측한다.
그런데 지금 인간이 공룡의 전철을 밟는 것이 아닌가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공룡은 그 힘에 있어서 무적이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생태계의 조화를 깨트려 스스로 멸망의 길을 갔지 않았을까.
이제 인간이 제2의 공룡이 될 것인가?
그런데 인간의 능력은 공룡의 그것과 다르다. 인간의 능력은 지능인 것이다.
이것은 동물계와는 질이 다른 인간계를 세상에 출현시키고, 생태계의 조화를 이루는데 우리가 알기에 지금까지 지구상에 출현하였던 어떤 생명체보다 비교가 안 되는 질(質)의 책임을 떠안게 된 것이다.
자기중심성을 가진 채 그 능력을 지나치게 발휘해서 주위와의 조화를 깨트리면 자신이 살고 있는 바탕이 허물어져 결국 스스로도 존속할 수 없게 된다.
암세포가 바로 그런 존재이다.
인간이 그 고도의 지능을 자기중심적으로 사용한 결과 기상이변을 비롯한 생태계의 교란을 가져오고, 환경과 자원 위기를 가져 오고 있는 것이다.
사람 사이에서도 이 자기중심성과 그 고도한 능력의 결합은 핵전쟁에 의한 자멸의 가능성마저 열어 놓고 있는 것이다.
무수히 많은 문제와 무수히 많은 해결책이 제시되고 있지만 그 해답은 인간 존재의 특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거대한 문명을 일으키고 반면에 인류 존속 그 자체의 위기를 일으키고 있는 그 바탕에는 인간의 지능이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인간의 지능의 사용 방향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인류의 존속과 번영 그리고 자연계 안에서 인간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길이 될 것이다.
인간은 이 지능을 통해 자연을 이용하여 물질적 제약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고, 스스로의 제도를 개혁하여 자유나 평등을 발전시켜 왔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자연과의 모순이나 사회적, 국가적 갈등이 그 가공할 능력 때문에 엄청난 위험 앞에 자신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인간의 능력을 뒤로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 능력 즉 인간의 지능을 다른 방향으로 더 고도화하는 길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인간의 외부 즉 자연과 사회를 변화시키는데 사용한 그 능력과 조화되도록 스스로를 변혁하는데 그 지능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것 또한 인간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의식의 변혁이다. 외부를 변혁하는 것이 물질 개벽이라면 의식을 변혁하는 것이 정신개벽이다. 외부를 변화시키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수억 년 생명체의 역사가 이 자기중심성을 하나의 속성으로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이것으로부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하나의 우주적 비약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인간의 출현 자체가 하나의 비약이었다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이 비약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미 그것을 실현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인류의 희망이다.
과거 성현이라 알려진 분들은 모두 이 자기중심성으로부터 자신을 해방하고, 나아가 세계 인류를 그 근본적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고 하신 분들이다.
공자도 그 한 분이다.
공자가 제시한 군자(君子)라는 인간상은 바로 이 자기중심성을 넘어선 인간의 전형이다.
인간이 그 지능의 사용을 어떤 방향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그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가 결정된다.
군자(君子)는 상달(上達)하고 소인(小人)은 하달(下達)한다는 이 구절은 그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군자는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려는 지향을 뚜렷이 하는 사람이고, 소인은 자기중심성 속에 머무르려는 사람이다.
그런데 다른 동물의 자기중심성과는 다르게 인간의 뛰어난 지능 때문에 주위에 더 많은 피해를 주게 된다. 이것이 소인의 하달(下達)이다.
이 피해의 정도는 그 능력에 비례하는 것이다. 공자 당시보다도 지금의 폐해는 더 심각한 것이다. 이제는 인류 전체의 존속을 위협하는 수준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군자의 상달(上達)은 인류 진화의 방향을 보여준다. 이제는 개인 차원이 아니라 인류가 소인으로부터 군자로 진화하지 않으면 그 자신의 존속마저 위협받게 되는 시대로 된 것이다.
이것이 공자를 비롯한 성인이 제시한 길이 인류 보편의 과제로 되고 있는 소이라고 생각한다.
논어 전편의 이야기들은 공자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환경 속에서 군자의 길을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제시한 것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한다.
- 상달(上達)이란 결국 의식의 진보를 말하는 것 아닐까요.
- 진정한 자유를 깨달아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 군자는 의(義)를 깨치고, 소인은 이(利)를 깨친다는 말과 상통하는 것 같아요.
- 의(義)니까 해야 한다는 것은 깨친다는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의(義)가 자유가 되는 것이 상달(上達) 아닐까요.
- 공자도 누누이 그 점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절사(絶四)를 행했다는 것이 그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 잇속을 밝히는데 귀신같다는 것이 하달(下達)이겠네요.
- 그런데 보통 사람의 경우 상달에 대한 욕구도 있고 하달에 대한 끌림도 있는 것 아닌가요.
- 그렇다고 생각해요. 상달에 대한 욕구가 더 강한지, 하달에 대한 끌림이 더 강한지가 다르겠지요.
- 많은 사람들이 아직 관념적으로는 상달(上達), 실제적으로는 하달(下達)인 것 같네요.
- 너무 상달하려고 무리하게 노력하다가는 정신 건강이 안 좋을 수 있어요.
- 하달에 대한 끌림을 잘 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네요. 비난하지 않고 자신의 실태를 잘 보는 것이 출발이 아닐까요. 부끄러움은 자연스레 나오는 것이지요.
- 그럼요. 자책이나 비난은 진정한 부끄러움과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 어디까지나 자신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서 상달(上達)하는 쪽으로 마음을 내는 것이 좋다고 자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은 사실 아닌가요.
- 기후 재앙이나 핵전쟁의 위험이나 인공지능이 인간의 정체성에 던지는 위험 등 인류가 만나고 있는 현실은 엄혹합니다. 우리가 만들어갈 미래가 ’디스토피아‘냐 ’유토피아냐‘를 가르게 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숭고지향성이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느냐에 달린 것 같습니다. 자기중심성을 더욱 심화시키는 것이 소인의 하달(下達)이고, 숭고지향성을 높이는 것이 군자의 상달(上達)이겠지요.
-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도화하는 인간의 능력‘이 ’변하지 않고 오히려 심화되는 자기중심성(이기주의, 각자도생)‘과 만나면 그것은 멸종 아니면 디스토피아죠.
-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도 스스로 숭고해져야 합니다. 물론 자각이 바탕이겠지요. 공자도 소인을 비난하거나 억제하려고 이런 말을 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그 현상을 이야기한 것이고, 선택은 각자의 자유의지에 맡기는 것이죠.
- 인간이 존속하여 우주 자연계에서의 위상을 살리기 위해서는 보편적으로 숭고해져야 하는 외길이라고 봅니다. 무슨 도덕 군자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 이른바 ’소인(小人)의 질서‘가 그 동안 물질적 번영과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측면이 있지요. 자본주의의 보편화와 개인 중심의 민주주의가 그것이죠. 그러나 앞으로는 ’군자(君子)의 질서‘로 발전해야만 인류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실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뜻은 알겠지만, 군자(君子)니 소인(小人)이니 하는 말들은 과거의 낡은 이미지와 겹치니까 그 말을 다른 말로 바꿔 사용했으면 합니다.
- 동감입니다. 다만 인류의 정신적 자산의 하나인 공자의 ’군자 소인론‘이 제대로 이해되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다가올 아시아연방이나 더 나아가 세계연방을 바라볼 때 공통의 정신적 바탕인 여러 종교나 철학사상을 새로운 문명을 위한 귀중한 밑천으로 활용해야 할테니까요.
- 우리가 하고 있는 논어 연찬도 그런 시도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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