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휘 교수, 『동학의 개벽사상과 문명전환』(8강)_“문명의 위기와 새로운 세계관의 필요성 / 수운 최제우의 동학 창도와 새로운 삶의 길”(1강)
1.K-Culture라는 단어가 대변하듯이, 우리의 맛, 우리의 멋을 말할 수 있다면 학문 분야에서도 우리의 학문을 말할 수 있는 고유한 방법론, 곧 이론적 안목이 있는가. 학문의 대상에 관해 지역적으로 우선순위를 매길 수 있겠지만, 안전하고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인류 공통의 영역은 매우 폭이 넓어졌다. 그렇다면 문제는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을 찾는 일일 것이다. 가령, 경험론이냐, 합리론이냐, 실용주의냐, 방법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동학의 학문적 방법은 무엇인가?
2. 과거에는 주로 중국을 통해 학문을 수입했고 20세기 이후에는 압도적으로 유럽과 미국에서 지식을 수입한다. 심지어 국문학이나 한국사를 연구하는데도 서양의 이론으로 연구한다고 한다. 동양학, 한국학, 우리말로 학문하기 등의 노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매우 부족하다. 과학과 정치 경제학은 말할 것도 없고, 인문학과 철학 및 예술과 미학, 종교학과 신학에서 주도적인 이론은 모두 서양에서 수입된 것들이다.
3. 이즈음 나의 눈을 확 사로잡은 것은 『개벽파선언』, 『개벽의 사상사』 등, ‘개벽’이란 말이 들어간 책들이다. 19세기 후반부터 신 지식인들이 성리학 중심의 수구파를 버리고 개화파의 근대화 노선, 곧 서구화에 매진했고 주로 그러한 지식을 공부했다. 그러나 서구적 문명의 한계가 노정(露呈)되고 있는 지금, 문명 전환의 사상으로 19세기 후반 동학에서부터 자랐던 동학과 개벽 사상이 더 적합하다는 주장이 솔깃하고 설득력을 더해간다. 김용휘의 말이다. “기존의 개화의 시선으로 보아서는 그들의 문제의식을 제대호 포착할 수 없도, 개벽의 관점에서 그들의 비전과 실천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 이번에 새롭게 주목한 부분이다. 결국 그들(동학과 천도교 및 개벽 종교:증산, 원불교, 대종교)의 운동은 개화운동이 아니라 개벽운동이라는 것이다.”(10) 더욱 중요한 지점은 위정척사파나 개화사상이 지식인 중심이었다면, 동학은 민중적 차원에서의 주체적 응전이었다는 사실이다.(46)
4. 공통의 사안과 주제로 학파가 형성된다는 것은 사회의 건강한 지표라고 생각한다. 조선 성리학의 시대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많지만 성리학 안에 수많은 학파들이 형성되어 사상을 정립해 나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퇴계와 율곡을 중심으로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만이 아니라, 남명 학파, 성호 학파, 간재 학파, 한려 학파, 강화 학파, 화서 학파, 노사 학파, 한주 학파, 화담 학파. 첨 듣는 이름들도 많다. 이론이 있었던 사회, 물론 사대부 중심이었겠지만 시대적 한계라는 점을 감안해서 본다면 사대부들의 정신운동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5. 서양철학에서도 20세기에 비엔나 학파니, 프랑크푸르트 학파니, 신칸트학파니, 신헤겔학파니,... 하는 것들이 있었고, 신학에서도 불트만 학파는 꽤 오래갔고, 판넨베르크 학파도 잠시 형성되었다. 인간 정신을 새롭게 하고 확장하며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고 변혁하려는 사유의 집단 운동은 늘 필요하다. 한국에서도 우리 학문을 지향하는 연구자들이 개벽학의 이름으로 모여 사상의 흐름, 그것도 문명 위기에 문명 전환과 새로운 문명을 꿈꾸는 사상운동이 형성된다면 정말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름하여 개벽학파. 김용휘 교수는 바로 동학이 우리 학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6. 수운이 동학을 창도할 때, 나라 안의 위기로서 성리학적 체제의 무능과 부패이고, 나라 밖의 위기로서 과학기술과 무기를 앞세운 서세동점의 위기였다. 하여 수운의 일차적 문제의식은 “輔國安民”의 방책이었다. 학문적으로 말하면 정치학, 경제학, 평화학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오늘 당면한 위기는 근대문명이 초래한 부작용으로서의 위기이다. 위기의 현상은 생태계의 위기, 자본주의의 위기, 민주주의의 위협, 소수의 부자와 다수의 가난한 사람의 격차 심화, 열패감에 의한 장기적 우울증과 울분의 상태, 젊은 층을 중심으로 자아실현 의지의 현격한 저하 현상. 그러나 오늘 동학과 개벽학을 재론한다면 자기변혁을 시발점으로 동시에 종교와 철학, 명상과 수행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 변혁을 위한 정치, 경제, 과학과 생태, 문화 등을 포함해야 한다.
그렇지만 철학이면서 종교인 동학 공부의 목적을 우주와 생명, 인간에 대한 관점의 확장에 두고 싶다고 말한다.
-신에 대한 인식의 확장
-시간에 대한 관점의 확장
-세계는 영적인 네트워크
7.김용휘는 젊은 시절 종교적 성찰이 매우 높은 사람으로 보인다(첫 강의에서도 책을 쓰게 된 동기에서도 밝힘) 특히 기독교의 믿음과 구원의 관계에 대한 회의가 컸던 것으로 본다(14쪽). 믿음은 객관적 신조에 대한 무조건적 수용이 아니라 “진정한 믿음은 가슴영역에서 일어나는 진정한 변화”라고 생각한다. 하여 기독교의 믿음이란 “예수로 상징되는 진리와 생명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자기 삶의 중심적 가치로 수용해서 살아가는 마음의 거룩한 상태”로 이해한다.
10.동학은 儒佛仙(도참까지)의 요소가 있지만 유불선의 종합이 아니다. 특히 수운의 부친 퇴계학파의 맥을 이은 근암공으로부터 성리학을 배웠지만, 김교수는 동학에서 “중국의 유학에 대해 종언을 선언하고 새로운 학문의 필요성을 역설한 의미가 크다”(6)는 점을 부각하고자 한다. 그렇다고 유학을 완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유학의 이상에는 동의하지만 현실의 유학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51)
11. 다른 동학 연구자들보다 김용휘는 서학(기독교)과의 관계에 관심이 높다. 젊은 시절 실망했던 기독교에 담긴 여운과 애정이리라. 어느 학회에서 “동학과 수운은 조선에 나타난 기독교와 예수다”라고 발언했더니만, 대종교이었던 한 분이 이의를 제기했다. 그 발언에는 동학과 민족 종교를 포섭하려는 기독교의 의도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 난 그 반대로도 말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어차피 기독교인인 내가 말하는 것은 임팩트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천도교인인 김용휘 교수의 바로 이 말을 그 분에게 들려주고 싶다.
첫째, 예수. 예수를 인간과는 다른 예외적이고 절대적인 존재, 즉 신적 존재로 격상시킨 예수의 신성의 문제다. “만약 그리스도교에서 예수를 가장 모범적인 삶을 산 인류의 스승으로 脫신화화하고, 예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아들딸이며 모두가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동학이다.”(60쪽)
변론 1:
①기독교에서도 예수를 인류의 스승과 모범으로 고백한다. 그러나 신성을 가진 성자라는 인식이 압도적으로 크다.
②18세기 이후 ‘역사적 예수’와 20세기 ‘예수 운동’을 다루는 연구에서는 예수를 현자, 예언자, 사회적 변혁가, 영의 사람 등으로 본다.
③예수의 신성과 관련해서는 구원론이 핵심 문제다. 어떻게 인간인 존재가 죄인인 인간을 구원할 수 있겠느냐? 라는 문제로 결국 예수의 신성에 대한 주장이 정통이 되었다. 에수의 신성과 더불어 삼위일체론이라는 중요한 교리가 발생했다. 20세기 이후 삼위일체론의 의미와 해석과 실천은 매우 열려져(여성신학, 종교신학, 해방신학, 탈식민지 신학), 일신론자들이나 칸트의 경우처럼 삼위일체론을 무시하기도 어렵다.
④성령 안에서 예수로 말미암는 하느님의 은총에 참여하면 인간도 하느님의 딸아들이 된다. 궁극적 목표는 인간의 성화(서방교회), 혹은 신화(神化, 동방교회; Theosis, or "deification" and "divinization," is a Christian spiritual process of union with God and becoming more like Him, central to Eastern Orthodox theology but also present in the Latin Church.)를 동양 종교에서처럼 말한다.
둘째, 하느님(神). 서양종교(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의 외재적, 초자연주의적 유신론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우주를 초월해서 저 높은 곳에 계신 것이 아니라, 이 우주에 가득 찬 기운이자 靈이며, 그 영기가 모든 사람들 속에 나아가 만물 속에 깃들어 있다고 보면 그것이 동학이다.”(60쪽)
변론 2:
①사실 신의 존재를 입증하려던 시대는 지났다. 신학에서도 신의 존재, 신의 인식이란 말 대신 ‘신의 경험’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해 신의 外在이 內在이 하는 말은 부적절하다. 在로 말하고 싶다면 신은 無所不在(ubiquitous)하다. 무소부재하시는 하느님은 영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영이시다”(요한복음 4:24) 영은 수운의 말로 말하면 至氣이다.
②“우주를 초월해서 저 높은 곳에 계신” 하느님은 하느님의 본성에 매우 부적절한 말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을 문자적으로 받아 그렇게 이해한다면 종교언어의 성격을 모르고 하는 얘기이니, 담론의 수준이 맞지 않는다.
③하느님의 창조는 창조자 하느님과 피창조자인 세계와 인간의 이원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창조(우주) 안에서 creating Creator이며 인간과 만물은 created creating Co-creator이다. ‘창조’는 창조적 공진화의 성서적 표현이다.
12. 양학과 동학이 運도 같고 道도 같다는 수운의 말: “세상의 진리(道)는 하나이며, 神도 우리 민족의 신이 따로 있고, 서학의 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 존재는 비록 이름은 다양하게 불리더라도 결국 하나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성찰:
①전적으로 동의한다.
②그러나 그 이름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대명사로 부를 때 뉴앙스 뿐만 아니라 실존적 태도가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파스칼의 인격적 신(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느님....)과 철학자들의 신을 구분한 것이라든가. 하이데거가 철학자의 신인 Causa sui에게 기도하거나 절을 하거나 노래할 수 없다는 말은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김교수도 “동학의 한울님은 ‘인격적 존재가 아니지만, 인간에게 인격적으로 경험되는 존재”이기도 하다라고 말한다.(96) 이 부분은 인격신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과 방불하다.
③서양신학에도 일찍이 神學卽人間學, 人間學卽神學이란 테제가 있다. 신학과 인간학(우주론)은 불가분리의 관계이며, 不一不二의 관계이다. 그러나 김교수의 강의에서 인간의 강조! 에컨대, 창조적 주체의 삶, 나의 무궁성과 창조성의 무궁한 발현 등의 강조에서 보자면, 동학에서 신은 숨어있고 인간이 강조되는 것 같다. 그래서 『신인철학』에서 우주론 안에 신이 포함되어 있고 우주론은 있으되 신론은 별도로 없는 소이가 이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실 기독교 신학은 처음부터 끝까지 신론(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라는 측면이 있다. 그래서 막상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간과되는 경향이 있다. 동학과 유사성도 있지만 또한 차이도 느껴진다.
④신학을 하는 입장에서는 동학의 ’天‘과 ’天主‘ ’한울님’, “천은(天恩)이 망극하여 경신(庚申) 사월 초오일에”(용담유사)에서의 天恩 등이 무명과 무지에 빠지기 쉬운 인간을 고무하고 긴장시켜 무궁하게 확장하는 견인력으로 작용했으면 좋겠다.
13. 동학이 동서양의 사유를 통합한다는 입장!
“동학에는 동서양의 사유가 통합적으로 녹아서 그 사상적 기반을 형성하였던 것이다.”(67쪽)
“한울님을 나의 삶의 주체로 모시고 섬기는 것임을 밝혔다. 그것은 외재적인 한울님의 존재를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그에게 의존하는 타력적인 신앙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존엄성과 내면의 거룩함을 회복함으로써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길이다. 이것이 유학과도 달라지고 서학과도 달라진 새로운 동학이다.”(75쪽)
성찰:
①한편으로 내재적 신이 전무한 유학을 견제하고, 다른 한편 외재적 신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서학을 비판하여 중도를 제시하는 동학의 길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②그렇지만 유학을 주자신학(한형조)이라고 말하는 연구자도 있고, 현대신학에서는 인간의 자유와 정의, 그리고 사랑을 앞세운 자율적, 자발적 성화의 길을 주장한다. 물론 자율과 자발에 하느님의 은총(天恩)이 절대 간과되지 않는다.
14.인간과 신을 연결하는 매개(수단, 방편)에 관하여.
세계 종교의 창도자 이후에 모든 종교에 교리, 제도, 교회와 승가, 계율과 법등이 생겼다. 이것들은 인간이 천주를 모시고, 천주가 인간에게 임하는 직통의 길을 방해할 뿐 아니라, 그런 제도의 잘못된 운용과 타락에서 생기는 부작용과 추함이 역사적으로 셀 수 없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런 매개(수단)을 없애는 것이 가능한가? 신을 알고 모시는 그런 직통 채널이 있는가? 신비주의 전통이나 선불교 전통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 정신적, 물질적 매개 없는 직통의 길이 과연 가능한가? 불교에도 방편이 엄청 많다.
기독교에서는 신을 아는 매개가 교회론이다. 가톨릭은 개신교보다 교회론이 강하고 크다. 특히 성사(sacraments)가 중요하다. 성사의 의미 중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물질(매개와 수단)의 신성(투명성)을 말하는 것이다. 개신교 전통에는 교회 없는 퀘이커 운동이나 무교회주의, 오늘날 가나안교회 등이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 이들 안에도 매개(수단, 방편)가 존재한다. 말(언어)과 인간의 가슴도 수단(방편)이다.
늘 그렇듯이 심선생님 특유의 정교한 문체의 글입니다만, 저로서는 질문의 형태로 만들 수 없는 몇몇 어렴풋한 물음이 머물러 있네요. 별 수 없이 읽어봐야겠어요.
9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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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Nambutas Kim 우리 한국처럼 좁은 땅에 세계종교와 민족종교가 공존하는 땅은 없을 것입니다. 종교적 진리는 모두 신묘막측한 깊은 곳이 있기 마련인데, 그 깊이를 어느 정도 다 체감하고 나올 수 있는 지혜는 무엇일까? 이 땅에서만 가능한 황홀한 실험입니다. 그 깊이에서의 만남이 "질문의 형태로 만들 수 없는 몇몇 어렴풋한 물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탈종교사회의 영성, 혹은 종교밖의 영성, 시인 김지하 선생이 찾던 아우라지나 흰 그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8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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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김용휘 교수께서 단톡방에 답글을 주셨다: "감사합니다. 제 책 서평도 아주 멋지게 써 주셔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제 뵐 수 있어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제 책 <우리학문으로서의 동학>은 20년 전에 쓴 책이라 부족함이 많습니다. 저는 어제 강의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예수의 깨달음과 수운의 깨달음이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제가 신학에 조예가 깊지는 않지만, 변론하신 내용은 저도 대략은 알고 있는 내용이고 동의합니다. 특히 20세기 신학은 '내재의 신학'이라 할 정도로 동학과 비슷한 해석을 하고 있다는 것도 얼풋이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기독교의 정통 교리와 오늘날 한국 교회가 보여주는 신앙 형태입니다. 신학적 연구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현장의 모습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한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김경재 목사님 역시 과정신학을 하셨지만, 한국 교회를 쇄신하기 위해 끊임없이 동학을 연구하신 것도, 어쩌면 동학에서 본래 예수 정신을 다시 찾고 싶은 때문이 아니었나 합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
박혜인
온갖 종류의 종교를 섭렵하고 어느날 아버지의 교회에 들어와보니 집어야할게 넘 많네요 지금까지 ᆢ ㅋ
Philo Kalia
박혜인 오 그러시군요. 언제 그리 다 섭렵하셨나요!경이롭고 대단하십니다. 여기가 아버지의 집이거늘 어디로 다시 들어갈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