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불교의 信
大乘起信論을 공부하기 위해 유튜브 강의를 탐색하다가 이중표 교수의 강의가 제일 맘에 들어 듣고 있다. 이중표 교수는 2024년에 한 권으로 된 불경을 출간하면서 기독교인들이 주일에 성경을 손에 들고 교회에 다니는 모습이 보기 좋았는데, 그것이 불교인들을 위해 한 권으로 된 불경을 출간하게 된 이유 중 하나라고 말하기도 했다. 초기 불교 경전인 니까야를 중심으로 결집한 무려 1,448쪽(70,000원)이나 되는 불경이다. 이 교수는 불교 경전 해석 등 많은 학술서적을 지어낸 훌륭한 불교학자로 알고 있다. 그의 강의는 분명하고 미더우며 군더더기가 없었다.
이 교수는 대승에 대한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大乘起信의 信을 설명하기에 앞서 불교의 ‘신’은 기독교의 ‘믿음’과 완전 다르다고 운을 뗀다. 기독교의 ‘믿음’이란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무작정 믿으라고 하는 것이 믿음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 예로 하느님의 창조, 예수의 동정녀 탄생, 부활 등을 거론한다. 이들은 상식적으로, 경험적으로,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니 무조건 믿으라는 말하는 것이 기독교의 믿음의 본질이라고 설명한다.
2,000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일어난 근본주의에서나 말하는 믿음 이해를 기독교의 일반적 믿음으로 설명하는 데 절망에 가까운 무지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낙담이 생겼다. 극우 기독교에서나 이해할 법한 믿음을 신학자들이 설명하는 믿음으로 말하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이중표 교수는 중견 학자가 아닌가. 그렇다면 기독교의 중견 신학자들이 말하는 믿음을 들어 같은 수준에서 비교해야 할 것이다. 이웃 종교의 교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 침묵하거나 아니면 공부하면서 좋은 방향에서 비교해야 하는 것이 학자의 기본 태도가 아닌가.
고대교부 중에 3세기의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Credo quia absurdum)라는 명제를 남겼다. 그러나 말씀의 불합리성은 비합리성이나 맹목적 믿음이 아니라 초논리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이후 5세기의 아우구스티누스는 Credo ut intelligam(알기 위해 믿는다)이라는 명제를, 11세기 안셀무스는 “Fides quaerens intellectum”이란 명제를 남겼다. 그 의미는 "faith seeking understanding" or "faith seeking intelligence”이다. 이 명제를 제목으로 삼은, 이미지에서 보는 신학서는 미국과 한국에서 신학도의 기초 공부를 위한 조직신학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 기신론에 “正信”이란 말이 있듯이, 믿음은 이해(지성)를 찾으며, 합당한 지성을 찾게 될 때 바른 믿음으로 이해되고 체득된다는 것이다.
그리스에서는 참된 지식은 에피스테메(episteme)였고, 믿음(fistis)은 억견으로 취급당했으나, 성경 이후 중세 시기에는 믿음이 지식에 참된 빛을 준다고 생각했다. 믿음이 지식보다 앞선 것이다. 불교에서 무명과 무지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참된 다르마(法)의 길이듯이, 세상의 지식에서 벗어날 때 참된 믿음을 얻게 되고, 참된 믿음은 지식을 얻는 전제가 된다. 지식보다 믿음 상위의 패러다임은 종교개혁기에 ‘믿음//지식’이라는 대등한 지위로 전환되고, 다시 근대기에는 믿음과 지식은 분리되었으나, 신학에서 세계의 지식으로 해명하지 못하는 믿음을 맹목적으로 주장한 적은 없다. 근대기 이후 성서에서의 다양한 비평 방법이라든가 교리 이해를 위한 해석학이 만발했음이 이 사실을 증거한다.
이보다 중요한 사실은 온전한 믿음이란 신자의 믿는 행위(信行: fides qua)와 믿음의 대상(fides quae)인 하느님과의 상호 만남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믿음의 자리는 인간의 주체적 믿는 행위나 일방적 신의 선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믿는 행위 사이에서 일어나는 만남의 사건이다. “나는 하느님을 믿는다”(Credo in Deum). 이 문장이 믿음의 기본적 문장이다. 믿음의 대상은 오로지 하느님이다. 믿음의 대상은 성경이거나 그 어떤 교리적 개념(동정녀 탄생, 부활, 기적...)이거나 신조가 될 수 없다. 신조도 성경도 하느님을 가리키고 드러내는 방편일 뿐이다. 불교에서도 방편은 대단히 중요하다. 문자도 중요하다. 그러나 영원한 법은 不立文字이며 최후의 목적은 信解, 곧 成佛道에 있음이다. 불교에서도 마음의 보는 행위를 통해서만 일체가 만들어짐(一切唯心造)을 알게 되지만, 결국 ‘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전제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주객불이(主客不二)일지언정 주관주의나 객관주의가 아니다. 불교에 기독교가 믿는 하느님의 자리는 없지만, 객체의 차원이 없는 오직 주체로서의 心은 생각할 수 없다. 心은 살아 있는 생명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불교가 무신론이라 하지만 대승의 一心은 이 우주와 천지, 이 인간세계를 그토록 사랑하기 때문에 안으로, 안으로 향하여 함께 거주하려는 하느님의 마음(心)이 들어설 자리를 결코 없애지 않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