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 Ka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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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대학민국학술원우수학술도서, 세 번째 선정)
공부, 배우고 물으면서 생각이 성장하고 성숙하여 자기 나름의 생각을 새롭게 지어나가는 길은 즐겁고 환희에 찬 여정이다. 선현들의 생각을 집대성하여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는 겸사로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동서 철학사는 술이창작(述而創作)의 역사라고 생각한다.
학위논문(『탈형이상학의 하느님_마르틴 하이데거, 빌헬름 바이셰델, 베른하르트 벨테의 신론연구』, 1991년) 후에 육체적 고단함과 이것을 견디고 이겨내고자 하는 정신적 중압감으로부터 조금씩 자유를 선물 받은 분야가 예술이다. 『예술신학』의 제목에 대해 오해를 많이 받았는데, 이제 좀 편안해지니 그런 신학을 하는 게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예술을, 먹고살만하니까 장식처럼 치장하여 사치 부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정말 그 반대인데 말이다. 육체적 피로와 정신적 경직성으로부 해방시킨 분야가 예술이었고 예술적 사유였다. 신학자로서 신학적 주제들을 예술적 사유로 풀고 싶은 것이 일차적 과제였고, 그다음 모든 장르의 예술활동과 작품에 대해 신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이차적 과제였다. 전자가 『예술신학』(2010년)으로, 후자가 『기독교미학의 향연』(2018년)으로 열매를 맺었다. 후에 생각이 떠오른 것이지만 신에 대한 탈형이상학적 이해는 신에 대한 예술적 사유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형상화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탈형이상학이 생각의 방법이라면 예술신학은 결과물이라고 생각했다.
출간 후 잊고 있었는데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선생님의 책이 2011년 대한민국학술원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어 도서관에 널리 보급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책 표지에 기념 스티커까지 붙었다. 도서관에서 가끔 이런 스티커가 붙은 책을 볼 때마다 학술서로서의 무게감을 느끼곤 했는데, 내 책이 이런 호사를 누릴 줄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2. 『공감과 대화의 신학_슐라이어마허의 신학사상 연구』(신앙과지성사)
철학적 신학이나 예술신학은 기독교 신학에서 비주류임에 틀림없다. 주류는 ‘조직신학’이라 불리는 ‘교의학’이다. 나는 스스로 교의학자로 소개하고 있었다. 근대철학이 칸트의 엄밀한 시스템적 사유를 통과했듯이, 근대신학에서는 슐라이어마허가 이러한 역할을 했다. 슐라이어마허는 근대적 사유(인간학적 사유, 신학에서는 성령론적 사유라고 칭하고 싶다)를 통해 신학을 유기적으로 재구성한 최초의 사상가이다. 슐라이어마허의 체계는 기계적 체계가 아니라 유기적 체계이며 네크워크적 체계이다.
슐라이어마허 이전까지 교의학은 각론(신론, 창조론, 인간론, 죄론, 그리스도론, 성령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의 나열을 모아놓은 것이었다. 그러나 슐라이어마허는 각론을 유기적으로 재구성한다. 말하자면 10층에 오르기 위해 3층, 5층, 7층을 통과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각 층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수자의 순서를 밟지 않고도, 직방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사유하고 방들의 창문을 열어 직통으로 통할 수 있게끔 재구성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각각의 각론이 다른 각론들을 포함하게 구성하는 것이다. 나 안에서 타자를 느끼고 타자 안에서 나를 찾을 수 있도록 구성하는 것이다. 하나 속에 전체가 있고 전체 속에 하나가 있게 하는 사유체계이다. 의상대사 법성게의 다음 구절이 슐라이어마허 신학의 유기적 전체성을 가장 적합하게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하나속에 모두있고, 여럿속에 하나있어
일중일체다중일 일즉일체다즉일 하나가 모두이고 모두가 하나이네.
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 한티끌 가운데에 시방세계 담겨있고
일미진중함시방 일체진중역여시 낱낱의 티끌마다 시방세계 들어있네.
신학을 공부하려면 반듯이 슐라이허마허의 『신앙론』을 통과해야 한다는 지도교수의 마지막 당부를 늘 마음에 간직했지만, 1,000쪽 가까운 『신앙론』을 꼼꼼히 읽고 이해하여 그 뜻이 무엇인지 다시 서술하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다. 시간강사 시절에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지속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긴 호흡이 필요한 데 계속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2001년 학교에 들어간 후 정신을 차리고 2006년부터 2년마다 4차례 대학원 세미나를 열면서 연구를 쌓아나갔고, 미진함을 느끼면서도 2015년 『공감과 대화의 신학』이란 이름으로 출간했다. ‘공감과 대화’에서 ‘공감’은 종교론과 신앙론의 감정을 살린 것이고, ‘대화’는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의 의미를 살린 제목이다. 계몽주의적 이성의 자리에 감정이 앉지만, 감정의 변덕스러움을 조정하기 위해 해석학, 즉 추상적 사유가 아니라 언어적 사유가 들어온다. 1,000쪽 가까운 책이 되었다.
슐라이어마허의 유기적 사유는 게르하르트 에벨링의 3권짜리 『기독교 신앙의 교의학』에서 더욱 세련되게 전개된다. 에벨링의 완벽성은 슐라이어마허보다 뛰어나다. 칼 바르트도 후기의 작품인 4권의 화해론(약 2,500쪽)에서 시스템을 전개한다. 걸작들을 보고 있으면 정말 사유의 체계가 아름답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모차르트의 음악만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이런 신학적 걸작 속에서 사유의 황홀경에 빠져든다.
2016년 이 책도 대한민국학술원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었다.
두 번째 책까지 선정되고나니, 퇴직 전에 세 번째 저술이 선정되었으면 좋겠다는 욕망이 꾸물거리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축구선수의 헤트트릭인가 하는 것을 달성해 보자는 욕심, 그전까지 정말 그런 욕망이 일지 않았다. 그 욕망은 실현되지 못했고, 세월은 흐르고 흘러 2023년 2월 퇴직했다.
3. 『슐라이어마허, 낭만주의 철학과 경건의 신학』(동연)
이 책이 2025년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었다. 학회원들과의 협력의 산물인 공저를 통해 세 번째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었으니 여간 기쁜 것이 아니다. 예상과 기대밖에서 홀연히 선물이 주어질 때 정말 기쁘다.
나는 “경건의 향연”이라는 제목으로 42쪽의 글을 기고했는데, ‘경건’은 종교개혁 이후 16세기부터 발아하여 18, 19세기에 화개한 기독교 신앙의 생동성을 찾고 회복하기 위한 개념이다. 경건은 제도 교회밖 작은 교회공동체, 교회밖 신앙운동을 이끈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경건은 ‘경건한체하기’가 절대 아니다. 경건은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가 6:7)의 말씀을 실제 담은 개념이다. 오늘날 ‘영성’에 해당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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