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저널 - ‘서재필 신화’ 왜곡된 진실들
‘서재필 신화’ 왜곡된 진실들
주진오 교수 특별 기고 / “업적 재평가해야”
주진우 교수 ㅣ | 승인 1994.04.28
서재필은 구한말의 대표적 개화사상가이며 <독립신문>을 창간한 언론인으로서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평가되어 왔다. 작년 7월 한국신문협회와 국가보훈처가 서재필 유해 봉환 사업을 확정한 후 그의 유해는 4월4일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와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이와 더불어 역사학계와 언론학회에서는 서재필 재조명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특히 4월2일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국언론학회 언론사연구회 세미나에서는 서재필과 <독립신문>에 관한 쟁점들이 쏟아져 나와 눈길을 끌었다. 정진석 교수 (한국외국어대)는 이 날 ‘서재필과 <독립신문>에 관한 논쟁점들’이라는 발제논문을 통해 서재필에 대한 긍정적 시각과 비판적 시각을 대비하여 정리한 바 있다.
그는 서재필을 한국의 볼테르라고 한 대전대 이광린 총장(《한국의 개화사상 연구》일조각, 1979), 서재필의 독립형회 창설과 독립문 건립, 배재학당 강의를 강조한 오세응 의원(《서재필의 개혁운동과 오늘의 과제》고려원. 1993), 서재필의 주권재민의식 계몽과 언론 발달에의 획기적 기여, 과감한 한글 전용을 조명한 서울대 신용하 교수 (《독립협회 연구》일조각. 1976)등의 연구서를 각주로 달아 긍정적인 평가 내용을 정리했다.
또 서재필의 친일적인 행적과 미국인 행세를 비판한 경상대 여증동 교수 (《고종시대 독립신문》형설출판사, 1992), 서재필이 중추원 고문으로 매월 3백원의 급료를 조선 정부에서 받았으므로 <독립신문>은 순수한 민간지가 아니라고 평가한 부산대 채 백 교수(《독립신문의 성격에 관한 일연구》한울. 1992) 등의 연구서를 각주로 달아 비판적 논제를 뒷받침했다.
“서재필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린다”는 정교수이 말처럼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작업은 학계의 쟁점 가운데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시사저널》이 서재필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인 역사학자 주진오 교수 (상명여대 · 한국 근대사)의 글을 싣는 까닭은 오직 적극적이고 공개적인 사실 검증을 통해 서재필에 관한 논의가 발전적으로 전개되기를 바라는 데 있다. 아울러 주진오 교수의 글에 대해 반론할 지면은 언제나 열려 있음을 밝힌자.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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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린다”는 정교수이 말처럼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작업은 학계의 쟁점 가운데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시사저널》이 서재필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인 역사학자 주진오 교수 (상명여대 · 한국 근대사)의 글을 싣는 까닭은 오직 적극적이고 공개적인 사실 검증을 통해 서재필에 관한 논의가 발전적으로 전개되기를 바라는 데 있다. 아울러 주진오 교수의 글에 대해 반론할 지면은 언제나 열려 있음을 밝힌자.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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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쓰는 것은 누구인가. 이것은 최근 필자가 심각하게 생각해 보는 주제이다. 그동안 서재필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필자를 비롯하여 학계 일부에서 제기된 바 있었다(필자의 ‘유명인사 회고록 왜곡 심하다-서재필 박사 자서전’ 《역사비평》1991년 가을호, ‘순국선열 유해 원칙 따라 송환토록’ <한겨레신문>1993. 7. 30 참조).
그러나 이러한 문제 제기에 대해서 정부나 대부분의 언론은 전혀 검증해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동안 필자가 제기해온 것은 단지 시각차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평가’차원만이 아니라 ‘사실’의 차원에서였다. 왜 엄연히 존재하는 사실을 거부하거나 묵살하는가.
서재필 신화의 한 원인은 서재필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에 대한 1차 사료를 많이 수집한 방선주 박사(한림대 교수)도 ‘서재필은 과거를 회상할 때 무책임할 정도로 시일을 혼동하였고, 냉엄한 이국 사회에서의 처신상 그때그때 적당히 호도하는 습성이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따라서 그의 회고는 학계의 철저한 검증을 거쳐야만 역사적 사실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선배 학자들 가운데는 이러한 노력 없이 그의 회고에 전적으로 의존하거나, 어떤 경우 그 자신조차 한 적이 없는 말까지 만들어서 신화 만들기에 앞장서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 그를 둘러싼 신화를 사실에 입각하여 차례차례 벗겨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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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은 1863년 논산 출신이다.
서재필이 1864년 11월생이라고 한 최근의 보도는 잘못이다. 그는 음력 1863년 11월 28일생, 양력으로는 1864년 1월7일생이다. 그의 고향은 충남 논산이다. 최근 그의 생가라고 해서 각광을 받고 있는 전남 보성은 그의 외가가 있던 곳이다. 물론 그의 어머니인 성주 이씨가 친정에 가서 그를 낳았으므로 보성이 그의 생가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가 일곱살 때까지 성장했다고 하는 보도는 사실과 다르다. 그가 서울로 가기까지 성장한 곳은 논산이었고, 그의 아버지와 첫 부인 광산 김씨의 묘소가 있는 곳도 논산이다.
서재필은 1890년 이후 자신을 서재필이라 부르지 않았다.
서재필이 서재필로 산 기간은 그의 생애에서 3분의 1도 안 되는 26년 간에 불과하다. 그가 미국 시민권을 얻어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 된 것은 1890년 6월이었으며, 그후 그는 자기를 서재필이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그가 시민권을 얻을 때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서광범이 미국 시민권을 취득할 때 법원에서 행한 선서에서 ‘이후 조선국왕에 대한 충성을 완전히 그리고 절대적으로 포기한다’고 하였던 것과 같았을 것이다.
그가 의사 면허를 취득한 것은 1893년 가을이었으며, 1894년 6월에 미국인 뮤리엘 암스트롱과 재혼하였다. 1893년 8월14일 워싱턴으로 서재필을 방문했던 윤치호는, 그가 우리말을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고 일기에 적었다. 일본이 조선 정부에 권고하여 추진하였던 갑신정변 망명자 귀환 사업에 호응하지 않았던 이는 서재필 한 사람뿐이었다. 그러다가 정부의 집요한 요청에 따라 1895년 12월 25일에 귀국하였다. 물론 그의 여권은 미국 정부가 발행한 것이었고 이름 역시 필립 제이슨이었다.
서재필은 귀국후 철저하게 미국인 제이슨으로 행세하였다. 또한 미국인이기 때문에 조선 정부의 정식 관리가 아닌, 고문관이 되어 최고의 봉급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그는 자기 이름을 한글로 표기하는 경우에도 제손박사 또는 피제선이라고 하였다. 이는 그가 죽을 때까지 마찬가지였다. 이번에 텔레비전을 유심히 본 독자들은 알겠지만 그의 묘비명에도 역시 필립 제이슨으로 적혀 있다.
서재필은 박사가 아니다
그가 다닌 대학은 워싱턴의 컬럼비안 대학교(현 조지 워싱턴 대학교의 전신) 부설 코크란 대학이다. 이 대학은 워싱턴의 고졸 공무원들을 위해 세운 야간 대학으로 컬럼비안 대학교와는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다. 그는 1888년 코크란 대학에 입학하여 자연과학을 주로 공부한 후, 다음해에 역시 야간 3년제 외과대학에 등록하였다.
그는 3년 후인 1892년 의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1년 간의 인턴 생활을 거쳐 1893년 의사 면허를 취득하였다. 따라서 그는 이 때부터 닥터 필립 제이슨이 되었다. 그러나 이 때의 닥터는 박사가 아니라 의사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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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 창간과 독립문 건립은 서재필의 개인 업적이 아니다
실제로 먼저 신문 발간 구상을 한 것은 유길준을 비롯한 김홍집 정권이었다.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 유길준 정권은 무너졌으나 새로 등장한 박정양 · 이완용 정권은 친미파 관료들이 주도하였다.
따라서 미국인인 서재필은 신문 발간 작업을 오히려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었다. 조선 정부는 <독립신문>에 필요한 모든 비용과 편의를 아낌없이 배려하였다. 따라서 <독립신문> 발간은 개혁파 관료들의 개혁 이념을 국민에게 계몽하기 위한 수단으로 조선 정부가 추진한 것이었고, 서재필은 이를 맡은 실무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독립신문> 소유권을 일본에 팔아 넘길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 때 일본 공사측은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였고 구두 계약까지 맺기에 이르렀다. 서재필은 출국 직전 일본 공사관에 구두 계약을 이행하라고 요구했으나 무산되고 말았다(‘독립신문 매수의 건’ 주한 일본공사관 기록. 1898년 1월 15일). 만일 일본측이 약속을 지켰다면 <독립신문>은 일본 정부 소유가 되었을 것이다.
독립문 건립과 관련한 사실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이를 주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영은문은 그가 헌 것이 아니라 이미 청일전쟁 당시 헐려 있었던 상태였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고 하여야 정확하다. 서재필은 자서전 등을 통해 여기에 들어간 비용을 모두 자기가 출자하였다고 회고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당시 왕실은 물론이고 각계 각층의 모금을 통해 충당하였다는 것이 당시 자료를 통해서 확인된다.
서재필은 추방된 것이 아니었다
1897년에 들어와서 러시아의 적극적인 간섭정책과 대한제국 수립을 통한 황제권 강화는 서재필과의 대립을 야기하였다. 이때부터 정부는 그를 중추원 고문에서 해고하려는 노력을 전개하였다. 그러자 서재필은 남은 계약기간의 봉급을 모두 지불하면 해약하고 출국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결국 1898년 4월 남은 7년 10개월분 봉급에다가 두달치 봉급에 해당하는 여비까지 보태어 받아냈다. 이 때 <독립신문> 창간 비용은 공제되었다. 빈약한 재정에 시달리고 있는 조국에 그렇게 막대한 돈을 강요하였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중추원 고문에서 해고됐을 뿐이라는 점이다. 즉 서재필이 고국에서 강제로 추방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욱이 당시 대한제국 정부는 미국인을 추방할 힘을 갖고 있지 못했다. 이 점은 그가 ‘나를 추방할 수 있는 것은 미국 정부뿐이며 미국정부가 그런 일을 할 리 없다’(《The Independent》1898. 1. 22)고 분명히 밝힌 바 있다.
따라서 그가 미국으로 돌아간 것은 추방이 아니라 자진 귀환일 뿐이다. 이는 그가 돈을 받고 난 다음 ‘만일 봉급을 2배로 올려준다면 남아 있을 생각도 있다’(《윤치호 일기》1898. 4. 22)고 말한 기록에도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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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이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느라 무일푼이 된 것은 아니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 의사가 아닌 문방구상인, 인쇄업자로 변신하였다. 1904년부터 사업을 시작해 그 이듬해 필라델피아로 자리를 옮겼으며 1914년부터는 단독으로 필립 제이슨 상회(Phllip Jaisohn & Company)를 세워 1924년까지 운영하였다. 물론 이 사업에 들어간 자금은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받아낸 돈이었다. 한때 필라델피아 중심가에 본점을 두고 두 곳에 분점을 운영할 만큼 번창하였다고 한다.
서재필은 조국에 다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18년 월신 미국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뒤부터였다. 더욱이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재미 한인들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서재필도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필라델피아 동북부 유학생을 중심으로 한인연합대회를 주도하고 의장직을 수행하였다.
그 후 서재필은 1921년까지 조선의 식민지 현실을 미국인들에게 알리는 일에 몰두하였다. 미국이 일본에게 압력을 가하여 조선의 독립을 이룩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그의 활동이 얼마나 의미를 갖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어쨌든 이 때의 공로는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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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차원을 벗어나 서재필이 전 재산을 이 활동에 쏟아 부어 무일푼이 되었다는 신화가 만들어졌다는 데 문제가 있다. 물론 이런 신화는 서재필 자신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었다. 당시 활동에 필요한 홍보책자들은 모두 그의 사업체에서 인쇄하였으나 그는 꼬박꼬박 인쇄비를 받았다. 오히려 당시의 기록을 통해 재미 동포들이 어려운 생활 속에서 헌신적인 모금 운동을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서재필이 주도하는 홍보사업에 만도 모금액 중 1만2천9백69달러가 지출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따라서 이 시기 활동 자금을 전적으로 자기가 댔다는 서재필의 회고는 과장이다.
더욱이 이해가 안가는 것은 그가 활동을 포기한 것은 1922년 2월인데 그의 필립 제이슨 상회는 1924년까지 영업을 계속하고 있었던 점이다. 전재산을 날렸다는 사람이 몇년후까지 사업체를 소유할 수 있는 것인지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최근의 한 연구는 1921년부터 미국을 강타한 대공황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고 있다(‘서재필의 독립운동연구’ 홍선표, 《한국독립운동사연구》7집. 1993).
그는 자기가 미국인임을 늘 강조하였다
그는 미국인으로서 <독립신문>을 통해 미국의 이미지를 절대적으로 미화하였다. 심지어 미국의 경인철도 부설권, 운산금광 채굴권 침탈을 환영하였다. ‘속마음을 의심할 필요가 없는 나라와 맺은 것이며 지금까지 어느 열강과 맺은 조약보다 유리한 계약’ (《The Independent》1896. 4. 16)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 미국의 필리핀 · 하와이 · 쿠바 점령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지지를 표시하였다. 1898년 당시 그의 출국을 만류하는 독립협회 회원들에게 보낸 답장에는 조선 정부를 ‘貴 政府’라 부르고 있다. (<독립신문> 1898.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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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조선인들에게 ‘계몽’한 내용 가운데에는 완전히 미국식 풍습을 모범으로 하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예를 들면, ‘남의 집에 갈 때 파 · 마늘을 먹고 가는 것이 아니고, 남 앞으로 지나갈 때는 용서해 달라고 해야 한다’ (<독립신문> 1896. 11. 14). ‘조선 사람들은 김치와 밥을 먹지 않고 소고기와 브레드를 먹게 되어야 한다’ (<독립신문> 1896. 10. 10)는 것이 있다.
1919년 한인연합대회 의사록에서도 그의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여전히 강조되고 있었다. 회의 벽두에 애국가가 아닌 미국 국가를 부르게 하고, 영어로 회의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의장 취임사에서도 ‘만일 대회 진행중에 미국을 비방하는 언동이 있게 되면 사임하겠다’는 것을 못박고 있었다.
서재필은 스스로 미국에 묻히기 원했다
광복 이후 미군정은 김규식의 건의를 받아 들여 83세의 고령인 그를 고문으로 임명하였다. 1947년 7월에 도착한 그는 이때에도 자기를 필립 제이슨이라 하였고 모든 발언은 영어로 했다. 그리고 자신의 부모 묘소를 한번도 참배하지 않는 등 한국인으로서 동질성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헌국회를 그를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그의 미국 국적이 문제였다. 그는 대통령 추대 운동자들로부터 미국 국적 포기를 요청받았으나 끝내 거절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1951년 1월 필라델피아에서 사망하였다.
그가 미국 땅에 묻혀 있는 것은 그 스스로가 선택한 일이다. 그에게는 여러 차례 한국 국적을 회복하고 여생을 고국에서 보낼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번번이 거부하였고, 자기가 선택한 미국 시민으로 살다가 죽었다. 누구나 자기가 죽어서 묻힐 자리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후대 사람들이 마음대로 옮겨서는 안되며 이는 사실상 고인의 뜻에도 위배되는 일임이 분명하다.
그밖에 사소하지만 틀린 사실들
첫째, 그는 18세 때 장원급제한 것이 아니다. 그는 20세인 1882년 과거에 합격하였으며, 최연소 합격자이기는 하지만 丙科 3등으로 급제하였다. 장원급제는 甲科 1등을 말하는 것이다.
둘째, 그가 다녔다는 도야마(?山) 육군학교는 일본 육사의 전신이 아니다. 이 학교는 하사관학교로서 사관학교와는 관계가 없다.
셋째, 이와 아울러 신문 대담에서는 서재필이 의대생 시절 암스트롱양의 가정교사를 하다가 결혼했다고 하면서, 장인은 미국 연방 정부의 초대 체신부 장관이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가정교사를 했다는 근거는 제시된 바 없었다. 그리고 아내의 아버지인 조지 암스트롱은 미국 철도우편국 창설자이자 초대 국장이었을 뿐이며 서재필이 암스트롱양과 결혼하기 전인 1871년에 죽었다. 결혼 당시에는 신부의 어머니가 화이트라는 사람과 재혼한 상태였다.
그러니 장인인 문방구를 처분하겠다는 서재필에게 반발하여 서재필이 이혼하겠다고 하자 암스트롱 가문에 이혼이란 없다고 꾸짖었다는 것도 성립될 수 없다. 이혼 요구설 뿐 아니라 죽을 때까지 한 집에서 살았지만 별거상태였다는 것도 어떤 근거를 가지고 한 말인지 궁금하다.
넷째, 서재필이 의대에서 수석을 했으나 황인종이라는 이유로 백인에게 밀려 차석 졸업을 했다는 주장은 어떤 자료에 근거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그가 병리학 강사로 발령을 받았으나 학생들에게 보이콧 당했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다섯째, 그가 다시 들어간 의대는 존스 홉킨스 대학이 아니라 펜실베니아 대학이며 특별 연구생이었다.
여섯째, 서재필이 6·25가 일어나자 자진해서 김일성에 반대하는 방송을 했으며, 그때부터 북한 역사책에서 그의 이름이 사라졌다는 것도 근거가 없는 말이다.
서재필은 우리와 같은 핏줄을 나누었을지 언정 한국인이 아니라 한국계 미국인 필립 제이슨이었다. 그가 미국 정부에 충성을 맹세한 후 고국 땅을 밟은 것은 다 합해서 5년을 넘지 못한다. 그것도 두번 다 미국에서보다 훨씬 넉넉한 봉급과 지위를 주었을 때에 한해서였다. 그때마다 우리 국민들은 그를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여기고 환영하였으며 이 땅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두 번 다 이를 뿌리치고 자기가 선택한 나라 미국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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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안전지대였던 미국에서 미국 시민으로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경력에 커다란 오점을 남기지 않을 수 있었다. 반면에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은 가난에 시달리고 체포와 고문의 위협에 시달리면서 고통스럽게 투쟁하였다. 그 가운데에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안타깝게도 자신의 오랜 투쟁 경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든 경우도 많았다. 우리는 그들을 쉽게 매도하고 만다. 우리는 이러한 역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사실 서재필은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상황 판단력과 현실 적응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뛰어나다. 그 결과 미국으로 건너간 다른 초기 이주민들이 미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주변인으로 살아간 반면에 그만은 중심부로 살아간 반면에 그만은 중심부로 진입할 수 있었다. 이 점에서는 그는 아메리칸 드림의 표상이며 ‘세계인’의 선구였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재미동포 사회나 의사 · 언론인 · 동창회 · 문중 등이 그를 기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거기에 필자가 개입하여 논란을 벌이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국가적인 사업으로 유해 송환 사업을 벌이고 신화를 만들어 그를 찬양하는 것은 전적으로 별개 문제이다. 서재필은 결코 우리가 후손들에게 귀감이라고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