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30

백승종 세종과· 권력 기구로 진화한 집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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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권력 기구로 진화한 집현전

세월이 흐를수록 세종은 집현전에 더더욱 큰 권한을 주었다. 학사들이 현실 정치에 깊숙이 간여하게 허락한 것이었다. 왕은 그들을 언관(言官)으로 대우해, 대간(사헌부, 사간원)과 더불어 조정의 잘잘못을 따지게 하였다. 집현전은 이제 학술기관인 동시에 권력기관으로 격상했다.
왕은 정치 권력을 여러 기관이 나눠 갖기를 바랐고, 그들이 서로 비판하고 견제하는 것을 정치적 이상으로 여겼다. 다분히 성리학적 발상이었다. 그로 말미암아서 학사들은 언관으로서 왕의 잘못도 지적하고 대신의 월권과 독주를 막기에 힘썼다.
세종 28년(1446) 겨울, 집현전 직제학 이계전 등은 사소한 일로 궁지에 몰린 대간을 두둔했다. 집현전 학사 10여 명이 집단으로 상소하기를, 대간의 처사가 비록 잘못되었을지라도 엄벌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언로가 막히면 나중에 더욱더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세종 28년 10월 10일). 왕은 이계전의 발언을 수용해 대간을 너그러이 용서하였다.
돌이켜보면 재위 10년쯤부터 세종은 제도 개혁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개혁의 후유증과 부작용을 심각하게 염려하였다. 재위 말기가 되면 왕은 매우 신중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그런 상태에서 왕은 집현전에 정책을 심의할 권한까지 주어, 새로운 제도와 정책의 문제점을 엄격히 분석 검토하게 하였다. 왕의 태도가 변화하자 집현전의 역할도 완전히 바뀌었다. 학사들이 제도 개혁을 반대하는 사례가 더욱더 많아졌다.
의정부가 사창법(춘궁기 빈민에게 곡식을 대여하는 법)을 세우려 했을 때도 그들은 강력히 반대하였다(세종 26년 7월 14일). 그 당시 의정부는 소금전매법(‘염법’)도 추진하였고, 왕 역시 그 문제에는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집현전은 단호히 이를 거부했다. 국가에서 소금을 제조 판매하면 백성의 생계가 어려워진다는 것이 주요한 이유였다. 그때도 왕은 집현전의 주장을 받아들여 소금전매법을 중도 폐기하였다(세종 27년 8월 27일). 이밖에도, 왕이 오랫동안 추진한 종이돈(‘저화’)의 부활도 집현전의 반대로 중단되었다(세종 27년 10월 11일).
집현전의 기능과 역할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갈수록 변화해, 마침내 세종의 재위 말년에는 집현전 학사들이 자신들을 길러준 왕과 대립하는 모습이 연출되었다. 세종으로서는 정말 어이없는 사태가 오고야 만 것이다.
세종 28년(1446) 봄, 왕은 작고한 왕비의 넋을 달래려고 불경을 간행하려고 했다. 그러자 집현전은 대간과 함께 반발하였다. 불교의 해독을 잘 아는 왕이 왜, 불경을 간행하느냐며 그들은 저항했다, 하지만 왕은 자신의 의지대로 불경 간행을 추진하였다. (세종 28년 3월 28일)
이태 뒤에는 더더욱 심각한 충돌이 일어났다. 세종이 대궐 안에 불당을 설치할 뜻을 밝히자 집현전 부제학 정창손 등이 거세게 반대했다. 대신과 대간은 물론 승정원까지도 합세했다, 성균관 유생들은 학업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정치적으로 큰 소용돌이가 일어났던 것인도 그때 세종은 물러서지 않았다.(세종 30년 7월 23일)
이 문제는 과연 어떻게 해결되었을까. 개혁정치가 조광조는 중종의 어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종은 정승 황희를 불러 이 문제를 상의하였습니다. 그러자 황희가 말하였습니다. ‘신이 그들을 다시 불러오겠습니다!’ 그러고는 즉시 학사들의 집을 일일이 방문하여 직무에 복귀하기를 종용하였습니다.”(중종 13년 2월 2일)
만약 세종 임금도 아니고 황희 정승도 아니었다면 어떠했을까. 왕은 자신이 아끼던 신하들이 배신했다고 분통을 터뜨렸을 것이요, 정승도 허리를 굽혀 학사들의 복귀를 간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조광조의 견해였다.
국시(國是)가 성리학이었던 만큼 신하들이 반대할 것은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으나, 세종으로서는 왕실의 오랜 전통이자 자신의 신앙이기도 했을 불교를 포기하기 어려웠다. 세종은 공식적으로 불교를 신앙한다고 인정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불교관련 행사를 여러 번 개최한 것으로 보아 왕이 불교 신자였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아무튼 내불당 사건은 황희라는 믿음직한 정승이 있어 다행히 큰 무리 없이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이태 뒤 세종은 세상을 등졌고, 이후 30여년 동안에 조선이란 나라를 좌우한 것은 집현전 출신들이었다. 이름난 정승만도 정인지를 비롯하여 정창손, 신숙주, 최항과 이사철 등 여럿이었다. 유명한 사육신도 무관 유응부를 제외하면 모두 학사들이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우리는 한 가지 역사적 사실에 주목하여야 한다. 세종 28년, 이계전이 현실 정치에 개입한 이후 집현전 학사들은 대관과 한 무리가 되어 갈수록 현실 정치에 깊숙이 끼어들었다. 이로써 언관의 활동이 더욱 활발해진 점은 역사적으로 보아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하지만, 세종이 집현전을 설치한 본래 의도에서는 동떨어진 폐단이었다. 그때 왕자로서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던 훗날의 세조는 집현전의 독주를 심각하게 염려하였다. 훗날 세조는 왕위에 오르자 집현전 세력의 중심인 박팽년, 하위지, 성삼문, 이개, 유성원을 이른바 단종 복위 사건으로 엄하게 다스렸다. 아울러 권력기관이 되고만 집현전을 영구히 폐지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나라의 인재를 길러야한다는 요구가 빗발쳐, 성종 때가 되면 집현전의 후신인 홍문관이 설치되었다. 그런데 홍문관은 처음부터 언관으로 기능하면서 예전처럼 국책 연구기관 또는 자문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홍문관은 처음부터 언관의 하나가 되어 이른바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이후 조선에서는 과거의 집현전처럼 국가의 개혁을 이끌고, 독창적인 학문적 연구를 담당하는 기관이 출현하지 못하였다. 조선왕조가 서서히 쇠망한 이유가 그 점에 있었다.
중종 때 개혁정치가 조광조는 세종 시대의 부활을 꿈꾸며 홍문관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그는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현실에 구현하고 싶은 열망 때문에 현실 정치에 매달렸다. 이런 사실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출처: 백승종, <<세종의 선택>>(사우, 2021)
사족: 문명사회에서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없을 수가 없는 것이나, 이데올로기에 집착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종이 훌륭한 까닭은요, 이것은 물론 제 생각입니다. 왕은 성리학 중심의 문명화를 꿈꾸었으나 그 자신이 모순적이었어요.
예컨대 개인적으로 불교 믿으면서 정치는 성리학적으로 되기를 꿈꾸었어요. 자기 자신은 며느리들을 마음대로 쫓아내면서도 신하들의 이혼은 끝끝내 반대하고 죄악시하였어요. 자신은 아내를 존중하였으나 사회적으로는 여성의 지위를 부정하였습니다. 청렴을 강조하였으나 왕의 주변에는 협잡꾼들이 들끓었어요.
바로 이러한 모순이 세종의 시대를 다채롭고 활기 넘치는 한 시대로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일관성도 중요하지만 너무 한쪽으로 몰아붙이면 도리어 세상이 경색되고, 창의성이 사라집니다. 조선 후기는 성리학 일색이 되어 모두가 경쟁적으로 도덕과 인륜이란 이념에 충실하고자 노력하였고, 그 결과는 그다지 좋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지금 왜, 하느냐고요? 수도권 집값 문제도 검찰개혁도 경제성장 또는 녹색 전환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소의 여유를 가지고 대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일을 계획적으로 한꺼번에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를 바로잡으면 적어도 또 다른 두 개가 틀어질 수 있습니다. 조급하면 일을 망칩니다. 제 부족한 생각은 그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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