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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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중 봉소(賊中封疏) / 적중 봉소(賊中封疏)

적중 봉소(賊中封疏)
[DCI]ITKC_BT_1380A_0010_010_0010_2003_002_XML DCI복사 URL복사
선무랑(宣務郞) 전 수형조좌랑(守刑曹佐郞) 신(臣) 강항(姜沆)은 목욕재계하고 백 번 절하여 서(西)로 향해 통곡하면서, 삼가 정륜입극 성덕 홍렬대왕 주상 전하(正倫立極盛德弘烈大王主上殿下)께 상언(上言)하옵니다.
생각하옵건대, 소신(小臣)이 지난 정유년(1597, 선조 30)에 분호조(分戶曹) 참판(參判) 이광정(李光庭)의 낭청(郞廳)으로서 총병(總兵) 양호(楊鎬)의 군량 운반을 호남(湖南)에서 독려하였습니다. 군량이 수집되었으나, 적의 선봉이 이미 남원(南原)을 침범했고 광정 또한 서울에 간 상황에서 신은 순찰사(巡察使)의 종사관(從事官) 김상준(金尙寯)과 더불어 여러 고을에 격서(檄書)를 보내어 의병(義兵)을 모집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생각하는 선비로서 모인 사람이 겨우 수백 명이었을 뿐더러, 자기 가속들을 고려하고 염려해서 곧 해산하고 말았습니다.
신이 어쩔 수 없이 배에다 아비ㆍ형ㆍ아우ㆍ처자를 싣고 서해를 따라 서쪽으로 올라갈 계획을 했었는데, 사공이 여의치 못하여 배를 운행하지 못하고 바닷가에서 머뭇거리다가 갑자기 적의 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신이 벗어나지 못할 것을 깨닫고서 나머지 가속(家屬)과 함께 바닷물 속으로 떨어졌으나, 해안의 수심이 얕아 모두 왜놈들에게 잡히게 되고, 오직 신의 아비만이 혼자 다른 배를 잡아타 모면했을 뿐, 분호조(分戶曹) 곡식을 모집한 공명첩(空名帖) 수백 통이 모두 물 속에 침몰되었습니다. 직무 수행을 형편없이 하여 위로 조정을 욕되게 하였으니, 더욱 죄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적은 신이 사족(士族)임을 알고서 신과 형ㆍ아우를 일제히 선루(船樓)에 결박하고, 배를 돌려 무안현(務安縣)의 한 바다 모퉁이로 끌고 갔습니다. 그곳에는 적선 6백, 7백 척이 두어 리(里)에 걸쳐 가득차 있었고, 우리나라 남녀가 왜놈과 더불어 거의 반반씩 되었는데 이 배 저 배에서 부르짖어 우는 소리가 바다와 산을 진동하였습니다. 순천 좌수영(順天左水營)에 당도하자, 적장(賊將) 좌도수(佐渡守)란 자가 신과 신의 형 준(濬)ㆍ환(渙)ㆍ처부(妻父) 김봉(金琫) 및 그 가속(家屬)들을 한 척의 배에 실어 왜국으로 압송하였습니다.
그 배가 순천을 떠나 일주야(一晝夜) 만에 안골포(安骨浦)에 당도하였으며, 이튿날 저물 무렵에 대마도(對馬島)에 당도하였는데 풍우를 만나 이틀간을 머물렀습니다. 또 이튿날 저물 무렵에 일기도(壹岐島)에 당도하고, 또 이튿날 저물 무렵에 비전주(肥前州)에 당도하고, 또 이튿날 저물 무렵에 장문주(長門州)의 하관(下關)에 당도하고, 또 이튿날 저물 무렵에 주방주(周防州)의 상관(上關)에 당도하였는데, 이른바 적간관(赤間關)이라는 곳이었습니다. 또 이튿날 저물 무렵에 이예주(伊豫州)의 대진현(大津縣)에 당도하여 드디어 유치되었는데, 좌도(佐渡)란 자의 사읍(私邑) 세 성(城) 중에 대진이 그 하나였습니다.
이곳에 당도해 보니 우리나라 남자와 여자로 전후에 사로잡혀 온 사람이 무려 천여 명인데, 새로 붙잡혀 온 사람은 밤낮으로 마을 거리에서 떼지어 울고 있으며, 먼저 온 사람은 반쯤 왜 사람에 귀화하여 돌아갈 생각이 이미 없어져 버렸습니다. 신이 넌지시 탈출하여 서쪽으로 달아나자고 깨우쳐 보았으나 호응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듬해 4월 그믐에, 서울 죽사(竹肆)에서 살다가 임진년에 사로잡혀 온 사람이 왜의 서울로부터 이예주(伊豫州)로 도망해 왔는데, 왜말을 잘하기에 신이 서쪽으로 돌아갈 뜻을 비쳤더니, 그 사람이 드디어 함께 계획을 정했습니다. 대개 신이 왜말을 전혀 몰라서 통역을 대동하지 아니하면 촌보도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침내 5월 25일에 밤을 틈타 서쪽으로 탈출하여 사흘을 가다가 몰래 바닷가 대밭 속에서 쉬고 있노라니, 나이 60 남짓 되어 보이는 왜승(倭僧) 하나가 폭포에서 몸을 씻고 바윗돌에서 졸고 있었습니다. 통역이, 가만히 신등이 여기까지 이르게 된 내막을 고하자 그 중이 슬피 여기며 몇 번을 탄식하더니 신 등을 풍후(豐後)까지 배로 건너 주겠다고 허락하였습니다. 신 등이 반가워 중을 따라 내려오기를 채 10보(步)도 못하여 문득 좌도(佐渡)의 부곡(部曲) 도병(道兵)이란 자를 만났는데, 왜졸(倭卒)을 거느리고 갑자기 왔으니, 신이 도망자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대진성(大津城)으로 강제 송환되었는데, 이후부터는 단속이 더욱 엄하였습니다.
금산(金山) 출석사(出石寺)의 중 호인(好仁)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자못 문자(文字)를 해독하였습니다. 신을 보고 슬프게 여겨 예우가 남보다 더했으며, 따라서 신에게 그 나라 제판(題判 관청에서 백성이 올린 소장(訴狀)에 쓰는 판결)을 보여 주었는데, 방여(方輿)와 직관(職官)을 빠짐없이 다 기록한 것이기에 신이 곧 등사하였습니다. 또 좌도의 아비 백운(白雲)이 매우 상세한 그 나라 여도(輿圖)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듣고 통역을 시켜 모사해 내고, 다시 눈으로 본 현실의 형세를 우리나라의 방어책과 비교해 보았으며, 간혹 어리석은 신(臣)의 천에 하나나 맞을는지 모르는 생각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그 사이에 논하여 보기도 하였습니다.
아아, 전투에 실패한 장수도 오히려 용맹을 말할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신은 사로잡혀 적의 소굴에서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처지로서, 문득 감히 붓대를 놀려 조정 정책의 득실을 논한다는 것은 극히 참람한 일로서 죄를 면할 길이 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옛사람은 시간(尸諫)을 한 사람도 있고, 죽음에 임박해서도 계책을 올릴 것을 잊지 아니한 사람도 있으니, 진실로 국가에 조금이라도 이익될 일이 있다면 또한 죄인이라 하여 끝내 말하지 않는 것도 불가하옵니다.
만 리(萬里) 경해(鯨海)의 밖이고 구중 궁궐의 안인지라, 혹은 이 왜노들의 간위(奸僞)를 자세히 살피지 못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전후 사신의 내왕에 있어서도 다만 가고 오기가 바쁠 뿐 아니라, 경계와 금제가 엄밀하여 얻은 것이 혹은 상세하게 구비되지 못할 수 있을 것이요, 사로잡혔다가 탈출한 사람들 또한 맹례(氓隷 하천배)의 무리로서 숙맥(菽麥)을 분간하지 못하는 자가 많아, 듣고 본 것이 혹은 정확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에 감히 체면 무릅쓰고 기록하되, 왜승(倭僧)의 제판(題判) 가운데 왜의 언서(諺書)로 쓴 곳을 신이 직접 우리나라 언서(諺書)로 등주(謄注)하여, 첩인(諜人)의 탐간(探間)과 투항한 왜의 추문(推問)에 있어 편리하게 하였습니다.
울산(蔚山) 살던 김석복(金石福)이란 사람이 자칭하기를,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의 집 종으로 계사년 가을에 사로잡혀 역시 이예주(伊豫州)에 와 있으면서 중한 값으로 왜선(倭船)을 세내어 서쪽으로 돌아갈 계획을 하고 있다.’ 하므로, 신이 곧 등록(謄錄)한 것을 그 사람에게 맡겼습니다. 만일 그가 중로에 차질이 없어 이 글이 예감(睿鑑)의 아래 도달된다면, 일본이란 나라가 비록 동떨어진 바다 밖에 있을지라도, 이 왜노들의 간담(肝膽)이 팔채(八彩)의 앞에 환히 나타날 것이니, 갖은 방법으로 사기를 부리는 추한 놈들이지만, 반드시 만 리 밖을 환히 내다본다 하여 신(神)으로 여기게 될 것이며, 국가의 방어하고 대응하는 경우에 있어서는 털끝만큼이나마 보익됨이 없지 아니할 것입니다.
왜적이 그 해 8월 8일에 신등을 옮기어 9월 11일에 대판성(大坂城)에 당도하였는데, 적의 괴수 수길(秀吉)은 이미 7월 17일에 죽었습니다. 대판은 왜의 서경(西京)인데, 거기에 있은 지 수일 만에 또 신등을 복견성(伏見城)으로 옮겼습니다. 복견성은 왜의 새 수도였습니다. 적괴(賊魁)가 죽고 나자 왜노들의 상황이 예전과는 아주 달라졌는데, 신은 우리 조정의 조치와 계획이 혹시라도 이러한 기회를 잃을까 염려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로잡혀온 사인(士人)으로 왜경(倭京)에 있는 동래(東萊) 김우정(金禹鼎)ㆍ진주(晉州) 강사준(姜士俊) 등과 더불어 아침 저녁의 양식을 조금씩 모아 각기 은화(銀貨) 1전과 바꾸고, 인하여 외국인이라고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왜말을 잘하는 통역을 선택하여, 노비(路費)와 뱃삯을 대주어 강역(疆域)의 밖에 도달하게 했었는데, 편지가 미처 발송되기 전에 뭇 왜인들이 이미 철수하였습니다.
신이 갖가지 계획으로 돌아갈 것을 도모하였으나 수중에 돈 한 푼이 없기에 마지못해 왜승에게 글씨품을 팔아 은전(銀錢) 50여 개를 얻었습니다. 몰래 배 한 척을 사서 동래 김우정과 서울 사람 신덕기(申德驥), 진주(晉州) 사람인 사공 정연수(鄭連守) 등과 함께 서쪽으로 돌아갈 것을 꾀하였습니다. 신(臣)과 신의 형 환(渙), 처부(妻父) 김봉(金琫) 등은 미처 기동하지 못하고, 신의 형 준(濬)이 사공과 통역을 거느리고 이미 배 타는 장소로 갔는데, 바닷가의 왜인이 몰래 좌도(佐渡)의 집에 고발하였습니다. 그래서 왜적이 군졸을 풀어 수색 체포하여 20여 일을 감금하였는데, 통역들은 다 죽었고 그 나머지는 오랜만에야 풀려났습니다.
아아, 계책도 막히고 재간도 고갈되어 천만가지 생각과 온갖 계획이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신의 변변찮은 임금을 향한 정성이 천지를 감동시키지 못하여 이런 오만가지 장애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아, 진(秦) 나라가 예(禮)를 버리고 공(功)을 숭상하므로 노중련(魯仲連)이 오히려 동해(東海)로 들어가려 했고, 무왕(武王)은 인(仁)으로써 포학한 자를 치는데도 백이(伯夷)가 오히려 서산(西山)에서 굶어 죽었습니다. 하물며 이 왜가 얼마나 추한 놈들이며, 이 땅이 얼마나 먼 곳이며, 우리나라 신민에게 얼마나 원수진 놈들입니까?
더구나 신은 한남(漢南)의 선비로서 과거에 급제하여, 직질(職秩)은 비록 하급이고 이력은 비록 얕으나, 지난 갑오년(1594, 선조 27) 가을과 겨울 사이에 외람되게 은대(銀臺)의 가랑(假郞)으로 편전(便殿)에 입시하였던 것이 거의 20회였는데, 일월(日月)의 빛이 가까이 지척(咫尺)에 임하여 따사로우신 천어(天語)로 성명(姓名)을 하문하기까지 하셨습니다. 병신년 겨울에는 상서랑(尙書郞 육조의 낭관)에 제수되어, 이마로부터 발뒤축까지 모두 천지 같은 조화로 만물을 생성해 내는 큰 덕택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신은 티끌만큼도 보답하지 못하고 갑자기 머나먼 지역의 견양(犬羊) 같은 놈들의 소굴에 빠져 있으니, 하루라도 구차하게 사는 것이 그 죄가 만 번 죽어 마땅하옵니다.
홍모(鴻毛)와 같은 목숨을 어찌 감히 아끼며, 잠시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겠습니까마는, 돌이켜 생각하면 일시에 이름을 없애버리고 마치 저 구독(溝瀆)에서 스스로 목매어 남모르게 죽는 사람과 같게 되어, 위로는 능히 충절(忠節)을 세워 국가에 보답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분명하게 죽음을 처리하여 영예스러운 이름을 남기지도 못하고, 어린 아이와 어리석은 부녀들과 함께 칼머리의 해골이 되게 되었으니,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하물며 사로잡혀서도 후사를 도모한 사람으로서 옛날의 충신 열사인 문천상(文天祥)ㆍ주서(朱序) 같은 사람도 모두 성공하지 못했지만, 전일의 사가(史家)들이 그르게 여기지 아니하고 그들이 절개를 온전히 한 것을 허여한 것은, 진실로 몸은 비록 사로잡혔을망정, 일찍이 사로잡히지 않은 절개가 오히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이 고루하고 용렬하여 비록 옛사람의 만 분의 일도 못 됩니다마는, 그 충성을 다하고 싶은 마음만은 옛사람에게 조금도 양보할 수 없습니다. 개미 같은 목숨일망정 일식(一息)이라도 붙어 있는 동안에는 견마(犬馬) 같은 정성은 만 번 꺾어도 꺾일 수 없습니다. 즉시 마땅히 온갖 계책을 다하여 탈출하여 돌아가 왕부(王府)의 뜰에 나아가 죽임을 받아, 비록 몸과 머리가 두 동강이가 되더라도 오히려 왜의 땅에 묻히는 것보다 나을 것입니다. 하물며, 추한 놈들의 정상(情狀)이 이미 신의 눈 안에 들어 있으니, 만일 하늘이 편리한 기운을 빌려주어 틈을 탈 기회가 생긴다면 곧 마땅히 변변치 못한 이 몸을 가지고 삼군(三軍)에 앞장서서 국가의 위령(威靈)에 의지하여, 위로는 산릉(山陵)과 묘사(廟社)의 수치를 씻고 아래로는 진대(秦臺)와 연옥(燕獄)의 쓰라림을 갚은 후에, 사패(司敗)의 처벌을 받아, 오늘날 구차하게 생활한 죄를 갚겠습니다. 이야말로 신이 한밤중에 칼을 만져보며, 하루면 창자가 아홉 번씩이나 뒤틀리고 있는 까닭입니다.
아아! ‘멀리 남의 나라에 의탁되어 있는 것을 옛사람도 슬퍼했다.’는 것은 참으로 형식적인 말에 불과합니다. 이 목숨이 남아 있는 동안에 한관(漢官)의 위의(威儀)를 다시 보게 되기를 바라지는 않으나, 살아서 대마도(對馬島)를 지나 부산(釜山)을 한 치만이라도 바라보게 된다면, 아침에 갔다 저녁에 죽더라도 다시 털끝만큼의 여한이 없겠사옵니다.
그 왜정(倭情)에 대한 기록과 적괴(賊魁)가 죽은 뒤의 간위(奸僞)를 기록하여 올리려 했던 것을 아래와 같이 아울러 기록하오니,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소신(小臣)의 구차히 살고 있는 것 때문에 아울러 그 말까지 버리지 마소서. 양(陽)이 열리고 음이 폐색되며 우레가 진동하고 바람 날 듯이 정사를 보실 적에, 간간이 이 글을 펼쳐 보신다면 절충(折衝)하고 어모(禦侮)하는 정책에 있어 다소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시험 삼아 정신들여 잘 살펴보소서. 신은 지극히 황공하고 애통하며 절박함을 견디지 못하오며, 삼가 소(疏)를 올려 아룁니다.
만력(萬曆) 27년(1599, 선조 32) 4월 10일
[주-D001] 수형조좌랑(守刑曹佐郞) : 수(守)는 계(階)는 낮은데 직(職)이 높은 것을 말함. 형조 좌랑은 원래 정6품인 승훈랑(承訓郞)이나 승의랑(承議郞)이어야 하는데, 강항(姜沆)은 종6품인 선무랑(宣務郞)으로 형조 좌랑의 직을 맡았었다.[주-D002] 공명첩(空名帖) : 성명을 적지 않은 서임서(舒任書). 관아에서 돈이나 곡식을 받고 관직을 팔 때 관직 이름을 써서 주는데, 이에 의해서 서임된 자는 실무는 보지 않고 명색만을 행세한다.[주-D003] 통역이 …… 고하자 : 저본에는 "통역이, 신등이 몹시 기뻐하여 중의 뜻을 따르겠다는 것을 가만히 고하자〔舌人潛告臣等喜甚從僧意〕"로 되어 있으나, 맥락상 맞지 않는 부분이 있기에 《수은집(睡隱集)》의 내용인 "舌人潛告臣等所以來之意"를 참고하여 번역하였다.[주-D004] 시간(尸諫) : 《한시외전(韓詩外傳)》에, “위(衛) 나라의 대부 사어(史魚)가 병이 들어 죽게 되자 그 아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남의 신하가 되어 살아서는 능히 어진이를 등용하지 못하였고 불초한 자를 물리치지 못했으니, 죽으면 정당(正堂)에서 치상하지 말고 나를 실(室)에서 빈(殯)해 주는 것이 족하다.’ 하였다. 위군(衛君)이 이 말을 듣고서, 거백옥(蘧伯玉)을 부르고, 미자하(彌子瑕)를 물리쳤다. 그는 살아서는 몸으로써 간하고 죽어서는 시(尸)로써 간하였으니, 곧다 할 만하다.”라고 하였다.[주-D005] 팔채(八彩) : 임금을 가리키는 말이다. 옛날 요(堯) 임금이 눈썹에 팔채(八彩)가 있다 하였다.[주-D006] 은대(銀臺)의 가랑(假郞) : 승정원의 가주서(假注書)를 가리킨다.[주-D007] 문천상(文天祥) : 송(宋) 나라 길수(吉水) 사람. 자(字)는 송서(宋瑞), 호는 문산(文山)이다. 덕우(德祐) 초년에 원(元)의 군사가 침범해 들어오니, 천상(天祥)은 군내(郡內)의 호걸(豪傑) 및 산만(山蠻)을 발동하여, 조서에 응하여 근왕(勤王)하였다. 좌승상(左丞相)에 승진되어 강서(江西)를 도독(都督)하다가 원군(元軍)에게 패하여 순주(循州)로 달아났는데, 위왕(衛王)이 들어서자 신국공(信國公)을 봉했다. 나중에 원장(元將) 장홍범(張弘範)에게 패하여 잡혀서 연옥(燕獄)에 3년 동안 구금되었으나 끝내 절개를 굽히지 아니하고 시시(柴市)에서 피살되었는데, 형(刑)에 임하자 정기가(正氣歌)를 지어 뜻을 보였다. 원 세조(元世祖)는 참으로 남자라고 칭찬했다.[주-D008] 주서(朱序) : 진(晉)의 의양(義陽) 사람. 자는 차륜(次倫)이다. 집안이 대대로 명장(名將)이었다. 영강(寧康) 초에 양주 자사(梁州刺史)가 되어 양양(襄陽)을 진수(鎭守)하고 있었는데, 부견(符堅)이 장수를 보내 성(城)을 공격하니, 주서(朱序)가 패하여 잡혀갔다. 그 후에 사석(謝石)과 부견이 비수(淝水)에서 싸우는데 주서가 진(陣) 뒤에서, “부견이 패했다.”고 외치니, 전진(前秦)의 군사들이 동요되어 마침내 크게 무너졌다. 그래서 주서는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주-D009] 진대(秦臺)와 연옥(燕獄) : 진대(秦臺)는 미상. 연옥(燕獄)은 송(宋) 나라 충신 문천상(文天祥)이 원(元) 나라 장수 장홍범(張弘範)에게 사로잡혀 3년 동안 연(燕) 나라에 구류된 것을 말한다.[주-D010] 사패(司敗) : 사구(司寇)로서, 형(刑)을 맡은 관직이다. 《좌전(左傳)》에 자서(子西)는 말하기를, “또 참언(讒言)이 있어 신(臣)더러 장차 도망할 것이라 하니, 신은 돌아와서 사패(司敗)에 죽겠습니다.”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역) | 19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