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한기 (1803~1879)
우리나라 봉건사회 말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이며 유물 론철학자. 호는 동강. 봉건양반출신으로서 철학적 및 사회정치적 문제들에서 일련의 진보적인 견해들을 내놓았다. 그는 종래의 실학과 기일원론적 유물론철학을 집대성하고 발전시켰을 뿐 아니라 실학사상과 근대 부르조아 개화사상 사이에 다리를 놓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 하였다. 그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진보적 양반계층의 요구를 대변하였다. 그는 물질적 기의 1차성을 주장하고 '이'를 초자연적인 정신적 실체로, 세계의 시원으로 내세우는 이일원론자들의 관념론적 견해를 반대하였다.
그에 의하면 '이'는 '기'의 운동원리이며 질서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견해로부터 출발해 최한기는 '기'를 떠나서 '이'를 구하는 것은 형체를 버리고 그림자를 구하는 것과 같이 허황한 것이라고 하였다. 특히 '기'에 관한 종래의 기일원론자들의 견해를 더욱 발전시켜 기'는 질과 중량을 가지고 있으며 자체의 고유한 운동 능력이 있으며 더는 쪼갤래야 쪼갤 수 없는 시원적인 물질적 실체라고 하였다. 그의 사상에는 변증법적 사상도 적지 않게 들어 있었다. 그는 동'(운동)과 정'(정 지)의 상호관계를 밝히면서 운동 가운데 정지가 있고 정지 가운데 운동이 있다고 하였다. 또한 '유'와 '무'의 상호관계에 대해서도 '유' 가운데 '무'가 있고 '무' 가운데 '유'가 있다고 하였다. 그는 무신론사상도 제기 하였다. 최한기는 유교에서 설교하는 '상제' (천신)중배 나 '천명'론을 부정하였으며 불교의 '영혼불멸'설이나 '천당지옥'설 그리고 풍수설 기타 각종 미신에 대해서 도 그 허위성을 폭로 비판하였다. 인식론에서 그는 세계의 가인식성을 인정하였으며 인식의 원천을 인식기관과 외계사물현상과의 접촉에서 찾았다.
그는 또한 '심'(마음)의 기능을 그 어떤 신비적인 것으로 보는 관념론적 견해들을 비판하고 '심'은 본 것을 미루어 아직 보지 못한 것을 추측하고 들은 바에 의해 아직 듣지 못한 것을 추측하며 익힌 것을 미루어 아직 익히지 못한 것을 추측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는 주자성리학자들이 이른바 선천적인 도덕관념을 염두에 두고 행동보다 아는 것이 선차적이라고 하는 관념론적 견해를 반대하였다. 최한기는 인식론에 관한 문제에서 긍정적인 유물론적 견해들을 내놓기는 하였으나 소박성과 직관성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사회 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그의 견해에는 봉건 국왕과 관료 들의 특권과 독선주의를 합리화하는 봉건적 이론들에 들의 특권과 독선주의를 합리화하는 봉건적 이론들에 대한 반항과 시민계층의 요구를 반영한 '민권' 사상의 요소가 담겨져 있었다.
그는 여러가지 음이 잘 조화되어야 듣기 좋은 음악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나라의 정치 가 잘 되기 위해서는 왕이 혼자서 정치를 할 것이 아니라 예의법률을 깊이 연구한 사람, 문장, 농업, 직포, 공업, 사업의 기능을 가진 사람, 기계기구에 통달한 사람들을 인재로 등용하고 그들에 의거해야 한다고 하였다. 나아가서 그는 국사와 인재선발에서 백성들의 의견을 들을 것을 주장하면서 "한 나라의 일은 마땅히 한 나라 국민과 더불어 공치해야 하며 한 두 사람의 개인의 욕망에 따라 다스려서는 안된다. 한 나라의 공론이 지망하는 사람을 취해 관리로 임명하고 책임을 다하게 하는 것이 공치이다. 공론이란 주민이 다같이 추천하는 론이다"(『인정」 6권, 선인, 국심선인)라고 하였다.
최한기는 사람은 본성에 있어 '평등' 하며 사회적 관계를 맺음에 있어서도 이해관계에서 ' 평등'의 원칙은 불변하다고 하면서 서로 '균평'한 이해를 침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치안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는 봉건적 신분제도를 반대하고 '사, 농, 공, 상'의 사민평등에 관한 사상을 내놓았으며 특히 공상인을 천시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는 세계 모든 인종의 무차별적 '평등'과 ' 인도'에 대한 존중, 불가침, '평화'의 유지를 주장하였다. 그는 사람은 나라와 풍토, 풍습의 차이, 직업과 습관의 차이는 있으나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다 같으며 평등하다고 인정하였다. 그리고 세계의 모든 사람은 동일하게 자연에서 나와서 자연법칙에 따르며 반드시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인도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최한기는 당시 봉건통치배들의 보수적인 ‘쇄국정책'을 반대하고 '개국론'을 제기하였다. 그는 “여러 나라를 살펴 그것으로써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 고 하면서 배를 타고 왕래하며 서적을 서로 번역해 보고 들은 것을 전달해 법제의 좋은 것과 기물의 유용한 것, 토산물이 조금이라도 우리나라에 도움이 되는 것은 마땅히 섭취해 이용해야 한다 (기측체의」 추측록, 6권, 추물측사, 동서취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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