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18

우리역사넷 최제우[崔濟愚]동학의 창립자 2 득도와 포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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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

최제우[崔濟愚]동학의 창립자


1824년(순조 24) ~ 1864년(고종 1)



제세주법상 최제우

e뮤지엄(국립중앙박물관)

1 출생과 수학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崔濟愚)는 1824년(순조 24)에 경상도 경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처음 이름인 초명은 복술(福述), 관명은 제선(濟宣)이었다. 제우(濟愚)는 그가 세상의 모든 사람인 창생(蒼生)을 구제하기 위한 수도를 하면서 어리석은 세상 사람을 구제하겠다는 의미로 1860년 경 바꾼 이름이다. 그리고 최제우의 자는 성묵(性默)이고, 호는 수운(水雲)이다.

그의 집안은 6대조부터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몰락양반 가문으로 아버지 근암(近菴) 최옥(崔鋈, 1762-1840)은 과거에 여러 차례 낙방한 유생이었다. 하지만 그의 문집인 『근암집』은 최옥이 재능과 실력을 가진 문사였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최옥은 첫 번째 부인 정씨(鄭氏)에게서 아들을 얻었으나 곧 병으로 부인과 아들을 모두 잃었다. 그는 다시 서씨(徐氏)와 혼인하여 딸만 둘을 얻었다. 이에 동생 최규(崔珪)의 아들 제환(濟寏)을 양자로 들여 대를 잇도록 하였다. 그런데 최옥은 다시 과부이던 한씨(韓氏)를 맞아들여 63세에 아들을 얻었다. 그가 바로 최제우이다.

최제우는 6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고, 13세에 울산 출신 박씨(朴氏)와 혼인하였다. 당시 75세 고령의 부친이 그의 결혼을 서두른 듯하다. 아버지 최옥은 79세로 사망했는데 그때 최제우의 나이 17세였다. 그리고 최제우에게는 불행이 연이어 일어났다. 아버지의 3년상을 치르는 중에 집에 큰 화재가 발생해 가옥과 재산을 모두 잃어버린 것이다. 이때 최제우는 심정은 『동경대전』 「수덕문(修德文)」에 잘 드러나 있다. “세월의 흘러감을 막을 길이 없어 부친은 어느 날 조용히 세상을 떠나고 나는 그 옆에서 슬피 울었다. 외로운 나의 한 목숨이 나이 겨우 열여섯에 무엇을 알았으리오. 어린 아이나 다름이 없었더라. 부친의 평생 사업은 화재를 만나 불 속에서 자취마저 없어지고 자손의 불초한 여한은 세상에서 낙심하게 되었노라. 어찌 슬프지 아니하며 어찌 애석치 아니하랴.”

부친의 3년상을 마친 최제우는 21세 때인 1844년 생활터전을 처가가 있는 울산으로 옮기고 새로운 활로를 찾아 집을 떠났다. 이때부터 1854년 울산으로 돌아올 때까지 전국 각지를 떠돌아다녔다. 이때 그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해 활쏘기와 말타기 등을 익히고, 장사와 의술·복술(卜術) 등 잡술에도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이 시기에 보고 다니며 체험한 것은 다름 아닌 조선후기의 혼란한 사회상이었다. 즉 그가 전국을 유랑하며 깨달은 것은 조선왕조의 질서가 붕괴되고 있으며, 백성들은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도덕·종교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것이었다.

1854년 유랑생활을 청산하고 울산으로 돌아온 최제우는 자신이 체험한 혼란한 세상을 구하기 위한 새로운 종교와 사상을 창조할 방안을 찾기 위해 수련에 매진하게 되었다. 1855년에는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서 온 승려로부터 신인(神人)에게서 얻었다는 일명 『을묘천서(乙卯天書)』를 받고 본격적인 수도를 위한 탐구와 수련을 시작했다. 1856년 여름, 울산을 떠나 양산군 천성산(千聖山) 기슭에 있는 내원암(內院庵)을 찾아 49일 동안의 기도와 사색을 시작하였다. 최제우는 1857년에 다시 양산 천성산으로 들어가 정상 부근에 위치한 자연동굴 적멸굴(寂滅窟)에서 49일 기도를 드리는 등 계속해서 수도에 정진하였다. 최제우는 1859년 10월 가족을 거느리고 고향인 경주로 돌아왔다. 구미산(龜尾山) 용담정(龍潭亭)에 정착한 후 세상을 구원할 도(道)를 깨치지 못하면 세상에 다시 나가지 않겠다는 뜻의 ‘불출산외(不出山外)’이란 네 글자를 문 위에 써 붙이고 수련을 계속했다. 1860년 봄을 맞은 최제우는 ‘도(道)의 기운이 오래 있으니 사악함이 들어오지 못하고 세상의 중인(衆人)과 함께 돌아가지 않으리(道氣長存邪不入世間衆人不同歸)’라는 입춘시(立春詩)를 지어 벽에 붙였다.

최제우는 1860년 4월 마침내 일종의 ‘종교체험’을 통해 도를 깨치게 되었다. 갑자기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소리가 공중에서 들려온 것이다. 최제우는 이때 자신의 경험을 『동경대전(東經大全)』 포덕문(布德文)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경신년(1860년)에 와서 전해 듣건대 서양 사람들은 천주의 뜻이라 하여 부귀는 취하지 않는다 하면서 천하를 공격하여 빼앗아 그 교당(敎堂)을 세우고 그 도를 행한다고 하므로 내 또한 그것이 그럴까 어찌 그것이 그럴까 하는 의심이 있었더니, 뜻밖에도 4월에 마음이 선뜩해지고 몸이 떨려서 무슨 병인지 집중할 수도 없고 말로 형상하기도 어려울 즈음에 어떤 신선의 말씀이 있어 문득 귀에 들리므로 놀라 캐어물은즉 대답하시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세상 사람이 나를 상제(上帝)라 이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시기를 ‘내 또한 공이 없으므로 너를 세상에 내어 사람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니 의심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라.’ 묻기를 ‘그러면 서도(西道)로써 사람을 가르치리이까.’ 대답하시기를 ‘그렇지 아니하다. 나에게 영부(靈符)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仙藥)이요 그 형상은 태극이요 또 형상은 궁궁(弓弓)이니, 나의 영부를 받아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을 가르쳐서 나를 위하게 하면 너도 또한 장생하여 덕을 천하에 펴리라.” 이후 최제우는 1년 동안 이때 깨달은 것을 정리하고 체계화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사람들에게 포교할 준비를 하였다.

2 득도와 포교


최제우는 자신의 도를 ‘동학’이라 하고, 1861년부터 본격적인 포교를 시작하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용담정으로 찾아왔고, 최제우의 가르침에 따르게 되었다. 『동경대전』 수덕문(修德文)에는 당시의 사정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나는) 포덕(布德)할 마음을 갖지 않고 오직 지극한 마음으로 치성을 드릴 생각만 하였다. 그렇게 미루어 오다가 다시 신유년(辛酉年)을 맞이하니, 때는 6월이요 절기는 여름이었다. 좋은 벗들이 찾아와 방안에 가득함에 먼저 도 닦는 법을 정하였고, 어진 선비들이 나에게 가르침을 물었으며 또한 포덕을 권하였다. (중략) 문을 열고 손님을 맞이하니 그 수가 그렇게 많았고, 자리를 펴고 법을 설교하니 그 즐거움이 매우 컸다. 어른들이 들어오고 나아가는 것이 마치 삼천제자의 행렬 같고, 동자들이 읍하고 절하는 것은 6,7명의 제자들이 시가를 읊는 것과 같았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이도 있으니 이것은 또한 나이 많은 자공이 나이 어린 공자를 받든 예와 같고, 노래 부르고 시를 읊으며 춤을 추니 어찌 공자의 하시던 일이 아니겠는가.” 최제우는 자신의 가르침을 마치 옛날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쳤던 일에 비유하며, 성공적인 포교를 자랑하였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반대로 이를 비난하는 인사들도 많이 생기게 되었다. 그의 집안에서도 그를 원수처럼 대하는 일이 벌어졌다. 최제우는 이런 상황을 『용담유사』 「교훈가」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그 모르는 세상사람 승기자(勝己者) 싫어할 줄 무근설화(無根說話) 지어내어 듣지 못한 그 말이며 보지 못한 그 소리를 어찌 그리 자아내서 향안설화(說話) 분분한고 슬프다 세상사람 내 운수(運數) 좋자 하니 네 운수 가련(可憐)할 줄 네가 어찌 알잔 말고 가련하다 경주 향중(慶州鄕中) 무인지경(無人之境) 분명하다 어진사람 있게 되면 이런 말이 왜있으며 향중 풍속(鄕中風俗) 다 던지고 이내 문운(門運) 가련하다 알도 못한 흉언괴설(凶言怪說) 남 보다가 배(倍)나 하며 육친(六親)이 무삼일고 원수같이 대접하며 살부지수(殺父之讐) 있었던가 어찌 그리 원수런고 은원 없이 지낸 사람 그 중에 싸잡혀서 또 역시 원수 되니 조걸위학(助桀爲虐)이 아닌가 아무리 그리해도 죄 없으면 그뿐일세.” 또한 최제우에게 큰 충격과 타격을 입힌 것은 그가 서학(西學)을 신봉하고 있으며, 동학은 사실상 서학과 같다는 중상(中傷)이었다. “가소(可笑)롭다 가소롭다 너희 음해(陰害) 가소롭다 신무소범(身無所犯) 나뿐이다 면무참색(面無慚色) 네가 알까 애달하다 애달하다 너희 음해(陰害) 애달하다 (중략) 요악(妖惡)한 그 인물이 할 말이 바이없어 서학(西學)이라 이름하고 온 동내 외는 말이 사망년(詐妄謰) 저 인물이 서학(西學)에나 싸잡힐까 그 모르는 세상사람 그것을 말이라고 추켜들고 하는 말이 용담(龍潭)에는 명인(名人)나서 범도 되고 용도 되고 서학(西學)에는 용터라고 종종걸음 치는 말을 역력히 못할로다.”(『용담유사』 「안심가」).

이에 최제우는 1861년 11월 전라도로 향하였다. 자신이 깨우친 도를 널리 전파하는 것은 물론 자신에 대한 핍박 등을 피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경주를 떠난 동래, 의령, 성주, 무주를 거쳐 남원에 이른 최제우는 이듬해 3월 경주로 돌아갈 때까지 남원의 은적암(隱寂庵)에 머물면서 다시 한번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하고 이론화하려고 노력하였다. “내가 또한 동(東)에서 나서 동에서 받았으니 도(道)는 비록 천도(天道)나 학(學)인 즉 동학(東學)이라. 하물며 땅이 동서로 나뉘었으니 서를 어찌 동이라 이르며 동을 어찌 서라고 이르겠는가.” 라는 내용이 포함된 『동경대전』의 「논학문(論學文)」이 써진 것도 이때였다.

경주로 돌아 온 후에는 최시형(崔時亨) 등 제자 중에 뛰어난 사람들을 뽑아 포교에 힘쓰게 하였다. 이에 동학에 입교하는 사람들이 크게 증가하자 경주진영(慶州鎭營)에서는 1862년 9월 요술이나 마술 같은 이상한 술법인 이술(異術)로 사람들을 속인다는 혐의로 최제우를 체포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각지에서 몰려 든 동학교도 수백 명은 동학이 본래 백성과 풍속을 해치는 것이 아니니 속히 자신들의 스승인 최제우를 석방해 달라고 청원하였다. 결국 최제우는 무죄로 석방되었다. 이렇게 되자 동학교도들은 관에서 동학의 정당성을 인정한 것으로 생각하고 마음 놓고 포교할 수 있다는 심정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동학의 교세는 확산되어 동학교도가 나날이 증가하였다. 특히 경주, 영해, 대구, 청도, 청하, 연일, 안동, 단양, 영양, 신녕, 고성, 울산, 장기 등지에 동학교도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를 조직적으로 관리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최제우는 1862년 12월 접주제(接主制)를 실시하였다. 각 지방에 접을 두고 책임자로 접주를 임명하여 관내의 동학교도를 관할하게 한 것이다. 동학의 교세는 계속 늘어나 접은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뿐만 아니라 경기도에도 설치되었다. 최제우는 1863년 7월 초순부터 1달간 용담정에서 각지의 접주들을 소집하여 동학의 교리, 접의 조직과 운영 등에 관한 내용을 교육하였다. 그리고 이때 최시형을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임명하여 동학에 대한 일체 사무를 관장토록 하였다. 그리고 8월 14일에는 도통(道通: 정통 계승자)을 전수하여 제2대 교주로 삼았다.

한편, 조정에서는 동학에 대한 대책을 논의한 끝에 어명(御命)으로 혹세무민(惑世誣民)한다는 죄로 최제우를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기로 결정하고,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龜)를 경주로 파견하였다. 경주로 내려간 정운구는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조령(鳥嶺)에서 경주까지는 400여 리가 되고 주군(州郡)이 모두 10여 개나 되는데 거의 어느 하루도 동학에 대한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없었으며 주막집 여인과 산골 아이들까지 그 글을 외우지 못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위천주(爲天主)’라고 명명하고 또 ‘시천주(侍天主)’라고 명명하면서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또한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오염되고 번성한지를 이를 통해서 알 만합니다.” 최제우는 1863년 12월 정운구에 의하여 동학교도 23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최제우를 서울로 압송하던 중 과천(果川)에서 철종의 승하 소식을 접한 정운구는 그곳에서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조정에서는 최제우를 다시 경상도 감영으로 압송하여 죄를 조사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정운구는 1864년 1월 경상감영이 있는 대구에 도착하였다. 최제우는 이곳에서 다른 동학교도들과 함께 심문받다가 3월 이단사교(異端邪敎)로 유교의 가르침과 법도를 어지럽히는 좌도난정(左道亂正)과 요사스러운 말로 백성들을 정신 못 차리게 하는 요언혹민(妖言惑民)했다는 죄목으로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효수(梟首)당하였다. 최제우의 가르침은 이후 최시형에 의해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로 간행되어 동학의 기본 경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