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제우
분류 동학·천도교 교주
조선의 종교인
순교자
종교 창시자
경주시 출신 인물
경주 최씨 사성공파
1824년 출생
1864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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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
崔濟愚
천도교 교단 요청본[1]
시천교 교단 요청본[2]
초명
최제선(崔濟宣)
아명
최복술(崔福述, 崔卜述)
자
성묵(性默)·도언(道彦)
호
수운(水雲)·수운재(水雲齋)
본관
경주 최씨[3]
출생 1824년(순조 24) 12월 18일[4]
경상도 경주부 현곡면 가정리
(現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5] 315번지)[6]
사망 1864년(고종 1) 4월 15일[7] (향년 39세)
경상도 대구도호부 서상면 계산동 관덕당 뜰
(現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
묘소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 산75번지 수운최제우태묘
종교
동학
비고
동학의 교조(敎祖)
부모
부친 - 최옥(崔鋈, 1762 ~ 1840)
모친 - 곡산 한씨(谷山 韓氏, 1785 ~ 1833) - 한문언(韓文彦)의 딸
부인
밀양 박씨
자녀
막내아들 - 최제근
1. 개요2. 생애3. 여담4.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조선의 종교 사상가이자 동학(천도교)의 창시자 겸 제1대 교주[8]로 호는 '수운(水雲)'이며 '경주 최부자집'의 비조인 최진립의 7대손이다.[9]
2. 생애[편집]
'양력'이라고 명시하지 않은 월일은 모두 음력임
최제우는 순조 24년(1824) 10월 28일(양력 12월 18일) 경상도 경주부 현곡면 가정리(現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 315번지)에서 유학자였던 아버지 근암(近庵) 최옥(崔鋈, 1762-1840)과 셋째 부인인 어머니 곡산 한씨(谷山 韓氏, 1785-1833)[10] 사이의 1남 1녀 중 서자로 태어났다. 아버지 최옥은 일찍이 정실부인 연일 정씨(1758-97)[11]과 둘째 부인 달성 서씨(1773-1811)[12] 등과 혼인하여 두 딸을 두었으나, 아들을 낳지 못하여 결국 첫째 남동생 최규(崔珪, 1770-1841)의 장남 최제환(崔濟寏, 1789-1851)을 입양하였는데, 최제우는 그 후 후실 곡산 한씨를 들여 낳은 자식이다. 그의 아명은 최복술(崔福述, 崔卜述)이고 초명은 최제선(崔濟宣)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재가한 몸이었고 또한 최제우 자신은 서자였으므로 태생적으로 문과에 응시할 수 없었으나, 부친 최옥[13]은 "모름지기 8살 때까지 공부를 시켜보면 싹수를 알 수 있다."하며 최제우에게 유학 교육을 시켰다. 그러나 곧 가세가 기울더니 순조 33년(1833, 10세) 어머니를 여의고 헌종 6년(1840, 17세)에는 아버지를 여의어 홀몸이 되었다. 이후 최제우는 헌종 8년(1842, 19세) 경상도 울산도호부(現 울산광역시) 출신의 월성 박씨(月城 朴氏, 1826 ~ ?. 11. 9) 여인과 결혼하며 먹여 살릴 식구까지 생겼지만[14], 일정한 생계방편이 없어 몰락한 양반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 농사도 배우지 않았고, 다만 한때 무과를 준비하기도 했으나 얼마 못 가 무인의 길을 접고 10년 동안 전국 각지를 유랑하며 장사꾼으로 일한 듯하다.[15]
이때 최제우는 조선이 망해간다는 암담한 현실을 선각한 듯하다. 청나라와 대영제국과의 아편 전쟁을 전해 듣고서 청나라가 대영제국에게 패배당했으니 우리나라는 순망치한의 상태라고 생각했으며 서학을 표방한 서양 세력들은 무슨 일이든 다 할 만큼 능통하기는 하지만 침략하려는 마음가짐을 지녔으니 서학도 올바른 정신세계는 아니라고 여겼다. 이 문제를 두고 높으신 분들과 이야기해보려 하였으나 양반들은 장사꾼 행색인 최제우에게 판에 박힌 말들(공자 왈 맹자 왈)을 하며 현실조차 파악하지 못하였다. 이런 경험들을 하면서 최제우는 "요순지치도 공맹지덕도 부족언(堯舜之治도, 孔孟之德도, 不足焉)"[16]이라며 말 그대로 새로운 가르침과 새로운 문화가 필요한 "다시 개벽"의 시대가 와야 한다는 생각을 굳힌 듯하다.
결국 장삿일을 끝내고 철종 5년(1854, 31세) 가지고 있던 전답을 팔아 경상도 울산도호부 상부면 길촌동(現 울산광역시 중구 유곡동 길촌마을 636번지)[17]로 이주해 지내면서 철물점을 경영했지만 사업에 실패했다. 이 때문에 빚쟁이들에게 쫓겨 다시 고향 경주부 현곡면 마룡골(現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 마룡골마을 산68-1번지)[18]로 들어가 천도를 얻으려는 수행을 계속하였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대략 이 즈음 이름을 '제선(濟宣)'에서 '제우(濟愚)'로 바꾸었는데, '제우'란 '어리석은 이를 구제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으니 그의 생각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러던 중 철종 11년(1860, 37세) 4월 5일(양력 5월 25일), 신내림과 흡사한 현상을 경험하면서 스스로를 '상제'라고 부르는 존재와 대면하여 주문의 말과 병을 고치는 부적 문양을 받았다. <동경대전>에서 전하는 최제우의 체험은 다음과 같다.
===
不意四月불의사월 心寒身戰심한신전 疾不得執症질부득집증 言不得難狀之際언부득난상지제
뜻밖에도 4월에 마음이 선뜩해지고 몸이 떨려서 무슨 병인지 알아낼 수도 없고 말로 형상하기도 어려울 즈음에
有何仙語유하선어 忽入耳中홀입이중 驚起探問則경기탐문즉
어떤 신선의 말씀이 있어 문득 귀에 들리므로 놀라 캐어 물은즉
曰勿懼勿恐왈물구물공
말씀하시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무서워하지 말라.
世人세인 謂我上帝위아상제 汝不知上帝耶여부지상제야
세상 사람이 나를 상제(하느님)라 이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問其所然문기소연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시기를
曰余亦無功故왈여역무공고 生汝世間생여세간 敎人此法교인차법 勿疑勿疑물의물의
나 또한 공이 없으므로[19] 너를 세상에 내어 사람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니 의심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라.
曰然則왈연즉 西道以敎人乎서도이교인호
그러면 서도(서양의 도[道]: 그리스도교)로써 사람을 가르치리이까?
曰不然왈불연 吾有靈符오유영부 其名仙藥기명선약 其形太極기형태극 又形弓弓우형궁궁
대답하시기를 "그렇지 않노라. 나에게 영부가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이요 그 형상은 태극이요 또 형상은 궁궁이니
受我此符수아차부 濟人疾病제인질별 受我呪文수아주문 敎人爲我則교인위아즉
나의 영부를 받아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을 가르쳐서 나를 위하게 하면
汝亦長生여역장생 布德天下矣포덕천하의
너도 또한 장생하여 덕을 천하에 펴리라."
동경대전東經大全 - 포덕문布德文
===
최제우는 자신의 신내림이 꿈은 아닌가 하면서 1년을 다시 수행하고서 그때 얻은 가르침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닫고 철종 12년(1861, 38세) 6월부터 비로소 본격적으로 동학의 주문과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포교하기 시작하였다. 동학을 믿는 사람들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영남 유림들 사이에서는 혹세무민의 사교라고 하여 동학을 배척하는 움직임이 생겼다. 이 때문에 철종 13년(1862, 39세) 9월 경주부 관아에서 최제우를 처음 체포하였으나 제자들이 탄원한 덕에 석방되었다. 이후 동학 활동을 지속하였다가 철종 14년(1863, 40세) 12월에 이름만 바꾼 서학이라는 혐의와 '혹세무민'한다는 혐의를 받아 다시금 체포되었다.
조정에서 파견된 선전관 정운귀(鄭雲龜)가 올린 장계에 따르면 '경주에 가까워올수록 주문[20] 소리가 마을마다 채우고 있었다.'고 하므로 당시 동학의 파급력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최제우가 철종 13년(1862) 6월부터 사람들에게 자기 가르침을 펴기 시작하였으므로, 동학의 창시자로서 대외활동을 한 기간은 고작해야 1년 반에 불과하다. 이 정도만으로도 조정이 동학을 위험하게 여길 만큼 사람들이 호응한 것이다.[21]
최제우는 체포된 채로 압송되어 경기도 과천현까지 왔다가 철종이 갑작스럽게 죽어 조정이 혼란해진 탓에 다시 경상도 대구도호부에 있던 경상감영으로 이감되었다. 해가 바뀌어 고종 1년(1864) 3월 10일(양력 4월 15일) 경상감영 관덕정 뜰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41세 나이로 제자들과 함께 순교(殉敎)하였다.
이후 최제우의 직제자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최시형이 제2대 교주로 옹립되어 동학을 이끌었다.[22] 최시형은 스승 최제우의 주술적, 무속적 면이 강한 신앙을 성리학에 가깝게 순화하고자 애썼기에, 최시형의 방침에 반발한 동학의 다른 신자들이 분리되었다.
최제우의 사상은 증산 계통의 종교와 원불교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특히 증산교에서는 중요한 인물이다.
최제우의 동상이 달성공원(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동) 내 관풍루 앞에 있다.
동학 교조 수운 최제우 순도비가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 현대백화점 대구점 앞 대구 지하철 2호선 반월당역 18번 출구 뒷편에 건립되어 있다.[23]
1991년 영화 《개벽》에서 배우 김길호가 연기했다.
[1] 한국 최초 서양화가로 알려진 춘곡(春谷) 고희동 화백이 1893년 아사히 신문(朝日新聞) 기사 그림을 바탕으로 그린 것을 수정한 수정본이다. 당시 천도교 교단에서 요청했던 그림으로 원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2] 순종의 어진을 그린 구한말 최후의 어진 화사였던 이당(以堂) 김은호 화백이 1909년에 그린 작품이다. 동학의 교파 중 하나인 시천교에서 요청한 작품이고, 최제우의 수양딸인 주씨(朱氏)의 증언을 토대로 그려내 작품이다. 사상적으로 한국사의 근세와 근현대를 가르는 한 인물의 얼굴을 전근대미술의 마지막 화가와 근대미술의 시발점인 화가가 동시에 그려냈다는 점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사성공파(司成公派)-현곡2파(見谷二派, 서파西派) 14세 제(濟) 항렬.
[4] 음력 10월 28일.
[9] 족보상으로는 최진립의 맏형 최진흥(崔震興, 1554 ~ 1626)의 7대손인데, 6대조 최동길(崔東吉, 1601. 2. 26 ~ 1656. 6. 28)은 본래 최진립의 넷째 아들로 후사가 없던 큰아버지 최진흥의 양자로 입적되었다.#[10] 한문언(韓文彦)의 딸이다.[11] 정일추(鄭一錘)의 딸이다.[12] 서달증(徐達曾)의 딸이다.[13] 최옥은 퇴계 이황 학파의 정통 계승자로 당대 영남 선비들 사이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서자에게도 공부를 시킨것을 보면 어쩌면 퇴계학파의 정통 계승자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게 이황은 자기 족보에 적서구별을 못하게 한 사람이다.[14] 헌종 2년(1836, 13세)에 결혼하여 꼬마 신랑 노릇을 하였다는 기록도 있으나 헌종 8년(1842, 19세)에 결혼하였다는 것이 정설이다.[15] 오지영의 <동학사>에는 최제우가 "시정에서 장사도 해보았고 한량들 틈에 끼어 활도 쏘아 보았고 호협자와 함께 말도 달려 보았고 일찍부터 유도, 불도, 선도와 <야소실>에 이르기까지 제자백가서를 낱낱이 섭렵해보았다."라고 적었다.[16] 요순의 통치,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도 이 난국을 타파하기에는 부족하다.[17] 이 지번에는 현재 수운최제우유허지가 남아 있는데, 1998년 1월 30일 울산광역시 중구 소유가 되었다가 2000년 1월 19일부터 울산광역시 소유가 되었다.[18] 이 지번에 현재 천도교에서 성지로 손꼽히는 용담정이 남아 있는데, 1975년 5월 21일부로 재단법인 천도교유지재단의 소유가 되었다.
[19] 서학의 신 관념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대목. 또 다른 문헌에는 노이무공(노력을 하나 이룬 것이 없는)이라고도 기록하였다.
[20]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
[21] 한편으로 그만큼 기존체제에 불만을 가진 사람이 많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기사 최제우가 살던 시대는 삼정의 문란이 한참 활개를 쳤기에 미륵신앙, 정감록, 천주교, 기타 반체제 사상 등이 사회에 만연하였고 역모사건 또한 있었으니, 불만을 품은 계층이 많음은 오히려 너무나 자연스럽다.
.[23] 순도비 자체는 중구 덕산동 관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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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최초 서양화가로 알려진 춘곡(春谷) 고희동 화백이 1893년 아사히 신문(朝日新聞) 기사 그림을 바탕으로 그린 것을 수정한 수정본이다. 당시 천도교 교단에서 요청했던 그림으로 원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2] 순종의 어진을 그린 구한말 최후의 어진 화사였던 이당(以堂) 김은호 화백이 1909년에 그린 작품이다. 동학의 교파 중 하나인 시천교에서 요청한 작품이고, 최제우의 수양딸인 주씨(朱氏)의 증언을 토대로 그려내 작품이다. 사상적으로 한국사의 근세와 근현대를 가르는 한 인물의 얼굴을 전근대미술의 마지막 화가와 근대미술의 시발점인 화가가 동시에 그려냈다는 점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3] 사성공파(司成公派)-현곡2파(見谷二派, 서파西派) 14세 제(濟) 항렬.
[4] 음력 10월 28일.
[5] 경주 최씨 집성촌이다.
[6] 이 지번은 1970년 6월 22일 재단법인 천도교유지재단으로 소유권이 이전되었고, 2014년 이 지번에 최제우생가가 복원되었다.
[7] 음력 3월 10일.
[8] 종교를 창시했기 때문에 교조(敎祖)라는 표현이 더 많이 쓰인다.
[9] 족보상으로는 최진립의 맏형 최진흥(崔震興, 1554 ~ 1626)의 7대손인데, 6대조 최동길(崔東吉, 1601. 2. 26 ~ 1656. 6. 28)은 본래 최진립의 넷째 아들로 후사가 없던 큰아버지 최진흥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10] 한문언(韓文彦)의 딸이다.
[11] 정일추(鄭一錘)의 딸이다.
[12] 서달증(徐達曾)의 딸이다.
[13] 최옥은 퇴계 이황 학파의 정통 계승자로 당대 영남 선비들 사이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서자에게도 공부를 시킨것을 보면 어쩌면 퇴계학파의 정통 계승자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게 이황은 자기 족보에 적서구별을 못하게 한 사람이다.
[14] 헌종 2년(1836, 13세)에 결혼하여 꼬마 신랑 노릇을 하였다는 기록도 있으나 헌종 8년(1842, 19세)에 결혼하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15] 오지영의 <동학사>에는 최제우가 "시정에서 장사도 해보았고 한량들 틈에 끼어 활도 쏘아 보았고 호협자와 함께 말도 달려 보았고 일찍부터 유도, 불도, 선도와 <야소실>에 이르기까지 제자백가서를 낱낱이 섭렵해보았다."라고 적었다.
[16] 요순의 통치,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도 이 난국을 타파하기에는 부족하다.
[17] 이 지번에는 현재 수운최제우유허지가 남아 있는데, 1998년 1월 30일 울산광역시 중구 소유가 되었다가 2000년 1월 19일부터 울산광역시 소유가 되었다.
[18] 이 지번에 현재 천도교에서 성지로 손꼽히는 용담정이 남아 있는데, 1975년 5월 21일부로 재단법인 천도교유지재단의 소유가 되었다.
[19] 서학의 신 관념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대목. 또 다른 문헌에는 노이무공(노력을 하나 이룬 것이 없는)이라고도 기록하였다.
[20]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
[21] 한편으로 그만큼 기존체제에 불만을 가진 사람이 많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기사 최제우가 살던 시대는 삼정의 문란이 한참 활개를 쳤기에 미륵신앙, 정감록, 천주교, 기타 반체제 사상 등이 사회에 만연하였고 역모사건 또한 있었으니, 불만을 품은 계층이 많음은 오히려 너무나 자연스럽다.
[22] 같은 경주 최씨지만 최시형은 완전히 몰락하여 머슴살이로 생계를 꾸리던 사람이었다.
[23] 순도비 자체는 중구 덕산동 관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