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전반기를 살았던 인물로 기호계 남인이었다. 사상적으로 볼 때 그는 성호 학파의 학맥을 계승하였으면서도 북학파 실학자와 교유하였고, 그 이전 여러 유파(流派)의 실학사상을 수용하여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대외관에서도 이익, 안정복의 민족주의적 관념과 북학파 실학자의 개방적 세계관을 수용하여 발전적으로 통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익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정약용은 일본의 기술, 제도, 문화 수준 등에 대해 선배 실학자들보다 폭넓은 관점에서 언급하였으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특히 일본 고학파 유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였으며, 그런 과정 속에서 일본 문화에 대한 독특한 인식을 갖게 되었다. 일본에 관한 정약용의 저술에는 『일본고(日本考)』, 『비어고(備禦考)』, 『민보의(民堡議)』,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 등이 있고, 시문집에도 적지 않은 기록을 남겼다.
이상의 저술에 나타난 정약용의 일본 인식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객관적 관점에서 일본 사회와 문물의 변화를 인식하였다. 그는 명분론적 관념과 전통적 일본관에서 벗어나 일본 문물을 보려고 하였으며, 국제 정치의 현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그가 인종적·지리적 관념에 바탕을 둔 기존의 중국 중심적 화이관에서 탈피한 것은 ‘탁발위론(拓跋魏論)’, ‘동호론(東胡論)’ 등의 논설(論說)에 선명히 나타나 있다. 이러한 그의 개방적인 국제 관념은 당연히 청나라에 대해서뿐 아니라 일본에도 적용되었다.
둘째, 정약용은 일본의 기술 문명과 문화 수준, 나아가 사회 제도의 특성과 발전된 면모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장점을 수용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일본의 기술 수준에 대해 “일본이 옛날에는 우리나라보다 기술 수준이 낮았으나 당시에 이르러 중국과 직접 교류하면서 기술을 도입한 결과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루었고, 기술 수준이 중국과 대등하게 되었으며, 우리나라를 능가하기에 이르렀다.”고 주장하였다.151) 특히 무기 면에서 조선과 일본의 차이가 현저한 것으로 인식하였다.152)
한편 문화 면에서도 정약용은 일본의 새로운 변화에 주목하면서 특히 일본 유학의 발전을 지적하였다.
돌이켜 보건대 일본은 본래 백제를 통하여 서적을 얻어 보았는데 처음에는 매우 몽매(蒙昧)하였다. 그런데 중국의 장쑤(江蘇), 저장(浙江) 지방과 직접 교역을 하면서부터 중국의 좋은 책을 사 가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한다. 또 일본에는 과거 제도의 폐단이 없었으므로 지금에 와서는 그들의 학문이 우리나라를 능가하게 되었으니 심히 부끄러운 일이다.153)
일본은 이제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내가 그들이 이르는바 고학 선생인 이토 씨의 글과 오규 선생, 다자이 쥰(太宰純) 등이 논한 경전 해석을 읽어 보니 모두가 그 수준이 찬연(燦然)하였다. 이것을 통해 볼 때 일본은 이제 우려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논의한 것에 간혹 왜곡된 것도 있지만 일본의 문화적 분위기가 성숙되어 있음이 틀림없다. ……문화가 우세하게 되면 군사적인 침략 같은 경거망동(輕擧妄動)을 하지 않는다. 저 몇 사람 유학자들의 경전과 예(禮)에 관해 논한 바가 이와 같으니 그 나라에는 반드시 예의를 숭상하고 먼 장래까지 고려하는 인물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이제 침략할 염려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154)
정약용은 일본의 과학 기술과 유교 문화를 통해 일본의 변화를 인식하고 그 수준에 대해 사실보다 과장되게 평가하였다. 그는 고학파 유학자들 의 경전 주석(經傳註釋)을 보면서 그들의 탈(脫)주자학 또는 반(反)주자학적 경서 해석에 상당히 공감을 느꼈던 듯하다. 그러한 탈주자학적인 경전 해석은 그가 깊이 모색하고 있던 방향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 일본 고학파 유학자들의 『논어』 주석에 공감한 나머지 전반적인 일본 유학의 수준이나 일본 사회의 유교화 수준을 긍정적으로 보았고, 나아가 조일 관계도 낙관적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셋째, 일본 문화에 대한 이해와 관련하여 특기할 사실은 정약용이 일본 고학파 유학자들의 저술을 본격적으로 연구하였으며, 그의 『논어』 주석서인 『논어고금주』에 그들의 학설을 인용하였다는 점이다. 정약용 이전의 지식인 가운데에서도 일본 유학자들의 서적을 보고 관심을 보인 이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예컨대 이익이나 안정복도 야마자키 안사이 학파의 유학자들을 소개하였고, 고학파 유학자인 이토 진사이의 『동자문』을 보고 논평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검토한 것은 아니었으며, 일본 유학의 전체적 수준이나 고학파 유학의 주장에 찬성한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정약용 이전의 조선 지식인이 이해한 일본 유학은 초보적인 것이었고, 그것에 대한 평가도 긍정적인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전반적으로 볼 때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일본 유학을 깊은 학문적 호기심을 가지고 연구할 대상으로까지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정약용은 고학파 유학자들의 『논어』 주석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였으며, 『논어고금주』에서 그들의 주석을 중요한 비중으로 인용하였다. 또 그들의 학설을 비판과 함께 수용하였는데, 이는 조선 지식인 가운데에서 찾아보기 힘든 예이다. 이것은 일본을 이적시하고 야만시하던 당시 조선 지식인의 소중화 의식에서 탈피한 정약용의 열린 세계관과 철저한 학자적 정신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이것은 조선 후기의 조일 문화 교류사, 나아가 동아시아의 유학 사상사 전반에 걸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정약용이 『논어고금주』에서 인용하고 있는 고학파 유학자들의 주석은 이토 진사이 3개소, 오규 소라이 50개소, 다자이 슌다이(太宰春臺, 다자이 쥰) 148개소로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한다. 『논어고금주』를 분석해 보면 그는 고학파 유학자들의 학설을 수용하기보다 훨씬 많이 비판하였다. 그러나 훈고적·고증적 측면에서는 그들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155)
넷째, 이와 같은 일본의 유교 문화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그에 따른 한때의 일면적이고 낙관적인 일본 인식과 달리, 말년에 정약용은 일본의 재침 가능성을 점치며 위기의식을 느꼈다. 그 결과 『일본고』, 『비어고』, 『민보의』 등의 저술을 통해 일본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를 시도하였고, 일본의 재침에 대한 대비책을 제시하였다. 따라서 그는 안정복보다 자료의 방대성, 대책의 구체성과 치밀성 면에서 진전된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