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27

Philo Kalia - *기독자이면서 동시에 불자로, 불자이면서..

Philo Kalia - *뜨거웠던 2023년 11월 26일(마지막 주일) 기독자이면서 동시에 불자로, 불자이면서... | Facebook



Philo Ka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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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웠던 2023년 11월 26일(마지막 주일)

기독자이면서 동시에 불자로, 불자이면서 동시에 기독자로서 살아갈 수 없을까?
 
종교가 발생한 이후 순교적 개종이나 지배, 즉 기독교의 이슬람 지배, 이슬람의 기독교 지배, 불교의 샤머니즘 지배, 유교의 불교 지배 등, 한 종교로 인위적인 경계선을 긋고 다른 종교들은 경계선 밖으로 몰아내 차별하거나 배제한 역사를 종식시킬 수 없을까? 폴 니터(Paul Knitter, 1938~ ), 벌써 85세구나, 40여 년 전 그 이름을 통해 종교신학을 접하면서 신앙적으로 매우 힘들었던 시기를 회상한다. 어제 가나안 교회 2부 순서에서 정경일 박사(심도학사, 성공회대)를 모시고 “폴 니터의 신학적 오딧세이”라는 제목의 특강을 듣고 대화를 나누었다. 정 박사는 국내에서 유일한 폴 니터의 제자이다.
니터는 가톨릭 사제로 출발하여 로마의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공부했고, 그 후 독일 마부르크 대학에서 학위를 받는다. 이후 그는 티벳 불교인 캐시와 결혼하고 인도의 불교와 힌두교의 명상을 30년 이상 훈련하고 일본의 선불교학자들과도 대화한다. 그는 종교간 대화만이 아니라 해방의 실천 운동에도 부단히 참여했는데 Christians for Peace in El Salvador이기도 하다. 그는 “종교해방신학”(Liberation Theology of Religions)이란 용어를 처음 제안한 학자이기도 하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사도행전 4:12)는 말씀에 근본적인 도전장을 던진 책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1985년), 2000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회성을 구원의 유일한 진리로 믿고 따랐던 신앙고백에 대한 본질적 도전 앞에 정신적 충격과 혼돈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혼돈으로부터 기존 질서로 달아나는 경우도 있겠지만 나에게 임한 혼돈은 지성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힘을 발휘했다. 그 힘은 매력이고 마력이었다. 나의 논문 주제는 종교신학(종교대화, 종교다원, 종교해방...)이 아니었기에 이 주제를 계속 천착(穿鑿)하지 못했지만, 니터라는 이름이 잊히지 않아 유학하던 첫해 서점에서 Towards a Protestant Theology of Religions를 아주 비싼 가격에 구입했다. 마부르크 대학에 제출(1975년)한 학위논문인데, 학위논문은 다른 책 3권을 살 수 있을 정도의 아주 비싼 가격이다. 그런데 좀 실망한 부분은 전혀 종교신학자라고 볼 수 없는 루터란 신학자 파울 알트하우스(Paul Althaus)를 사례 연구한 것이었다. 정 박사를 통해 그 의문이 풀렸는데, 당시 가톨릭교회 안에서는 바티칸 공의회의 헌장에서 제시한 종교간대화를 실천하기 위해 니터에게는 개신교의 사례를 연구하도록 지정되었다고 한다.
예수 이름의 유일성의 문제는 니터와 존 힉이 함께 편집한 The Myth of Christian Uniqueness(1987년)에서 정점에 이르렀고, 이 입장을 비판하는 학자들이 Christian Uniqueness Reconsidered(1990)이라는 책을 이어 출간했다. 이 책의 부제 “다원적 종교신학의 신화”라는 제목이 흥미롭다.
니터는 2002년 『종교신학입문』(분도, 2007. 유정원 옮김)이라는 책에서 종교간대화의 모델을 종래에 널리 통용되던 ‘배타주의’, ‘포괄주의’, ‘다원주의’에서 ‘대체모델’, ‘완성모델’, ‘관계모델’, ‘수용모델’의 4가지 범주로 새로 정리한다. 각 범주 안에서도 여러 차이들을 세분하여 제시한다. 대단히 철저히 검토한 학문적인 책이다. 앞의 책들과 달리 『붓다 없이 나는 그리스도인일 수 없었다』(2011년)는 아주 수월하고 흥미진진하게 읽혔다. 그의 생의 실험적 여정이 신학의 형성에 고스란히 녹아, 그가 말한대로 지성적으로 따라갈 수 없고 감성적으로 공감이 되지 않는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가르침의 본래 의미와 힘을 불교와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다시 해석해내는 작업이다. 이 책은 그리스도인들뿐 아니라 불자들도 읽었으면 좋겠다. 성심으로 불교를 배우는 기독자와 진정으로 기독교를 배우는 불자들이 만나 자신이 속한 종교전통의 경계를 넓혀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참으로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니터는 ‘두 종교전통에 속하기’를 평생 실험한다. 그의 삶은 실험(모험)이다. 삶의 실험에는 실패는 없다. 더 많은 경험을 통한 풍요로운 삶만이 있을 따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니터는 “서양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종교인들과의 대화가 그들의 신앙을 무척 풍요롭게 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태생 그리스도인으로서 불교로 건너가서 불교를 배우고 익히면서 기독교를 반성, 성찰하고 다시 기독교로 돌아와 기존 기독교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제시하는 왕복운동을 반복한다. 그의 종교간대화는 대화로 머물지 않고 종교실천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그에게 종교는 명사이거나 형용사(종교적 혹은 종교다운, 가령 기독교적, 그리스도인 다운; 불교적, 불교인다운)만이 아니라 동사이다. ‘종교하기’(Doing Religion)!! 그래서 묻는다. “‘열반’은 무엇인가?” 그것은 정말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단지 만물이 존재하고 활동하는 방식에 대한 보편적인 묘사인가? 열반은 모든 것 안의 진정한 활동인 ‘동사’인가 아니면 단순히 만물이 활동하는 방식을 서술하는 ‘부사’인가?
정경일 박사는 마르크 샤갈의 ‘아브라함과 세 천사’(1966년) 그림에 대한 설명으로 강의를 마무리했다. 유목적 공간 안에 들어온 손님들이 주인으로 평안하게 살기, 유사한 색은 친구이며 다른 색은 연인들, 그래서 세상에는 친구와 연인들만 있다.
저녁 식사 후 영화 <서울의 봄>을 함께 봤다.
1979년 12월 12일, 13일 새벽 청화대가 신군부에 의해 점령되고 마지막까지 수경사 사령관인 장 장군은 외롭게 홀로 결단한다. 수도권의 모든 부대가 신군부에 의해 포섭당한 상태에서 구테타 세력에 끝까지 저항할 것인가 아니면 투항할 것인가? 나라를 지킨다는 대한민국 군인으로서 국법을 어기면서 하극상의 만행을 저지른 “구테타 세력”에 저항한 군인이 한 사람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여 탱크 네 대와 100여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경복궁 앞으로 진군한다. 중과부적도 이만저만이 아닌데, 마침 찌질하고 빙신같은 국방장관이 사령관 직위를 해제한다고 방송한다. 마지막 순간 장 장군은 홀로 경복궁 앞에 겹겹이 쳐 놓은 철가시 바리케이트를 찔리며 넘어지며 20여 개를 넘어간다.
“하나님은 정의의 이름이다.” 지금 이 순간 정의의 이름으로 바리케이트를 넘어가는 그에게 하느님이든, 그 어떤 다른 이름이든 그게 무슨 경계이고 걸림돌이 되겠는가? 그에게 초월적 하느님은 전적으로 체화되어 그는 하느님을 몸받아(體) 그의 존재 전체로 하느님을 모신 것(侍天主)이다. 하느님은 명사도 아니고 형용사나 부사도 아니며 지난(至難)한 현실 속에서 부단히 생성하여 사건화하는 동사 자체이다. 바로 거기에는 기독자라는 이름도 불자라는 이름도, 그 어떤 이름도, “예수의 이름”도 제한이 될 수 없다. 인간은 정의감과 실천 앞에서 인간이 역사적으로, 제도적으로 그어놓은 경계와 담을 허물고 막힌 철벽도 뚫고 다시 근본으로 돌아간다. 근본(뿌리)으로 돌아가게 하는 힘만이 종교가 태어나고 자란 존재의 힘이다.
도덕경은 말한다. 反者道之動(되돌아감이 도의 움직임이다.) 수운 최제우도 논학문에서 그가 받은 것은 “가서 되돌아오지 않는 이치가 없다”(受其無往不復之理)는 그 진실을 받았을 뿐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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