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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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9-10 19:28



1. 기독교와 서양 과학에 대한 정약용의 태도 재검토



글쓴이 : 선유도




기독교와 서양 과학에 대한 정약용의 태도 재검토


김영식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교수





천주교와의 만남과 천주교 신앙의 포기


17세기  초부터  북경에  다녀온  사신들을  통해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의 [천주실의天主實義]· [교우론交友論]· [기인십편畸人十篇] 알
레니(Giulio Aleni,  艾儒略, 1582~1649)의 [직방외기職方外記],  샬(Johann    Adam
Schall von Bell , 湯若望, 1592~1666)의 [주제군징主制群徵],  판토하(Diego de
Pantoja,  龐迪我 1571~1618) 의 [칠극七克] 등  많은  기독교  서적이  조선에  소
개되고  전래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안정복安鼎福(1712~1791)은  서학서가 
유행하던  당시의  상황에  대해  “서양서들이  선조  말년부터  이미  동국에 
들어와  명경名卿과  석유碩儒 중  읽지  않은  사람이  없으며,  그  책들을  제
자백가나  도가,  불가의  것들처럼  여기고  서재의  완상품으로  갖추고  있
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한참  동안  대부분의  조선  학자들은  기독교
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지녔다.  그들  중에는  서학  서적에  담긴  서양 
과학  지식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도  대부분  기독교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18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기독교  교리에  심취한  학자들이  나타나기  시
작했다.  이에  계기가  되었던  것은  1777년에서  1779년  사이에  천진암天
眞菴과  주어사走魚寺에서  권철신權哲身(1736~1801) 의  주도로  몇  차례  열
린 것으로  보이는  강학회였다.  이  강학회에는  권철신  이외에  이벽李蘗
(1754~1789)·이승훈李承薰(1756~1801)·이가환李家煥(1742~1801)·권상학權相
學·이기양李基讓·정약전丁若銓(1758~1816 ) 등  남인  신서파信西派  학자들
이  참여해서  유교  경전을  탐구하면서  천주교  교리를  담은  서학서도  논
의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천주교  교리  학습은  이후  이벽의  주도로 
계속  이어졌는데,  1783년  사행使行  길에  오른  부친을  수행해  북경에  간 
이승훈이  다음해  영세를  받고  돌아오기에  이르렀다.  그  후  이벽은  이승
훈과  함께  자신의  집으로 부터  중인中人  김범우金範禹의  집으로  옮겨가
며  천주교  교리  모임을  가졌고,  이들의  활동은  1785년  적발되어  사교邪
敎  금령이  내려지기도  하는  가운데에도  지속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천
주교  교리는  이들을  중심으로  해서  급히  퍼져  나갔다.  심지어는  과거 
시험에  기독교에  관한  문제가  출제 되기도  했으며,  천주교가  퍼져  나가
는  이 같은  상황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들이  나오기도  했다. 급기야  1791
년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폐지하는  진산珍山 사
건이  발생하여  큰  물의를  빚지만  천주교는 계속  퍼져 나가서  1794 년에는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1752~1801)가  조선에  잠입하여  활동하게  되었
다.  1801년에는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가해졌고 
뒤이어  청의  영향력과  서양의  무력을  빌어  조선에서의  천주교  포교를 
꾀하는  황사영黃嗣永(1775~1801)의  백서帛書가  발각되자  천주교는  정치적
으로도  체제 전복적인  세력으로  인식되어  천주교  신자에  대한  더  심한 
박해가  뒤따랐다.


정약용은  천주교에  심취한  이들  초기  조선  학자들과  가까웠다.  초
기  조선  천주교를  주도했던  사람들  중에는  정약용과  인척  관계인  사람
들이  많았다. 이들  중  정약종丁若鍾(1760~1801)은  그의  셋째  형이었고 
이승훈은  매형, 이벽은  큰형의  처남으로  정약용과  인척  관계였으며  특
히 정약용에게  지적으로  큰  영향을  준  두  사람  이가환(이승훈의 외숙)과 
정약전이  그와  인척  관계였다.  또한  이황李滉(1501~1570)에서  윤휴尹鑴
(1617~1680)로  그리고  이익으로  이어지는  학맥에  속했던  정약용의  학파
적  배경이  그로  하여금  기독교  교리에  흥미를  느끼기  쉽게  해  준  측면
도  있었다.  리理의  능동성과  자발성  그리고  천天에  대한  외경畏敬 을  강
조한  이황과  윤휴의  경향이  그  학맥에  속했던  정약용  같은 사람으로  하
여금  천주교를  어렵지  않게  받아 들이도록  한  면이  있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정약용은  10대  후반부터  이벽·이가환·이승훈  등의  영
향  아래  이익의  유저를  학습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서학—과학기
술과  함께  기독교—에도  접하게  되었다.




정약용  자신이  권철신의  강학회에  참여한  것을  보여 주는  증거는  없
다. 그러나  그는  그  모임에  참석했던  정약전을  통해  강학회에  대해  전
해  들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이  모임  이후  권철신과도  교류하게  된  것으
로  보인다.  정약용이  천주교 교리에  관해  직접 들은  것은  알려진  대로 
1784년  4월  큰 형수의 제사를  지내고  오던  중,  배  안에서  이벽으로부터 였
다.  그는  이벽의  이야기에  큰  감동을  받고  곧  이벽의  집에 가서  [천주실
의]· [칠극]  등을  빌려와  읽었으며,  얼마  후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
었다.  그  후  정약용은  이벽을  중심으로  진행된  천주교  교리  모임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1787년에는  이승훈과  함께  성균관 
근처  사가에서  교리  학습  모임을  가졌다고  하여  동료에게  고발되는  이른
바  ‘정미반회丁未泮會’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지만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에서  “정미년  이후  45년  상당히  마음을  기울였다”14)라고  토로한  것처
럼  정약용의  천주교  신앙은  그  후  얼마간  지속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천주교  신학이  당시  새로운  것을  추구하던  정약용  같은  청년  학자에
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을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20대  청년
기에  서학과  천주교를  접한 것이  정약용에게  큰  지적  깨달음을  불러 일
으키고  사고의  범주를  크게  넓혔다.  기독교가  정약용의  ‘하늘天’ 개념
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그에  따라  상제上帝·리理·귀신鬼神·제사祭祀  같
은  것들에  대한  생각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특히  상제에  관한  정약
용의  생각은  기독교의  인격적인  신 ‘천주天主’와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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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유도 15-09-10 19:39

강학회 -  남인  신서파信西派  학자들 -  이벽의  주도 - 이승훈 - 중인中人  김범우金範禹의 집 교리 모임
- 급속도로 확장







바람아구름아 15-09-10 20:29

17세기  초부터  북경에  다녀온  사신들을  통해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의 [천주실의天主實義]· [교우론交友論]· [기인십편畸人十篇] 알
레니(Giulio Aleni,  艾儒略, 1582~1649)의 [직방외기職方外記],  샬(Johann    Adam
Schall von Bell , 湯若望, 1592~1666)의 [주제군징主制群徵],  판토하(Diego de
Pantoja,  龐迪我 1571~1618) 의 [칠극七克] 등  많은  기독교  서적이  조선에  소
개되고  전래되어  있었다.







전설따라소설쟁이 15-09-10 21:52

황사영黃嗣永(1775~1801)의  백서帛書가  발각되자  천주교는  정치적
으로도  체제 전복적인  세력으로  인식되어  천주교  신자에  대한  더  심한 
박해가  뒤따랐다.







멜론 15-09-11 00:23

그는  이벽의  이야기에  큰  감동을  받고  곧  이벽의  집에 가서  [천주실
의]· [칠극]  등을  빌려와  읽었으며,  얼마  후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멜론 15-09-11 00:24

실제로  20대  청년기에  서학과  천주교를  접한 것이  정약용에게  큰  지적  깨달음을  불러 일
으키고  사고의  범주를  크게  넓혔다.







호반도시 15-09-11 07:32

1777년에서  1779년  사이에  천진암天
眞菴과  주어사走魚寺에서  권철신權哲身(1736~1801) 의  주도로  몇  차례  열
린 것으로  보이는  강학회였다.







산백초 15-09-11 09:04

상제에  관한  정약
용의  생각은  기독교의  인격적인  신 ‘천주天主’와  비슷했다.







혁명밀알 15-09-11 09:33

“서양서들이  선조  말년부터  이미  동국에  들어와  명경名卿과  석유碩儒 중  읽지  않은  사람이  없으며,  그  책들을  제
자백가나  도가,  불가의  것들처럼  여기고  서재의  완상품으로  갖추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현포 15-09-11 10:03

천주교  신학이  당시  새로운  것을  추구하던  정약용  같은  청년  학자에
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을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20대  청년
기에  서학과  천주교를  접한 것이  정약용에게  큰  지적  깨달음을  불러 일
으키고  사고의  범주를  크게  넓혔다.


게리 15-09-11 10:41

이황李滉(1501~1570)에서  윤휴尹鑴
(1617~1680)로  그리고  이익으로  이어지는  학맥에  속했던  정약용의  학파
적  배경이  그로  하여금  기독교  교리에  흥미를  느끼기  쉽게  해  준  측면







객1 15-09-11 17:22

주님이 酒님이 되는 酒敎신자를 위하여 한잔 드시것습니까




















아사달 15-09-11 19:12

천주교  신학이  당시  새로운  것을  추구하던  정약용  같은  청년  학자에
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을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20대  청년
기에  서학과  천주교를  접한 것이  정약용에게  큰  지적  깨달음을  불러 일
으키고  사고의  범주를  크게  넓혔다.  기독교가  정약용의  ‘하늘天’ 개념
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그에  따라  상제上帝·리理·귀신鬼神·제사祭祀  같
은  것들에  대한  생각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특히  상제에  관한  정약
용의  생각은  기독교의  인격적인  신 ‘천주天主’와  비슷했다







사오리 15-09-12 23:44

한적함을 좋아하고 시끄러움을 싫어하는 사람은 곧잘 사람들이 북적대는
세상에서 도피하여 고요함을 구한다. 그러나 아무도 없는 곳에 뜻을 두면
오히려 자신에 얽매이게 되고, 마음을 고요함에 집착하면 도리어 동요의
원인이 된다. 이러한 것들을 깨닫지 못한다면, 어떻게 나와 남을 하나로
보고 시끄러움과 고요함의 구분을 잊는 경지에 이를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