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진사이
이토 진사이(일본어: 伊藤 仁斎), 간에이(
이름은, 어려서는 유정(維貞), 커서는 유정(維禎)이다. 가명 통칭은, 원길(源吉), 원좌(源佐), 원칠(源七)이다.
옥호(屋号)는 쓰루야 시치에몬(
- 옥호: 에도 시대에는 가게 이름이 가게 주인 이름과 같았다. 이것을 '야고(
屋号 )'라고 한다.
생애[편집]
간에이(
간에이(
가정[편집]
40세를 지나고 나서 혼인해 1남 2녀를 두었지만, 52세 때에 첫 번째 아내가 앞서가고 그 수년 후에 두 번째 아내와 재혼하여 4남 1녀를 더 낳았다.
이토 진사이(
아들 5인은 모두, 뛰어난 유학자가 되었다.
이 사람들이 바로 이토 도가이〔
학설과 사상[편집]
주요 저서로서 『논어고의(論語古義)』,『맹자고의(孟子古義)』,『어맹자의(語孟字義)』,『중용발휘(中庸発揮)』,『동자문(童子問)』,『고학선생문집(古學先生文集)』등을 들 수 있지만, 생전에 강의와 저술을 정리하고 퇴고하는 데 전력을 경주했기 때문에 직접 발간한 저작은 없다.
도덕과 존재가 생겨나는 본바탕이 되는 이치나 법칙으로서 이(理)를 공자도 맹자도 일절 언급하지 않았으므로, 그 탐구를 허황되었다고 부정하고 그 탐구를 해결하는 단서를 갖다 주어 이바지하는 예기(禮記)나 예기에서 독립하여 존재하게 된 대학(大學), 중용(中庸) 등을 후대에 불교나 노장사상이 혼합된 완전하지 아니한 텍스트로 치부하여 그 위신과 영향력을 부정하는, 배짱이 두둑하면서도 사소한 부분까지 아주 분명한 방법과 수단을 이용하여 변하지 않는 기준으로서 자신이 세운 준거인, 공자와 맹자의 언행에서 이탈하는 해석을 용인하지 않는, 코기가꾸(
이토 진사이(
주자학은 학문 체계로서는 과거의 선진 유학보다는 이론이나 이치에 매우 합당한 체계를 갖추고는 있었지만, 그 성립하는 과정에 유입된 불교의 선학(禪學)이나 노장사상(老莊思想)이라고 하는 유교에 관계되지 않은 사상에 영향받았으므로 경서를 약간 편향되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토 진사이(
이런 경향은 동시대 유학 연구에서 공통으로 볼 수 있다.
이토 진사이(
만물과 무한한 시간을 포함하는 끝없는 공간의 총체의 근원을 이루는 물질이 아닌 실재나 인식의 목적이 개념이나 언어에 근거하여 된 표상이나 본질의 외면에 나타나는 상의 모든 범위와 의식이나 경험의 대상인 현상 전체가 주관의 작용과는 독립하여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냉정한 도리보다는 조금 더 인간답고 혈액이 통하는 인간의 감정[심정]을 굳게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맹자 사상인 사단(四端)의 심(心)이나 성선설(性善説)을 주창하기에 이른다.
이토 진사이(
저작[편집]
- 『논어고의(論語古義)』(세키 기이치로우편 「일본 명가 사서 주석 전서」논어부일, 동양 도서, 1922년 4월)
- 최경열 역, 그린비 2016
- 장원철 역, 소명출판 2013
- 『맹자고의(孟子古義)』(세키 기이치로우편 「일본 명가 사서 주석 전서」맹자부일, 동양 도서, 1924년 10월)
- 최경열 역, 그린비 2016
- 어맹자의
- 최경열 역, 그린비 2017
- 『동자문(童子問)』시미즈 시게루 교주 이와나미 문고, 1970년 외 ISBN 978-4-00-330091-6
- 최경열, 『동자문』- 이토 진사이 선집 1, 그린비, 2013년 1월 2일, ISBN 9788976823984
- 대학정본 / 중용발휘
- 최경열 역, 그린비 2017
- 키무라 에이이치 편집·해설 「이토진사이집 일본의 사상 11」(지쿠마 서점) 1970년
- 카이즈카 시게키 편집·해설 「이토진사이 일본의 명저 13」중앙공론사 1977년 1983년
- 요시카와 고지로, 시미즈 시게루 교주 「이토진사이 이토토가이」 <일본 사상 대계 33>이와나미 서점, 1971년
- 아사야마 요시로, 엄명교주 「이토진사이」<일본한시인선집 4>연문출판, 2000년, ISBN 978-487636-190-8
- 우에타니 겐 교주 『인재일찰(仁斎日札)』<신일본고전문학대계99>이와나미 서점, 2000년 3월
- 이토 린후 「이토진사이,부-이토토가이」<총서·일본의 사상가 10>덕성 출판사, 1983년 3월
- 미야케 마사히코 편집·해설 「고학선생님 시와 글집」<근세 유가 문집 집성 제 1권>리카응사, 1985년
연구서[편집]
- 이또오 진사이 / 이기동 저
- 비토우 마사히데 「이토진사이에 있어서의 학문과 실천」, 「사상」 제524호, 1968년 2월
- 요시카와 고지로 「진사이,소라이,노리나가」,이와나미서점,1975년6월,복간2000년외,ISBN 978-4-00-000959-1
- 와타나베 히로시 「이토진사이·이토토가이-송학 비판과 「고의학(古義学)」
- 사가라 도루·마츠모토3지개·원 료원편 「에도의 사상가들」상권, 연구사 출판, 1979년 11월
- 고야스 노부쿠니 「이토진사이 인륜적 세계의 사상」, 도쿄대학 출판회, 1982년 5월
- 증보판 「이토진사이의 세계」리카응사, 2004년 ISBN 978-4-8315-1060-0
- 이시다 가즈요시 「이토진사이」<인물 총서> 요시카와 히로후미관, 1989년 ISBN 978-4-642-05176-7
- 사가라 도루 「이토진사이」리카응사, 1998년 ISBN 978-48315-0827-0
- 마루야 코이치 「이토 히토시재의 「정」적 도덕 실천론의 구조」, 「사상」 제820호, 1992년 10월
- 다니자와 에이이치 「일본인의 논어 「동자문」을 읽는다」 PHP 신서상·아래, 2002년, ISBN 4-569-62224-0·ISBN 978-4-569-62271-2
- 「일본 유교의 정신 주자학·진사이학·소라이학」시냇물사 1998년 8월
각주[편집]
- ↑ “[책과 삶]“공자와 맹자의 날것이 최고”…일본의 최초 유학서"”. 경향신문. 2014년 2월 13일에 확인함.
같이 보기[편집]
伊藤仁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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伊藤 仁斎(いとう じんさい、寛永4年7月20日(1627年8月30日) - 宝永2年3月12日(1705年4月5日))は、江戸時代の前期に活躍した儒学者・思想家。京都の生まれ。日常生活のなかからあるべき倫理と人間像を探求して提示した。
諱は、はじめ維貞、のち維禎。仮名 (通称)は、源吉、源佐、源七。屋号は、鶴屋七右衛門。仁斎は号であり、諡号は古学先生。『論語』を「最上至極宇宙第一の書」と尊重した。 初めは朱子学者であったが、後に反朱子学となり、孔子・孟子の原義に立ち返る「古義」を標榜した。
生涯[編集]
- 寛永4年7月20日(1627年8月30日) 京都で誕生。
- 1662年 京都の堀川に古義堂(堀川学校)を開く。堀川を隔てた対岸に、山崎闇斎の闇斎塾があった。
- 宝永2年3月12日(1705年4月5日) 死没。
家庭[編集]
- 40歳を過ぎてから結婚し1男2女をもうけたが、52歳のときに妻に先立たれ、その数年後に再婚し、更に4男1女をもうけた。末子で五男の蘭嵎(らんぐう)が生まれたのは仁斎68歳の時である。5人の男子は皆、優れた儒学者となった。東涯(原蔵)・梅宇(重蔵)・介亭(正蔵)・竹里(平蔵)・蘭嵎(才蔵)で、世上「伊藤の五蔵」と称された。
学説と思想[編集]
『論語』を「最上至極宇宙第一の書」と称した。
古義学(古学)を提唱し、主著に『論語古義』『孟子古義』『語孟字義』『中庸発揮』『童子問』『古学先生文集』などが挙げられるが、生前は講義と著述の整理・推敲に尽力し、著作を公刊することはなかった。
仁斎の学問手法は、当時支配的だった朱子学的経典解釈を廃し、直接テクストを検討するというものである。朱子学は学問体系としては非常に整ってはいたが、その成立過程に流入した禅学や老荘思想といった非儒教的な思想のために経書の解釈において偏りがあった。仁斎はそのような要素を儒学にとって不純なものとみなし、いわば実証主義的な方法を用いた。このような傾向は同時代の儒学研究に共通にみられるものである。仁斎は朱子学の「理」の思想に反して、「情」を極的に価値づけした。客観的でよそよそしい理屈よりも人間的で血液の通った心情を信頼している。四端の心や性善説を唱えた。
校注著作[編集]
- 『論語古義』(関儀一郎編『日本名家四書注釈全書』論語部壱、東洋図書、1922年4月)
- 『孟子古義』(関儀一郎編『日本名家四書注釈全書』孟子部壱、東洋図書、1924年10月)
- 清水茂校注 『童子問』[1]岩波文庫、1970年。ISBN 978-4-00-330091-6 - 度々重版
- 木村英一編集・解説 『日本の思想11 伊藤仁斎集』 筑摩書房、1970年
- 吉川幸次郎編集・解説、清水茂校注『日本思想大系33 伊藤仁斎 伊藤東涯』 岩波書店、1971年 -「語孟字義」「古学先生文集」
- 貝塚茂樹責任編集 『日本の名著13 伊藤仁斎』[2] 中央公論社 1972年、新版・中公バックス 1983年
- 浅山佳郎、厳明校注『日本漢詩人選集4 伊藤仁斎』 研文出版、2000年11月、ISBN 978-487636-190-8
- 植谷元校注 『新日本古典文学大系99 仁斎日札 ほか』 岩波書店、2000年
- 伊東倫厚 『伊藤仁斎 附伊藤東涯』<叢書・日本の思想家10>明徳出版社、1983年3月
- 三宅正彦編集・解説 『古学先生詩文集』<近世儒家文集集成 第1巻>ぺりかん社、1985年
参考文献[編集]
- 尾藤正英「伊藤仁斎における学問と実践」、『思想』第524号、1968年2月
- 吉川幸次郎『仁斎・徂徠・宣長』 岩波書店、1975年6月、復刊2000年ほか、ISBN 978-4-00-000959-1
- 渡辺浩「伊藤仁斎・東涯-宋学批判と「古義学」」
- 子安宣邦『伊藤仁斎-人倫的世界の思想』、東京大学出版会、1982年5月
- 増補版『伊藤仁斎の世界』ぺりかん社、2004年 ISBN 978-4-8315-1060-0
- 『仁斎論語 『論語古義』現代語訳と評釈』上下、ぺりかん社、2017年
- 石田一良 『伊藤仁斎』 吉川弘文館「人物叢書」、1989年 ISBN 978-4-642-05176-7
- 相良亨 『伊藤仁斎』 ぺりかん社、1998年 ISBN 978-48315-0827-0
- 丸谷晃一「伊藤仁齋の「情」的道徳実践論の構造」、『思想』第820号、1992年10月
- 『伊藤仁斎の古義学 稿本からみた形成過程と構造』に収録。ぺりかん社、2018年
- 澤井啓一『伊藤仁斎 孔孟の真血脈を知る』ミネルヴァ書房「ミネルヴァ日本評伝選」、2022年 ISBN 978-4-623-09502-5
解説書[編集]
- 谷沢永一『日本人の論語-伊藤仁斎「童子問」を読む』 PHP研究所(新版)、2015年2月、ISBN 4-569-82367-X
- 渡部昇一『伊藤仁斎「童子問」に学ぶ 人間修養に近道なし』 致知出版社、2015年12月、ISBN 4-8009-1098-6
脚注[編集]
関連項目[編集]
外部リンク[編集]
이토 닌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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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사이 (이토 진사이, 히로 나가 4년 7월 20일 ( 1627년 8월 30일 ) - 호에이 2년 3월 12일 ( 1705년 4월 5일 ))는 에도 시대 의 전기에 활약한 유학자 · 사상가 . 교토 의 태생. 일상생활 속에서 있어야 할 윤리 와 인간상 을 탐구하고 제시했다.
諱는, 처음에 유정, 후유 유. 가명(통칭) 은 겐지치, 겐사, 겐지치. 야호 는 쓰루야 시치오에몬. 닌사이는 호 이며, 사호 는 고학 선생님. '논어'를 '최상지극우주 제일서'라고 존중했다. 처음에는 주자 학자였지만, 후에 반주자학이 되어 공자·맹자의 원의로 돌아오는 '고의'를 표방했다.
평생 [ 편집 ]
- 히로나가 4년 7월 20일(1627년 8월 30일) 교토에서 탄생.
- 1662년 교토의 호리카와에 고의당 (호리카와학교)을 연다. 호리카와를 가로지르는 건너편에 야마자키 암사이의 어둠사이 학원이 있었다.
- 다카나가 2년 3월 12일(1705년 4월 5일) 사망.
가정 [ 편집 ]
- 40세를 지나고 나서 결혼해 1남 2여자를 벌었지만, 52세 때 아내에 앞서 그 몇 년 후에 재혼하고 4남 1여자를 벌었다. 막내에서 오남의 란구가 태어난 것은 인사 68세 때이다. 5명의 남자는 모두 뛰어난 유학자가 되었다. 동평 (원장)· 우메우 (중장)·개정 (정장)· 다케리 ( 평장)· 란후라 (재장)로, 세상 “이토의 오조”라고 불렸다.
학설과 사상 [ 편집 ]
『논어』를 「최상지극우주제일의 서」라고 칭했다.
고의학( 고학 )을 제창하고, 주저하게 『논어 고의』 『孟子古義』 『어 孟字義』 『中庸発휘』『童子問』『古学先生文集』 등을 들 수 있지만, 생전 은 강의 와 저술의 정리· 추억 에 진력해, 저작을 공간하는 것은 없었다.
인사이의 학문 수법은 당시 지배적이었던 주자 학적 경전 해석을 폐지하고 직접 텍스트를 검토한다는 것이다. 주자학은 학문 체계로서는 매우 정돈되어 있었지만, 그 성립 과정에 유입된 선학이나 노장 사상이라고 하는 비유교적인 사상 때문에 경서의 해석 에 있어서 편향 이 있었다 . 닌사이는 이러한 요소를 유학에 있어서 불순한 것으로 간주하고, 이른바 실증주의 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이러한 경향은 동시대의 유학연구에 공통으로 보이는 것이다. 닌사이는 주자학의 '리'의 사상에 반해 '정'을 극적으로 가치있게 했다. 객관적이고 약한 이굴보다 인간적이고 혈액이 다니는 심정을 신뢰하고 있다. 사단의 마음과 성선설을 주창했다.
주석이 달린 작품 [ 편집 ]
- 『논어 고의』(관의이치로편 『일본명가 4서 주석전서』 논어부단, 동양도서, 1922년 4월)
- 『孟子古義』(세키기 이치로편 『일본 명가 4서 주석 전서』 孟子部壱, 동양 도서, 1924년 10월)
- 시미즈 시게 교주 『 동자문』[1] 이와나미 문고 , 1970년. ISBN 978-4-00-330091-6 - 종종 중판
- 기무라 히데이치 편집·해설 “일본의 사상 11 이토 닌사이집” 쓰쿠마 서방 , 1970년
- 요시카와 유키 지로 편집·해설, 시미즈 시게루 교주 “ 일본 사상 대계 33 이토 히사이 이토 동애 ” 이와나미 서점 , 1971년 - “어학자의” “고학 선생님 문집”
- 가이즈카 시게키 책임 편집 “ 일본의 명저 13 이토 닌사이” [2] 중앙 공론사 1972년, 신판·중공 벅스 1983년
- "일본 한시가집 4 이토니나" 아사야마 요시로 편집, 아이메이 주석 , 얀웬 발행 , 2000년 11월, ISBN 978-487636-190-8
- 우에야 전 교주 『신 일본 고전 문학대계 99 닌사이 일찰 외』 이와나미 서점, 2000년
- 이토 윤후 “이토 닌사이 부 이토 동애”<총서·일본의 사상가 10> 명덕 출판사 , 1983년 3월
- 미야케 마사히코 편집·해설 『고학 선생 시문집』<근세 유가문집 집성 제1권>페리칸사 , 1985년
참고 문헌 [ 편집 ]
- 오토 마사히데「이토 닌사이에 있어서의 학문과 실천」, 「사상」 제524호, 1968년 2월
- 요시카와 유키지로 『니사이・후우사이・선장』이와나미 서점 , 1975년 6월, 복간 2000년 외, ISBN 978-4-00-000959-1
- 와타나베 히로시「이토 히사사이・히가시 츠키-송학 비판과 「고의학」」
- 지안 노부니 "이토 니나 - 인간관계의 세계에 대한 생각", 도쿄대학교 출판부 , 1982년 5월
- 증보판 「이토 닌사이의 세계」페리칸사 , 2004년 ISBN 978-4-8315-1060-0
- 『인사이 논어 『논어 고의』 현대 어역과 평석』 상하, 페리칸사, 2017년
- 이시다 이치로 "이토 니나" 요시카와 히로분칸 " 캐릭터 시리즈 " , 1989 ISBN 978-4-642-05176-7
- 아이라 료「이토 히사이」 페리칸사, 1998년 ISBN 978-48315-0827-0
- 마루야 아키라치 “이토 히토시의 “정”적 도덕 실천론의 구조”, “사상” 제820호, 1992년 10월
- 『이토 닌사이의 고의학 논문에서 본 형성 과정과 구조』에 수록. 페리칸사, 2018년
- 사와이 케이이치 “이토 닌사이 공孟의 진혈맥을 아는”미네르바 서방 “ 미네르바 일본 평전선 ”, 2022년 ISBN 978-4-623-09502-5
해설서 [ 편집 ]
- 타니자와 나가이치「일본인의 논어-이토 닌사이 「동자문」을 읽는다」PHP 연구소 (신판), 2015년 2월, ISBN 4-569-82367-X
- 와타나베 승이치「이토 닌사이 「동자문」에 배우는 인간 수양에 지름길 없음」치치 출판사, 2015년 12월, ISBN 4-8009-1098-6
각주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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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 편집 ]
Itō Jinsai
Itō Jinsai (伊藤 仁斎, August 30, 1627, Kyoto, Japan – April 5, 1705, Kyoto), who also went by the pen name Keisai, was a Japanese Confucian philosopher. He is considered to be one of the most influential Confucian scholars of seventeenth century Japan, and the Tokugawa period (1600–1868) generally, his teachings flourishing especially in Kyoto and the Kansai area through the final years of the Tokugawa shogunate.
Jinsai's school, known as the Kogigaku, criticized the teachings of Song dynasty Chinese philosopher Zhu Xi 朱熹 (1130–1200) and instead advocated a philosophical vision based on an understanding of the meanings of key terms in the Analects and the Mencius. His school has been considered part of a larger movement, Kogaku ("ancient learning'), including earlier scholars such as Yamaga Sokō 山鹿素行 (1622–1685), and later thinkers such as Ogyū Sorai 荻生徂徠 (1666–1728). However, Jinsai never mentions Sokō or his ideas, and Jinsai's own statements of philosophical meaning were strongly and systematically criticized by Sorai. Rather than as a thinker aligned with the so-called Kogaku movement, Jinsai's ideas are best understood on their own terms. Jinsai is widely known for his outspoken affirmation of the validity of human emotions, and his articulation of a metaphysics highlighting the pervasiveness and infinite creative potential of a "unitary generative force" (Jpn: ichigenki). Indicative of his renown in the larger world of East Asian philosophy, Jinsai's writings have frequently been compared to those of the Qing dynasty scholar Dai Zhen 戴震 (1724–1777), whose key work, Mengzi ziyi shuzheng (The Meanings of Philosophical Terms in the Mencius) is very similar in theme and method to Jinsai's opus, the Gomō jigi (The Meanings of Philosophical Terms in the Analects and Mencius).
Life[edit]
Jinsai was born the eldest son of a Kyoto merchant, Itō Ryōshitsu. It is not clear exactly what merchant activities the family was engaged in, however. He began studying Chinese from an early age and devoted himself to Zhu Xi's expression of Song dynasty Neo-Confucianism. He continued to study Confucianism throughout his teens, going over old books his uncle had left his father.[1]
By the age of ten, he was studying under his uncle, a noted physician who had once treated the emperor Go-Yōzei. He also likely studied with Matsunaga Sekigo, a Kyoto-based Neo-Confucian scholar who had in turn studied with Fujiwara Seika. Given the distinctively Kyoto lineage of Jinsai's learning, there are good reasons for interpreting it as an expression of the philosophical world of the ancient imperial capital.[2]
Itō suffered from an unidentified illness when he was twenty-eight and left the family business to his younger brother. Afterwards he became a recluse, studying Buddhism and Daoism. During this time he began to have his first doubts over Zhu Xi's philosophy, even changing his pen name which showed his commitment to humaneness (jin).[3]
He later established a private school, the Kogidō, in Kyoto in 1662. Following Jinsai's death in 1705, leadership at the Kogidō was assumed by his son, Tōgai (1670–1736). The Kogidō was located on the east bank of the Horikawa River, directly across from the school of Yamazaki Ansai. During his lifetime, Ansai became a major proponent of Zhu Xi's version of Song Neo-Confucian thought. Jinsai's school, in contrast, offered a sustained critique of Zhu Xi's ideas. Especially in Kyoto, Jinsai's school met with great success, attracting three thousand students from many different classes and professions.[4]
Teachings[edit]
Jinsai formed his own understanding of Confucian philosophy after coming to realize that Zhu Xi's speculative philosophy of was not practical in everyday ethics. Instead, he felt one could learn the way of the sages through an understanding of the meanings of words in the Analects and the Mencius, two of the Four Books that Zhu Xi's philosophy had elevated to nearly canonical status within the broad field of East Asian Confucianism. The other two of the Four Books, The Doctrine of the Mean and the Great Learning, were originally chapters from the Book of Rites (Chinese: Liji), that had been treated as separate volumes, with significant emendations, by Cheng Yi and Zhu Xi. It was largely on the basis of the latter two writings that Zhu Xi in particular had articulated some of his most distinctive Neo-Confucian ideas. In response to Zhu Xi's textual alterations, Jinsai argued, in a very distinctive manner, that "the Great Learning was not a surviving work of the Confucian School", not simply rejecting Zhu Xi's claims on particular points, but in an across the board manner dismissing the text as "not Confucian" in any significant respect. Instead of the Great Learning, Jinsai's approach was to focus on an explanation of the meanings of philosophical terms as discussed in the Analects and the Mencius. Jinsai's approach to Confucian scholarship is today known as kogigaku or "study of ancient meanings". This approach was taken up by later Confucian scholars, particularly Ogyū Sorai.[4]
In significant respects, Jinsai can be seen as advancing the Neo-Confucian project that Zhu Xi, his chief philosophical adversary, had otherwise so effectively and persuasively championed. For example, Jinsai's most comprehensive philosophical text, the Gomō jigi (The Meanings of Philosophical Terms in the Analects and Mencius), was first recorded as Jinsai was giving a series of lectures on Chen Beixi's 陳北溪 (1156–1223) Xingli ziyi 性理字義 (The Meanings of Neo-Confucian Philosophical Terms). Much of the philosophical structure of Jinsai's Gomō jigi as well as its methodology of conceptual clarification and analysis clearly derive from Beixi's work. The two texts even share common elements in their titles, jigi and ziyi 字義 (Jpn: jigi) being written with the same characters, referring to the meanings of words. In both cases, however, the words that were discussed and defined were distinctively philosophical terms such as tendō (the way of heaven), tenmei (the decree of heaven), michi (the way), sei (human nature), kokoro (the mind and heart), kotowari (principle), kishin (ghosts and spirits), and many others.
Jinsai is often described as an apolitical philosopher. However, the Gomō jigi can easily be seen as an inherently political text, one which defines the very philosophical foundations of an ideal political order. In the Analects, 13/3, Confucius, when asked by a disciple what he would do if given political authority, replied that he would "rectify terms" (zheng ming). When his disciple responded with bewilderment, Confucius explained that if words were not used correctly, then in effect there could be little hope for order in a state. For that reason, Confucius added, the prince is always careful in his use of words. Jinsai's project of defining philosophical terms rightly is very much a later day expression of Confucius' view that in order to govern effectively, one must ensure that words are understood and used correctly. If that is not done, then all will be lost.
Jinsai had several fundamental philosophical disagreements with Zhu Xi, the premier interpreter of Confucian thought since the late-Song dynasty. For one, Zhu Xi had claimed that human nature is inherently good. Jinsai disagreed and instead argued it had the potential to become good, but only through daily practice and deeds can this potential be realized. Additionally, he rejected the dualism of rational principal (li) and material force (qi) proposed by Song Confucianism, believing it was material force alone that led to the creation of life and all things.
Furthermore, Zhu Xi connected the way of heaven (tendō) with the human way (jindō) through rational principal. Jinsai on the other hand saw the way (michi) as being embedded in the common and everyday, and not ensconced on some elevated plane as Zhu had suggested. To Jinsai, the central question was how one should conduct oneself in everyday life. Zhu Xi affirmed that all humans are born with an "original human nature" (sei), which is naturally good. Jinsai, however, rejected this.
Rather than the essential goodness of human nature, Jinsai stressed natural human emotions (ninjō), which he found in everyday life. Extending from this came the importance that was placed on poetry which allowed for the expression of human emotions. This, he believed, provided a needed release of emotions and desires. Song Confucianism he felt too much advocated seriousness and a restraint of human nature.[3] His support for literature even led to the Kogidō attracting some students more interested in Chinese poetry than his Confucian teachings.[4]
Although often grouped with the Edo Confucian scholar, Ogyū Sorai, as a proponent of the ancient learning movement, Jinsai's singlemost harsh critic was none other than Sorai. In a letter written to Jinsai, Sorai early on expressed admiration for the Kyoto philosopher and an interest in his philosophy, having read a pirated edition of Jinsai's Gomō jigi published long before Jinsai was ready for it to be released in its final form. Jinsai never responded to Sorai, apparently wounding his pride deeply. Whatever Sorai might have made of Jinsai's silence, it is clear that in Sorai's later writings, in the Bendō and Benmei (1728) in particular, Sorai takes issue with Jinsai on nearly every count, often criticizing him harshly as in effect no different in philosophical doctrine than the thinker he supposedly was criticizing, Zhu Xi.
In the later writings of the Kaitokudō, a merchant academy based in Osaka, Jinsai found a succession of defenders who returned Sorai's critiques with a series of harsh responses to Sorai's own philosophical statements.
Works[edit]
- Gomō jigi 1705 (The Meaning of Words in the Analects and Mencius).
- Dōjimon 1705 (Questions From Children).
- Daigaku teihon 1705 (The Established Text of the Great Learning).
- Hakushimonjū 1704 (Postscripts to the Collected Works of Bo Juyi).
Notes[edit]
- ^ Yamashita, Samuel Hideo. (1983). "The Early Life and Thought of Ito Jinsai", in Harvard Journal of Asiatic Studies. 43:2, pp. 455-457.
- ^ Tucker, John Allen. (1998). Itō Jinsai's Gomō jigi and the Philosophical Definition of Early Modern Japan. pp. 29-52
- ^ ab De Bary, William et al. (2005). Sources Of Japanese Tradition: Volume 2, 1600 to 2000, pp. 206-207.
- ^ ab c Shirane, Haruo. (2006). Early Modern Japanese Literature: An Anthology, 1600-1900. p. 362.
References[edit]
- Chan, Wing-tsit, translator. Neo-Confucian Terms Explained: The Pei-his tzu-i by Ch'en Ch'un, 1159–1223.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6. ISBN 978-0-231-06384-5
- De Bary, William Theodore, Arthur E. Tiedemann and Carol Gluck. (2005). Sources of Japanese Tradition: 1600 to 2000.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ISBN 0-231-12984-X
- Najita, Tetsuo. (1987). Visions of Virtue in Tokugawa Japan: The Kaitokudō Merchant Academy of Osaka.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 Shirane, Haruo. (2006). Early Modern Japanese Literature.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ISBN 0-231-10990-3
- Spae, Joseph John. (1967). Itō Jinsai: A Philosopher, Educator and Sinologist of the Tokugawa Period. Peiping: Catholic University of Peking, 1948. New York, Paragon Book Reprint Corp., 1967.
- Tucker, John Allen (1998). Itō Jinsai's Gomō jigi and the Philosophical Definition of Early Modern Japan. Leiden: E. J. Brill, 1998. ISBN 978-90-04-10992-6
- Tucker, John A. (2006). Ogyū Sorai's Philosophical Masterworks: The Bendō and Benmei.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ISBN 978-0-8248-2951-3
- Yamashita, Samuel Hideo (1983). "The Early Life and Thought of Itō Jinsai", in Harvard Journal of Asiatic Studies. 43(2): 455–7.
External links[edit]
- East Asia Institute, University of Cambridge: Further reading/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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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고의 이토 진사이 (지은이), 최경열 (옮긴이) 그린비 2016-04-10 정가 45,000원 이토 진사이 선집 (총 5권) 더보기신간알리미 신청 어맹자의 - 논어 맹자 개념어 사전 판매가 15,200원 ===== 책소개 이토 진사이 선집 2권. 주자학이 횡행하던 시절, 경전 탐구에 있어서 지배적 담론에 포섭되지 않고 끊임없이 그 본의가 무엇인지를 묻고, 자기 나름의 해답을 구해낸 이례적이고도 선구적인 유학자가 있었다. 그는 바로 일본 고의학의 창시자 이토 진사이다. 이토 진사이가 <논어>를 평생에 걸쳐 탐구하며 성인의 뜻을 밝혀낸 저작이다. '고의'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논어>의 옛 의미, 그 당시의 원래 의미를 탐구한다. 한나라에서부터 육조시대에 이르는 고주와 주자를 중심으로 한 송나라 시대의 신주를 섭렵한 끝에 이들과는 다른 <논어> 해석의 길을 연 저작이다. 주자학에 가려진 경전의 의미를 밝히고, 주체적인 해석을 보여주고 있다.접기 목차 『논어고의』 간행 서문 『논어고의』 총론 논어고의 권1 학이(學而) 위정(爲政) 논어고의 권2 팔일(八佾) 이인(里仁) 논어고의 권3 공야장(公冶長) 옹야(雍也) 논어고의 권4 술이(述而) 태백(泰伯) 논어고의 권5 자한(子罕) 향당(鄕黨) 논어고의 권6 선진(先進) 안연(顔淵) 논어고의 권7 자로(子路) 헌문(憲問) 논어고의 권8 위령공(衛靈公) 계씨(季氏) 논어고의 권9 양화(陽貨) 미자(微子) 논어고의 권10 자장(子張) 요왈(堯曰) 논어고의 원문 옮긴이 해제 / 실학으로 다시 읽는 『논어』 접기 책속에서 P.18~19 고원해 다다를 수 없으며 은미하고 까다로워 알 수 없다는 따위의 말은 삼대의 왕의 사적을 고찰해 보면 잘못이 있을 것이며, 온 세상에 기준으로 세워 보면 어그러질 것이며, 인간의 감정과 사물의 원리에 미루어 생각해 보면 모두 부합하지 않을 것이다. 우주라는 시공간에 본래 이런 식의 이치가 없으니 도를 심하게 곡해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높은 곳[高]을 끝까지 올라가면 반드시 낮은 곳?[卑]으로 돌아오며 먼 곳[遠]을 극단까지 나아가면 반드시 가까운 곳[近]으로 돌아온다. 비근卑近으로 돌아오고 난 뒤에야 견해가 비로소 실질[實]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비근한 곳은 항상 살 수 있지만 고원한 곳은 제대로 머무는 곳이 아닌 줄 알기 때문이다. 이른바 비근은 본래 비근이 아니요 평상?平常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실로 예로부터 지금까지 온 세상이 공통으로 따르던 것이었으며 인간 윤리와 일상생활에서 당연히 있어야 한다고 여기는 바였다. 어찌 여기에 고원한 것이 있겠는가. 비근을 싫어하고 고원을 기뻐하는 자들과 어떻게 천하와 만세에 두루 통용되며 잠시라도 떨어질 수 없는 도를 함께 얘기할 수 있겠는가. 배우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를 알아야 한다. 그런 뒤에 『논어』를 읽을 수 있다. P.317~318 진사이는 논한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 “성인은 상서로운 조짐을 말씀하시지 않았는데 여기서 봉새와 하도를 말씀하신 것은 어째서입니까?” 나는 대답했다. “이 말은 상서로운 조짐을 말한 것이 아니라 봉새와 하도를 빌려 당시 훌륭한 임금이 없는 것을 탄식한 것이다. 성인은 남들과 함께 지내지 다른 기반에 서지 않으며 동시대를 살면서 세상 사람들이 듣기에 놀랄 말을 하지 않는다. 일을 할 때 성공과 실패에 크게 문제되지 않는 것은 모두 옛 방식을 따르며, 분분한 설명으로 사람들이 듣고 보는 것을 감히 어지럽히지 않는다. 봉새와 하도는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길 성왕聖王이 세상을 다스릴 상서로운 징조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공자는 이를 빌려 자신의 탄식에 부쳤을 뿐이다.” P.848 여기서 논점은 주희가 맞다 틀리다 하는 점이 아니라 진사이가 그의 해석과는 다르게 『논어』를 읽었다는 사실이다. 주희 해석의 시비 문제도 아니고 진사이 해석의 시비문제는 더욱 아니다. 다르게 읽기 그 자체다. 인仁을 실實의 관점에서 읽는다면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독자가 눈길을 주어야 할 곳은 이 질문이다. 진사이의 대답?: 사랑하고 슬퍼하는 마음을 펼치는 것이다. 인은 본래 사랑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맹자는 “친친인민애물”親親仁民愛物이라는 말로 정식화한다.) 내가 가진 사랑과 연민의 마음을 남에게까지 확대하는 것. 내 마음을 실제로 남에게 적용하라는 말이다. 사랑하는 마음을 자신에게 담아 두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남에게 베풀어라. 진사이는 인을 이렇게 읽었고 다시 한번 주희의 형이상학은 평이하고 일상적인 실의 원리로 대치된다. 공부하는 사람이 할 일은 일상에서 실질적이고 평이한 도를 묵묵히 실행하는 것이다. 가까운 곳에서 도를 찾고 마음에 두고 잊지 않으면서 쉬운 일부터 해나가야 한다.(「옮긴이 해제」 중에서) 추천글 한겨레 신문: 한겨레 신문 2016년 4월 14일자 동아일보: 동아일보 2016년 4월 16일자 '책의 향기/150자 서평' 저자 소개 지은이: 이토 진사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최근작 : <[큰글자책] 어맹자의 >,<[큰글자책] 대학정본 / 중용발휘 >,<[큰글자책] 논어고의 > … 총 12종 (모두보기) 에도 시대 전기에 활약한 유학자, 고의학파(古義學派)의 창시자. 초명은 고레사다(維貞)이고 뒤에 고레에다(維禎)로 개명했으며, 보통 겐시치(源七), 겐키치(源吉), 겐스케(源佐) 등으로 불렸다. 진사이는 그의 호이며, 고학선생(古學先生)으로도 불렸다.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 교토에서 재목상(材木商)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당시 가장 유명했던 화가 오가타 고린(尾形光琳)의 사촌 여동생과 결혼했다. 청년 시절 주자학에 몰두하였고 이십대 후반에는 가업을 포기하고 불도(佛道)에 전념했으나, 삼십대에 이르러서는 이를 비판하며 유교 고전의 새로운 읽기를 시도하였다. 1662년 사립 유학 학교인 고의당(古義堂)을 설립하여 후학을 양성하기도 한 그는 『논어고의』(論語古義), 『맹자고의』(孟子古義), 『어맹자의』(語孟字義), 『동자문』(童子問), 『중용발휘』(中庸?揮), 『고학선생문집』(古學先生文集), 『진사이일찰』(仁齊日札), 『동지회필기』(同志會筆記) 등의 저서를 남겼으며, 사후 그의 아들 이토 도가이(伊藤東涯)가 모두 교감해서 출판하였다. 옮긴이: 최경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최근작 : <기록자의 윤리, 역사의 마음을 생각하다> … 총 12종 (모두보기)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한문학을 공부했습니다. 곡부서당(송양정사松陽精舍)에서 서암(瑞巖) 김희진(金熙鎭) 선생님께 한문을 익히며 낯선 세계에 눈을 떴습니다. 선생님과의 만남은 무엇보다 인간의 감화력이 무엇인지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한림원과 민추(현 고전번역원)에서도 고전을 공부했습니다. 서양인이 동양을 공부하는 치밀함에 자극받아 영어에도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방문학자로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18세기 조선 지식인들에 대한 관심을 품고 있으나 그보다 우선 넓게 공부해서 파야겠다는 생각으로 중국고대사상에 집중해, 선진(先秦)시대 저작을 두루 읽고 있습니다. 유학이 정통이나 주류로 자리 잡기 이전, 많은 담론이 쟁명(爭鳴)하는 모습이 장관이라서 공부가 흥미롭습니다. 『당시 300수』를 공역했고 일본의 유학자 이토 진사이(伊藤仁齊)의 대작인 『논어고의』(論語古義), 『맹자고의』(孟子古義), 『동자문』(童子問) 등을 잇달아 번역했습니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주자학이 횡행하던 시절, 경전 탐구에 있어서 지배적 담론에 포섭되지 않고 끊임없이 그 본의가 무엇인지를 묻고, 자기 나름의 해답을 구해낸 이례적이고도 선구적인 유학자가 있었다. 그는 바로 일본 고의학(古義學)의 창시자 이토 진사이(伊藤仁齋, 1627~1705)이다. 그의 핵심 저작, 곧 「논어」와 「맹자」를 평생에 걸쳐 탐구하며 성인(聖人)의 뜻을 밝혀낸 저작 「논어고의」(論語古義)와 「맹자고의」(孟子古義)를 동시에 번역 출간하였다. ‘고의’(古義)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이 두 저작은 「논어」와 「맹자」의 옛 의미, 그 당시의 원래 의미를 탐구한다. 한나라에서부터 육조시대에 이르는 고주(古注)와 주자(주희)를 중심으로 한 송나라 시대의 신주(新注)를 섭렵한 끝에 이들과는 다른 「논어」, 「맹자」 해석의 길을 연 저작이다. 주자학에 가려진 경전의 의미를 밝힌 이 두 저작은 조선 땅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주체적인 해석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고전 연구상에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다. [출판사 서평] ‘논어’와 ‘맹자’의 본의는 무엇인가? ―일본 특유의 사상이 피어나는 지점, 이토 진사이의 ‘고의학’(古義學) 주자학이 횡행하던 시절, 경전 탐구에 있어서 지배적 담론에 포섭되지 않고 끊임없이 그 본의가 무엇인지를 묻고, 자기 나름의 해답을 구해낸 이례적이고도 선구적인 유학자가 있었다. 그는 바로 일본 고의학(古義學)의 창시자 이토 진사이(伊藤仁齋, 1627~1705)이다. 그의 핵심 저작, 곧 「논어」와 「맹자」를 평생에 걸쳐 탐구하며 성인(聖人)의 뜻을 밝혀낸 저작 「논어고의」(論語古義)와 「맹자고의」(孟子古義)를 동시에 번역 출간하였다. ‘고의’(古義)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이 두 저작은 「논어」와 「맹자」의 옛 의미, 그 당시의 원래 의미를 탐구한다. 한나라에서부터 육조시대에 이르는 고주(古注)와 주자(주희)를 중심으로 한 송나라 시대의 신주(新注)를 섭렵한 끝에 이들과는 다른 「논어」, 「맹자」 해석의 길을 연 저작이다. 주자학에 가려진 경전의 의미를 밝힌 이 두 저작은 조선 땅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주체적인 해석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고전 연구상에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다. 특히 이 저작들은 일본사상사에서 전환적인 위치를 점유한다. 중국의 강력한 자장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불행히도 이후 흐름은 국수적인 國學으로 귀결하고 말았지만) 자신들만의 어떤 고유한 특질을 찾아내려는 집요한 연구 성격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본의를 집요하게 추적하고 “진사이는 논한다”라고 자신 있게 소신을 밝히는 학문 태도는 사상사와 무관하게 지금 여기에서도 유효하다. 먼지 쌓인 경전을 털어내고 ‘실학’(實學)으로써 세상에 펼쳐 보이는 그의 공부 방법은 고전 연구 현장에 적용할 가치가 높다. 「논어」와 「맹자」를 함께 읽는다 이토 진사이는 「논어」와 「맹자」의 시대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두 경전을 마치 하나의 텍스트인 양 대하고 있다. 그가 주장하는 ‘고의’, 즉 성인 공자가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가 바로 이 두 저작에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토 진사이 선집’으로 구성된 「논어고의」, 「맹자고의」, 「동자문」(童子問), 「어맹자의」(語孟字義, 미출간)는 모두 이 성인의 뜻, 성인의 도가 무엇인지 탐구하는 얼개들이다. 「동자문」이 질문과 대답의 형식으로 성인의 뜻과 그 핵심에 집중하고 있고(주제적이고) 「어맹자의」가 공자와 맹자의 개념을 풀이하고 있다면(개념적이라면), 「논어고의」와 「맹자고의」는 「논어」와 「맹자」를 읽어가며 성인이 말하는 도의 구체적인 내용과 보편적 성격을 밝히고 있다(내용적이다). 한마디로 「논어고의」와 「맹자고의」는 이토 진사이 고의학의 고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진사이에 따르면, 「논어」는 교(敎)를 말하지만 도(道)가 그 안에 있다. 반대로 「맹자」는 도를 말하지만 교가 그 안에 있다. 이를 섞어 읽으면, 「논어」는 공자의 가르침이 주를 이루지만 「맹자」의 거울을 비춰 보면 성인의 도, 즉 인의(仁義)의 의미가 구체화한다는 것이다. 또 「맹자」는 인의를 비롯한 몇몇 추상적인 개념과 문답의 논의가 주를 이루고 있는데, 공자의 가르침을 근거로 그 적실성을 얻음을 알 수 있다. 진사이는 말한다. “공자와 맹자의 도를 공부하는 사람은 「논어」와 「맹자」의 같은 점을 알아야 하고 또 다른 점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공자와 맹자의 근본 취지가 자연스레 명료해질 것이다.” “「논어」와 「맹자」 두 책의 말이 다른 점이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서로 보완이 되는 관계이다. 이것이 두 책의 핵심이며 학문의 목표다. 만약 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끝내 공자와 맹자의 문하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배우는 이들은 이 점을 깊이 주의해야 한다.” 이렇게 진사이는 「맹자고의」에서는 「논어」를, 「논어고의」에서는 「맹자」를 가져와서 두 경전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논의를 전개한다. 「논어고의」를 완성하고 「맹자고의」를 완성한 게 아니라 두 저술을 하나로 묶어 자신의 학문 양식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주자학의 근거였던 「맹자」를 추상의 그물에서 구출해내고 「논어」의 의소(義疏)로 삼음으로써 고의학만의 독특한 해석 근거로 삼기에 이르렀다. 비로소 성선설을 비롯한 인성론의 굴레를 벗고 민낯에 가까운 모습에 다가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성인의 도는 실질에 힘쓴다” 이토 진사이는 성인 문하의 학문은 “실제에 유용한 실학(實學)”이라고 단언한다. 실학이라는 말을 직접 쓸 정도로 그의 관심은 ‘실’에 집중되어 있고 그것으로써 「논어」와 「맹자」를 관통해 읽는다. 이 속에는 주자학이 불교에 대해 ‘허학’(虛學)이라고 비판했던 것을 그대로 되돌려주는 듯한 비판을 내포하고 있다. 추상적이고 은미한 도를 추구하고, 자기 자신의 수양과 ‘경’(敬)의 태도를 강조한 주자학에 대항해 진사이는 세상 경영과 일상 일용을 강조한다. 자기 수양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삶을 보살피고 편안히 하는 실질적인 행동이자 군자의 정치임을 강조하며 ‘실’을 경세의 토대라는 관점에서 구체화한다. 공부하는 사람이 할 일은 일상에서 실질적이고 평이한 도를 묵묵히 실행하는 것이다. 가까운 곳에서 도를 찾고 마음에 두고 잊지 않으면서 쉬운 일부터 해나가야 한다. 자신이 솔선한다면 백성들은 서로 일을 권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일은 멈춰지게 된다. 자신이 몸소 부지런히 하면 효과가 빠르게 나타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성과를 이루지 못하게 된다. 나아가 공자에 대해, 백성들을 교화하려 했다고, 아니 더 나아가 이들과 함께하려 했다고 평가한다. 공자의 인(仁)을, 남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마음으로 남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정치를 펼치겠다는 의지로 해석한다. 공자는 늘 실천했다. 말이 아니라 사상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몸을 놀려 움직이며 바삐 돌아다녔다. 괴롭다고 불평하지 않았으며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서운해하지 않았다. 자신의 주장을 일관되게 밀고 나갔으나 유연했고 사람들에게 예를 지켰지만 비굴하지 않았다. 그런 마음이며 태도이기에 덕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방정하지만 사납지 않고 엄정하지만 두려움을 주지 않는. 진사이가 “위대하다”고 한 말은 으레 하는 수사가 아니다. “공자는 세상을 근심하는 마음을 하루도 마음속에서 잊은 적이 없다. 그런 까닭에 그런 마음이 석경을 치면서 자연히 드러났던 것이다. …… 성인은 온 세상을 자기 한 몸처럼 보고, 백성들이 어지러운 세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자기 몸에 가려움증과 고통이 심한 것처럼 보았다.” 고전의 권위에 압도되거나 글로만 바라보지 않고 성인의 마음을 읽어내는 이토 진사이의 깊은 안목이 글 곳곳에 반영되어 있다. 이기론과 심성론에서 벗어난 유학 이토 진사이는 단언한다. “도란 완벽하게 바르고 명백해서 알기 쉽고 따르기 쉬우며, 천하와 만세에 두루 통용되며 잠시라도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지키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즐기기 어려운 것이다. 고원해서 도달할 수 없는 것은 도가 아니며 은미하고 까다로워 알 수 없는 것은 도가 아니다.” 때문에 그는 주자학의 여러 해석에 반대한다. 심성론에 기반한 이기론(理氣論)적 해석, 존천리거인욕(存天理去人慾)과 같이 인간의 욕망을 부정하는 논리, 어떤 고정된 실체나 진리를 상정한 듯한 본체론적 해석, 이발(已發)이니 미발(未發)이니 하는 사변적인 논의 등에 강한 거부반응을 보인다. 그것은 공자와 맹자 시대에는 없던 해석 틀로 후세의 유학자들이 덧씌운 것에 불과하다. 심하게 말하면 때로 그것은 불교와 노장의 허무맹랑한 이야기와도 별반 다르지 않은 이야기이다. 가령 주자학자들은 인간의 본성을 해명하면 근본적인 문제가 풀리고 이에 따라 사회와 국가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맹자」를 그 기초에 두었다. 성선설을 중심에 놓고 어떻게 하면 때 묻은 인간을 다시 선하게 만들 수 있는지 연구하였고, 따라서 현실성에 바탕한다기보다는 이론적인 정합성을 강조하였다. 이토 진사이는 주자학의 이런 추상화 작업이 「맹자」의 본모습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것으로 파악한다. 그는 성선(性善)의 논의 그 자체보다는 인성의 문제가 어떻게 선정(善政)의 문제로 확충할 수 있는가에 주목한다. 맹자는 “사람에겐 누구나 차마 해치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이를 실천하는 데까지 도달하는 것이 인(仁)”이라고 하였다. 다른 말로, 사단의 마음을 확충한다면 비록 그것이 미약할지라도 인의예지의 덕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사이는, 주자학자들은 이와 달리 “오로지 성(性)을 귀하게 여길 줄만 알지 확충 공부가 더 큰 줄은 모른다”며 비판한다. 「맹자」라는 텍스트는 맹자가 동시대의 제자백가들과 논쟁을 벌이며 유학을 통해 정치를 펼치려 노력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 유학의 이념이나 논리의 정합성, 경전으로서의 권위, 그런 것이 아니라왕과 제후들과의 문답, 제자들과의 문답, 맹자의 행적 등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현장 중계 같다. 이때 비로소 「맹자」는 유학 담론으로서가 아니라 이질적인 것들이 공존하는 현실의 언어로서 읽을 수 있다. 이토 진사이가 주자학 관련 주석을 광범위하게 참조했으면서도 결국에는 갈라지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공자와 맹자가 주장한 인의와 도덕을 추상적이고 심오한 무엇으로 해석하기보다는 현실에 들어맞는 합리적 사상으로 풀어간다는 점. 그리고 이 점이야말로 일본 사상사에서도 특이성을 발현되는 지점이자 유학에 있어서 ‘사고의 혁신’을 보여주는 지점이다. 이토 진사이는 묻는다. 유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유학자에게 정치란 무엇인가? 일상에서 만민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을 여는 것에 있음을 그는 「논어고의」와 「맹자고의」를 통해 계속 말하고 있다. 이 두 저작은 형이상학으로 색칠하지 않고, 현세의 삶을 꾸려가는 사람살이의 방법으로 고전을 재창조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접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