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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03
Sung Deuk Oak [全的 기독교] 우치무라 간조와 김교신-- 역사적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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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g Deuk O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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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的 기독교] 우치무라 간조와 김교신-- 역사적 관점
内村鑑三(1861-1930년)과 김교신(1901-1945)의 나이 차이는 40세요, 김교신은 우치무라 사후에 15년을 더 살았다. 따라서 1920년대의 김교신이 내촌의 무교회주의를 계승하고 성경적인 순수 복음의 기독교를 전하려는 측면이 강했다면, 1930-45년의 김교신은 좀 더 조선적 기독교, 30년대의 상황에서 나온 새로운 독자적인 면이 있을 것이다. 20년대에는 내촌과의 연속성(continuity), 30년대는 내촌과의 비연속성(discontinuity)의 관점에서 보면 좋을 것이다.
즉 1930년 이후의 김교신의 자료를 읽을 때에는, (1) 내촌이 경험하지 못했던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 교회의 신사참배(1935-45), 태평양전쟁(1941-45)이라는 조선의 정세, (2) 내촌에게 많은 영향을 준 독일루터교회가 1930년대 히틀러 치하에서 국가 종교로 타락해 간 역사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스승과 제자의 사상에 차이가 없을 수 없다. 일본과 조선의 상황이 같을 수 없었다. 신학은 상황에 토착화한다. 무교회주의가 현해탄을 건너오고 시공간이 바뀌었다면, 그 연속성과 함께 비연속성을 강조하는 게 마땅하다. 그게 역사가가 중시할 점이다.
오늘 한국기독교역사연구회 발표회에 시간이 없어 참석은 못했지만, 논문과 논평을 읽고 느낀 점을 쓴다. 김교신의 '전적 기독교'라는 말은 내촌에게는 없는 김교신이 만든 새로운 용어였다.
한국에서 1920년대에 '전적'이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 말의 반대는 '개적'이었다. 전체와 개별, 둘의 관계는 무엇인가가 철학적 문제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개별적, 부분적인 기독교란 곧 사적, 가족적, 부족적, 국가적 기독교이다. (그 부분적 전체로 참 신앙을 가진 개인을 억압하면) 거짓 기독교이다. 전체주의에 포섭되어 전적인 복음이 되기를 포기한 독일루터교회는 다가올 조선교회, 신사참배할 교회의 미래였다.
전적 기독교란 복음의 전체를 드러내는 기독교, 전 인류를 위하면서 (천하보다 한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원래 기독교를 말한다. 참 기독교, 진정한 기독교, 보편적 기독교이다.
요즘 말로 하면 사적 기독교가 아닌 공적 기독교이다. 김교신은 국가에 충성하는 기독교로 타락해 가는 독일 루터교회와 조선교회를 보면서 '전적 기독교'라는 말을 창안해서 사용했다.
"우리의 희망은 거대한 사업 성취나 신령한 사업 헌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인물의 출현에 있다. 비록 그가 그리스도처럼 세상에서 참패하더라도, 참 의미에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 더불어 생각하고 노동하는 자라면, 조선의 희망이 전적으로 그에게 있다."(김교신, "조선의 희망," 1937)
오늘 김교신이 살아 있다면 그는 사유화한 '세습 기독교'와 맘몬을 섬기는 대형 '사업 기독교'와 권력지향의 '정치 기독교'에 대항하는 말로 '전적 기독교'를 사용했을 것이다.
KOREANCHRISTIANITY.TISTORY.COM
김교신, "조선의 희망," 1937
"조선의 희망" 우리는 경험을 통해 부흥회로 교회에 영적 불이 붙는다고 해서 나라에 희망이 생기지 않음을 안다. 한 도시 전반이 기독교화 되어 상인까지 예수쟁이 행세를 해야 장사를 해도 희망이 약속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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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g Deuk Oak
제392회 학술발표회 논문과 논평은 http://www.ikch.org/home.php
Sung Deuk O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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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的 기독교] 우치무라 간조와 김교신-- 역사적 관점
内村鑑三(1861-1930년)과 김교신(1901-1945)의 나이 차이는 40세요, 김교신은 우치무라 사후에 15년을 더 살았다. 따라서 1920년대의 김교신이 내촌의 무교회주의를 계승하고 성경적인 순수 복음의 기독교를 전하려는 측면이 강했다면, 1930-45년의 김교신은 좀 더 조선적 기독교, 30년대의 상황에서 나온 새로운 독자적인 면이 있을 것이다. 20년대에는 내촌과의 연속성(continuity), 30년대는 내촌과의 비연속성(discontinuity)의 관점에서 보면 좋을 것이다.
즉 1930년 이후의 김교신의 자료를 읽을 때에는, (1) 내촌이 경험하지 못했던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 교회의 신사참배(1935-45), 태평양전쟁(1941-45)이라는 조선의 정세, (2) 내촌에게 많은 영향을 준 독일루터교회가 1930년대 히틀러 치하에서 국가 종교로 타락해 간 역사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스승과 제자의 사상에 차이가 없을 수 없다. 일본과 조선의 상황이 같을 수 없었다. 신학은 상황에 토착화한다. 무교회주의가 현해탄을 건너오고 시공간이 바뀌었다면, 그 연속성과 함께 비연속성을 강조하는 게 마땅하다. 그게 역사가가 중시할 점이다.
오늘 한국기독교역사연구회 발표회에 시간이 없어 참석은 못했지만, 논문과 논평을 읽고 느낀 점을 쓴다. 김교신의 '전적 기독교'라는 말은 내촌에게는 없는 김교신이 만든 새로운 용어였다.
한국에서 1920년대에 '전적'이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 말의 반대는 '개적'이었다. 전체와 개별, 둘의 관계는 무엇인가가 철학적 문제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개별적, 부분적인 기독교란 곧 사적, 가족적, 부족적, 국가적 기독교이다. (그 부분적 전체로 참 신앙을 가진 개인을 억압하면) 거짓 기독교이다. 전체주의에 포섭되어 전적인 복음이 되기를 포기한 독일루터교회는 다가올 조선교회, 신사참배할 교회의 미래였다.
전적 기독교란 복음의 전체를 드러내는 기독교, 전 인류를 위하면서 (천하보다 한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원래 기독교를 말한다. 참 기독교, 진정한 기독교, 보편적 기독교이다.
요즘 말로 하면 사적 기독교가 아닌 공적 기독교이다. 김교신은 국가에 충성하는 기독교로 타락해 가는 독일 루터교회와 조선교회를 보면서 '전적 기독교'라는 말을 창안해서 사용했다.
"우리의 희망은 거대한 사업 성취나 신령한 사업 헌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인물의 출현에 있다. 비록 그가 그리스도처럼 세상에서 참패하더라도, 참 의미에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 더불어 생각하고 노동하는 자라면, 조선의 희망이 전적으로 그에게 있다."(김교신, "조선의 희망," 1937)
오늘 김교신이 살아 있다면 그는 사유화한 '세습 기독교'와 맘몬을 섬기는 대형 '사업 기독교'와 권력지향의 '정치 기독교'에 대항하는 말로 '전적 기독교'를 사용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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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신, "조선의 희망," 1937
"조선의 희망" 우리는 경험을 통해 부흥회로 교회에 영적 불이 붙는다고 해서 나라에 희망이 생기지 않음을 안다. 한 도시 전반이 기독교화 되어 상인까지 예수쟁이 행세를 해야 장사를 해도 희망이 약속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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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 김교신, "조선의 희망," 1937
https://koreanchristianity.tistory.com/581?fbclid=IwAR0Nl7IlgfPGnRXXInwt-pDSlDd6T7JYpNE7iLgoam8ZP2DyomZyj2rjJW8 1/4
인물/김교신
김교신
조선의 희망
1937
사용자 lutheroak 2019. 4. 24. 06:18
"조선의 희망"
우리는 경험을 통해 부흥회로 교회에 영적 불이 붙
는다고 해서 나라에 희망이 생기지 않음을 안다 한
도시 전반이 기독교화 되어 상인까지 예수쟁이 행
세를 해야 장사를 해도 희망이 약속되지 않았다 교
회 부흥으로 靈火가 타올라도 안 되고 도시 聖市
化로 기독교가 힘을 가져도 신학생이 많고 신학교
가 부흥해도 구령 사업 선교 사업이 늘어나도 사회
변화의 희망은 생기지 않았다
차라리 양돈 양계를 해도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따
라 속이지 않을 때 거룩한 일을 하는 것이요 전 시
민에게 희망을 주는 대 사업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희망은 거대한 사업 성취나 신령한 사업 헌
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인물의 출현에 있
다 비록 그가 그리스도처럼 세상에서 참패하더라
도 참 의미에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 더불어 생
각하고 노동하는 자라면 조선의 희망이 전적으로
그에게 있다
김교신 조선의 희망 1937년 3월
옥성득 교수의 한국 기독교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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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2021 김교신, "조선의 희망," 1937
https://koreanchristianity.tistory.com/581?fbclid=IwAR0Nl7IlgfPGnRXXInwt-pDSlDd6T7JYpNE7iLgoam8ZP2DyomZyj2rjJW8 2/4
한 명의 루터가 일어나면 된다 한 명의 거룩한 양돈 전문가가 있으면 된다 비상한 酷寒에도 全滅을 면하면 된다 만인사제설은 사제를 치는 일반인의 권리 선언이 아니라 일상이 거룩한 목회지라는 나의 책임 선언이다 이웃도 그런 특권을 갖도록 노력하겠다는 나의 약속이다
Sung Deuk Oak
제392회 학술발표회 논문과 논평은 http://www.ikch.org/home.php
온실가스 3% 줄이는 원전, 핵 재앙 또다른 위험이 문제 - 중앙일보
온실가스 3% 줄이는 원전, 핵 재앙 또다른 위험이 문제 - 중앙일보
온실가스 3% 줄이는 원전,
핵 재앙 또다른 위험이 문제
[중앙선데이] 입력 2017.09.10 01:11 | 548호 27면 지면보기
[기후변화 리포트] 원자력의 기후 영향
일본 후쿠시마원전 사태로 핵 위험 문제가 다시 한 번 부각됐다. [중앙포토]2015년 파리 기후변화협약으로 화석연료에 기반을 둔 사회가 더는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석유·석탄·가스와 같은 화석연료를 태울 때 주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는 온실가스의 약 80%를 차지하므로, 이를 줄이는 것이 기후변화 대응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산화탄소는 평균 수명이 200년 이상 되므로 당장 배출을 멈추더라도 지구 온난화는 계속 진행된다. 하지만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감축해 기후변화의 위험을 줄일 수 있는 시간은 아직 남아 있다.
세계 450개 원전, 석유 대신해
산업·운송·농업은 가동 못 시켜
화석연료의 속박 탈피 어려워
과거 위험은 기술 결핍서 발생
지금은 문명의 과잉 진보가 초래
에너지 수요 증가해야 한다는 것
왜 당연히 받아들이는지 따져봐야화석연료 사용을 줄이는 것이 기술로만 달성될 수 있는지가 문제이다. 에너지원을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가능에너지로 전환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의견이 있다. 재생가능에너지로는 지금 소비하는 에너지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자력 발전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원전은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여 기후변화를 막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석유 수입 국가들의 에너지 안보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원자력은 전력을 생산하는 데만 사용된다. 화력발전소 대신에 원전을 사용하면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온실가스는 전력 부분에서만 발생하는 게 아니다. 전체 온실가스의 3분의 2 이상을 배출하는 산업, 운송, 농업 등은 원자력으로 가동될 수 없다. 즉 원자력은 온실가스 배출의 일부만을 해결할 수 있을 뿐이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450개 정도의 원전이 운행되고 있다. 이것은 약 3%의 온실가스를 감축시키는 효과가 있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는 파리 기후변화협약의 목표를 달성하려면, 온실가스 배출이 2050년에는 2010년에 비해 절반 수준이어야 하고 2100년 이후에는 거의 없어야 한다고 전망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50년까지 원전을 증가시켜 줄여야 할 온실가스의 6% 정도를 감축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이런 맥락에서 원전은 기후변화 대응의 완전한 해결책은 못된다.
프랑스는 원자력으로 전기의 약 75%를 생산해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1인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적다. 하지만 1인당 석유 소비량은 원자력을 상대적으로 적게 사용하는 주변 유럽국가와 비슷한 수준이다. 석유와 원자력의 용도가 같지 않아 원자력이 석유를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원전을 사용하든 말든 석유의 속박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원전이 에너지 안보를 위한 수단이 아님을 보여 주는 사례다.
알지 못한 원인으로 원전 사고 날 수도미래를 염두에 두지 않고 뿜어 낸 온실가스가 기후변화를 일으켰듯이, 원전은 또 다른 위험을 일으킨다. 원전 확대는 기후변화 문제로부터 다른 문제(핵폐기물, 핵 재난, 핵 확산)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다른 문제에 눈을 감는다면 원전 확대는 괜찮은 선택이다. 원전의 위험을 뒤로 감추고 기후변화 위험과 안전 중에서 선택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일 뿐만 아니라 서로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위험 중에서 선택하는 문제다.
위험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목걸이의 강도는 가장 약한 고리가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위험에 가장 취약한 곳이 전체의 안정성을 결정한다. 스리마일섬, 체르노빌, 후쿠시마 원전은 평소에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던 취약한 문제로 사고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앞서 발생한 원전 사고는 그 원인이 각기 달랐다. 앞으로 사고가 발생한다면 또 다른 미처 알지 못하는 원인으로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기후변화와 원전은 선형적인 단순계가 아니라 복잡계이므로 우리는 취약한 모든 곳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위험은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된다. 이제 필요한 것은 위험을 감지하고 감당하는 능력이다.
우리는 위험을 어느 정도 감수할 수 있는가? 인간은 제한된 합리성을 갖고 있다. 인간이 제한 없는 합리성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에 무슨 문제라는 게 있겠는가? 기후변화 대응과 원자력 사용에 합리적인 합의가 이루어지려면, 제한적 합리성을 가진 사람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위험을 어느 정도까지 수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적절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정부의 의사결정과 전문가의 의견이 신뢰받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정부와 전문가만이 위험 담론을 독점해서는 안 된다. 전문가도 자기 분야 외에선 전문가가 아니긴 매한가지다. 정책을 결정하는 데 과학기술은 일부의 요소일 수밖에 없다. 화석연료와 원자력 사용에 따른 혜택과 이에 따른 위험은 결코 전문가들의 논의만으로 정해질 수 없는 사회적 논의와 합의가 필요한 사안이다. 서로 다른 가치와 이해를 가진 시민들 사이의 논쟁은 불가피하다. 옳다, 그르다 하는 판단은 어떤 과학적 사실에 어떤 가치를 얼마나 두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기후변화와 원전은 우리 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위험은 우리 세대가 이익을 누렸기 때문에 우리 세대에만 피해를 주는 게 아니라, 미래 세대에게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 미래에 아무런 이익도 없이 위험만을 끌어안고 살아야 할 미래 세대들도 의사결정과정에서 고려해야 한다.
정부가 시민으로부터 신뢰를 얻는다는 것은 정보가 널리 공유되고 이를 바탕으로 시민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민주적 합의를 이뤄 내는 데 있다. 이는 기후변화 대응과 원자력 발전에 대한 찬반을 떠나 민주사회에서 위험을 다룰 때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민주적 합의는 단순히 당위적으로만 요청되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불안과 갈등을 방지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은 완전한 지식이 아니라, 인류가 최대한 밝혀낸 불완전한 지식이다. 이 때문에 위험을 통제하기 위해 또 다른 과학기술을 동원하지만, 오히려 새로운 위험의 원인이 되어 또 다른 부작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해결이 문제를 낳고 문제가 다시 해결을 낳는 순환고리로 인해 미지의 불확실한 세계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이 새로운 위험에 직면해서 우리는 우리 사회가 지향해온 가치를 다시 점검해야만 한다.
울리히 벡은 이를 ‘위험사회’로 특징지웠다. 과거 위험은 홍수·가뭄·지진·전염병처럼 자연에서 발생하는 외부적인 위험이며, 방재기술이나 보건위생 등의 결핍 때문에 발생했다. 선진사회에서는 결핍을 채움으로써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반면에 기후변화, 환경오염, 구제역, 조류 인플루엔자(AI), 원자력과 같은 현대 위험은 과거의 결핍을 메웠던 산업과 기술의 진보가 초래한 내재적 위험이며, 그것은 주로 결핍이 아닌 인류 문명의 과잉으로 발생한다. 이 위험은 실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도한 성공에서 오기 때문에 위험을 제어하기가 더욱 어렵다.
발전으로 인한 에너지 과소비 체계 바꿔야 기후변화와 원자력은 각각 문명의 결과이자 동력이었지만, 이로 인해 새롭게 직면한 위험이기도 하다. 에너지 소비에 기반을 둔 현재 삶을 유지하는 한, 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또한, 원전은 기후변화의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 문제는 에너지 과잉소비인데 기술적인 해결 방안만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곤경으로 몰아넣은 원인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 눈앞의 현실에만 몰두하게 하는 사고방식을 더욱 강화할 뿐이다.
기후변화는 대기의 화학 조성의 변화로 일어난 과학 문제이지만, 이 변화는 사회경제 체계의 변화에서 출발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 즉, 우리가 만들어 놓은 시스템으로 발생한 문제이기도 하다. 이 근원에는 에너지 소비를 더욱 늘리려는 욕망이 자리를 잡고 있다. 바로 이것이 기후변화를 일으키고 그 대응으로 원전을 선택하게 하는 시스템을 유지한다. 왜 에너지 수요가 항상 증가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것은 우리 스스로가 결정한 것이 아니라 시스템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발전만을 생각할 게 아니라 발전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도 함께 성찰해야 한다. 발전으로 인한 에너지 과소비 체계를 바꾸는 선택을 지금 하지 않으면 앞으로는 선택이 아닌 시련을 겪어야 한다. 위험은 가능성일 뿐만 아니라 미래에 일어날 재앙을 피하려고 현재의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이를 통해 미래는 주어지는 게 아니라 이루어 가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위험은 단순한 재해가 아니라 삶과 사회를 바꾸는 발판이 될 수 있고 그렇게 되도록 해야만 한다.
“빈곤은 위계적, 스모그는 민주적”
현대 위험은 자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지배하려는 인류문명에서 비롯한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사진)은 이 위험의 불확실성을 통제하기 위해 더 많은 합리적 통제와 제도를 동원하지만, 불확실성만 더욱 증대되는 것이 위험사회라고 정의하였다. 이 위험은 ‘눈앞의 위험’이라기보다는 ‘직접 감지되지는 않는 위험’이다. 직접 감지되지 않는다는 것이 현대사회에 불안을 일으킨다.
울리히 벡은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근대사회는 불평등을 극복하기 위해 투쟁한 시대였지만, 현대는 위험 앞에 누구나 평등하게 노출된 사회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근대사회의 변화 동력이 ‘나는 배고프다’에서 시작했다면, 현대사회에서는 ‘나는 두렵다’는 불안을 기반으로 한다. 울리히 벡은 풍요로운 사회를 향한 근대화 과정이 위험 사회로 귀착한 과정을 되짚어 보고, 산업사회의 핵심이었던 부의 분배를 위험의 분배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천호 국립기상과학원(책임운영기관) 원장
국립기상과학원 원장. 연세대 대기과학 박사. 국립기상연구소 지구대기감시센터장, 지구환경시스템연구과장, 기후연구과장 역임. 미국 지구시스템과학원 지구대기감시연구소 탄소순환연구실 연구원.
온실가스 3% 줄이는 원전,
핵 재앙 또다른 위험이 문제
[중앙선데이] 입력 2017.09.10 01:11 | 548호 27면 지면보기
[기후변화 리포트] 원자력의 기후 영향
일본 후쿠시마원전 사태로 핵 위험 문제가 다시 한 번 부각됐다. [중앙포토]2015년 파리 기후변화협약으로 화석연료에 기반을 둔 사회가 더는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석유·석탄·가스와 같은 화석연료를 태울 때 주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는 온실가스의 약 80%를 차지하므로, 이를 줄이는 것이 기후변화 대응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산화탄소는 평균 수명이 200년 이상 되므로 당장 배출을 멈추더라도 지구 온난화는 계속 진행된다. 하지만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감축해 기후변화의 위험을 줄일 수 있는 시간은 아직 남아 있다.
세계 450개 원전, 석유 대신해
산업·운송·농업은 가동 못 시켜
화석연료의 속박 탈피 어려워
과거 위험은 기술 결핍서 발생
지금은 문명의 과잉 진보가 초래
에너지 수요 증가해야 한다는 것
왜 당연히 받아들이는지 따져봐야화석연료 사용을 줄이는 것이 기술로만 달성될 수 있는지가 문제이다. 에너지원을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가능에너지로 전환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의견이 있다. 재생가능에너지로는 지금 소비하는 에너지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자력 발전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원전은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여 기후변화를 막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석유 수입 국가들의 에너지 안보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원자력은 전력을 생산하는 데만 사용된다. 화력발전소 대신에 원전을 사용하면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온실가스는 전력 부분에서만 발생하는 게 아니다. 전체 온실가스의 3분의 2 이상을 배출하는 산업, 운송, 농업 등은 원자력으로 가동될 수 없다. 즉 원자력은 온실가스 배출의 일부만을 해결할 수 있을 뿐이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450개 정도의 원전이 운행되고 있다. 이것은 약 3%의 온실가스를 감축시키는 효과가 있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는 파리 기후변화협약의 목표를 달성하려면, 온실가스 배출이 2050년에는 2010년에 비해 절반 수준이어야 하고 2100년 이후에는 거의 없어야 한다고 전망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50년까지 원전을 증가시켜 줄여야 할 온실가스의 6% 정도를 감축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이런 맥락에서 원전은 기후변화 대응의 완전한 해결책은 못된다.
프랑스는 원자력으로 전기의 약 75%를 생산해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1인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적다. 하지만 1인당 석유 소비량은 원자력을 상대적으로 적게 사용하는 주변 유럽국가와 비슷한 수준이다. 석유와 원자력의 용도가 같지 않아 원자력이 석유를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원전을 사용하든 말든 석유의 속박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원전이 에너지 안보를 위한 수단이 아님을 보여 주는 사례다.
알지 못한 원인으로 원전 사고 날 수도미래를 염두에 두지 않고 뿜어 낸 온실가스가 기후변화를 일으켰듯이, 원전은 또 다른 위험을 일으킨다. 원전 확대는 기후변화 문제로부터 다른 문제(핵폐기물, 핵 재난, 핵 확산)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다른 문제에 눈을 감는다면 원전 확대는 괜찮은 선택이다. 원전의 위험을 뒤로 감추고 기후변화 위험과 안전 중에서 선택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일 뿐만 아니라 서로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위험 중에서 선택하는 문제다.
위험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목걸이의 강도는 가장 약한 고리가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위험에 가장 취약한 곳이 전체의 안정성을 결정한다. 스리마일섬, 체르노빌, 후쿠시마 원전은 평소에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던 취약한 문제로 사고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앞서 발생한 원전 사고는 그 원인이 각기 달랐다. 앞으로 사고가 발생한다면 또 다른 미처 알지 못하는 원인으로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기후변화와 원전은 선형적인 단순계가 아니라 복잡계이므로 우리는 취약한 모든 곳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위험은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된다. 이제 필요한 것은 위험을 감지하고 감당하는 능력이다.
우리는 위험을 어느 정도 감수할 수 있는가? 인간은 제한된 합리성을 갖고 있다. 인간이 제한 없는 합리성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에 무슨 문제라는 게 있겠는가? 기후변화 대응과 원자력 사용에 합리적인 합의가 이루어지려면, 제한적 합리성을 가진 사람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위험을 어느 정도까지 수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적절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정부의 의사결정과 전문가의 의견이 신뢰받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정부와 전문가만이 위험 담론을 독점해서는 안 된다. 전문가도 자기 분야 외에선 전문가가 아니긴 매한가지다. 정책을 결정하는 데 과학기술은 일부의 요소일 수밖에 없다. 화석연료와 원자력 사용에 따른 혜택과 이에 따른 위험은 결코 전문가들의 논의만으로 정해질 수 없는 사회적 논의와 합의가 필요한 사안이다. 서로 다른 가치와 이해를 가진 시민들 사이의 논쟁은 불가피하다. 옳다, 그르다 하는 판단은 어떤 과학적 사실에 어떤 가치를 얼마나 두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기후변화와 원전은 우리 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위험은 우리 세대가 이익을 누렸기 때문에 우리 세대에만 피해를 주는 게 아니라, 미래 세대에게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 미래에 아무런 이익도 없이 위험만을 끌어안고 살아야 할 미래 세대들도 의사결정과정에서 고려해야 한다.
정부가 시민으로부터 신뢰를 얻는다는 것은 정보가 널리 공유되고 이를 바탕으로 시민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민주적 합의를 이뤄 내는 데 있다. 이는 기후변화 대응과 원자력 발전에 대한 찬반을 떠나 민주사회에서 위험을 다룰 때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민주적 합의는 단순히 당위적으로만 요청되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불안과 갈등을 방지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은 완전한 지식이 아니라, 인류가 최대한 밝혀낸 불완전한 지식이다. 이 때문에 위험을 통제하기 위해 또 다른 과학기술을 동원하지만, 오히려 새로운 위험의 원인이 되어 또 다른 부작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해결이 문제를 낳고 문제가 다시 해결을 낳는 순환고리로 인해 미지의 불확실한 세계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이 새로운 위험에 직면해서 우리는 우리 사회가 지향해온 가치를 다시 점검해야만 한다.
울리히 벡은 이를 ‘위험사회’로 특징지웠다. 과거 위험은 홍수·가뭄·지진·전염병처럼 자연에서 발생하는 외부적인 위험이며, 방재기술이나 보건위생 등의 결핍 때문에 발생했다. 선진사회에서는 결핍을 채움으로써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반면에 기후변화, 환경오염, 구제역, 조류 인플루엔자(AI), 원자력과 같은 현대 위험은 과거의 결핍을 메웠던 산업과 기술의 진보가 초래한 내재적 위험이며, 그것은 주로 결핍이 아닌 인류 문명의 과잉으로 발생한다. 이 위험은 실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도한 성공에서 오기 때문에 위험을 제어하기가 더욱 어렵다.
발전으로 인한 에너지 과소비 체계 바꿔야 기후변화와 원자력은 각각 문명의 결과이자 동력이었지만, 이로 인해 새롭게 직면한 위험이기도 하다. 에너지 소비에 기반을 둔 현재 삶을 유지하는 한, 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또한, 원전은 기후변화의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 문제는 에너지 과잉소비인데 기술적인 해결 방안만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곤경으로 몰아넣은 원인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 눈앞의 현실에만 몰두하게 하는 사고방식을 더욱 강화할 뿐이다.
기후변화는 대기의 화학 조성의 변화로 일어난 과학 문제이지만, 이 변화는 사회경제 체계의 변화에서 출발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 즉, 우리가 만들어 놓은 시스템으로 발생한 문제이기도 하다. 이 근원에는 에너지 소비를 더욱 늘리려는 욕망이 자리를 잡고 있다. 바로 이것이 기후변화를 일으키고 그 대응으로 원전을 선택하게 하는 시스템을 유지한다. 왜 에너지 수요가 항상 증가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것은 우리 스스로가 결정한 것이 아니라 시스템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발전만을 생각할 게 아니라 발전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도 함께 성찰해야 한다. 발전으로 인한 에너지 과소비 체계를 바꾸는 선택을 지금 하지 않으면 앞으로는 선택이 아닌 시련을 겪어야 한다. 위험은 가능성일 뿐만 아니라 미래에 일어날 재앙을 피하려고 현재의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이를 통해 미래는 주어지는 게 아니라 이루어 가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위험은 단순한 재해가 아니라 삶과 사회를 바꾸는 발판이 될 수 있고 그렇게 되도록 해야만 한다.
“빈곤은 위계적, 스모그는 민주적”
현대 위험은 자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지배하려는 인류문명에서 비롯한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사진)은 이 위험의 불확실성을 통제하기 위해 더 많은 합리적 통제와 제도를 동원하지만, 불확실성만 더욱 증대되는 것이 위험사회라고 정의하였다. 이 위험은 ‘눈앞의 위험’이라기보다는 ‘직접 감지되지는 않는 위험’이다. 직접 감지되지 않는다는 것이 현대사회에 불안을 일으킨다.
울리히 벡은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근대사회는 불평등을 극복하기 위해 투쟁한 시대였지만, 현대는 위험 앞에 누구나 평등하게 노출된 사회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근대사회의 변화 동력이 ‘나는 배고프다’에서 시작했다면, 현대사회에서는 ‘나는 두렵다’는 불안을 기반으로 한다. 울리히 벡은 풍요로운 사회를 향한 근대화 과정이 위험 사회로 귀착한 과정을 되짚어 보고, 산업사회의 핵심이었던 부의 분배를 위험의 분배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천호 국립기상과학원(책임운영기관) 원장
국립기상과학원 원장. 연세대 대기과학 박사. 국립기상연구소 지구대기감시센터장, 지구환경시스템연구과장, 기후연구과장 역임. 미국 지구시스템과학원 지구대기감시연구소 탄소순환연구실 연구원.
2001 "한국은 기후난민이 되는 쪽, 멀뚱멀뚱 하는 게 위기" - ::: 글로벌 녹색성장 미디어 - 이투뉴스
[직격인터뷰] "한국은 기후난민이 되는 쪽, 멀뚱멀뚱 하는 게 위기" - ::: 글로벌 녹색성장 미디어 - 이투뉴스
[직격인터뷰] "한국은 기후난민이 되는 쪽, 멀뚱멀뚱 하는 게 위기"
이상복 기자
승인 2020.01.01 08:20
댓글 6
조천호 전 국립기상과학원장 (경희사이버대 특임교수)
서해 관측소서 온실가스 급변 확인 30년간 연구 천착
"기후위기 근본원인은 결핍이 아니라 과잉, 국가책임"
▲조천호 전 국립기상과학원장
[이투뉴스] “안면도가서 1년쯤 쉬다 와라” 인사권자(기상청장)에 자주 직언(直言)한 대가는 외딴 연구소로의 발령이었다. 2005년 국립기상과학원 안면도기후감시센터. 조천호 당시 기상연구소 과장의 새 근무지는 태안반도 서쪽 끝자락에 들어선 작은 관측소였다. 20여년간 ‘기상판’에서 날씨만 다루다 기후연구를 맡은 것도 처음. 하지만 격지 생활은 인생의 변곡점이 됐다. 예사롭지 않은 온실가스 변화를 직접 확인했다. ‘심상치 않다’는 직감이 들었지만, 그에 대해 설명해주는 이도 없었고 스스로 설명하지도 못했다. 이태 전 국립기상과학원장을 끝으로 공직에서 내려올 때까지 기후연구에 천착한 이유다. 지난 21일 서울 통인동 에너지전환포럼 ‘공간 1.5’에서 조 전 원장을 만났다. 그는 ‘번잡하게 흩어진 앎의 조각들을 모으고 연결해(책 서문 中)' 작년 3월 <파란하늘 빨간지구>(동아시아)를 펴냈다. 2016년부터 신문과 웹진 등에 연재한 글을 다듬어 엮은 것이다. 최근 기후변화 대중강연 요청이 쇄도해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과학은 물론 역사, 사회, 문화 전반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당면한 기후위기를 쉽게 풀어 설명해 줘 반향이 뜨겁다.
-15년 전 안면도에 내려가 확인한 건 무엇인가
“그전까지는 아무생각이 없었다. 왜 그런 시설(기후감시센터)이 있을까, 그냥 연구하는 곳인가 보다 했다. 그런데 일을 하다 보니 예사롭지 않았다. 뭔가 있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됐다. 변화가 확확 보였으니까. 그래서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내 자신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직관적인 느낌과 인식으로 깨닫게 되어 아는 것과 그 차이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했다. 지구 평균기온이 조금만 더 오르면 큰일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가을철엔 하루에도 20℃가 변한다. 우리보다 10℃ 낮은 북쪽나라에서도 잘 살고 있고, 반대인 남쪽나라도 살만하다. 그런데 왜 문제라는 걸까. 이걸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해야 하나 스스로 굉장히 답답했다.”
- 기후변화와 거리가 먼 분야는 아니잖나
“논문에서 기후변화는 ‘악기상(惡氣象)이 많아진다’, ‘재해성이 많아진다’ 정도로 표현된다. 그건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국내외 관련서적과 논문을 모두 찾아봤다. 그러면서 스스로 설명이 안 되는 부분들을 하나씩 채워갔다. 당시만 해도 IPCC(기후변화에관한정부간협의체)가 1990년대에 1차 보고서 낼 때 21세기말이 되면 경제성장을 지속하면서 온실가스를 줄이지 않을 경우 산업혁명 이후 평균기온이 4~5℃ 상승할 것이라고 했다. IPCC 보고서는 5~6년마다 업데이트 되는데, 그 내용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문제는 그게 급변적으로, 굉장히 파국적인 상황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거다. 지난해(2018년) IPCC보고서가 중요한 건 1.5℃ 이상일 때부터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경고한 거다.”
- 재앙으로 달려가는 속도가, 시간이 짧아졌다는 뜻인가?
“속도가 빨라진 게 아니다. 파국이 1.5℃ 이상일 때도 시작될 수 있다는 게 충격적인 내용이다. 과학으로 미래를 예측할 때 항상 불확실성이란 게 있지만, IPCC는 사실 매우 보수적인 곳이다. 전 세계 기후과학자들이 동의하는 내용만 보고서에 담긴다. 그러다보니 설령 합리적이더라도 누구나 인정하기 어렵다거나 검증이 안 되는 건 실지 못한다. 그런 부분을 미래 예측 시뮬레이션에 넣지 못한다. 가령 기후변화로 영구동토층이 녹아내릴 위험이 있다거나, 북극해의 메탄하이드레이트가 끓어오를 수 있다거나 그런 모델을 (시뮬레이션에) 걸 수 없다. 다 빠져 있다. 또 빙하가 녹아내리는 속도 계산 역시 두께가 2~3km에 달하고 폭이 수천km인 것을 표면부터 녹는다고 가정하고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해수면이 20cm가 올랐으니까, 앞으로 금세기말까지 90cm가 더 오르는 상황이 시나리오상 극단이다.”
- 가장 우려되는 시나리오는
“사탕을 입안에서 녹이면 천천히 오래간다. 그건 과학으로 온도 등을 측정해 정확이 계산할 수 있다. 빙하가 녹는 것도 그렇다. 문제는 그 빙하가 불안정해져 깨지고 쪼개지는 상황이다. 입안의 사탕을 깨무는 순간 표면이 늘어나 순식간에 녹는다. 그런데 우린 빙하가 언제 어떻게 깨질지 모른다. 그런 건 예측의 범주 안에 없다. 그런 걸 하나도 고려하지 않는 예측모델을 쓰고 있다. 우리의 예측은 운에 맡기는 수준이다. 지금 예측하는 건 가장 기본적인 위험 수준이다. 거기에 더해지는 위험이 있다고 보는 게 맞다. 과학에선 검증도 안되고 불확실한 것은 시뮬레이션에 넣을 순 없으니 다 뺐다. 현재의 위험이란 건 그런 거다.”
- 2018년 인천 IPCC 총회는 어쨌든 1.5℃ 이내로 막아야 한다고 했다.
“불확실성을 고려하지 않은 예측모델로도 1.5℃ 상승에 파국이 온다는 뜻이다. 온도가 조금 더 오르면 폭염이 오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네이처>에 실린 논문을 보면 단 0.5℃만 올라도 식량부족으로 고통 받는 사람이 3500만 명에 이르게 된다. 거기서 0.5℃가 더 올라 2.0℃가 되면 농업생산량 변화가 크게 일어나 3억6000만 명이 기아에 시달리게 된다. 만약 3.0℃가 오르면 그 수가 18억 명에 달하게 된다. 이건 어떤 한사람 연구결과를 정리한 게 아니다. 여러 연구결과를 모아 정리한 거다. 그런 기아사태가 벌어지면 사회 불안정은 어떻겠나.”
- 0.5℃ 변화가 그렇게나 위험한 건가
“시리아 난민 사태는 2010년 러시아 가뭄으로 밀가루 가격이 몇 달 새 60% 폭등하면서 시작됐다. 이미 2005년부터 가뭄이 들기 시작하는 상황이었는데, 소득의 대부분을 식량구입에 사용하던 가난한 이들이 가격 폭등을 참지 못해 폭동을 일으키고, 그게 내전으로 이어져 IS까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내전을 피해 식량을 구하려는 이들이 난민이 됐다. 그들이 유럽으로 밀려가니 유럽연합에선 국가안보의 문제가 됐다. EU국가들이 분산해 수용하자고 했는데, 영국은 난민을 안 받겠다면서 블렉시트를 선택했다. 러시아의 가뭄이 전혀 엉뚱한 곳에서 새로운 문제로 파생된 거다. 앞으로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증폭돼 일어날 거다. 단순하게 0.5℃ 가 올라가는 문제가 아니다. 악기상이 약간 늘어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사회 불안정으로 이어진다는 얘기다. 과거 역사로 볼 때 그럴 때 국가나 사회가 아끼고 나누면서 문제를 해결한 적은 없다. 전쟁을 벌였다. 굉장한 사회불안이다. 위기는 그런식으로 온다. 지금보다 단 0.5℃가 오르면 그런 위기가 올 수 있다. 모든 데이터가 그렇다고 말한다.”
- 국부(國富)가 넉넉한 나라는 좀 낫지 않을까
“우리나라 식량 자급률은 25%에 불과하다. 지금이야 반도체나 스마트폰, 중화학공업을 수출해 식량을 수입하면 된다. 러시아도 가뭄이 있기 전 밀을 수출하던 나라였다. 그런데 자급도 어려워지자 수출을 못했고, 전 세계 밀가루 가격이 올라갔다. 물론 현재 식량의 4분의 1은 쓰레기로 버려지는 상황이라 총량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곡물은 투기자본이 매달려 있어 1%만 과잉생산만 해도 가격이 폭락하고 반대의 경우 폭등한다. 생산량에 따른 가격 민감성이 높다. 가난한 나라가 먼저 피해를 볼 수는 있다. 하지만 전 지구적 수급에 문제가 생긴다면 얘기가 다르다. 지금처럼 우리가 수출을 통해 안정적으로 식량을 공급받을 수 있을까? 0.5℃가 올라갈 때마다 기아자가 3500만명에서 3억6000만명으로, 다시 18억명으로 증가한다. 그 얘긴 이런 일이 아시아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 아시아, 특히 한국도 안전지대가 아니란 얘긴데
“올초 호주 안보전략가들이 기후보고서를 냈다. 언론에서 잘 다뤄지지 않은 내면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대륙에서 사는 이들은 자기들 머리 위에 사는 35억명을 걱정한다. 인구밀도도 높고 아시아몬순이란 비로 농업생산을 해 먹고 사는데, 본격적인 기후위기로 진입하게 되면 아시아몬순 자체에 문제가 생겨 상당히 많은 아시아 국가에서 기근사태가 일어날 것으로 본다. 강수대 폭이 변하면 충분히 그럴 개연성이 있다. 보수적으로 예측한다고 해도 그렇다. 다만 그 숫자가 1억명이냐, 5억명이냐 그런 불확실성은 있다. 호주입장에선 나중에 배나 비행기를 타고 난민들이 이들 지역서 몰려올 수 있다고 걱정하는 거다. 그렇게 됐을 때 어디서부터 차단해야 하나 뭐 그런 걸 걱정하지 않겠나.”
- 한국이 기후문제의 원인자란 생각은 해봤어도 피해 당사자가 될 것이란 생각은 못해 봤다.
“결국은 배고픔의 문제, 식량부족의 문제다. 그렇게 난민이 된다. 이미 미국도 2000년대 초반 그런 대응 시나리오를 만든 적이 있다. 먹을 게 부족하면 사회가 극도로 불안정해지고, 결국 그 땅을 떠나 살만한 곳으로 몰리게 된다. 그런 면에서 우린 (난민)대상이 되는 쪽이다. 과연 억명 단위로 기아사태가 왔을 때도 수출로 식량을 구할 수 있을까. 곡물 수출국이 그 때가 되어도 안정적인 생산‧수출이 가능할지 따져봐야 한다. 그런데 그걸 걱정하는 이들은 따로 있고, 우린 멀뚱멀뚱 하고 있다. 이게 더 위기다. 기후위기가 문제가 아니라 기후위기를 인식 못하는 것, 그것이 진짜 위기다.”
- 우린 온실가스 다배출국가면서도 신규석탄을 건설하고 있다
“서구 투자사들은 석탄화력에서 자본을 모두 뺐다. 국부펀드도 더 이상 투자하지 않겠다고 압박한다. 세상은 그렇게 변하는데 대한민국은 과거 성공방식에 여전히 집착하고 있다. 석탄발전소를 새로 건설하고,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가서 건설하도록 융자를 해주고 있다. 세상의 에너지 패러다임이 모두 변하고 있는데 ‘태양광판이 눈부시다’, ‘환경을 파괴한다’고 지적한다. 물론 졸속도 있다. 하지만 전환이란 가치를 갖고 어떻게 보완할지를 얘기해야 한다. 태양광 패널은 지난 10년간 가격이 5분의 1이 됐고 배터리 가격도 급락했다. 이렇게 가격혁신이 일어나는 분야가 어디있나. 다른 주요국들이 어마어마한 혁신이라며, 세상이 변하고 있다고 하는데 우린 과거의 성공만 쥐고 앉아 있다. 태양광을 하기에 국토가 좁다면 옥상이 벽면 등 굉장히 전환적인 준비들을 해나가야 한다. 그런데도 좌초자산이 될 석탄화력만 붙들고 있다. 과거 성공방식에 집착하는 시스템이다. 전환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는다. 이젠 시장의 논리로도 들어가면 안된다.”
- 유독 한국서 에너지전환 논의가 정쟁화 되고 있다.
“원자력 같은 경우가 그렇고, 재생에너지도 그 수준으로 들어가 힘을 못 쓰고 있다. 원자력은 위험도 위험이지만 이미 시장논리로도 끝났다고 본다. 일본 도시바가 터키와 영국 진출했다가 수조원을 손실보고 나왔다. 우린 일부서 원전을 짓자고 하고, 수출산업화를 운운하지만 그렇게 이익이 남는 사업이라면 왜 그런 경쟁력을 놔두고 해외사업서 정부더러 돈을 대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옛 소비에트가 왜 망했나. 자본주의 논리에 그렇게 철저한 이들이 그럴 때면 소비에트 시스템을 요구한다. 그게 무슨 진짜 경쟁력인가. 원전을 최소 40년 가동한다고 하면 그 기간 다른 에너지는 어마어마한 기술혁신이 될거다. 지금까지의 성공방식이 앞으로도 지속될 거라고 보고 과거에만 집착하고 있다.”
- 한 나라의 사회‧경제 시스템은 관성이 클 수밖에 없지 않을까
“독일은 우리보다 위도가 높은 나라다. 그런데도 재생에너지 비중이 40%가 넘는 지역이 많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재생에너지가 10%를 넘어서면 기저전력이 불안해진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40%를 운영하는 단계다. 논문으론 100%도 가능하다고 한다. 10년 전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기술혁신이다. 그간 원전은 기술혁신이 있었나. 이런 변화를 안 따라가고 파산자본이 될 여지가 큰 걸 계속 잡겠다는 거다. 또다른 측면에선 우리가 계속 이대로 가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앞서 말했듯 기후위기가 사회적 불안정성을 갖는 위험체계로 들어가게 됐을 때 전 세계가 화석연료를 보는 관점이 달라질 거다. 그땐 강제적이 될 거다. 그런 면에서 빨리 전환이 되도록 해야 하는데, 굉장히 느긋하다. 위기가 2100년대에 일어난다는 가정에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유럽에선 태양광과 풍력이 어마어마하게 확산되고 있고, 미국은 파리협정 탈퇴에도 화석연료를 줄이고 있다. 우리나라만 한손에 원자력, 다른 한손에 석탄화력을 쥐고 있다. 우리 경제구조가 중국이나, 인도, 러시아가 아니잖나. 영토가 크고 인구가 많아 자체로 버틸 힘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시다시피 RE100이나 국경탄소세처럼 우리가 변하지 않더라도 강제로 (변화)당할 상황이다. 유럽시장 하나만 잃어도 파산이 일어날 텐데, 그런 나라가 국경을 탄소가 넘어오도록 허용하겠나. 당장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필연적으로 가야할 길인데, 전환하면 이런저런 어려움이 있다고 하니 굉장히 느긋한 이야기로 들린다.”
- 빠른 전환을 위해 우리가 감수해야 할 부분은
“지구 평균기온 상승을 1.5℃ 이내로 막으려면 엄청난 양의 탄소를 줄여야 한다. 2030년까지 전 세계가 2010년 배출량의 45%로 수준으로 줄여야 하고, 2050년에는 넷제로(순배출량 ‘0’)로 가야한다. 지금 갖고 있는 상식과 관성으론 달성하기 어렵다. 생각조차도 못해 본 수준이다. 지금은 전시상황이다. 줄여야 하는 양으로 따지면 매년 18%씩 감축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1998년 IMF 때 14%가 줄었다. 이젠 전 세계가 한꺼번에 그 수준으로 줄여야 한다. 그러니 전시상황이랄 수밖에. 그런데 꼭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미국이 약간 늦게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모든 산업을 군수산업으로 전환하는데 걸린 시간이 불과 1~2년이다. 자동차를 만들다가 탱크를 만들고, 징집된 남성을 대신해 여성이 공장으로 들어가 일했다. 사회적으로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러나 2년 만에 모든 산업구조를 그렇게 뒤엎었다. 수십년이 걸리는 일이 아니다.”
- 전시(戰時)라고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거다
“이 기회에 밀어붙여야 한다고 본다. 유발하라리가 쓴 <싸피엔스>엔 '허구를 발명한 인간이 위대하다'는 내용이 있다. 사실 돈이란 게 종이 쪼가리가 아닌가. 그러나 돈에 교환가치가 있고 물질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순간에 가치를 갖게 된다. 법전 역시 종이에 쓰여 있지만 사람들이 이건 지켜야 한다고 하면 우리를 지배하지 않나. 물질적인 것으로만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허구에 믿음을 부여하는 순간, 그래서 우리가 믿고 사람들의 신뢰가 한꺼번에 모아지면 불가능하지 않다. 그렇게 수십년씩 걸릴 일이 아니다. 문명도 그렇게 만들어진 것 아니겠나.”
- 어디서부터 돌파구를 찾아야 할까
“오늘날 기후위기의 근본원인은 결핍이 아니라 과잉 탓이다. 현재도 식량의 4분의 1이 쓰레기로 버려진다. 공산품도 생산과잉이다. 그런데도 우린 여러 문제를 이야기 할 때 항상 경제를 성장시켜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경제성장이란 물질의 팽창을 더 시키자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문제는 결핍 때문에 일어난 게 아니다. 이런 모순에 제동을 걸지 않으면 안된다. 세상 모든 일은 어떤 견제와 균형의 작업이 필요하다. 자본과 노동, 기업과 노동자 등 모두 타협점이 필요하다. 어떤 하나의 방향으로 결정할 수 없다. 그런데 유독 성장과 관련해서는 견제나 균형이 없다. 지구는 한계가 있고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다. 이 상태로 인구가 늘고 소득이 증가하면 당연히 에너지소비도 지금보다 많아지고 식량도 더 필요하게 된다. 그런데 인간은 2차대전 이후 지구가 견뎌낼 수 없을 만큼 일을 벌리고 있다. 이 상태로 계속 가다간 필연적으로 붕괴한다. 예를 들어 유리접시 안에 세균 한 마리 풀어놓으면 갑절로 불어나면서 증가해 접시 절반을 차지할 때까지는 꽤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절반을 넘어서 한 세대를 넘어가면 모든 영양분을 빨아들이고 절멸한다. 역사적으로 봐도 과거 모든 문명들은 물질적 소비가 최고치에 이른 다음, 도시가 최대로 팽창한 다음, 복잡성이 굉장히 늘어난 상황에서 몇 십년 뒤 훅 하고 무너졌다. 지구는 거의 그 수준에 임박해 있다. 기후뿐만이 아니라 모든 시그널이 그렇다. 더욱이 과거엔 개별 문명이라 어느 한 곳이 무너지면 다른 문명이 일어서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모두 묶여 있다. 한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순차적으로 다 같이 무너진다. 더욱이 우린 (붕괴하는)앞쪽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이번 문명이 무너진다면, 인류문명의 붕괴가 아닐까 생각한다.”
- 욕망으로 가득찬 인류가 이런 미증유의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사회란 협력하고 연대하고 돌보고, 나누는 것이 최우선 가치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싸게 에너지와 자원을 착취하고, 쓰레기를 버릴까 하는 시장논리 뿐이다. 안전하게 숨 쉴 수 있고 먹을 수 있는, 지속가능한 안전보다 더 우위에 있는 가치가 있나? 그래서 유엔은 대전환(Great transformation)만이 기후위기에 대응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공학적으로 어느 부분을 손보거나 개별적으로 온실가스를 줄여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다. 정치, 경제, 사회 분야의 모든 체계를 바꿔야 한다. 경제성장이 가파를수록 빈부격차는 커진다. 이제 뒤집어 생각해 볼 때다. 기후위기란 것 자체도 어떤 면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게 해주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럭저럭 넘길 수 있는 위기라면, 위기인 줄도 모르고 넘어갈 수 있다. 오히려 기후위기 앞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는 그런 여지가 생길 수 있다. 과거 역사를 보면 소빙하기 때 무척 어려웠다. 우리나라도 1700년대 경신대기근 당시 이조실록 보면 비참하기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오늘날 문명의 맥아가 탄생한 게 다 소빙하기 때다. 자기 땅에서 살만하다면 왜 영토를 개척하러 갔겠나. 지금의 위기라는 것도 또 한 번의 새로운 도약,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 수 있는 여지가 되지 않을까. 나누고 아끼는 그런 가치들이 다시 우선순위가 되는 사회로 만들어가는...”
- 온실가스든, 기후위기든 눈에 보이지 않아 개개인의 각성이 더 어렵다.
“어려운 문제다. 스모그든 수질오염이든 눈앞에서 보이는 어떤 피해가 일어나는 쉽지만. 기후위기는 과학자들이 연구하다보니 인지하게 된 거다. 이걸 전혀 인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는 상황인데, 인간은 당장 눈앞에 보이지도 않는 위험을 인지하고 대응하고 그렇게 진화되지 않았다. 몸은 현대를 살아가지만 아직도 구석기처럼 즉각적인 위험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고 대응한다. 그런 면에서 기후위기는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위기다. 개인적으로도 질문한다. 이걸 어떻게 알리고, 모든 사람들이 깨우치게 할까. 하지만 모든 사람을 설득하는 그런식의 전환은 안 일어난다. 통계물리학자 김범진 교수에 따르면, 항상 3.5%가 완벽히 인식하면 뒤집을 수 있다. 지금은 그 정도 안된다는 얘기다. 국민 100명을 설득해 3.5명만 명확하게 인식시켜주면 해법을 찾아나갈 수 있다는 얘기다. 국가가 책임을 지고 끊임없이 깨우쳐 줘야 한다. 정부가 교육이나 합리적 대안을 통해 대국민 설득에 나서야 한다. 위험하니 이렇게 갈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시키는 작업들을 해야 한다.”
- 정부는 잘하고 있나
“기후위기는 근본적으로 대전환의 문제이기 때문에 전체 시스템을 바꾸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전혀 안한다. 일전에 환경부가 시민단체들을 향해 ‘여러분들이 열심히 활동해서 알려줘야 자기들이 힘을 받는다’고 하더라. 나도 공무원을 했지만 해도해도 너무한다. 올해 환경부 예산이 8조원대에 직원만 2500여명이다. 산하기관만 해도 수천명일텐데 어마어마한 예산과 인력을 갖고 기후변화 인지시키는 노력은 아무것도 안한다. 연구개발과 홍보에 아주 조금 예산을 둔 것 뿐이다. 기후위기 퀴즈를 맞추면 통닭을 보내주는 이벤트나 하고 있다. 기후위기 인식을 전혀 안하고 있다. 실제 공무원을 상대해보면 굉장히 민감해 해야 할 사람들이 일반 시민수준이다.”
- 언제까지 기후위기를 알리는 일을 할 예정인가
“제가 할 수 있는 역할만 열심히 하고 있는데, 사실 지친다. 눈앞에 보이는 이 위기는 굉장히 절박한데 세상은 거의 반응이 없다는 것에. 하지만 전 긍정적으로 보려고 한다. 잘 해결만 한다면 더 좋은 사회로 갈 수 있다는 어떤 희망이 있다. 기후위기는 다음세대가 아니라 우리세대의 문제다. 굉장히 눈앞에 다가온 위험이다. 그런데 작년만 해도 지금처럼 얘기하지 못했었다. 작년 10월부터 위기 징후가 명확해 졌고, 앞으로 점점 더 명확해져 갈거다. 2005년부터 이 일을 했왔는데, 단 한번도 미래에 대한 전망이 과도해 본 적이 없다. 위기성이 훨씬 증가되는 양상이다. 급변적인 전망을 고려하지 않은 예측에서도 그런 결과들이 나온다. 그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은 결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굉장히, 굉장히 절박하다."
이상복 기자 lsb@e2news.com
조천호(曺千鎬) [He is...] 서울 출생으로 연세대에서 대기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6년 기상연구소에 입사해 지구대기감시관측소장, 지구대기감시센터장, 지구환경시스템연구과장, 예보연구과장, 기후연구과장 등을 지냈다. 2015년부터 2018년까지 기상청 국립기상과학원장(고위공무원)으로 일했다. 현재 경희사이버대 기후변화 특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변화를 꿈구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 부대표도 맡고 있다. 현직 기상과학원 연구원인 부인 전영신씨와의 슬하에 아들, 딸 자녀 둘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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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댓글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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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옥 2020-02-03 21:39:48
더보기기막힌 글 입니다.
이렇게 명확하고 절실하게 기후변화의 위기에 대해 쓴 글은 접하지 못했습니다...널리 공유합니다.....기사,감사합니다답글쓰기
17 0
자재 2020-02-02 01:15:39
더보기백번 동감합니다
갈수록 급하게 변해가는 자연을 보면
섬찟해집니다
지도 20여년 전부터 일체의 세재를 사용하지 않고
일회용품도 안쓰며,
비환경적인 요소들을 제거해가며 살고있지만 너무 큰
불가항력을 느낍니다답글쓰기
10 0
홍성국 2020-01-29 16:17:58
더보기널리 공유하는 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쉬운 일 인것 같습니다
공유 합시다! 함께 협력하면 가능합니다!
초일류 무한경쟁교육으로 인간본능적 탐욕을 부추기는 교육제도를 바꿔야 가능합니다
입시제도 폐기하고 국공립 통합 네트워크 공동학위제로 똘똘한 인간교육과 연대와 상호 협력하는 상생교육을 통한. 협력시스템사회로 가야만 합니다답글쓰기
11 0
정선애 2020-01-04 14:40:36
더보기제발좀 정부와 우리모두가 힘을 합쳐 기후위기에 적극적인 대응책을 강구하고 온실가스 감축과 이산화탄소 발생원을 차단헙시다.답글쓰기
28 0
신주호 2020-01-04 11:55:13
더보기국해의원, 철밥통 공무원, 환경선동가들보다 이렇게 할동하는것이 중요합니다.답글쓰기
17 1
신민규 2020-01-03 21:14:49
더보기티비에서도 봣던 분이시네요. 대외활동으로 기후변화 관련해 캠페인을 꾸준히 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에 보여야 믿더군요. 응원합니다.
아..기자님 기후변화와 기상은 유사분야입니다.
[직격인터뷰] "한국은 기후난민이 되는 쪽, 멀뚱멀뚱 하는 게 위기"
이상복 기자
승인 2020.01.01 08:20
댓글 6
조천호 전 국립기상과학원장 (경희사이버대 특임교수)
서해 관측소서 온실가스 급변 확인 30년간 연구 천착
"기후위기 근본원인은 결핍이 아니라 과잉, 국가책임"
▲조천호 전 국립기상과학원장
[이투뉴스] “안면도가서 1년쯤 쉬다 와라” 인사권자(기상청장)에 자주 직언(直言)한 대가는 외딴 연구소로의 발령이었다. 2005년 국립기상과학원 안면도기후감시센터. 조천호 당시 기상연구소 과장의 새 근무지는 태안반도 서쪽 끝자락에 들어선 작은 관측소였다. 20여년간 ‘기상판’에서 날씨만 다루다 기후연구를 맡은 것도 처음. 하지만 격지 생활은 인생의 변곡점이 됐다. 예사롭지 않은 온실가스 변화를 직접 확인했다. ‘심상치 않다’는 직감이 들었지만, 그에 대해 설명해주는 이도 없었고 스스로 설명하지도 못했다. 이태 전 국립기상과학원장을 끝으로 공직에서 내려올 때까지 기후연구에 천착한 이유다. 지난 21일 서울 통인동 에너지전환포럼 ‘공간 1.5’에서 조 전 원장을 만났다. 그는 ‘번잡하게 흩어진 앎의 조각들을 모으고 연결해(책 서문 中)' 작년 3월 <파란하늘 빨간지구>(동아시아)를 펴냈다. 2016년부터 신문과 웹진 등에 연재한 글을 다듬어 엮은 것이다. 최근 기후변화 대중강연 요청이 쇄도해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과학은 물론 역사, 사회, 문화 전반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당면한 기후위기를 쉽게 풀어 설명해 줘 반향이 뜨겁다.
-15년 전 안면도에 내려가 확인한 건 무엇인가
“그전까지는 아무생각이 없었다. 왜 그런 시설(기후감시센터)이 있을까, 그냥 연구하는 곳인가 보다 했다. 그런데 일을 하다 보니 예사롭지 않았다. 뭔가 있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됐다. 변화가 확확 보였으니까. 그래서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내 자신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직관적인 느낌과 인식으로 깨닫게 되어 아는 것과 그 차이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했다. 지구 평균기온이 조금만 더 오르면 큰일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가을철엔 하루에도 20℃가 변한다. 우리보다 10℃ 낮은 북쪽나라에서도 잘 살고 있고, 반대인 남쪽나라도 살만하다. 그런데 왜 문제라는 걸까. 이걸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해야 하나 스스로 굉장히 답답했다.”
- 기후변화와 거리가 먼 분야는 아니잖나
“논문에서 기후변화는 ‘악기상(惡氣象)이 많아진다’, ‘재해성이 많아진다’ 정도로 표현된다. 그건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국내외 관련서적과 논문을 모두 찾아봤다. 그러면서 스스로 설명이 안 되는 부분들을 하나씩 채워갔다. 당시만 해도 IPCC(기후변화에관한정부간협의체)가 1990년대에 1차 보고서 낼 때 21세기말이 되면 경제성장을 지속하면서 온실가스를 줄이지 않을 경우 산업혁명 이후 평균기온이 4~5℃ 상승할 것이라고 했다. IPCC 보고서는 5~6년마다 업데이트 되는데, 그 내용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문제는 그게 급변적으로, 굉장히 파국적인 상황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거다. 지난해(2018년) IPCC보고서가 중요한 건 1.5℃ 이상일 때부터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경고한 거다.”
- 재앙으로 달려가는 속도가, 시간이 짧아졌다는 뜻인가?
“속도가 빨라진 게 아니다. 파국이 1.5℃ 이상일 때도 시작될 수 있다는 게 충격적인 내용이다. 과학으로 미래를 예측할 때 항상 불확실성이란 게 있지만, IPCC는 사실 매우 보수적인 곳이다. 전 세계 기후과학자들이 동의하는 내용만 보고서에 담긴다. 그러다보니 설령 합리적이더라도 누구나 인정하기 어렵다거나 검증이 안 되는 건 실지 못한다. 그런 부분을 미래 예측 시뮬레이션에 넣지 못한다. 가령 기후변화로 영구동토층이 녹아내릴 위험이 있다거나, 북극해의 메탄하이드레이트가 끓어오를 수 있다거나 그런 모델을 (시뮬레이션에) 걸 수 없다. 다 빠져 있다. 또 빙하가 녹아내리는 속도 계산 역시 두께가 2~3km에 달하고 폭이 수천km인 것을 표면부터 녹는다고 가정하고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해수면이 20cm가 올랐으니까, 앞으로 금세기말까지 90cm가 더 오르는 상황이 시나리오상 극단이다.”
- 가장 우려되는 시나리오는
“사탕을 입안에서 녹이면 천천히 오래간다. 그건 과학으로 온도 등을 측정해 정확이 계산할 수 있다. 빙하가 녹는 것도 그렇다. 문제는 그 빙하가 불안정해져 깨지고 쪼개지는 상황이다. 입안의 사탕을 깨무는 순간 표면이 늘어나 순식간에 녹는다. 그런데 우린 빙하가 언제 어떻게 깨질지 모른다. 그런 건 예측의 범주 안에 없다. 그런 걸 하나도 고려하지 않는 예측모델을 쓰고 있다. 우리의 예측은 운에 맡기는 수준이다. 지금 예측하는 건 가장 기본적인 위험 수준이다. 거기에 더해지는 위험이 있다고 보는 게 맞다. 과학에선 검증도 안되고 불확실한 것은 시뮬레이션에 넣을 순 없으니 다 뺐다. 현재의 위험이란 건 그런 거다.”
- 2018년 인천 IPCC 총회는 어쨌든 1.5℃ 이내로 막아야 한다고 했다.
“불확실성을 고려하지 않은 예측모델로도 1.5℃ 상승에 파국이 온다는 뜻이다. 온도가 조금 더 오르면 폭염이 오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네이처>에 실린 논문을 보면 단 0.5℃만 올라도 식량부족으로 고통 받는 사람이 3500만 명에 이르게 된다. 거기서 0.5℃가 더 올라 2.0℃가 되면 농업생산량 변화가 크게 일어나 3억6000만 명이 기아에 시달리게 된다. 만약 3.0℃가 오르면 그 수가 18억 명에 달하게 된다. 이건 어떤 한사람 연구결과를 정리한 게 아니다. 여러 연구결과를 모아 정리한 거다. 그런 기아사태가 벌어지면 사회 불안정은 어떻겠나.”
- 0.5℃ 변화가 그렇게나 위험한 건가
“시리아 난민 사태는 2010년 러시아 가뭄으로 밀가루 가격이 몇 달 새 60% 폭등하면서 시작됐다. 이미 2005년부터 가뭄이 들기 시작하는 상황이었는데, 소득의 대부분을 식량구입에 사용하던 가난한 이들이 가격 폭등을 참지 못해 폭동을 일으키고, 그게 내전으로 이어져 IS까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내전을 피해 식량을 구하려는 이들이 난민이 됐다. 그들이 유럽으로 밀려가니 유럽연합에선 국가안보의 문제가 됐다. EU국가들이 분산해 수용하자고 했는데, 영국은 난민을 안 받겠다면서 블렉시트를 선택했다. 러시아의 가뭄이 전혀 엉뚱한 곳에서 새로운 문제로 파생된 거다. 앞으로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증폭돼 일어날 거다. 단순하게 0.5℃ 가 올라가는 문제가 아니다. 악기상이 약간 늘어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사회 불안정으로 이어진다는 얘기다. 과거 역사로 볼 때 그럴 때 국가나 사회가 아끼고 나누면서 문제를 해결한 적은 없다. 전쟁을 벌였다. 굉장한 사회불안이다. 위기는 그런식으로 온다. 지금보다 단 0.5℃가 오르면 그런 위기가 올 수 있다. 모든 데이터가 그렇다고 말한다.”
- 국부(國富)가 넉넉한 나라는 좀 낫지 않을까
“우리나라 식량 자급률은 25%에 불과하다. 지금이야 반도체나 스마트폰, 중화학공업을 수출해 식량을 수입하면 된다. 러시아도 가뭄이 있기 전 밀을 수출하던 나라였다. 그런데 자급도 어려워지자 수출을 못했고, 전 세계 밀가루 가격이 올라갔다. 물론 현재 식량의 4분의 1은 쓰레기로 버려지는 상황이라 총량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곡물은 투기자본이 매달려 있어 1%만 과잉생산만 해도 가격이 폭락하고 반대의 경우 폭등한다. 생산량에 따른 가격 민감성이 높다. 가난한 나라가 먼저 피해를 볼 수는 있다. 하지만 전 지구적 수급에 문제가 생긴다면 얘기가 다르다. 지금처럼 우리가 수출을 통해 안정적으로 식량을 공급받을 수 있을까? 0.5℃가 올라갈 때마다 기아자가 3500만명에서 3억6000만명으로, 다시 18억명으로 증가한다. 그 얘긴 이런 일이 아시아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 아시아, 특히 한국도 안전지대가 아니란 얘긴데
“올초 호주 안보전략가들이 기후보고서를 냈다. 언론에서 잘 다뤄지지 않은 내면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대륙에서 사는 이들은 자기들 머리 위에 사는 35억명을 걱정한다. 인구밀도도 높고 아시아몬순이란 비로 농업생산을 해 먹고 사는데, 본격적인 기후위기로 진입하게 되면 아시아몬순 자체에 문제가 생겨 상당히 많은 아시아 국가에서 기근사태가 일어날 것으로 본다. 강수대 폭이 변하면 충분히 그럴 개연성이 있다. 보수적으로 예측한다고 해도 그렇다. 다만 그 숫자가 1억명이냐, 5억명이냐 그런 불확실성은 있다. 호주입장에선 나중에 배나 비행기를 타고 난민들이 이들 지역서 몰려올 수 있다고 걱정하는 거다. 그렇게 됐을 때 어디서부터 차단해야 하나 뭐 그런 걸 걱정하지 않겠나.”
- 한국이 기후문제의 원인자란 생각은 해봤어도 피해 당사자가 될 것이란 생각은 못해 봤다.
“결국은 배고픔의 문제, 식량부족의 문제다. 그렇게 난민이 된다. 이미 미국도 2000년대 초반 그런 대응 시나리오를 만든 적이 있다. 먹을 게 부족하면 사회가 극도로 불안정해지고, 결국 그 땅을 떠나 살만한 곳으로 몰리게 된다. 그런 면에서 우린 (난민)대상이 되는 쪽이다. 과연 억명 단위로 기아사태가 왔을 때도 수출로 식량을 구할 수 있을까. 곡물 수출국이 그 때가 되어도 안정적인 생산‧수출이 가능할지 따져봐야 한다. 그런데 그걸 걱정하는 이들은 따로 있고, 우린 멀뚱멀뚱 하고 있다. 이게 더 위기다. 기후위기가 문제가 아니라 기후위기를 인식 못하는 것, 그것이 진짜 위기다.”
- 우린 온실가스 다배출국가면서도 신규석탄을 건설하고 있다
“서구 투자사들은 석탄화력에서 자본을 모두 뺐다. 국부펀드도 더 이상 투자하지 않겠다고 압박한다. 세상은 그렇게 변하는데 대한민국은 과거 성공방식에 여전히 집착하고 있다. 석탄발전소를 새로 건설하고,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가서 건설하도록 융자를 해주고 있다. 세상의 에너지 패러다임이 모두 변하고 있는데 ‘태양광판이 눈부시다’, ‘환경을 파괴한다’고 지적한다. 물론 졸속도 있다. 하지만 전환이란 가치를 갖고 어떻게 보완할지를 얘기해야 한다. 태양광 패널은 지난 10년간 가격이 5분의 1이 됐고 배터리 가격도 급락했다. 이렇게 가격혁신이 일어나는 분야가 어디있나. 다른 주요국들이 어마어마한 혁신이라며, 세상이 변하고 있다고 하는데 우린 과거의 성공만 쥐고 앉아 있다. 태양광을 하기에 국토가 좁다면 옥상이 벽면 등 굉장히 전환적인 준비들을 해나가야 한다. 그런데도 좌초자산이 될 석탄화력만 붙들고 있다. 과거 성공방식에 집착하는 시스템이다. 전환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는다. 이젠 시장의 논리로도 들어가면 안된다.”
- 유독 한국서 에너지전환 논의가 정쟁화 되고 있다.
“원자력 같은 경우가 그렇고, 재생에너지도 그 수준으로 들어가 힘을 못 쓰고 있다. 원자력은 위험도 위험이지만 이미 시장논리로도 끝났다고 본다. 일본 도시바가 터키와 영국 진출했다가 수조원을 손실보고 나왔다. 우린 일부서 원전을 짓자고 하고, 수출산업화를 운운하지만 그렇게 이익이 남는 사업이라면 왜 그런 경쟁력을 놔두고 해외사업서 정부더러 돈을 대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옛 소비에트가 왜 망했나. 자본주의 논리에 그렇게 철저한 이들이 그럴 때면 소비에트 시스템을 요구한다. 그게 무슨 진짜 경쟁력인가. 원전을 최소 40년 가동한다고 하면 그 기간 다른 에너지는 어마어마한 기술혁신이 될거다. 지금까지의 성공방식이 앞으로도 지속될 거라고 보고 과거에만 집착하고 있다.”
- 한 나라의 사회‧경제 시스템은 관성이 클 수밖에 없지 않을까
“독일은 우리보다 위도가 높은 나라다. 그런데도 재생에너지 비중이 40%가 넘는 지역이 많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재생에너지가 10%를 넘어서면 기저전력이 불안해진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40%를 운영하는 단계다. 논문으론 100%도 가능하다고 한다. 10년 전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기술혁신이다. 그간 원전은 기술혁신이 있었나. 이런 변화를 안 따라가고 파산자본이 될 여지가 큰 걸 계속 잡겠다는 거다. 또다른 측면에선 우리가 계속 이대로 가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앞서 말했듯 기후위기가 사회적 불안정성을 갖는 위험체계로 들어가게 됐을 때 전 세계가 화석연료를 보는 관점이 달라질 거다. 그땐 강제적이 될 거다. 그런 면에서 빨리 전환이 되도록 해야 하는데, 굉장히 느긋하다. 위기가 2100년대에 일어난다는 가정에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유럽에선 태양광과 풍력이 어마어마하게 확산되고 있고, 미국은 파리협정 탈퇴에도 화석연료를 줄이고 있다. 우리나라만 한손에 원자력, 다른 한손에 석탄화력을 쥐고 있다. 우리 경제구조가 중국이나, 인도, 러시아가 아니잖나. 영토가 크고 인구가 많아 자체로 버틸 힘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시다시피 RE100이나 국경탄소세처럼 우리가 변하지 않더라도 강제로 (변화)당할 상황이다. 유럽시장 하나만 잃어도 파산이 일어날 텐데, 그런 나라가 국경을 탄소가 넘어오도록 허용하겠나. 당장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필연적으로 가야할 길인데, 전환하면 이런저런 어려움이 있다고 하니 굉장히 느긋한 이야기로 들린다.”
- 빠른 전환을 위해 우리가 감수해야 할 부분은
“지구 평균기온 상승을 1.5℃ 이내로 막으려면 엄청난 양의 탄소를 줄여야 한다. 2030년까지 전 세계가 2010년 배출량의 45%로 수준으로 줄여야 하고, 2050년에는 넷제로(순배출량 ‘0’)로 가야한다. 지금 갖고 있는 상식과 관성으론 달성하기 어렵다. 생각조차도 못해 본 수준이다. 지금은 전시상황이다. 줄여야 하는 양으로 따지면 매년 18%씩 감축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1998년 IMF 때 14%가 줄었다. 이젠 전 세계가 한꺼번에 그 수준으로 줄여야 한다. 그러니 전시상황이랄 수밖에. 그런데 꼭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미국이 약간 늦게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모든 산업을 군수산업으로 전환하는데 걸린 시간이 불과 1~2년이다. 자동차를 만들다가 탱크를 만들고, 징집된 남성을 대신해 여성이 공장으로 들어가 일했다. 사회적으로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러나 2년 만에 모든 산업구조를 그렇게 뒤엎었다. 수십년이 걸리는 일이 아니다.”
- 전시(戰時)라고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거다
“이 기회에 밀어붙여야 한다고 본다. 유발하라리가 쓴 <싸피엔스>엔 '허구를 발명한 인간이 위대하다'는 내용이 있다. 사실 돈이란 게 종이 쪼가리가 아닌가. 그러나 돈에 교환가치가 있고 물질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순간에 가치를 갖게 된다. 법전 역시 종이에 쓰여 있지만 사람들이 이건 지켜야 한다고 하면 우리를 지배하지 않나. 물질적인 것으로만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허구에 믿음을 부여하는 순간, 그래서 우리가 믿고 사람들의 신뢰가 한꺼번에 모아지면 불가능하지 않다. 그렇게 수십년씩 걸릴 일이 아니다. 문명도 그렇게 만들어진 것 아니겠나.”
- 어디서부터 돌파구를 찾아야 할까
“오늘날 기후위기의 근본원인은 결핍이 아니라 과잉 탓이다. 현재도 식량의 4분의 1이 쓰레기로 버려진다. 공산품도 생산과잉이다. 그런데도 우린 여러 문제를 이야기 할 때 항상 경제를 성장시켜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경제성장이란 물질의 팽창을 더 시키자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문제는 결핍 때문에 일어난 게 아니다. 이런 모순에 제동을 걸지 않으면 안된다. 세상 모든 일은 어떤 견제와 균형의 작업이 필요하다. 자본과 노동, 기업과 노동자 등 모두 타협점이 필요하다. 어떤 하나의 방향으로 결정할 수 없다. 그런데 유독 성장과 관련해서는 견제나 균형이 없다. 지구는 한계가 있고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다. 이 상태로 인구가 늘고 소득이 증가하면 당연히 에너지소비도 지금보다 많아지고 식량도 더 필요하게 된다. 그런데 인간은 2차대전 이후 지구가 견뎌낼 수 없을 만큼 일을 벌리고 있다. 이 상태로 계속 가다간 필연적으로 붕괴한다. 예를 들어 유리접시 안에 세균 한 마리 풀어놓으면 갑절로 불어나면서 증가해 접시 절반을 차지할 때까지는 꽤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절반을 넘어서 한 세대를 넘어가면 모든 영양분을 빨아들이고 절멸한다. 역사적으로 봐도 과거 모든 문명들은 물질적 소비가 최고치에 이른 다음, 도시가 최대로 팽창한 다음, 복잡성이 굉장히 늘어난 상황에서 몇 십년 뒤 훅 하고 무너졌다. 지구는 거의 그 수준에 임박해 있다. 기후뿐만이 아니라 모든 시그널이 그렇다. 더욱이 과거엔 개별 문명이라 어느 한 곳이 무너지면 다른 문명이 일어서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모두 묶여 있다. 한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순차적으로 다 같이 무너진다. 더욱이 우린 (붕괴하는)앞쪽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이번 문명이 무너진다면, 인류문명의 붕괴가 아닐까 생각한다.”
- 욕망으로 가득찬 인류가 이런 미증유의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사회란 협력하고 연대하고 돌보고, 나누는 것이 최우선 가치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싸게 에너지와 자원을 착취하고, 쓰레기를 버릴까 하는 시장논리 뿐이다. 안전하게 숨 쉴 수 있고 먹을 수 있는, 지속가능한 안전보다 더 우위에 있는 가치가 있나? 그래서 유엔은 대전환(Great transformation)만이 기후위기에 대응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공학적으로 어느 부분을 손보거나 개별적으로 온실가스를 줄여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다. 정치, 경제, 사회 분야의 모든 체계를 바꿔야 한다. 경제성장이 가파를수록 빈부격차는 커진다. 이제 뒤집어 생각해 볼 때다. 기후위기란 것 자체도 어떤 면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게 해주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럭저럭 넘길 수 있는 위기라면, 위기인 줄도 모르고 넘어갈 수 있다. 오히려 기후위기 앞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는 그런 여지가 생길 수 있다. 과거 역사를 보면 소빙하기 때 무척 어려웠다. 우리나라도 1700년대 경신대기근 당시 이조실록 보면 비참하기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오늘날 문명의 맥아가 탄생한 게 다 소빙하기 때다. 자기 땅에서 살만하다면 왜 영토를 개척하러 갔겠나. 지금의 위기라는 것도 또 한 번의 새로운 도약,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 수 있는 여지가 되지 않을까. 나누고 아끼는 그런 가치들이 다시 우선순위가 되는 사회로 만들어가는...”
- 온실가스든, 기후위기든 눈에 보이지 않아 개개인의 각성이 더 어렵다.
“어려운 문제다. 스모그든 수질오염이든 눈앞에서 보이는 어떤 피해가 일어나는 쉽지만. 기후위기는 과학자들이 연구하다보니 인지하게 된 거다. 이걸 전혀 인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는 상황인데, 인간은 당장 눈앞에 보이지도 않는 위험을 인지하고 대응하고 그렇게 진화되지 않았다. 몸은 현대를 살아가지만 아직도 구석기처럼 즉각적인 위험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고 대응한다. 그런 면에서 기후위기는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위기다. 개인적으로도 질문한다. 이걸 어떻게 알리고, 모든 사람들이 깨우치게 할까. 하지만 모든 사람을 설득하는 그런식의 전환은 안 일어난다. 통계물리학자 김범진 교수에 따르면, 항상 3.5%가 완벽히 인식하면 뒤집을 수 있다. 지금은 그 정도 안된다는 얘기다. 국민 100명을 설득해 3.5명만 명확하게 인식시켜주면 해법을 찾아나갈 수 있다는 얘기다. 국가가 책임을 지고 끊임없이 깨우쳐 줘야 한다. 정부가 교육이나 합리적 대안을 통해 대국민 설득에 나서야 한다. 위험하니 이렇게 갈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시키는 작업들을 해야 한다.”
- 정부는 잘하고 있나
“기후위기는 근본적으로 대전환의 문제이기 때문에 전체 시스템을 바꾸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전혀 안한다. 일전에 환경부가 시민단체들을 향해 ‘여러분들이 열심히 활동해서 알려줘야 자기들이 힘을 받는다’고 하더라. 나도 공무원을 했지만 해도해도 너무한다. 올해 환경부 예산이 8조원대에 직원만 2500여명이다. 산하기관만 해도 수천명일텐데 어마어마한 예산과 인력을 갖고 기후변화 인지시키는 노력은 아무것도 안한다. 연구개발과 홍보에 아주 조금 예산을 둔 것 뿐이다. 기후위기 퀴즈를 맞추면 통닭을 보내주는 이벤트나 하고 있다. 기후위기 인식을 전혀 안하고 있다. 실제 공무원을 상대해보면 굉장히 민감해 해야 할 사람들이 일반 시민수준이다.”
- 언제까지 기후위기를 알리는 일을 할 예정인가
“제가 할 수 있는 역할만 열심히 하고 있는데, 사실 지친다. 눈앞에 보이는 이 위기는 굉장히 절박한데 세상은 거의 반응이 없다는 것에. 하지만 전 긍정적으로 보려고 한다. 잘 해결만 한다면 더 좋은 사회로 갈 수 있다는 어떤 희망이 있다. 기후위기는 다음세대가 아니라 우리세대의 문제다. 굉장히 눈앞에 다가온 위험이다. 그런데 작년만 해도 지금처럼 얘기하지 못했었다. 작년 10월부터 위기 징후가 명확해 졌고, 앞으로 점점 더 명확해져 갈거다. 2005년부터 이 일을 했왔는데, 단 한번도 미래에 대한 전망이 과도해 본 적이 없다. 위기성이 훨씬 증가되는 양상이다. 급변적인 전망을 고려하지 않은 예측에서도 그런 결과들이 나온다. 그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은 결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굉장히, 굉장히 절박하다."
이상복 기자 lsb@e2news.com
조천호(曺千鎬) [He is...] 서울 출생으로 연세대에서 대기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6년 기상연구소에 입사해 지구대기감시관측소장, 지구대기감시센터장, 지구환경시스템연구과장, 예보연구과장, 기후연구과장 등을 지냈다. 2015년부터 2018년까지 기상청 국립기상과학원장(고위공무원)으로 일했다. 현재 경희사이버대 기후변화 특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변화를 꿈구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 부대표도 맡고 있다. 현직 기상과학원 연구원인 부인 전영신씨와의 슬하에 아들, 딸 자녀 둘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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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댓글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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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옥 2020-02-03 21:39:48
더보기기막힌 글 입니다.
이렇게 명확하고 절실하게 기후변화의 위기에 대해 쓴 글은 접하지 못했습니다...널리 공유합니다.....기사,감사합니다답글쓰기
17 0
자재 2020-02-02 01:15:39
더보기백번 동감합니다
갈수록 급하게 변해가는 자연을 보면
섬찟해집니다
지도 20여년 전부터 일체의 세재를 사용하지 않고
일회용품도 안쓰며,
비환경적인 요소들을 제거해가며 살고있지만 너무 큰
불가항력을 느낍니다답글쓰기
10 0
홍성국 2020-01-29 16:17:58
더보기널리 공유하는 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쉬운 일 인것 같습니다
공유 합시다! 함께 협력하면 가능합니다!
초일류 무한경쟁교육으로 인간본능적 탐욕을 부추기는 교육제도를 바꿔야 가능합니다
입시제도 폐기하고 국공립 통합 네트워크 공동학위제로 똘똘한 인간교육과 연대와 상호 협력하는 상생교육을 통한. 협력시스템사회로 가야만 합니다답글쓰기
11 0
정선애 2020-01-04 14:40:36
더보기제발좀 정부와 우리모두가 힘을 합쳐 기후위기에 적극적인 대응책을 강구하고 온실가스 감축과 이산화탄소 발생원을 차단헙시다.답글쓰기
28 0
신주호 2020-01-04 11:55:13
더보기국해의원, 철밥통 공무원, 환경선동가들보다 이렇게 할동하는것이 중요합니다.답글쓰기
17 1
신민규 2020-01-03 21:14:49
더보기티비에서도 봣던 분이시네요. 대외활동으로 기후변화 관련해 캠페인을 꾸준히 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에 보여야 믿더군요. 응원합니다.
아..기자님 기후변화와 기상은 유사분야입니다.
이인자 한살림광주 동학사상 다시읽기 제6강 원불교의 살림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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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살림광주 동학사상 다시읽기
제6강 원불교의 살림철학
원불교의 살림사상
물질을 활용하여 문명을 창조하자
원불교는 나에게 커다란 원이다. 서울에 있는 인사동 거리처럼 광주 시내에도 예술의 거리가 있다. 거기에 원불교당이 자리잡고 있다. 지나갈 때 보게 되는 커다란 원...
하나의 또 다른 종교일 뿐 관심의 대상 밖에 존재했던 원불교.
동아시아의 사상 전통이 원불교에도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4월2일 오늘 들은 것이 내가 원불교에 대해 아는 것의 전부이다.
나의 공부의 연은 어디까지 이어질 것인가..
불교의 영향이 있긴 하나 차이점(고통의 원인에 접근하는 관점과 해결책이 다르다 한다)이 있고 물질이나 과학을 배척하기보다는 활용하자고 한다(만물을 활용하되 생명평화를 해치는 방향이 아닌 보장하는 방향으로).
원불교의 핵심교리는
- 일원우주(일원의 우주론),
- 사은윤리(사은의 윤리론),
- 삼학수행(삼학의 수행론).
이 중 다른 개벽종교와의 차이가
유불도 삼교의 수행론을 집대성하고 현대화하는 데에 가장 역점을 두었다는 것이고
원불교를 대변하는 키워드가 마음공부라 한다.
앎이 있으되 행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으리요..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 원
- 일원
- 모든 것이 하나이다.
- 동기연계(만물은 하나의 기운으로 연결되어 있다)
원불교가 이 땅에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는 더 많은 공부를 필요로 한다.
수행(실천)이 있고 경전(앎/교리-정전)이 있다.
하나의 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모든 것이 하나이다.
나의 하나됨은 무엇인가? 어디까지 확장하고 연결해 나갈 것인가? 하나가 된 느낌을 가져 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어디까지 이어질 것인가?
자기개벽,사회개벽,천지개벽
어떻게 시작해서 어디로 나아가며 어디서 만날 것인가?
인간의 영성필요에 의해서 종교가 필요하다면 그 종교는 어떻게 새롭게 인류사에 재등장 할 것인가?
(원불대학교 한복판에 수덕호라는 호수의 둘레에는 예수,공자,붓다,소크라테스 인류의 사대성인이 있다는데 언젠가는 가보리라..
화두를 가지고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모든 답은 내 안에 있다는데 호수에 내 마음을 비춰볼 수 있을까?)
** 우리의 스승(안내자/연결자)은 왜 우리(나)에게 다시 개벽을 이야기 할까요?
................(중략)
이 중심 없는 중심, 또는 모두가 중심이라는 생각을
동학에서는 하늘로,원불교에서는 일원으로 표현했습니다.
- 이로써 이제 주변인에 머물렀던 이들도 당당하게 개벽의 주체로 거듭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한국 근현대사에 개벽운동이 많았던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 개벽적 주체관을 확립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 그 여파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 다만 개벽의 주체라는 기억이 망각되어 있어서 화산처럼 단발적으로 솟아나고 있을 뿐입니다.
- 그 기억을 되살렸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21세기의 다시 개벽의 역사의 첫 걸음을 디딜 수 있습니다.
- 제가 사상사 복원작업에 힘을 쓰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 벚꽃이 나를 부릅니다.ㅎ
이만 총총...
천주교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 [20101115] 김조년 교수의 함석현의 평화주의와 우리의 평화운동 (정세미)
천주교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 [20101115] 김조년 교수의 함석현의 평화주의와 우리의 평화운동 (정세미)
[20101115] 김조년 교수의 함석현의 평화주의와 우리의 평화운동 (정세미)정세미 강연 2016. 12. 20. 22:09
2010년 11월 15일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한 미사(정세미) 강연
대전 관저동 성당
함석헌의 평화주의와 우리의 평화운동
김조년 한남대 교수
(민들레의료생협 이사장, 표주박통신 발행인)
함석헌의 평화사상의 맥락
이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일단 그의 생애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살피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함석헌에게서 평화는 가능하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를 뛰어넘는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왜 살아야 하냐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하는 것과 같다. 어느 누구도 살 가치가 있다거나, 살아야 할 어떤 당위성이 있어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냥 낳았으니까 사는 것이요, 살려 주시는 것이니까 사는 것이지, 어떤 자유의지의 선택에 따라서 우리가 사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물론 살지 않고 죽음을 택할 수는 있는 것이지만, 그 순간 삶과는 일단 떨어진다. 살아 있는 한은 살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를 생각할 것 없이 그냥 살아가는 것이다. 거기에 어떤 다른 질문이 없다. 이것처럼 평화롭게 사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삶이 아니면 죽음이듯이, 평화가 아니면 반평화나 불화가 있을 뿐이다. 즉 평화롭게 살아야 하냐 아니냐의 문제는 평화가 필요한 것이냐, 가능하냐,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느냐를 뛰어 넘는 문제로 설정한다. 여기에는 어떤 논리를 따지는 말의 전개가 필요가 없다. 평화하지 않으면 죽음이다 하는 것에 걸리는 문제기 때문이다.
함석헌에게서 이러한 문제는 태어나면서부터 일생을 따라다닌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가 태어난 1901년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한 가운데 있는 시점으로 언제나 전쟁의 기운이 사회에 가득할 때였다. 특히 그가 태어난 평안북도 용천지방은 중국과 한반도를 연결하는 지점, 압록강 하류 서해안에 있는 작은 섬이었다. 그래서 지리상으로 볼 때 중국과 한반도 사이의 갈등과 긴장과 화해의 분위기를 아주 민감하게 느끼던 곳이다. 더욱이나 조선은 말기현상으로 중앙정부의 권위가 사라지고 지역민 스스로 자신들의 안녕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와 곳에서 자랐다. 전쟁의 분위기는 어린아이들의 놀이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패를 나누어 놀이를 할 때에도 ‘나는 아라사다, 나는 일본이다’라고 하면서 전쟁놀이를 하는 것이 어린아이들의 일상이었다.
6ㆍ25 때 우리가 전쟁놀이 하면서 자랐고, 지금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과 미군이 싸우는 전쟁놀이를 하고 자라는 아이들이 있는 것처럼, 언제나 전쟁 상황에서는 아이들이 놀이를 통하여 전쟁을 재생산하고 체화하는 비극을 반복한다. 그러다가 국권을 잃은 때부터 점점 더 사회불안은 심화되었다. 이러한 때 사회분위기는 언제나 나라를 잃고 자기를 상실한 비애감에 휩싸였다. 함석헌의 집안 분위기와 그가 살던 지역의 분위기는 중앙정부와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상관은 없었지만, 민족과 나라를 잃은 것에 대한 비감함은 매우 대단하였다. 그러한 것이 그에게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가 일찍이 어린 나이에 접촉한 기독교교육의 효과는 매우 결정적으로 컸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동등하다는 것을 그는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그가 자랐던 곳에서는 반상의 구별이 별로 없던, 평민들이 주로 살았던 곳이기에 계급갈등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안에서의 남녀차별이나 장자우선 관습은 남아 있었지만, 그것은 어머니의 가르침에 의하여 아주 뼈저린 경험으로 깨지고 깨우쳐진다. 거기에서 그에게는 민주주의 사상의 기초를 배운다. 남녀가 평등하다는 것, 상하가 평등하다는 것을 어머니의 단순한 이야기로 깨달아 그의 일생을 이끌어 나간다.
그 뒤 그는 사립 기독교학교를 다닐 때와 공립학교를 다닐 때의 분위기를 다 경험한다. 사립학교에서는 매우 활발한 자유정신과 독립정신을 경험하였지만, 공립학교에서는 식민지배자의 앞잡이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다른 선택의 가능성이 없었다. 그러던 중 3ㆍ1만세운동이 일어난다. 이 때 그는 평양의 만세운동을 앞장에서 아주 시원하게 전개한다. 그 결과로 학교를 나오게 되고, 다시는 관립학교에 가지 않고, 그의 말대로 하느님의 발길에 채여 오산학교에 간다. 이 때부터 그는 관과는 대립하는 관계를 설정한다. 그것은 바로 그에게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거대한 사건이 된다. 그곳에서 민족주의를 알게 되고, 독립 기독교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동양고전과 서양철학의 접목이 어떠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며, 동시에 자기 자신이 독자적으로 깊이 생각하고 파고들어가는 훈련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 그는 매우 귀한 사람들을 책으로 접촉하게 된다. 가장 귀한 인물이 이승훈과 유영모다.
일본에 건너가 공부하게 되면서 기독교를 새로 이해하고, 기독교와 애국이라는 관계를 새롭게 정리한다. 특히 예레미야를 공부하면서 망국노의 비애가 무엇인지? 무엇을 통하여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데 힘을 보탤 수 있는 것인지를 깨닫고 생각하게 된다. 이 때 그가 만난 우찌무라 간조는 일생의 좋은 스승으로 남는다. 그에게 배운 것은 독립정신으로 모든 것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뒤 귀국하여 모교 오산학교에서 10년간 교사로 생활한다.
특히 예레미야를 공부하면서 망국노의 비애가 무엇인지?
무엇을 통하여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데
힘을 보탤 수 있는 것인지를 깨닫고 생각하게 된다.
이 때 그의 동료 김교신과 함께 무교회성서집회를 열고, 《성서조선》을 창간하여 함께 꾸려나간다. 이 때 그는 오산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데, 역사 교사가 된 것을 무척 후회한다. 아무 것도 학생들에게 영광스럽던 조상들의 역사를 가르칠 건덕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외세의 침략과 패배와 굴종과 식민통치의 쓰라린 경험의 역사만을 반복할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데는 ‘자기를 잃어버린’ 결과라는 것이다. 자기를 잃어버린 뒤에는 어떠한 물질의 영광이나 힘의 강력함도 소용이 없다. 등뼈가 부러진 것이요, 중축이 부러진 것이 되고 만다. 그러한 근본이 못된 다음에는 어떤 처방도 임시처방일 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러한 것들을 보면서 그는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쓴다.
여기에서 그는 한국역사를 고난의 역사로 규정하고, 고난의 의미를 예수의 고난과 한국민족의 고난을 대비하여 본다. 예수의 고난에서 인류구원의 비전을 보듯이 한국역사의 고난의 행진 속에서 세계구원의 비전을 본다. 한국역사는 단순히 한민족의 한 역사로 끝나지는 않는다. 그 한 예가 6ㆍ25전쟁이다.
그것은 세계의 모든 잘못 된 것이 함께 몰려든 전쟁이다. 이데올로기와 물질과 과학과 민족들과 헤게모니 쟁탈전이 한반도에서 집중하여 나타난 것이었다. 그것은 세계화의 어두운 면과 긍정의 면을 동시에 경험한 거대한 사건이었다. 이것의 의미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1) 우선 무력과 전쟁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 2) 국지적인 문제라 하더라도 그 지역의 독자적 힘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관계 안에서 해결된다는 것, 3) 적과 아, 원수와 형제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인류, 하나의 인간이라는 철학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 4) 그러나 민족의 문제는 외세종속체계에서가 아니라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앞서야 한다는 것, 5) 고난의 연속으로 경험한 민족의 최대비극을 통하여 세계구원의 원대한 비전을 찾아보라는 것, 6) 적대관계나 상생관계나 어느 한 편이 이기고 다른 편은 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살아가는 길을 찾으라는 것. 사실 이러한 것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현재의 남북문제도 처리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비로소 예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과 모든 인류가 궁극적으로 구원되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음미하여 볼 때라고 본다. 이 부분은 뒤에서 다시 논의하게 될 것이다.
그이의 평화사상: 민족과 민족의 화합, 사람과 하느님의 합일, 사람과 자연의 평화, 순간(지금)과 영원의 통합, 땅과 하늘의 합일, 개인과 전체의 합일을 상정한다.
그는 “씨알은 평화요 평화는 씨알에 있다”는 명제에 따라서 이와 같은 사상을 전개한다. “우리는 모두 세 세계에 살고 있다. 극대(極大)의 나라, 극소(極小)의 나라, 중간 나라. 물질계를 보는 데 눈ㆍ망원경ㆍ현미경의 세 눈이 있듯이, 정신계에도 세 눈이 있어야 한다. 영원ㆍ무한을 내다보는 눈, 마음이 갈피를 찾는 눈, 그리고 사회와 역사를 두루 살피는 눈. 이 여섯 세계를 공통으로 다스리고 있는 원리가 평화다. 화는 곧 조화ㆍ고름인데, 고르게 되지 않고는 세계가 서갈 수 없다. 안ㆍ밖ㆍ생ㆍ무생을 말할 것 없이 복잡한 힘의 얽힘이다. 그 얽혀 작용하는 것이 어느 고른 상태에 이르지 않고는 하나의 세계가 있을 수 없다. 코스모스라는 말은 그래서 있다. 하나의 질서 잡히고 법칙 있는 세계가 된 다음에야 우리가 능히 생각하고 알고 교섭할 수 있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설혹 상상한대도 혼돈ㆍ어지러움ㆍ허무ㆍ두루뭉수리밖에 없다. 우리가 있을 때, 알 때, 나일 때는 벌써 거기 세계 곧 질서ㆍ코스모스ㆍ대조화ㆍ평화가 있었다. ‘화(和)는 천하지달도(天下之達道)다.’(중용) 그러므로 화는 알파와 오메가다.
영원ㆍ무한을 내다보는 눈, 마음이 갈피를 찾는 눈,
그리고 사회와 역사를 두루 살피는 눈.
이 여섯 세계를 공통으로 다스리고 있는 원리가 평화다.
다른 말로 하면 평화는 구경의 원리인 동시에 또 내재의 원리다. 칸트가 위와 안을 보고 다 같이 놀라고 찬미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중간의 세계도 알고 보면 놀랍다. 공자가 교육의 대강을 말하는데, 명명덕 친(신)민 지어지선(明明德 親(新)民 止於至善)이라고 했다. 그것을 실현하는 과정을 말할 때 첫머리에 평천하(平天下)를 내걸었다. 명명덕 어천하(明明德 於天下)라 했다. 예수가 날 때 하늘에서 찬송이 들려서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기쁨’이라 했다. 노자의 무위(無爲), 석가의 니르바나도 요컨대 평(平)의 자리다.
예와 이제를 말할 것 없이, 종교 정치를 가를 것 없이, 사람인 다음에는 다 평화를 내세웠다. 전쟁을 직업으로 하여 불쌍한 씨알의 피로 제 살을 찌우고 기름을 짜며 사람 죽임을 재미있는 장난으로까지 하는 소위 영웅이란 것들도 입으로는 평화를 위해 하노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주 내놓고 전쟁을 예찬하는 놈은 미쳤거나 그렇지 않으면 악마의 종자라고 할밖에 없다. 씨알은 말하자면 내재의 평화, 극소세계의 평화다. 본질적인 평화다. 씨알의 바탈이 평화요, 평화의 열매가 씨알이다. 그러므로 씨알의 목적은 평화의 세계 이외에 있을 수 없다. 극소는 극대에 통한다.” 함석헌: ‘세계평화의 길’, 함석헌 저작집 12, 『평화운동을 일으키자』, 한길사 2009, 44-46
결국 그에게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 그것들이 교섭하여 사는 방법은 화라는 것이다. 그것이 그가 내세우는 평화사상의 알파요 오메가다. 그런데 이것들이 깨지는 데는 몇 가지 사회제도와 그것에 힘을 업은 인간의 집단 심리와 집단행동에서 연유한다. 소유제와 국가지상주의와 계급제가 그것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것은 국가지상주의다. 국가주의는 결국엔 국가지상주의, 민족 지상주의로 변하여 나와 다른 민족이나 나와 다른 가문, 또는 내나라 다른 나라, 나와 다른 종교에 대한 전쟁을 때때로 신성한 것으로 만들었다. 대개 정의로운 전쟁이나 거룩한 전쟁이란 것은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뒷받침하는 철학은 차별에 있다. 나와 너는 다르다는 것, 다른 너는 나의 소유물이나 밥이나 도구가 되어도 좋다는 기본철학을 깔고 있다. 여기에 모든 중심은 ‘나’에 있다. ‘우리’나 ‘서로’가 아니라, ‘나’를 중심에 놓는다. 이 때 나는 언제나 강력하여야 했다. 여기에 복무한 것이 이른바 우승열패, 약육강식 따위의 사회진화론적 차원의 관계철학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힘의 논리를 앞세운 것으로 화쟁의 원칙이 없다. 그러나 상당히 강한 다른 이론, 즉 생물진화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것들은 꼭 강자만이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약한 자들이 연합하여 살아남았다는 이론이 매우 강하다. 이것은 러시아의 학자 크로포트킨이 쓴 『상호부조론』에서 주장하는 화쟁과 상생의 논리다. 만물은 서로 돕는다는 것이다. 어떤 것은 상생관계로 돕고, 어떤 것은 상극관계로 돕는다. 그것들은 서로 함께 존재해야 살아나가는 것이지, 어느 것이 사라지면 다른 것 역시 사라진다. 적대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 역시 공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주의 원리다. 원칙이 그러하지만,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현실에서 어떻게 사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2. 함석헌의 평화운동과 실천
함석헌의 평화사상이 언제부터 싹트게 되었을까? 가장 가까운 직접 영향은 2차 대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때 그는 전선에 투입되지는 않았지만, 무모한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특히 식민지배체제 아래 살고 있는 조선 청년들이 강제로 전쟁터에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가를 본다. 그리고 가장 큰 것, 특히 전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가장 큰 이유로 과학기술의 발달과 성숙한 인간이성을 든다. 전쟁무기를 생산하고 운용할 수 있는 과학기술은 세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을 완전히 말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증명하였다. 핵무기의 개발은 전혀 무력전쟁의 무의미함을 말해준다. 핵무기의 발명과 개발은 그것을 무기로 사용하여 무력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할 경우 모두가 멸망하게 될 것이기에 평화롭게 살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무렵 H. G. 웰즈의 『세계문화사대계』를 읽고 그의 세계국가주의와 평화사상을 받아들인다. 세계는 점점 더 하나의 국가로 되어가며, 한 형제로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으며, 싸워야 할 아무런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톨스토이나 간디의 삶은 그에게 비폭력적 평화의 삶이 어떠한 효과를 가져오는가를 깨우쳐준다. 더욱이나 인간이성의 성숙으로, 인간은 함께 사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과 그가 꾸리는 사회는 독립이지만, 종속이 나닌 함께 어울려 산다는 것을 생활로 경험한다. 급격하게 문제들이 개별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으로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점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더욱이나 6ㆍ25를 경험하면서 더 이상 무력을 통한 전쟁으로는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런데도 가장 안타까운 것 중 하나는, 누구보다, 어느 나라와 민족보다 더 평화를 사랑하여야 하는 한반도에서 ‘평화’란 말의 정치-사회적 범죄성을 뼈아프게 여긴다. 평화운동이 어디에서보다도 더 먼저 일어나야 할 한반도에서 평화란 말이 위험한 말이 되는 것을 경험하면서 당대의 가장 큰 화두는 평화임을 실감한다. 그 당시 평화는 새 길을 여는 명령이면서 시대를 때리고 깨우는 목탁이었다.
그래서 일차로 주장한 것이 한반도의 중립국가론이다. 이것은 그 당시 이데올로기 대립과 갈등이 심화된 상황에서 매우 위험한 발상이었다. 어느 한 이데올로기에 속하는 것을 극복하는, 초월하자는 주장이었다. 그것은 동시에 한반도의 남북 양쪽을 통제하고 있는 외세로부터 자유를 선언하고 독립하자는 주장이 된다. 즉 남의 힘을 빌리지 말고, 우리의 힘으로 나라를 통일하고 이끌어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스위스처럼 약한 나라는 중립의 입장이라야 자신을 잃지 않고 종속체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분리하고 지배하려는 외세의 입장에서 볼 때와, 그러한 외세의 힘을 빌어 정치를 하려는 세력의 입장으로 볼 때는 매우 불순한 주장이었다. 이러한 원칙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방법이 나와야 한다. 그것은 철학과 도구와 삶을 통합하는 것이라야 한다. 다음 같은 것들이 그 중 몇 가지다.
평화사상은 그의 폭력에 의한 피해와 그것에 맞서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일제 때 감옥에 두 번 씩 투옥되었고, 해방된 조국에서 소련군에 의하여 투옥되었고, 남쪽으로 내려와서 글을 쓴 것 때문에 투옥되었다. 그 뒤 감금, 투옥, 재판, 가택연금, 금구령에 버금가는 강연방해, 글 삭제와 게재방해 등을 받았다. 정부의 집권권력의 폭력성을 고스란히 몸으로 체험하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몇 가지 그의 평화사상과 운동에 영향을 준 것이 있었다. 동양에서는 제도와 권력을 철저히 부정하는 노장사상, 힌두교의 바가받기타를 몸으로 실천한 간디, 전쟁에 대한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것에 맹렬한 비판을 가하면서도 기독교의 예수와 이사야의 사상, 퀘이커의 평화사상과 평화운동, 그리고 우리 민족의 본래 가지고 있는 평화사랑의 사상을 기본으로 한다.
앞에서도 말하였듯이 평화는 그에게는 신조다. 어떤 논리나 실험으로 증명하여서가 아니다. 인간의 본능이 평화라고 보고 싶은 것이다. 평화가 생명의 본연의 길이기에 그것에 저촉되는 것에 대한 저항은 아주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평화는 공존이다. 공존하지 못하면 공멸할 뿐이다. 이렇게 평화로운 삶을 가장 극명하게 저해하는 것이 국가주의다. 나라를 뜻하는 한자의 국(國)자에서, 국가는 이미 근본에서부터 무력을 핵심으로 한다. 사람(口)과 땅(一)을 무력인 칼(戈)로 지켜 낼 큰 테두리(口)가 곧 국가다. 그에게 국가는 폭력의 핵심이다. 아직 사람이 크게 깨닫지 못하였을 때는 국가가 사람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지만, 지금은 그것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점점 더 국가는 견고한 성으로 자리를 굳힌다. 그러므로 가장 근본 되는 평화주의 운동은 국가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된다. 그 한 예를 그는 주민등록증을 만들지 않았다. 성숙한 개인-이성의 진행은 국가 없이 살 수 있는 때가 되었다는 것이 그의 확신이다. 전쟁은 언제나 국가를 앞세운 전쟁업자들의 흥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쟁만큼 가장 사치스럽고 낭비스럽고 파괴스런 것이 없다는 결론이다.
그런데 그것에 저항하는 방법은 어디까지나 비폭력저항이다. 그것의 실예를 간디의 비폭력저항운동에서 보며, 그보다 먼저 살았던 소로우에서 모범을 찾는다. 이 두 사람에게 비폭력은 방법이나 수단이 아니라 삶이었다. 그것을 통하여 일을 성취시키고 이룬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삶이기 때문에 살아갈 뿐이라는 것이다. 간디에게는 폭력을 통하여 인도의 독립을 얻기 보다는, 비폭력으로 영국의 식민지 안에서 사는 것이 더 낫다고 할 만큼 비폭력을 철저한 삶의 하나로 본 사람이다. 바로 그 길을 함석헌은 따르기를 바랬고, 실천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비폭력운동과 삶은 철저한 자기훈련과 자기교육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개개인들이나 집단문화가 성숙되어야 하며, 삶을 수련하듯이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은 폭력을 미워하고, 국가권력을 비판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잠시 동안 수행하고 담당하는 사람들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 사람을 우리와 꼭같은 인격을 가진 존재, 하느님, 부처, 그리스도, 인을 가진 존재로 인정하고 그들까지도 불쌍히 보고, 구원하는 깊은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엄밀히 따지면 그들은 역사의 심판을 위하여 대신 짐을 져주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함석헌이 가장 힘들어 했던 부분의 하나는 바로 이 점이었다. 내 속에 공격의 대상인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맘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다. 내가 맘으로 그를 미워하는 것은 이미 그를 죽이는 폭력에 사로잡힌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비판이나 대항하는 행동은 나와 그를 동시에 구원하는 기도요 구도자의 행위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을 위하여 해체되어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 중 하나가 계급이요, 소유제도였다. 계급은 평등에 저해되는 것이며, 지나친 소유제의 신성시는 함께 사는 것을 방해하는 근본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계급해체의 방법으로는 역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길 밖에 다른 것은 없었다. 그것은 인간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인권을 최대한으로 보장하는 사회제도에서 온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도 제재하지 않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민주주의의 실현은 그에게는 인간의 권위를 최대한으로 보장하고,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평등한 사회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것을 거저 되지 않는다. 값비싼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 전대로 남이 그것을 대신하거나 집어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 우리 자신이 이루어야 할 일이다. 그러기 위하여는 가장 중요한 것이 언론의 자유였다. 그래서 그는 일제 때는 김교신이 주간이었던 《성서조선》을 통하여, 해방된 뒤에는 《영단》아니, 《말씀》을 통하여 영적 진리의 말씀을 펼치다가, 1950년대 중반부터 장준하가 발행하는 《사상계》와 1970년에 그 자신이 발행한 잡지 《씨알의 소리》를 통하여 끊임없이 발언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바로 씨알의 자기교육 도구였다. 무지하거나 무식하여서는 결코 자기를 해방할 수는 없다. 온갖 것으로 씨알을 무식하게 만들고 무지하게 만들려는 제도로부터 벗어나려면 스스로 깨닫는 길밖에는 없다. 그러려면 교육기관이 필요한데, 이제 제도 교육기관이나 언론기관은 모두 다 기본 틀을 유지하고 지키고 더욱 견고히 하는데 봉사할 뿐이다. 여기에는 기본 종교기관들도 마찬가지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바른 언론을 통한 씨알들의 자기교육을 통한 깨달음, 곧 해방뿐이었다.
그 해방운동은 결국 평화운동과 통한다. 왜냐하면 온갖 기본 제도들은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는 데 방해되는 것을 주장하고 이끌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로부터 벗어나는 인간해방운동은 평화운동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데, 사탄은 우리는 서로 싸우는 적대자로 갈라놓고 지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평화운동을 제창하는 것은 결국 통합운동이다. 사람과 사람을 갈라놓고, 민족과 민족을 갈라놓으며, 나라와 나라를 분리하고,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를 따로 서게 하며, 사람과 하느님을 분리시키고, 자연과 인간을 적대관계로 설정하는 온갖 분열의 철학과 종교와 정치와 문화에 대한 저항운동이다. 그 저항은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함석헌은 끊임없이 ‘생각하는 백성’과 ‘행동하는 씨알’을 말하였다. 이들이 모여서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함께 살기 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 그의 평화운동의 요체였다.
3. 우리의 평화운동
그렇다면 우리의 평화운동은 어떠하여야 하는 것일까?
기독교인으로서: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구교와 신교를 막론하고 스스로 우리 사람들에 의하여 된 일이다. 여기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유교가 한국에 들어온 때도 분명한 기록은 없으나 그 때 사정으로 미루어보면 지배자 층을 통하여 들어왔고, 불교도 일부 민간에 들어왔던 것이 있는지 모르나 적어도 공공연히 크게 들어온 것은 정치 세력을 타고 왔다. 그러므로 그 두 종교는 처음부터 사회의 상층으로부터 시작되었고, 후에 민간에 널리 퍼진 때에는 그것은 늘 지배자의 종교, 국교였다. 그런데 이 기독교만은 그와 반대로 지배자가 아니고 불우한 지위에 있는 자를 통하여 왔다. 유교나 불교와 같이 나라 사이의 외교의 한 부분으로 온 것이 아니고 민간의 요구로 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 후의 발달에서도 나라의 지배 세력과 늘 사우는 자리에 있었다. 그러므로 도덕면에서 크게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한길사(젊은이들을 위한 새편집) 2010, 363
그래서 우리에게는 처음부터 큰 의미를 가지고 오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처음부터 온전히 세상을 건지고 인생을 건지는 진리로, 연구하는 것으로 시작이 되었으며, 마침내 이편에서 머리를 숙여 세례를 구하게 되었다는 것은 비단 교회사에서뿐 아니라 일반 역사를 이해하는 데도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위의 책, 364
이 때 우리 사회는 매우 절박하게 새로운 기운이 필요하였다. “한 시대가 새로워지려면 결국 기적이 일어나야만 한다. 기적을 행하는 것은 외물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하는 정신만이다. 그러므로 결국 종교 문제다. 유럽의 신생운동이 종교혁신에 이르러 가지고야 참 신생이 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때의 종교는 어떠하였느냐 하면 불교에서도 유교에서도 새로운 것을 기대할 수 없었다. 이제 깬다는 것은 씨알이 깨는 것이므로 요구되는 것은 씨알의 종교다. 그런데 유교도 불교도 다 씨알의 종교는 될 수 없었다. 그것은 완전히 씨을 떠나 특권층의 것이 되어버렸고, 그 특권층과 함께 썩었으므로 도저히 씨알의 가슴을 흔들 힘이 없었다. 씨알이 구하는 것은 곧 새 양심이다. 두 종교가 다 특권층에 붙음으로써 씨알의 양심을 마비시켜버렸다. 그러므로 그 때의 형식으로 굳어진 유교 교리나 고루한 선비의 유교 사상을 가지고는 아무리 뒤집고 고쳐보아도 씨알을 흔드는 새것은 나올 수 없었다.” 위의 책, 357
물론 그 당시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던 불교나 유교 역시 그것들이 들어올 때는 언제나 새 기운으로 들어왔다. 단군조선이 세워질 때 하나님을 숭배하는 종교로 됐고, 기자조선이 될 때 유교로 했으며, 삼국이 세워질 때는 불교가 큰 할 일을 하였다. 이것들이 다 썩은 뒤에는 새로운 것이 와야 하는 조건들이 형성된 때였다. 이 때 기독교는 왔다. 모두가 다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찾게 하려는 것이란다. 거기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아시아인이나 아프리카인이 따로 있지 않고, 종이나 주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늙은이나 젊은이가 따로 있지 않고, 지배자나 피지배자가 따로 있지 않다. 모두가 그 앞에서는 평등하며 오로지 하나가 되어 그를 찾음이 인생의 최종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가진 종교가 이 땅에 들어온 것은 몇 가지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었다. 1) 계급주의를 깨뜨리는 일이요, 2) 사대사상을 쓸어버리는 일이요, 3) 숙명론의 미신을 씻어버리는 일이었다. 위의 책, 369
이것을 이루기 위하여는 천지에 오직 섬길 이는 영이신 하나님 하나밖에 없다는 것, 모든 인류는 다 형제라는 것, 삶의 기본 원리는 사랑이라는 것, 그리고 진리에 대한 절대순종의 믿음을 주장하는 엄격한 도덕적 종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이 사명을 띄고 이 땅에 왔다는 것이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는 다 인생을 건지자는 것이지, 압박하고 짜먹는데 협력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모든 종교들이 그렇게 됐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그 자체 내에 계급주의, 사대주의, 미신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혁명을 이루지 못하는 종교가 되고 말았다. 순교자를 그렇게 많이 내면서도 사회혁명을 하지 못한 것은 바로 이 땅에 온 기독교가 깔끔하고 깨끗하게 들어오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위의 책, 370
그것은 서양에서 실패한, 썩은 제도를 그대로 가지고 왔을 뿐, 그리스도의 복음을 살리지 못한 데서 연유한다. 미신이 흥행한 것은 그 당시 사회가 흉흉하여 살고자 하는 발버둥이었다. 그것을 받아 새로 들어온 기독교는 과학적 탐구를 통한 개혁운동을 주도할 민중교육을 실시하였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때, 구교보다 100여년 늦게 들어온 개신교의 활동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흐름을 타고 들어온 개신교의 활동은 초기의 가톨릭처럼 매우 희망스런 출발을 하였다. 독립사상, 새교육의 흐름과 과학정신이 가득한 것은 새로운 기운을 넣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개신교가 했어야 할 근본혁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그것을 이끌고 나갈 사회적 중산층이 없었기 때문이다. 워낙 강력한 착취 때문에 피폐한 민중 뿐 중산계급이 형성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일제 때 그 역할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으나 기독교의 생생한 정신이 제대로 펴졌다면, 다른 시들어가는 종교들의 정신도 다시 살아나도록 됐어야 한다. 한 종교의 살아남은 다른 종교가 동시에 새롭게 살아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정신으로 나갈 때 사회는 평화가 오며 혁명은 가능하여 진다. 특히 우리 사회는 다원종교사회다. 역사를 관통하여 볼 때나 사회를 횡으로 볼 때 다양한 종교들이 고루 분포해 있다. 여기에서 원수는 없다는 것을 선언해야 한다. 한 종교의 건전한 발전은 다른 종교의 건전한 발전을 이끌어 온다. 반대로 한 종교의 타락은 다른 종교의 타락을 함께 불러 올 수도 있다. 모든 것은 그물처럼 얽혀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의 평화생활의 요체는 이러한 것이리라. 신약성경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 12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중심으로부터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는 척 하지 마십시오. 악은 필사적으로 피하십시오. 선은 필사적으로 붙드십시오. 깊이 사랑하는 좋은 친구들이 되십시오. 기꺼이 서로를 위한 조연이 되어 주십시오.(9-10) 지쳐 나가떨어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늘 힘과 열정이 가득한 사람이 되십시오. 언제든 기쁘게 주님을 섬길 준비를 갖춘 종이 되십시오. 힘든 시기에도 주저앉지 마십시오. 그럴수록 더욱 열심히 기도하십시오. 도움이 필요한 그리스도인들을 도우십시오. 정성껏 환대하십시오.(11-13) 원수에게도 축복해 주십시오. 결코 악담을 퍼붓거나 하지 마십시오. 친구들이 행복해 할 때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그들이 슬퍼할 때 함께 울어 주십시오. 서로 잘 지내십시오. 혼자 잘난 척 하지 마십시오. 별 볼 일 없는 이들과도 친구가 되십시오. 대단한 사람인 양 굴지 마십시오.(14-16) 되받아치려고 하지 마십시오. 대신 누구에게서나 아름다운 점을 찾으십시오. 할 수 있다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사이좋게 지내십시오. 받은 대로 갚아 주겠다고 고집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이 할 일이 아닙니다. ‘내가 상관할 것이다.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다’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17-19) 우리의 성경은 원수가 굶주리고 있는 것을 보면 가서 점심을 사 주고 그가 목말라하면 음료수를 대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런 관대함을 베풀면 원수는 소스라치게 놀랄 것입니다. 악이 여러분을 이기도록 놔두지 마십시오. 오히려 선을 행함으로써 악을 이겨 내십시오.(20-21)” 신약성경, 로마서 12장(유진 페터슨: 메시지, 신약), 복 있는 사람 2010
얼마나 놀라운 소리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의 말씀,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을 실천하는 실행방법이다. 진리를 위하여 죽은, 초기의 순교자들은 모두가 다 타협을 몰랐고, 방편을 쓰지 않았으며, 소박하였고, 목숨을 내걸었고, 직접적이요, 저돌적이었다. 그것이 우리 크리스천의 전범이다. 그런데 지나치게 지금은 국가주의, 자본주의, 정치주의와 타협하여 산다.
일반 시민으로서; 허(虛) 정(靜) 유(柔) 겸(謙)의 수련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하여 일단 ‘나’를 정립해야 한다. 나는 공(公)과 연결되고, 하나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공은 국가, 민족, 종교, 단체, 가문 따위를 뛰어 넘는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한 때 우리 인류 역사에서 공은 바로 위에 든 것들이라고 여기게 되었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공으로 가는 길목에서 잠간 돌보아 주는 역할을 하였던 것들이다. 지금은 그것을 지나야 하는 때가 되었다. 여기에서 바로 허상을 넘는, 진리와 합일되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를 나 되게 하는 데 방해 되는 모든 것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나’는 어떤 사람이든 그 속에 그리스도, 하느님, 부처, 인(仁)의 씨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우리는 내면의 빛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이것은 적절한 상황만 되면 언제나 움이 트고 잎이 나고 줄기가 생기고 가지를 뻗치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것은 언제나 무서운 고난 속에서 피어난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모든 좋고 나쁜 환경을 겪어 가면서 때를 기다려서 솟아난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씨는 많고 무성해서가 아니라, 한 알이라도 제대로 여물고 썩으면 된다. ‘나는 한 알의 씨다’ 라는 생각을 가지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것을 선언하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요 위로다. 나는 한 알의 씨알이다. 즉 하느님, 그리스도, 부처, 인, 내면의 빛을 가지고 있는 영근 씨알이라는 것을 확고하게 믿는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든 그 속에 그리스도,
하느님, 부처, 인(仁)의 씨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우리는 내면의 빛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함석헌과 김교신 등이 일제 강점기의 갖은 압제에서 온갖 박해를 겪으면서 만들어 낸 《성서조선》이란 잡지는 독자가 많을 때 200명 정도를 넘지 못하였으며, 그들이 매년 연말과 연시에 가졌던 수련집회에는 20명 이내가 참석하였다. 그런데 그들에게 뿌려진 씨와 그들이 뿌린 씨는 매우 고귀하고 강력하였다. 한 사람에게 뿌려진 씨는 모든 사람에게 함께 뿌려지는 보편적 씨요, 한 곳에 피어나는 씨는 전체를 뒤덮는 상징이다. 관저동에 개나리가 피면 다른 강산에도 핀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요, 목포에서 움트는 싹이라면 여기에서도 조건이 맞으면 틔어난다는 것을 예시하는 것이다.
다시 반복하여 말하는 것이지만, 동양에서 인(仁)으로 표시하는 씨, 기독교에서 이미지 또는 형상으로 표시하는 하느님의 상은 모든 사람에게 있다. 아니, 내 속에 있다. 이 씨는 알이다. 로 함석헌은 표시하는데, 그것은 바로 전체와 개체, 극대와 극소, 영원과 순간, 하늘과 인간을 통합하는 개념이다. 그것은 각각 독립된 개체이면서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다. 이것이 평화의 근원이다. 아름다움의 근원이다. 이 씨를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 있는 한 우리는 평화할 수밖에 없다.
생명평화운동에서 전개하고 있는 ‘우리가 평화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평화가 되자’라는 것은 좀 더 적극성을 띈 것으로 진전되어야 한다. 나는 이미 평화의 씨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을 누리는 것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평화는 원하고 원하지 않고 할 선택사항이 아니라, 명령으로 받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평화 한다고 선언하는 것만이 남아 있다. 다른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하느냐에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내가 평화하면 된다. 이미 나는 평화에 들어섰다고 선언하고 믿는 것이 중요하다. 독립은 선언하므로 시작이 되고, 자유와 평화 역시 선언하므로 되는 것이다. ‘네 병이 고쳐졌느니라’ 선언할 때 이미 병은 사라지는 것이다.
정의롭고 아름다운 세상은 바로 평화로운 세상이다. 단일한, 획일화한 세상이 아니라, 백화가 만발하듯이 서로 다른 독특한 것들이 건전하게 조화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음악이 될 때는 각각 자기 소리를 내되 다른 것에 맞출 때 이루어진다. 불협화음도 아름다운 음악이 되는 것은 바로 전체 음악에 따르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그가 만들고 인정한 모든 것 속에 그의 속성이 함께 들어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믿고 따른다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따르고 그렇지 않은 것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만큼 통이 클 필요가 있단 말이다.
나와 전체; 그렇다면 어떻게 하자는 것일까? 우리는 몇 가지를 일상생활에서 실현하여 볼 필요가 있다. 평화는 거저 오는 것이 아니라, 만들고 찾아야 하는 것이다. 누가 할까? 내가 평화롭게 살아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우선 ‘천하에 남이란 없다’는 묵자의 말을 깊이 새길 필요가 있다. 그래서 폭력과 평화에 대한 공부와 생각을 하되, 혼자서도 하여야 하는 것이지만, 몇 명 씩 짝을 지어 끊임없이 해보는 것이다. 수도원이나 수녀원 같은 함께 살아가는 것을 실험할 필요도 있다. 간디는 그것을 아쉬람에서 실험하여 보았고, 함석헌 역시 실패하긴 하였으나 몇 번 시도하여 보았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적대적이라고 하는 것을 서로 방문하여 보는 것도 좋겠다. 우선 가톨릭과 개신교가 서로 짝을 지어 방문하여 보고, 기독교가 연합하여 불교나 원불교나 이슬람을 방문하고, 함께 예배, 미사, 예불을 드려보는 것이 좋겠다. 다른 종교를 적대시하고 자기들 것만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대한 배반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평화의 노래를 자주 부르고, 평화의 기도를 부르며, 한 두 가지의 평화운동이나 평화로운 삶에 구체적으로 우리 자신을 던져보는 것이 좋겠다. 이제는 좌우익의 갈등이나, 진보나 보수의 대립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아우르거나 뛰어넘는 하나로 살아가는 실제 생활을 실험하여 볼 때다. 사실 우리 속에는 모든 것을 통합하는 진리를 가지고 있다. 다만 제도와 틀이 그것을 가리고 방해할 뿐이다. 성숙된 인간이라면 바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운동을 벌일 때 우리 사회에 평화로운 기운은 싹이 트고 만발할 것이라고 믿는다. 사실 오늘 가톨릭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퀘이커를 따르는 저를 이곳에 초청하여 이야기를 서로 나누고자 하는 것 자체가 벌써 통합의 평화운동으로 가는 한 발걸음이라고 생각한다. 남이야 어떠하든 나는 평화 한다는 것, 사회야 어떠하든 나는 평화 한다는 것을 선언하고 나갈 때 이미 평화의 세계는 뿌려지고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고 나무가 되며 가지가 돋고, 잎이 피고 꽃이 피며 열매를 맺어 다시 땅에 떨어져 그 평화의 행진을 계속하여 진행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 맘과 발걸음 자체가 이미 복일 것이다. 세상은 언젠가는 평화의 세계가 되고야 말 것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요 예수가 이 땅에 온 뜻일 것임을 믿는다. 그러나 지금 평화롭다는 안일한 생각에 위기의식이 없을 때 이미 평화세계는 깨져버리는 것이 될 것이다.
(2010. 11. 15. 관저동성당에서)
[20101115. 사진] 김조년 교수의 함석헌의 평화주의의 우리의 평화운동
출처: https://www.djpeace.or.kr/177 [천주교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20101115] 김조년 교수의 함석현의 평화주의와 우리의 평화운동 (정세미)정세미 강연 2016. 12. 20. 22:09
2010년 11월 15일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한 미사(정세미) 강연
대전 관저동 성당
함석헌의 평화주의와 우리의 평화운동
김조년 한남대 교수
(민들레의료생협 이사장, 표주박통신 발행인)
함석헌의 평화사상의 맥락
이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일단 그의 생애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살피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함석헌에게서 평화는 가능하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를 뛰어넘는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왜 살아야 하냐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하는 것과 같다. 어느 누구도 살 가치가 있다거나, 살아야 할 어떤 당위성이 있어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냥 낳았으니까 사는 것이요, 살려 주시는 것이니까 사는 것이지, 어떤 자유의지의 선택에 따라서 우리가 사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물론 살지 않고 죽음을 택할 수는 있는 것이지만, 그 순간 삶과는 일단 떨어진다. 살아 있는 한은 살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를 생각할 것 없이 그냥 살아가는 것이다. 거기에 어떤 다른 질문이 없다. 이것처럼 평화롭게 사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삶이 아니면 죽음이듯이, 평화가 아니면 반평화나 불화가 있을 뿐이다. 즉 평화롭게 살아야 하냐 아니냐의 문제는 평화가 필요한 것이냐, 가능하냐,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느냐를 뛰어 넘는 문제로 설정한다. 여기에는 어떤 논리를 따지는 말의 전개가 필요가 없다. 평화하지 않으면 죽음이다 하는 것에 걸리는 문제기 때문이다.
함석헌에게서 이러한 문제는 태어나면서부터 일생을 따라다닌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가 태어난 1901년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한 가운데 있는 시점으로 언제나 전쟁의 기운이 사회에 가득할 때였다. 특히 그가 태어난 평안북도 용천지방은 중국과 한반도를 연결하는 지점, 압록강 하류 서해안에 있는 작은 섬이었다. 그래서 지리상으로 볼 때 중국과 한반도 사이의 갈등과 긴장과 화해의 분위기를 아주 민감하게 느끼던 곳이다. 더욱이나 조선은 말기현상으로 중앙정부의 권위가 사라지고 지역민 스스로 자신들의 안녕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와 곳에서 자랐다. 전쟁의 분위기는 어린아이들의 놀이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패를 나누어 놀이를 할 때에도 ‘나는 아라사다, 나는 일본이다’라고 하면서 전쟁놀이를 하는 것이 어린아이들의 일상이었다.
6ㆍ25 때 우리가 전쟁놀이 하면서 자랐고, 지금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과 미군이 싸우는 전쟁놀이를 하고 자라는 아이들이 있는 것처럼, 언제나 전쟁 상황에서는 아이들이 놀이를 통하여 전쟁을 재생산하고 체화하는 비극을 반복한다. 그러다가 국권을 잃은 때부터 점점 더 사회불안은 심화되었다. 이러한 때 사회분위기는 언제나 나라를 잃고 자기를 상실한 비애감에 휩싸였다. 함석헌의 집안 분위기와 그가 살던 지역의 분위기는 중앙정부와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상관은 없었지만, 민족과 나라를 잃은 것에 대한 비감함은 매우 대단하였다. 그러한 것이 그에게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가 일찍이 어린 나이에 접촉한 기독교교육의 효과는 매우 결정적으로 컸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동등하다는 것을 그는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그가 자랐던 곳에서는 반상의 구별이 별로 없던, 평민들이 주로 살았던 곳이기에 계급갈등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안에서의 남녀차별이나 장자우선 관습은 남아 있었지만, 그것은 어머니의 가르침에 의하여 아주 뼈저린 경험으로 깨지고 깨우쳐진다. 거기에서 그에게는 민주주의 사상의 기초를 배운다. 남녀가 평등하다는 것, 상하가 평등하다는 것을 어머니의 단순한 이야기로 깨달아 그의 일생을 이끌어 나간다.
그 뒤 그는 사립 기독교학교를 다닐 때와 공립학교를 다닐 때의 분위기를 다 경험한다. 사립학교에서는 매우 활발한 자유정신과 독립정신을 경험하였지만, 공립학교에서는 식민지배자의 앞잡이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다른 선택의 가능성이 없었다. 그러던 중 3ㆍ1만세운동이 일어난다. 이 때 그는 평양의 만세운동을 앞장에서 아주 시원하게 전개한다. 그 결과로 학교를 나오게 되고, 다시는 관립학교에 가지 않고, 그의 말대로 하느님의 발길에 채여 오산학교에 간다. 이 때부터 그는 관과는 대립하는 관계를 설정한다. 그것은 바로 그에게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거대한 사건이 된다. 그곳에서 민족주의를 알게 되고, 독립 기독교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동양고전과 서양철학의 접목이 어떠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며, 동시에 자기 자신이 독자적으로 깊이 생각하고 파고들어가는 훈련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 그는 매우 귀한 사람들을 책으로 접촉하게 된다. 가장 귀한 인물이 이승훈과 유영모다.
일본에 건너가 공부하게 되면서 기독교를 새로 이해하고, 기독교와 애국이라는 관계를 새롭게 정리한다. 특히 예레미야를 공부하면서 망국노의 비애가 무엇인지? 무엇을 통하여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데 힘을 보탤 수 있는 것인지를 깨닫고 생각하게 된다. 이 때 그가 만난 우찌무라 간조는 일생의 좋은 스승으로 남는다. 그에게 배운 것은 독립정신으로 모든 것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뒤 귀국하여 모교 오산학교에서 10년간 교사로 생활한다.
특히 예레미야를 공부하면서 망국노의 비애가 무엇인지?
무엇을 통하여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데
힘을 보탤 수 있는 것인지를 깨닫고 생각하게 된다.
이 때 그의 동료 김교신과 함께 무교회성서집회를 열고, 《성서조선》을 창간하여 함께 꾸려나간다. 이 때 그는 오산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데, 역사 교사가 된 것을 무척 후회한다. 아무 것도 학생들에게 영광스럽던 조상들의 역사를 가르칠 건덕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외세의 침략과 패배와 굴종과 식민통치의 쓰라린 경험의 역사만을 반복할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데는 ‘자기를 잃어버린’ 결과라는 것이다. 자기를 잃어버린 뒤에는 어떠한 물질의 영광이나 힘의 강력함도 소용이 없다. 등뼈가 부러진 것이요, 중축이 부러진 것이 되고 만다. 그러한 근본이 못된 다음에는 어떤 처방도 임시처방일 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러한 것들을 보면서 그는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쓴다.
여기에서 그는 한국역사를 고난의 역사로 규정하고, 고난의 의미를 예수의 고난과 한국민족의 고난을 대비하여 본다. 예수의 고난에서 인류구원의 비전을 보듯이 한국역사의 고난의 행진 속에서 세계구원의 비전을 본다. 한국역사는 단순히 한민족의 한 역사로 끝나지는 않는다. 그 한 예가 6ㆍ25전쟁이다.
그것은 세계의 모든 잘못 된 것이 함께 몰려든 전쟁이다. 이데올로기와 물질과 과학과 민족들과 헤게모니 쟁탈전이 한반도에서 집중하여 나타난 것이었다. 그것은 세계화의 어두운 면과 긍정의 면을 동시에 경험한 거대한 사건이었다. 이것의 의미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1) 우선 무력과 전쟁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 2) 국지적인 문제라 하더라도 그 지역의 독자적 힘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관계 안에서 해결된다는 것, 3) 적과 아, 원수와 형제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인류, 하나의 인간이라는 철학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 4) 그러나 민족의 문제는 외세종속체계에서가 아니라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앞서야 한다는 것, 5) 고난의 연속으로 경험한 민족의 최대비극을 통하여 세계구원의 원대한 비전을 찾아보라는 것, 6) 적대관계나 상생관계나 어느 한 편이 이기고 다른 편은 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살아가는 길을 찾으라는 것. 사실 이러한 것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현재의 남북문제도 처리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비로소 예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과 모든 인류가 궁극적으로 구원되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음미하여 볼 때라고 본다. 이 부분은 뒤에서 다시 논의하게 될 것이다.
그이의 평화사상: 민족과 민족의 화합, 사람과 하느님의 합일, 사람과 자연의 평화, 순간(지금)과 영원의 통합, 땅과 하늘의 합일, 개인과 전체의 합일을 상정한다.
그는 “씨알은 평화요 평화는 씨알에 있다”는 명제에 따라서 이와 같은 사상을 전개한다. “우리는 모두 세 세계에 살고 있다. 극대(極大)의 나라, 극소(極小)의 나라, 중간 나라. 물질계를 보는 데 눈ㆍ망원경ㆍ현미경의 세 눈이 있듯이, 정신계에도 세 눈이 있어야 한다. 영원ㆍ무한을 내다보는 눈, 마음이 갈피를 찾는 눈, 그리고 사회와 역사를 두루 살피는 눈. 이 여섯 세계를 공통으로 다스리고 있는 원리가 평화다. 화는 곧 조화ㆍ고름인데, 고르게 되지 않고는 세계가 서갈 수 없다. 안ㆍ밖ㆍ생ㆍ무생을 말할 것 없이 복잡한 힘의 얽힘이다. 그 얽혀 작용하는 것이 어느 고른 상태에 이르지 않고는 하나의 세계가 있을 수 없다. 코스모스라는 말은 그래서 있다. 하나의 질서 잡히고 법칙 있는 세계가 된 다음에야 우리가 능히 생각하고 알고 교섭할 수 있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설혹 상상한대도 혼돈ㆍ어지러움ㆍ허무ㆍ두루뭉수리밖에 없다. 우리가 있을 때, 알 때, 나일 때는 벌써 거기 세계 곧 질서ㆍ코스모스ㆍ대조화ㆍ평화가 있었다. ‘화(和)는 천하지달도(天下之達道)다.’(중용) 그러므로 화는 알파와 오메가다.
영원ㆍ무한을 내다보는 눈, 마음이 갈피를 찾는 눈,
그리고 사회와 역사를 두루 살피는 눈.
이 여섯 세계를 공통으로 다스리고 있는 원리가 평화다.
다른 말로 하면 평화는 구경의 원리인 동시에 또 내재의 원리다. 칸트가 위와 안을 보고 다 같이 놀라고 찬미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중간의 세계도 알고 보면 놀랍다. 공자가 교육의 대강을 말하는데, 명명덕 친(신)민 지어지선(明明德 親(新)民 止於至善)이라고 했다. 그것을 실현하는 과정을 말할 때 첫머리에 평천하(平天下)를 내걸었다. 명명덕 어천하(明明德 於天下)라 했다. 예수가 날 때 하늘에서 찬송이 들려서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기쁨’이라 했다. 노자의 무위(無爲), 석가의 니르바나도 요컨대 평(平)의 자리다.
예와 이제를 말할 것 없이, 종교 정치를 가를 것 없이, 사람인 다음에는 다 평화를 내세웠다. 전쟁을 직업으로 하여 불쌍한 씨알의 피로 제 살을 찌우고 기름을 짜며 사람 죽임을 재미있는 장난으로까지 하는 소위 영웅이란 것들도 입으로는 평화를 위해 하노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주 내놓고 전쟁을 예찬하는 놈은 미쳤거나 그렇지 않으면 악마의 종자라고 할밖에 없다. 씨알은 말하자면 내재의 평화, 극소세계의 평화다. 본질적인 평화다. 씨알의 바탈이 평화요, 평화의 열매가 씨알이다. 그러므로 씨알의 목적은 평화의 세계 이외에 있을 수 없다. 극소는 극대에 통한다.” 함석헌: ‘세계평화의 길’, 함석헌 저작집 12, 『평화운동을 일으키자』, 한길사 2009, 44-46
결국 그에게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 그것들이 교섭하여 사는 방법은 화라는 것이다. 그것이 그가 내세우는 평화사상의 알파요 오메가다. 그런데 이것들이 깨지는 데는 몇 가지 사회제도와 그것에 힘을 업은 인간의 집단 심리와 집단행동에서 연유한다. 소유제와 국가지상주의와 계급제가 그것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것은 국가지상주의다. 국가주의는 결국엔 국가지상주의, 민족 지상주의로 변하여 나와 다른 민족이나 나와 다른 가문, 또는 내나라 다른 나라, 나와 다른 종교에 대한 전쟁을 때때로 신성한 것으로 만들었다. 대개 정의로운 전쟁이나 거룩한 전쟁이란 것은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뒷받침하는 철학은 차별에 있다. 나와 너는 다르다는 것, 다른 너는 나의 소유물이나 밥이나 도구가 되어도 좋다는 기본철학을 깔고 있다. 여기에 모든 중심은 ‘나’에 있다. ‘우리’나 ‘서로’가 아니라, ‘나’를 중심에 놓는다. 이 때 나는 언제나 강력하여야 했다. 여기에 복무한 것이 이른바 우승열패, 약육강식 따위의 사회진화론적 차원의 관계철학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힘의 논리를 앞세운 것으로 화쟁의 원칙이 없다. 그러나 상당히 강한 다른 이론, 즉 생물진화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것들은 꼭 강자만이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약한 자들이 연합하여 살아남았다는 이론이 매우 강하다. 이것은 러시아의 학자 크로포트킨이 쓴 『상호부조론』에서 주장하는 화쟁과 상생의 논리다. 만물은 서로 돕는다는 것이다. 어떤 것은 상생관계로 돕고, 어떤 것은 상극관계로 돕는다. 그것들은 서로 함께 존재해야 살아나가는 것이지, 어느 것이 사라지면 다른 것 역시 사라진다. 적대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 역시 공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주의 원리다. 원칙이 그러하지만,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현실에서 어떻게 사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2. 함석헌의 평화운동과 실천
함석헌의 평화사상이 언제부터 싹트게 되었을까? 가장 가까운 직접 영향은 2차 대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때 그는 전선에 투입되지는 않았지만, 무모한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특히 식민지배체제 아래 살고 있는 조선 청년들이 강제로 전쟁터에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가를 본다. 그리고 가장 큰 것, 특히 전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가장 큰 이유로 과학기술의 발달과 성숙한 인간이성을 든다. 전쟁무기를 생산하고 운용할 수 있는 과학기술은 세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을 완전히 말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증명하였다. 핵무기의 개발은 전혀 무력전쟁의 무의미함을 말해준다. 핵무기의 발명과 개발은 그것을 무기로 사용하여 무력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할 경우 모두가 멸망하게 될 것이기에 평화롭게 살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무렵 H. G. 웰즈의 『세계문화사대계』를 읽고 그의 세계국가주의와 평화사상을 받아들인다. 세계는 점점 더 하나의 국가로 되어가며, 한 형제로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으며, 싸워야 할 아무런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톨스토이나 간디의 삶은 그에게 비폭력적 평화의 삶이 어떠한 효과를 가져오는가를 깨우쳐준다. 더욱이나 인간이성의 성숙으로, 인간은 함께 사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과 그가 꾸리는 사회는 독립이지만, 종속이 나닌 함께 어울려 산다는 것을 생활로 경험한다. 급격하게 문제들이 개별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으로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점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더욱이나 6ㆍ25를 경험하면서 더 이상 무력을 통한 전쟁으로는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런데도 가장 안타까운 것 중 하나는, 누구보다, 어느 나라와 민족보다 더 평화를 사랑하여야 하는 한반도에서 ‘평화’란 말의 정치-사회적 범죄성을 뼈아프게 여긴다. 평화운동이 어디에서보다도 더 먼저 일어나야 할 한반도에서 평화란 말이 위험한 말이 되는 것을 경험하면서 당대의 가장 큰 화두는 평화임을 실감한다. 그 당시 평화는 새 길을 여는 명령이면서 시대를 때리고 깨우는 목탁이었다.
그래서 일차로 주장한 것이 한반도의 중립국가론이다. 이것은 그 당시 이데올로기 대립과 갈등이 심화된 상황에서 매우 위험한 발상이었다. 어느 한 이데올로기에 속하는 것을 극복하는, 초월하자는 주장이었다. 그것은 동시에 한반도의 남북 양쪽을 통제하고 있는 외세로부터 자유를 선언하고 독립하자는 주장이 된다. 즉 남의 힘을 빌리지 말고, 우리의 힘으로 나라를 통일하고 이끌어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스위스처럼 약한 나라는 중립의 입장이라야 자신을 잃지 않고 종속체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분리하고 지배하려는 외세의 입장에서 볼 때와, 그러한 외세의 힘을 빌어 정치를 하려는 세력의 입장으로 볼 때는 매우 불순한 주장이었다. 이러한 원칙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방법이 나와야 한다. 그것은 철학과 도구와 삶을 통합하는 것이라야 한다. 다음 같은 것들이 그 중 몇 가지다.
평화사상은 그의 폭력에 의한 피해와 그것에 맞서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일제 때 감옥에 두 번 씩 투옥되었고, 해방된 조국에서 소련군에 의하여 투옥되었고, 남쪽으로 내려와서 글을 쓴 것 때문에 투옥되었다. 그 뒤 감금, 투옥, 재판, 가택연금, 금구령에 버금가는 강연방해, 글 삭제와 게재방해 등을 받았다. 정부의 집권권력의 폭력성을 고스란히 몸으로 체험하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몇 가지 그의 평화사상과 운동에 영향을 준 것이 있었다. 동양에서는 제도와 권력을 철저히 부정하는 노장사상, 힌두교의 바가받기타를 몸으로 실천한 간디, 전쟁에 대한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것에 맹렬한 비판을 가하면서도 기독교의 예수와 이사야의 사상, 퀘이커의 평화사상과 평화운동, 그리고 우리 민족의 본래 가지고 있는 평화사랑의 사상을 기본으로 한다.
앞에서도 말하였듯이 평화는 그에게는 신조다. 어떤 논리나 실험으로 증명하여서가 아니다. 인간의 본능이 평화라고 보고 싶은 것이다. 평화가 생명의 본연의 길이기에 그것에 저촉되는 것에 대한 저항은 아주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평화는 공존이다. 공존하지 못하면 공멸할 뿐이다. 이렇게 평화로운 삶을 가장 극명하게 저해하는 것이 국가주의다. 나라를 뜻하는 한자의 국(國)자에서, 국가는 이미 근본에서부터 무력을 핵심으로 한다. 사람(口)과 땅(一)을 무력인 칼(戈)로 지켜 낼 큰 테두리(口)가 곧 국가다. 그에게 국가는 폭력의 핵심이다. 아직 사람이 크게 깨닫지 못하였을 때는 국가가 사람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지만, 지금은 그것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점점 더 국가는 견고한 성으로 자리를 굳힌다. 그러므로 가장 근본 되는 평화주의 운동은 국가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된다. 그 한 예를 그는 주민등록증을 만들지 않았다. 성숙한 개인-이성의 진행은 국가 없이 살 수 있는 때가 되었다는 것이 그의 확신이다. 전쟁은 언제나 국가를 앞세운 전쟁업자들의 흥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쟁만큼 가장 사치스럽고 낭비스럽고 파괴스런 것이 없다는 결론이다.
그런데 그것에 저항하는 방법은 어디까지나 비폭력저항이다. 그것의 실예를 간디의 비폭력저항운동에서 보며, 그보다 먼저 살았던 소로우에서 모범을 찾는다. 이 두 사람에게 비폭력은 방법이나 수단이 아니라 삶이었다. 그것을 통하여 일을 성취시키고 이룬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삶이기 때문에 살아갈 뿐이라는 것이다. 간디에게는 폭력을 통하여 인도의 독립을 얻기 보다는, 비폭력으로 영국의 식민지 안에서 사는 것이 더 낫다고 할 만큼 비폭력을 철저한 삶의 하나로 본 사람이다. 바로 그 길을 함석헌은 따르기를 바랬고, 실천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비폭력운동과 삶은 철저한 자기훈련과 자기교육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개개인들이나 집단문화가 성숙되어야 하며, 삶을 수련하듯이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은 폭력을 미워하고, 국가권력을 비판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잠시 동안 수행하고 담당하는 사람들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 사람을 우리와 꼭같은 인격을 가진 존재, 하느님, 부처, 그리스도, 인을 가진 존재로 인정하고 그들까지도 불쌍히 보고, 구원하는 깊은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엄밀히 따지면 그들은 역사의 심판을 위하여 대신 짐을 져주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함석헌이 가장 힘들어 했던 부분의 하나는 바로 이 점이었다. 내 속에 공격의 대상인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맘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다. 내가 맘으로 그를 미워하는 것은 이미 그를 죽이는 폭력에 사로잡힌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비판이나 대항하는 행동은 나와 그를 동시에 구원하는 기도요 구도자의 행위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을 위하여 해체되어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 중 하나가 계급이요, 소유제도였다. 계급은 평등에 저해되는 것이며, 지나친 소유제의 신성시는 함께 사는 것을 방해하는 근본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계급해체의 방법으로는 역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길 밖에 다른 것은 없었다. 그것은 인간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인권을 최대한으로 보장하는 사회제도에서 온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도 제재하지 않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민주주의의 실현은 그에게는 인간의 권위를 최대한으로 보장하고,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평등한 사회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것을 거저 되지 않는다. 값비싼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 전대로 남이 그것을 대신하거나 집어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 우리 자신이 이루어야 할 일이다. 그러기 위하여는 가장 중요한 것이 언론의 자유였다. 그래서 그는 일제 때는 김교신이 주간이었던 《성서조선》을 통하여, 해방된 뒤에는 《영단》아니, 《말씀》을 통하여 영적 진리의 말씀을 펼치다가, 1950년대 중반부터 장준하가 발행하는 《사상계》와 1970년에 그 자신이 발행한 잡지 《씨알의 소리》를 통하여 끊임없이 발언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바로 씨알의 자기교육 도구였다. 무지하거나 무식하여서는 결코 자기를 해방할 수는 없다. 온갖 것으로 씨알을 무식하게 만들고 무지하게 만들려는 제도로부터 벗어나려면 스스로 깨닫는 길밖에는 없다. 그러려면 교육기관이 필요한데, 이제 제도 교육기관이나 언론기관은 모두 다 기본 틀을 유지하고 지키고 더욱 견고히 하는데 봉사할 뿐이다. 여기에는 기본 종교기관들도 마찬가지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바른 언론을 통한 씨알들의 자기교육을 통한 깨달음, 곧 해방뿐이었다.
그 해방운동은 결국 평화운동과 통한다. 왜냐하면 온갖 기본 제도들은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는 데 방해되는 것을 주장하고 이끌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로부터 벗어나는 인간해방운동은 평화운동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데, 사탄은 우리는 서로 싸우는 적대자로 갈라놓고 지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평화운동을 제창하는 것은 결국 통합운동이다. 사람과 사람을 갈라놓고, 민족과 민족을 갈라놓으며, 나라와 나라를 분리하고,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를 따로 서게 하며, 사람과 하느님을 분리시키고, 자연과 인간을 적대관계로 설정하는 온갖 분열의 철학과 종교와 정치와 문화에 대한 저항운동이다. 그 저항은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함석헌은 끊임없이 ‘생각하는 백성’과 ‘행동하는 씨알’을 말하였다. 이들이 모여서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함께 살기 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 그의 평화운동의 요체였다.
3. 우리의 평화운동
그렇다면 우리의 평화운동은 어떠하여야 하는 것일까?
기독교인으로서: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구교와 신교를 막론하고 스스로 우리 사람들에 의하여 된 일이다. 여기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유교가 한국에 들어온 때도 분명한 기록은 없으나 그 때 사정으로 미루어보면 지배자 층을 통하여 들어왔고, 불교도 일부 민간에 들어왔던 것이 있는지 모르나 적어도 공공연히 크게 들어온 것은 정치 세력을 타고 왔다. 그러므로 그 두 종교는 처음부터 사회의 상층으로부터 시작되었고, 후에 민간에 널리 퍼진 때에는 그것은 늘 지배자의 종교, 국교였다. 그런데 이 기독교만은 그와 반대로 지배자가 아니고 불우한 지위에 있는 자를 통하여 왔다. 유교나 불교와 같이 나라 사이의 외교의 한 부분으로 온 것이 아니고 민간의 요구로 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 후의 발달에서도 나라의 지배 세력과 늘 사우는 자리에 있었다. 그러므로 도덕면에서 크게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한길사(젊은이들을 위한 새편집) 2010, 363
그래서 우리에게는 처음부터 큰 의미를 가지고 오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처음부터 온전히 세상을 건지고 인생을 건지는 진리로, 연구하는 것으로 시작이 되었으며, 마침내 이편에서 머리를 숙여 세례를 구하게 되었다는 것은 비단 교회사에서뿐 아니라 일반 역사를 이해하는 데도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위의 책, 364
이 때 우리 사회는 매우 절박하게 새로운 기운이 필요하였다. “한 시대가 새로워지려면 결국 기적이 일어나야만 한다. 기적을 행하는 것은 외물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하는 정신만이다. 그러므로 결국 종교 문제다. 유럽의 신생운동이 종교혁신에 이르러 가지고야 참 신생이 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때의 종교는 어떠하였느냐 하면 불교에서도 유교에서도 새로운 것을 기대할 수 없었다. 이제 깬다는 것은 씨알이 깨는 것이므로 요구되는 것은 씨알의 종교다. 그런데 유교도 불교도 다 씨알의 종교는 될 수 없었다. 그것은 완전히 씨을 떠나 특권층의 것이 되어버렸고, 그 특권층과 함께 썩었으므로 도저히 씨알의 가슴을 흔들 힘이 없었다. 씨알이 구하는 것은 곧 새 양심이다. 두 종교가 다 특권층에 붙음으로써 씨알의 양심을 마비시켜버렸다. 그러므로 그 때의 형식으로 굳어진 유교 교리나 고루한 선비의 유교 사상을 가지고는 아무리 뒤집고 고쳐보아도 씨알을 흔드는 새것은 나올 수 없었다.” 위의 책, 357
물론 그 당시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던 불교나 유교 역시 그것들이 들어올 때는 언제나 새 기운으로 들어왔다. 단군조선이 세워질 때 하나님을 숭배하는 종교로 됐고, 기자조선이 될 때 유교로 했으며, 삼국이 세워질 때는 불교가 큰 할 일을 하였다. 이것들이 다 썩은 뒤에는 새로운 것이 와야 하는 조건들이 형성된 때였다. 이 때 기독교는 왔다. 모두가 다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찾게 하려는 것이란다. 거기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아시아인이나 아프리카인이 따로 있지 않고, 종이나 주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늙은이나 젊은이가 따로 있지 않고, 지배자나 피지배자가 따로 있지 않다. 모두가 그 앞에서는 평등하며 오로지 하나가 되어 그를 찾음이 인생의 최종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가진 종교가 이 땅에 들어온 것은 몇 가지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었다. 1) 계급주의를 깨뜨리는 일이요, 2) 사대사상을 쓸어버리는 일이요, 3) 숙명론의 미신을 씻어버리는 일이었다. 위의 책, 369
이것을 이루기 위하여는 천지에 오직 섬길 이는 영이신 하나님 하나밖에 없다는 것, 모든 인류는 다 형제라는 것, 삶의 기본 원리는 사랑이라는 것, 그리고 진리에 대한 절대순종의 믿음을 주장하는 엄격한 도덕적 종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이 사명을 띄고 이 땅에 왔다는 것이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는 다 인생을 건지자는 것이지, 압박하고 짜먹는데 협력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모든 종교들이 그렇게 됐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그 자체 내에 계급주의, 사대주의, 미신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혁명을 이루지 못하는 종교가 되고 말았다. 순교자를 그렇게 많이 내면서도 사회혁명을 하지 못한 것은 바로 이 땅에 온 기독교가 깔끔하고 깨끗하게 들어오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위의 책, 370
그것은 서양에서 실패한, 썩은 제도를 그대로 가지고 왔을 뿐, 그리스도의 복음을 살리지 못한 데서 연유한다. 미신이 흥행한 것은 그 당시 사회가 흉흉하여 살고자 하는 발버둥이었다. 그것을 받아 새로 들어온 기독교는 과학적 탐구를 통한 개혁운동을 주도할 민중교육을 실시하였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때, 구교보다 100여년 늦게 들어온 개신교의 활동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흐름을 타고 들어온 개신교의 활동은 초기의 가톨릭처럼 매우 희망스런 출발을 하였다. 독립사상, 새교육의 흐름과 과학정신이 가득한 것은 새로운 기운을 넣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개신교가 했어야 할 근본혁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그것을 이끌고 나갈 사회적 중산층이 없었기 때문이다. 워낙 강력한 착취 때문에 피폐한 민중 뿐 중산계급이 형성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일제 때 그 역할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으나 기독교의 생생한 정신이 제대로 펴졌다면, 다른 시들어가는 종교들의 정신도 다시 살아나도록 됐어야 한다. 한 종교의 살아남은 다른 종교가 동시에 새롭게 살아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정신으로 나갈 때 사회는 평화가 오며 혁명은 가능하여 진다. 특히 우리 사회는 다원종교사회다. 역사를 관통하여 볼 때나 사회를 횡으로 볼 때 다양한 종교들이 고루 분포해 있다. 여기에서 원수는 없다는 것을 선언해야 한다. 한 종교의 건전한 발전은 다른 종교의 건전한 발전을 이끌어 온다. 반대로 한 종교의 타락은 다른 종교의 타락을 함께 불러 올 수도 있다. 모든 것은 그물처럼 얽혀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의 평화생활의 요체는 이러한 것이리라. 신약성경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 12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중심으로부터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는 척 하지 마십시오. 악은 필사적으로 피하십시오. 선은 필사적으로 붙드십시오. 깊이 사랑하는 좋은 친구들이 되십시오. 기꺼이 서로를 위한 조연이 되어 주십시오.(9-10) 지쳐 나가떨어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늘 힘과 열정이 가득한 사람이 되십시오. 언제든 기쁘게 주님을 섬길 준비를 갖춘 종이 되십시오. 힘든 시기에도 주저앉지 마십시오. 그럴수록 더욱 열심히 기도하십시오. 도움이 필요한 그리스도인들을 도우십시오. 정성껏 환대하십시오.(11-13) 원수에게도 축복해 주십시오. 결코 악담을 퍼붓거나 하지 마십시오. 친구들이 행복해 할 때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그들이 슬퍼할 때 함께 울어 주십시오. 서로 잘 지내십시오. 혼자 잘난 척 하지 마십시오. 별 볼 일 없는 이들과도 친구가 되십시오. 대단한 사람인 양 굴지 마십시오.(14-16) 되받아치려고 하지 마십시오. 대신 누구에게서나 아름다운 점을 찾으십시오. 할 수 있다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사이좋게 지내십시오. 받은 대로 갚아 주겠다고 고집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이 할 일이 아닙니다. ‘내가 상관할 것이다.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다’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17-19) 우리의 성경은 원수가 굶주리고 있는 것을 보면 가서 점심을 사 주고 그가 목말라하면 음료수를 대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런 관대함을 베풀면 원수는 소스라치게 놀랄 것입니다. 악이 여러분을 이기도록 놔두지 마십시오. 오히려 선을 행함으로써 악을 이겨 내십시오.(20-21)” 신약성경, 로마서 12장(유진 페터슨: 메시지, 신약), 복 있는 사람 2010
얼마나 놀라운 소리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의 말씀,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을 실천하는 실행방법이다. 진리를 위하여 죽은, 초기의 순교자들은 모두가 다 타협을 몰랐고, 방편을 쓰지 않았으며, 소박하였고, 목숨을 내걸었고, 직접적이요, 저돌적이었다. 그것이 우리 크리스천의 전범이다. 그런데 지나치게 지금은 국가주의, 자본주의, 정치주의와 타협하여 산다.
일반 시민으로서; 허(虛) 정(靜) 유(柔) 겸(謙)의 수련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하여 일단 ‘나’를 정립해야 한다. 나는 공(公)과 연결되고, 하나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공은 국가, 민족, 종교, 단체, 가문 따위를 뛰어 넘는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한 때 우리 인류 역사에서 공은 바로 위에 든 것들이라고 여기게 되었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공으로 가는 길목에서 잠간 돌보아 주는 역할을 하였던 것들이다. 지금은 그것을 지나야 하는 때가 되었다. 여기에서 바로 허상을 넘는, 진리와 합일되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를 나 되게 하는 데 방해 되는 모든 것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나’는 어떤 사람이든 그 속에 그리스도, 하느님, 부처, 인(仁)의 씨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우리는 내면의 빛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이것은 적절한 상황만 되면 언제나 움이 트고 잎이 나고 줄기가 생기고 가지를 뻗치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것은 언제나 무서운 고난 속에서 피어난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모든 좋고 나쁜 환경을 겪어 가면서 때를 기다려서 솟아난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씨는 많고 무성해서가 아니라, 한 알이라도 제대로 여물고 썩으면 된다. ‘나는 한 알의 씨다’ 라는 생각을 가지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것을 선언하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요 위로다. 나는 한 알의 씨알이다. 즉 하느님, 그리스도, 부처, 인, 내면의 빛을 가지고 있는 영근 씨알이라는 것을 확고하게 믿는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든 그 속에 그리스도,
하느님, 부처, 인(仁)의 씨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우리는 내면의 빛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함석헌과 김교신 등이 일제 강점기의 갖은 압제에서 온갖 박해를 겪으면서 만들어 낸 《성서조선》이란 잡지는 독자가 많을 때 200명 정도를 넘지 못하였으며, 그들이 매년 연말과 연시에 가졌던 수련집회에는 20명 이내가 참석하였다. 그런데 그들에게 뿌려진 씨와 그들이 뿌린 씨는 매우 고귀하고 강력하였다. 한 사람에게 뿌려진 씨는 모든 사람에게 함께 뿌려지는 보편적 씨요, 한 곳에 피어나는 씨는 전체를 뒤덮는 상징이다. 관저동에 개나리가 피면 다른 강산에도 핀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요, 목포에서 움트는 싹이라면 여기에서도 조건이 맞으면 틔어난다는 것을 예시하는 것이다.
다시 반복하여 말하는 것이지만, 동양에서 인(仁)으로 표시하는 씨, 기독교에서 이미지 또는 형상으로 표시하는 하느님의 상은 모든 사람에게 있다. 아니, 내 속에 있다. 이 씨는 알이다. 로 함석헌은 표시하는데, 그것은 바로 전체와 개체, 극대와 극소, 영원과 순간, 하늘과 인간을 통합하는 개념이다. 그것은 각각 독립된 개체이면서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다. 이것이 평화의 근원이다. 아름다움의 근원이다. 이 씨를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 있는 한 우리는 평화할 수밖에 없다.
생명평화운동에서 전개하고 있는 ‘우리가 평화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평화가 되자’라는 것은 좀 더 적극성을 띈 것으로 진전되어야 한다. 나는 이미 평화의 씨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을 누리는 것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평화는 원하고 원하지 않고 할 선택사항이 아니라, 명령으로 받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평화 한다고 선언하는 것만이 남아 있다. 다른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하느냐에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내가 평화하면 된다. 이미 나는 평화에 들어섰다고 선언하고 믿는 것이 중요하다. 독립은 선언하므로 시작이 되고, 자유와 평화 역시 선언하므로 되는 것이다. ‘네 병이 고쳐졌느니라’ 선언할 때 이미 병은 사라지는 것이다.
정의롭고 아름다운 세상은 바로 평화로운 세상이다. 단일한, 획일화한 세상이 아니라, 백화가 만발하듯이 서로 다른 독특한 것들이 건전하게 조화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음악이 될 때는 각각 자기 소리를 내되 다른 것에 맞출 때 이루어진다. 불협화음도 아름다운 음악이 되는 것은 바로 전체 음악에 따르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그가 만들고 인정한 모든 것 속에 그의 속성이 함께 들어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믿고 따른다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따르고 그렇지 않은 것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만큼 통이 클 필요가 있단 말이다.
나와 전체; 그렇다면 어떻게 하자는 것일까? 우리는 몇 가지를 일상생활에서 실현하여 볼 필요가 있다. 평화는 거저 오는 것이 아니라, 만들고 찾아야 하는 것이다. 누가 할까? 내가 평화롭게 살아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우선 ‘천하에 남이란 없다’는 묵자의 말을 깊이 새길 필요가 있다. 그래서 폭력과 평화에 대한 공부와 생각을 하되, 혼자서도 하여야 하는 것이지만, 몇 명 씩 짝을 지어 끊임없이 해보는 것이다. 수도원이나 수녀원 같은 함께 살아가는 것을 실험할 필요도 있다. 간디는 그것을 아쉬람에서 실험하여 보았고, 함석헌 역시 실패하긴 하였으나 몇 번 시도하여 보았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적대적이라고 하는 것을 서로 방문하여 보는 것도 좋겠다. 우선 가톨릭과 개신교가 서로 짝을 지어 방문하여 보고, 기독교가 연합하여 불교나 원불교나 이슬람을 방문하고, 함께 예배, 미사, 예불을 드려보는 것이 좋겠다. 다른 종교를 적대시하고 자기들 것만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대한 배반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평화의 노래를 자주 부르고, 평화의 기도를 부르며, 한 두 가지의 평화운동이나 평화로운 삶에 구체적으로 우리 자신을 던져보는 것이 좋겠다. 이제는 좌우익의 갈등이나, 진보나 보수의 대립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아우르거나 뛰어넘는 하나로 살아가는 실제 생활을 실험하여 볼 때다. 사실 우리 속에는 모든 것을 통합하는 진리를 가지고 있다. 다만 제도와 틀이 그것을 가리고 방해할 뿐이다. 성숙된 인간이라면 바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운동을 벌일 때 우리 사회에 평화로운 기운은 싹이 트고 만발할 것이라고 믿는다. 사실 오늘 가톨릭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퀘이커를 따르는 저를 이곳에 초청하여 이야기를 서로 나누고자 하는 것 자체가 벌써 통합의 평화운동으로 가는 한 발걸음이라고 생각한다. 남이야 어떠하든 나는 평화 한다는 것, 사회야 어떠하든 나는 평화 한다는 것을 선언하고 나갈 때 이미 평화의 세계는 뿌려지고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고 나무가 되며 가지가 돋고, 잎이 피고 꽃이 피며 열매를 맺어 다시 땅에 떨어져 그 평화의 행진을 계속하여 진행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 맘과 발걸음 자체가 이미 복일 것이다. 세상은 언젠가는 평화의 세계가 되고야 말 것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요 예수가 이 땅에 온 뜻일 것임을 믿는다. 그러나 지금 평화롭다는 안일한 생각에 위기의식이 없을 때 이미 평화세계는 깨져버리는 것이 될 것이다.
(2010. 11. 15. 관저동성당에서)
[20101115. 사진] 김조년 교수의 함석헌의 평화주의의 우리의 평화운동
출처: https://www.djpeace.or.kr/177 [천주교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2021/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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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바보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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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정신
정신에서 정신으로
3.1운동을 그 밖에 나타난 결과로 하면 한 개 실패한 운동이다. 만세만 부르면, 그리하여 우리가 일본 정치 아래 있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뜻을 세계 여러 나라 앞에 표시만 하면 독립이 곧 되는 줄로 믿었는데 그대로 되지 않았으니 그 점에서 본다면 실패다. 그러나 독립만세 부르다가 독립은 되지 않고 많은 희생자를 내고 여러 사람이 감옥살이를 하고, 한때 산천을 뒤흔들던 만세도 총칼 밑에 바람 자듯 자버리고 말았는데, 아무도 그것을 실패라 생각하고 그 한 일을 후회하고 풀이 죽어버린 사람을 하나도 없었다.
이 사실은, 이 독립운동이 실패에 돌아갔는데도 민중이 한 사람도 풀이 죽지 않았다는 이 사실은, 우리가 역사를 말하는 데 있어서 크게 주의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다.
언제나 일의 결과는 육신의 사람에게 그때그때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고 마는 데 그치는 것이요, 그 일이 드러내는 정신은 사람의 정신 속에 길이길이 살아 작용하여 산 역사를 이루어가는 법이다.
3.1운동은 민중의 가슴 속에 정신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것이 물결처럼 휩쓸고 지나간 뒤에도 사회에 낙심,낙망의 기분이 돌지 않고 도리어 머리를 들고 올라가려는 여러 가지 운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러한 정신을 일으킨 것은 그 자체가 또 산 정신에서 나온 증거다.
정신은 정신에서만 나온다.
정신은 정신을 일으키고야 만다.
우주, 인생을 꿰뚫는 정신
그럼 무슨 정신인가? 무슨 정신이라는 것이 없다. 정신은 그저 하나 산 정신이 있을 뿐이다. 세상에서 흔히 3.1정신이라고 떠드는 소리를 듣지만 3.1정신이란 것이 따로 있는 것 아니다. 있다면 우주 인생을 꿰뚫는 정신이 있을 뿐이지. 해를 낳고, 달을 낳고, 천체를 낳고, 꽃을 웃게 하고, 새를 울게 하며, 사람으로 사람이 되게 하는 그 정신이 3.1운동을 일으켰지, 그밖에 또 무슨 조작이 있을 수 없다.
무슨 특별한 것이 있는 것처럼 민중 앞에서 어렵게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은 민중이 이미 저도 모르게 가지고 있는 이 정신을 빼앗아 다시 팔아먹으면서 사사로이 이익을 얻으려는 협잡꾼의 하는 소리다.
알고 모르고가 문제 아니다. 가졌나 못 가졌나가 문제다. 그리고 아는 자가 반드시 가지는 것이 아니요, 가진 자가 반드시 아는 것이 아니다.
대개의 경우에 참으로 가진 자는 도리어 가진 줄 알지도 못하는 법이요, 입으로 공교히 설명을 하는 자는 사실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다. 아노란 말은 모르노란 말이요, 했다는 소리는 아니했다는 소리다. 31정신은 스스로 가진 줄 알지도 못하는 민중의 것이다.
3.1절만 되면 보기 싫은 것은 서로 3.1정신 팔아먹으려 드는 꼴이다. 이 큰 정신의 꿈틀거림이 어느 단체나 몇몇 개인이 꾸며낸 일이나 되는 것처럼 서로 제가 먼저 했다는 거요, 제가 잘 안다는 것이다. 민중이 입이 없다고 업신여기는 이들 협잡꾼을 쓸어버리라 해라! 3.1운동은 어디까지나 민중의 산 정신이 드러난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할 것이 이 운동은 돌발적이라는 것이다. 갑자기 터져 나온 것이란 말이다. 전부터 무슨 사상단체나 조직체가 있어서 이 운동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요, 이 운동 후에 또 무슨 일정한 체계의 사상이나 단체가 깉어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운동은 백두산이 그런 것처럼, 한라산이 그런 것처럼, 갑자기 혼자서 터져나와 천하를 진동시킨 것이다.
3.1운동의 주인이 될 인물도 단체도 없고, 그 지도 원리와 방법이 되는 사상도 조직도 없다. 이것은 누가 가지고 주인이 되기에는, 누가 그 공로자가 되기에는 너무도 큰 운동이다. 너무도 평범한, 너무도 광범한 정신의 나타남이다. 마치 바람에 주인 없고, 비에 시킨 이 없는 것같이.
주인은 민중
다시 말하면, 꾸며낸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일어난 생명의 일이요, 진리의 움직임이라는 말이다. 돌발적으로 터져 나왔다는 것은 사실은 그 힘이 언제나 어디나 준비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러지 않고는 돌발할 수가 없다. 화산이 갑자기 터지는 것은 지구 속에 불이 본래 늘 있기 때문이다. 화산을 누가 만들어서 되는 것이라면 그 터질 것을 모를 리 없다. 그러면 화산이 아니다. 3.1운동은 민중의 가슴 속에 본래 언제나 있는 정신이 기회를 타 터져 한때 화산처럼 불길을 뿜은 것이다. 화산의 주인이 지구라면 3.1운동의 주인은 민중이다. 화산의 불이 우주 자연의 불이라면 3.1운동의 정신은 우주 본연의 정신이다.
우리도 동경에서 누가 왔다든지, 상해에 누가 연락을 했다든지, 서울에 누구누구가 모였다든지, 33인이 어쨌다든지, 그것을 모르는 것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느 기회에 그 심부름은 했는지 모르나, 그 정신에 이르러는 아무도 터럭끝 만큼도 이러구저러구 할 것이 못된다. 태극기를 만들고 선언서를 찍어 사람들의 가슴에 안겨줄 때 누구라고 알고, 누구를 골라서 주었던가? 그전에 무슨 조직, 기관이 하나인들 있었던가? 실로 아무것도 없었다. 없었는데 그저 다만 민중을 하나로 보고, 전적으로 믿고 한 것뿐이다. 그들이 민중의 가슴을 들치는 부지깽이는 됐는지 모르느니라. 그러나 불은 민중 그들 자체의 가슴 속에 본래 언제부터 붙고 있던 것이요, 또 언제까지도 붙을 것이었느니라.
갑자기 터진 화산
독립운동을 하다가 잡혀 들어갔을 때 안도산, 최린, 여운형의 세 분을 놓고 일본 법관이 묻기를, 나가면 또 다시 독립운동을 할 것이냐? 한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묻는 속뜻이 독립운동을 계속한다면 죄를 더하여 주고 다시 아니한다면 용서해주마 하자는 심산에서 나온 것임을 누구나 쉬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자연 대답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최린이 먼저 일어나 재주 있는 대답을 했다는 것이요, 여운형은 놀랄만한 웅변을 토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산은 그와는 달리 자기 차례가 오자, 허허 하고 웃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하는 말이 “아, 이날껏 내가 선동해서 독립운동 된 줄 아느냐? 우리 민족이 한 것이지, 내가 하라 해서 하고 하지 말라 해서 하지 않을 것이냐?” 하는 의미의 대답을 했다는 것이다. 거기가 다른 사람의 따르지 못하는 도산의 도산 된 점이 있는 곳이다. 그것이 어찌 재주로 될 일일까? 참이 아니고는 못 나오는 말이다. 무슨 말을 하여서 이리도 저리도 걸리지 않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은 벌서 참은 부족한 재주의 사람이요, 참은 생각할 것 없이 있는 대로를 뱉아도 대적의 흉계가 한마디에 부서지고 그 혼담이 서늘한 법이다. 도산은 그 자신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도자, 선동자의 심리를 품고 한 것이 아니요, 자신이 민중의 한사람으로 제 할 것을 한다는 정신으로 했기 때문에, 한마디로, 참 정성으로 했기 때문에, 자연 그런 대답이 나온 것이다. 그것은 도산의 대답이 아니라, 민족의 대답이요, 참 자체의 대답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참 애국자, 참 정치가일 수 있었다.
그렇다, 살아도 민중 자체가 사는 것이요, 죽어도 민중 자체가 죽는 것이다. 살려는 민중을 누가 능히 줄일 수도 없고 망하려 드는 민중을 누가 능히 억지로 살릴 수도 없다. 3.1운동은 민중이 우리도 살아야겠다, 살았다 하는 한 외침이었다. 내가 아니면 이 나라를 어떻게 하나, 우리가 아니면 이 민족을 어떻게 하나 하고, 크게 걱정이나 하는 척하는 그런 따위의 협잡꾼을 물리쳐라!
국제적인 협동 협화정신
3.1정신은 곧 민족정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옳은 말이다. 물론 민족의 정신이다. 민족의 독립을 부르짖었으니 민족정신 아닌가?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설명이다. 이제는 그것만으로 역사를 설명하려던, 그리하여 그것만으로 역사가 나가는 힘을 삼으려던 시대는 지나갔다. 민족정신이 3.1운동 전엔 없었던가? 물론 있었다. 있었으면 왜 힘을 못 쓰고 이제 와서야 일어났나? 이때에 와서 고종이 돌아간 것으로 민족감정이 올라갔기 때문이라고 혹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운동의 날로 3월 1일을 택한 데는 그 이유가 많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결정적인 요소는 못된다. 그렇게 큰 운동이 손에 무기 하나 없이 순전히 비폭력의 평화운동으로 일어나게 되는 결정적인 동기는 그보다 다른데서 찾아야 한다. 그것은 그때 파리에서 열린 국제연맹에 호소하자는 데 있었다. 윌슨 대통령이 말한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의하여 세계 여론에 호소하면 되리라는 것이 그 신념이었다. 이 신념이 아니라면, 고종 같은 이가 열 스물이 돌아갔다 하여도, 민족감정이 아무리 올라갔다 하여도 맨주먹으로 감히 독립만세는 부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거기는 민족정신 외에 다른 무엇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민족주의보다는 차라리 그와는 반대된다고도 할 수 있는, 국제적인 협동, 협화를 믿는 정신이다. 세계의 모든 나라가 우리를 도와주려니 믿는 정신이다.
그리고 이것은 반드시 파리에 모인 몇몇 정치가의 호의를 상대로 한다기보다는, 암암리에, 그 정치가들을 보내놓고 있는 여러 나라의 민중을 믿은 것이다. 이러므로 이것은 민중에게서 민중에게로 건너가는 세계적인 외침이었다. 그러나 각 나라의 제국주의 정치가들은 민중을 속여 이 운동은 실패하고 말았다.
인간성에 대한 믿음
그러나 한층 더 깊이 들어가 생각하면, 나라와 나라 사이에 협화를 믿고, 민족과 민족 사이에 동정을 믿는 것은 그 밑에는 그보다 먼저 미리 생각하는 무엇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인간성의 공통이라는 사실이다.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이지, 그들도 양심 가진 사람이겠지, 믿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나라 사이에 서로 도움을 믿는다. 모순인 듯하지만, 우리가 맨주먹으로 만세를 부를 때는, 국제연맹에 호소하기 전, 누구에게보다도 더 우리 대적이라는 일본 사람에게 그것을 믿는 것이다. 2천만이 돌같이 단결한다 하더라도 일본군이 만일 하려면 한칼로 어려움 없이 무찔러버릴 수 있다 하는 것쯤은 누구나 쉬이 알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일어섰던 것은 저들이 감히 칼을 못 쓸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왜 칼을 두고도 못 쓰나? 세계의 눈이 무서워서라고 하고 싶은 점도 있으나, 그보다는 역시 그들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눈을 두려워하는 것은 이해관계보다도 인간적인 양심 때문이다. 우리가 폭력 없이 데모를 하고 그들도, 수원, 강서 사건 같은 것이 한둘 없지 않으나, 대체로 그 이상 희생을 내지 않고 만 것은 역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화적으로 반항운동을 한 것은 순전히 미운 마음 없이 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들을 인간적으로 퍽 대접하고 믿어준 셈이다.
이제 우리는 이 점을 강조해야 한다. 서로 저쪽의 잘못을 과장 선전하며 감정을 일으켜 싸워 이기려던 것은 옛날이야기고, 이 앞의 역사는, 그보다도, 서로 싸우기는 하면서도, 서로서로 사이에 숨어있는, 일을 극단의 참혹한 지경에는 이르지 못하게 하는, 서로 믿고 돕는 그런 정신, 그런 힘을 너와 나 사이에 찾아내어 기르는 것이 우리를 위하여서도 세계를 위하여서도 필요한 일이다.
우리가 3.1운동으로 인하여 얻은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정체를 드러낸 것도 있기는 하지마는, 그보다도 더 뜻있는 것은 일본사람의 인간성을 알게 된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일어났다. 그들을 사자나 이리로 알고 반항한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믿었기 때문에, 우리의 편이 그들의 가슴 속에도 있을 것을 믿었기 때문에, 반항한 것이었다. 사실 나 자신 그 운동에 참여하여 본 것이지만, 그 당시에 일본사람 미운 생각 실로 없었다. 다만 우리도 살았구나 하는 기쁨에 가슴이 들먹일 뿐이었다.
그러나 인간성을 그저 믿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 저희도 사람이지 하고 믿을 때는, 그보다 먼저 그 인간성을 다스리고 있는 도덕의 법칙을 믿어야 한다. 사람을 믿음은 결국 하나님을 믿음이다. 사람은 정의의 법칙에 복종하고야 말 것, 곧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대적을 이기는 것은 내가 아니고 그 대적 속에도 있는 정의 그 자체다. 도덕률 그 자체는 하나님 자신이다.
그러고 보면 3.1운동을 일으킨 것은 인간 역사를 꿰뚫고 있는 윤리정신 그 자체다. 맹자의 ‘호연지기(浩然之氣)’, 문천상(文天祥)의 말로 하면 ‘천지정기(天地正氣)’다. 성신이라 해도 좋고, 불성이라 해도 좋고, 자연이라 해도 좋다. 이름이야 뭐라 불렀거나, 하여간 생명의 맨 처음이며 끄트머리요, 역사의 고갱이면서 또 그 살인 그것이다. 물이 잘 흐르면 시내며 강이요, 막혔다 터지면 여울이요 폭포이듯이, 이 정신도 순하게 나가면 인생이며 문화요, 비상하게 나타나면 싸움이요 혁명이다.
밭 갈고 물 길으며, 자녀를 낳고 이웃을 이루며, 처마 밑에는 제비가 새끼를 기르게 두고 뜰 앞에는 화초가 꽃을 피우도록 가꾸는 인간의 가슴 안에는 3.1운동 같은 운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언제나 늘 준비되어 있다. 다만 그 민중을 꾀어 속이지만 말라!
비로소 대접 받은 민중
그럼 그렇게 늘 있는 정신이 하필 3.1운동 때에 나타난 것은 웬일인가? 대답은 간단하다. 그때 가서야 민중이 비로소 사람으로 대접을 받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역사의 주인이 민중인 것을 분명히 알지만 정치가들이 이것을 깨닫기에는 퍽 힘이 들었다. 원시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정치라면 일부 적은 수의 사람이 특권을 가지고 강제로 하는 것처럼 알아왔다. 다스린다는 말부터 그것 아닌가?
이제 다스리는 정치는 고물이다. 이때까지 정치는 일부 사람이 강제로 하는 것이므로 거기 무슨 잘못이 있어 그것을 바로잡으려 할 때 부득이 음모, 암살, 선동 이런 식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결국 일을 결정하는 힘이 민중에 있는 이상 아무 때에 가서도 민중을 얻지 않고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우리나라에도 혁명이 여러 번 없었던 것은 아니나, 모두 실패하였다. 그 원인은 한결같이 그 일을 민중에게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갑신정변도 그렇고, 갑오경장도 그렇다. 그런데 3.1운동 때엔 처음부터 민중에 호소했다. 이점이 아주 주의할 만한 점이다. 민중을 믿었고 민중에 매달렸다. 그러므로 됐다. 민중은 언제나 자기를 부르는데 응하지 않는 법 없다. 그리고 민중이 일어설 때 막을 놈이 없다. 칼은 다하는 날이 있어도 민중은 다하는 날이 없다. 물론 언제나 일을 시작하는 것은 지식층이지만 그 지식층이 민중 앞에 겸손하지 않고는 일은 되지 않는다. 아무리 해방운동이라 하더라도 권력층이 민중을 이용하려는 심리를 벗어나지 못해가지고는 일은 될 수 없다.
민중을 주인으로 모셔야 한다. 3.1운동엔 구한국 시대의 벼슬아치가 주인도 아니요, 지식층의 학생이 주인도 아니요, 자본가가 주인도 아니요, 순전히 전체 민중이 주인이었다. 아무 음모도 없이, 아무 미리한 조직도 없이, 민중을 무조건 믿고 나서서, 하나가 “만세!” 할 때에 2천만이 한 목소리로 “만세!” 했다. 그때 바로 말없는 민중을 임금으로 모신 것이었다.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3⦁1운동에서 시작되었다. 그렇게 본다면 오늘날 문제는 없는 것 아닌데, 아무 힘 있는 운동이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 원인이 어디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일본에게 나라가 망한 후 민족은 셋으로 갈라졌었다. 그전에 지사라던 사람은 외국으로 도망하고, 깉어있던 지식층은 대개 일본에 붙어먹고, 그리고 남은 민중, 무식하고 가난한 민중은 입을 닫고 소처럼 있었다. 지사들의 생각은 꼭같이 무력혁명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의 애국심은 뜨거우나 그 정치사상은 낡은 것이었다. 나라의 주인인 민중을 무식한 것이라고 업신여기고, 일은 언제나 자기네가 할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3.1운동에는 그 지사나 지식층의 청년이 민중 앞에 겸손히 믿음의 손을 내밀고, 주인으로 모셨다. “우리를 따르라” 하지 않고 “당신들이 해야 됩니다.”했다. 평민은 의리 는 것이요 감격하는 것이다. 자기를 믿어주면 죽을 데라도 들어가는 것이 민중이다. 3.1운동은 이 감격으로 하나 된 민중의 힘으로 되었다. 이때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사들의 낡은 꿈은 깨지고, 일본 군대의 강하기는 세계가 놀라는 것이었다. 길은 자연 어쩔 수 없이 민중의 가슴에 깃들어 있는 우주 본연의 진리에 호소하는 길밖에 없었다. 유일의 길이 참 길이다. 민중의 의기가 그렇듯 나타난즉 이때껏 대적에게 붙어먹던 층도 감격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민족통일은 이루어졌다. 민중을 제자리에 모시면 그들은 언제나 자기 할 일을 한다.
이 정신으로 남북통일
지금 우리에게 부닥친 것은 남북통일 문제다. 이것을 해결하는 데는 오직 한 길이 있을 뿐이다. 3.1운동에서 우리 민중의 양심을 동원하여 일본의 양심, 인류의 양심을 때렸고, 그러므로 그 힘을 막을 수 없었듯이, 오늘도 공산당을 이기는 것은 그 양심을 때리는 데 있다. 3.1운동은 실패 아니냐 하는가? 그런 소리 마라. 바다로 가는 냇물이 깊은 발 앞만 보고는 모른다. 3.1운동 아니었더라면 8.15는 없다.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대적을 도덕적 인간으로 믿고 그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이 가장 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도둑의 사회도 성립이 되지 않고, 정의의 법칙을 지키지 않고는 무기조차도 만들 수 없다. 근본 되는 것은 이 우주의 윤리적 질서를 굳게 믿음이다. 人者無敵於天下(인자무적어천하)라, 어진(큰)이는 천하에 맞설 놈이 없다 하거니와, 어짊은 곧 민중의 마음이다. 그것이 큰 것이요 그것이 인(仁)이다. 민중은 언제나 믿는 것이요, 그러므로 평화요, 그러므로 살았다.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것은 민중의 가슴이 흐려 올바른 판단을 잃고 그 본연의 힘을 잃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치업자들이 민중을 그대로 두지 않고 간사하고 음험하고 잔혹한 수단으로 강제하는 때에 그렇게 된다. 3.1운동이란 다른 것이 아니고 그러한 정치로 인하여 가슴 속에 눌려 있던 정신이 한때 화산처럼 내뿜은 것이다.
걱정은 소련에 있는 것도 중공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이해심으로 인한 민족의 분열에 있다. 정치적 갈라짐이 사회적 분열로까지 되어가는 데 있다.
3.1정신이 정말 있다면 38선이 걱정이겠느냐? 칼로 물을 쳐도 물은 또 합한다. 물같이 맑고 부드러우므로 하나 되는 정신 잃어버린 것이 걱정이지 칼이 걱정이냐? 그리고 이 하늘이 준 정신을 민중에게서 빼앗는 자가 누구냐? 정치업자 아니냐? 몇 해 전에 홀딱 벗겨진 우리나라 산림을 구원하기 위하여 영국의 노련한 임업 전문가를 데려다 물은 일이 있었는데, 그가 우리 산천을 다 돌아보고 가면서 마지막에 하는 말이 “건드리지 말고 두어라!” 했다고 한다. 그것을 또 정치에도 옮겨서 쓸 천고의 명언이다. 제발 민중을 건드리지 말라. 그리고 믿어라! 그들의 가슴 속에 언제나 제 일은 제가 하는 정신이 살아 있다. 1959.3.1
조선일보 1959년 3월 1일
저작집30; 5-15
전집20; 17-85
인간혁명 (1961 일우사)에 재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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