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5

박정미 로저 스크루턴, [우리를 속인 세기의 철학자들>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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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미

동물농장 밖의 스퀼러들
-로저 스크루턴, <우리를 속인 세기의 철학자들>을 읽고


‘에드먼드 버크 이후로 가장 뛰어난 영국 보수주의자’라는 저자의 타이틀에 혹하여 책을 펼쳤는데, 과연 탁월했다.
서양철학의 계보를 꿰뜷고 칸트-헤겔 그 다음 마르크스에 이르러 한번 뒤집어져 비로소 시작되는 좌파철학의 핵심을 유려하게 설명해내고 있었다.
거기에 자국인 영국뿐만 아니라 프랑스, 미국 등 나라마다 특유한 정치-사회-문화적 맥락을 고려하여 사상을 압축, 포착해내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하지만 저자의 뛰어난 지적역량에 못미친 나는 끝끝내 프랑스와 독일 좌파철학자들의 내적논리에 근접할 수 없었다. 하버마스, 알튀세르, 라캉, 들뢰즈, 바디우와 지젝은 어찌나 난삽하던지 인용문만 보면 멀미가 날 정도였다.
호기심과 존경심을 가지고 읽었던 처음과는 달리 두번째 읽었을 때는(라캉은 아예 건너 뛰었고) 넌더리가 났다. 특히 싸르트르와 바디우는 역겨운 감정이 들 정도로 거짓되어 보였다.
젊은시절 순진한 우리 대학생 머리 위에 거대한 권위를 가지고 군림한 거물사상가들이 단체로 두들겨 맞는 것을 구경하는 재미가 그나마 쏠쏠했지만.
 
사적유물론은 역사적으로 파산했다. 하지만 자신을 마르크시스트라고 규정한 신좌파철학자들은 말을 달리하여 지금까지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위세를 부리고 있다.

“1989년의 사건이 일어나고 얼마동안은 공산주의 기획이 무너진 것 같았고 2차세계대전 이후 동유럽의 사람들을 노예로 만든 사상을 이제는 단호하게 배척할 수 밖에 없는 증거들이 속출했다.
하지만 합리적 논증이 다시 싹틀 즈음 넌센스 기계가 굴러들어와 싹을 다 베어버렸다. 모든 것을 불확실성의 안개로 덮어버렸고 진정한 혁명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는 신념을 복구시켰다.
이 혁명은 사유의 혁명, 내적인 해방인데, 이 앞에서 어떤 합리적 논증도 살아남을 수 없다. 넌센스의 지배 아래 혁명에 대한 의심은 모두 합리적 탐구가능성과는 거리가 먼 저 깊은 곳에 묻혔고, 그런 의심은 더 이상 직접적으로 다룰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여기서 스크루턴이 '넌센스'라고 표현한 것은 조지오웰이 <동물농장>에서 지적한 바 있는 좌파의 '신어'를 말한다.
동물농장에서 동물들이 엉겹결에 반란에 성공한 직후 농장 담벼락에는 선명한 일곱계명이 새겨지게 된다.
 
"무엇이든 두 발로 걷는 것은 적이다."의 제1계명부터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의 제7계명까지 그것은 단순하고 분명했다.
하지만 일곱 계명은 지배자 돼지 나폴레옹의 독재를 통해 하나 둘 무력화되어간다. 단 하나 남은 계명마저도 다른 계명들처럼 단서를 추가함으로써 본래의 취지를 잃고 말았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
이것은 이미 평등 자체를 부정하는 평등으로서 무의미한 언설이다. 신좌파는 이러한 신어의 남발로 합리적논증을 피해 혁명의 환상을 존속하게 하는데 지적역량을 쏟아부었다.
이미 혁명의 대의를 배반한 혁명은 혁명이 아니다. 과학적 입증을 실패하고 현실에서 죽은 마르크시즘을 '신어'로 치장하여 살아있다고 떠들고 숭배하고 다니는 것이 뉴레프트라는 것이다.

동물농장에서 '스퀼러'라는 돼지가 요설로 혁명을 배신했듯이 동물농장 바깥에서 스탈린, 마오독재에 부역해온 것이 신좌파사상가이다.
 
말, 신어, 새롭게 규정된 말로써 현실을 재창조하려 하는 그들의 심리적 배경에 "평범한 것과 실제적인 것에 대한 경멸이 발견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신좌파의 사상가들은 정치 사회체계에 대한 비판을대체로 언어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시작한다. 권력과 지배를 최대의 정치적 현안으로 상정하고, 합의점을 모색하기 위해 인간관계가 조정되는 현상을 광범위하게 비판한다. 좌파적 신어는 그들의 강력한 도구가 된다. 우리사회를 비웃을뿐만 아니라 온화해 보이는 표면 아래 어떤 다른 현실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그 현실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그 표면은 기만적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어떤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지에는 무심하고 파괴적 혁명만을 옹호하는 정신이다. 대안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아니 대안을 유토피아로 상정해놓고 현실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정신이다.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를 이렇게 소개한다.

"나는 언제나 부정하는 정신이다. 유를 무로 만들며, 따라서 창조의 일을 무효로 만들어버리는 정신이다."

그들은 인류의 자랑스러운 정치적유산인 권력분립, 법치주의, 선거제도를 부정하고 그 대신 일당 독재체제를 만들어서 온갖 퇴행적 폭력을 일삼은 역사를 옹호했다.

1917년 혁명당시 레닌이 제일 먼저 공표한 지령은 전횡적인 위협과 체포로부터 유일하게 국민을 보호하는 사법부, 사법고시, 법조계를 철폐하는 것이었음은 특기할만 하다.

스크루턴은 국가의 성격이 사적소유를 중심으로 한 경제체제 측면이 아니라 제도 측면에서 결정된다는 입장이다. 만일 전자로 국가의 성격을 규정하면 자본주의와 파시즘은 한편에 서고, 후자의 지점에 착목하면 마르크시즘과 파시즘은 한 편에 선다.
 
좌파들은 법과 정치를 단순한 부현상으로 격하시키고 모든 국가들을 경제적 지배구조에 기반을 둔 ‘체계’로 봄으로써, 대의정치와 전체주의적 독재 사이의 극명한 차이를 말소해버린다.
그나저나 지금도 혁명이나 프롤레타리아독재를 믿는 사람은 없겠지? 그러나 혁명의 시대는 지나갔어도 이를 추구하던 좌파의 삶의 자세는 그대로 남아있다.

제도와 절차를 경시하고 투쟁만을 능사로 아는 사고방식, 자신들만이 약자의 편에 서있고, 정의롭고 도덕적이고 깨어있다는 우월의식이 그것이다. 그리고 우파는 타도해야할 적이지 협의와 지적협력의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도.
 
“일단 우익으로 분류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의견은 논점을 벗어난 것이 되고 그 인성은 훼손되며 세상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오류라고 여기는 것이다. 열띤 토론을 벌일 상대가 아닌 피해야 할 질병으로 간주한다. 이것이 나의 경험이자 내가 아는 모든 (동유럽)반체제 인사들의 경험이다. “

스크루턴은 냉전이 한창이던 1979~1989년에 동유럽에서 반체제 대학들의 지하학술네트워크 설립을 후원했다. 이 때문에 한 때 동유럽에서 억류당하고 추방되기도 했다.

지금도 자신이 좌파라는 데서 우월감을 느끼고 만천하에 인정투쟁을 벌이며 우파지식인을 상종못할 무뢰배로 경멸하는 자칭 좌파엘리트들이 우리세대에는 얼마나 많은가.

동물농장 밖의 유럽 스퀼러들을 따라 인간본성의 취약함을 오로지 부르즈와와 자본의 탓으로 돌리며 폼 잡는 지식인들도. 스탈린과 마오를 추종한 스퀼러의 전통을 오늘에 되살려 북한의 김씨일가를 신어로 옹호하는 사람들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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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미옥

음모론자, 피시주의자, 패션좌파, 그리고 개저씨, 남근이성중심주의(phallogocentrisme)의 해체주의자들이 떠오릅니다. 무엇이 밀이고 무엇이 가라지일까요? 확실치 않을 땐 분열하는 자, 부정하는 자, 파괴하는 자를 조심해야겠죠. 신(로고스)은, 가라지(넌센스)가 밀(센스)을 뒤덮은 이 시대의 밭을 언제까지 보고만 계실까요?

박정미

임미옥 그 난삽한 이론을 소개하고 비판하는 와중에 스크루턴의 신앙고백이 스쳐지나가듯 나옵니다. 저는 비록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인간영혼을 꿰뚫는 종교적심성, 영성을 표현한 그 글귀는 제 안에서 선명하게 반향하더군요.
현학적인 유물론철학자들이 복잡한요설로 덮고 묻어버리려 했지만 
결코 성공하지 못한 단순하고 맑은 소리였습니다.


임미옥

박정미 그 글귀, 그 단순하고 맑은 소리가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지네요.

박정미

임미옥 아! 제가 친 그물에 걸리셨군요.ㅋㅋㅋ
자아~ 이제 기나긴 문장을 옮겨드립니다.

"그래도 소비사회에 대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에는 일말의 진리가 있다.
이 진리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장식한 마르크스주의 이론들보다 훨씬 오래된 진리다.
히브리 성서 안에서부터 새겨져있는 진리로서 세기를 거쳐 지속적으로 재구성되었다.

즉, 우상에 절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본성(신성)을 저버리게 된다는 진리다.

토라(Torah)는 우리에게 인간실현의 이상을 제시해준다. 인간은 하느님의 규례의 제한을 받고 이 하느님은 어떤 우상숭배도 용인하지 않으며 우리의 절대적인 헌신을 바란다.

하느님에게로 향하면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모습, 즉 더 높은 세계에 속한 존재가 된다. 단순히 소망하는 바가 충족되는 것 이상의 실현을 경험하는 존재인 것이다.

반면,우상을 숭배하면 우리는 하등한 존재로 격하된다. 우리의 욕구가 곧 신이 되어 우리를 지배하게 되는 그런 노예의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