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머무름의 미학
이민재 목사 승인 2024.05.07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상승 욕구에 사로잡힐 때 삶의 시야는 좁아진다. 목표만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표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생의 바닥에 머무를 때 그동안 포착하지 못한 것들이 보인다. 무명의 들꽃 같은 이들의 정겨운 삶이, 때로는 상처 입은 미물들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상승과 하강이라는 공간의 변화가 그렇다면 시간의 변화도 못잖은 변화를 가져온다.
머무를 때 보았네
달려갈 때 못 본
그 꽃
속도는 풀이며 꽃이며 나무며 나비 같은 개별 생명을 전체로 뭉개버린다. 이러한 뭉갬 속에서 개별 생명은 풍경 속에 함몰된다. 물론 풍경도 나름의 의미는 있다. 풍경은 향유의 대상으로 나(관찰자)에게 만족을 준다. 하지만 개별 생명에게는 무의미하다. 개별 생명은 풍경을 구성하면서도 유령 취급을 받는다.
머무름은 사정을 바꾼다. 풍경에 함몰됐던 개별 생명은 전체의 뭉갬에서 빠져나와 자기만의 형태와 색깔로 존재한다. 그들은 쥐오줌풀이며, 며느리밥풀꽃이며, 꽝꽝나무며, 개똥지빠귀다. “저 세부(細部)는 얼마나 생생한가, 얼마나 감동적인가.”(엘리자베스 비숍) 머무를 때 나는 개별 생명의 세부를 보며 감탄한다. 개별 생명은 예술의 영감을 자극한다. 이를테면 시인이 떨어져 뒹구는 벚꽃에서 치열했던 생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고바야시 잇사의 하이쿠).
후회하지 않고
그들은 쓰러져버리고,
벚꽃.
글이든 그림이든 음악이든 모든 예술작품은 머무름의 산물이다. 그런데 머무름은 창작의 자궁일 뿐 아니라 감상의 기술이기도 하다. “[머무르면서] 우리는 특별한 방식으로 작품을 곱씹는다. 작품에 더 오래 머물수록 작품은 더 다채롭고 풍성한 면모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술 경험의 정수는 이런 식으로 머무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게오르그 가다머)
이러한 머무름이 깊어지면 “특별한” 일이 일어난다. 인식의 방향이 역전되는 것이다. 감상의 초기에는 내가 대상을 즐기며 인식하지만, 머무름이 깊어질 때 대상은 나에게 침투하여 나를 휘젓는다. 내 즐김의 대상은 나에게 상처를 내거나 나를 부수기도 한다.
성경을 읽을 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말씀에 깊이 오래 머물면 내가 말씀을 읽지 않고 말씀이 나를 읽기 시작한다. 히브리서 저자가 이런 진실을 알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양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히 4:12)
요즘 말씀의 종교라고 자부하는 한국교회가 동시대인들에게 둔중한 영혼의 울림을 주지 못하는 까닭은 말씀을 머무름 속에서 말씀을 관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씀을 지식 대상으로 학습하고 소비할 뿐 상처와 부서짐으로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머물러 성서 읽기가 바로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거룩한 독서”다. 말씀에 깊이 오래 머물러 말씀을 씹고 또 씹다 보면 내(독자) 마음에 드는 구절이 아니라, “성령의 검(엡6:17)”을 들고 나를 향해 돌진하는 그리스도를 만난다. 이때 말씀은 세속의 타성에 젖은 나의 거짓 자아에 깊은 상처를 낸다. 나의 옛사람은 찢어지고 나의 에고는 부서진다. 하지만 상처 속에 치료의 향유가 들어 있다. 잠들었던 참 자아가 깨어나고 나는 새사람을 입는다.
이민재 목사
은명교회 담임
감신대 객원교수
예목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