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2

생명이야기 - 풍류(風流) 접화군생이란 무엇인가?

생명이야기 - 풍류(風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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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의 말들] 풍류(風流)

우리는 ‘풍류’하면, 일반적으로 고구려나 부여 등 고대 한반도 사람들이 단오나 가을걷이에 함께 모여(國中大會) 사흘 낮밤을 무리지어 음주가무(群聚飮酒歌舞)했다거나 선비들이 산천경계(山川境界)의 풍광(風光)을 완상(玩賞)하면서 탁주 한 잔 걸치고 시 한 수 읊는 것을 떠올립니다. 우리들 머리에는 풍류하면 잘 ‘노는 것’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잘 노는 것’속에 생명사상의 정수가 담겨 있습니다. 그 의미를 우리 춤을 생명운동 차원으로 끌어올린 채희완 선생님과 인디언 문화 속에서 현대문명의 대안을 찾고 있는 서정록 선생님의 글 속에서 확인해 봅니다. 

 

생명원리와 가치는 한국고대사상의 한 상징인 풍류도(風流道)에 이미 실현되어 있다. 풍류도는 화랑도(花郞道)와 맞닿아 있으며, 더욱 거슬러 올라가면 천부경(天符經)에서 그 시원적 물줄기를 만나게 된다. 풍류도의 내용을 가장 적확하게 전해 주는 것으로서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의 난랑비서(鸞郞碑序)의 글이다. “국유현묘지도(國有玄妙之道) 왈풍류(曰風流) 설교지원(設敎之源) 실내포함삼교(實乃包含三敎) 접화군생(接化群生)”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핵심은 ‘접화군생’에 있다. 접화군생이란 인간뿐만 아니라 동식물, 무기물, 우주만물, 흙, 물, 바람, 공기, 티끌까지도 마음 깊이 가까이 사귀어 감동, 감화, 교화시키고 진화까지 시켜서 서로 완성되고 해방된다는 뜻이다. 

 

이런 논의는 보이는 것만을 규명해 보려고 했던 과학 체계의 미비점을 극복하고, 보이지 않는 것조차도 과학적으로 논의될 수 있다라고 하는 차원, 이를테면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 드러난 질서와 숨겨진 질서, 이들이 동시에 과학적으로 탐구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학문 체계의 요구이기도 하다. 특히 ‘비과학적인 것의 과학화’는 중요한 과제인 것이다. 

 

접화군생을 사람 사이의 문제로 좁혀 보면 한 사람의 개체적 삶이 사회에서 살아 나가는 데 여러 가지로 닥치는 개인적인 것과 집단적인 것 사이의 연관성 문제가 된다. 말하자면 한사람의 개체적인 삶과 사회적인 삶을 통합적으로 보는 시각의 문제이다. 이는 개인이 지닌 무한한 창조적 개성이 계발되고 확산되는 것과 함께 인간해방, 노동해방, 사회평등이라는 사회적 가치가 동시에 실현되는 것으로 요약해 볼 수 있다. 개인과 집단이 유기적이고 교호적 상호관계를 맺으며 이를 협동적으로 진전시킨다는 것인데, 이 점이 바로 생명사상의 사회적 기초 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집단 속에 깔묻혀 갈 수밖에 없는 오늘의 대중 사회에서 창조적 개인으로서 어떻게 구제 받을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새삼 중요한 문화적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 채희완 <한국 전통춤의 생명사상> 중에서 

 

아침에 동녘에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라. 마른 대지를 적시는 빗방울을 맞아 보라. 시름에 잠긴 나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스치는 바람을 기억해 보라. 길가에 핀 풀 한 송이가 피워낸 꽃을 보라. 푸른 하늘을 유유히 흐르는 흰구름을 보라. 그리고 내 곁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라. 그리고 그 얼굴이, 그 표정이 말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라. 밤하늘에 뜬 달과 별들을 보라. 그 해와 그 달과 그 바람과 비를 그저 단순한 물질덩어리라 말할 수 있는가? 

 

이 세상의 모든 존재에는 신성함이 내재해 있다. 해와 달도 신성하다. 바람도 신성하고, 비도 신성하다. 벌레도 신성하고, 풀 한 포기도 신성하고, 돌멩이 하나도 신성하다. 

 

우리는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나의 숨에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의 숨결이 들어와 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존재들에는 나의 숨결이 들어가 있다. 그렇게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숨을 쉰다. 동식물은 물론 바위도, 해도 달도 숨을 쉰다. 그리고 숨을 쉬는 동안 서로 하나가 된다. 물 또한 마찬가지다. 모든 존재에 나뉘어 들어가 있는 물은 언젠가 바다로 흘러가고 다시 무수한 생명으로 그 모습을 바꾸며 돌고 돈다. 그렇게 순환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물은 하나다. 바람이 하나이듯이. 또 우리의 말과 행위는 다른 존재에게 영향을 끼치고 또 영향을 받는다. 그렇게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생명은 하나인 것이다. 

 

이렇게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생명세계의 ‘그물망’을 샤마니즘에서는 영혼으로 푼다. 그리고 그 영혼의 울림과 떨림이 현상적으로 드러난 것을 바람, 흐름, 결이라 하니, 그것이 바로 최치원 선생이 말한 풍류요, 그 근본원리를 말한 것이 ‘접화군생(接化群生)’인 것이다. 

 

접화군생이란 무엇인가? 

 

바람이 없으면 생명은 살 수 없다. 비가 없으면 식물은 자랄 수 없다. 물이 없어도 그렇고, 변화와 움직임이 없어도 마찬가지이다. 바람, 흐름, 결, 즉 풍류가 있기에 뭇 생명이 나고 자라는 것이다. 힘겨우면 힘겨운 대로,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모두들 이 세상의 바람, 흐름, 결 속에서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 만나고, 서로를 공경하고, 서로의 존재를 섞으며 살아간다. 그것이 바로 바람, 흐름, 결 속에서 영혼을 가진 뭇 생명들이 나고 산다는 접화군생이다. 

 

이러한 풍류의 삶 속에서는 일상과 종교가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으니 곧 일상이 종교요 기도이다. 한마디로 일상 속에 신성함이 깃들어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지극히 고귀해지는 순간이다. 이를 가리켜 최치원 선생은 ‘포함삼교(包含三敎)’라 하였으니, 이 땅에 유불선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그들의 도(道)를 다 포함하는 아름다운 삶이 있었음을 지적했던 것이다. “집에 들어오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이웃과 부족과 민족을 위해 봉사하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과 같고,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고 침묵을 사랑하는 것은 노자의 가르침과 같으며, 악행을 멀리하고 선함을 위해 힘쓰는 것은 부처의 가르침과 같으니” 그 안에 이미 유불선이 다 들어있지 않느냐고 말이다. 고운(孤雲) 선생의 위의 말에는 유불선이 들어오면서 오히려 그 아름다운 도가 무너지고 어지러워짐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배어 있다. - 서정록 ?인간이란 무엇인가?에서 

 

- 이 글은 채희완의 <한국 전통춤의 생명사상>과 서정록의 <인간이란 무엇인가>(두 자료 모두 <우리의 오래된 미래>, 모심과 살림 연구소 자료집, 2003)에서 풍류에 관한 이야기를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