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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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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 최제우 200주년
어제 동곡 뮤지엄에서 수운 최제우 탄신 200주년 콜로키움과 동학농민운동 130주년 기념전 오픈식에 참여했다. 김남수 선생과 함께 가면서 4시간 줄곧 대화가 흥을 돋웠다.
첫 발표 “모심(侍)의 동학, 들깨어 모신 ‘다시개벽’과 하는님”에서 김종길 선생(다석철학자/미술평론가)은 다석의 한글철학을 빌어 “모심은 안에 계시는 ‘검얼’이요 (그것은) 밖으로 퍼지는 ‘숨짓’이니, 한 세상 사람들이 낱낱으로 알아 안 옮기는 것이다.”(侍者內有神靈外有氣化一世之人各知不移者也)라고 풀어 한글의 힘과 맛을 마음껏 발휘했다. 한글은 일반 사람들의 실삶의 체험에서 우려져 나온 감각적 말이요 경험적 언어라는 생각이 든다.
둘째 발표 “모시고 사는 존재들의 모심”에서 유기쁨 선생(서울대사회과학연구원)은 시천주를 모든 생명으로 확산한다. 만물은 지극한 생명이 기운을 모신 존재들임을 포착해야 한다. “새소리도 시천주의 소리이다.” 양천주는 생명의 기운을 돌보기가 된다. 결국 “날마다 모시고 사는 존재들을 모심”이 문명전환의 시대에 새문명을 여는 다시개벽과 하늘모심의 뜻이다.
시천(侍天)이 외천(畏天)이나 경천(敬天)보다 훨씬 내재적이며 관계적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일상어에서 ‘모신다'는 말에 겸손의 의미도 있지만, 여전히 상하관계의 뉘앙스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모심은 늘 아랫것들이 윗것을 대하는 태도와 행위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완전한 대등(對等) 관계는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면 ‘시천’보다는 생명감각의 원천인 天과 교감하고 공명하며 공감하는 感天, 더 나아가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好天과 樂天은 어떻겠는가.
이러한 생각은 양진호 선생(철학자, 인문학교육연구소)의 세 번째 발표에서 더욱 힘을 받았다. 그는 수운의 검무(칼노래)를 풀이하는 과정에서, 수운이 뭉우리돌의 정원을 지나 묘고봉(妙高峰)의 정상에 올라 칼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장면을 재현했다.
“용천검 날랜 칼은 일월을 희롱하고”
여기서 戲弄은 부정적인 뜻이 아니라 “서로 즐기며 놀리거나 놂”이라는 뜻이다. 특히 弄은 거문고를 탈 때 대나무로 만든 술대가 현을 노는 것을 말할 때 농현(弄絃)이라고 한다. 농현이란 거문고·가야금 등의 현악기 연주에서 음을 굴려내는 연주법이며, 즉 왼손으로 줄을 짚고 흔들어서 여러 가지 꾸밈음을 내는 기법(技法), 악기의 현과 최상으로 잘 노는 법을 말한다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일월을 희롱”한다는 말은, 일월을 가야금인 天의 絃으로 생각한다면 희롱천(戲弄天)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럴 때 만물과 더불어 온전하고 고스란히 신명이 나는 것이다. 김종길도 “스스로 들깨워 신나야 한다. 신나야 몬이 신을 낳는다.”라고 말한다.
기독교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 인생의 최종 목적은 “하느님을 영원히 즐기는 것이다.”(to enjoy God forever).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의(을) 향유”(fruitio Dei)한다는 말로 표현했다. 그래서 그런지 천국 생활이란 산드로 보티첼리의 <신비한 탄생>의 그림이나 프라 안젤리코의 <최후의 심판>에서 그려진 ‘성인들의 윤무’는 신을 향유하고 신과 함께 노는 희롱이 묘사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칼 바르트가 바흐와 모차르트의 음악을 비교하면서 한 말, “천사들이 하느님의 존전에서 (예배드릴 때에는) 바흐(Bach)를 연주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으나, 천사들이 저희들끼리 있을 때에는 모차르트를 연주한다는 것이고, 사랑의 하느님께서도 그것을 기꺼이 들을 것이다”라는 말도 모차르트 음악의 유희성을 가지고 하느님의 놀이와 유희(Deus ludens)를 간접적으로 말한 것이다.
고대의 제천의식에는 늘 가무(歌舞)가 있었고, <삼국사기>도 화랑들은 노래와 음악으로써 서로 즐긴다(相悅以歌樂)고 되어있다. 풍류의 연장선에 있는 수운의 검무(劍舞)는 바로 ‘검춤’(神舞), 곧 무천(舞天)인 것이다. 侍天-養天-體天-舞天(하늘을 모신다 – 하늘을 기른다 – 하늘을 몸받는다 – 하늘을 춤춘다)
네 번째 발표 “나라없는 나라를 넘어 씨알들의 나라로”에서 고영직 선생(문학평론가)은 민중의 생활주의가 권정생의 <한티재하늘>에서 매우 잘 그려져 있다고 말한다. 소설 속 ‘안이순’은 간난(艱難)의 삶 속에서 한티재의 하늘을 넘어가면서 하늘이 그들의 삶 안으로 들어오고 그들은 들어온 하늘을 모신다. 그렇지만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인 한티재의 “삼밭골 사람들도 바람에 날려가듯이, 물결에 흘러가듯이, 그러면서도 작은 틈바구니를 비집고 올라오는 씀바귀 풀처럼 산다. 밟히면 뭉그러지고 쥐어뜯기면 뜯긴 채로 다시 촉을 틔우고 꽃피고 씨앗을 맺어 훨훨 바람에 날려보내는 씀바귀 씨같이 자손을 퍼뜨린다.”
이것이 한티재에서 바라보는 하늘, 아니 한티재의 씨알들이 모신 하늘이고 그 사람들이 노니는 하늘이 아닐까. 이런 점에서 김종길이 말하는 “땅에 하늘”과 한티재에 하늘은 서로 어울린다. 훨훨 바람을 타고 추는 씨알들의 춤속에서 솟구치는 ‘솟남’, 그 안에는 ‘들깨움’의 신명으로 새생명을 낳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