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01

여민(與民)과 위민(爲民)의 차이, 여민사상 , 여민동락(與民同樂), 맹자

여민(與民)과 위민(爲民)의 차이


정운복의 아침시평



여민(與民)과 위민(爲民)의 차이
임금은 가볍지 않을지라도 백성은 귀한 것
[정운복의 아침시평 43
등록 2019.08.23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청와대에 들어가면 잘 단장된 앞마당과 미동도 하지 않는 헌병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회의실 명칭이 위민일실(爲民一室), 위민2실.... 처럼 백성을 위한다는 뜻의 당호가 붙여있지요.

맹자는 ‘與民(여민)’이란 표현을 많이 하고 ‘爲民(위민)’이란 표현을 자제했습니다. 
여민(與民)이란 백성과 더불어 한다는 뜻이고 위민(爲民)은 백성을 위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비슷하게 보이지만 깊이 들어가면 차이가 있습니다.

여민은 백성과 더불어 하는 것이니 임금과 백성 사이의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위민은 백성을 위하는 것이니 임금이 백성을 소유하는 것으로 자기 소유물에 대하여 시혜를 베푸는 것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중국 고전을 보면 맹자처럼 백성을 위하는 통치철학을 내세운 철학자는 없습니다. 물론 공자가 간간히 백성을 논하긴 했지만 그것은 피 통치자로서의 백성일 뿐이지요. 법가 사상이나 한비자를 보면 백성은 통제의 대상일 뿐입니다.


하지만 맹자는 이야기합니다.

민위귀 사직차지 군위경(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며 임금은 가장 가벼운 존재다.”


또한 임금이 잘못하는 경우에는 그 임금을 바꿀 수 있다는 혁명론을 주장한 것도 그이지요. 그리고 여민동락(與民同樂)을 이야기합니다. 백성과 더불어 같이 즐기는 것이 진정 군주의 즐거움이라는 것이지요.



▲ 맹자는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며 임금은 가장 가벼운 존재다.”라고 말한다.(그림 이승헌 작가)


우리나라에서 성군중의 성군으로 존경받는 세종대왕은 여민락(與民樂)을 만들고 즐겨 연주했습니다. 이는 백성과 더불어 즐긴다는 뜻이니 세종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글을 만든 까닭도 글로 표현하지 못하는 백성의 고충을 덜기 위함이니 말이지요.



우리나라 헌법 제 1조에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1조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백성이 중요한 까닭입니다.

요즘 세태를 보면 힘을 가진 자의 한마디가 힘없는 다수의 의견에 우선하고, 침묵하는 다수보다 떠벌리는 소수의 의견이 힘 있으며, 내용만 읽고 가는 많은 네티즌보다 소수의 댓글부대가 힘이 있습니다. 어쩌면 권력의 속성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떠벌리는 자보다 묵묵한 사람의 입장도 생각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임금은 가볍지 않을지라도 백성은 귀한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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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blog.naver.com/PostView.nhn?isHttpsRedirect=true&blogId=trendkey&logNo=221324106157

맹자의 사상. 의(義)와 여민동락 사상.

해피캣
2018. 7. 22


대체로 맹자는 공자 사후 약100년 뒤에 산동성 남부 추에서 출생했으며 이름은 '가'로 알려져 있다.

강의

저자 신영복

출판 돌베개

발매 2004.12.11.상세보기




공자는 춘추시대 사람이고
맹자는 전국시대 사람이다.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의 군주
춘추시대의 군주는 지배 영역도 협소하고 군주 권력이 귀족 세력들의 제어를 받는 제한군주였다.

전국시대의 군주는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절대군주였다.

맹자를 이해함에 있어 이러한 시대적 특성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생각해야할 초점은?

공자 시대의 유가사상이 맹자 시대에 와서 그 중심이 어떻게 이동했는가?

공자의 인(仁)이 맹자에 의해서 의(義)의 개념으로 계승하고 있다.

의는 인의 사회화


인이 개인적 관점에서 규정한 인간관계의 원리라면
의는 사회적 관계로서의 인간관계를 의미한다.
의는 인에 비하여 사회성이 많이 담긴 개념이다.

<논어>가 함축적인 글임에 비하여
<맹자>는 주장과 논리가 정연한 논설문이다.

맹자의 사상과 정책은 결국 당시 패권을 추구하던 군주들에게 채용되지 못했다. 당시 군주들은 사회적 정의보다 부국강병이란 이득에 더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다. 즉 각 국가 경쟁력에서 맹자의 의란 무가치해보였을 것이다.

•맹자의 민본 사상의 핵심

임금을 바꿀 수 있다는 맹자의 논리는 이를테면 민에 의한 혁명의 논리이다.


맹자 사상의 핵심을 의라고 할 경우 그 의의 내용을 구성하는 것이 바로 여민락이라고 할 수 있다.


•여민락 : 백성들과 함께 즐긴다

문왕은 백성들의 노역으로 대를 세우고 못을 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모두 그곳을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 했으며 그 대를 영대, 그 못을 영소라 부르면서 그곳에 사슴과 물고기와 자라들이 살고 있음을 즐거워했습니다. 이처럼 옛사람들은 그 백성들과 즐거움을 함께 했기 때문에 제대로 즐길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맹자의 유명한 여민동락 사상이다. 즉 여민동락은 진정한 즐거움을 말하며.

진정한 즐거움이란
여럿이 함께 즐거워하는 것.

맹자의 여민동락은 오늘날 대부분 사람들이 추구하는 즐거움과 차이를 보인다.

요즘 우리는 독락, 혼자 즐긴다.
오늘날 낙樂의 보편적 형식은 독락이다.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하여 무심한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오늘날의 일반적 정서는 가능하면 다른 사람과 닮는 것을 피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차별성에 가치를 두려고 한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것은 개인적 정서의 만족을 낙樂의 기준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의 공감이 얼마나 한 개인을 행복하게 하는가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공감이 감동의 절정은 못 된다고 하더라도 동류라는 안도감과 동감이라는 편안함은 그 정서의 구원함에 있어서 순간의 감동보다는 훨씬 오래 가는 것이다.
공감은 서로가 서로를 상승시켜 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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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arte365.kr/?p=6690


맹자는 왜 여민(동)락을 말했을까?
_동양철학자 신정근③


2012.10.30. 댓글 4 조회수 9,370

사람들은 맹자라는 사상가를 몰라도 ‘여민락’은 한 번쯤 들어봐서 알고 있다. ‘여민락’은 조선시대 아악의 이름이기도 하고 대학과 단체에서 모임의 이름을 지을 때 즐겨 사용하는 이름이다. ‘여민락’은 원래 정치 지도자가 여유 자원을 가지고 문화 예술 활동을 벌이면서 일반 백성들과 함께 쾌락을 누린다는 뜻이다. 없는 살림에 콩 한 쪽도 나누어 먹는데 문화 예술의 제전을 백성들과 함께 즐긴다는 데에 누가 반대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뜻이 좋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애용하게 된 듯하다.

그런데 정작 맹자가 이 ‘여민락’을 왜 중요하게 떠드는지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먼저 정치 지도자의 자질 또는 이상 정치의 측면에서 살펴보자. 맹자도 공자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여러 나라에서 유세했다. 실제로 「맹자」 첫 편은 양나라 혜왕(惠王), 제나라 선왕(宣王)과 대화로 시작되고 있다. 맹자가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흥미롭게 음악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그 이야기 속에는 ‘여민해락(與民偕樂)’, ‘여민동락(與民同樂)’, ‘독락(獨樂)’ 등이 쓰이고 있다. 이 말들은 정치 지도자가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사회적 자원을 어떻게 쓰느냐, 라는 맥락을 가리킨다. 독락은 자원을 순전히 개인적인 향락과 사치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고 여민해락과 여민동락은 경제적 부를 일군 인민과 함께 쾌락을 누리느라 쓰는 것이다. 인민들은 독락의 지도자를 증오하고 여민동락의 지도자를 희망한다. 따라서 정치 지도자라면 인민의 바람을 저버리지 않는 여민해락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문화 예술의 측면에서 살펴보자. 전국시대에 정치 지도자들이 자신의 특별한 신분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높은 누대의 신축, 넓은 정원의 독점, 커다란 궁궐의 축조에 매달리고 또 그곳에서 대규모 연회를 빈번하게 열었다. 이는 정치 지도자가 씨족 공동체의 수장에서 중앙 집권적 관료 국가의 왕으로 그 특성을 바꾸어가는 과정에 나타난 사회 현상이었다. 수장은 허름한 집, 낡고 떨어진 옷, 보잘것없는 식사를 하면서 인민과 함께 지내면서 동고동락했지만, 왕은 도전자의 경계, 지도자의 권위 등을 이유로 오늘날 보이는 대규모 궁궐 속에 특별한 존재로 살고자 했다.

이러한 일은 맹자보다 앞서 활동했던 묵자가 일찍 통렬하게 비판했던 사회 풍조이자 문화 현상이었다. 이 점에서는 맹자도 묵자와 같은 보조를 취했다. 하지만 그는 묵자 마냥 음악을 공리주의의 맥락에서 비판만 할 수 없다. 맹자는 공자처럼 음악의 교육적 기능과 문화 예술적 가치를 긍정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맹자는 일종의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즉 그는 한편으로 묵자처럼 사회적 통합이 아니라 갈등을 부추기고 특정인의 무분별한 쾌락을 돕는 문화 예술(음악)의 퇴폐적인 측면을 인정했다. 다른 한편으로 문화 예술(음악)이 사회적 지원으로 받아서 사람들의 고통을 달래고 심미 의식을 키우는 문화 예술의 적극적인 측면을 인정했다.

맹자는 이 난제를 풀기 위해서 묵자와 마찬가지로 문화 예술(음악)의 향유를 정의의 관점에서 접근하기로 했다. 그는 묵자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독락과 여민동락 또는 여민해락을 구분했던 것이다. 음악이 독락으로 쓰인다면 묵자처럼 존재 근거를 상실하지만, 여민락으로 쓰인다면 묵자와 달리 향유될 권리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맹자는 지도자가 자신이 노동하지 않고 세금을 거둔 자원을 여민동락보다 독락으로 쓰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지도자를 향해 「서경」 「탕서(湯書)」에 나오는 섬뜩한 참요(讖謠)를 소개했다. “저놈의 해가 언제 없어질까? 우리 저 녀석과 함께 망해버릴까 보다!”(時日害喪? 予及女偕亡!) 원래 해는 온갖 포악한 짓을 일삼았던 하나라 걸왕을 가리키지만, 맹자는 현실에 걸왕 같은 인물이 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했으리라. 여민락은 그냥 뜻만 좋은 말이 아니다. 그것은 문화 예술인들로 하여금 자신이 왜 있는지 끊임없이 사유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한갓 미사여구가 아니라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 물음인 것이다.





글 | 동양철학자 신정근

동양철학에서 문화예술교육의 메시지를 찾다

서울대학교에서 동서철학을 배우고 한제국의 금고문 논쟁을 주제로 석사를, 인(仁) 개념의 형성 과정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로 시대와 사회의 맥락에서 철학과 예술 미학의 형성과 전개 과정을 다양한 연구 성과로 밝혀내고 있다. 요즘 현대 철학없는 동양 철학의 문제를 새롭게 풀어내려고 하면서 동양철학 텍스트의 재해석에 열을 올리고 있다. 아울러 철학 사상 위주의 동양학을 예술 미학의 맥락에서 재조명하고자 긴 준비기간을 보내고 있다.

4 Comments이은아 2012년 11월 01일 at 10:24 AM
댓글


중요한 말씀 너무 감사하고 감동입니다…
위의 말씀처럼…..우이음악을 논하면서 동양철학사상이 빠질수가 없을 만큼 관련이 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禮와樂을 숭상하여 바르고 雅鄭한 음악을 만들 고 보급함으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치국의 중요한 근본으로 삼았기 때문이죠…공자나 맹자도 악을 중요시하여 정치를 다스리는 사상을 논하셨고 고민하셨습니다.
대선을 앞두고 여민동락 할수있는 정치지도자가 나오길 바래봅니다…..^^
아르떼365 2012년 11월 07일 at 1:50 PM
댓글


통치와 문화예술, 문화예술의 쾌락적/교육적/그 자체로서의 존재 이유를 크게 크게 짚어주는 듯하여 아르떼365 담당자들도 원고를 꼼꼼히 읽어보며 기사 업로드 준비했던 글 입니다. 웹진의 제한된 분량 때문에 성큼성큼 이야기를 이어갈 수 밖에 없어서 아쉽다는 내부 평가도 있었죠. ^^

최땅콩 2021년 03월 09일 at 11:43 PM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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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ksmnews.co.kr/view.php?idx=74177
<기자수첩> 여민동락(與民同樂),공직자의 기본
정철규 기자 / 2014년 04월 02일 경상매일신문

여민동락(與民同樂)은 백성과 함께 즐긴다는 뜻이다.
맹자의 양혜왕장구(梁惠王章句) 하편에 나오는 고사로 왕이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면서 자기만 즐긴다면 백성이 반발하겠지만 백성들과 즐거움을 함께하다면 왕이 즐기는 것을 백성들도 함께 기뻐할 것이라는 말이다.
무소불위(無所不爲)의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임금일지라도 백성이 없으면 아무 쓸모없는 한 인간에 불과한데 백성은 먹고 살기에 급급한데 부귀영화와 놀이에 빠져 있는 군주에게 정문일침(頂門一鍼)을 가한 말이다.
이 고사의 의미는 “국가 지도자가 제 역할을 못하면 결국 그 국민들이 고통을 겪는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와 같은 글로벌 무한경쟁시대에는 지도자의 역할이 더욱더 중요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지방자치단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지방자치단체란 국가영토의 일부를 구역으로 하여 그 구역 내에서 법이 인정하는 한도의 지배권을 소유하는 단체로서 주민의 복리에 관한 사무를 관리하고 재산을 관리하며 법령의 범위 안에서 자치에 관한 규정을 제정하여 시행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국가통치 일부를 맡아서 주민에 의한 주민을 위한 행정을 시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방행정의 키를 가지고 있는 공직자들이 사리사욕을 떠나서 과연 주민에 의한 주민을 위한 주민의 복리증진을 위해서 얼마나 헌신적으로 일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공직자들은 주민과 더불어 즐기며 살아가는 여민동락(與民同樂)을 해야 하고 주민을 위한 지방자치행정을 해 나가야 하는데 이렇게 부정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여민동락의 시작은 공감이다. 공감하려면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 가장 우선돼야 할 것이다. 나를 낮추어 귀를 열고 대화하는 것은 지방행정에 몸담고 있는 공직자에게는 필수이자 기본이 되는 요소이다.
그래서 강조하게 되는 것이 주민의 눈높이에 맞는 현장행정이다. 그렇다면 여민동락의 마무리는 끊임없는 자기성찰이 될 것이다. 여민동락이 꼭 왕이나 지도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듯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웃의 고통과 슬픔에 무관심해서는 안된다.
구석구석까지 골고루 스며드는 소통과 공감의 현장행정으로 주민들과 함께 즐겁고 행복해지는 것이 바로 여민동락의 실천이라 믿는다.
이에 상주시를 책임지고 있는 공직자들은 맹자의 여민동락이라는 민본사상을 잊지 말고 항상 시민들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여민동락(與民同樂)의 행정, 가장 낮은 자세로 시민을 섬기는 유약겸하(柔弱謙下)의 행정을 펼쳐 주었으면 한다.
정철규 기자 / 2014년 04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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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일언] 여민동락(與民同樂)
군포,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하는 것은 지역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진복 기자 | 기사입력 2017/05/14 [군포신문]

여민동락(與民同樂)은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하다'라는 뜻으로, 백성과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하는 통치자의 자세를 보여주는 말로 『맹자(孟子)』에서 유래되었다.

▲ 서예가 권시환의 여민동락



맹자는 인의(人義)와 덕(德)으로써 다스리는 왕도(王道)정치를 주창하였는데, 그 바탕에는 백성을 정치적 행위의 주체로 보는 민본(民本) 사상이 깔려 있다. 맹자는 양(梁)나라 혜왕(惠王)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 왕께서 음악을 연주하시는데 백성들이 종과 북, 피리 소리를 듣고는 골머리를 앓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우리 왕은 음악을 즐기면서 어찌하여 우리를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여 부자(父子)가 만나지 못하고, 형제와 처자가 뿔뿔이 흩어지게 하는가"라고 불평하며, 또 왕께서 사냥을 하시는데 백성들이 그 행차하는 거마(車馬) 소리와 화려한 깃발을 보고는 골머리를 앓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우리 왕은 사냥을 즐기면서 어찌하여 우리를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여 부자(父子)가 만나지 못하고, 형제와 처자가 뿔뿔이 흩어지게 하는가"라고 원망한다면, 이는 다른 이유가 아니라 백성들과 즐거움을 함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此無他, 不與民同樂也).


지금 왕께서 음악을 연주하시는데 백성들이 종과 북, 피리 소리를 듣고는 모두들 기뻐하는 빛을 띠며 "우리 왕께서 질병 없이 건강하신가 보다, 어찌 저리 북을 잘 치실까"라고 하며, 왕께서 사냥을 하시는데 백성들이 거마 소리와 화려한 깃발을 보고 모두들 기뻐하는 빛을 띠며 "왕께서 질병 없이 건강하신가 보다, 어찌 저리 사냥을 잘 하실까"라고 한다면, 이는 다른 이유가 아니라 백성들과 즐거움을 함께하기 때문입니다(此無他, 與民同樂也)."

곧, 왕이 백성들에게는 고통을 주면서 자기만 즐긴다면 백성들이 반발하겠지만, 백성들과 즐거움을 함께한다면 왕이 즐기는 것을 함께 기뻐할 것이라는 말이다. 이 고사(故事)는 『맹자』의 「양혜왕장구(梁惠王章句)」 하(下)편에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여민동락(與民同樂)은 항상 백성을 중심으로 하는 통치자의 이상적인 자세를 비유하는 말로 사용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통령 집무실을 광화문으로 옮기기 전 일상적인 업무를 청와대 비서동인 ‘위민관(爲民館)’에서 참모들과 함께 보기로 했다. 그리고 청와대는 12일(금) 비서동인 위민관 명칭을 '여민관(與民官)'으로 바꾸기로 했다.

청와대가 주체가 되어 ‘백성을 위한다’는 위민과 ‘백성과 함께 하는’ 여민은 모두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는 의미로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촛불혁명으로 선거가 시작되고 선거로 인해 국민이 만들어준 대통령”의 의미는 “청와대가 국민과 함께 동고동락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 이석화 청양군수의 여민동락

박근혜정부의 적폐(積弊)청산으로부터 시작된 촛불혁명은 새로운 대통령을 탄생과 함께 여민동락의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적폐현상은 중앙정치 못지않게 지역정치에 더 많이 쌓여있고 그 불만의 목소리가 다양한 곳에서 등장하고 있다. 따라서 진정한 여민동락의 시대가 오려면 내년 개헌과 함께 지역정치의 변화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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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민동락(與民同樂)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다” [군주(君主)는 백성과 더불어 즐거움을 함께한다]

기자명남해신문 기자 입력 2018.05.

'군주는 백성에게 도움이 되어 백성이 기뻐하는 정책을 펴야한다'라는 뜻으로 백성과 동고동락하는 통치자의 자세를 비유하는 말이다.
맹자는 인의(仁義)와 덕(德)으로 다스리는 왕도(王道)정치를 주창하였는데, 그 바탕에는 백성을 정치적 행위의 주체로 보는 민본(民本)사상이 깔려 있다고 본다.
여민동락은 중국 맹자(孟子) 양혜왕장구(梁惠王章句) 하편(下篇)에 나오는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 한다'라는 내용에서 유래하였다. 같은 성어로 여민해락(與民偕樂)이 있다.
맹자는 양(梁)나라 혜왕(惠王)에게 아뢰기를 "지금 왕께서 음악을 연주하는데, 백성들이 그 종과 북, 피리소리를 듣고는 모두 골머리를 앓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우리왕은 음악을 즐기면서 어찌하여 우리를 이 지경에 까지 이르게 하여 부자(父子)가 서로 만나지 못하게 하고, 형제와 처자가 뿔뿔이 흩어지게 하는가 하고 불평하며 말한다면 어찌되겠습니까. 또한 왕께서 이곳에서 사냥을 하는데 백성들이 행차하는 거마(車馬)소리와 화려한 깃발을 보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원망한다면, 이는 다른 이유가 아니라 백성들과 더불어 즐거움을 함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맹자가 다시 반대로 '왕께서 여기서 음악을 연주하는데 종소리 북소리 피리소리를 듣고 모두들 기뻐하며 희색을 띄고 반색을 하면서 '우리 왕께서 저렇게 음악을 잘하고, 사냥을 잘하는 것은 질병이 없고 건강하다는 이유에서 일 것입니다. 그것은 백성들과 즐거움을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곧 왕이 백성들에게는 고통을 주면서 자기만 즐긴다면 백성들이 반발하겠지만, 백성들과 즐거움을 함께한다면 왕이 즐기는 것을 함께 기뻐할 것이라는 말이다.
여민동락을 여민락(與民樂)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아악(雅樂)의 이름이기도 한데, 여민락은 본래 정치지도자가 여유 자원을 가지고 문화예술 활동을 벌이면서 백성들과 쾌락을 누린다는 뜻이다. 맹자의 사상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위의 내용과 같이 맹자는 양나라 혜왕, 그리고 제나라 선왕(宣王)과의 대화 속에 음악과 관련된 여민동락, 여민해락, 독락(獨樂)등이 나오는데, 여민동(해)락은 경제적 부(富)를 일군 백성과 함께 쾌락을 누리는데 쓰이며, 독락은 자원을 순전히 개인적 사치를 위해 사용하는 것으로, 당연히 인민들은 여민동락의 지도자를 희망하고 독락의 지도자를 미워한다. 그래서 지도자의 위치에 있으면 백성의 바람을 저버리지 않는 여민동락을 추구할 것이다. 여민락은 세종대왕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바탕으로 창제(創製)한 음악과 노래, 춤, 등 종합공연예술 물(物)로, 궁중음악(宮中音樂)의 '봉래의(鳳來儀)' 가운데 한 곡(曲)이다. 맹자의 여민동락에서 유래하였지만 여민락도 세종이 백성을 아끼는 마음이 담겨져 있다.
여민동락은 지금도 다르지 않다. 국민의 뜻을 헤아리고 국민을 위한 정치를 편 지도자는 국민이 칭송하고 함께 즐거워하겠지만, 자기만 즐기고 국민에게 고통을 주는 지도자는 국민이 끌어 내리며 갈아치운다. 국민과 함께하지 못한 권력자의 최후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러므로 백성과 더불어 즐거움을 함께하고 기쁨을 함께하는 군주가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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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의 사상은 위민도 민본도 아닌 여민주의”
등록 2019-09-06 
황상철 기자


정치학 전공한 배병삼 영산대 교수 
<맹자> 새롭게 옮기고 풀어 써
상호존중·소통 강조하는 쌍방의 윤리 ‘오륜’이 공자와 맹자의 본뜻



맹자, 마음의 정치학 1, 2, 3
배병삼 지음/사계절·


<맹자, 마음의 정치학>을 펴낸 배병삼 교수는 이 책에서 맹자와 유교에 덧씌워진 오해와 잘못된 상식을 바로잡고자 했다고 밝혔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중국 전국시대(기원전 403년~기원전 221년)의 사상가인 맹자(기원전 372년 추정~기원전 289년 추정)의 사유가 담긴 <맹자>는 우리말로 된 역주서와 해설서들도 많다. 그런데도 <맹자>는 새롭게 옮겨지고 풀어 써진다. 전쟁으로 사회가 붕괴했던 시기에 새로운 사회를 꿈꿨던 사상가들을 재조명해 이 시대의 문제를 헤쳐나가는 데 실마리를 얻고자 해서일 터다. “맹자가 두려워한 당시의 사회는 환과고독(鰥寡孤獨)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아내 없는 홀아비, 남편 잃은 홀어미, 고아, 독거노인이죠. 그런 상황에서 맹자는 더불어 사는 삶을 모색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도 ‘혼술’ ‘혼밥’이라는 말이 있고, 독거노인은 고독사합니다. 우리 역시 더불어 사는 삶의 방법을 찾고 있는 중이죠.”


지난 3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배병삼(60) 영산대 자유전공학부 교수는 이번에 <맹자, 마음의 정치학>을 펴내고, 지금 <맹자>를 읽어야 하는 까닭을 이렇게 설명했다. 대학 석사 과정에서 마키아벨리를 공부한 배 교수는 박사 과정 때 동양 고전으로 공부의 방향을 틀었다. 

“1980년 광주항쟁은 큰 충격이었죠. 학생운동을 하다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고 81년도 2학기에 복학해 버트런드 러셀의 <서양철학사>부터 다시 읽었는데, 어떤 목마름이 해소되지 않았어요. 한국 땅에서 정치란 무엇인가? 88년 박사 과정 때 서당(유도회 부설 한문연수원)에 다니면서 <논어> <맹자>를 읽었는데, <논어> <맹자>가 바로 정치학 책이었습니다.” 

2002년 <논어> 주석서를 내고 한국사상사를 공부하는데 정도전(1342~1398) 앞에서 탁 걸렸다고 한다. “조선은 <맹자>의 나라였습니다.” 

그렇게 <맹자>와 씨름하고, 출판사에 <맹자> 관련 책을 써보겠다고 한 게 10년 전이라고 한다. “<맹자>를 제대로 풀어내려면 법가·묵가·종횡가 등 다른 제자백가의 사상을 공부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렸죠.”

배 교수는 이번 책에서 맹자와 유교에 덧씌워진 오해와 잘못된 상식을 바로잡고자 했고, 그 점이 이 책이 이전의 <맹자> 관련 책들과 구별되는 특징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맹자한테 씌워진 게 위민(爲民)이니 민본주의니 하는 것인데, 맹자의 사상은 위민도 민본도 아닌 철저한 여민(與民)주의입니다.” ‘
위하지 말라, 다만 함께하라’가 맹자 정치사상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배 교수는 유교에 대한 오해가 <맹자> 이해를 방해한다고 생각하고 삼강오륜(三綱五倫)을 분석해 유교에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은 신민과 자식, 아내가 군주, 아비,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노예의 윤리, 일방적인 군주 독재의 정치 논리로 한(漢) 제국의 이데올로기라고 지적한다. 반면, <맹자> ‘등문공 상’ 편에 나오는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의 오륜은 부모와 자식, 군주와 신하, 남편과 아내, 윗사람과 아랫사람, 친구 사이의 상호 존중과 소통을 강조하는 상호적인 쌍방의 윤리이고, 이것이 공자와 맹자의 본래 뜻이라고 강조한다. 지배와 복종의 윤리인 ‘삼강’에서는 통치자 중심의 ‘위민’ 정치론을, 상호성을 특징으로 하는 ‘오륜’에서는 ‘여민’ 정치론을 찾아낼 수 있다고 한다. 배 교수는 “오륜의 관계론이 유교의 정통이며, 삼강은 청신한 본래 유교가 타락한 형태”라고까지 말한다. 책무를 방기한 군주를 쫓아낼 수 있고, 부모를 올바른 길로 이끄는 것이 ‘효’라는 맹자의 주장은 오륜을 토대로 삼는다.


배 교수는 “동양 고전은 두괄식”이라며, <맹자>의 핵심은 첫머리에 담겼다고 말한다. ‘양혜왕 상’ 편이다. 맹자를 만난 양나라 혜왕이 “노인장께서 천 리를 멀다 않고 와 주셨는데, 아마 내 나라를 이롭게 할 방안을 가지고 계시겠지요?”라고 묻자, 맹자는 “왕께서는 하필 이(利)를 말씀하십니까! 다만 인의(仁義)가 있을 따름입니다”라고 대답한다. 배 교수는 “오늘날 자본주의는 자기가 누굴 해치는지도 모른다. 또 죽어가는 사람도 죽인 사람을 모른다. 모르는 채 남을 해치고, 누가 저를 죽이는지 모르는 채 죽는다. 이익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이익을 뜻하는 이(利)에 칼(刀) 자국이 선명한 것이 섬뜩하다”고 했다. ‘양혜왕 상’ 편에는 ‘여민해락’(與民偕樂),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 ‘연목구어’(緣木求魚), ‘무항산무항심’(無恒産無恒心) 등 널리 알려진 얘기들이 많다. “일정한 생업(항산)이 없어도 일관된 마음(항심)을 유지할 수 있는 자는 오로지 사(士)뿐입니다. 백성은 항산이 없으면 항심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사(士)와 백성(民)은 구별된다. 오늘날에는 스스로를 사(士)로 내세우면서 ‘무항산무항심’을 구실 삼아 막대한 돈벌이에 나서는 ‘사이비’(似而非·‘진심 하’ 편)들도 있다.
책은 동서고금을 오가며 방대한 자료를 활용해 <맹자>를 해설하며 우리 사회의 문제와 접목시킨다. 배 교수는 특히 성호 이익(1681~1763)의 <맹자> 주석이 탁월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문지기가 공자를 가리켜 ‘안 될 줄 알면서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어렵지만 불가능하지 않다고 보고 도전하는 게 인문학의 길이고, 사람다운 삶을 보존하는 힘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황상철 기자 roseb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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