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26

Philo Kalia - *역사적 예수 – 예수의 초상 렘브란트의 [젊은 유대인 그리스도>(1648년)

Philo Kalia - *역사적 예수 – 예수의 초상 렘브란트의 <젊은 유대인 그리스도>(1648년)와 임영선의... | Facebook

*역사적 예수 – 예수의 초상
렘브란트의 <젊은 유대인 그리스도>(1648년)와 임영선의 <예수상>(1990년, 연세대학교교회) 이다. 화가들이 그리거나 조각한 예수상 중에 어떤 예수상이 실제 예수에 가까운 것인지 우리는 묻지 않는다. 화가(예술가)들의 독창적 다양성을 인정하고 들어가기 때문일까? 그러나 역사적 예수 연구는 갈릴리에서 살았던 나사렛 예수가 어떤 분이었는지 실제로 재현하고 싶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 “예수는 누구였는가?” “그의 의도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얻은 대답은 ‘영원’하고 ‘불변’하길 원한다.
종교개혁이 중세 교회의 권위로부터의 자유를 얻는 계기가 되었다면 프랑스 혁명 전후로 등장한 ‘역사’라는 범주는 교회와 신학에서 기독교 신앙이 교리의 권위는 물론 성경의 권위로부터도 해방되는 인식의 혁명적 전환을 만들었다. 역사 앞에는 ‘영원’과 ‘불변’이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은 과정이고 형성 중에 있다. 신관도 형성 중에 있다.
모든 역사는 근본적으로 시대의 역사이다. 역사학의 대상은 이중적 운동 속에서 있다. 하나의 운동은 지나간 모든 생활 과정으로부터 생겨나며, 또 다른 운동은 역사를 서술하는 인간의 계속적인 변화로부터 생긴다. 인간 자신도 역사적 과정 속에 종속되어 있다. 그러므로 역사는 항상 다시금 새롭게 써야 한다.
계몽주의 이후의 역사관에서는 인간이 역사를 계산할 수 있고 만들 수 있다는 경험을 통해 발전해 왔다. 역사란 곧 인간의 역사를 의미한다. 이런 전제 아래서 하느님의 역사 발언은 ‘역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되며, 바로 그래서 ‘역사적’으로 의미 없는 주장이 된다. 역사학적 진리의 전제 속에서 신학적 진리 주장은 사라진다. 신학적 진리도 다 인간이, 인간 공동체 안에서 형성된 것에 불과한 것이라 여긴다.
나는 신학에서 그리스도론이 중심이고 신론과 성령론은 그리스도론의 확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신학은 예수를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는 것으로 늘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그리스도론은 고대 교회에서 완성(?)된 양성론의 해석에 집중하다가 ‘역사적 예수 연구’ 이후 그 틀이 무너졌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신약성경 안에서조차 그리스도론은 자라고 있다.
신약 신학자 제임스 던(James Dunn)의 신약성서 그리스도론은 “형성 중에 있는 그리스도론”(Christology in the Making)이다.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차정식 옮김, 상/하)으로 번역된 책의 영어 제목도 “기억된 예수. 형성 중에 있는 기독교”이다. ‘역사’의 범주가 그리스도론과 기독교의 정체성을 밝히는데 적용된 것이다. 19세기에 서로 관점이 다른 포이어바흐와 하르낙이었으나 하나의 영구불변하는 『기독교의 본질』을 탐구하려고 했지만 한스 큉은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역사』에서 여섯 개의 패러다임으로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역사적 패러다임으로 서술할 수밖에 없었다.
제임스 던은 무려 150쪽에 걸쳐 르네상스 이후 최근까지 역사적 연구를 비평적으로 서술하고 공관복음의 예수는 “그 자체로 예수가 무엇을 행하였고 말했는가보다는 예수의 처음 제자들이 그가 무엇을 행하거나 말한 것으로 기억했는가에 대한 증거를” 토대로 알려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기억이란 “과거를 다시 현재화함으로써 정확하게 과거와 현재의 지평을 융합하는 과정”이다. 예수 탐구를 위해 우리가 가진 자료는 “처음부터 우리가 직면해 있는 대상은 예수라기보다는 그가 어떻게 인식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 자체라기보다는 그 가르침을 기억 속에 보존하고 구어 전승 과정을 시작한 개인들에게 영향을 준 결과로서의 내용이다.” 불트만 이후 신해석학자들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던에게 신앙이란 역사 해석학적 신앙이다(6장).
던은 마지막 장(19장)에서 책의 제목인 “기억된 예수”(Jesus Remembered)로 정리한다. 그는 예수 전통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말하려고 한다. 그것은 부활절 이전 예수와 부활절 이후 그리스도가 부활을 중심으로 양분되는 것이 아니라 부활절 이전의 예수가 제자들에게 끼친 강력한 영향이 부활절 이후에 심화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활절 이전 예수의 영향이 이미 신적인 권세와 권능의 견지에서 가늠된 것이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제임스 던의 저서가 10여 가지 이상 번역이 되었구나. 신학적 자료가 참 풍성해졌다. 조직신학에서 몰트만, 틸리히, 바르트, 본회퍼, 최근에는 판넨베르크의 저서까지 다 번역이 되었으니 한국 신학계와 교계에 참으로 경사스러운 일이다.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을 읽으면서 성서학자들의 방대한 고대 문헌에 대한 섬세하고 분석적인 연구에 존경심이 저절로 솟아난다. 하나의 새로운 의미와 진리를 밝히기 위해 엄청난 자료들을 섬세하게 주석하고 정치하게 분석 비교하는 그 치밀한 과정도 어렵겠지만, 이걸 읽는 독자도 힘든 건 마찬가지다. 이 책에 비하면 몰트만이나 틸리히의 저서가 나에게는 훨씬 쉽더라. 이 방대한 분량(무려 1,400쪽)을 명쾌한 우리말로 옮긴 차정식 교수에게 감사한 마음 전하고 싶다. 인내력 시험을 얼마나 당했을까....
난 역사비평, 사회사적 비평이 기본으로 깔린 성서학 분야 글들에서 신학의 갈급함을 느낀다. 내 주관적 느낌이다. 문학, 역사, 정치 경제 사회학적 주석, 그쪽 분야에서 하는 지식 서술.... 신학적 목소리는 언제 나오지... 그런 갈급함과 기대감이다.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에 대해 이런 말을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그것이 다른 범주들에 의해서도 언제나 해명될 수 있는 역사 속에서 일어났기 때문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우리가 살아갈 수 있고 또 살아가야 할 역사를 만들기 때문이요, 그것이 미래의 사건을 위해 길을 열어놓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종말론적 미래를 열어놓기 때문에 역사적이다.” ‘부활의 역사’를 증언하는 자는 ‘역사’의 범주로 부활을 변증하다가 역사의 뒤안길에서 역사의 지각생이 될 것이 아니라, ‘부활의 역사’를 통해 ‘역사의 부활’을 말함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취하는 보냄받은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억된 예수’(Jesus Remembered)를 토대로 ‘기대하는 예수’(anticipating Jesus)를 말해야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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