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05

맹자의 정의(義)와 인간 삶의 조건 < 한국 페미니스트 신학자의 유교 읽기 < 학술 < 기사본문 - 주간기독교

맹자의 정의(義)와 인간 삶의 조건 < 한국 페미니스트 신학자의 유교 읽기 < 학술 < 기사본문 - 주간기독교

맹자의 정의(義)와 인간 삶의 조건
기자명 이은선 한국信연구소 대표  승인 2022.04.01

한국 페미니스트 신학자의 유교 읽기 신학神學에서 신학信學으로 7
 

   우리는 지난 6회 글에서 어린 시절 공자가 그 어머니 안징재로부터 어떻게 큰 사랑을 받았고, 그런 공자가 제자와 더불어 부모 3년 상(喪) 치르는 일로 어떤 쟁론을 벌였는지를 살폈다. 공자를 이어서 유가의 도를 공고히 하고 전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맹자(BC 372-289)가 살던 시대는 그보다 더한 실리주의와 패권주의가 극성을 부리던 약육강식의 전국(戰國)시대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맹자 삶에도 부모님 상 치르는 일과 관련한 설왕설래가 전해진다. 다름 아니라 맹자가 그 아버지 장례보다 어머니 장례를 더 화려하고 성대하게 치렀다는 논란이다(『맹자』 「양혜왕」下16). 여기서 당시의 일반적인 경향에 반해서 어떻게 어머니 장례가 더 성대하고 ‘지나쳤다(踰)’라고 하는지의 구체적인 내용과 근거는 알기 어렵지만, 그동안 맹자에 대해 알려진 여러 이야기와 더불어 상상해 보면 맹자도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으면서 자란 것이 확실한 것 같다. 그런 맥락에서 맹자가 자신이 어머니 관을 준비하는 마음은 단지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에 흡족(盡於人心)한가’에 따른 것이라고 밝히는 이야기가 있다(『맹자』 「공손추」 下 7). 우리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이야기도 익히 알고 있거니와, 이것으로써 공자의 仁이나 맹자의 義처럼 ‘마음을 극진히 하는 일’과 관련한 유교 도는 당시 시대 일반을 훨씬 뛰어넘는 어머니들의 지극한 모성 실행과 그 체험과 깊이 연관되며 거기서 피어난 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치 기독교의 예수에게서도 어쩌면 당시 로마 식민지 아래서 원치 않는 폭력적 임신으로 태어난 ‘사생아’ 예수가 그 어머니 마리아에 의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식으로까지 키워지는 사랑과 정성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기독교 여성신학적 상상과도 잘 연결되는 것 같다. 

 

   많은 유가도 연구가들에 따르면 맹자의 가르침은 한국인들의 심성에 제일 잘 부합한다고 한다. 우리는 특히 맹자가 당시 만인 대 만인의 투쟁 시기와도 같이 패도의 시대였지만 위정자들에게 끊임없이 리(利)보다는 의(義)에 따라서 정치할 것을 강조했고, 그 義가 무엇이고, 어떻게 사람이 義에 대한 의식에 도달하게 되는지를 끝없이 논쟁하고 고민한 것을 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지적이 맞는 것인지, 몇 년 전 미국 철학자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한국에서만큼 많이 팔린 나라가 없다고 한다. 그런 샌델 교수가 얼마 전 다시 『공정하다는 착각』을 내놓았는데, 거기서 그는 오늘날 소위 21세기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세계에서 널리 통용되는 ‘능력주의’ 내지는 ‘능력 평등주의’로서의 정의와 공정 개념이 그 안에 얼마나 많은 모순과 “착각”을 내포하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지적했다. 즉 오늘 한국사회에서도 특히 젊은 세대가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당연시하는 능력주의, ‘각자가 가져갈 가치와 보상은 각 개인이 내보인 능력에 따라서 나누는 것이 공정하다’라는 이상은 결코 정의롭지도, 공정하지도 않다고 밝힌다. 왜냐하면, 한 개인이 오늘날 자신의 개인적 능력이라고 주장하는 학벌이나 지능, 신체적 재능까지도 결코 단순하게 개인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그 개인은 아무런 역할이나 기여도 하지 않은 前 세대의 삶과 수고가 녹아있고, 그런 것들이 바탕이 되어서 이루어진 공적 영역이 토대가 된 것이며, 더 나아가서 이 지구 집에 태어났으면 누구나가 고루 누릴 권리가 있는 지구 자연의 토대와 기여가 내재하여 있는 등, 그래서 그것은 결코 개인적인 노력만으로 얻은 것이라 할 수 없고, 또 그것을 얻는 데 모두에게 똑같은 기회가 제공되었던 것도 아니라는 지적이다. 

 

   오늘 한국사회에도 심각하게 드러나는 이러한 능력 평등주의의 폐해 앞에서 서구 기독교 전통의 샌델은 그러나 그 한계와 불의만을 지적할 뿐 그에 대한 대안은 잘 제시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에 필자는 우리에게 아주 오래된 미래인 맹자의 ‘경장(敬長)’으로서의 義를 다시 가져와 보고자 한다. 맹자는 당시 오늘날보다도 때와 기회에 따른 ‘능력의 폭정’과 ‘힘과 무력의 폭정’이 심했을 전국(戰國)시대의 한복판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든 그것을 넘어서 그와는 다른 인간적인 길을 찾고자 고투했는데, 거기서 특히 필자에게 의미 있게 다가온 개념이 ‘경장(敬長)’으로서의 義 의식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한 공동체가 더욱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정의가 단지 현세대 구성원 간의 문제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그 현시대의 존재가 가능해지도록 자신을 내어주었고, 토대가 되어준 과거 세대와의 관계에서 먼저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과거와 더 오래된 윗세대, 거기서의 개인과 주체의 수행, 역사적 진실 등이 올바로 평가되고 살펴지는 일이 우선이라는 의식인데, 만약 이미 과거의 인물이 되었고, 중심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힘없는 대상이 된 과거에 대한 인정과 배려를 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회는 현재의 약자에게 더 가혹할 수 있다. 반대로 온 공동체가 그와 같은 배려를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좋고 선한 것을 돌려준다면, 즉 눈에 보이는 능력과 힘만이 다가 아니라는 것에 대한 인정과 공경이므로 거기서는 동물 세계처럼 능력 평등주의의 약육강식 논리가 아니라 약하고 힘없으므로 더욱 배려해주는 인간적 일을 가능하게 한다는 가르침이다.

 

   정의와 공평이란 한 공동체의 힘과 권력, 재화와 기회 등을 그 구성원들 사이에서 편중되지 않게 나누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닌 남의 것을 함부로 빼앗지 않고, 만약 그것을 힘과 폭력으로 빼앗았을 때 그것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을 말한다. 그런데 맹자에 따르면 그 부끄러워하는 수오지심의 義는 바로 어린 시절부터 자신과 자기 욕망만이 다가 아니라 나보다 먼저 온 형과 언니가 있고, 그래서 그 윗사람인 형과 언니는 내가 함부로 할 수 없는 권위이며, 그것을 존중하고 공경하는 일을 습관적으로 체화하면서 얻어진다고 밝힌다(『맹자』 「진심」 上 15). 이것은 바로 인간이 자신을 한 ‘조건 지어진 존재(conditioned being)’로 파악하는 일이다. 자기가 힘과 능력이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되고, 자아의 지금이 자기 홀로의 힘과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더 오래된 존재, 더 먼저의 세대, 더 근원적인 토대가 있었으므로 가능해진 것으로 받아들여 스스로에게 한계를 주는 능력이 한 공동체의 삶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강력히 요청된다. 오늘 21세기 인류가 맞닥뜨리고 있는 가장 큰 위기가 인간 자아의 무한대 확장이 불러오는 자아 중심주의와 세계소외라고 했을 때 바로 이러한 경장(敬長)으로서의 정의는 그 자아가 한계를 가진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거기서 자기보다 먼저 온 세대의 수고와 희생,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오래된 것(長)에는 인간보다 먼저 이 지구 집의 주인이었던 다른 생명체와 자연의 토대 됨과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될 수 있으므로 현재 인류의 크나큰 생태위기 상황에서도 적실하게 적용될 수 있다. 맹자는 만약 그렇지 않고 오늘 우리 시대처럼 능력주의에 골몰할 때 극단적으로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 일어난다고 경고했는데, 우리 시대에 대한 경고로도 낯설지 않고, 거기서 더 나아가서 일찍이 한 철학자가 지시한 대로 더 큰 능력을 얻기 위해서 자신 능력의 극대화와 거기서 얻어지는 실리에 대한 무한 추구로 결국 스스로를 잡아먹는 극도의 피로 사회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맹자의 이러한 주장과 가르침은 어쩌면 그의 스승 공자의 인격을 지시하는 말대로 ‘안 되는 일인지 알면서도 이루고자 하는 것(知其不可而爲之者)’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맹자 이후 오늘 2천여 년이 훌쩍 지나갔지만, 여전히 우리 삶에서 능력 평등주의가 판치고 있고, 그로 인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것과 같은 현실이 가시지 않고 있다. 이번 대선에서 차기 대통령으로 선출된 당선인은 얼마 전 선거 운동 시절 “민주화 운동 좀 했다고 그게 뭐 소용 있습니까?”라는 말을 했고, 그 이전에 일제 강점 시대나 전두환 시기에 대한 발언에서 매우 우려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한, 주 52시간제 폐지와 최저임금제 폐지를 당선 후 제일 먼저 추진하겠다고 한다. 매우 우려되는 지점이다. 물론 동아시아 유교 전통의 나라에서 그 전통이나 나이, 오래된 것의 권위가 항상 다시 오도되어서 폭력적으로 적용되는 패착이 우려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의 긴박한 상황은 다시 경장으로서의 義가 오래된 미래로서 긴급히 요청되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한나 아렌트와 같은 서구 정치사상가도 “전통, 종교, 권위”의 세 가지를 인간 공동체 삶이 지속하고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기반과 조건이라고 강조했는데, 지금까지 살펴본 경장으로서의 정의 의식과 잘 상통한다(한나 아렌트, 『과거와 미래』, 서유경 옮김, 2005년, 13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