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혁신의 동력이 되는 묵상과 관상 | 신앙세계
자유와 혁신의 동력이 되는 묵상과 관상
노영상 호남신학대학교 총장
묵상은 영어로 ‘meditation’으로 표현되는데, 묵상으로 번역되기도 하고 명상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명상이라고 하면 불교 등에서의 초월적 명상과 구별이 안 되는 점이 있어, 기독교에서는 이 단어를 묵상이라고 많이 번역한다. 기독교에서 묵상은 보통 말씀묵상을 말한다. 주님의 성경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중에 그 말씀 대한 묵상의 시간을 갖는 것을 말씀 묵상이라고 하는데, 이런 시간을 보통 우리는 QT(Quite Time)라고 부른다. QT는 우리말로 직역하면 조용한 시간 정도이겠으나,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을 의미하는 바, ‘경건의 시간’으로 자주 번역된다.
말씀 묵상을 의미하는 묵상은 관상과 구별되어 사용되는 단어다. 관상은 영어로 ‘contemplation’이라고 번역되는데, 이 단어는 집중해서 어떤 것을 보는 것을 말한다. 이 단어는 ‘응시’를 뜻하는 말로 보통 ‘봄’이라고도 많이 번역된다. 우리는 기독교의 묵상을 말할 때 관상과 연결하여 함께 설명하는 것이 좋다. 묵상이란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향한 상향적 방향의 영성 훈련이다, 반면 관상은 한자어로 볼 觀, 생각 想을 쓰는데, 한자어로 관조라는 말과 비슷한 개념으로 보면 된다. ‘관조’의 사전적 의미는 “조용한 마음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하거나 비추어 보는 것”을 말하는 바, 위에서 사물들을 내려다보는 하향적 조망을 말한다. 묵상은 영성신학에서 수덕적 훈련의 단계이며, 관상은 일종의 신비적 훈련의 단계로 구분되기도 한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으며 상향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다. 기독교의 하나님 경험은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성경과 성령을 매개로 하는 것이다. 이런 묵상으로서의 수덕적 훈련이 쌓이게 되면, 우리는 다음 단계의 관상 훈련으로 나아가게 된다. 관상이란 묵상훈련의 결과 주어지는 것으로, 말씀 묵상을 많이 하다보면 어느 순간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 되어, 하나님의 시야에서 나와 사물을 조망하게 되는 단계에 이르게 되는데, 이 단계가 관상이다. 영성훈련으로서의 묵상의 단계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며, 관상의 단계에서는 하나님과 하나 되어 나와 사물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말씀을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우리의 영성이 깊어지게 되면, 우리의 눈에 우리 주변의 인간과 사물이 더욱 또렷이 들어오게 된다. 산은 산이며, 물은 물이고, 채송화는 채송화이고, 진달래는 진달래로 우리 눈에 밝히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예전에는 희미하게 눈에 들어오던 것이 이젠 잘 맞는 안경을 쓰고 보는 것 같이 분명한 영상으로 사물들이 눈앞에 놓이게 된다. 은혜를 받아 사물을 보게 되면 사물들이 그렇게 아름답고 사랑스러울 수 없다. 뜰에 피어 있는 민들레도 이전에 보는 민들레가 아니다. 나뭇가지에 잠시 앉아 있다 날아가는 뭇새에서도 천상의 미를 느끼게 된다. 은혜를 받고 관상적 시야에서 사물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게 된다.
김진홍 목사님은 그의 책에서 성동교에서의 경험을 전하고 있다. 죽어가는 환자를 업고 이 병원 저 병원 다녔으나, 치료비를 마련하지 못한 관계로 환자를 입원시키지 못하고 그를 들쳐업고 성동교를 건너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침통한 마음으로 성동교를 건넜는데, 다리 중간 쯤에서 뒤에 업혀있던 환자가 축 늘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환자가 삶을 지탱하지 못하고 그의 등 뒤에서 죽음을 맞게 된 것이다. 김 목사님은 그 환자의 얼굴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환자의 얼굴을 통하여 그리스도와의 하나 됨을 체험한 것이다.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는 환자에게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체험하게 되었다. 우리는 관상을 통해 유한하고 일그러져 있는 사물들에서 신의 파편을 바라보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성경묵상과 관상의 단계를 통해 사물들의 본질을 관통하는 앎을 깨우치게 된다. 사물의 껍데기가 아니라 사물의 근본 모습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이웃이 이웃으로 보이고, 동물들이 동물들로 보이며, 들판의 식물들이 진정한 식물들의 모습으로 보이게 하는 힘이 묵상과 관상의 힘이다. 우리는 매번 사람들을 만나지만 언제나 가면을 쓰고 만나는 피상적인 만남에 그치곤 한다. 그러나 깊은 묵상과 관상의 단계에 이르러 우리는 이웃의 본심을 알게 되며, 그들의 근원적 모습과 고통 그리고 유한성을 직시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진정한 자유로움을 갖지 못하며, 진정으로 스스로와 환경을 혁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물의 진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진정으로 느끼게 되는 순간, 우리를 감싸고 있는 껍데기 인간이 우리의 진정된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본질을 깨닫고 우리는 진정한 자신을 받아들이게 되며, 나의 추한 모든 모습도 용납하게 됨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찾게 되는 것이다.
진정한 바라봄과 앎이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어 여타의 사물들과 바른 관계를 맺게 하며, 비본질적인 것에 침잠해 있는 우리의 삶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회개와 혁신의 삶을 살게 한다. 말씀 묵상을 통한 나 자신과 다른 존재들에 대한 성찰을 통해 우리는 보다 또렷한 영상을 얻게 되고, 그를 통한 바른 결단이 가능하게 되어 자유의 삶을 영위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주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 및 사물들에 대한 바른 지식을 얻게 되며, 그로 인해 자유의 삶 가운데에서 매일 매일 혁신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시편 119편 105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우리는 길과 진리요 생명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참 밝음의 삶을 살게 됨을 확신한다(요 14:6). 우리가 이웃과 모든 피조물들을 바르게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의 참 모습을 깨우치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
노영상.
현 호남신학대학교 총장, 한국기독교학회 부회장, 명성교회 협동목사.
저서『하나님의 세븐 게이트』, 『기독교 사회윤리 방법론에 대한 해석학적 고찰』,
『기독교 생명윤리 개론』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