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09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기다림 < 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금강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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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기다림
기자명 금강일보   입력 2021.02.08 


한남대 명예교수


나는 언제 처음으로 왜 무엇을 어떻게 기다리기 시작하였을까? 지금은 또 무엇을 왜 기다릴까?

내 생일이라고 어른들이 말씀하실 때, 그날이 되면 어떤 밥을 기다렸을까? 농촌에서 어머니와 한 집에 살았기에, 언제나 어머니는 집에 계셨기 때문에 나는 어려서 어머니를 기다린 적은 없었던 듯하다. 그러나 강요된 아버지에 대한 기다림, 어른들은 어린 나에게 ‘애비 언제 오나 머리 긁어보라’고 하셨다. 그러면 내 앙증맞은 손으로 내 머리 여기저기를 긁었다. 뒷꼭지 쪽을 긁으면 아직 아버지가 올 때가 먼 것이고, 이마에 가까운 머리를 긁으면 곧 오실 때가 되었다고 어른들은 뻔한 헛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좋아하셨다. 그렇게 나는 객지에 나가 사는 아버지를 기다린 것일까? 명절 때가 되면 막연하게 나는 버스 정류장에 나가서 그를 늘 막차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꽉 찬 버스에서 마지막에 내리는 손님을 떨구고 떠나는 버스를 한참 바라보고 맥없이 집으로 돌아올 때, 언제나 어머니를 생각했다. 어른들 앞에 명절이라고 일찍 나타나지 않는 남편이 부끄러워 그냥 죄송해 할 그 맘이 내 맘에 아리게 솟아났다.

장날이 되면 늦은 저녁나절이나 초저녁에 동구밖까지 나가 할아버지를 기다렸다.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어둠은 짙어졌다. 어둠 속에 히끗히끗 두루마기자락 날리는 듯 느껴져 반갑게 그의 발자국 소리 들리는가 귀까지 쫑긋하고 기다렸다. 오시지 않는 그를 찾아 시장 가까이 살던 그의 친구 양약국 댁까지 가면서 할아버지를 기다렸다. 무엇을 기대하면서 기다린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집에 떨어질 날벼락이 걱정되어 억지로 기다린 것일까?

그러기 전 나이가 들어 학교에 가게 됐을 때 막연히 학교 가는 날을 기다렸을까? 말로만 듣던 선생님들이 어떤 분인가를 기다렸을까? 함께 놀고 공부하게 될 다른 동네에서 오는 동무들을 기다렸을까? 새로운 학기가 되거나 학년이 되어 나누어 주던 책이 어떻게 생겼고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기다렸을까? 시험이라는 것을 보기 시작하면서 오늘 보게 될 시험문제는 어떻게 나올까 기다렸을까? 중학교에 가고 고등학교나 대학에 들어가기 위하여 시험을 본 다음에 어떤 소식을 나는 기다렸을까?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쓰기 시작한 편지 때문에 빨간 자전거를 타고 빨간 가방을 메고 오는 우편배달부 아저씨를 기다릴 때는 벌써 꽤 생각이 컸을 때다. 아니지, 우편배달부 아저씨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혹시 그 양반이 나에게 오는 편지를 가지고 오지나 않을까 기다리지 않았을까? 언젠가부터 편지를 즐겨 쓰던 나는 나에게 오는 많은 편지를 기다릴 때, 그냥 편지를 기다렸을까? 그 속 귀한 내용을 기다렸을까? 그 중 어느 한 사람의 편지를 특별히 골라서 기다렸을까? 혹시 맘에 두었으나 한 번도 내 맘을 나타내보이지 못한 그녀가 내 맘을 알고 편지를 보내지는 않았을까 무망하게 기다린 것은 아니었을까? 군대에 가 있는 동안 간절히 바라던 그녀가 혹시 면회를 오지는 않을까 마냥 떨리는 맘으로 기다리지는 않았을까?


 
분명하고 확연한 맘으로 기다려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도부장수라고 하는 보따리장사들이 우리 집에 와서 자고 가는 일이었다. 낯선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우리 집에서 자게 되면 이것저것 재미나는 일을 이야기하고 갔다. 그러할 때는 나는 참 재미가 있었고 기분이 좋았다. 그들이 여기저기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말할 때 나에게는 매우 특이한 소식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을 기다리면서, 그들이 물고 올 괴상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기다렸던가?

그러다가 도서관에서 이런저런 책들을 살피고 빌릴 때, 이런 저런 탁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갈 때, 그 속에서 무엇인가 놀랍고 깊은 깜짝 깨달음이 오기를 기다렸을까? 우리들의 선생님들이 그렇게 했다면 무딘 나에게도 깨닫는 날이 있을까 기다렸을까? 무망하다고 포기했을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애를 쓰고 고생을 했는데 왜 이 사회는 이렇게 불평등이 가득한 것일까? 있고 없고를 서로 고르게 나누어 살 수 있는 세상이 될 것이라는 것은 쓸데없는 기다림일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이야기와 화해로운 말들과 생각들을 펼쳤고 가르쳤는데도 왜 들리느니 전쟁과 다툼의 소리일까? 그런 것들 속에서 깔끔한 화평한 소리 하나 기다리는 것은 허망한 일일까?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것은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한 듯하다. 있다가 없고 없다가도 있게 되는, 바닷가 물결이 높고 낮게 번갈아 출렁이듯이, 있고 없고 기쁘고 슬프고 불행하다고 느끼고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것들이 하나로 움직인다는 것을 깨닫고 덤덤히 살 수 있는 때가 올 것이라고 믿는 것은 무망한 기다림일까?

가만히 생각하니 내 삶은 기다림이었던 듯하다. 무엇을 기다린다는 것도 없이 그냥 막연히 기다리는 것이 내 삶이었던가? 내 삶만이 아니라 온통 모든 삶이 다 기다림이지 않던가? 어려서 앞으로 살 날이 창창하게 멀리까지 펼쳐질 사람만 아니라, 앞날이 별로 많지 않을 것이라고 보이는 이들에게도 삶은 기다림이지 않을까? 일단 사람이라면,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그냥 기다리는 것만이 있는 것이 아닐까? 맘이 텅 비어있어도 무엇인가로 가득해도 끝없는 기다림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는 오늘 무엇을 기다리나? 내가 속한 퀘이커에서는 모든 사람에게는 ‘내면의 빛’이 있다고 말한다. 그 빛이 가리워지지 않고 살짝 빛나기를 기다린다. 빛나는 그 빛들이 다른 빛나는 빛들과 만나 빛의 동무들의 잔치가 일기를 기다린다. 나도 내 속에 있는 빛이 빛나기를 기다리고, 이웃 친구 속에 있는 그 빛이 빛나기를 기다린다. 그 빛들이 함께 빛나기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