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명상’과 ‘리얼 유토피아(Real Utopias)’ < 삶의 이정표 < 지혜와 영성 < 기사본문 - IPKU
‘사회적 명상’과 ‘리얼 유토피아(Real Utopias)’
기자명 이남곡 인문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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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will Gira Mude
나의 첫 일과는 박석 교수가 제작한 오디오 파일을 들으며 하는 ‘몸바라보기 명상’입니다. 몸의 신비(神祕)에 대한 경외(敬畏)와 몸의 모든 부분에 대한 깊은 감사를 느낍니다. 명상의 끝부분에 몸 전체를 바라보는 순서가 있습니다. 이때 이끎 말이 다음과 같습니다.
“내 몸에 쌓인 모든 경험을 포용하는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내 몸이 삶의 꽃을 활짝 피우는 좋은 밭이 됩니다.”
몸은 신비한 유기체입니다. 내 몸에는 모든 경험이 녹아 무언가의 흔적으로 녹아 있습니다. 모든 감정이 어딘가에 기억되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까마득한 옛날 어린 시절이나 중고등학교 때의 고통스러운 기억이나 부끄러운 기억들이 떠오릅니다.
이 모든 경험을 ‘포용’하는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그 아프고 부끄럽고 지우고 싶은 감정들이 녹아내립니다. 그래서 거름이 됩니다. 비로소 삶의 꽃을 활짝 피우는 밭이 됩니다. 나는 이미 늙었지만,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이라도 얼마든지 삶의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이 ‘몸’을 더 크고 넓은 유기체로 바꿔서 생각해 봅니다. ‘나라’일 수도 있고, ‘민족’일 수도 있고, ‘사회’일 수도 있습니다.
“그 안에 쌓인 모든 경험 즉 역사를 포용하는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밝은 미래의 꽃을 활짝 피우는 좋은 밭(사회, 민족, 국가)이 됩니다.”
이렇게 확대해서 나라와 사회를 바라보는 것을 편의상 ‘사회적 명상’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복합적 위기 속에서 우리에게는 '사회적 명상'이 절실합니다. 심리적 내전에 가까울 정도로 퇴행적인 정치적 혼돈의 틈새에서 ‘새로운’ 정치와 정당을 추진하는 노력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는 그 ‘새로움’을 지지합니다.
그 새로움의 중심에 ‘사회적 명상’이 뿌리를 내리는 것이야말로 나라와 사회를 한 단계 질적으로 성숙하게 하는 근본 동력이 될 것입니다. 이 ‘사회적 명상’에 대하여 우리나라 현대불교를 대표하는 선승(禪僧) 성철 스님에 의해 널리 알려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화두를 통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의식과 본질』의 저자인 이즈쓰 도시히코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걸출한 선사들이 지금까지 전하는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분절Ⅰ→ 무분절→ 분절Ⅱ’의 전체 구조를 적확하고 명쾌하게 제시한 것으로는 길주吉州 청원유신靑原惟信의 ‘산은 산임을 본다→ 산은 산이 아님을 본다→ 산은 다만 산임을 본다’보다 탁월한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존재의 궁극적 무분절태란 보통 선(禪)수행자가 무(無)라든지 공(空)이라든지 하는 이름으로 의미하는 의식·존재의 제로 포인트이고 나아가 그것이 동시에 의식과 존재의 두 방향으로 분기되어 전개하는 창조적 활동의 출발점이다.
이 의미에서의 무(無)에는 유(有), 즉 존재의 끝없는 창조적 에너지가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이 존재 에너지가 온전히 그대로 무(無)로부터 발산하여 사물을 드러나게 하는 그 모습을 분절 Ⅱ의 의식은 알아차린다. 즉 이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에서는 이른바 현상계나 경험적 세계의 모든 사물 하나하나가 제각각 무분절자의 전체를 들어서 자기 분절하는 것이다. 무(無)의 전체가 그대로 산이 되고 물이 된다. 즉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것이다’
분절 Ⅱ의 존재 차원에서는 모든 분절의 하나하나가 그 어느 것을 취해서 보아도 반드시 무분절자의 전체 현현이며 부분적 · 국소적 현현은 아니다.
분절Ⅰ의 의식으로부터 분절 Ⅱ의 의식으로 나아가는 데는 이른바 ‘무분절에 대한 깨달음’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깨달음이 예전에는 탁월한 사람들이 각고의 수행을 통해 오직 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라면, 21세기에서 보면 현대 물리학을 비롯한 과학의 발전으로 보통 사람들이 어렵지 않게 이런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 장의 종이, 한 벌의 옷 속에서 우주를 본다’는 표현은 더 이상 종교계의 화두에 그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사회적 명상은 ‘사회’라는 유기체를 깊게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사회의 구성요소인 자본가와 노동자를 위에 언급한 ‘산’과 ‘물’에 대입해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분절Ⅰ) 자본가는 자본가요, 노동자는 노동자다.
(무분절) 자본가는 자본가가 아니고 노동자는 노동자가 아니다.
(분절 Ⅱ) ‘다시’ 자본가는 자본가요, 노동자는 노동자다.
사회적 명상은 무분절의 세계를 깊이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현실의 전선(戰線)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그 운동 동력이나 바라보는 방향은 바뀔 것입니다. ‘증오와 분노’ 대신에 깊은 ‘사랑과 연대’가 동력이 되어, 대립과 갈등의 관계로부터 상호보완과 협동의 관계로 점차 바뀌어 갈 것이며, 마침내 새로운 질의 사회체제로 이행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혁명이고 개벽입니다.
추상적인 관념의 세계나 사물에 대한 인식에서 무분절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지만, ‘사회’나 ‘사건’을 대상으로 할 때는 한층 어렵습니다. 개개인의 구체적인 이해관계와 직결되어 있고, ‘나’라고 하는 분절Ⅰ의 주체에 대한 집착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의식의 진화가 사회적 명상으로 확장되지 않고서는 개인도 결코 진정한 자유와 행복에 이르지 못하고 사회도 지금의 복합적 위기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사회적 명상을 통하여 진보적인 사회 정치 운동도 비로소 ‘고통과 저항의 연대’로부터 ‘희망과 창조의 연대’로 도약하는 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요즘 여러 위기들과 극심한 정치적 혼돈이라는 조건 속에서 역사 논쟁은 피할 수 없는 메뉴로 등장합니다. 이 논쟁은 역사를 전공하는 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전문가인 역사학자들의 관점이 자신의 사관(史觀)에 따른 논리적 일관성 때문에 오히려 대단히 좁게 고착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나는 역사를 학문으로 공부해 본 적이 별로 없는 사람이지만, 내가 접한 정보를 가지고도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여러 차례 변해 왔습니다. 역사에 대한 정보가 바뀐 것이 아니라, 사람과 세상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사건에 대한 여러 정보들 가운데 어떤 정보를 선택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입니다.
‘역사는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은 내 인생을 통해서도 여러 차례 실감해 온 바가 있습니다. 나는 여기에 하나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역사는 현재와의 대화이며, 동시에 미래와의 대화입니다. 어떤 미래를 바라보는 것인가에 의해 역사는 살아 숨 쉬는 생명력을 얻게 됩니다.
논어 옹야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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齊一變 至於魯, 魯一變 至於道
제나라가 일변(一變)하면 노나라에 이를 것이요,
노나라가 일변(一變)하면
도(道)를 행하는 나라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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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나라의 정치가 훌륭했던 것도 아닙니다. 노나라의 정치에 실망하여 일종의 망명 유랑생활을 했던 공자였습니다. 또한 당시의 노나라는 제나라보다 국력이 약한 나라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노나라에 대한 긍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비교의 관점이 다른 것입니다. 그 긍지는 이상 세계를 실현할 수 있는 근원적 힘인 문화적 전통을 노나라가 계승하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것은 노나라가 일변하면 ‘도(道)를 행하는 나라’가 될 수 있다는 전망으로 뒷받침되고 있습니다. 일변(一變)은 양적인 변화가 축적되어 질(質)이 변하는 것입니다. 떼이아르 사르땡 신부의 ‘오메가 포인트’를 연상하게 됩니다.
얼마 전 읽은 책이 에릭 올린 라이트의 ‘리얼 유토피아’인데, 시대와 체제의 벽을 넘어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가슴 속에 ‘유토피아’를 품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논리적 일관성’이 갖는 위험에 대해서 늘 이야기하는 편이지만, 가져도 좋은 일관성이라면 가슴 속에 ‘유토피아’를 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가 생명력을 갖는 것은 이 ‘유토피아’를 ‘리얼’로 만들려는 일관된 노력과 실천으로 이어질 때라고 생각합니다. 세계사나 나라(國)나 종족의 역사는 물론 개인사(個人史)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자기 개인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 또한 현재의 자신을 어떻게 보는가와 어떤 자신의 미래상(未來像)을 그리는가에 따라 바뀝니다. 자신이 도달하고 싶은 목표를 기왕이면 높게 갖는 것이 좋습니다.
자신의 자유와 행복을 숭고(崇高)한 가치와 연결하는 것이야말로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낙관을 유지하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를 바라보는 명상이 내 삶의 꽃을 활짝 피우는 과정이라면 ‘사회적 명상’은 유토피아를 리얼로 만드는 과정입니다.
청년들이여, 가슴에 유토피아를 품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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