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행복과 진정한 사회발전에 ‘명상’ 이바지해야”분류안됨
입력 2013.09.05 17:44
기자명정리=이성수 기자
지상중계 / 명상 붐 어떻게 볼 것인가
마음이 건강해지면 몸도 건강해
신명을 영성 에너지로 연결해야
개인 이해하는 바탕 위에 ‘치유’
명상은 내면의 탐구를 통해 ‘진정한 행복’을 찾는 수행이다. 사진은 미얀마 마하시선원에서 명상수행하는 스님.불교신문 자료사진
사회적으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명상을 주제로 한 학술 심포지엄이 열렸다. 만해사상실천선양회가 주최하고 계간 〈불교평론〉이 주관해 지난 6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실에서 ‘명상 붐 어떻게 볼 것인가’를 주제로 개최된 심포지엄이 바로 그것이다. 본지는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장현갑 영남대 명예교수의 ‘현대인은 왜 명상에 열광하는가’라는 주제의 기조발제를 비롯한 발표문을 요약해 소개한다.
왜 현대인은 명상에
열광하고 있는가?
장현갑(영남대 명예교수)
명상은 이제 의학과 심리학의 뜨거운 연구주제와 심신치료 분야의 중요 치료방법의 하나로 대두되고 있다. 최첨단의 과학시대에, 최고수준의 의료혜택을 받고 있는 현대인들이 왜 이처럼 고대불교에서 기원한 명상에 열광하고 있을까? 먼저 현대사회에 만연하는 각종 심신 장애가 정신적 괴로움, 다시 말해 심리적 스트레스가 빚어낸 질병이란 것이고, 다음으로 스트레스 관련 질병의 치유에 명상이 갖는 효과를 뇌 과학적 심리학적 효과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마음 수행의 목적이 ‘삶의 괴로움을 넘어 안락한 세계로 가는데(離苦得樂)’ 있으므로 스트레스에 찌든 현대인들에게 명상수행은 멋진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요즘 병원을 찾는 많은 환자들이 스트레스가 직.간접 원인이 되어 병원을 찾게 된 환자들이므로 약물로서는 그 병의 근본뿌리를 뽑을 수 없다. 따라서 정기적인 마음수행은 이들의 질병을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어 각광을 받고 있다.
명상을 통해 치유가 일어나는 것을 몇 가지 심리적 관점의 변화로 볼 수 있다. 첫째는 무아(無我)라는 관점으로의 변화라는 입장에서 고려해볼 수 있다. 둘째, 명상을 통해 주의집중능력이 커지면 치유능력 또한 커진다. 셋째로 자신의 반응에 대한 탐지력의 증가가 치유의 힘이 될 수도 있다. 넷째로 명상은 비판단적 태도의 함양과 수용성의 증가를 통해 치유의 능력을 키운다.
행복이란 어떤 객관적 지표에 이르렀을 때 얻는게 아니라 주관적으로 느끼는 만족감의 정도이다. 몸과 마음은 하나이다. 마음이 건강해지면 몸도 건강해진다. 규칙적인 운동과 명상, 충분한 수면과 건강한 식습관, 즐거운 마음가짐이 행복으로 가는 고속도로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되고 치열한 경쟁이 가속화되는 현대사회에서 명상이 주목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명상 붐의 국내외적 현황과 추이
오원칠 (한산사 간화선 수행학교장)
선불교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한국불교는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관행에 머물러 있다. 또한 새로 유입되고 있는 명상법들은 서구에서 겪은 혼란과 같이 사람이나 수행 방법에만 의지해 부작용이 있다.
명상 붐을 잘 이용해 발전적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첫째, 종교성을 최대한 배제하고, 생활에 가장 가깝고 일상에서 활용 가능한 명상법을 도입해야 한다. 둘째, 명상이 가지고 있는 추상적이고 신비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삶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현실적이고 과학적인 대안들과 사회통합에 기여 할 수 있는 공동선적인 방법론들이 필요하다. 셋째, K-POP과 월드컵으로 대변되는 한국인들의 신명의 에너지를 영성의 에너지와 연결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넷째, 사회전체의 소통과 통합을 추구하고 자비로 대변되는 사회적 공감 능력을 통해 한국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는 것으로 명상을 활용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명상을 힐링이나, 트렌드, 사업화시킴으로써 본래 명상의 목적과 의미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명상이 단순한 개인의 치유와 행복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나아가 전 인류에 기여할 수 있는 역할을 했을 때 개인의 행복과 더불어 진정한 사회 발전에 이바지 할 수 있다.
명상은 무엇을 치유하는가
전현수(전현수정신신경과의원장)
명상으로 무엇을 치료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할 때 두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명상이 무엇인가 하는 점과 명상으로 치료할 수 있는 정신적인 문제의 특성이다.
명상은 여러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고 방법도 명상을 하는 배경에 따라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공통점이 있다. 현재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명상의 대상으로 정한 대상에 집중하는 점에서는 모든 명상이 똑같다.
명상은 현재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기 때문에 대상이 몸과 마음인 경우 관찰을 통해 몸과 마음의 속성을 알 수 있다. 몸과 마음의 속성을 앎으로써 몸과 마음의 속성에 맞게 살아갈 수 있다. 명상을 통해 생각이 줄어든다. 명상을 통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면 다시 말해 몸과 마음이 어떤 속성을 가졌는지 알고 그에 맞게 하면 몸과 마음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특히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알고 그에 맞게 마음을 쓰면 마음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개인마다 경험하는 것은 다를 수 있다. 명상을 개인이 가진 문제를 해결하는데 효과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개인을 잘 이해하는 바탕 위에서 명상을 치유에 적용하는 경험을 통해 배워나가야 할 것이다.
명상은 십악을 극복하게 하는가?
허우성(경희대 철학과 교수)
명상의 일차적인 목표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증오나 분노 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나는 경로를 차단하는 것이다. 자기 내면과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어찌 불교의 명상뿐이겠는가? 다른 종교와 철학 전통에도 나름의 방법이 있을 것이고, 기도 역시 그 중 하나이다. 하지만 서구 학자들도 인정했듯이, 명상은 자기 성찰에 상당히 효과적인 방법이고, 불교도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야다.
21세기 명상은 진화했다. 명상의 대상은 지구의 고통이다. 긴장의 이완, 부정적 감정의 제거, 자비심의 배양을 통해 개인을 개조하고, 전쟁과 테러, 환경파괴로부터 인류를 지켜야 한다. 그렇다면 지난 시대의 선어록과 화두를 포기해야 할까? 그럴 필요는 없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현 세계와의 접촉을 유지하는 것은 필수이다. 고통은 현실 안에 있지 어록 안에 있지 않다. 세계의 고통을 알면 알수록 마음은 더욱 간절해지는 법이다.
탐욕과 경쟁은 주변 환경을 황폐하게 했다. 현대문명 자체를 위협한다. 지구 윤리를 제시하지 못하는 명상은 무책임하고 이기적이고 냉담한 것이라고 했다. 한국의 승단이 현대문명의 종말까지를 명상하고 행동할 때, 시민들은 존경할 것이다. 자신들의 문제이기도 하니까.
명상은 사회적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가?
박병기(한국교원대학교)
사마타와 위빠사나로 대표되는 불교 명상은 깨침을 통한 열반을 목적으로 삼아 전개되는 수행과정에서 지계행과 지혜행이라는 다른 두 축과 연결되어 있는 삼학의 한 축을 이룬다는 점에서 다른 명상과 차별화된다. 차별성을 전제하면 불교 명상은 개인적 차원의 고통뿐 아니라 연기적으로 이어져 있는 사회적 고통의 해소를 목표로 삼을 수밖에 없다. 만약 그러한 자각을 갖지 못한 채 명상에 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무명(無明)의 굴레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연기적 독존(獨尊)이라는 불교적 삶의 지향을 찾아가는 과정으로서의 불교 명상이 전개될 수 있다면, 그것은 개인과 사회 또는 공동체 사이의 연기성에 충분히 유념하면서도 개인 또는 공동체 어느 것으로도 온전히 환원되지 않고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확보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 가능성의 범위 안에는 끝없는 탐욕의 확산과 그 안에서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피로와 허기를 근원적으로 치유할 수 있는 ‘진정한 대안으로서의 불교 명상’의 가능성이 포함되어 있다.
불교 수행과 명상,
접점은 어디인가
박재현(동명대 불교문화학과 교수)
명상을 통해 심리적 고통이나 병리상태가 치유되고 행복을 느낄 수 있으면 좋은 일이다. 다만, 명상이 치유라면 필연적으로 치유자와 피치유자 사이에 주종관계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주종관계는 지속될수록 강화되고, 주종관계가 강화될수록 피치유자는 종속되고 나약해진다. 이것이 모든 치료행위가 내포하고 있는 피할 수 없는 속성이다.
치유와 행복이 목적이 되기 위해서는 현재의 상황이 병들어 있고 불행하다는 인식이 전제돼야 한다. 생사윤회의 고통 속에 있는 자신이 안쓰러워 그 고리에서 벗어나 열반의 언덕으로 가려고 몸부림치는 것은 박수쳐줄 일이다. 돈오(頓悟)의 인간관에서 중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남김없이 다 부처이니 목적태로 설정할 것이 따로 없고, 목적이 없으니 그것을 얻거나 이르기 위해 애쓸 이유도 없다.
치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명상의 논리와, 일체의 추구하는 행위는 모두 미망을 양산할 뿐이라고 보는 선의 논리 사이를 관통하여 흐르는 강은 깊고 멀어 보인다. 선 수행과 명상의 접점은 희미해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접점이 있어도 혹은 없어도 문제될 것은 없다. 문제의 심각성은 접점이 있거나 없는 것이 아니라, 희미하다는 사실이다.
명상붐과 불교계의 대응
인경스님(동방대학원대학교 교수)
‘자극과 대응이라는 관점에서 논쟁을 중심으로 명상의 유입기(70년대), 대중화(90년대), 토착화(2010년대)라는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유입기’에는 인도명상, 요가명상, 초월명상의 유입과 돈점논쟁의 사회적 의미를, ‘대중화’ 시기에는 요가와 위빠사나의 확산을, 위빠사나와 간화선의 논쟁을 언급했다. ‘토착화’ 시기에는 2차에 걸친 사띠논쟁과 상담 심리치료에의 활용과 더불어 전문화 과정을 기술했다.
과제를 언급하며 결론을 대신한다. 첫째, 방법론의 문제이다. 기술방식은 개인적 경험에 기초한 내러티브적인 방식을 취했다. 전통적인 문헌연구는 연구자와 연구의 대상(문헌)이 엄격하게 분리되고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 둘째, 명상붐과 기존 종교와의 관계이다. 명상에 대한 대중의 열정은 시대적인 스트레스 문제와 아픔에 대한 치유적인 대안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 문제는 종교에 대한 효용성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셋째, 인간의 본성, 본질, 성품의 문제이다. 사회적인 현상으로서 힐링 문화는 새로운 사조로서 중요한 흐름이지만, 힐링이 마음 산업이라면서 산업화되고 값싼 기분전환의 수준으로 떨어진다면, 현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명상도 마찬가지이다. 명상이 현실적인 문제와 연결될 때는 전문화 되어야 하고, 본질적으로는 근본적인 본성, 깨달음과 연결되어야 생명력을 유지해갈 것이다.
[불교신문2943호/2013년9월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