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신앙이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는가?" 2
톨스토이의 작품을 섭렵한 지 얼마 안 돼서, 역시 러시아 출신인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를
알게 됐다. 러시아 작가들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뛰어났던 이들은 역사상 같은 시기에 생존
했고 활동했다. 둘은 무릎을 쳐가며 상대방의 작품을 탐독하면서도 한 번도 직접 대면하지는
못했다. 마치 공전하는 행성들처럼 서로의 관심을 끌고 때로는 강렬한 영향을 주면서 똑같은
도시들을 순회했지만, 그들의 공전 궤도는 결코 겹치는 법이 없었다. 아마 톨스토이와 도스
토예프스키가 모든 면에서 서로 상반되는 작가였기 때문이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톨스토이가 밝고 환한 소설들을 썼다면 도스토예프스키는 관조적이고 내면적인 작품을 내놓
았다. 톨스토이가 자기 수양을 위해서 수도사적인 일과를 지켰던 반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애정 행각과 술과 도박으로 건강과 재산을 탕진하기를 되풀이했다. 톨스토이는 작업 일정을
지키는 게 몸에 밴 사람이었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도박 빚을 갚기 위해 밤을 새워가며
엄청난 속도로 소설을 써댔다. 톨스토이의 집에는 수천을 헤아리는 순례자들이 지혜를 구
하기 위해 몰려들었지만, 언제나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있는 도스토예프스키에게 가서 지식
을 얻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회적으로 도스토예프스키는 미숙아였다. 재산을 얼마나 형편없이 관리했던지, 가끔은
완성된 소설을 출판사에 보내고 싶어도 우편 요금을 치를 돈이 없을 지경이었다. 더구나
간질로 고통을 받고 있던 터라, 간혹 극심한 발작이 일어나면 그후로 며칠 동안은 자포자기
상태에서 보내곤 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삶 속에서는 허다한 실수를 저질렀지만, 예술 분야에서만큼은 놀라운
위업을 이루었다. 그의 소설은 톨스토이에 필적하는 설득력을 갖춘 채 그리스도 복음의
핵심인 은혜와 용서를 전달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톨스토이가 드러낸 처절한 실패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생애 초기에 실제로 부활을 경험했다. 그는 짜르 니콜라이 1세가 반역
단체로 규정한 조직에 소속되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니콜라이 1세는 구속된 청년들의
죄상이 대단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일단 말뿐인 이들 급진주의자들을 모의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판결을 기다리며 여덟 달째 감옥에 갇혀 있던 어느날, 갑자기 도스토예프스키
일행은 감옥에서 끌려나와 광장으로 가는 마차에 태워졌다. 크리스마스를 사흘 앞둔 지독
하게 추운 아침이었다. 광장에는 사형을 집행할 소총 분대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집행관
들이 죄인들의 모자를 벗기고 옷도 하얀 색 수의로 갈아 입혔으며 손을 뒤로 돌려 단단히
결박했다. 그들은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구경꾼들 앞에 일렬로 섰다. 때마침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신부가 성경 말씀을 낭독하고 십자가를 내밀어서 죄인들이 마지막
입맞춤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어서 먼저 사형이 집행될 죄수 세 명이 불려나가 기둥에
묶였다. 이윽고 "사격 준비!"라는 구령이 떨어지고 북소리가 우르르 울려퍼졌다. 병사들은
총을 어깨에 대고 방아쇠 당길 준비를 했다. 그런데 바로 그 마지막 순간, 전령이 미리
준비해둔 짜르의 조서를 들고 광장으로 바람처럼 달려들어왔다. 짜르가 자비를 베풀어서
형량을 사형에서 중노역 형으로 경감한다는 조서였다. 귀족 출신이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칼을 들어 머리를 두드렸다. 수치스러움의 표시였다. 어떤 죄수는 심한 정신적 충격을 입고
다시는 회복되지 못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죽는 날까지 당시의 경험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는 죽음의 깊은 구덩
이를 똑똑히 목격했으며, 그때부터 그에게 삶이란 값으로 따질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것이
되었다. 감옥으로 돌아온 도스토예프스키는 생명을 다시 얻은 순수한 기쁨을 노래하며 방
안을 서성거렸다. 자신의 형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지금처럼 영적인 생명력이 풍성하고
건강하게 용솟음쳤던 적은 여태까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제 인생은 변화될 것입니다.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날 것입니다"라고 적었다. 그리고 기념물로 간직하기 위해 수의를 잘
개켜 넣어두었다.
이제 도스토예프스키 앞에는 시베리아 이송을 포함한 여러 시련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된 마차 여행을 견뎌내야 했다. 살을 에이는 듯한 추위로 곳곳에 동상을 입은 상태
였다. 시베리아에 도착하자, 죄수들을 마지막으로 분산 배치하기 전에 시베리아에서 며칠
동안 머물기로 결정한 호송 책임자는 그곳에 있는 여성 3명에게 도스토예프스키 일행을
면회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이들은 모두 다른 정치범들의 아내로서 남편 근처에
살겠다는 생각으로 시베리아로 이주한 여인들이었다. 여인들은 새로 온 죄수를 반겨주는
것을 소명으로 여기던 터여서 어떻게든 그들을 편안하게 해주려고 애를 썼다.
그들 가운데 독일 철학을 공부한 데다가 성경을 외울 정도로 잘 알고 있는 경건한 어느
부인이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신약 성경을 쥐어주었다. 성경은 감옥에서 소지할 수 있는
유일한 책이었다. 부인은 조그만 목소리로, 성경책을 찬찬히 뒤져보면 10루불짜리 지폐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소명을 이룰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두 번째 기회를 주셨다고 믿은 그는 유형 생활을 하는
동안 성경을 열심히 읽고 또 읽었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 도스토예프스키의 딸(Aimee)은
당시의 정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아버지는 그 소중한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장도
빼놓지 않고 연구했습니다. 한 단어 한 단어를 깊이 묵상했으며 상당 부분은 외우기까지
해서 결코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무슨 작품을 쓰든지 성경 말씀이 깊이 스며들도록
했는데, 아마 이것이 아버지의 작품에 힘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중노동을 하면서 4년을 보냈으며 그 뒤로도 5년씩이나 유형생활을 했다.
그렇게 10년 형기를 마칠 즈음에 그는 흔들림 없는 신앙을 가진 크리스천이 되어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신앙은 시베리아에 처음 도착하던 날 그에게 신약 성경을 건네주었던
부인에게 써보낸 신앙 고백 가운데 잘 나타나 있다. "저의 신앙 고백은 대단히 단순합니다.
그리스도보다 아름답고, 심오하며, 사랑이 넘치고, 정당하고, 용맹스럽고, 완전한 분은
없습니다. 설령 누군가가 증거를 들이대며 그리스도는 진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할지라도,
나는 진리와 함께 있기보다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는 쪽을 택할 것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신약 성경을 전해주었던 여인의 친절함과 아울러, 어느날 간수들의
호위를 받으며 걸어가고 있을 때 쪼르르 달려와서 "불쌍한 아저씨,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으로 이 동전을 드릴 게요!"라고 외치던 어느 꼬마 계집아이의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신약 성경과 수의처럼 그때 받은 동전도 기념물로 소중하게 간직했다. 도스토예프
스키는 삶이 주는 진정한 선물을 마음껏 향유했다.
"삶은 선물이다. 삶은 행복이다.
일분에 불과한 시간도 영원한 행복이 될 수 있다.
생명은 어디에나 있다.
생명은 밖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우리 안에 존재한다."
"나뭇잎 한 장, 빛 한 줄기까지 모두 사랑하라.
짐승들을 사랑하고, 초목들을 사랑하라.
모든 존재를 낱낱이 다 사랑하라.
모두를 사랑하노라면,
하나하나마다 하나님의 신비를 볼 수 있으리니."
차츰 한 가지 역설적인 점이 눈에 들어왔다. 모든 것을 가졌던 톨스토이는 쉽게 분노하고
상처를 입혔던 데 반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던 도스토예프스키는 범사에 감사하고 원기
왕성하게 살았다는 사실이다.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촌에서 천박하고 야비한 인간 군상들
속에 섞여 살면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을 성경속의 '돌아온 탕자'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희망... 감옥을 둘러싼 울타리 너머에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서 '묘한 조바심과
열정으로 달뜨게 만드는' 이 희망이야말로 그의 목숨을 부지하게 만드는 진정한 힘이었다.
- <내 영혼의 스승들>(필립 얀시 저, 좋은씨앗)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