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예프스키의 예수 이해
-정연복이 추천하는 시와 수필
기자명 정연복 승인 2009.07.01
도스토예프스키의 예수 이해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예수쟁이들보다
삶의 깊은 진리를 터득한 사람들의 말과 글이
우리들에게 종교에 대하여 더 깊고 넓은 길을
보여주는 예는 너무도 많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일생은 참으로 파란만장했다.
그는 한때 반역사건에 연루되어
시베리아의 유형도시 옴스크에서
4년간 유형생활을 하기도 했다.
옴스크의 겨울은 영하 40도에서 50도까지 내려갔다.
작은 새는 날아가다 떨어질 정도로 추웠다.
그는 등판에 사격용 표시가 된 하얀 헝겊의 죄수복을 입고
죽거나 형기가 끝나기 전에는 절대로 풀어주지 않는
족쇄를 4년 내내 덜거덕거리며 차고 있어야 했다.
우리는 그의 문학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세련되고 유능한 신학자가 도달한 것보다도
훨씬 더 깊고 진실한 예수이해에 그가 도달하고 있음을!
이것은 그가 성서를 철저히 연구했다거나
남달리 신앙심이 두터운 데서 온 통찰력으로 볼 수는 없다.
그는 당시의 보통 러시아인들이 지닌 정도의
성서에 대한 이해와 예수에 대한 상식을 갖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가 당시의 어떤 종교가들보다
기독교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의 처절한 삶의 경험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표작인 [죄와 벌]에서
무식하고 말도 못하는 창녀 소냐를 통해
그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민중을 그림으로써,
공산주의 이전 시대에서 예수를 가장 잘 이해한
예수의 산 증인이 되었다.
소냐의 아버지는 비참한 가난 속에서도
옛날 일만 되씹으며 술주정을 하고,
후처로 들어온 여자는 굶어 죽는 상황에서도
옛 생활을 유지하려는 도도하고 혹독한 여자로 등장한다.
꼼짝없이 앉아서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슬그머니 공창(公娼)에 등록하고
몸 팔아 돈을 몇 푼씩 들고 들어오는 소냐.
그런 생활 속에서도 한쪽 손엔 성경을 들고 있으면서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는 소냐.
그리고 마침내 그 시대 지성인의 모델격인
라스콜리니코프를 굴복시켰던 그녀.
이처럼 도스토예프스키는 소냐를 통해
종교나 법의 척도로는 잴 수 없는
하층민중 속의 예수의 현존을 말하고 있다.
그가 이 소설에서 예수의 뜻을 올바로 표현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그가 남보다 예수를 더 잘 알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당시 민중의 삶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인간, 특히 민중의 삶을 잘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남달리 잘 안다고 큰소리칠 게 아니라
인간에 대해,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의 아픔과 희망에 대해
더 잘 알고 민감해지려고 애써야 하리라.
지성수 / 목사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