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의 기일을 지나며/
어제가 음력으로 팔월 스무닷새, 아버지의 19주기 기일이었다.
그동안 아버지와 어머니의 제사를 따로 모셔오다가 지난해부터 어머니 제사를 먼저 가신 아버지의 기일에 합쳤다.
어머니 기일 제사를 따로 모시지 않게된 것은 조상의 기제사를 모신다는 게 아마도 내 세대에서 끝나리라 싶기도 하고, 아이들에게까지 굳이 번잡스럽게 제사라는 형식으로 부모나 조상을 기리게 할 것은 아니라 싶어 그리한 것이다.
그래서 나의 사후엔 제사는 지내지 말라고 미리 유언장에도 썼고 아이들에게도 그리 말해두었다.
어느새 아버지께서 유명을 달리하신지 19년, 참 세월이 빠르다. 이제 나도 부친이 돌아가셨던 그 나이가 되었다. 그래선지 다른 때보다 마음 한 켠이 더 착잡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양친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두 분 모두 병원에서 운명하셨는데, 부친께서 운명하셨다는 부음을 강연 도중에 받았다. 그날 내가 안동의 시민 단체에서 주관했던 강연에 초대 받았기 때문이었다.
강연은 저녁에 있었는데, 강연 중에 계속 전화음이 울려 받아보니 부친이 운명하셨다는 가족의 다급한 연락이었다. 서둘러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질의 응답 시간에 양해를 구한 뒤 주최측에서 대절해 준 택시를 타고 밤길을 세 시간 넘게 달려오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잊고 있었던 이런 기억이 부친의 기일을 맞아 새삼스레 다시 떠오른 까닭이 무엇일까.
나는 부모님의 기대에 한번이라도 제대로 부응했던 적이 있었을까. 학교에서 쫒겨나고 수감되었다가 나온 뒤로는 운동판을 나돌며 백수로 살아가던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님의 심경은 어땠을까.
아버지는 참 강직하시고 명석하신 분이셨다. 한때 공직에 계시면서 자식인 나로 인해 여러 고초를 겪으시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런 부당한 압력에 더욱 굳건히 맞서셨다. 내심으로는 자식이 하는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생전에 한번도 내가 하는 일을 언짢아 하시거나 나무라신 적이 없으셨다.
어머니께서도 많이 속상해 하시기는 했지만 내가 하는 일을 반대하거나 만류한 적은 없었다. 그런 두 분을 생각하면 아직도 나는 도저히 부모님께 미치지 못함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내세가 있는 지 알지 못한다. 궁금할 때도 있기는 하지만 별로 구애받지 않는다. 그건 이번 생이 끝나면 절로 알게될 것이기 때문이고, 이번 생에서는 우선 여기의 삶 자체에 충실한 것이 당면과제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님 기제사나 조상의 차례를 모시는 것에도 추모 정도의 의미를 둘 뿐이다. 내세가 있다고 하고, 불멸하는 영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내세는 이승과는 전혀 다를 수 밖에 없을 것이라 싶다. 그렇다면 몸, 육신이 없는 존재와 그런 존재가 사는 저승이란 세계에 대해 몸을 가진 내가 이승에서 미리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싶다.
이승에서 지금 여기를 잘 사는 것이 잘 죽는 길이며, 저승에서도 잘 사는 유일한 길이라고 내가 말하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