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 김용옥 우리는 누구인가 제10강 심과 성
망중한담 2016 3 26 1839
불교는 마음의 종교다.
불교에서는 종교적 문제가 인간의 마음에 있다고 생각한다. 마음에 대한 이론이 굉장히 발달한 종교다. 세계 어느 종교보다 마음에 대한 이론이 정교하다. 오늘은 정도전에 의한 불교의 마음 이론을 비판하려 한다. 제목이 불씨심성지변(佛氏心性之辯)으로 되어있다.
(원시불교의 핵심은 무아론(無我論)이다. 무아(Anatman)는 모든 존재론적 실체를 거부한다. 하느님<God>도 나<Ego>도 모두 심적현상<心的現象 : Psychological Phenomenon>일 뿐이다.)
고려말엽의 사상가요, 혁명가요, 조선왕조 창건의 주역이었던 정도전은 불씨심성지변(佛氏心性之辨)을 통해서 불교의 심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불씨심성지변 : 불교의 심(心)과 선성(善性)을 분별함)
심자(心者) 인소득어천이지생기(人所得於天以之生氣)
성자(性者) 인소득어천이지생리(人所得於天以之生理)
심(心)이라는 것은 인간이 하늘로부터 얻어서 생한 기요, 성이라는 것은 인간이 하늘로부터 얻어서 생한 리(理)라고 했다.
조선 사상의 이기론(理氣論)이 여기에서부터 태동한다. 조선사상의 이기론은 우주의 근원을 리(理)에 두느냐, 기(氣)에 두느냐에 관한 조선사상사의 논쟁을 의미한다.
심(心)=기(氣) 심은 우리가 하늘에서 얻어 가진 기,
성(性)=리(理) 성은 우리가 하늘에서 얻어 가진 리
동양적인 우주관에서의 세계, 즉 천지(天地)는 기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면 여기의 책상, 펜, 고로쇠 물 등은 모두 기(氣)다. 기가 움직이는 법칙을 리(理)라고 한다.
(고로쇠 물 : 고로쇠나무에서 뽑은 수액인데, 봄에 이것을 마시면 생명이 약동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좋은 물이다.)
자연의 질서를 탐구하는 것이 과학이다.
인간세계를 둘러싼 환경의 객관적 리(理)를 자연의 법칙(Law of Nature)이라고 한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리가 기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를 떠난 리를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자연과학적 태도(Scientific Attitude)이다.
리가 기 속에 있다고 한다면 리는 기에 지배당하고 종속될 뿐이다.
성리학자들은 기에 종속되지 않는 리의 독자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것이 인간을 명령하는 도덕적 법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리는 인간의 도덕적 품성과 관련되어 있다. 인간이 도덕적으로 사는 것은 기(물질)만 있는 것이 아니고 리(법칙)가 있기 때문이다.
성리학에서는 자연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연속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존재(Sein)와 당위(Sollen)가 같은 차원에서 이해되었다. 인간의 심성에 내재하는 리가 곧 인의예지(仁義禮智)였다. 性에 理가 내재한다고 생각한 이론을 우리가 성리학(性理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맹자의 성선(性善)은 인간의 도덕적 성품의 선천성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기보다 리를 중시한 성리학은 맹자 성선설(性善說)의 적통을 잇고 있는 것이다.
심(心)은 인간의 의식현상 일반(Consciousness)을 말하고, 성(性)은 마음의 도덕적 핵심(Moral Core)을 의미한다.
우리는 성선설과 성악설을 이야기하고 있다. 성(性)은 원래적으로 선(善)하다. 이것은 맹자의 성선설이고 '성은 원래적으로 악하다'라고 하면 순자의 선악설(善惡說)을 연상한다.
순자왈 (荀子曰) 인지성악(人之性惡) 기선자위야(其善者僞也)
순자는 '인간의 성은 좋지 않아서 선하다는 것은 거짓'이라고 했다.
순자는 인간을 이기적 욕망의 주체로 파악하였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쟁탈(爭奪), 호색(好色), 호리(好利), 음란(淫亂)에 빠질 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인간이 성을 따르게 된다면 세상은 어지러워진다고 한다.
기선자위야(其善者僞也)
선하다고 하는 것은 인위적인 노력일 뿐이다. 인간의 성이 악하기 때문에 예의라는 것이 필요하다. 예의라는 것은 성(性)이 만들어내는 인위적인 것이다.
범예의자(凡禮義者) 시생어성인지위(是生於聖人之僞) 비고생어인지성야(非故生於人之性也)
무릇 예의라고 하는 것은 성인의 위선에서 나온 것이며 모든 사람의 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순자>
인간이 힘써야 할 것은 적위(積僞)다.
적위란 인위적 노력을 쌓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공부(工夫)이다. 위(僞)는 거짓, 위선이 아닌 인위적(人爲的)이라는 의미의 위(僞)로 해석해야 한다.
위기이생예의(僞起而生禮義)
(인위적인 노력이) 일어나서 예의가 생겼다. 예의가 인간 본성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 <순자>
성선(性善)과 성악(性惡)은 결코 인간의 본성을 선(God)과 악(Evil)으로 규정하는 논의가 아니다.
노자 2장에 천하개지미위미(天下皆知美之爲美) 사오의(斯惡矣)
천하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것은 추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미(美)⇔추할 오(惡). 오(惡)는 어디까지나 미(美)의 반대말이다. 선(善)의 반대말은 아니다.
개지선지위선(皆知善之爲善) 사불선의(斯不善矣)
모든 사람들이 선한 것을 선하다고 알고 있는데 그것은 불선(不善)일 수도 있다.
선의 반대어는 악(惡)이 아니고 불선(不善 :선하지 않음)이다.
동양인의 관념 속에서는 실체로서의 악(惡)은 근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악은 불선(不
善)일 뿐이다.
동양인들의 관념 속에 천사와 악마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서양인들에게는 천사가 있고 악마가 따로 있다. 선과 악으로 2분되어 있다. 동양에서는 선의 반대는 불선이지 악은 아니다. 중국 고전에서의 악(惡)이라는 글자는 모두 추할 오(惡)로 읽어야 한다. 악(惡)으로 읽는 것은 서양언어와 서양종교의 영향일 뿐이다.
성선설(性善說)의 반대말은 성악설(性惡說)이 아니고 성불선설(性不善說)이라야 한다. <순자>의 성악(性惡)은 성악이 아니라 성오(性惡)다.
순자는 성악설을 말한 적이 없다. 순자의 성오설(性惡說)은 성선(性善)을 전제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다. <순자>의 성불선설도 성선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래야만 인간의 교화가 가능 한 것이다.
'순자'의 글에서 인지성악(人之性惡) 필장대예의지화(必將待禮義之化) 연후개합어선야(然後皆合於善也)
사람의 성악은 예의 교화를 거쳐 성선이 된다.
동양사상에는 인간의 본성이 본래적으로 '선:善'하니 '악:惡'하니 하는 논의는 없다.
인간의 심(心)에는 두 측면이 있다. 하나가 정적(情的) 측면(욕망의 세계 : Sentiments)이고 다른 하나는 성적(性的) 측면
(순수한 선 : Moral Nature)이다. 근세 유학의 문제(과제)는 심통성정(心統性情), 즉 심(心)이 성(性)과 정(情)을 통괄하는 것이다.
심(心), 성(性), 정(情)은 셋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의식현상이다.
인간의식의 작위적 주체는 어디까지나 心이다.
심은 일심(一心 : 하나)인데, 동전의 양면처럼 어떤 때는 심으로 나타나고, 어떤 때는 정으로 나타난다. 정도전이 (볼 때)
불교도 심, 마음의 종교이다. 그래서 마음에는 정적인 측면이 끼여 있기 때문에 문제가 많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성(性)은 능동적 촉발성(觸發性)을 갖지 않는 비작위적(非作爲的) 순수한 도덕적 이상(Moral Ideal)일 뿐이다.
심(心) : 정(情)↔성(性), 기(氣)↔리(理), 용(用)↔체(體), 인욕(人慾)↔천리(天理)
고려왕조는 불교사회면서 개인주의적(Individualistic)사회였다. 조선왕조는 유교사회로써 공동체적(Communalistic)사회였다.
불교에서는 나 혼자 천국이 가능하고 해탈도 가능하고 성불도 가능하다. 불교는 철저하게 개인주의적인 종교이다. 마음을 다스려서 번뇌로부터 벗어나면 그것이 곧 해탈이요, 성불이다.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고 개별적으로 행한다.
불교이론으로는 정치이론을 만들기 어렵다. 불교에서는 모두가 개별적으로 놀기(행하기) 때문이다. 불교사회도 잘만 돌아가면 제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고려 말에는 문제가 나타났다.
새로운 과거시험제도를 도입했다. 굉장히 이상적인 제도다. 과거제도란 시험을 통해서 권력을 주는 제도인데, 중국에서 나왔다. 중국문명의 유니크(Unique)한 시도였다. 법조문만 외워서 합격하면 권력을 갖게 되는 오늘날의 고시와 같이 당시의 중국에서는 '서경(書經)' 등을 외워서 합격하면 권력을 갖게 되었다.
인재를 등용하는 방법에는 시험(Examination)과 추천(Recommendation)이 있다. 과거제도에서는 객관적인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사회가 잘 돌아갈 때는 추천제도도 좋겠지만 추천제도는 주관적이며 문란해지는 문제가 있었다. 반면에 시험제도는 객관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 때부터 중국에서 과거제도를 도입했다. 신라시대에는 화랑제도가 있었으나, 과거제도는 없었다. 과거제도에서 종이쪽지 하나로 권력을 준다는 것은 불안했다.
이러한 과거제도에 대해서 주자는 관료 제도를 시행함에 있어 관리들에게 권리를 주는 동시에 철저한 윤리의식을 의무지우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주자학의 목표는 사대부 관료 계층에 철저한 도덕적 가치를 심어주기 위한 것이다. 주자철학은 기본적으로 공무원 교육철학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정보다는 성을 더 강조했다. 인의예지(仁義禮智)가 갖추어진 인간이다. 그러기 때문에 性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감정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기(氣)요, 이성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리(理)다. 주기론자(主氣論者)는 감정에 대해 관용적(Liberal)인 반면 주리론자는 감정에 대해서 엄격하다. 조선왕조에서는 주리(主理)의식을 강조했다. 사대부들의 엄정한 윤리의 식을 강조했다. 주자학에서는 '네가 원래 가지고 있는 리(理)가 너의 기(氣)를 지배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불교에도 심(心)과 성(性)에 대한 논의가 많이 있었다.
불교에서도 심(心)은 본성을 말한다. 그 본성을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즉 인간 본래의 성은 청정한 것이라고 불렀다.
인간의 마음에는 정심(淨心), 즉 깨끗한 마음과 염심(染心), 즉 더러운 마음이 있다. 그러나 결국 이 정심(淨心)과 염심(染心)은 한마음(一心)이다.
불교는 번뇌즉보살(煩惱卽菩薩), 즉 번뇌가 곧 보살이라고 한다. 불교는 심과 성을 이원화(二元化)시키지 않는다. 불교의 원래 이론은 좋은 것인데 잘못 해석하면 항상 도덕적 해이를 가져올 수 있다. 불교는 리적(理的)인 세계의 진여문(眞如門)과 기적(氣的)인 세계의 생멸문(生滅門)으로 이원화(二元化)시키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초윤리적(Transethical)이기 때문에 도덕적 해이를 가져올 수 있다.
정도전의 철학은 주자학에 기초했다.
불교에서는 심과 성을 구별하지 않았다. 심과 성이 일체화되는 것은 곤란하다. 인간의 마음에는 항상 환원될 수 없는 도덕적 핵심인 성이 있다고 했다. 그의 이론이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지만 조선왕조는 주리론적 전통을 고수했고, 따라서 매우 규범 윤리적 사회가 된 것만은 틀림없다.
'주자학'은 한 마디로 요약된다.
존천리(存天理) 거인욕(去人慾)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항상 몸에) 하늘의 이치를 보존하고 사람의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천리(天理)=도심(道心), 인욕(人慾)=인심(人心).
'주자'는 또 이렇게 말했다.
음식천리(飮食天理) 요구미미(要求美味) 인욕야(人慾也)(인간이 배고플 때) 먹고 마시는 것은 천리다. 그러나 맛있는 것을 많이 먹으려는 것은 욕심이다.
'주자'는 인욕중자유천리(人慾中自有天理). 즉 사람의 욕심 속에도 천리가 있다고 했다. 천리와 인욕의 구분은 무욕(無慾), 유욕(有慾)의 구분이 아니라 공(公)과 사(私), 시(是)와 비(非), 정(正)과 사(邪)의 구분이다.
주자는 과거제도를 통해 등용되는 공직자들에게 사(私)를 버리고 공(公)을, 비(非)를 버리고 시(是)를, 사(邪)를 버리고 정(正)을 추구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주자학'의 가장 큰 명제는 천리인욕수동시병유지물(天理人慾雖同時竝有之物) 연자기선후공사사정지반이언지(然自其先後公私邪正之反而言之) 역
부득불위대야(亦不得不爲對也)
천리와 인욕을 비록 동시에 가질 수 있으나 인욕을 버리고 천리를 따르는 '보편적 가치'를 실천할 수 없는 사람은 공직자가 될 수 없다.
공직자는 시험에 의해서만 권력을 부여 받는 자가 아니다.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은 세종이 지은 악장체(樂章體) 찬불가(讚佛歌)다. 부처님의 중생교화를 예찬하고 있다. 월인천강(月印千江)은 달이 천 개의 강에 비친다는 뜻이다. 즉 부처님의 공덕이 달과 같이 모든 삼라만상에 고루 베풀어진다는 뜻이다.
'석보상절(釋譜詳節)'은 1447년 세조가 지은 석가모니 일대기인데 석가의 영웅적 일생을 찬탄하는 서사시다.
정도전은 불교를 비판하고 개혁하는 패러다임을 정했는데, 조선왕조에서 가장 위대하다는 세종임금은 공자를 찬양하는 글을 지어도 시원찮을 판에 불교를 찬양하는 서사시를 지었다. 왜 그랬을까? 조선 왕조는 1392년 창건되었지만 왕조초기는 아직도 고려문화 즉 불교문화가 잔존하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개혁은 어려운 것이다. 아직 민중들은 혁명의 실감을 느끼지 못하였다. 향교보다 절로 가고 싶었다. 세종 때 집현전을 만들고 학사들을 중용하며, 유교를 진흥시켜도 민중들은 불교가 지배하고 있으므로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세종은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던 것이다. 이것은 역사로 볼 때 개혁의 후퇴라고도 할 수 있다. 역사의 패러다임을 바꾼다는 것은 다이나믹(Dynamic)하며 어려운 것이다.
정도전의 불교비판
시기심여천상지월(是其心如天上之月) 기응야여천강지영(其應也如千江之影) 월진이영망(月眞而影妄) 기간미상연속(其間未嘗連續)
마음은 하늘 위의 달과 같은 것이다. 달은 실물이지만 천강에 있는 그림자는 모두 헛것이 아닌가? 그 달과 그림자 사이에는 연속성이 없는 것이다.
정도전의 문제의식은 세종 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불교는 감각적 세계를 허환(虛幻)으로 본다. 정도전은 현상과 실제의 이원성을 본질적으로 거부한다. 그래서 월인천강(月印千江)의 노래는 fiction(허구)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정도전의 유학적 의식은 세종 때보다 훨씬 앞서 나가있었다. 허망된 것, 그림자적 세계하고 실제 세계를 나누어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림자를 받아들일 수 없다. 모든 것은 실(實)해야만 한다.
여지무량지형(如持無量之衡) 칭량천하지물(稱量天下之物) 기경중저앙(其輕重低昻) 유물시순(惟物是順) 이아무이진퇴칭량지야(而我無以進退稱量之也)
이것은 마치 눈금이 없는 저울대를 가지고 천하의 사물을 저울질 하겠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저울 쟁반에 올려진 물건이 무거운가, 가벼운가, 저울대가 내려가는가, 올라가는가, 이것을 오직 물건에만 맡겨둔다면, 내가 추를 움직여서 무게를 잰다는 행위가 없게 될 것이다.
고왈(故曰) 석씨허(釋氏虛) 오유실(吾儒實) 석씨이(釋氏二) 오유일(吾儒一) 석씨단절(釋氏斷絶) 오유연속(吾儒連續) 학자소당명변야(學者所當明辯也)
그리고 말하기를 석씨는 허하고 우리 유가는 실하다. 석씨는 둘이고, 우리 유가는 하나다. 불가는 단절적이지만 유가는 연속적이다. 배우는 자들이 어찌 이것을 명확하게 분별하지 않겠는가
정도전의 불교비판은 단순한 불교비판이라기 보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의 이원(二元)적 사유에 대한 본질적인 도전장을 내고 있는 것이다.
유교는 현실주의적이며 인간세계의 윤리를 주장하고 있다. 반면, 불교와 기독교는 초월주의, 윤회, 열반·지옥, 천당을 믿고 있다.
삼봉의 언어는 어디까지나 삼봉 고유의 문제의식 속에서 생겨난 그 자신의 언어이다. 이 조선 땅의 역사현실이 잉태시킨 언어다.
여태까지 우리는 살아있는 우리 조상의 언어를 너무도 읽지 못했다. 그들의 살아 움직이는 삶, 그 자체를 살아있는 모습대로 구성할 능력이 우리에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인류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이며, 혁명가의 한 사람으로서 삼봉을 재조명해야 하는 당위성이 있는 것이다.
삼봉의 유혼(幽魂)은 아직도 조선의 푸른 창공을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