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14

** ‘영혼의 탈식민지화’ 후카오 요코 , 야마모토 교시< 동양포럼 < 동양일보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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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포럼-주제 기고 ‘영혼의 탈식민지화’

기자명 조아라 기자
입력 2017.04.23 


(동양일보 조아라 기자)동양포럼 운영위원회(위원장 유성종 전 꽃동네대 총장)는 오는 8월 14~16일 3일 동안 청주에서 한국의 조명희, 일본의 나쓰메 소세키, 중국의 루쉰을 재조명하는 한·중·일 문학-철학대화모임을 개최한다. 

‘영혼의 탈식민지화’를 주제로 한 이 행사 개최에 앞서 후카오 요코 오사카대 교수와 야마모토 교시 ‘미래공창신문’ 발행인의 글을 함께 소개한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혼의 탈식민지화’라는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경제대국 일본에서 진정한 삶의 모습에 관한 깊은 반성을 일으킨 후카오 요코 교수와 한·일 간 미래공창에의 길을 정력적으로 열어가는 야마모토 교시 발행인의 의견을 소개함으로써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이 그동안 국내·외에서 제창해 온 ‘영혼의 탈식민지화’와의 바람직한 상관연동을 진작시키는데 도움이 되도록 한다. <편집자>

혼의 탈식민지화란 무엇을 말하는가?



후카오 요코 (深尾葉子)
오사카대학 교수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번에 내가 왜 일본에 있어서 ‘혼의 탈식민지화란 무엇을 말하는가?’라는 주제로 글을 쓰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 드리고자 한다. 일전에 ‘미래공창신문’의 기획으로 한국 충북 청주에서 동양포럼을 주관하고 계신 김태창 선생님과 ‘미래공창신문’의 야마모토 교시(山本恭司) 편집장님과 함께 ‘혼의 탈식민지화’에 대해서 장시간에 걸쳐 진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차후 게재 예정) 

그 대화에서 많은 깨우침을 얻은 바 있는 나 자신은 ‘혼의 탈식민지화’야말로 일본인은 물론이고 한국인과 중국인도 동아시아의 평화와 인류·지구의 미래를 열어 나가기 위해서 논의해야 하는 긴급한 주제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나에게 있어 ‘혼의 탈식민지화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나름의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써보고자 한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그 생명의 불꽃을 온전히 태우고, 지구상에 주어진 시간을 다 쓸 수 있는 힘을 함장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혼(=넋) 또한 그 온전한 발로를 다해야 하는 사명과 가능성을 띠고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생명을 받아 사람으로 자라서 세상으로 내보내지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우리의 혼은
다양한 제약을 받는다. 그것은 ‘학습’이라는 과정으로 시작되어,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적응’이라는 형태로 실현된다. 이것들은 종종 미래의 혼의 발로를 저해하고 본래의 자신의 모습을 감추어 거짓된 모습으로 이 사회에 적응시킨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치 자신의 힘으로 살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지만, 실은 본래의 자신의 혼의 발로와는 전혀 다른 ‘틀’에 자기를 끼워 맞춰, 답답한 채로 인생을 살다가 궁핍한 채로 인생을 마친다.

그리고 자신의 혼을 ‘덮개’ 아래에 가둔 채 은폐하며 사는 것은 본인은 물론이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가령 엄마가 ‘혼’을 죽이면서 살게 되면, 마치 자식에게 자신의 억압을 전화시키기라도 하듯이 ‘억압적’으로 대하거나 겉모습과 속마음이 일치되지 않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내보내, 아이를 이중구속 상태로 내몰거나 새로운 정신병의 연쇄를 일으키게 한다. 그리고 조직이나 사회에서의 다양한 학대 또한 자신의 혼을 온전히 살지 않는 인간이 그의 혼의 원망을 주위에 쏟아내는 과정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는 자신을 온전히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대리만족으로 집단적 사회폭력을 일으키고, 마침내는 전쟁까지 일으킨다.

이렇게 생각하면 자기의 혼을 온전히 표출하는 활동은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이 세상에 실현시키는 중요한 수단임과 동시에 사회 전체의 폭력성을 감소시키고 타자에 대한 불필요한 공격성을 피하기 위해서도 대단히 중요한 일임을 알 수 있다.

나는 지금까지 자기 자신이 누군가에게 속박되어 자신의 ‘삶’을 살지 않는 것을 “혼의 식민지화”라고 부르고, 반대로 자기 자신의 감각에 ‘덮개’를 씌우지 않고 온전한 혼의 발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을 “혼의 탈식민지화”라고 불러 왔다. 그리고 가까운 가족, 친구, 지인, 학생들과 함께 혼을 탈식민지화하여 사는 것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가능하면 혼의 속박을 풀어내는 관계를 구축하고 싶다고 생각하여, 그런 관계의 친구를 ‘혼우(魂友)’라고 불어 왔다. 그러나 혼의 속박을 푸는 과정은 결코 한번만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스스로가 구속해 온 인간관계나 환경을 되묻고, 자기 자신을 바로잡아 혼을 탈식민지화했다고 해도, 곧바로 다른 함정에 빠져 식민지화되고 만다. ‘혼의 탈식민화’ 과정은 결코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이기고 지는 과정 속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자신이 피해자가 되는 것뿐만 아니라, 가해자가 될 가능성도 항상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을 기르거나 친밀한 관계를 맺거나 가족이 되거나 서로 영향력을 주는 가운데, 관계가 속박으로 변질되는 계기는 항상 존재한다. 일체의 속박 없는 관계를 구축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고 필요 없을지도 모르지만, 항상 마음에 새길 필요는 있다.

인간은 어리석은 속박에 사로잡혀 스스로가 진정으로 삶을 충실하게 하는 길에서 일탈하여 타자에게 가해를 가하고 자신을 궁지로 내몬다. 그 작동을 정지시켜 자신을 살리고 타자를 살리는 실천을 나날이 행하는 것은 사회 전체의 속박의 폭주를 저지하는 중요한 혹은 유일한 방법일지 모른다. 20세기는 전례 없는 규모의 거대한 전쟁을 일으켰고, 유례없는 규모의 환경파괴를 초래하였다. 21세기에 사는 우리들은 그 거대한 부정적 유산에 허덕이며, 언제나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있다. 동아시아에서도 20세기의 전쟁과 대립의 부정적인 영향이 지금도 우리의 생활이나 국제 관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사람들의 의식도 마치 거기에 말려들기라도 하듯이, 서로를 향한 근거 없는 증오를 증폭시키고 불필요한 대립을 부추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더 이상 대립을 부추기고 파괴와 전쟁에 몸을 맡길 여유는 없다. 우리가 지닌 파괴력은 인류를, 지구상의 생명계를 괴멸시킬 수 있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류 차원에서 그 부정적인 연쇄를 끊으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사는 세계는 고통과 고뇌와 증오로 가득 찬 세계로 전락될 수 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다른 생명에 대한 거대한 모독이 될 것이다. 이제 동아시아는 우선 자기 자신이 혼의 구속에서 벗어나서, 타자에 대한 속박을 걷어버리고, 서로를 인정하고 나누며 용서하는 관계를 구축해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러기 위한 대화의 장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우리가 보다 열린 세계에서 살기 위한 중요한 첫 걸음이 될 것이다. 속박을 풀고 혼의 자유를 획득하여 생명의 연대를 실감하고 의식의 장벽을 걷어낸다. 이것을 매일 매일 실천하는 것이 혼의 탈식민지화를 향한 여정(道)이다. 그리고 이것을 위한 대화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



영혼의 탈식민지화에서 미래공창으로

야마모토 교시(山本恭司)
‘미래공창신문’ 발행인




‘미래공창신문’의 ‘미래공창(未來共創)’이란 ‘순수미래(‘계획미래’의 대칭어)‘의 공동창발(共 倉發)을 말한다. ‘창발’은 ‘처음으로(創) 일으킨다(發)’는 뜻이다. 한일·일한 간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는 길을 열기 위해서는 지나간 과거를 숙지해서 철저하게 반성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거기에 더해서 우리의 행동은 현재·과거에 대한 평가의 일치점을 찾기보다도 인간 신뢰에 기반한 대화와 공동(共 )이 요구된다. 그 공동주체(共 主體)는 하늘과 함께 공공하고 사람과 함께 공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음으로 ‘미래공창’을 ‘영혼의 식민지화’를 보조선으로 삼아 생각해 보자. ‘혼’이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현상을 받쳐주는 근원적인 생명에너지다. 그러나 한국 청주에서 동양포럼을 주관하고 계신 김태창 선생님과의 몇 번의 대화를 통해서 알게 된 바로는 

생명에는 개개인의 개체생명과 그것을 원천적으로 가능하게 하고 성장, 생숙하게 하며 언젠가는 개체생명의 형태에서 벗어나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하는 우주생명이 있으며 그 두 가지 생명이 제대로 상관연동하면 생명의 충실함을 느끼게 되고 분리되면 생명의 쇠퇴 또는 증발을 가져오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특별히 유념할 것은 개체생명의 근원적 생명력을 ‘혼’이라는 말로 나타내고 우주생명의 근원적 생명력을 ‘영(靈)’이라는 말로 나타내고 그 두 가지 생명력의 상관연동하는 모습을 ‘영혼’이라는 말로 나타낸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때까지 아무도 밝힌 바가 없었던 각성체험이라고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김태창 선생님의 입장에서 보면 후카오 요코 교수의 혼의 탈식민지화는 개개인의 경우에 초점이 놓여 있어서 개개인의 생명과 개인 간 또는 개체생명과 우주생명의 아우러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바람직한 한일·일한 관계의 복원·개선·발전을 위해서 혼의 탈식민지화만으로는 미흡하고 영혼의 탈식민지화가 거론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대일본제국이 한반도를 식민지화했던 일한합방은 한국인 한 사람 한 사람의 근원적인 생명력으로서의 혼을 식민지화 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인이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하늘과의 연관을 의도적으로 차단시키고 그것을 대일본제국의 천황이라는 현인신(現人神·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신)에게 통합시킴으로서 한국인의 ‘영’까지도 완전히 식민지화했는데 그것에 대한 자각이나 죄책감이 전혀 없거나 없는 척 한다는 지극히 바람직하지 못한 사태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지금 여기서 한중일의 학자와 젊은 세대가 자리를 함께 하면서 영혼의 탈식민지화를 거론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해볼 수 있다. 그것은 과거의 대일본제국이 강요했던 식민지화의 잔재가 아직도 한일 양국의 관계 개선을 저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 쪽에서 보면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깨끗하고 말끔하게 벗어나지 못하고 때때로 영혼의 아프고 쓰라린 상처를 되새겨야 되고 일본인 쪽에서 보면 과거의 한때 자행했던 비도덕적, 반윤리적, 반생명적 악행에서 연유하는 양심의 가책을 호도하기 위해서 허위의 정당화를 날조해야 되는 비정상의 사태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어서 안타깝기 때문이다. 

그러면 영혼의 탈식민지화는 우리들 세대의 최종 목표인가? 아니다. 꾸준히 끈덕지게 영혼의 탈식민지화를 계속해야 하지만 그것이 우리 세대의 목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한일 양국의 현재 세대가 장래세대까지도 영혼의 식민지화된 상태의 여진을 지닌 채 살아가도록 방치하지 않기 위해서 보다 나은 미래를 함께, 더불어, 서로 열어가야 하는데 그 일의 원동력으로서 영혼의 탈식민지화가 제대로 이루어져서 진정으로 자유로워진 영혼이 한일 양국인들이 꼭 갖추어야 할 조건이기 때문이다.

‘미래’를 연다는 말은 ‘희망’을 갖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미래는 혼자 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열어가야 이루어지는 과제다. 희망이 없으면 인간은 살 수 없다. 일본의 작가 무라카미 류(村上龍)는 ‘희망의 나라로 엑소더스(2000)’에서 “이 나라에는 뭐든지 있다. 정말로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단 하나 희망이 없다”고 통찰하였다. 일본의 대다수 사람들은 “언젠가 걸어왔던 길”에 역행하려고 하는 현직수상을 지지하고 있다. “신의 나라의 백성”이라는 신화이데올로기에 영혼이 식민지화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는 정의와 용기와 희망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미래공창을 위한 희망의 싹은 나타나기 시작했다. 동경대학에서는 2005년부터 ‘희망학’ 연구가 시작되었다. 동경대학출판회에서 ‘희망학(전 4권)’을 출판하였고, 쿠마모토대학(熊本大學)에서는 2008년 무렵부터 ‘장래세대학’이라는 새로운 분야의 구상이 시작되었다. ‘장래세대에 대한 책임’과 ‘인간의 행복’이라는 관점에서 근현대를 본질적으로 다시 물으면서, 큐수대학출판회(九州大學出版會)에서 2012년에 ‘장래세대학의 구상 - 행복 개념의 재검토를 축으로(高橋隆雄編)’가 간행되었다. 오사카대학(大阪大學)에서는 올해 4월에 미래공창센터가 개설되었다. 오사카의 어느 음식점 주인은 ‘행복공창신문’이라는 월간 소식지를 내고 있고, 어느 약사 모임의 이름은 ‘미래공창’이다.

‘미래독창(未來獨創)’은 위험하다. 미래독창은 특정한 개인이 구상한 미래상을 목적화해서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민중을 동원하고 개체생명을 억압한다.

미래공창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생명과 생명의 연대이다. 함께 모색하고 함께 미래(=희망, 새벽)를 개신하는 모험이다. 미래공창은 ‘공공하는 철학’이 주창하는 ‘대화(對話)·공동(共 )겙낸?開新)’의 과정을 거쳐서 영성적 세계를 개벽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미래공창은 한국인과 일본인이 함께 손을 잡고 반도(半島)·열도(列島)의 영성화를 지향한다. 미래공창의 시점에서 조망한 오늘날의 미디어는 철학 없는 ‘지나간 캘린더’이다.

미래공창신문과 동양일보는 국경을 초월하여 연대하여 미디어 혁명을 일으킨다(發).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시민들이 활명연대할 때에 근대 이래로 분단되어 온 두 민족이 맺고·잇고·살리는 관계가 된다. 영성혁명은 개체생명의 인간혁명에서 시작된다. 마침내는 아시아 전역, 러시아, 아프리카, 남북아메리카, 유럽, 중동에까지 확산되어, 인류사회는 영성적 자유가 만발하게 된다. 지금은 거대한 패러다임 전환이 동트기 직전이다.

* 번역 : 조성환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