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14

조명희 - 디지털진천문화대전

조명희 - 디지털진천문화대전

조명희
포석 조명희 문학비

한자 趙明熙
이칭/별칭 포석(抱石),목성(木星),적로(笛蘆)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 수암부락지도보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양식
[상세정보]
[정의]

개항기에 활동한 충청북도 진천군 출신의 문학가.

[개설]

조명희(趙明熙)는 본관은 양주(陽州)이고, 호는 포석(抱石)·목성(木星), 필명은 적로(笛蘆)이다. 시인이자 소설가, 희곡작가인 조명희는 1894년(고종 31) 8월 10일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 수암부락[숫말]에서 조병행과 연일정씨와의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활동사항]

조명희는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소년기를 진천에서 보내며 소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 서울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가난으로 중퇴하였다. 이후 방황하다가 3·1운동에 참가해 투옥되기도 하였다. 감옥에서 나온 조명희는 1919년 가을경에 일본 도쿄 도요대학[東洋大學] 동양철학과로 유학을 갔다. 이때 유학생 모임인 학우회에 들어가 김우진을 만나, 희곡을 창작하고 연극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때 무정부주의 계열의 단체인 흑도회에 가입, 무정부주의 운동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1921년 일본에서 돌아온 조명희는 창작 희곡 「김영일의 사」를 순회 공연하여 전국적으로 큰 호응을 받으며 민족주의 신극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는 희곡사상 선구적 의미를 가진다. 1923년 단행본으로 발간된 『김영일의 사』와, 같은 해 『개벽』에 발표된 조명희의 두 번째 작품인 『파사(婆娑)』는 근대 희곡사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테마인 민족 해방과 인습 타파의 문제를 동시에 표현한 최초의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조명희는 『폐허 이후』·『개벽』 등에 몇 편의 시를 발표한 뒤, 1924년 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출간하였다. 그는 이 시집 서문에서, 남의 시를 본뜨지 말고 우리 시를 찾아 지게 목발 두드리는 나무꾼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자고 당당히 주장하였다.

1925년부터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창설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충청북도 청주 출신 조각가 김복진 등과 프로 연극운동 단체인 ‘불개미극단’을 조직하여 민족주의 연극운동가로, 희곡작가로, 시인으로, 소설가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궁핍한 소시민 지식인의 갈등을 그린 『땅 속으로』, 『R군에게』, 농토에서 쫓겨난 후 간도(間島), 일본으로 떠나거나 도시 빈민으로 떠도는 농민들의 비참한 삶을 그린 『농촌 사람들』, 『마을을 갉아먹는 사람들』 등의 소설을 계속 발표하였다. 1927년 『조선지광』에 발표한 대표작 「낙동강」은 프로 문학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조명희는 1928년 러시아로 망명하였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과 육성촌, 우수리스크와 하바로프스크 등으로 옮겨 다니면서 블라디보스토크 신문 『선봉』의 편집자로, 조선사범학교 교수로, 『노력자의 조국』 주필로 활동하면서 재소 한인 문학 건설에 힘썼다. 망명하던 해에 「붉은 깃발 아래서」라는 장편소설을 탈고하였으나, 내용이 소련에서 수용될 수 없어 발표하지 못한 채 원고마저 분실하였다. 1937년에도 다시 『두 얼굴의 조각 그림』이라는 작품집을 출판하려고 하였으나, 이 또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1937년 소련은 스탈린의 명령으로 연해주의 동포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 무렵 소련은 사회 지도자급 한인 2,000여 명을 체포하여 처형하였는데, 조명희 역시 친일파이자 반혁명분자라는 죄목으로 1937년 9월 체포되었다. 이듬해 5월 11일 조명희는 공개재판도 없이 비밀리에 총살되어 44세의 아까운 생을 마감하였다.

[저술 및 작품]

조명희가 한국 문단에서 활동한 기간은 8년 정도이지만, 다양한 활동으로 민족주의적 극작가, 사실적인 시인, 현실 비판의식이 높은 프로 소설가라는 선구적 업적을 남겼다. 일본에서 귀국한 조명희는 민족주의 신극운동을 개척하여, 희극 「김영일의 사」와 「파사(婆娑)」를 연이어 발표하였다. 1924년에는 ‘적로’라는 필명으로 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펴냈는데,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미발표 창작 시집이었다.

카프에 가담한 1925년 이후에는 소설 「땅속으로」·「R군에게」·「농촌사람들」·「낙동강」·「아들의 마음」 등을 연달아 발표해, 프롤레타리아 소설의 형성과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대표작 「낙동강」은 이전까지 자연발생적인 수준에 머물던 신경향파 문학을 목적의식적인 프로 문학으로 발전시킨 작품으로 평가된다.

소련으로 망명한 뒤에는 식민지 민족의 한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노래한 시 「짓밟힌 고려」·「10월의 노래」·「볼쉐비크의 봄」 등을 발표하였고, 항일투사들의 활동을 그린 소설 「만주 빨치산」 등을 쓰는 등 KGB에 연행될 때까지 2편의 장편소설과 7편의 산문시, 수필, 평론 등을 썼다. 그밖에 소설집으로 『그 전날 밤』, 평론으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직업·노동·문예작품」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88년 12월 10일 우즈베크공화국 타슈켄트시 국립원고연구소 문학박물관 4층에 조명희 상설전시관이 세워졌다.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1994년에는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그의 생가 터에 표지석이 세워지고, 이를 계기로 매년 포석조명희문학제가 개최되는 등 추모사업이 전개되고 있다.

중국 연변에서는 2001년에 연변포석회가 창립되어, 2002년부터 연변포석문학제가 매년 개최되어 2008년까지 7회 행사가 열렸다. 그밖에 2003년에 진천읍 벽암리에 문학비가 건립되고 포석문학공원이 조성되었으며, 2003년 제1회 포석추모 전국시낭송경연대회가 열려 2008년까지 6회 대회가 개최되었다. 또한 2006년에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극동기술대학교 교정에 조명희 문학비가 건립되었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