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과 일본 전통집
(Bauen Wohnen Denken)
“같은 동양이라 하더라도 일본인과 우리 한국인의 미의식은 확연히 다르다.
나는 이 두 그림을 통해서 형식의 의미보다는 그 형식을 낳게 한 의식을 지적코자 한다. 자의적인 절제가 언제든지 한계를 가지는 데 비하여 무의식적 절제는 그 한계를 두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은 숙명이다.”(승효상, <빈자의 미학>, 82)
건축가 승효상은 건축의 요건으로 세 가지를 언급한다. 합목적성, 장소성 그리고 시대성이다. 합목적성이란 건축이 적합하게 수행해야하는 목적이며, 장소성이란 건축이 놓이는 땅에 대한 관계이며 시대성이란 그 건축이 배경으로 하는 시간과 역사를 의미한다. 나는 셋 중에 특히 장소성에 이목이 쏠린다. 승효상은 장소성과 관련하여 오래된 말인 지문(地文), 즉 터무니를 모셔오기 때문이다. 터무니란 사람이 터(장소, 땅, 거주지)에 살면서 새기고 새겨진 공동체의 삶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공동체의 관습의 무늬, 공동체적 삶의 역사적 흔적이기 때문이다.
승효상은 오늘의 한국 도시가 효율성과 합리성, 기능과 속도를 중시하고 전호후랑으로 건축(아파트와 건물)을 자산 증식의 수단으로 종속시켰기 때문에 “터는 개발할 면적”으로만 계산된다고 한탄한다. 그래서 옛 도시들이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죄다 터무니없이 뜯어고쳐지고 있다. 그래서 그는 땅에 대한 성찰을 주장하면서 현대 도시가 메트로폴리스가 아닌 메타폴리스(metapolis, 프랑스의 도시학자 Ascher의 말), 즉 ‘성찰적 도시’를 현대도시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다른 말로 윤리의 건축이다. 윤리의 건축이란 땅과 건축 사이의 윤리를 따지는 것이고 건축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따지는 것이다. 그래서 선조들은 노동을 뜻하는 건축(建築)이 아니라 가꾸어서 만드는 영조(營造)라 했으며, 집은 그냥 물리적으로 세우는 게 아니라 사유의 과정을 통해서 짓는다고 했다.
그러니까 우리의 본래의 건축(집짓기)에는 터에 대한 성찰과 인간의 거주 그리고 사유의 과정이 함께 자랐던 것이다. 여기서 하이데거의 글 “Bauen Wohnen Denken”(집짓기 거주하기 사유하기)가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이 글(1951년)은 『강연과 논문』에 수록되어 있는데, 대학원과 학위과정에서 이 책은 나에게 매우 중요한 도서였다. 나는 당시 도서관에서 해천 윤성범 선생님의 기증도서를 복사해 읽었는데, 지금 보니 이미 오래전에 우리 이기상, 신상희, 박찬국 세 선생님에 의해 아주 말끔하게 번역되어 있다.
하이데거는 집짓기(건축)란 근원적으로 거주하기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는 인간이란 이 땅위에서, 하늘 아래에서, 신적인 것들 앞에 머물러 죽을 자로서 거주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거주함의 근본 특성은 소중히 보살핌에 있다. 그래서 하이데거에게 건축물이란 사방(하늘-땅-신적인 것-죽을 자)을 저마다 그 나름의 방식으로 소중히 보살피는 사물들이다. “사방을 소중히 보살피는 것, 즉 땅을 구원하고 하늘을 받아들이며 신적인 것들을 기다리고 죽을 자들을 인도하는 것, 즉 이렇게 사중적으로 소중히 보살핌이 거주함의 단순하고도 소박한 본질이다.”(<강연과 논문>, 205) 그래서 하이데거는 거주의 본래적 곤경은 주택이 모자란다는 현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을 자로서의 인간이 거주함으로 비로소 배워야 한다는 사실에 있다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Dasein)라고 칭한다. 존재가 밝히 들어나는 장소가 인간이란 점에서 Sein(존재)의 Da(터/장소), ‘터-있음’(Da-sein)이다. 그러나 그 터-있음으로서의 인간 현존재는 거주지를 그 터로서 모으고 보살필 때 그 본래적 의미에 가닿을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승효상이 말하는 지문(터무니)을 살리는 집짓기와 하이데거의 Da-sein의 존재방식으로서의 ‘집짓기 거주하기 사유하기’는 크게 다르지 않고 매우 닮았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일본 전통집의 자의적인 절제가 언제든지 한계를 가지는 데 비하여 한옥의 무의식적 절제는 그 한계를 두지 않는다”고 보는 승효상의 미의식은 한옥의 구조가 한국 사람의 삶의 방식이 있는 대로 드러난 것이며, 그것은 터-있음의 터(장소) 안에서 열린 자세로 활연(豁然)하게 살았던 삶의 존재방식으로서의 ‘숙명’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