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24

Namgok Lee | ‘협동 사회운동이 왜 필요한가?

(3) Namgok Lee | Facebook

Namgok Lee
12 h  · 

오후에는 ‘익산 시민으로서 나의 희망’이라는 주제로 시민들과 강의 형식으로 대화를 했다.
익산이 ‘도농복합의 행복 도시’가  되었으면 하는 희망을 이야기하였다.
우리는 ‘경쟁 사회’에 살고 있다. ‘개인의 해방’과 ‘경쟁 사회’는 서로 맞물려 있다.
‘경쟁 사회’는 지금의 물질적 풍요와 개인의 권리 신장에 기여했고, 지금도 여전히 또 상당 기간 지배적 형태로 존속할 것이다. 
 그러나 만족을 모르는 극심한 소비주의와 각자도생의 차가운 이기주의 문화  때문에 행복도(幸福度)가 오히려 낮아지고, 양극화가 심해져 합법적 불공정이 커지면(흙수저 금수저 등)  ‘갈등 사회’로 되고, 성장과 소비 위주의 문명이  생태적 재앙을 일으키는 등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경쟁 사회’ 속에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협동 사회’를 키우고 넓혀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를 위한 시민운동, 정치운동, 교육 운동 등이 ‘행복 도시’를 위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몇 가지 제안을 했다.

그런데 참가한 한 청년이 ‘협동 사회운동이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했다.
아마도 ‘협동’이라는 말 속에서 어떤 ‘부자유’ 즉 집단이나 전체 또는 도덕이나 윤리 등에 의한 ‘개인의 억압’을 느끼는 듯 했다.
짧은 시간이라 충분히 대화를 나누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나는 우리의 청년 세대가 ‘경쟁 사회’ 이외의 다른 사회 특히 ‘자유로운 협동 사회’에  대한 상상 자체가 어렵지 않나 하는, 뭔가  벽을 만나는 느낌을 받았다.

개인의 해방, 프라이버시의 존중, 자유로운 경쟁을 통과하여 그것을 포월하는 협동 사회에 대한 상상력이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까?

‘경쟁’과 ‘협동’은 좋고 나쁨의 선택이 아니다. 어차피 공존하면서 사회의 건강과 행복을 높여가야하는 쌍두(雙頭)마차다.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협동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 신뢰가 사라지는 것이다.
어제 좀 착잡했지만, 협동 운동을 비롯한 문명 전환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청년들과의 대화나 교육환경의 개선에 좀 더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램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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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1 d
  · 
논어 가운데 가장 많이 회자(膾炙)되는 문장이다. 이 문장을 처음 읽으면서 썼던 글인데, 요즘 이수태의 공자의 발견을 읽고 그 내용을 덧붙힌다.
 “군자는 화(和)하되 동(同)하지 아니하고, 소인은 동(同)하되 화(和)하지 아니한다.” 
子曰 君子 和而不同 小人 同而不和 (13/23)
 “군자는 섬기기는 쉬어도 기쁘게 하기는 어려우니,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도로써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군자는 사람을 부릴 때 그릇에 맞게 쓴다. 소인은 섬기기는 어려우나 기쁘게 하기는 쉽다. 이를 기쁘게 하는 데는 비록 도로써 하지 않아도 된다. 소인은 사람을 부리는데 모든 것을 다 갖추기를 바란다.” 

子曰 君子 易事而難說也 說之不以道 不說也 及其使人也 器之 小人 難事而易說也 說之雖不以道 說也 及其使人也 求備焉 (13/25)


<화이부동(和而不同)은 요즘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리는 말의 하나이다. 

군자와 소인을 나누는 말 중에 대표적인 말이라고 생각된다. 군자는 사람의 본성에 조응하는 사고와 행동을 하는 사람이고, 소인은 아집에 바탕을 두고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사람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서로 다르다. 성격, 지능 , 취향, 환경 등이 모두 다르다. 따라서 이 다름을 인정하고 각자의 특성을 존중하여 자기중심적으로 같게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인간의 실상에 맞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통의 경우는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기 쉽다. 자기와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상대를 자기의 생각이나 행동양식에 일치시키려고 한다. 
자기와 다르면 틀렸다고 생각한다. 자기 생각과 다른 생각을 말하면 자기를 반대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미워한다. 
이것은 인간의 실상에 거스르는 것이다. 이것이 공자가 말하는 소인의 전형적인 행동양식이다. 
이런 소인을 기쁘게 하는 것은 그의 생각이나 취향에 맞추면 된다. 그런데 그것은 진실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같지 않은 것을 같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마음에 부자유나 허위가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소인은 섬기기가 어렵다고 한 것 같다. 항상 비위를 맞추어야 하는 관계는 얼마나 힘든 것인가? 
군자는 사람의 다름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의 입장이나 적성, 기량에서 대한다. 그래서 섬기기가 쉽다. 그러나 군자를 기쁘게 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군자의 기쁨은 그 행위가 진리에 부합할 때이기 때문이다. 소인이 군자를 기쁘게 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부동(不同)을 머리로는 이해하는 것 같아도 막상 그런 경우를 당하면 마음이 편치 않다. 그래도 머리로라도 이해하는 것은 좀 나은 편이다. 머리로라도 이해하면 그런 방향으로 움직이게 된다. 소인으로부터 군자로의 이행이 조금씩이라도 일어나는 것이다. 자신을 돌아보아 생각과 마음이 일치하지 않거나 말과 행동이 다르게 되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부끄러움이야말로 소인으로부터 군자로 이행하게 하는 나침반인 것이다. 
이 부동(不同)을 마음속으로부터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러워지면(억지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넘어서서) 진정으로 다른 사람과 화(和)하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사이좋아지는 것이다. 따라서 화이부동(和而不同)의 화(和)와 부동(不同)은 동전의 안팎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脫朱子 論語學으로 스스로를 밝힌 이수태의 ‘공자의 발견’에서 이 문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지지 받고 있는 해석은 “군자는 융화하되 뇌동하지 아니하며, 소인은 뇌동할 뿐 융화하지 못한다.”이다.
 주자는 동(同)을 아비(阿比;아첨하고 빌붙는다)는 뜻으로 보았고, 정약용은 ‘춘추좌씨전’의 화동(和同)의 논리를 극찬하였다.
이 문장을 신영복은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고 해석하면서,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지배하려 하는 대표적인 것으로 자본주의를 들고 극좌와 극우도 모두 그런 논리에 빠져들고 있다고 경고한다.
문제는 공자의 진의眞意인데, 나는 “군자는 서로 융화하나 같지는 않고, 소인은 같으면서도 서로 융화하지 못한다”가 맞다고 본다.
이 해석은 주자의 論語集註보다 1000년전에 나온 정현 마융 등 한 대와 삼국 시대 학자들의 해석을 모아 놓은  <논어 집해集解>의 주석과 같다.
‘군자는 마음이 화목하나 그들이 보는 견해는 각각 다른 고로 같지 않다고 하였다. 소인은 즐기고 좋아하는 바가 같으나 제가끔의 이익을 다투는 고로 화목하지 못하다.’
주자朱子는 좌전의 특수성에 근거하여 공자의 보편성 있는 발언을 해석한 것이 무리이고(동을 뇌동으로),
신영복은 동同의 의미를 관념적으로 확장(同을 획일화로)한데 문제가 있다고 본다.
공자가 살았던 춘추시대 후반이 다양성과 획일성이 문제가 되는 시대였겠는가?
다양성과 획일성, 공존과 지배는 춘추후반의 문제를 인식하는 프레임으로서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신 영복의 해석은 그 자체로는 의미가 있고 음미할만한 주제지만, 그것이 공자의 발언 의도였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
공자는 단지 세속적 가치에 얽매인 ‘한 통속’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갈등하고 싸우는 소인들의 모습과 그런 잇속을 떠나 생각은 다르지만 예를 잃지 않고 화목하는 군자의 모습을 대비적으로 언급했을 뿐이 아닐까.>
참고로 말하면 나는 신영복 선생을 대전교도소에 수감 중일 때 만나 ‘감옥에서의 교류’를 했던 인연으로 출옥 후에 일정한 교류가 있었다. 탁월한 사상적 능력을 가진 분이지만, 내가 가졌던 선생에 대한 기억은 졸저 ‘진보를 연찬하다’에서 ‘극좌나 극우를 비판하는 것을 넘어 마르크스의 잔영殘影에서 과감하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 그의 사상적 천재성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것 같다’로 아쉬움을 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