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05

퀘이커 300년- 5. 감화 > 번역물 | 바보새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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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이커 | 퀘이커 300년- 5. 감화
페이지 정보작성자 바보새 16-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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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감화

감화는 퀘이커 예배에서 중요하나 본질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론으로 나 실지로나 완전한 침묵의 예배는 말이 나오는 예배와 마찬가지로 귀한 것입니다.
“우리 중에 아무도 한마디라도 말을 한 사람은 없었지만 그것은 마음을 내놓은 시간이었습니다”라고 리처드 조르단은 그의 일기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감상은 얼마든지 인용할 수 있습니다. 일반으로 영감에서 나오지 않는 말을 하는 것보다는 말없는 모임 편을 좋게 봅니다. 그러나 경험이 보여주는 바로는 오랫동안 감화가 매우 적거나 도무지 없는 모임은 오는 사람도 줄고 힘이 없어집니다. 모임 중에 어떤 사람은 감화를 별로 필요하게 여기지 않기도 하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매우 필요하기도 합니다. 진리와 생명을 찾는 것은 개인으로도 하지만 또 단체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나가는 길에서 훨씬 앞선 사람도 다른 사람과 같이 모이는 데서 힘도 얻고 용기도 나게 됩니다.

저자는 일본서 선불교의 참선에 참여하곤 한 일이 있습니다. 그 모임은 사람이 많아서 선방 안에 몇 줄씩 줄을 지어 앉는데, 거기에 완전한 침묵이 있었습니다. 흡사히 친우들의 모임 같으나 거기 중요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거기는 교통이 전혀 없었습니다. 각 개인은 혼자서 진리와 실재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명상자는 이따금 방을 나가서 노사, 즉 스님을 만나는 수가 있고, 그러면 그는 어떤 지도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명상자는 다시 명상으로 돌아갑니다. 이 스님이 퀘이커의 방식과는 매우 다르지만 전도상 필요한 것을 해주고 있습니다.
가톨릭의 정신적 지도자는 그것과도 또 다른 방식으로 골방에서 혼자 정신적 수련을 하고 있는 사람을 돕고 지도합니다.

친우들 사이에 있는 전도자는 선교의 지도자나 가톨릭의 지도자와는 다롭니다. 그는 예배하는 무리의 직접 대변자로 말을 합니다. 그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은 모임 가운데 임해 계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발표함에 이르게 됩니다. 마치 전기의 힘이 어느 점에 올라가면 극에서 극으로 불꽃이 왔다갔다하게 되듯이 모임 전체의 영적 힘이 점점 올라가서 어느 점에 이르면 침묵의 경계선을 깨뜨리고 말이 나오게 됩니다. 퀘이커의 감화에는 제일인칭단수 대명사가 나오는 일은 별로 없고, 말하는 사람이 더 널리 일반적인 진리를 밝히게 되지 않는 한 자기 개인적인 체험을 말하는 일도 없습니다. 찰즈 램(Carles Lamb)이 어떤 퀘이커 전도자가 말하는 것을 듣고 “그는 말을 하기보다는 말을 듣고 있었다”라고 했던 것과 같습니다.

퀘이커의 전도의 원리는 간단한 것입니다. 예배자들이 주를 우러르기 위해 침묵 중에 같이 앉았을 때 그중의 누가 생각 가운데 메시지가 떠오르는 것을 느끼고, 그것이 자기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그는 말할 의무가 있고, 또 다하고 나면 끊어야 할 것입니다. 그는 그 긴급성을 깨달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요구라는 증거입니다. 어떤 생각이 올 때에 이상한 생명과 능력을 가지고 오게 되면, 그는 그것을 하나님이 말하라고 하시는 표적이라 생각해도 좋습니다. 어떤 때는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나 그밖에 또 다른 무슨 일에 있어서나 그것이 하나님의 지시라는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와 겸손한 기다림을 통해서 ‘고요하고 가는 소리’를 듣게 됐다면 그는 부름이 있을 때에 알아듣는 능력을 점점 더 충실하게 가지게 될 것입니다.
다른 근원에서 오는 말은, 가령 예한다면 자기의 힘이나 지식을 자랑 하자는 생각 혹은 단순히 억제하지 못해 하는 것 같은 말은 아무리 거짓 꾸민 모양을 하고 오더라도 곧 알아보고 물리치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체로는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이 모임에 유익이 되겠나 아니 되겠나를 아는 법입니다. 이따금은 참 근원에서 오면서도 모임 전체를 위한 것이 아니고, 페닝톤이 주의하여 말한 것같이 ‘집에서 먹을 빵으로’, 즉 받은 사람이 가만히 지켜두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친우 일기에서 보면 말을 하기 전에 마음이 무겁고 불안을 느끼는 일 이 종종 있습니다. 말하는 사람은 될수록 엄숙한 침묵을 깨치고 싶지 않습니다. 제 스스로의 결단으로 그러한 중대한 책임을 지려 한다는 것은 교만하기 때문인 듯이 제 눈에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책임은 전혀 자기 것만이 아니고 자기를 부르신 거룩하신 주의 것이라고 깨닫게 될 때, 그가 만일 신실한 사람이라면, 그 요구에 응하게 될 것입니다. 퀘이커 일기 중에는 그 부르심에 복종한 뒤에 오는 온전한 평화의 느낌에 대해 쓴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늘 화평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따금은 아주 존경받는 친우들도 불안감과 ‘인도해주심을 벗어났다’는 느낌에 주저앉는 수가 있습니다. 존 울만이 처음으로 모임에서 말을 하고 난 때의 체험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는 그후 매우 오래 있다가야 다시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 흔치는 않으나 매우 잘 알려져 있는 친우들이 많은 사람이 자기에게서 듣기를 기대하고 모였는데 말할 수 없어 속이 마르고 고통스러운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고통의 침묵 속에 앉았다’고 좁 스코트의 일기에 종종 적혀 있습니다. 어떤 때는 이렇게 말 못하는 것이 옳은 때가 있습니다. 리처드 조르단은 “나는 끝내 그 모임 속에 잠잠히 앉았었다. 틀림없이 많은 사람이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조바심을 치고 있는 귀를 즐겁게 하는 일을 않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했다”라 고 했습니다.

퀘이커들의 감화의 목적은 강단에서 하는 설교의 목적과는 다릅니다. 강단에서 하는 설교의 주목적은 성경을 해석해서 가르치고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설교자는 듣는 사람에게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라고 권면합니다. 내세에만 관심을 두었던 구식의 구원론은 오늘날은 종종 현세 생활을 위한 사회적 구원론으로 바뀌는 일이 많습니다.
교육적인 설교가 친우모임에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것은 그 목적을 위해 특별히 마련해놓은 데서만 하게 됩니다. 진정 예언자적인 능력을 가지는 사람이 말을 할 때는 교훈적인 것은 엄숙히 주님을 우러르는 가운데 적당히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종교사, 교리 실천에 관한 보다 더 자세한 가르침은 다른 어디서나 마찬가지로 친우회에서도 필요하지만 그것은 예배모임보다는 강좌에서 하는 것이 더 적당합니다.

조지 폭스는 말하기를 퀘이커의 전도 목적은 “사람들을 모든 설교가 끝나는데까지 이끌어 가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페닝톤은 또 그리스도의 전도자의 할 큰일은 양심을 언제나 그리스도를 향해 열려 있도록 함이다”라고 했습니다. 설교가 헤매이는 마음을 한데 모으게 하는 명상의 제목을 줄 수는 있지만 설교하는 사람은 듣는 자가 자기에게 의지하게 되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아니됩니다.
가톨릭의 영적 지도자에 대한 지도서에 보면 지도가 자신이 너무 지나치게 책임을 지거나 너무 자세한 지도를 해서는 아니 된다는 경고가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보다도 그는 자기에게 맡겨진 그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에까지 뚫고 들어가지 않으면 아니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말합니다.

영적 지도자는……여기서 주로 활등하시고 영혼의 참 지도자가 되시는 이는 성령이란 것, 그리고 그는 언제나 그들을 돌보기를 쉬지 않고, 그들이 유익을 얻고, 될수록 빨리 가장 좋은 길을 얻어 하나님 앞으로 가게 하기 위하여 온갖 방법으로 게으름 없이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됩니다. 그들은 명심해야 합니다. 자기네는 일하는 자가 아니라 다만 영혼들을 신앙의 원리와 하 나님의 법에 의하여 인도하는 기구일 뿐인 것을……그러므로 저들의 목적은 저들에게 좋게 저희 마음대로 영혼들을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인도하시는 그 길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러한 조언은 퀘이커 모임의 말하는 사람에게도 적용할 말입니다. 전도자는 성령의 기계입니다. 그 성령은 자기 속에만 아니라 듣는 자의 속에도 있습니다. 그가 만일 그 중심 되는 그이에게 가까이 있기만 하다면 그는 거기서 나가는 바퀴살을 따라 누구에게도 이를 수가 있을 것입니다.
퀘이커의 감화에는 어떤 규칙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성령은 자기 마음대로 인도하십니다. 대체로 그 하는 말은 진리에 대해 단순하게 증거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요, 변론을 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방법은 듣는 사람이 각별한 토론이 필요없이 받아들일 만한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미술가가 제 그림을, 시인이 제 시를 아무 이유 캘 것 없이 그대로 받아주기를 바라고 내놓듯이, 그렇듯이 말하는 사람도 그저 제 속에 있는 빛이 남의 속에도 있는 빛에 응답할 것을 믿고 제 감화를 내놓아야 할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가는 생명은 그 의지를 움직이지만 그 의지가 변론에 의하여 강요당하게 되면 설혹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그 움직임은 완전히 제 안에서 우러나서 한 것이 못됩니다.

종교적인 체험을 해부하는 분석적인 감화는 마치 식물 동물의 해부와 같아서 생명을 죽이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 속의 생명을 직접적인 직감으로 알듯이 우리는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알 수 있습니다. 분석은 독특한 과학적인 가치를 가지지만 마치 불길이 이 석탄덩이에서 저 석탄덩이로 뛰어가듯이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건너가는 성령은 진리를 스스로 제 안에 통일을 가지는 하나의 산 것으로 옹근 채로 파악합니다. 그러한 체험은 마치 여러 종류의 새들에 관해 토론을 하고 있는 조류학자들의 모임 안에 정말 어떤 진귀한 새가 한 마리 날아들었을 때에 일어날 그 일과 비슷합니다.
친우들의 모임에서 하는 감화는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아무도 모임에 올 때 미리 말해야겠다든지 그런 각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예레미야의 비유를 빌어서 한다면 우리의 종교는 샘에서 솟아나와야 할 것이지 물웅덩이에서 길어먹는 것이어서는 아니됩니다. 감화는 그 모임의 생명에서 신선하게 순수하게 솟아올라야 합니다. 비유를 바꾸어 말한다면, 싹이 트기 전에 적당한 조건이 오기를 기다리기 위하여 씨를 일찍 뿌려 두어야 합니다. 나중에는 감화로까지 자라서 말로 발표되어 나오는 그 관심거리는 아마 어떤 때, 일상 잡무를 하고 있는 동안 혹은 혼자 물러가기도 하고 예배를 드리기도 하는 동안에 마음에 떠올랐을 것입니다.

익어서 이제 말할 때가 왔다고 분명히 느껴지는 때까지 그것을 잘 간수 해두어야 할 것입니다.
메리 잉글랜드(Mary England)라는 18세기의 한 친우가 이런 꿈을 꾼 일이 있습니다. 물동이를 샘에 넣어 물을 길어서 곧 가지고 가려 하니 물이 다 쏟아져나와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엔 동이를 한참 물속에 담갔다가 천천히 했더니 물이 쏟아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보고 그는 모임에서 말하자는 생각이 났을 때, 너무 서둘러서는 아니 된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감화 말이 있은 다음에는 침묵이 계속되므로 듣는 사람들 자신들이 더 이어서 생각할 기회가 있습니다. 친우모임에서 하는 말은 있는 말을 다 한다기보다는 함축성이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어느 정도 모호할 수까지도 있습니다. 정신적 진리는 과학적 진리처럼 줄을 그어서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의식하는 사상의 수평선을 넘은 황무지의 어둑한 변자리에 있습니다. 영계의 말은 상징적이요, 그 암시하는 것은 사실이기보다는 자신을 뛰어넘어 모든 존재의 밑바닥을 가리키는 부호들입니다. 어떤 때는 그 영의 음성은 전혀 말로 할 수 없기 때문에 한 숨으로 겨우 발표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완전한 침묵밖에 없는 수가 있습니다.

퀘이커 모임에서 하는 말은 어떤 문제에 관한 것이라도 좋습니다. 다만 분명히 종교적인 범위 안에 속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수학에서, 한 좌표 안에서 동그라미인 것이 다른 좌표 안에서는 길죽 동그라미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속적인 배경 안에서는 이렇게 뵈는 것이 종교 적인 범주 안에서는 매우 다른 모양을 가지게 됩니다.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의 차이는 곱고 미움과 선하고 악한 사이의 차이와 같이 아마 말로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은 그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입장에서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이냐”가 아니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입니다.
종교적인 발언으로는 틀에 박힌 도덕의 말보다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 의 영 안에 살라고 단순히 외치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그 영 안에 사는 사람은 자연히 역사적 그리스도의 교훈을 따르게 됩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 가운데 그리스도가 임하여 계시는 것을 진실히 체험한다면, 모든 말이 다 그의 영에 잘 들어맞은 것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인격과 사업에서 존경을 받는 사람과 말을 한다면 그 하는 모든 말이 그 사람에게 맞도록 되는 법입니다. 누가 말했듯이 아무리 가시덤불을 뒤진다 해도, 불붙는 가시덤불을 뒤질 사람은 없습니다.

죄의 결과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식의 설교는 퀘이커의 전형적인 설교는 아닙니다. 영혼을 완전한 데로 인도하는 것은, 선을 즐겨함으로써 되지, 악을 무서워함으로써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스티븐 그렐레트(Stephen Grellet)에 대하여 월리엄 앨린슨(William Allinson)은 말하기를 그의 감화는 설득력이 있고 예언자적이요 권면적인 동시에 엄숙하고, 박력있고, 경고적이었다고 했습니다. 빛이 맨 먼저 하는 일은 죄를 드러냄입니다. 누구나 장애물이 그 빛을 가리어서 생기는 그 깜깜한 그림자를 지적하기를 서슴어서는 아니됩니다.
죄악의 무서운 실제를 깨닫고, 그 결과로 오는 겸손과 의지하는 느낌이야말로 새로남의 첫걸음입니다. 그것 없이 정신적 여행의 출발은 아니됩니다. 그러나 영혼은 언제까지 그 캄캄한 속에만 있어서는 아니됩니다. 예배모임의 목적은 그 암흑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암흑을 이기는 빛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가 그 목적으로 향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요, 사람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 생명만이 그 목적에 도달하는 힘을 줄 수 있습니다. 다음에서 예로 든 조지 폭스가 병들고 마음에 많은 괴로움을 가졌던 크롬웰의 딸 클레이폴 부인(Lady Claypole)에게 보낸 편지는 바로 그러한 종류의 것이었습니다.

어떠한 유혹과 정신 빠짐과 어지러움을 그 빛이 드러내어 보여주더라도 그 유혹, 어지러움, 타락을 들여다보지 마십시오. 그보다 그것을 드러낸 그 빛을 보십시오. 그것은 아래로 죄, 타락, 헤매임만 들여다보면 거기 삼키워 버리지만 그것을 드러내준 그 빛을 들여다보면 스스로 그것을 넘어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서간 1: 488)

예배모임에서 나오는 가장 높은 말은 기도입니다. 예배하는 사람이 그 모임에서 기도의 영이 자기를 통하여 말씀을 하고자 하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그 모임의 입이 되어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게 될 것입니다. 그의 기도의 말은 ‘내’가 아니고 ‘우리’ 입니다. 자기를 위한 기도는 대개 침묵 중에 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나 기도는 어디까지나 자기의 일이요, 친밀한 것이기 때문에 들리는 말로는 할 수가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진실치 못하고 형식적인 것 같아서 그것을 피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겸손하게 올리는 참된 기도처럼 모임 전체를 힘있게 돕는 것은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는 능히 하지 못하는 말을 듣고 감사를 느낍니다.

예배모임에서 말을 하라는 명령은 교육 있는 사람, 없는 사람, 늙은 이, 젊은이, 남자, 여자, 누구에게나 올 수 있습니다. 300년 동안의 퀘이커 역사는 말하는 은혜는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령한 은혜를 받았다는 증거밖에 또 다른 무슨 임명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조지 폭스의 젊은 시절의 ‘열림’은 그에게 전도자가 되기 위하여 옥스포드나 케임브리지에서 훈련을 받을 필요는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초기의 퀘이커 전도자 중에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도 더러 있었으나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성경시대의 사도나 예언자들도 그러 했습니다. 초대의 친우들은 누구보다도 더 옥스포드, 케임브리지, 에던버러, 애버딘 대학 학자들에게 가장 혹독한 학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친우들이 전도의 선결 조건으로서 학문의 지위를 낮게 보는 것에 분개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그들이 성경을 원어로 읽을 줄도 모른다고 비웃음을 받았을 때 친우들은 조지 폭스가 한 것처럼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원어입니다……거룩하게 하는 것도 말씀입니다. 남자나 여자나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고, 그들을 하나님의 성질 속으로 인도하는 것도 말씀입니다. (서간 249:1667)

친우들이 남자나 여자나 인생활동을 위하여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그들이 설립한, 유지하고 있는 학교들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교육은 정신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또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말로 전도하는 데 그것이 절대 필요조건은 아닙니다.
맨 처음부터 퀘이커 여자들은 남자들과 같이 감화를 말했습니다.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부르심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친우들은 다만 그 결과를 지적하면 그만이었습니다. 바클레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날에 정말 많은 영혼들을 여자들의 감화를 통하여 회개시켰고, 또 그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혼을 위로하시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것은 실지 체험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바울의 교훈은(고린도 전서 14:34) 같은 서간 안에 있는, 예언할 때에 여자들의 머리 수건에 관하여 한 교훈의 말과 비추어서 읽었습니다.(고린도 전서 11:5,13) 여자들의 전도하는 지위를 두둔하기 위하여 친우들이 매양 쓰곤 한 성경 귀절은 오순절에 베드로가 인용한 선지자 요엘의 말이었습니다. “내가 내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주리니, 너희 아들과 딸들이 예언을 하리라.”(사도행전 2:17)
폭스는 말하기를 남녀의 불평등은 타락의 결과로 온 것이나, 그리스도의 회복으로 말미암아……이제는 타락 전과 같이……그들은 서로 돕는 자입니다.(서간 291)
전도의 책임을 특별히 준비하여 대표로 세운 개인, 혹은 몇 사람에 두지 않고 모임 전체에다 두는 방법은 분명히 아주 어려운 문제입니다. 퀘이커 모임에서의 전도는 이날까지 문제였고 앞으로 계속 문제일 것입니다. 체험도 옅고 가장 높은 동기에 이르지도 못하여 전도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 자유라는 틈을 타가지고 나옵니다. 조지 폭스는 ‘조마조마 한, 토라진, 덤비는, 안절부절하는 마음’으로 설교를 해서는 아니된다고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서간 131) 어떤 사람은 모임이 종교적 성질의 것이라는 점도 모르고, 주를 우러르기 위한 모임보다도 토론회나 강연회에나 알맞을 만한 말을 끄집어냅니다. 그리고 지난날에는 분명 은혜를 받았으나 지금은 이미 그것을 잃어버린 줄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을 너무 많이 하면 사람들이 말에 너무 의지하게 됩니다.
수아 에반즈(Joshua Evans)는 그 일기에서 말합니다.

요즘은 우리 모임에 전에 목사였던 네 사람의 친우가 나왔습니다. 나는 이런 생각이 났습니다. 시절이 가물 때에 우리는 비가 올까 하고 구름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떤 때는 구름은 많아도 비는 조금밖에 아니 오는 때가 있습니다. 마찬 가지로 여러 설교자가 정면석에 나타나면 사람들이 그들만 바라보고 정말 영혼의 주교는 향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실망하는 때가 많습니다.

씨뿌리는 비유에 어떤 씨는 굳은 땅에 떨어져서 싹이 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땅이 굳어진 것은 씨를 뿌리느라고 너무 밟고 오르내려서 그럴 것입니다.
친우모임에 나오는 사람은 적당치 않다 생각되는 것도, 적어도 자기에게는 그렇더라도, 그런 것도 많이 들어 버릇해야 합니다. 빛을 향해 맹목적으로 애를 쓰면서 길을 못 찾고 있는 설교자를 존경하여 참는 그 자체가 벌써 값있는 훈련입니다. 만일 잘못된 감화 때문에 모임이 잘못되고 있는 경우라면, 모임의 각 분자들은 모임의 질의 일부분은 자기와 자기의 충성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는 또 친우들의 모임은 데모크라시와 마찬가지로 통제 대신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그 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친우들의 모임은 잘 짜인 표준에 의하여 진행되도록 제정되어 있는 교회의 예배보다는 높이 올라갈 수도 있고 낮게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자유로운 프로그램 없이 자발적으로 하는 감화가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 것같이 직업적 프로그램으로 되는 설교는 아마 마찬가지로 또 다른 중대한 문제를 일으킬 것입니다. 성직과 평신도의 차별은 교회의 통일을 돕지 못합니다. 평신도 편에 책임이 없는 것은 영의 자람을 돕지 못합니다.
설교를 미리미리 준비하는 일은, 바클레가 말하는 ‘두루 찾아 주워 모은 것’(변호론 352) 혹은 조지 폭스가 말하는 ‘머리로 짜낸 고린내나는 것’(서간275: 1669)이 돼버리고 말수 있습니다. 친우들은 이것을 어떤 때는 ‘물마른 방아질’이라고 했습니다. 말하는 것이 예배자의 생활과 연구에서 새로이 솟아날 때에 그것은 더 생기가 있습니다. 퀘이커 모임에서 깊은 깨달음의 반짝하는 불꽃에 따라 나오는 한마디 말이 길다란 설교보다 더 힘이 있을 것입니다.
직업 전도자들이 보수를 받는다고 친우들이 비난하던 것은 이제는 그쳤습니다. 사실 그들이 넉넉하지도 못한 보수를 받고 있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그 보수를 받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진실한 소감의 발표로 되는 그의 설교까지도 억울하게 그 효과의 감소를 당할 수가 있습니까? 그는 또 다른 약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 메시지가 듣는 사람의 가슴 속에 깊이 스며들려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고요한 시간이 너무도 없는 때가 많습니다.

순서 없이 모임을 하려면 거기 여러 가지 어려운 점들이 들어 있는데 그것은 퀘이커의 전역사 과정을 통해서 장로를 세움으로써 어느 정도 막아낼 수가 있었습니다. 장로의 주요한 책임은 모임에서 말을 하는 사람에게 조언을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친우모임의 자유로 인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는 후에보다도 초기에 더 어려운 점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운동이 아직 유동적이요, 조직이 잘 짜여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운동이 무엇을 목표하는지 매우 부분적으로밖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거기 관계를 하고 있었습니다. 회원 명부의 제도가 서기도 전에 친우들은 제명 성명을 하지 않으면 아니됐었습니다.
친우회의 시작부터 최근까지 모임에서 감화를 자주 하는 사람들은 정기적으로 모여서 서로 충고를 하고 서로 도와왔습니다. 이러한 감화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는 친우들의 월회, 사계회, 연회는 모임의 정신생활의 실력을 길러내는 데 많은 힘을 썼습니다. 이것이 정말 ‘예언자의 학교’였습니다. 차차 시일이 감에 따라 친우들은, 이렇게 자주 말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끼리도 그러하거니와 또 청중으로부터도 비평을 듣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다음에 보는 1714년 필라델피아 연회의 의사록은 이러한 모임들의 중요한 변화가 아메리카에서 일어나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을 보여줍니다.

이 모임은 설교자의 모임을 현재 가지고 있거나 혹은 앞으로 가지려는 월회는 둘 혹은 그 이상의 친우를 지명하여 선교자들 모임에 같이 참석하게 할 것을 결의한다. 주의할 것은 그 뽑히는 친우는 근신 견실한 친우일 것.

이들을 장로(elders)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자의 모임을 ‘선교자’와 장로의 모임이라고 했습니다. 선교자는 ‘찬성’ ‘추천’ 혹은 ‘등록’이 된 때, 즉 모임이 그들의 전도에 공식적으로 동의를 표명했을 때 그 모임에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그러한 선교자들이 다른 모임을 방문하고 싶을 때는, 그 모임이 만일 그 방문을 찬성한다면, 선교자에 동의한다는 것을 표명한 의사록을 줍니다. 이 의사록이 신임장 혹은 소개장의 역할을 합니다. 대개 장로 한 사람이 그 선교자를 따라 인도자, 원조자, 비평자로서 같이 여행을 합니다.
‘돌봄’ (eldering)은 자유의 원리 위에 놓여 있는 모임에는 없어서는 아니되는 요소입니다. 그 목적은 단체 전체의 자유를 될수록 크게 하기 위하여 개인의 자유를 될수록 제한하는 데 있습니다. 친우모임에서 필요한 여러 가지 조정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것이 개인의 자유와 전체의 자유와의 사이의 조절입니다. 개인이 만일 단체의 구속을 너무 받는다면 그 단체는 개인만이 줄 수 있는, 듣기 거북은 하겠지만, 새로운 진리를 얻을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단체 각 개인들의 맘대로 하는 것이 돼버려도 아니됩니다. 그렇게 되면 같이 모이는 원목적이 방해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단체나 개인이나 둘 다 진리의 거룩한 빛에 겸손히 복종해서만 제각기 제 할 일을 다할 수 있고 하나로 같이 살 수 있습니다.
‘돌봄’ 이란 말이 충고란 말과 같은 뜻이 돼버렸지만 사실 격려가 필요한때도 많습니다. 친우들의 모임에서 말을 하는 것은 자진하여 지는 책임이기 때문에 겸손하고 마음이 약한 사람은 자연히 움츠러들게 됩니다. 젊은 사람이 더욱 그렇습니다. 1723년 필라델피아 연회는 그 의사록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우리 모든 자비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우리 여러 젊은이들에게 산 전도의 거룩한 생을 열어주시었고, 또 지금도 열고 계신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러므로 선교자들이나 장로들이 이 젊은이들, 아직 선교에 익숙치 못한 이들 젊은이들에게 자녀들을 길러내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이 되어주기를 간곡히 바라는 바이다.

1765 년에는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선교자들과 장로들은 선교에 미숙한 젊은이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서로서로 돌보아주며 최선을 다하기를 간절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권고한다. 생명과 능력은 없이 말에만 빠지려는 너무 지나친 분위기들은 눌러주어야 할 것이고, 목소리 몸짓을 꾸며서 하는 것과 그밖에 예배에 해가 될 만한 모든 것에 대하여는 타일러야 할 것이며, 그러면서도 지친사람에게는 적절한 한마디 말을 주어 겸손하고 조심성 있는 여행자를 격려해주어야 할 것이다.

장로 노릇을 참으로 건설적으로 한 좋은 실례를 월리엄 팬이 보여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그 받은 사람이 기록한 것이 있습니다. 어떤 큰 모임에서 중요한 감화를 지도적인 친우들이 하려니 하고 일반이 기대하고 있었던 때에 사람들이 이름도 잘 모르는 존 리처드슨(John Richardson) 이라는 청년이 길다랗게 말을 해버렸습니다. 그런 다음, 팬이 그 사람에게 말을 했습니다.

오늘 예배의 중요한 일은 네가 했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비록 보기에 하나의 관목(灌木)같이 밖에 아니 뵈는 너를 통해서 주어지기는 했지마는, 우리는 즐겨 평안한 마음으로 그 진리에 순종하였다. 또 주님이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쓰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존 러티(John Rutty)는 의사요, 의학책도 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더블린 모임의 장로의 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의『영의 일기』에는 많은 짤막짤막한 기도가 들어 있습니다. 그 안에(1796) 이런 것이 있습니다.

주여, 제가 만일 영의 집의 잡은 것 중 칼이 될 수 없다면 숫돌로라도 되게 해주옵소서.

장로가 되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 진리를 전하기 위하여 쓰시는 기구를 개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아니 됩니다. 그래서 폭스는 이런 충고를 합니다.

친우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땅에서 돋아올라오는 연한 식물들 속에 발을 들여놓을 때 조심하지 않으면 아니됩니다. 하나님의 포도원을 짓밟고 상하고 망가뜨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월리엄 뮤스버리 (William Dewsbury)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네가 무슨 은사를 받았거나……찬송이거나 예언이거나 권면이거나간에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네게 명령하는 바이지만, 너는 주의 영을 끄지 말고 네 은사를 하나님의 제단에 가져다놓고, 빛 안에 있는 주의 생명의 힘으로 그것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치어라. 그리하여 네 재주가 늘고, 어린것이 자라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아, 서로서로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의 지극히 연한 숨에도 민첩히 하고, 모두 고쳐주시는 영으로 입혀주심을 입을 때 까지 기다리라.

전도자에게 필요한 모든 조언의 알짬이라고도 할 만한 말을 존 월리엄즈가 했습니다.

시작도 생명으로, 계속도 생명으로, 끝맺음도 생명으로

친우회의 감화는 어떤 때는 예언이라고도 할 만합니다. 물론 어떤 친우도 자기를 예언자라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감화가 예언이라는 것은 다만 이러한 의미에서입니다. 즉 인간적인 아무런 준비 없이 직접성령의 인도로 이루어진 거라고 믿는 가운데서 나왔다는 것. 그런 외침은 어떤 때는 예언이 라는 확신을 줍니다. 사무엘 포더길()에 대해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의 감화는 어떤 때는 불길같이 내쏘아서 저 맨 밑바닥의 어둡고 굳은 구렁에까지 뚫고 들어가는 일이 많습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의 심으시는 연한 초목 위에 이슬같이 내리며, 영의 깊은 동정으로 아픔을 같이 나눕니다.

1658년 처음으로 아메리카를 방문한 조시아 콜(Josiah Coale)에 관해서 역사가 시웰(Sewel)은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그가 죄악의 세상을 향하여 말할 때는 엄숙하고 무거운 표정이 그 얼굴에 나타나고, 그 말은 쇠뭉치와 같고 날카로운 칼 같습니다. 그는 우뢰의 아들이지만 그러나 또 경건한 혼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져줄 때는, 그 입에서 사랑스런 말이 시냇물처럼 흘러나옵니다.

신약 교회에 예언자들이 있었던 것은 가장 중요한 전례라고 퀘이커들은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여러 가지 영의 은사를 그 중요성의 순서에 따라 모조리 들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예언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을 고치는 것과,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말하였습니다.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린도전서」12:28,14:1)그러나 기독교사의 제 1세기에서 그렇게 높은 지위에 있던 예언의 능력은 곧 제사제도 밑에 들게 되었고, 제 2세기에 와서는 전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예언주의를 다시 일으키려고 2세기에 일어났던 몬타누스파와 같은 운동은 혹독한 탄압을 받았습니다. 예로부터 있는 그리고 구약성경에 있어서 여러 가지 극적 사건들의 원인이 되는 제사와 예언자와의 싸움은 기독교에 있어서는 일찍부터 제사의 승리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 까닭 때문입니다. 건전한 교리를 유지해갈 필요와 성례전을 차지하는 특별한 자격을 가진 사람의 중요성. 바울이 “예언하는 사람의 영은 그 예언하는 사람에게 통제를 받는 것입니다”(고린도 전서 14: 32) 한 지 60년도 채 못 돼서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제사에게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장로 곧 후일의 제사는 예언자들의 외침이 무궤도적이고, 혼란을 일으키고 때로는 혁명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제어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됐습니다. 제 1세기 마지막 3분의 1에 기독교가 어떤 발전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6세기 전에 히브리 예언자들이 제사세력에 대항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예언자들이 성직자제도의 경향에 대항했던 것은 있었음직한 일입니다. 마지막 만찬을 기념하기 위하여 하던 애찬, 즉「고린도 전서」11장에 적혀 있는 모양으로 같이 회식을 하던 것이 차차 의식적이 되고 그것을 위하여 어떤 특정한 사람이 임명되게 되었습니다.

초대 기독교회에서 예언이 쇠퇴되도록 만든 두 원인, 즉 성례전적인 종교와 정통적인 교리의 커짐은 퀘이커주의 안에는 없었습니다. 성례전이라면 친우회에서는 제사직을 통할 것 없이, 누구나 직접 할 수 있는 내적인 체험으로 해석했습니다. 친우들은 필요하다면 언제나 자기 믿는 바를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회원이 되는 조건으로 아무런 신앙개조를 제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외적 권위로 속박이 되지 않는, 자유로운, 자진해 하는 예언적인 감화를 장려하도록 된 예배형식을 유지해왔습니다. 그 결과 예언적인 감화가 친우회 안에서는 교회에서보다 더 오래 계속되었습니다.
모든 종교단체에서 다 그런 것같이 친우회 안에도 제사식의 사고방식을 가지는 사람이 나타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친우회에서도 장로가 어떤 제사적인 직능을 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초대 교회에 비하여 그 정도가 낮고 다른 방식으로였지마는 18세기 동안에 장로의 세력은 차차 신장되어갔습니다. 그들의 일은 중요하고도 필요한 것들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퀘이커주의는 하나의 독특한 문화형, 곧 규칙적인 생활양식을 발전시켰습니다. 퀘이커는 그 말 하는 것, 옷 입는 것, 행동하는 것을 보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장로 들은 전통의 보호자가 됐고 모든 제사적 경향을 가진 사람이 다 그런 것같이, 그들은 새 진리의 발견보다는 낡은 진리를 보존하는 데 더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퀘이커주의가 이렇듯이 속으로 여무는 시기를 통과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요, 또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으로서 퀘이커 종교는 모임 집과 시장으로부터 가정으로 생활의 모든 면으로 들어갔습니다. 장로들은 마침내 너무 지나쳐서 전통에 거슬려서 일어나는 새 생활을 억누르는 데로 기울어졌습니다. 그러나 19세기의 첫 사반세기, 필라델피아 장로들이 신학 학설에 통제를 가하려고 하기 전까지는 장로의 권위에 대해 일치된 반항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영국에서는 그러한 분열이 없이 보다 자유로운 양식의 훈련으로 옮겨갔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친우회가 둘로 갈라지게 됐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친우회 중에서도 자유롭고 프로그램 없는 예배를 유지해가려는 파 중에서 예언자적인 전도가 쇠하게 된 책임을 장로들에게 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생명의 샘을 모든 더러운 것에 물들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극력 주의했습니다. 그 쇠약은 주로 모든 종교단체에 나타났던 고도의 지식주의와 세속주의에서 온 것입니다. 고등교육, 특히 대학교육이 더 일반화되었습니다. 그 결과로서 자아의식적인, 합리주의적인 인생관이, 흔히 인도주의에 접근하면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감화에도 지식적인 내용이 늘어갔습니다. 이것은 대체로는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 따라 영적 내용이 줄어드는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지식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서로 도우면서 발전할 수 없다는 진정한 이유는 없습니다. 인간 이성과 인간 이상인 영은, 둘다 없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균형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한세대도 못되는 동안에, 아무리 일반식이 거슬리고 불합리하더라도 속의 인도에 완전히 내맡겨야 한다는 것을 그 특성으로 하던 옛날식의 예언자적인 전도가 가장 보수적인 퀘이커 중에서도 거의 다 없어졌습니다. 다른데에서는 더 일찍 없어졌습니다. 퀘이커 예언자들은 독특한 개성의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느끼는 대로 말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하나의 남자나 여자가 다 윌리엄 펜이 조지 폭스를 가리켜 했던 말로 형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는 독창이지 누구의 모형이 아니었다.” 그들은 듣는 사람의 귀에 거슬릴 바른 말도 참 사랑 하는 맘으로 했기 때문에, 아무도 성내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뜻에 복종함으로 말미암아 속의 모든 갈등이 없어졌기 때문에 그 얼굴이 하나님의 화평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네의 약점 때문에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네 분에 넘치는 일을 요구하시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군중 심리적으로 되어 있는 현대에서는 그러한 독특한성격의 인물을 내는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공장만 아니라 대학에서도 일정한 틀을 거쳐서 제품을 내고 있습니다. 정신적이거나 기업적이거나 겉에 있는 기구의 세계가 너무 발달됐기 때문에 인간 구경의 목적에 관계되는 궁극의 의미의 깊은 세계는 눈앞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마치 뚫고 들어가 길어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지하수와도 같습니다.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심하고 있는 전도도 내버려서는 아니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을 하나님과, 또 사람 서로서로와 연결시킴으로써 해결하려는 그러한 정도로서 깊어지고 강화되지 않으면 아니됩니다. 휘티어의 소네트「외침」(Utterance)은 예배모임에서 말을 하라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직면하는 문제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가장 깊은 속의 진리를 더듬는 데 이 불완전한 말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눈멀고 약한 몸으로써 누가 능히 길을 가리키고 앞장을 서며
평범한 말로 진리의 신비를 어찌 풀 수 있느냐?
그러나 네 것은 아닌 어떤 무엇이
그 밑에서는 우리 모든 제도, 신조, 예배, 의식이
꿈밖에 아니 돼버리는 거룩한 뜻의 그림자가
황송하게도 네게 알려지는 때면
너는 숨김없이 외치라, 비록 네 입술에서는
참도 거짓으로, 아름다움도 더러움으로 변해버릴까 두려워
가볍게 입을 열 수 없을지라도
그리하여 네 의무를 기도의 저울에 달아
네게 주어졌다 믿는 바를 전하라, 그러면 너는 알리라.
그것은 고대하는 밭고랑에 떨어진 한알의 선한 씨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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