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산스님 이야기 석사자(石獅子)' 전편 중에서
노하 이야기/선사선담
'구산스님 이야기 석사자(石獅子)' 전편 중에서노하
2017. 4. 21. 15:14댓글수1공감수0
O 이 몸이 건강할 때는 백년이나 천년이나 살 것처럼 믿으나, 숨 한 번 내쉬었다가 들이쉬지 못하면 백년이요 들이쉬었다가 내쉬지 못하면 또한 백년이다. 인생 백년이 숨 한번 쉬는 데 달린 것이다.
그러면 과연 안신입명처(安身立命處)가 어디인고? 이 몸을 운전하는 주인공이 마음 붙일 곳이 어디인고? 나 자신을 믿는 것이 결국 자신에게 속는 것이 아니겠는가? 꿈도 현상계도 모두 환상이 아닐 수 없다.
사람마다 나름대로 나란 멋에 살건만은
이 몸은 환상이라 믿을 곳이 어디런가
마음 하나 깨치면 제일 기쁨 아니리!
O 이 몸이 지(地)-수(水)-화(火)-풍(風)으로 구성되고, 세계도 지(地)-수(水)-화(火)-풍(風)으로 구성되었으니 세계도 인류도 모든 동물도 나 자신과 다를 바가 없다. 이것이 곧 대아(大我)이다. 그러니 세계의 어느 부분도 떼어버릴 수는 없다. 결코 남이 있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인 나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대아(大我)는 곧 무아(無我)인 것이다.
그러면 소아(小我)는 어떤 것인가? 6,7척에 불과한 이 육신만이 나이고 그 밖의 것은 자기와 상관없는 남으로 생각하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만이 내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재산이 아무리 많이 있다 하더라도 빈궁함을 면할 도리가 없다. 뿐만 아니라 천만인 속에 있어도 고독감을 면할 도리가 없다.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가 남이요, 나는 일개의 자기 몸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느 경지에서 생활할 것인가 물으면 누구나 대아경지에서 생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들 말한다. 대아경지에서 외계를 관찰할 때에는 남녀 차별도, 노소도, 생사도, 열반도, 종교도, 원근도, 선악도, 시비도, 극락도, 천당도, 사바도 일체 차별의식이 끊어진 진성의 세계이다.
세계도 인류도 유정무정(有情無情)도 우주 만유가 모두 자신인데 그 세계에 조물주가 어디에 있겠는가? 자신을 지배하는 자성(自性)이 바로 진아(眞我)이며 조물주이다.
我生汝生하고 我死汝死라고 한 보조국사의 말씀은 자성을 발견할 때에 자기 자신이 생사를 초월하면 우주 만유가 동시에 생사를 해탈하기 때문에 '내가 살면 너도 산다'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미시(迷時)에는 주객이 분리되고 오시(悟時)에는 주객을 초월하여 격외인(格外人)이 되는 것이다.
O 생사고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마음을 찾아 깨치는 그 순간에 육도고해가 사라진다. 중생들은 육도고해가 따로 존재한 것으로 착각하지만 몽중(夢中)의 시계도 실존인 양 착각하였다가 잠을 깨면 환상으로 인식하듯이 마음이 어리석으면 환상을 실존으로 착각하였다가 마음을 깨달으면 환상 세계는 자취도 없다. 절대불변인 실성(實性)을 깨달은 사람의 안목에서는 우주의 대진리를 곧바로 인식하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를 초월하고 시공도 초월해서 유무에 거리낌이 없으니 이것을 해탈이라 한다.
O 태어나되 태어남이 없고 죽되 죽음이 없으며
있지 아니하되 있고 없지 아니하되 없음이라.
유무가 무애(無碍)하고 범성(凡聖)이 무이(無異)하고 미오(迷悟)가 불이(不二)하니 선악이 무근(無根)이라, 사바와 극락이 일여하고 생사와 열반이 동화(同和)하고 이(理)와 사(事)가 무분별한 것이 열반심이며 대자재심이며 대해탈심이며 최상승심이다.
O 우주만유가 성주괴공(成住壞空)을 하는 듯하나 그 근본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그 변하지 않는 원리 가운데 또한 삼라만상이 벌어지니 이것을 일체유심조라 한다. 하기에 사람마다 모두 조물주요 절대자이면서도 자기 자신의 본성을 매각(昧却)했기 때문에 성주괴공 속에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다. 비단 사람뿐이랴! 항하사 미진수세계에 진진찰찰이 불생불멸 부증불감하니 그것을 무량수 무량광이라 한다. 그러면 그 근본 자체란 무엇인가?
자성은 사바와 극락의 차별이 없고 본심은 바로 아미타불이네
금색상은 위의를 나툴 뿐 무량한 광명 속에 끝없는 부처로세.
O 사람은 누구나 대법기(大法器)가 되기를 희망한다. 사람마다 이 몸을 운전하는 주인공이 있는데 그것을 일러 마음이다, 넋이다, 영혼이다, 본래면목이다, 얼이다 라고 하니 이것은 모두 다 이름일 뿐이다. 실제와는 상관없는 대명사이니 명상(名相)을 떠나서 자체가 어떻게 생겼는지 물으면 육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으니 공한 것이 아닌가라고 답한다. 그러면 물질이 아니라서 잡을 수 없으니 허공이겠는가? 허공이 선악이나 시비를 판단할 수 있는가? 허공은 무기체이기 때문에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러면 소소영영하게 아는 그 한 물건이 무엇인고? 다시 말하면 이 몸을 운전하는 주인공은 무엇일까? 명사를 떼고 나니 마음도 아니요, 깨치지 못했으니 부처도 아니요, 주고받지 못하니 물건도 아니요, 허공이 선악을 알 수 없으니 허공도 아니다. 이와 같이 네 가지로 부정하고 나면 필경에 그 한 물건은 무엇일까? 의심이 일어난다. 그래서 '이 뭣고(是甚麽)?'라는 화두인 공안이 성립된다.
이 화두선은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라, 큰 의심에 큰 깨달음이 있나니 의심 없는 것이 큰 병이 된다. 옛날 중국 당나라 때 조주라는 스님은 고불화현이라 칭송하였는데 어느 날 한 납자가 와서 조주 스님께 물었다.
"저 개에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스님은 "무(無)"라는 답하였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조주스님은 무엇 때문에, 어째서 '무(無)'라고 하였는고? 참구하고 참구하라. 조주수님의 '무(無)'자는 있다, 없다 하는 '무(無)'가 아니다. 그리고 참으로 없어서 '무(無)'라 말한 것도 아니다. 그러면 어째서 또 무슨 까닭에 '무(無)'라 하였는고? 조주 스님이 '무(無)'라고 말로 표현하기 이전에 무슨 생각이 있어서 '무(無)'라 하였는고? 여기에 착안하여야 한다.
이 '무(無)'자 화두를 깨치면 조주 스님과 같은 고불이 될 뿐만 아니라 삼세제불과 역대조사와 시방보살이며 천하 선지식과 함께 파수공행하느니라. 이와 같이 깨쳐서 완전무결한 인격을 이루는 것이 인간 최고의 행복이요 인간과 천상의 사표가 되는 길이다. 옛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한낱 '무(無)'자는 한 덩어리 불과 같아서 가까이 가면 얼굴이 확 타버린다' 하였으니 이 말이 과연 무슨 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