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27

'구산스님 이야기 석사자(石獅子)' 전편 중에서

'구산스님 이야기 석사자(石獅子)' 전편 중에서





노하 이야기/선사선담
'구산스님 이야기 석사자(石獅子)' 전편 중에서노하
2017. 4. 21. 15:14댓글수1공감수0





















O 이 몸이 건강할 때는 백년이나 천년이나 살 것처럼 믿으나, 숨 한 번 내쉬었다가 들이쉬지 못하면 백년이요 들이쉬었다가 내쉬지 못하면 또한 백년이다. 인생 백년이 숨 한번 쉬는 데 달린 것이다.



그러면 과연 안신입명처(安身立命處)가 어디인고? 이 몸을 운전하는 주인공이 마음 붙일 곳이 어디인고? 나 자신을 믿는 것이 결국 자신에게 속는 것이 아니겠는가? 꿈도 현상계도 모두 환상이 아닐 수 없다.



사람마다 나름대로 나란 멋에 살건만은

이 몸은 환상이라 믿을 곳이 어디런가

마음 하나 깨치면 제일 기쁨 아니리!





O 이 몸이 지(地)-수(水)-화(火)-풍(風)으로 구성되고, 세계도 지(地)-수(水)-화(火)-풍(風)으로 구성되었으니 세계도 인류도 모든 동물도 나 자신과 다를 바가 없다. 이것이 곧 대아(大我)이다. 그러니 세계의 어느 부분도 떼어버릴 수는 없다. 결코 남이 있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인 나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대아(大我)는 곧 무아(無我)인 것이다.



그러면 소아(小我)는 어떤 것인가? 6,7척에 불과한 이 육신만이 나이고 그 밖의 것은 자기와 상관없는 남으로 생각하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만이 내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재산이 아무리 많이 있다 하더라도 빈궁함을 면할 도리가 없다. 뿐만 아니라 천만인 속에 있어도 고독감을 면할 도리가 없다.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가 남이요, 나는 일개의 자기 몸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느 경지에서 생활할 것인가 물으면 누구나 대아경지에서 생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들 말한다. 대아경지에서 외계를 관찰할 때에는 남녀 차별도, 노소도, 생사도, 열반도, 종교도, 원근도, 선악도, 시비도, 극락도, 천당도, 사바도 일체 차별의식이 끊어진 진성의 세계이다.



세계도 인류도 유정무정(有情無情)도 우주 만유가 모두 자신인데 그 세계에 조물주가 어디에 있겠는가? 자신을 지배하는 자성(自性)이 바로 진아(眞我)이며 조물주이다.



我生汝生하고 我死汝死라고 한 보조국사의 말씀은 자성을 발견할 때에 자기 자신이 생사를 초월하면 우주 만유가 동시에 생사를 해탈하기 때문에 '내가 살면 너도 산다'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미시(迷時)에는 주객이 분리되고 오시(悟時)에는 주객을 초월하여 격외인(格外人)이 되는 것이다.





O 생사고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마음을 찾아 깨치는 그 순간에 육도고해가 사라진다. 중생들은 육도고해가 따로 존재한 것으로 착각하지만 몽중(夢中)의 시계도 실존인 양 착각하였다가 잠을 깨면 환상으로 인식하듯이 마음이 어리석으면 환상을 실존으로 착각하였다가 마음을 깨달으면 환상 세계는 자취도 없다. 절대불변인 실성(實性)을 깨달은 사람의 안목에서는 우주의 대진리를 곧바로 인식하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를 초월하고 시공도 초월해서 유무에 거리낌이 없으니 이것을 해탈이라 한다.





O 태어나되 태어남이 없고 죽되 죽음이 없으며

있지 아니하되 있고 없지 아니하되 없음이라.



유무가 무애(無碍)하고 범성(凡聖)이 무이(無異)하고 미오(迷悟)가 불이(不二)하니 선악이 무근(無根)이라, 사바와 극락이 일여하고 생사와 열반이 동화(同和)하고 이(理)와 사(事)가 무분별한 것이 열반심이며 대자재심이며 대해탈심이며 최상승심이다.





O 우주만유가 성주괴공(成住壞空)을 하는 듯하나 그 근본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그 변하지 않는 원리 가운데 또한 삼라만상이 벌어지니 이것을 일체유심조라 한다. 하기에 사람마다 모두 조물주요 절대자이면서도 자기 자신의 본성을 매각(昧却)했기 때문에 성주괴공 속에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다. 비단 사람뿐이랴! 항하사 미진수세계에 진진찰찰이 불생불멸 부증불감하니 그것을 무량수 무량광이라 한다. 그러면 그 근본 자체란 무엇인가?



자성은 사바와 극락의 차별이 없고 본심은 바로 아미타불이네

금색상은 위의를 나툴 뿐 무량한 광명 속에 끝없는 부처로세.





O 사람은 누구나 대법기(大法器)가 되기를 희망한다. 사람마다 이 몸을 운전하는 주인공이 있는데 그것을 일러 마음이다, 넋이다, 영혼이다, 본래면목이다, 얼이다 라고 하니 이것은 모두 다 이름일 뿐이다. 실제와는 상관없는 대명사이니 명상(名相)을 떠나서 자체가 어떻게 생겼는지 물으면 육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으니 공한 것이 아닌가라고 답한다. 그러면 물질이 아니라서 잡을 수 없으니 허공이겠는가? 허공이 선악이나 시비를 판단할 수 있는가? 허공은 무기체이기 때문에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러면 소소영영하게 아는 그 한 물건이 무엇인고? 다시 말하면 이 몸을 운전하는 주인공은 무엇일까? 명사를 떼고 나니 마음도 아니요, 깨치지 못했으니 부처도 아니요, 주고받지 못하니 물건도 아니요, 허공이 선악을 알 수 없으니 허공도 아니다. 이와 같이 네 가지로 부정하고 나면 필경에 그 한 물건은 무엇일까? 의심이 일어난다. 그래서 '이 뭣고(是甚麽)?'라는 화두인 공안이 성립된다.



이 화두선은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라, 큰 의심에 큰 깨달음이 있나니 의심 없는 것이 큰 병이 된다. 옛날 중국 당나라 때 조주라는 스님은 고불화현이라 칭송하였는데 어느 날 한 납자가 와서 조주 스님께 물었다.

"저 개에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스님은 "무(無)"라는 답하였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조주스님은 무엇 때문에, 어째서 '무(無)'라고 하였는고? 참구하고 참구하라. 조주수님의 '무(無)'자는 있다, 없다 하는 '무(無)'가 아니다. 그리고 참으로 없어서 '무(無)'라 말한 것도 아니다. 그러면 어째서 또 무슨 까닭에 '무(無)'라 하였는고? 조주 스님이 '무(無)'라고 말로 표현하기 이전에 무슨 생각이 있어서 '무(無)'라 하였는고? 여기에 착안하여야 한다.



이 '무(無)'자 화두를 깨치면 조주 스님과 같은 고불이 될 뿐만 아니라 삼세제불과 역대조사와 시방보살이며 천하 선지식과 함께 파수공행하느니라. 이와 같이 깨쳐서 완전무결한 인격을 이루는 것이 인간 최고의 행복이요 인간과 천상의 사표가 되는 길이다. 옛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한낱 '무(無)'자는 한 덩어리 불과 같아서 가까이 가면 얼굴이 확 타버린다' 하였으니 이 말이 과연 무슨 말일까?

O 일체 중생이 악을 행하면서 약인 줄을 모르기 때문에 갈수록 악업이 깊어져서 악도에 떨어지건만 일체 중생은 생처(生處)로 위락(爲樂)이라. 모든 중생들은 자기가 태어난 곳을 즐거움으로 삼기 때문에 악도를 벗어날 기약이 없을 뿐 아니라 더욱더 길어진다.

무정물(無情物)도 보라. 풀 한 포기를 뽑아 던져도 뿌리가 내리고 움이 돋으며 나무를 한 그루 잘라 내 버려도 흙이 있는 부분에서는 뿌리가 내리고 나무둥제에서는 새싹이 돋는다.  

생에 대한 애착은 인간과 모든 생물이 다를 게 없다. 그러기에 육신을 무시할 것은 아니나 육신만이 '나'라고 그릇 집착하고 있는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가치관을 상실하고 있을 뿐 아니라 뭇 동물과 차이가 어디에 있을 것인가?

이 점을 자세히 생각하여 진아를 깨칠 수 있는 길을 선택하여 전제전능한 우주의 대진리를 포착하고 깨달아 필경 무위진인(無爲眞人)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시방에서 중생들을 제도하고 대법왕(大法王)의 과를 증득하여 무여열반을 수용하도록 노력할 때 올바른 인간의 길을 가게 된다.

O 한 평생을 산다 하나 호흡은 순간이다. 명재일식지간(命在一息之間)이라. 사람의 목숨이 숨 한번 들이쉬고 내쉬는 사이에 있으니 어찌 무상치 않은가? 어느 것을 '나'라 하며 믿을 곳이 어디인고? 곰곰이 생각하고 진정한 안심처를 찾으려면 선(禪)의 길을 결택하라.

좌선을 하고자 면벽관심(面壁觀心)을 할 때에 화두가 없이 눈을 감고 모든 번뇌를 끊으려고 앉으면 망상이 한없이 일어난다. 망상을 끊으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반대로 더욱 치열하게 일어나는 것이 마치 풍랑처럼 더욱 번거로워져 오히려 큰 병이 된다. 

화두는 팔만사천 번뇌망상을 제거하는 청룡보검이며 명약이다. 마음도 부처도 물건도 허공도 아닌 한 물건이 '이 무엇인고?'라고 참구하라. 이와 같이 생각할 때에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목마른 이가 물을 찾듯이, 어린애가 어머니 젖을 생각하듯이, 늙은 부모가 삼대독자를 생각하듯이, 고양이가 쥐를 잡듯이, 닭이 알을 품듯이 간절하게 생각해야 한다. 

참선을 하는 사람도 지혜롭게 마음의 당처(當處)를 반조하며 화두를 의심하다가 끝코를 잡을 시가가 도래하면 화두에 중량이 생겨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 놓을래야 놓아지질 않는다. 또 자리에 한번 앉으면 하루가 순간이고 하룻밤 역시 잠깐이다. 그때는 몸이 허공에 뜬 것 같고 지구도 있는지 없는지 모를 지경이며 몸은 허공을 나는 것처럼 가벼워진다. 그런 때는 화두를 생각하려고 노력을 아니하여도 저절로 화두가 성성하게 들린다. 화두를 버리려고 하여도 버려지지 않고 저절로 성성히 들린다. 

O 공(空)인 줄 깨친 사람은 세간사가 모두 환몽임을 깨치고 발심하여 수도의 길을 찾아간다. 자기의 기능을 따라 수도하여 진아를 깨달으니 보배가 본래 스스로 구족하였음을 알았다. 그래서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널리 일체 중생을 살펴보니 여래의 온갖 지혜와 덕성을 본래 갖추고 있다.'고 하였다. 

이미 구족하였다면 누구를 막론하고 성불하지 못할 까닭이 무엇인가? 다만 자기 스스로 하지 않을지언정 하지 못한다고 말하지 말아라. 그래서 사원(寺院)이다, 총림이다 하는 수도도량은 참된 인간을 만드는 대장간이다. 다시 말하면 범부를 용광로에 제련하여 성인을 만들어 내는 불뭇간이다. 

O 범부가 처음 발심했을 때는 닦을 것도 있고 증득할 것도 있으나 대각(大覺)하면 닦을 것도 없고 또한 증득할 것도 없다.

이곳에 이르면 성품이 본래 둘이 아니기 때문에
범성이 둘이 아니며
미오가 둘이 아니며
노소가 둘이 아니며
생사가 둘이 아니며
원근이 둘이 아니며
고저가 둘이 아니며
또 유정무정이 둘이 아니니라.

이런 고로 어떤 사람이 진리를 깨달아 근원에 돌아가면 산하대지 온 누리가 다 비로자나불의 청정법신인 것이다. 그러기에 대각은 각무소각고(覺無所覺故)로 미무능미(迷無能迷)라, 깨달았으되 깨달은 바가 없고 미했어도 미한 바가 없나니 이 이름이 여래청정선이며 또한 평등성지(平等性智)이다. 

O 만일 어떤 이가 삼세의 모든 부처님을 알고자 하면
   마땅히 법계의 성품을 보아라.
   모두가 이 마음의 조작이니라. -화엄경-

  과거의 부처님은 이미 갔고
  미래의 부처님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
  현재의 부처님은 어디에 가서 찾을 것인가?  

  마음 밖에 따로 부처없고
  부처 밖에 마음 없나니
  자심을 깨달으면 
  눈앞에 산 부처님 나타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