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함석헌’
[월요인터뷰] ‘내가 본 함석헌’ 펴낸 김용준 고려대 명예교수
중앙일보기사입력 2006-03-19 20:40 최종수정2006-03-19 20:40
[중앙일보 배영대.김성룡] “요즘 들어 함석헌 선생님의 존재가 더욱 그립고 또 그렇게 커보일 수가 없어요.” 팔순을 앞둔 노학자 김용준(79) 고려대 명예교수가 최근 ‘내가 본 함석헌'(아카넷)을 펴냈다. 올해는 함석헌옹의 탄생 105주년. 김 교수는 20대 초 청년이던 1949년 봄 어느 일요일 우연히 함석헌 선생의 YMCA 강연에 참석했다. 첫 만남에서 함 선생의 이야기에 푹 빠져버렸다. 서울 중구 남대문로5가 대우재단빌딩에 있는 사단법인 한국학술협의회 이사장실에서 만난 김 교수는 “내 전공인 유기화학을 빼놓고는 모든 것을 함 선생님께 배웠다”고 말했다.
-요즘 왜 함 선생이 더 그립다고 생각하십니까.
“아 글쎄, 이해찬 총리의 골프 말이에요. 처신이 그게 뭡니까. 운동권 출신으로 서울대 앞에서 서점을 운영해 생계를 꾸려가며 많은 이의 촉망을 받던 그 이해찬의 모습은 어디로 간 겁니까. 이해찬씨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들이 비판해 온 독재정권 사람들과 뭐가 다릅니까. 황우석 사건도 그렇고, 도대체 나라 돌아가는 모습이 너무 경박해요. 진득하게 생각하는 문화가 갈수록 적어지고 있어요. 큰인물이 자랄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야. 함 선생님처럼 사회 각 분야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어른이 없으니까 더 그렇다고 봐요. 어찌 보면 국민이 제일 똑똑한 거 같아.”
(김 교수는 반독재 민주화운동으로 70~80년대 두 번의 해직과 복직을 경험했다. 74년 민청학련 사건 당시 김 교수는 핵심 인물들이 많이 관여해 있던 한국기독학생운동총연맹(KSCF)의 이사장이었다. 민청학련을 주도한 제자와 후배들의 병풍 역할을 한 셈이다. 그들 가운데 현 정부의 요직을 맡는 등 관련 인물이 많기에 실망이 더 큰 듯했다.)
-현 시점에서 함 선생으로부터 우리가 배울 점은 무엇일까요.
“함 선생님은 한마디로 ‘순수한 사람’이었지요. 내가 함 선생님께 붙여준 별명이 ‘글쎄’예요. 무슨 질문을 하면 ‘아 글쎄’만 하시곤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적이 많았어요. 함 선생님은 팔십세가 넘은 어느 날 노자 강의를 하며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이제 나이 팔십이 넘었으니 누가 와서 한마디 남기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해야 할까’를 생각하다가 얻은 결론이 ‘기다려라’였답니다. 저 역시 낙관주의자예요. 함 선생님은 역사의 주인의식을 늘 강조했어요. 함 선생님이 내면의 성찰을 통해 사회변혁을 이루고자 했던 점도 혼돈의 시대를 사는 우리가 되새겨봐야 할 점이라고 봅니다. ”
-‘내가 본 함석헌’이란 책 제목에 무슨 특별한 뜻이 담긴 것 같습니다.
“내가 직접 보고 느낀 점을 이야기한다는 거요. 내가 보지 못하거나 보지 않은 함석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내 서재에 걸려 있는 함 선생님의 전신 사진과 글씨를 바라보고 ‘내가 본 함석헌’을 기리고 살고 있습니다.”
-함 선생에 대한 비판도 있습니다. 일부에선 여자관계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여자관계 얘기를 80년대 독재정권이 함 선생의 명성에 흠집을 내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라고만 말하진 않겠습니다. 책에도 그런 얘기를 썼어요. 함 선생이 천안의 씨알농장에 계실 때 한 여대생이 정말 끈질기게 쫓아다녔어요. 그런데 그게 어쨌단 말입니까. 함 선생님이 성자(聖者)는 아닙니다. 결코 잘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함 선생도 많이 후회하고 반성했어요. 세상을 보는 눈을 그냥 좁혀서 너는 틀렸다, 너는 맞았다 식으로 좀 그러지 말자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함 선생님이 참 시원하게 하신 말씀이 있어요. ‘죄는 없습니다’라고 했지. 죄가 없으니까 구원이 있다는 뜻인데, 참 생각의 폭이 넓고 깊어요.”
-해방전후사에 대한 인식을 놓고 여러 논란이 있습니다. 현 정부 들어 각종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도 활발합니다. 과거사 논란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나는 1927년에 태어나 소학교와 중학교(5년제 경기중학)를 모두 일제시대 때 다녔어요. 내 또래 사람들은 우리나라 역사를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어. 일본어로 일본 역사를 배웠지. 황국신민(皇國臣民) 선서를 외우고 천황이 계신 곳을 향해 동방요배(東方遙拜)를 하며 일과를 시작하던 시절입니다. 완전히 일본인으로 일본 문화에 젖어 살았던 거지. 책에도 썼는데, 사람들이 소설가 춘원 이광수를 친일파라고 욕해도 나는 그렇게 말 못해요. 나는 일제시대 때 춘원의 소설을 읽으며 한국인이 되어가기 시작했어. 중학생 때 지금은 사라진 종로의 화신상회 자리에 있던 한 서점에서 우연히 춘원이 쓴 ‘그의 자서전’이란 소설집을 발견하게 됩니다. 애정행각과 도피 얘기니까 별 거 아니죠. 그런데 도망간 곳이 간도(間島)야. 독립군들이 많던 곳이잖아. 황국신민으로 살던 내가 볼 때 전혀 다른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된 거죠. 이후 이광수의 소설은 모두 사서 읽습니다. 나에게 이광수는 흠모의 대상입니다. 이광수를 욕할 수만은 없는 것이죠. 마찬가지입니다. 특정한 하나의 패러다임이나 권력으로 역사를 재해석하려 해선 곤란해요. 과학도 한 패러다임으로 다 재단이 안 되는데 어떻게 역사를 그렇게 보려 합니까.”
-과학도 한 패러다임으로 재단이 안 된다는 말씀을 좀 더 부연 설명해 주시죠.
“신과학에 대한 소개를 내가 비교적 많이 한 편이에요. 신과학은 비주류 학설이죠. 과학의 주류는 물론 뉴턴의 패러다임입니다. 내가 해직당하지 않았으면 나도 신과학에 눈을 돌릴 틈이 없었을 테고 돈도 많이 벌었을지 몰라요. 내 전공이 유기화학인데 그게 신약 개발과 관련되거든요. 혹 항암제라도 개발했을지 모르잖아요. 해직되고 실험실이 없으니까 이런저런 다양한 분야의 책을 뒤적이게 됐는데 그때 신과학의 세계에 접하게 됐어요. 예컨대 이런 거예요.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용어 중에 ‘가역성(可逆性)’과 ‘비(非)가역성’이란 말이 있어요. 뉴턴의 역학은 가역성을 전제로 한 설명이지요. 이를테면 우리가 KTX를 타고 부산을 갔다 그대로 역으로 돌아오는 것을 가역성이라 하지요. 그렇지 못하면 비가역성이고요. 그런데 자연현상에는 비가역적인 것도 많아요. 이 책상에 놓인 종이를 태워보세요. 그걸 다시 되돌려놓을 수 있습니까. 없지요. 비가역성입니다. 생물학 분야에선 특히 그렇습니다. 인간의 뇌는 거의 비가역성의 영역이에요. 뉴턴 역학으로 다 설명하지 못하는 현상을 푸는 방향으로 과학은 진화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뉴턴 역학이 없어지진 않아요. 가역성을 전제로 한 뉴턴 패러다임은 그대로 유지되면서 비가역성에 대한 설명이 강화되는 쪽으로 과학이 발전하겠지요. 신과학이란 말, 20세기에 처음 생긴 말이 아닙니다. 갈릴레이 때도 신과학이란 말이 있었어요. 과학도 진화하는 거지요.”
-과학자이자 교육자로서 황우석 사태를 어떻게 보셨습니까.
“(김 교수는 이 질문에 목소리를 높였다) 학문을 그렇게 정치적으로 다루는 사람들이 세상에 어딨어. 말이 안 돼요. 박기영 전 청와대 보좌관도 그렇고, 우리나라 과학계에 그렇게 사람이 없습니까. 박기영 (당시) 보좌관이 황우석 교수 논문 공동집필자로 들어가 있는 것 보고는 안되겠다 생각했지요. 김대중 정부 이후 정치권력이 대학과 학계에 너무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해왔어요. 그러다 보니 학문하는 사람들이 학문 외적인 것에 신경을 쓰게 되지요.”
-도올 김용옥 전 고려대 교수의 친형이시죠. 도올이 최근 새만금 사업 반대시위를 벌이기도 했는데.
“일반 관객 입장에서 용옥이를 보면 ‘괜찮은 놈 나와서 잘 논다’고 재미있게 구경할 수도 있을 거예요. 형의 입장에서 용옥이를 보면 참 아쉬워요. 자기의 가능성을 낭비하고 있는 거 같아섭니다. 용옥이가 30년 전에 대만.일본.미국을 돌며 동양학을 공부했잖아요. 동양학의 새로운 방법론을 대학에 재직하면서 후진도 많이 양성하고 제대로 펼쳐보였으면 하는 것이 저의 원래 바람이었어요. 만나면 이런 잔소리 듣기 싫어서 그런지 잘 못만나요. 바쁘기도 하겠죠. 그런데 새만금 관련해선 용옥이 얘기가 맞아요.”
만난 사람=배영대 문화부문 차장 사진=김성룡 기자 xdragon@joongang.co.kr
*** ‘생각하는 인생’ 이어온 류영모 – 함석헌 – 김용준
함석헌(1901~89)은 21세 때 오산학교 3학년에 편입한 뒤 ‘생각하는 인생’이 시작되었다고 고백했다. 다석(多夕) 류영모(1890~1981)라는 걸출한 스승을 만난 것이다. 다석은 함석헌이 편입할 무렵 교장으로 부임했다. 훗날 그는 “내가 오산에 온 것은 함 자네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나 봐”라고 말했다.
해방 이후 한국 사회가 압축 근대화 과정을 거치는 동안 단절된 전통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지성사 면에서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부분이 다석과 함석헌의 철학이다. 다석의 사상은 유교.불교.도교라는 동양의 전통 3교를 두루 섭렵한 철학 위에 서양의 진보적 기독교를 결합한 독특한 사상 체계다. 21세기 동서양 문화 융합의 원류를 추적할 때 피할 수 없는 인물이 다석이다.
함석헌이 생명사상에 눈을 뜨고 노자와 장자 이야기, 그리고 일본 무교회주의 선구자 우치무라 간조의 사상 등을 알게 된 것도 모두 다석을 통해서였다. 다석은 28년부터 YMCA 연경반(硏經班.각 종교의 경전을 연구하는 모임)을 지도하며 대중 가르침에 나섰고, 함석헌도 다석에 이어 YMCA에서 강연했다. 그리고 49년 봄 청년 김용준은 우연히 종로를 지나다 함석헌의 강연을 듣고 그를 평생의 스승으로 모시게 된다.
김용준은 경기중과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한 수재로, 미국 텍사스 A&M 대학에서 유기화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자연과학자다. 하지만 종교와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 등을 함 선생한테 배웠다고 고백한다. ‘생각하는 인생’을 배웠다는 뜻이다. 그래서 김 교수 역시 과학자이면서도 동서양 사상을 두루 꿰는 보기 드문 지성인이다.
배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