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수 목사
그의 자서전은 이 때까지의 기록을 담고 있으니, 그의 사상과 70에 이르기까지 그의 생애에 궁금하다면 그의 저작들을 마저 더 읽어야 할 것이다. 그의 전반기 생애의 자서전을 읽고 그의 전 인생과 사상을 가늠하기는 쉽지 않으나, 몇 가지 떠오르는 감상의 자리들이 있다. 우선, 우찌무라 간조는 끊임없이 조국 일본과 기독교와의 관계를 놓고 고민했다. 이미 삿포로 농업대학 시절부터 선교사들이 세운 이질적 교회를 극복하고, '대안교회' '새로운 교회' 운동을 시작했던 그였다. 그는 어찌하든지 일본에 의한 일본을 위한 물론 나중에는 더 나아가 세계를 위한 선교적 열정으로 발전하지만 기독교회를 생각한다. 그의 이러한 고민은 서구교회 특별히 미국 교파주의적 교회 의 축소판으로 불리기를 원치 않았던 그의 자주적 정신에 기인한다. 이런 면은 신학을 공부하고 학자연하는 한국의 신학자들 대부분이 서구신학의 무분별한 수용자요, 철저한 추종자이면서도 서로 목소리를 높이는 한국교회를 돌아보게 한다. 선교 130년의 한국교회사를 잠시 살펴본다면, 우리는 초창기로부터 지금에 이르까지 선교사들간의 갈등, 선교사와 한국인 목회지도자들과의 갈등, 한국인 간의 갈등들을 목격할 수 있다. 그 갈등의 축에는 교단과 교파의 헤게모니와 신학논쟁들이 놓여 있다.
그러한 문제가 전 교회사적으로 없을 수 없는 문제이기는 하겠지만, 적어도 한국교회 안에서의 갈등의 중심에는 '조국 대한민국' 의 정체성 혹은 '조국 교회 한국교회의 신학'에 대한 고민이 투철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조선 기독교'라는 하나의 뿌리를 내리려는 초기의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선교사들과 초기의 기독교 지도자들의 그러한 대국적 모임은 늘 '내 권리' '내 교파' '내 신학'만을 내세우는 것 때문에 무산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다시 우찌무라 간조의 전일본 교회 정신을 생각하는 이유는 그가 이미 100여 년 전에 그의 조국과 기독교를 놓고 치열하게 고민했던 그 기상을 사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일본을 위하여, 일본은 세계를 위하여, 세계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그의 이러한 생애의 숙원이 "일본을 성서 위에 세우자!"라는 모토에 집약되어 있다. '성서일본' 이라는 말만큼 그의 고민과 갈등의 최적의 해결책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조국에 대한 사랑과 기독교적 진리에 대한 애정을 이렇게 아우를 수 있는 말이 또 어디있을까? 나는 이것이 비단 제자였던 김교신 선생의 「성서조선」에서만이 아니라, 그 어느 민족 누구에게라도 조국과 기독교간의 고민과 갈등 속에서 내놓을 수 있는 해답이라고 생각한다.
이 해답은 그 말 자체로서는 매우 개신교적이다. 그 어떤 권위보다도 성경을 진리의 참된 표준으로 인정하고 있기에 그러하다. 또한 이것은 개혁주의적이기도 하다. '오직 성경' 이라는 개혁주의자들의 첫번째 모토와 부합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복음주의적이다. 성경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진리대로 살고자 하기에 그렇다. 우찌무라 간조의 신학적 내용은 이런 점에서 성경적이며, 복음적이다. 물론, 그가 실제로 세우고 만들었던 교회(형제회)의 모습이 기존의 교회조직과 체계를 넘어선 교회 무교회주의 를 표방했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심지어 일본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회의적 시각으로 바라보게 했다. 또한, 성서일본이라는 모토가 가지는 국수주의적인 국가관이 당시에 일어났던 러일전쟁에 대해서도, 일본군대를 지지하고 한국민의 고통에 대해서 침묵하게 했던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그도 어쩔 수 없는 일본인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분명 당시에 그 어떤 일본인보다 양심적이고 공정했으며 조선의 제자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성서로 민족을 사랑하고 섬기는 법을 가르쳐 준 인물이다. 그래서 그의 영향력은 아직도 그의 제자들의 제자들에 의해서 전수되고 있고, 아직도 그의 글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이어지고 있다.
「성서조선」이 절간된 지 칠십여 년이 흘렀지만 성경의 진리를 통해서 고난으로 점철되었던 조국의 역사를 풀고, 이 땅의 어둠을 빛으로 드러내는 조국교회의 비전은 여전히 살아있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