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2/20 08:00 김삼웅
함석헌이 전두환 정권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주변의 한 켠에서는 음습한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다. 독재시대 공권력으로 처리하기 어려운 상대에게 사적 폭력을 자행하는 것은 독재자들이 즐기는 수법이었다. ‘사적 폭력’에는 암살, 테러, 비리조작, 스켄들 날조 또는 과장 등이 동원되었다.
함석헌에게는 아무리 뒤져봐도 엮을 건덕지가 없었다. 그렇다고 돈이나 권력을 탐하지 않아서 재물이나 감투로 유혹할 수도 없고, 재산이 없어서 이를 강탈한 방법도, 잡지 발행 과정을 정보기관이 훤히 꿰고 있어서 세무조사를 해봐야 나올 것이 없었다. 해서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히는 방법 뿐이었다. 함석헌에게는 마침 그런 ‘헛점’이 있었다.
함석헌의 외조카라는 조순명이 1982년 7월 합동 출판사에서 사생활 문제 등을 담은 <거짓 예언자>라는 책을 발간했다. 이 책에는 <운명의 여인>, <나이롱 단식>, <사탄아 물러가라> 등 저주 섞인 항목이 들어 있었다. 그는 1965년부터 함석헌에게 “거짓말쟁이”, “색마”, “후안무치” 등 극렬한 용어로 비난해왔다고 한다. 조순명은 이후 1986년에 이 책의 증보판을 펴냈다. 그리고 1992년 <함석헌과 한국 지성들 上下>를 홍익재라는 출판사에서 간행하였다.
1986년 증보판을 낼 때에는 초판 때보다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히고 책 제목도 <왠말인가 함석헌>으로 바꾸어서 간행했다. 조순명은 “그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건만, 두번째 역시 그는 아무런 응답도 하지 못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주석 2)고 서문에서 썼다.
1982년 <거짓 예언자>가 나왔을 때 함석헌의 주위에서는 이를 전두환 정권 정보기관의 소행으로 치부했다. 그리고 이심전심으로 이 책에 대해 외면하였다. 독자들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의 ‘외도’와 관련한 소문은 주변에서 끊임없이 회자되었고, 본인도 공개석상에서 이를 시인하면서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거짓 예언자>들의 내용과는 다른 방향이었다. 김용준 교수의 지적이다.
나는 지난 번에 함 선생님이 “아내 아닌 다른 여인을 범하였다”는 표현을 쓰기는 하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절대적인 차원에서 하는 소리다. 풍문에 여러 말들이 떠돌았지만 확실치도 않다. 이런 풍문을 여기에 옮겨 놓을 수도 없지만, 다만 씨알농장에서 자진해서 선생님의 취사와 살림살이를 돕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나온 오모 여인과의 사건인 것만은 확실하다.
내가 알기로는 그런 일이 있은 다음 이 여인이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자기의 은사인 김석목 교수에게 고백한 것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주석 3)
함석헌이 1957년 천안에서 씨알농장을 경영할 때 오모 여인과 관계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일로 그는 참회를 거듭했다. 당시 44일 간의 긴 단식 기도에는 이에 대한 반성도 포함되었다. 1960년 9월(30일) 당시 독일에서 공부 중이던 안병무에게 보낸 함석헌의 편지에도 ‘참회’의 내용이 엿보인다.
내가 분명 죄 되는 일을 한 게 있습니다. 벌써 전부터 있던 일이지만 그것이 금년 1월에 와서 가까운 친구들에게 알려져 문제가 되었습니다. 단식도 그래 했고 글과 말을 그만두고 모임을 중지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지금 할 수 없고, 한 마디로만 들어주십시오. 여성문제에서 잘못한 것입니다. 놀라고 슬퍼하실 줄 압니다마는 사실입니다. 친구들 다 소식 끊어졌고 류 선생(유영모-필자)도 매우 섭섭하게 여기시는 중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우선 형이 나를 친구로 계속해 대해주겠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나로서는 그럴 염치 없고 형의 넓은 생각에 달렸습니다.(…) 하지만 내 혼이 상처를 입었습니다. 나를 버리지 않거든 또 소식 주십시오. 아아! (주석 4)
함석헌의 이런 ‘외도’를 빌미로 조순명은 줄기차게 ‘외삼촌’을 비방하고 다녔다.
<거짓 예언자>가 별 효과를 보지 못하면서 <웬말인가 함석헌>에 이어 <함석헌과 한국 지성들>을 두 권으로 묶어 펴냈다. 이를 두고 함석헌과 오랜 교분을 가졌던 김용준은 ‘정보기관의 후원’이라 지적한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할 수 없지만 함 선생님에게는 조카뻘 되는 조순명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정보기관의 후원까지 받아가면서 그는 당시 민주화운동의 선봉에서 주야장천 사자후를 토하고 있는 함석헌을 마치 희대의 색한이나 되는 듯 비난하는 <거짓 예언자>라는 책을 출판하여 화제를 모은 일이 있다.
이 책을 낸 출판사는 일확천금을 노려 초판을 5만부나 찍었다. 그러나 당시 시민운동으로 불매운동이 벌어져 이 책은 서점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와 같은 사실을 말씀하시면서 불매운동을 일으킨 젊은이들에게 고마움과 흥분을 감추지 못하시던 함 선생님의 모습을 나는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주석 5)
한국현대사에는 독재자가 적대시하는 인물들에 관한 각종 위서(僞書)가 끊이지 않았다.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의 <시역의 고민>, 김대중을 음해한 함윤식의 <동교동 25시>, 최근 김근태를 고문한 이근안의 책, 그리고 <거짓예언자 함석헌>이 대표적이다.
이와는 별개로 함석헌의 도덕적 일탈행위는 그것이 실수이든 아니든 비판의 대상이다. 도덕성의 상징인 재야 지도자의 위치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일생일대의 오점이고 실수였다. 그는 80회 생신 자리를 비롯 몇 차례 공개석상에서 참회하는 발언을 하였다.
주석
2> 조순명, <함석헌과 한국지성들 上>, 홍익재, 1997.
3> 김용준, 앞의 책, 126~127쪽.
4> 앞의 책, 127쪽, 재인용.
5> 앞의 책, 135쪽.
함석헌에게는 아무리 뒤져봐도 엮을 건덕지가 없었다. 그렇다고 돈이나 권력을 탐하지 않아서 재물이나 감투로 유혹할 수도 없고, 재산이 없어서 이를 강탈한 방법도, 잡지 발행 과정을 정보기관이 훤히 꿰고 있어서 세무조사를 해봐야 나올 것이 없었다. 해서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히는 방법 뿐이었다. 함석헌에게는 마침 그런 ‘헛점’이 있었다.
함석헌의 외조카라는 조순명이 1982년 7월 합동 출판사에서 사생활 문제 등을 담은 <거짓 예언자>라는 책을 발간했다. 이 책에는 <운명의 여인>, <나이롱 단식>, <사탄아 물러가라> 등 저주 섞인 항목이 들어 있었다. 그는 1965년부터 함석헌에게 “거짓말쟁이”, “색마”, “후안무치” 등 극렬한 용어로 비난해왔다고 한다. 조순명은 이후 1986년에 이 책의 증보판을 펴냈다. 그리고 1992년 <함석헌과 한국 지성들 上下>를 홍익재라는 출판사에서 간행하였다.
1986년 증보판을 낼 때에는 초판 때보다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히고 책 제목도 <왠말인가 함석헌>으로 바꾸어서 간행했다. 조순명은 “그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건만, 두번째 역시 그는 아무런 응답도 하지 못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주석 2)고 서문에서 썼다.
1982년 <거짓 예언자>가 나왔을 때 함석헌의 주위에서는 이를 전두환 정권 정보기관의 소행으로 치부했다. 그리고 이심전심으로 이 책에 대해 외면하였다. 독자들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의 ‘외도’와 관련한 소문은 주변에서 끊임없이 회자되었고, 본인도 공개석상에서 이를 시인하면서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거짓 예언자>들의 내용과는 다른 방향이었다. 김용준 교수의 지적이다.
나는 지난 번에 함 선생님이 “아내 아닌 다른 여인을 범하였다”는 표현을 쓰기는 하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절대적인 차원에서 하는 소리다. 풍문에 여러 말들이 떠돌았지만 확실치도 않다. 이런 풍문을 여기에 옮겨 놓을 수도 없지만, 다만 씨알농장에서 자진해서 선생님의 취사와 살림살이를 돕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나온 오모 여인과의 사건인 것만은 확실하다.
내가 알기로는 그런 일이 있은 다음 이 여인이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자기의 은사인 김석목 교수에게 고백한 것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주석 3)
함석헌이 1957년 천안에서 씨알농장을 경영할 때 오모 여인과 관계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일로 그는 참회를 거듭했다. 당시 44일 간의 긴 단식 기도에는 이에 대한 반성도 포함되었다. 1960년 9월(30일) 당시 독일에서 공부 중이던 안병무에게 보낸 함석헌의 편지에도 ‘참회’의 내용이 엿보인다.
내가 분명 죄 되는 일을 한 게 있습니다. 벌써 전부터 있던 일이지만 그것이 금년 1월에 와서 가까운 친구들에게 알려져 문제가 되었습니다. 단식도 그래 했고 글과 말을 그만두고 모임을 중지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지금 할 수 없고, 한 마디로만 들어주십시오. 여성문제에서 잘못한 것입니다. 놀라고 슬퍼하실 줄 압니다마는 사실입니다. 친구들 다 소식 끊어졌고 류 선생(유영모-필자)도 매우 섭섭하게 여기시는 중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우선 형이 나를 친구로 계속해 대해주겠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나로서는 그럴 염치 없고 형의 넓은 생각에 달렸습니다.(…) 하지만 내 혼이 상처를 입었습니다. 나를 버리지 않거든 또 소식 주십시오. 아아! (주석 4)
함석헌의 이런 ‘외도’를 빌미로 조순명은 줄기차게 ‘외삼촌’을 비방하고 다녔다.
<거짓 예언자>가 별 효과를 보지 못하면서 <웬말인가 함석헌>에 이어 <함석헌과 한국 지성들>을 두 권으로 묶어 펴냈다. 이를 두고 함석헌과 오랜 교분을 가졌던 김용준은 ‘정보기관의 후원’이라 지적한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할 수 없지만 함 선생님에게는 조카뻘 되는 조순명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정보기관의 후원까지 받아가면서 그는 당시 민주화운동의 선봉에서 주야장천 사자후를 토하고 있는 함석헌을 마치 희대의 색한이나 되는 듯 비난하는 <거짓 예언자>라는 책을 출판하여 화제를 모은 일이 있다.
이 책을 낸 출판사는 일확천금을 노려 초판을 5만부나 찍었다. 그러나 당시 시민운동으로 불매운동이 벌어져 이 책은 서점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와 같은 사실을 말씀하시면서 불매운동을 일으킨 젊은이들에게 고마움과 흥분을 감추지 못하시던 함 선생님의 모습을 나는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주석 5)
한국현대사에는 독재자가 적대시하는 인물들에 관한 각종 위서(僞書)가 끊이지 않았다.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의 <시역의 고민>, 김대중을 음해한 함윤식의 <동교동 25시>, 최근 김근태를 고문한 이근안의 책, 그리고 <거짓예언자 함석헌>이 대표적이다.
이와는 별개로 함석헌의 도덕적 일탈행위는 그것이 실수이든 아니든 비판의 대상이다. 도덕성의 상징인 재야 지도자의 위치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일생일대의 오점이고 실수였다. 그는 80회 생신 자리를 비롯 몇 차례 공개석상에서 참회하는 발언을 하였다.
주석
2> 조순명, <함석헌과 한국지성들 上>, 홍익재, 1997.
3> 김용준, 앞의 책, 126~127쪽.
4> 앞의 책, 127쪽, 재인용.
5> 앞의 책, 13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