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찌무라간조의 삶
우찌무라간조의 삶
“동양평화 외치며 전쟁하는 일본, 하나님이 불벼락 내릴 것”
부활절 아침에 ‘일본의 양심’ 우치무라 간조의 기독교 정신을 찾아서
중앙선데이
---
4일 부활절의 아침이다. 부활절은 예수가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날이다. 기독교 신앙은 이 믿을 수 없는 일을 믿음으로써 시작됐다. 부활 사건은 미스터리다. 그러나 신생의 역설이 담겨 있다. 죽음의 고난을 통해서만 새로운 탄생이 가능하다는 역설이다. 신생의 역설은 기독교 안에 끊임없이 자기혁신의 기운을 불어넣어 왔다. 인류 문명의 진전에도 기여했다.
일본 근대사에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1861~1930)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신앙의 자기혁신이란 면에서, 국가의 양심 회복이란 면에서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지성이다. 제도적 교회의 독선을 경계하는 무교회 신앙을 열었고, 전쟁을 일으킨 조국에 대해 “하나님이 불벼락을 내릴 것”이라고 경고해 국가의 적으로 낙인 찍혔다. 김교신·함석헌·송두용 같은 이를 제자로 삼아 한국 지성사에 영향을 미쳤다. 일본에선 기념우표가 나올 만큼 유명하지만 현대 한국에서 그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마침 지난주 우치무라 선생 80주기를 맞아 중앙SUNDAY가 도쿄에서 그의 흔적을 찾는 여행� 했다. 우치무라의 끝없는 자기혁신적 신앙, 부활의 신앙을 추적했다.
----
1923년 62세 때의 우치무라 간조. 이 무렵 그는 이마이칸에서 성서 강연에 정열을 쏟았다. [ICU 제공]
도쿄 시부야역에서 걸어서 7분 정도에 있는 금속노동회관 3층 회의실. 일요일인 지난달 21일 오전 10시. 공무원을 정년퇴임한 반나이 무네오(坂內宗男·76)의 성서 강의가 한창이다. 30여 명 되는 청중 대부분은 60~70대다. 800만의 신이 산다는 일본에서 그의 강의 제목은 ‘유일한 하나님을 따르다’였다. 반나이는 출애굽기 20장 3, 4절을 읽었다. 3절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이고 4절은 ‘너를 위해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며…’이다. 반나이는 “15년 전쟁(1931년 만주사변부터 1945년 2차대전 종전까지) 때 피침략국, 특히 한국 기독교도들의 수난에 대해 냉담했던 것, 강제로 신사참배를 하게 하는 데 가담한 것은 3절의 의무를 지키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4절을 들어 일본의 천황제를 우상숭배라고 비판했다. 교회건물도 십자가도, 목사도 없는 무교회주의자의 성서집회는 1시간40분 만에 끝났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 모습 여전히 간직
매주 열리는 무교회주의자들의 성서집회는 132년 전인 1878년 홋카이도(北海道)의 삿포로 농업학교 기숙사에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 같은 형태로 시작됐다. 당시 17세의 앳된 학생이었던 우치무라 간조는 기독교에 함께 입문한 동기생 7명과 일요일과 수요일에 모임을 가졌다. 기숙사 방에는 밀가루 통에 파란 담요를 덮은 강단이 만들어졌다. 지도자는 학생들이 돌아가며 하고 참석자들이 한마디씩 자기 얘기를 했다. 이런 집회 방식은 지금도 비슷하다.
우치무라가 일본 열도를 흔든 사건은 30세의 꽃미남 교사였던 1891년 1월에 발생했다. 도쿄 제일고등중학교 강당엔 교사 60명과 학생 1000여 명이 모였다. 단상엔 ‘일본인의 신’이었던 메이지 천황의 초상과 그가 서명한 교육칙어가 놓여 있었다. 칙어 낭독이 있은 뒤 한 사람씩 허리를 깊이 숙여 절을 했다. 셋째로 올라선 젊은 교사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절을 하지 않았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유일신 신앙인에게 천황은 그저 우상이었기 때문이다. 웅성거림은 소란으로 이어졌다. 언론은 전대미문의 이 사건을 앞다퉈 보도하면서 ‘불경사건(不敬事件)’으로 명명했다. 우치무라는 이 사건으로 학교에서 쫓겨난다. 국가와 국민의 반역자 취급을 받았다. 이후 다른 학교에 취업을 했으나 그곳서도 오래 근무하지 못했다. 불경사건의 주인공은 군국주의 정책에 대해서도 조국의 종말을 예언했다.
러일전쟁(1904~1905년)이 끝나 온 나라가 승전 분위기에 도취해 있을 때 우치무라는 “앞으로 일본은 동양평화를 위한다면서 더 큰 전쟁을 할 것이다. 그러면 가이사마(하나님)가 일본에 불벼락을 내리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1930년에 타계했지만 그 뒤 일본은 실제로 더 큰 전쟁을 벌였고, 결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하늘에서 불벼락(원자폭탄)을 맞았다.
우치무라는 동양평화를 명분으로 한국침략이 당연시되던 지적 풍토에서 보기 드문 친한파였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있자 ‘조선에서 일본인의 대실패’라는 글을 썼다. 1910년 한일병탄 때 그는 “나라를 잃어 슬픔에 잠긴 민족을 생각했다. 일본은 영토를 넓힘으로써 영혼을 잃었다”고 한탄했다.
직장을 잃고 우치무라는 강연과 저술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는 도쿄 기독교 청년회를 상대로 1915, 1917, 1922년 세 차례에 걸쳐 성서 강의를 한다. ‘성서연구회’를 만들고 『성서의 연구』란 잡지를 출간했다. 김교신·송두원· 함석헌 등 한국 무교회주의 1세대들이 우치무라의 강의를 들은 것도 이때다. 우치무라는 일기에서 “나의 가르침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들은 조선인이다. 그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성서연구회를 한 보람이 있다”고 썼다.
복음엔 국적 없지만 기독교인에겐 국적 있다
다시 2010년의 도쿄. 우치무라가 강연을 했던 이마이칸(今井館·이마이라는 사람이 기증한 건물)은 원래 신주쿠에 있는데 1935년 지금의 메구로구로 옮겼다. 성서강의장에는 지금도 우치무라가 사용했던 강단과 의자가 놓여 있다. 2층짜리 건물인 자료관에는 우치무라의 강연 내용과 저작물이 빼곡히 쌓여 있다. 그곳에서 전철로 40여 분가량 떨어진 우추시의 공원묘지에는 석묘로 된 우치무라의 무덤이 있다. 우치무라의 묘에서 하나 건너 이마이칸을 기증한 이마이의 무덤이 있다. 마침 춘분을 맞아 다녀간 성묘객이 두고 간 꽃이 보였다.
묘비명은 “I for Japan; Japan for the World; The World for Christ; And all for God. (나는 일본을 위해, 일본은 세계를 위해, 세계는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을 위해)”라고 쓰여 있었다. 69세에 세상을 떴지만 묘비명은 20대 미국 유학 시절에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유학을 떠나기 전 삿포로 농학교 졸업식에서 우치무라는 친구들과 함께 평생을 두 개의 ‘J’에 바칠 것을 서약하는 의식을 가졌다. 두 개의 J는 예수(Jesus)와 일본(Japan)이었다. 젊은 시절 우치무라 선생의 영향을 받은 김진홍 두레교회 목사는 ‘두 개의 J’에 대해 “선생이 복음에는 국적이 없지만 크리스천에겐 조국이 있다는 인식에 도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신과 일본, 일본과 세계, 세계와 예수, 예수와 하나님을 일체화하는 무교회신앙은 가장 개인주의적이면서도 가장 민족적이며 가장 개방적인 독특한 가치관을 성립시켰다. 이런 가치관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과학주의가 충돌 없이 조화하는 독특한 세계관을 형성했다. 사회주의에 대한 우치무라의 입장은 단호했다. 그는 ‘사회주의’란 제목의 글에서 “기독교와 흡사하면서 가장 다른 것이 사회주의다. 성서에서 말하는 소위 불법이 숨은 자이다. 불평과 완강과 파괴의 사상만이 있다”고 했다. 사회주의자들의 본성이 제국주의자와 똑같이 싸움을 좋아하는 체질이라는 주장도 했다.
우치무라가 한 번 성서 강의를 하면 300~400명이 몰려 들었고, 강의가 끝난 뒤에도 그 숙연한 깨달음에서 헤어나지 못해 오랫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형성된 제자들은 전후 일본 재건의 주역으로 성장했다. 도쿄대 총장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內原忠雄)는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정부를 비판하다 학교에서 쫓겨났다. 야나이하라 말고도 도쿄대 총장 2명, 문부대신(교육부 장관) 5명이 우치무라의 제자 그룹에서 배출됐다.
우치무라 정신의 향기는 문필에서 느껴진다. 간결하면서 의표를 찌르는 언어들이다. 기성관념과 제도신앙에 젖은 사람들을 찔끔찔끔 놀라게 하는 말들이 많다. “하나님, 나는 당신에게 나와 내 집을 축복해 주십사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나를 당신의 것으로 써주십사고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십사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바치게 해주십사고 기도합니다.”
우치무라는 세상을 회피하는 나약한 인간형은 아니다. 그 반대다. “세상을 피하려고 하지 말라. 세상을 이겨야 한다. 환경이 개선되길 기도하지 말라. 마음이 개선되길 기도하라. 고통이 사라지기를 바라지 말라. 은총이 더하기를 바라라. 밖으로 부유해지고 흥하기를 바라지 말라. 안으로 기뻐하고 즐거운 자가 되어야 한다.” “사람은 희망의 동물이다. 앞을 바라봄이 자연스러우며 뒤를 돌아다 봄은 부자연스럽다. 희망은 건전하며, 회고는 불건전하다. 죄를 잊어 버리고, 병을 잊어 버리고, 실패를 잊어 버리고, 원한을 잊어 버리고, 하나님과 생명과 성공과 사랑을 향하여 나아갈 뿐.”
관념성을 떨치고 실용적 삶을 촉구하는 글들도 많다. “인간의 가치는 그의 ‘지금’의 가치다. 그의 과거의 가치가 아니다. 그가 과거에 선인이었다 해도 ‘지금’ 악인이라면 그는 악인이다. 그가 과거에 악인이었어도 ‘지금’ 선인이면 그는 선인이다. 그의 가치는 그의 ‘지금’의 가치다. 우리는 그의 과거를 따져 그의 가치를 정하지 않는다.”
우치무라의 출생과 교육, 회심은 흥미진진하다.
우치무라는 “나의 아버지는 훌륭한 유교학자였고, 공자의 기록과 말씀을 거의 대부분 암기하셨다 ”고 회고했다. 우치무라는 유교적 전통이 있는 사무라이 가정에서 자라면서 일본의 신사마다 있는 수없이 많은 신을 믿었다. 그는 신마다 다른 금기나 규칙을 지키기 위해 애썼고 그것이 날마다 늘어나고 모든 규칙을 지켜 신을 만족시키기가 어려운 지경이 돼갔다. 우치무라는 그즈음 “드디어 구원의 손길이 나타났다”고 『나는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에서 적었다. 16세 때 삿포로 농업학교에서 만난 유일신 하나님이 구원의 손길이었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뒤 그의 발언은 소박했다. “새로운 믿음의 실용적인 유익은 금방 드러났다. 내가 믿어왔던 800만 이상의 많은 신을 버림으로써 (금기나 규칙들은) 전부 쓸모없는 것들이 돼 버렸다.”
삿포로 농업학교 학생들을 기독교 세계로 이끈 건 미국 매사추세츠 농업대학 학장 출신으로 이 학교에서 8개월간 교무주임으로 근무하던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W S Clark) 교수다. 클라크 교수는 이 학교 1기생 16명을 모두 개종시켰고, 이 1기생들이 2기생인 우치무라를 전도했다. 클라크 교수는 귀국할 때 하얀 눈길 위를 말을 타고 학교를 떠났다. 그때 작별 인사로 클라크 교수가 남긴 말은 아시아에서 매우 유명한 말이 되었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Boys be ambitious!)” 이 장면을 형상화한 큰 유화 그림이 지금도 홋카이도 도청 2층 기념관에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