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11

조현 이남곡 인터뷰 1 20251206


조현TV휴심정
11,288 views  Dec 6, 2025  #Studying #Monk #Confuc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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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특별한 분을 뵈러 전북 익산에 왔습니다. 저와는 수십년 인연을 맺고 있고, 제가 존경하는 이남곡 선생님을 뵈러왔습니다. 
이남곡선생님이 무려 천페이지에 달하는 ‘논어를 연찬하다’는 책을 냈습니다. 한문만 하시는 분보다, 보다 폭넓은 시각, 현실적인 시각과 인문적 시각을 통섭해 낸 책이어서 저도 논어를 참 좋아하고, 많은 논어를 읽었지만, 백미로 꼽을 만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남곡 선생님은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민주화운동을 하며 옥살이도 하시고, 1970년대엔 농촌지역에서 교사를 하며 교육실천연구회 활동도 하고, 법륜스님이 정토회 가장 초기에 설립한 불교사회연구소 소장도 지냈고, 1994년부터 8년은 경기도 화성 산안마을 야마기시실현지 공동체에서 무소유공동체 실험에 동참하시면서 2004년부터는 전북 장수에 정착해 연찬문화연구소 이사장으로서 연찬을 이끌어오고, 그 이후 익산에 머물면서 인문운동가라고 활동하고 계십니다.
 2010년에 세상을 떠나신 부인 서혜란 여사님은 여성민우회 창립을 주도한 여성운동, 생협운동가였지요. 20여년전 저도 야마기시에 어린 딸을 데리로 자주 놀러가곤했는데요. 그 때 이남곡 선생님과 서혜란 여사님이 참 다정하게 반겨주셨지요. 
 이남곡 선생님이 17년전 논어에 대한 첫 책. 즉 이번 책의 원조격인 원고를 제가 보내서 한겨레출판사에서 ‘논어-사람을 사랑하는 기술’이라는 책으로 출간되었었지요. 
 이남곡 선생님께서 우리 시대에 남겨준 정신적 보배인 ‘논어를 연찬하다’를 가지고 연찬의 자세로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논어를 연찬하다 #법륜스님 #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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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1


오늘은 특별한 분을 배어 전북 익산에 왔습니다.
저와는 수십년 인연을 맺고 있는 분인데요. 제가 존경하는 분입니다. 이남곡 선생님을 배로왔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아 반갑습니다. 예남국 선생님께서 이번에 무려 천페이지에
달하는 논어를 연찬하다이 책을 냈습니다. 아,
너무 두꺼워 가지고이 책 읽느라고 제 죽는 줄 알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제가 이렇게 어 제거네이 책 읽는데만 해도 한 열흘 동안 꼬박 읽었는데에
제가 책 내용이 별로면은 읽다가 한
1분 읽다가 그냥 집어 던졌을 거예요. 근데 읽으면 읽을수록 저기 너무나 그 깊이도 있고 또 유연하고
또 굉장히 읽을 만하고 또 삶에도 도움이 될 만하고 그래서 끝까지
완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어 정말이 시대에 꼭 많은 분들이 읽어야 될
필독소로 권유하고 싶어서 어 제가 오늘 익상까지 왔습니다.
그이 책이 굉장히 이제 현실적인 시각, 폭넓은 시각, 또 입문적 시각
이걸 이제 통섭에내는 책이라고 어 느껴지더라고요. 저도 논를 참
좋아하고 많은 논를 읽었지만은 아 논노에 관련된 수백권의 책 중에서
정말 첫번에 꼽을 만한 책이다. 아이 논을 연천하다를 이렇게 추천합니다.
이국 선생님께서는 경기고등학교와 서울 법대를 졸업하시고
어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옥사리도 하시고 1970년 된 농천 지역에서
교사를 하면서 교육실천회 활동도 하시고
법윤수님이 정토해 가장 초기에 설립한 불교사회
연구소에서 불교사회 연구소 소장도 지내셨습니다. 1994년도부터 8년은 경기도 화성
산남마을 야마귀시 시현지 공동체에서 무소위 공동체에
실험도 동참하시면서 이제 그 이후에 2004년부터는 전북
장수에 정착해서 연찬문화 연구소 이사장으로 연찬을
이끌어 오시고 그 이후에는 이곳 익산에 머무시면서 입문 운동가로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아, 이런데 선생님 그 한평 같은
촌에서 태어나셔 가지고 그때 한평에서 수제들은 광주 일을 가도 전부 다
대단하다고 그랬는데 왜 경기국까지 갔어요? 뭘 모르고 갔지?
그때 이제 제 교육을 위해서 어머니 혼자 예. 아, 참 서울에 올라오셔서
그 아들 교육을 시키려고 그렇게 하시고 계셨는데 그때 그러면 어머니하고 두 분 있어서
서울 올라오신 거? 아니요. 그 어머니가 먼저 올라오셨죠. 아, 먼저 교육시키려고. 아, 먼저 올라오셔서 이제
맹자 어머니 저리 가가 많이 아니 그 어, 뭐 여러 가지 이제 구준일 해 가시면서 어, 그렇게
하셨는데 네. 내가 이제 고등학교로 가야 되는데
어머니가 물어보시더라고. 아 어느 학교 원서를 사보낼 거냐고.
그래서 나는 전혀 몰라서 시골학교와 뭐 그 경기도학교가 뭐 얼마나 어 좋은 학교인지 들어가기
어려운 학교인지 모르고 예. 어 그냥 그 어머니한테 그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예. 그래도 제일 좋은 학교 그니까
어머니도 전혀 모르셔. 어머니도 저보다 더 모르지. 학교를 안 나오신 분이니까.
그게 주 사람들한테 물어본 모양이에요. 제일 좋은 학교냐니까 경기 고등학교로 그래서
그럼 그 학교 사보내신 거예. 그래 그래가지고 얼떨결에 들어갔습니다.을
얼떨결 들어갔는데 예 아마 경기 중학교를 나온 이제 학생들이
420명은 그대로 진학을 하고 아 60명만 이제 예에서 예배 뽑을
텐데 어 내가 생각해도 어떻게 들어가는지 모르겠어요. 근데 다만 하나 기억되는
거는 예 수학 아 내가 중학교 때 수학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아. 아,
수학 시험지를 받아봤는데에 이게 수학 시험인지 무슨 저 국어
시험인지 모를 정도로 음, 전체 앞변이 전부 그 방정식 응용 문제야. 그러니까 수식이 나오는게
아니고 주로 그 방정식 응용 문제가 나왔어요. 그리고 뒷면에 약간 인수분해 지금도 기억이 든다니까 그
나오고 전면이 전부 그렇게 그 어 뭐야 그 저 뭐 빽빽한 글자가 쓰 있는 그런
시험지였는데 하필 그 내가 그 운이 좀 있는 거 같아요. 내가 제일 좋아했던게 방정식
긍용 문제예요. 예. 그런 면에서 아마 좀 논리적인 어떤 그런 부분이 좀 있었던 거 같은데. 네.
어 그 나중에 들어가 가지고 수학 시간에 수학 선생이 내 이름을
불러서 이렇게 세우더라고. 그 그거 보니까 내가 수학에서 아마 수학에서 점수를 많이
얼마나 탁월하게 그 이렇게 적어냈으면 선생님이 딱 이렇게 세웠겠어. 아니,
그러니까 그러면은 수학자의 길로 갔으면은 이곡 노벨 수학상 이렇게
딱했 인생 이렇게 안 꼬였을 텐데. 아, 왜 또 수학자의 길을 또 안
가시고 또 괜히 또 민주화 운동을 해 가지고 또 말이야 인생이 권이고. 근데 고등학교 가서는 이제 관심이
조금 수학에서 떨어지더라고. 떨어지면서 아 때 아마 내가 좀 이과 기질보다는
문과 기질이 좀 나타나는데 근데 하여튼 중학교 때까지 수학을 그리고 그거 내가 지금 생각해 봐도
네 어 수학의 어떤 논리 추리 뭐 이런 부분이 내가 좀 그 능력이 좀 그 그런
소질이 좀 있었던 거 같아 그래가지고 어 하여튼 그렇게 돼서 어 어떻게
보면 이게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대한 초기 게 별로 없어요. 아하. 왜냐하면
우선 다 다른 학교에서 지나게 오기도 했지만은 예 아마 그 당시 경기고등학교 다니는
학생들이 일반적인 어떤 문화 환경 문화라든지 생활환경하고
아주 전혀 다른 그런 생활 했기 때문에 아 그러니까 그때 경기고등학교 뭐 지금도
그러지만은 그 경기고등학교 오늘 애들이 뭐 엄청나게 뭐 재벌집 아들
장차관집 아들들 이런 좀 부유충 자재들이 많았을까? 많았겠죠. 아 말았을 아 나는 모르지
모르 그러니까 뭐 모르고 촌에서 올라가 가지고 친구들은 거의 뭐 엄청난 그
집배 자재들이 많고 그러니까 선생님 뭐 이러선님 그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그 친구들 집에 입주해 가지고 친구들 가르키면서 다녔다는 소문이 있던데 고등학교 3학년 때 사실은 이제 그
제가 그 입주 가정 교사를 했습니다. 아 고등 3학년 때 어떤
그러니까 그 뭐 저 초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를 가르치는 가정 교사로
가정 교사는 내가 입주를 해 가지고 그래서 거기서 대학 들어가서 대학
교학년 때까지가 그 그 거기서 생활을 했습니다. 아 참 지금 생각하면 참 고맙죠.
아, 그러니까 요새처럼 뭐 과를 하는게 아니고 내가이 가정 교사를 하면서
아, 당시엔 그래도 그게 가능했던 거 같은데 요새는 아마 상상도 못 할
거예요. 요새는 그렇게 입주 가위하면서 부잣집은 어떻게 사는가도 처음
아니 그다지 그 집이 그다지 부자이었어요. 부자
나중에 부자 추도 며칠가 봤지. 아, 그렇어.
그러셨구나. 그래 가지고 이제 서울대 법대까지 가시면서도 저 다른 분들은
대부분 다 검사 판사 될 걸로 기대를 했을 텐데
이제 그런 길로 또 못 가시고 그러니까 예전에 이제 사모님이 이제
벌써 지금 15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서열란 선생님 지금 말씀하신 어머니도 또 서열란 어 선생님도 어 우리 인나
선생님이 경기도 화성 산남마을 야마귀시 씨 공동체에 사실 때 저도
그때 이제 과천에 살아 가지고 저희 어린 딸을 데리고 맨날 거기 낙원 거기 낙원촌이고 뭐 낙원촌이 아니어도
주말에 이제 놀로도 자주 가고 그러면은 그 어머니도 그때 같이 거기 사셨거든요. 이제 서한 여사님도
참 따뜻하게 정말 잘해 주시고 맛있는 맛있게 밥도 해 주시고 항상 오면은
또 이제 계란이랑 상추랑도 이렇게게 싸 주시고 그게 지금 그것 때문에
지금 오늘 제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 계란값 계란값 지금 상추까 말아
그때에 굉장히 따게 품어 주시고 근데 우리
그 서라는 여사님은 여성민 의의 창립 그 생운동에 굉장히 주도하신 여성
운동가 또 생애 운동가 있는데에 그때 그 그 전에는 잘 몰랐는데 그
서열란 여사님 돌아가시고 추모식을 그 장충동에 에 그 어디 불교 어떤 단체
우리 함께 하던 그 단체 거기에서 이제 추모식 할 때가 보니까 그 이와대 동기동창 선우배들이
추모시기꽤 여러 명이 왔더라고요. 그래 가지고 그때 나중에 이와이드
총장했던 이예숙 총장 그분도 예전에 저하고도 같이 이제
그런 이문학 공부모임 멤버로 같이 공부했던 멤버인데 그때 그분도 거기 오셨더라고 그러면서
그 서란사님 친구들이 인나 선생님을 별로 미 미 미워하더라고
우리 혜란 언니가 정말 대단한 언니였는데 남편 잘못 만나가지고 인생 졌다.
그래요가지고 아 그래가지고 얼마나 속으로 웃었는지
아니 여자가 자기가 좋다는데 좋아서 갔다 하는데 뭘 자기들이 예 자기들이 불만이야 그러면서 근데서 여사님이 그
마산에 굉장히 부잣집 따임이셨다고 그러 거창 거창 거창 굉장히 부잣집 따임이었는데
그러니까 별로 사이가 마음에 안 들어 가지고 그 집에서 서 별로 이제
딸 사이 별로 이렇게 예 별로 안 챙기셨다고
어 그건 나 잘 모르겠는데 아니 근데 그렇게 큰 부자는 아니고
그 뭐 시골 뭐 시골 부자죠 시골 부자고 예 어 하여튼 뭐 사람 2년이라는게
묘해요. 그래서 어 지금도 내가 이제 80이
넘었지만은 이게 돌아보면 예 어 그 인연들이 그 어떻게 발전하는지
어떻게 변하는지 하는게 참 미용하다는 걸 느낄 때가 많아요. 우리 저
조선생하고도 그때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잖아요.음 네. 그래서
어 예를 들면 어 대학에 들어가서도
어 처음에 2학년 때는 예 그 내가 이제 가정이 어렵고 어머니가
혼자 오랫동으니까 어떻게든지 어머니를 빨리 좀 좀 이렇게 풍요롭게 해주 그런 생각이
많았죠. 사실 많아서 그때 대학을 아마 3학년인가를
마치면 사법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게 생겼을까? 아 잘 기억이 안 되는데
그걸 더 빨리 하고 싶어서 1학년 때 그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 시험을
봤어요. 어 대학 1학년 때 됐어. 와 뭐 박수 칠이 아니야.
그러니까 아니 그런데 옛날 말이 그 조선 시대 때 15세 장원 급지하면 인생이 부다 그러는데
이미 너무 일찍 그냥 막 그냥 가 나이가만으로 18살 예 우리 저 우리
나이로 하면 19살 때인데 예 그래 가지고 그러다가 그의 겨울에
이게 좀이 그게 인연이에요. 음. 어, 내가 사실 고등학교 때부터도
약간 그런 어떤 사회 어떤 어 뭐라 할까? 사회 변역에 대한
관심이 있었어요. 그런 민족주의적인 생각이 강했고 어 그런데
이제 그런 시대하고도 만나지. 내가 대학 1학년 때에에
고등학교 때 저 올라와서 419 만났고 고등학 2학년 때 516을 만났어요.
그리고 이제 대학에 들어와 왔는데 그런 의식도 좀 있는 편이었는데
어 이때 이제 누군가를 만나게 되지. 아 아
이제 운명히 갈리 1학년 1학년 때 1학년 때 갈려 가지고 2학년인 때부터는
완전히 그 그 그런 길하고는 전혀 다른 길 음
그런 다른 길을 걷기 이제 그 길 그렇게 해서 맺어진 인연이 어 지금까지 여러 차례 이제 여러
차례 변곡 그 변환을 하면서 이어주고 있다 이렇게 봐집니다. 우리 조선생도
그 과정에서 만났고 그렇죠. 그냥 우리 이나우 선생님께
이나우 선생님이 계속 검사 판사만 하셨으면 저를 만날 일이 없었는데 하여튼 그런 삶의 우곡조를 다
거치면서 어 또 어 저도 우리이 선생님 뵐 수 있었고
참 검사 판사가 안 돼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예. 그렇죠. 그러니까 우리 이나고 선 어머니도 그게 다행이죠. 검사
판사돼 가지고 어떤 그 집에 사이로 대리 사이로 거의 팔려갔으면은 거의
같이 살지 못했을 텐데 그래도 같이 그 돌아가실 때까지 같이 아들을
며느리하고 이렇게 하시고 그 제가 보기에는 복이죠. 복.
근데 어머니 생각이 요새 가끔 해요. 내가 업무 생각하는데
나는 내 세계관이란 내 인생관에 따라서 어떻게 보면
어떤 사람들 때로는 아주 과격하다고 해 나를 근데 실제로 객관 증경을 보면 과격한 때가 있었다고 이렇테면
어떤 사건에 이렇게 관여해서 그 이제 그런 어떤 내가 저 징역사를
했지만은 그 과정도 보면 어 상당히 과격한 면이 있어요.
음. 선생님 그때 징역사를 몇 년 하셨어요? 어 4년. 그니까 5년 형을 받아 가지고
근데 그 징역사리에 계기가 된 사건이 이런바 그 남민 사건이라고 해서
알려진 사건인데 한 석달했어요. 활동을 석달하다 보니까
이제 그 거기 또 전환점이 와요. 음. 평소 내가 그 사회 변역 운동 특히 이제 뭐 솔직히 뭐 요새는
이야기해도 뭐 다 이해가 되겠지만은 사회주의 성향에 어떤 운동을 했기
때문에 그런 어떤데 대해서 여러 가지 마음속에 의문이
있으면서도 의문이 있으면서도 어 그런 길을 이제 걷기로 이제 쭉 걸어왔었는데
네이 그 남민 하고 이렇게 만나면서
예 그런 여러 가지 그 회의할까 그런데 대한 어떤 의문점들이
더 깊어졌어. 아, 그래서 이거는 어, 내가 생각하는 것하고 다르다. 처음엔 그런
생각보다도 어떻든이 단체에 들어가서이 단체
뭐 뭐랄까 표현이 어떨지 몰라도이 단체의 상층부에
어떤 진입을 해서 이걸 좀 내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좀 바꿔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아하다 보니까 예 아 그게 전혀 이게 잘못된 생각이 착각이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아 어 석달하고서 그만뒀어요. 그만두고
거기서 비밀 뭐 비밀 지하 조정이니까 거기서 거기서 이렇게 저 그만두는게
쉽지 않잖아요. 그래서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그래서 그 그 당시 이제
학교 선생이었는데 학교 선생도 그만두고 집도 이사에서 몇 달 동안 좀 이렇게
다른데 나가 있었습니다. 어 그리고 1년 있다가이 사건이
터져서 내가 이제 그 구속이 됐는데 그러니까 실제 이미 이미 다 떠났는데
그렇죠. 근데 했는데 수사 기관이 알린 것도 아니고 혼자 그만뒀다고
하면 혼자 그만둔 거기 때문에 네 그런게 저게 안 되더라고. 그 저 참
활동이 면책이 안 되는 그렇지 안 되고. 어 그런데도 이게 석달이지만
간부였다는 거야. 그게 1조 2항이야. 국가 보안법 1조 2항 간부야. 간부
간부니까 어 15년을 구영을 하더라고. 근데
그래 가지고 어 선고가 이제 5년 5년 선고가
됐고 선고되고 어 1년 그 뭐 특사로
1년 해서 4년 동안 이제 살았는데 아하 어떻게 보면 그 당시는 상당히
치열하게 산 건 사실이에요. 예. 살아서 어 거기에 대한 어떤 뭐 좀 어떻게
보면 좀 억울한 면도 있지. 그만두기도 했고 몇 달 안 했는데
어 이거 중영을 받았으니까 근데 그런 생각이 없었어요. 억울함이라든지
원망이 없었어요. 어허 억울함이 없고 오히려 어 그니까 내가
치열하다는 건 내 성찰하는게 상당히 치열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여러 가지 그동안의 반성 성찰하는 시간이 이제 저 감옥에서 그걸 하게 돼요.
그것이 사실은 그 그 이후에 감옥을 나와서 내가 이렇게 사상적인 조환도
하고 전환이라 할까 뭐 하도 이런 과정에 어 큰 그 바탕이 됩니다.
예. 그때 어만 사람들이 이제 주로 저
사상적으로는 내가 지금 오래돼서 잘 기억은 안 나지만은
어 대아 사르 신부 사르땡 신부 아 그저 데아르신 대사르
그 책으로 만나셨겠나 그죠? 최고로 봐. 책으로 보고 그 하는게 어 인간 자체의 진화에 대해서 오메가
포인트라든지 인간 자체의 진화에 대해서 이런 부분들이 평소 마음속에 이게 감춰져 있던 그런 부분을 좀
읽겨웠어요. 읽겨워서 내가 생각할 때 그런데 좀이 전환하는
어떤 바탕이 있었던 거 같고 사람으로는 거기서 만난 사람이 한 분 있어. 감옥에서. 어
신목 선생이요. 아 신현목 선생을 내가 그 대전 교도소에서 이렇게 만났는데 네
어 이제 다 뭐 기결수니까 아 기결수니까 주로 만나는게 이제 일요일
날 만나게 돼. 아 일요일 날 어떤 시간에 종교 시간이 종교 시간. 다 종교 시간.
아, 그러니까 뭐 종교가 여러 가지잖아요. 여러 가지데 그 종교 시간에에 만나서
그 무슨 뭐 뭐 저 염부를 한다든지 기도하는게 아니고 둘이서 이야기하는
거야. 그게 이제 그걸 아, 한 종교를 선택 안 하고 또 따로 만나도 됐었는 모양이죠. 그렇게
그니까 그렇게 했던 거 같아. 자세한 기억은 없는데 하여튼간에 그 주로 일주일에 한 번씩 그렇게 만나는
시간에 그걸 이제 주로 그 감옥에서 쓰는 말을 하면 통방이라 그러는 통방. 아, 통방 아,
통방으로 좀 활용을 해서 그 지금도 어, 종교에 대해서 감사 아,
종교 농담이고 그런 일이 있습니다.
아, 그러셨구나. 그러니까 그 신국 선생이 들어간 건 남민고
그분은 통역 아니 통당 통역당 사건 통역당 사건이고 남민은
예전에 그 법륜 스님이 형 최한실 선생이랑 그거 다 다 남민 아니에요.
그렇죠. 어 그 뭐 그런 지금 이제 이야기하다 보니까 여러 가지 구체적인 인연들이 떠올라 사람들이. 최한실 씨
이야기하는데 최한실 씨가 나를 남민에 안 내리려 했지.
그러니까 참 이게 다 근데 어 지금 생각해 보면
아 그게 이제 나이가 들다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드는데 어떤 인연이 예 어 이게 악 뭐 악연이나 서연이라고
할할 만한게 아니야. 보면 그것이 다른 인연을 낳는 총매가 되거든.
역할을 해. 그러니까 어떤 사람 만났을 때 그 사람 만나가지고 그 사람 때문에
내가 좀 이렇게 여러 가지 고생을 했다 이렇게 말할게 아니야. 그게 다른 인를 낳는 총미 역할을
하거든. 잘 보면 그렇게 돼요. 그래서 그 어 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게 조금 그다 또 그
형 제한실 선생이 그렇게 이제 감옥에 들어감으로써 법륜 스님도 엄청나게 깨우는 역할을
했죠. 범수님도 형이 아니었으면은 그 불교의 어떤 문제 의식을 못 느끼고
완전히 그걸 깨고 나오면서 하여튼 현실에 대해서 너무 무지한 종교의 세계 현실의 어떤 고통에
대해서 눈을 감아 버린 종교에 대해서 굉장히 눈을 뜨는 어떤 현실을 도시한
종교에 대해서 굉장히 깊이 있게 또 성찰하고 고민하고 고뇌하고 하면서
어떤 식으로 종교가 나가야 될 것인가 아마 그런 걸 고민하는 과정에서 또 불교사의 연구서를 초기에 젊은 때
설립하고 그것을 이나고 선생님 또 소장 맡아서 같이 그 시절은 또 아마 치열한 그 고민의 과정이 있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게 이제 아마
그 아까 저 최안실 씨 이야기를 했지만은 최한실 씨하고 이어짐이
아 법륜 스님을 만나게 했지. 예. 법륜 스님하고 나하고는 전혀 뭐 그다
그 당시 스님이 아니었고 예. 정토회라고 하는 그런 그
법사야. 법사인데 머리를 그러니까 깎은 상태가 아니고 머리를 길었어요. 머리 하는데
대단한 분이죠. 대단한 분이야. 그 저 한국의 종교인 가운데서
어 참 대단한 인물로 보고 있습니다. 보이는데 그 당시 아마
오래돼서 잘 기억을 안 나지만 어 그 당시 불교 운동을
한 과정에서 뭐 새로운 거 그 종전의 어떤 민중
불교라든지 어떤 불교 운동의 어떤 그런 부분에 대해서 아마 새로운 모색을 하고 있었을
겁니다. 근데 나는 남민을 거치면서 사실 아까 이야기했던 것처럼 지금까지
어떤 운동 방향 변역 운동 자체의 변역 변운동 자체의 변역을
어 내 화도로 삼고 있었을 때입니다. 기존의 사회주의 운동의 어떤 문제식을
절감하고 좀 변화를 가져가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라는 성찰을 이제 하는
와정에 또 이제 법윤 수님하고 만나서 어떻게 우리가 새로운 사회 변역을 가져갈
것인가 그걸 이제 같이 고민하는 어떤 그때 이제 단계였구만요.
참 그래서 그때 아마 그 내가 저 요새
그 옛날 그 불교사 연구소에서 낸 그 회 회지
서원과 연대라 하는 회지를 냈는데예 그 회지 창간호에 내가 그동안 그
불교사 연구소에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 그런 뭔제실을 가지고 같이 이야기했던
그런 부분들을 정장 글을 내가 참관에 실었더라고 그 요새 그 현대 문명의 저걸 보고
있는게 그걸 책이 딱 한 권 있는데 그 한 권을 내가 그
요제 그 사상계 새로 나오는 새로 복관한 사상계 어
그 편집인으로 있는 장원 선생 만나서 그 책을 내가 이렇게 저 참고로 이렇게
좀음 드렸어요. 거기에 보면 새로운 인간, 새로운 사회, 새로운
문명이라고 하는 걸 분명히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전에는 그게 사실은 내가 이제 변화한 건데
제도 물질과 제도를 바꾸면 예 어 인간이
변화한다. 이런 이런 전제가 상당히 강했다고 그게 소위 뭐 유물론적 사고
방식이기도 하고 예를 들면 아 하부 구조가 바뀌면 상부 구조가
바뀐다는 이런 이제 직인데 예 내가 그 여러 가지를 경험내 이게
수술의 경험이죠. 경험을 하면서 느꼈던게 그렇게 잘 안 돼.
예. 그리고 뭐 이렇게 제도를 바꿔 가지고
사람이 바뀐다고 하는 이런게 이런게 실제로 잘 이루어지지 않더라고. 예. 오히려 왜 그런 말 있잖아요. 어
세수를 세부대. 세수 세부대라고 하는 거는 어떻든 뭔가 틀을 바꾸고 제도를
바꾸면 거기에 이제 세술 할 때는 그렇게 제도를 바꾸고 거기 한다 이렇게
하는데 실제로 아마 아 물론 다른 영역에선 그게 가능할 수도 있겠다 봅니다만는
정치나 사회 변화 부분에서는 세수를 세부되라고 하는 거는 맞지
않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오히려 세수이 이거 사람이 변하지 않았는데
변하지 않았는데 그걸 뭐 체제를 바꾸고 제도를 바고 가지고 거기다가 이렇게 그 적용을 해 보면
오히려 어 새 새 부대에 새술이 들어가는게
아니고 대부분 헌이 들어가는 거 그러니까 인간이 변하지 않으니까
아무리 캐치 플레이를 좋은 걸로 달라와야 예 이름이 더러워지는 뿐이죠. 예.
그래서 그때 생각했던 내 지금 그런 면에서 결국 이게 이런 이런 여러
가지 그게 공자하고 만나게 되는 그 배경이 돼요. 공자 그니까 내가
공자는 예순이 넘어서 봤거든. 예순이 넘어서 본 것도 논를
본 것도 어 또 한 차례 내가 그 좀 과정을 거쳐 그게 바로 아까 이야기했던
야마귀 씨라고 하는 무조의 공동체하고의 만남이야. 단순의 만남이 아니에요. 난 8년 동안을
실제로 살았어요. 살면서 그 핵심이 되고 있는 연이라 하는 걸 내가 실제 그 저 특강도 진행도
한다니까 그 우리 선생님이 진행할 때 저도 연찬에 같이 참석해서 7박 8일 동안 치하게 또
연차 갖추 있죠. 그때 하여튼 저 술을 안 준다고 대모 아니고
내가 진행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때가 우리 조조 선생이 특강할 텐데 그때
12명인가 몇 명이 했는데 그중에 또 조선생 조선생이 직접 앞에 손도뒤에 서진 않았어 괴자가 하나 있었다고
가지고 그 특강장에 안 들어오고 앞에 앉아서 연자를 하는 거야.이 술
죽이지는 못 들어가. 그 술을 안 먹게 되셨거든. 그래가지고 근데
그 야마귀 씨하고 만남이라고 하는 걸 경과한 다음에 공자를 보겠대. 만 이게
그런 과정이 사실 이런 논어를 가능하게 논어 뭐라 할까
논어의 해석이라 할까 논를 다시 보게 되는 그 과정이 돼요. 그러니까
나는 그 내 인생의 과정 처음에 어떤 변역 운동 그다음 변역 운동에 대한
변역 운동 자체의 변역 그리고 어 실제로 한번 나는 근데 이런 건 있어요. 보통
흔히 하는 말로 요새 뭐 좌우란 말도 쓰기 그렇지만 좌파
좌파 운동을 하다가 실망을 하면 이번엔
휙하고 우파로가 버려. 아니 이제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예. 어 그런데
어 그게 너무 심하게가 버려. 예. 음.데 이런 현사은
나는 이금 이게 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는 거예요. 네. 그까 나는 사실 어떻게 보면
그런 운동을 하다 운동에 어떤 문제를 느끼게 되면 어 그걸 어떻게 하면 넘어설까는
차원에서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중도를 향한 과정이었어요. 그니까 내가 이쪽 극에서 다른 극으로 갔다
왔다 갔다 하는게 아니고 예 거기를 어떻게 하면 이게 중도를 향해서 갈까 하는 그런 과정에서
사실은 만난게 야막귀시이기도 하고 연찬이기도 한데 네
그런 과정에서 보니까에 공자가 그렇게 보이는 거예요. 바로 그거 길을 간 사람이야.
2500년 전에 예 헌 부대에 세수를 담물고 했던 사람 예
그래서 어느 정도 화학 작용이 충분히 일어날 때 다시 말해서 그 세술이 들어가서 사람이 변해서 그 사람들이
변해서이 이이 부대가이 체제가 안 되겠다 할 때 그때이
체제가 바뀌고이 되는 게 아마 내가 볼 때는 2500년 전 뭐
공자의 전략이었던 거 같은데 그런 점에서 공자도 사실 우연히 만나게 됩니다.
장소에 가가지고 만나게 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단순한 우연이 아니야. 내 이미
내 안에 내 안에 있던 그런 씨앗이 예 공자를 만나 걸 통해서
그런 식으로 또 새롭게 봐주는 점이 있었지 않느냐. 예. 고마울 뿐이에요. 다들.
그러니까 제가 봤을 때는 보통은 이제 뭐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이런 식으로 극적으로 이렇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면은 무슨 뭐
시대의 어떤 변화에 의해서 아픈 대목이기도 하지만은 어떤 개인적으로
이게 내 출세라든가 나를 알리고 내가 뭔가 세상에 어필하는데 이게 유리할까
저게 유리할까 하다가 자기 욕심의 일환으로 어떤 그런 것을 취사
선택하는 경우에 그런 식으로 극적으로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많은 거 같고
그 이제 이남 스님이나 법윤수님 경우처럼 그 머리 좋던 사람들이에
얼마든지 그런 식으로 영악하게 행동할 수 있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전혀
그렇지 않고 그런 분들은 그때 당시 벌써 4, 50년 3, 40년 전에
그 지금으로부터 보면은 한국사 사가 이렇게 변역이 되기 훨씬 전인데
어 그때 치열하게 얼마나 치열하게 그 담론을 갖고 치열하게 고뇌하고 했는지
그때 정토회 같은 경우도 그때 했던 어떤 결과 어 그러니까 내외 명철
안으로서는 어떤 깨달음을 추가 인간 진화를 추가하고 밖으로는 이제 구호라든가 환경이라든가
아 이런 쪽으로 탁 뭔가 틀을 잡아가는 그런이 세상 변화를 위해서
어떤 식으로 우리가 움직여야 될 것인지 그때 벌써 3, 40년 전에
짜내온 틀에 하나도 어긋남이 없이 지금도 뭐 만일, 2만일, 3만일 뭐
이런 식으로 쭉 이리 관지 견지온 거 보면 참 놀랐고 그런 면에서 우리나욱
선님이 이제 공자를 만나 것도 공자 같은 경우도 그냥 자기의 어떤 이익에 의해서 일이 붙을까 저리 붙을까가
아니고 정말 인간 삶의 근본이 어떤
정말 일의 삶이고 어떤 것이에 진정으로이 삶을이 세상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삶인지 이것을 끊임없이 성찰하고 권해하고 추구해 가는
삶이었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우리인 선생님도 결국 막바지에 그 우리가
알고 있는 왜곡된 공자가 아니고 그 진심의 공자를 만났기 때문에 아 그것과음 이렇게 우리가 추구해온 삶이
내가 죽였던 삶이 정말에 같구나. 아, 그렇기 때문에 이인나 목사님께서
말년 20여년을 지금 공자와이 노노에 이렇게 깊게 이렇게
전착해서 무려 1천000 페이지 가까운 책을 이렇게 서내지 않았는가 이렇게 싶습니다. 입니다.
서울법대 1학년때 사법고시 예비시험 합격해 출세길 보장된 운명이 달라진 이유 | 수감중 신영복과 매주 단둘이 만나 토론해보니 | 책 '논어를 연찬하다'펴낸 이남곡 인터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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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2

그나욱 선생님께서 22년 동안 공자와
함께 살았다고 해도 다름이 없는데요.
공자의 사람됨을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어떻습니까?
어,
[박수]
내가 이제 아마 예술 세 살에
처음으로 논어를 보게 돼요.
왜냐하면
뭐 저 조선도 알다시피
내가 그 당시 어떤 사회 피역 운동을
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면 공자에 대해서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겠느냐 하는 거는
팀자이 가지죠. 예전는 우익의 대부
아 보수 반도반도
사상적 원조 정도로 이제
보고 있었는데
그래서 내가 그 논를 볼 당시에 그
세상에 나왔던 책 중에 하나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이런 책이 나와
나올 정도에 있어요.
그렇죠. 그 100만 불 이상 판 책
논에 대한 책이 또 엄청나게 막 저
기초로 쏟아질 때었었는데
내가 논를 접하게 된 거는 당시 이제
장수로 이사를 해 가지고 저 장수에
정착을 해서
내가 정착하다 보니까 주변에 알고
지내는 사람들 뭐 이제 장석에도
있지만은 전주라든지 뭐 이렇게 좀
가까운
몬이라든지 이런 곳에 있는 사람들이
와서 자연히 이제 그 여러 가지
우리가 같이 고민하고 생각하는
문제들을 논의하는 자리들이 마련해 말
자연스럽게 됐어요. 예. 사람들이 뭐
모이게 되는데 조금만 의견이 달라도
이게 소통이 안 되는 거야.
이해 관계까지가
다르지 않지 뭐 귀농한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 사회 운동하는 사람도 뭐
있는데 그런데도
어 생각이 다르면 이게 소통이 안
돼. 그래서 이게 사실은 하나의 그
단적인 어 그런 현상이죠. 우리 이거
지금 현재 지금이이 뭐 극단적으로
서로 이렇게 적 뭐 적대하고 증화하고
하는 이런 평가름의 이런 퇴성이
나타나고 되는 그
근데 그래서 아이 이렇게 돼서는 좀
서로 소통하기가 힘드니까
무언가 성인급의 사람을 하나 앉혀
놓고
같이 좀 이렇게 이야기 해 보면
어떨까 해서
사람들한테저 우리 한번 성인을 한번
누구 안혀 놓고 한번 이야기 해
보자. 그래서 했더니
어 성인하면 또 오른 사람들
있잖아요.서 이제 석가지 부처님
부처님
부처님을 안쳐놓더라도
의견이 다를 것 같아.
불교를
저거하는 사람 믿는 사람하고 또
반대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그렇죠. 그렇죠.
예수님을 안쳐라도 예수님 마찬가지야.
예수님 안쳐라도 또 이게 제일 만만한
사람을 골라보자. 이건 누가 누가 막
그냥 요구를 하고 뭘 해도 예예.
별로 그 뭐 그 괜찮은 사람 딱
공자야. 그 당시에 왜냐면 공자 이미
막 비난을 많이 받고 있거든다.
그리고
어 우리나라에서도 사대 종교에서도
빠져버렸어.
유결하는 거. 그러니까이
뭐 권력이 없는 거야 이게. 예.
그래서 앉혀 놓고 해서 저도 뭐 큰
기대 안 하고 처음 보니까 사실
이렇게 보다 보는데
어느 순간이다 보니까 점점 공자의 그
진수가 이렇게 나한테 이게 뭐 내
시각이죠. 내 감각이지만 보여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마 내가 주자 승리학에
바탕을 체계적인 학습을 했던
사람이라면 보이지 않았을게 보이는데
그 보이는게 보이게 했던 요소가 내
자신의 경험들이에요. 변역 운동에
대한 경험들 그리고 그 저 어 감옥에
서였던 성찰 그 나와서 어 이게
불교사 연구소에서 같이 탐구하던 거
그리고 하나 더 나가 가지고 실질 해
보고 싶어서 무소위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이거 했던 연찬 이런 부분들에
의해서 공자가 하는데
아마 그런 면이 아마 나중에 이렇게이
이런 책을로 나옵니다만은
어 그중에서도
어 소름이 돋을 정도로 내가
뭐 뭔가 어떤 걸 발견했을 때 그런
느낌이 있잖아. 아 그런 느낌이 있던
문장이 하나 있어.
그죠? 어허
그것이 전체 노는 문장 가운데 아마
다른 사람들은 별로 별로 그렇게 흘러
버리는 문장인데에
노노 자한편 이게 9편이죠. 9편
7장에 나오는 문 예
어 말은 간단합니다. 내가 아는 것이
있는가? 아는 것이 없다.
아하. 아 무지야 무지야.
이게 내가 이제 한 분도 별로 내가
공부해 본 사람이 없지만 내가 논어
보면서 이제 한문도 더듬더듬
문법도 이해하기도 하고 하는데
무지 야야야 야 야라고 하는 거는
상당히 강한 표현이에요.
예. 에 호라고 하는 거는 좀 강한
표현이 아니고 뭐 그거는 뭐 좀 질문
비슷하게
약한 표현인데
야하는 상당히 강한 편현이에요.
무지 무지야 이거
무지하고
그다음에 하는 말이 그런데 그런데라는
건 내가 이제 좀 고친 거고
어 누구라도 와서 물어보면는게
유비부
문어 비부라 하는 거는
별로 볼 이렇게 평범한 사람이요.
아주 저 똑똑한 사람이라든지 뛰어난
사람이 아니고 비부
누구라도 와서 비부 비부가 어떤
비부가 나한테 물어오면 유비부 문어
물어보면
그다음이 재밌어요. 요게 요게요
해석이
아마 일반적인 논의 해석하고는 많이
다를 겁니다.
공공여야란 말이 나와. 공공여야
빌공자가 두 번 공공여야
텅빈서란
말이에요. 음
텅빈돼서 해 가지고 그다음에 나오는게
내가 그 양끝을 두들겨서이
한문으로 말하면 아고기양단
고는 이게 두들긴다는 게
내가 그 양끝을 양단을 두들겨서
갈른이
갈인데
끝까지 끝까지 밝혀 보겠다. 끝까지
밝혀 보겠다.
이게 사실은 평 이게 보통
논어에서는이 문장 논어 자한편
9편 7장 7장에 나온이 문장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요.
그 대수럽지 않게 넘어가는 것 중에
상당한 해석이 어떻게 하는가 하면
무지를 공자는 말이지 스승 중에
스승을 알려 준 사람인데 무지야
했거든. 그니까
겸손한 표현이다.
아, 상당히 그렇게 봐요. 겸손한
표현이다. 겸손한 표현이고 그렇게
보다 보니까 내가 그 양끝을
두들겨서이 한문으로 말하면
아고기양단.
음.
고는 이게 두들긴다는 게
내가 그 양끝을 양단을 두들겨서
갈런
음.이
갈인데 끝까지 끝까지 밝혀 보겠다.
끝까지 밝혀 보겠다.
예. 이게 사실은 평 이게 보통
논어에서는이 문장 논어 자한편
아 9편 7장 7장에 나온이 문장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요.
대수럽지 않게 넘어가는 것 중에
상당한 해석이 어떻게 하는가 하면
무지를 공자는 말이지 스승 중에
스승으로 알려 준 사람인데 무지야
했거든.
겸손한 표현이다.
아 상당히 그렇게 봐요. 겸손한
표현이다. 겸손한 표현이고 그렇게
보다 보니까 무지하고 뒤에 나오는
거는 뭐냐면
간언을 아까 양쪽 끝을 두들겨서
끝까지 밝혀보겠다는 갈 갈을 갈을
어떻게 하면 끝까지 가르치겠다.
이렇게 나와.
그러니까이 이렇게 해석하는 거 자체가
얼마나 모선되는지 자체를 의식을 못
해. 앞에는 무지라고 했는데 뒤에는
가르치겠다. 왜? 공자는 스승 중의
스승인데
스승이 이렇게 무지라고 하는 건
대단히 겸한 표현이야. 아 그러니까
앞에는 무지를 그렇게 해 놓고 뒤에는
가르치겠다.
천만해. 전혀. 그이 나한테는 그게
바로 들어오는 거예요.
왜? 연차이라는 걸 경험했기 때문에.
그까
연천이라는 걸 내가 저 실제로 해
봤기 때문에
공공을 대부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면
텅 비었다는 걸 앞에 비부를 수식하는
말로 해.
아무리 텅 빈 사람이 와서 물어봐도
이거
아무리 멍청하고 텅 빈 사람이 와서
물어봐도 나는 끝까지 양쪽을 두들겨서
끝까지 가르치겠다.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죠.이
말이 안 되는 해석을 대부분 그렇게
하고 근데 나한테는
공공이 비을 수식하는게 아니야.
음.
공자를 수식하는 말이요.
내가 텅 빈 상태에서
야방시 전차는 해 보셨잖아.
영위에 선다는 그러니까
영유에 선다 핵심적인 거예.
예. 그거를 어 그렇게 해서 그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 아닌 영의 영의
서서 제로
일체 제로 베이스에서
그 말은 뭐냐면 무지를 자각한
상태에서라는 말이야. 예.
그런데 그 말을 또 사람들이 이렇게
잘 해석 못 하면 그럼 내 내가 알고
있는 걸 다 버리란 말이냐? 버리면
안 돼. 버려 가지고 어떻게
파이칩니까? 버리라는게 아니고
내가 인식하고 있는 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감각일 뿐이고 나의 판단일
뿐이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틀림
없다라는 생각이 없는 거예요.
이게 영예요. 그니까 무지를 장악한
상태에서 끝까지 한번 그리고
무지야 해 버리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죠.
불가지론이요.
알 수 없어. 그건 나요. 불가지론
아니면 이런들 어려 저런들 어때리
회의론이 여기에 빠지잖아요. 이게
연찬 정신이거든. 치열하게 탐합니다.
어떤 바탕에서
내가 생각하는 것이 나의 감각이고
판단일 뿐이지만 하는 자각이 있는
상태. 그러니까 내 생각이
틀림없다는게 아니지.
그런 단정이나 고정이 없는 상태에서
끝까지 한번 탐구해 보겠다. 요게
논어 9편 7장이에요.
예. 이것이 나한테 전편을 읽는
키워드가 됩니다. 그러고 보면 다른
부분들이 제대로 이해가 되기
시작해요. 네.
음. 그래서
막 이런 점이에 내가 그 논노하고
이렇게 만나서
그 후 스스로 입문동이라고 하는 거
임문동갈 자체하고서 주로 동반자가
논어했습니다. 왜?
연이 굉장히 중요한데 이걸 야마귀시
연찬을 가지고 이야기하기 힘들어
사람들한테.
이름도 잘생 한 데다가
아 그래도 연천 야마기시 연찬 덕분에
국회에서도 뭐 하면 맨날 요즘에
연한다. 연찬 말은
많이 따오긴 한데 연이 안 돼. 실제
그게 연천이 아니고 그냥 뭐 저
연천회라 말은 많이 해.
근데
어 그거를 내가이
야망의 나오면서 나오는 것도 앞으로
이야기하게 될지 모르겠지만은 지금
세상에서는 어 그런 어 방식 그런
방식은 보편증을 획득하기가
어렵더라고. 음흠. 어
그냥 뜻 맞는 사람끼리 몇 사람은
행복하게 살 나도
어 내가 그게 저 그런 면에서는 저
전혀 야마이 살면서 불편이 없었어요.
나는 왜냐면 그런데 좀
원래 좀 익숙한 사람이야. 목소리
그래서 아근데 이게 운동으로서
보편성을 획득하기 어렵다는 생각
때문에 나왔어 나왔는데
그 연찬을 이렇게 보편했으면 좋겠는데
야마이 씨가 지금 일본에서도
운동으로선 거의 끝난 상태입니다.
그 일본에서 또 여러 가지 저 뭐 안
좋은 선입관들이 많아서
그 뭐뭐라 일종에
사교 비슷하게 사교 집단 비슷하게
이렇게 보하는 견해도 있고 해서
한국은 뭐 그런 것까지는 아닙니다만은
일본이 이제 본산이니까 한국은 뭐
한국
한 곳에 있잖아요. 한 곳 뭐 어디
거기죠? 향남 바람 바람 산남마인데
어 그래서 내가 그 입문 운동을
하면서 어 야마귀시이라는 이름보다는
공자의 이름을 불려서 사실은 연차의
보편화 운동이랄할까 이게 핵심입니다.
이 핵심이고
그게 그걸 통해서만 지금의 이렇게
심리적 내전에 가까운
우선 지금 저 우리 정치 상황 퇴적인
정치 상황을 넘어설 수 있지 않겠느냐
이런 생각도 있었고
또 여러 가지 뭐 협동 운동이라든지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운동들이
있잖아요. 이런 운동들이 정말로
뿌리를 데리고 성공할 수 있으려면
그 내부의 소통문화 그리고 어떤
합의에 이르고 실천하는 그런 면에서
어 이런 연이라는게 참 중요하게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예.
공자하고 만나서 공자하고 미올
기간이었지.
네. 네
그 22년 동안 이제 공자와 함께
미를 하셨는데에
공자 이제 사람됨을 물었고 이제
그러니까 공제 핵심을 지금 그 어떻게
보면은 그 무지의 자가 무지의 자가
그러니까 야마귀시 연찬에서도
어 영위에서 모든 것을 제로에서 실제
뭔가
실제는 뭔가 그러니까 선입견을 을
가지고 그것을 합리하기 위해서 논리적
변명거리를 항상 하는게 학문이고
사람들의 논리데 그러니까 100분
토론 하면은 전혀 100분 동안
교집합이 하나도 안 생기고 서로 더
등을 돌리기만 하는데 그러니까
내가이기는게 목적이 아니고 내 논리의
병명거리 합리성을 찾는게 목적이
아니고 진짜는 뭔가
진실은 뭔가 이런 것을 그러니까
자기가 무지의 자각 편견과 고정관념을
놓지 않으면은 는 실제적 진실을
탐구할 수 없기 때문에 공자였던 이런
어 모습을 가장 높게 평가하셨고
그러니까 그 불교소도 승산 스님이
미국가 가지고 어 선불 세계 알려 때
그분은 항상 트레이드 마크가 오직
모를 뿐
오직 모를뿐 그랬는데
그런 것도 어떻게 보면 이제 그
분류가 무하고
그 무상이고 그러니까 무지의 자각하게
더 철저한 것이 불교하지만 한국
선불교의 모습 보면은 굉장히 그
기독교 이상으로 놀랍게 독선적인
모습이 또 강한데 그리고 예를 들면은
일본의 야마귀시도
연찬 정신이 놀라울만큼 야마귀시
미오조라는 사람이 다시 이렇게 무지의
자각을 현실에 맞게 100년 전에
퇴살려냈는데
어떻게 그렇게 연을 예리하게 이렇게
파헤치는 단체가 연찬 정신하고 또 정
반대 대로 또 가버려 가지고
어 또 그게 또 산산 조각이 많이
깨지고서 에존이라는 새로운 곳으로
이렇게 탄생하고 그러니까 그게 그렇게
이제 공자도 그렇게 위대한 무지에
자각을 했음에도 한국에 와서 성리하기
위해서 너무 또 독선적으로 변했듯이
그런 점이 어떤 참 그 삶의
아이런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
본질의 근본 바탕을 따져야지 어떤
지금의 또 야마귀시 공동체를 보고
야마귀시 미오조를 오해하면 안 되고
지금 성리학만 보고 또 공자를
오해하면 안 되고 어 또 지금의 어떤
선승들의 모습만 독선적인 모습만 보고
또 붙다야만 되고 하튼 이제 그런
점을 느끼게 입니다. 음.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말이 잘못된 이유 #이남곡 #야마기시 #논어를 연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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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3

공자 사상의 핵심을 보통 인이나 예로
하는데요.
그런데 이제 공자는
흥어이 이벌의 성어학이라고 해서
시에서 시 포에서 일어나서 악으로
음악 음악의 악 악으로 완성된다고
했는데요.
보통 이제 성인 철학자가 공자님처럼
감성적인 신하 예술 음악을 중시하고
강조한 인무를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거든요.이를 이를 어떻게
보십니까?
그 점이 이제 사실은 그 뭐 이야기를
여러 가지 해 나가야 될 부분이
하난데 무지의 자각에 바탕을 둔 연찬
그리고 그것에 바탕으로 둔 호학 학
배우는 걸 배우길 탐가는 걸 좋아하는
거 이런게 사실은
공자한테는 인의 예지보다도 더
본질적인 것입니다. 예.
대부분 그 점에서 이제 아까 이제
우리 저 조선생이 지금 말을 하셨기
때문에
인의 예지하고
어 아까 그 공공
공공 예라고 하는 게
여기에 대한 이해를
하는데
어떤 유학자보다도 내가 이제 물론
과문이니까 많이 못 봤지만 어떤
유학자보다도 더
아주 내가들을 때 아 이거 핵심을 잘
짚었네라고 하는 표현을
내가 원불교 대경에서 발견을 해요.
원불교의 소태산 대종사가
이야기하는 가운데 아마 유학자 유교
사람하고 대화하는 과정일 텐데 이런
말을 하더라고. 뭐냐면
허무멸을 허무멸 이게 이
어 실제로 비공짜가 나오는 건
노자에도 빌공자가 안 나옵니다. 노자
도덕경에도 한자도 안 나와요. 공공
공사상이 없어 거기는.
유 유학에 유교 쪽에도 공자
이야기에도 공짜가 별로 안 나와.
필공자가 안 나오는데
내가 기억하기엔 그 아까 9편 7장에
공공이란 말이 나오는데요
말을 어 허무멸이라고 하는 식으로
표현을 한다면 공연을 불교에서 말하
저 소태산 대종사의 표현들 하면
대중사가 급발을 표현하더라고 공을
아니 허무 정멸을 채로 하고 체 몸
하고 인의 예지를 용으로 합니다.
용어로 삼는다.
음.
아주 내가 그 말 듣고이 엄청난 이게
느낌 모아요.
정확하게 정확하게라는 건 내 탄이니까
다른 사람들 다른 생각하겠지만 내가
볼 때는 핵심을 질렀어.
근데 이게 사실은 논에도 나옵니다.
어 그게 노 공자의 직접적인 이야기는
아니에요. 아니고
6원 6패라는 말을 해요.
음. 6원 6패 여섯 가지 이에
대해서 이게 덕도 되지만 이게 폐가
될 수 있다는게 6원 6패인데 그게
그게 전인
예지 같은 것들이 다 덕인데이 덕이
무엇이 뒤되지 않으면 하는 말은
호학이에요. 불호학. 만일에 배우는
걸 좋아하지 않은 홍악을 하지 않으면
다 패단이 되는 거예요.
그니까 이거 이게 바로 어 어떻게
보면 아까 초태산 저 박중민 선생이
이야기하는 핵심이요. 음.
어. 허무 정밀이란 표현이 좀 조금
우리 마음에 좀 아 닿지 않았다는
오히려 공이란 말이 그 좋았는데 공을
채로하고 음
인위 예지를 용어로 삼는다는 이제
이런 그거가 이제 하나 생각이 되고
아까인가
예에 대한 는데
지금 말씀하신 그 흥어시
입을래
성어랑
예예
일반적으로 다른 성인들한테는 볼 수
없죠.음 음.
근데 실제로 공자는
어 인간의 어떤 감정에 일어남
주로 상당히 보면 뭐 대단히 이성적인
성력은 주로 그 대단히 이성적인 근데
공자는
어 인간의 어떤 감정이라든지 이게
정서라든지에 대한 탁월한 통찰이
있어요.
그 그게 지금 그 문장 상당히 어려운
문장입니다. 나도이 이게 흥원이
이번에 성어하기 이거 어떻게 어떻게
봐야 되나 하는 거 이게 잘 들어오지
않았어요? 처음에 그러는데 이
쭉 공자 이렇게 논를 몇 차례 쭉
보다 보니까 이게 이제 들어와 사람이
어떤이
감정이 일어나는 것에 온초적인 감정을
나는 시라고 표현한 거 같아.
네.
온초적 감정이야 이게. 보면 아 근데
대초로 그 어 히로의약도 있지만 내가
볼 때는 그 원초적 감정이 뭐냐면
아름다움 같아. 예.
아름다움에
대한 감 그거야이 저 예 일어날 때
이게 시야 그러니까
그때 뭐 식경이지 뭐지 하는 걸 많이
예를 들어서 시를 모르면 뭐 하는
말을 제자들한테 많이 이야기해 시를
모르고 어떻게 하는 말은
그 사람의 어떤 원초적 감흥
아름다움에 대한 감흥 이런 것들이
일어나게 시인데
어 시 처음 일어나는 감정은
거치어요. 음
거칠다고 이러는 감정이 거칠어
거칠어서이
거친 걸 그대로 해 가지고는 내가 볼
때는 공자가 생각할 때는
이상적인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건
조금 어 그대로 안 된다. 그게
입을래야. 입을래. 근데 여기서
얘는요
얘가 또 이게에 뭡니까? 아, 공자가
아, 그 과거에 공자 이전에 여러
가지 사상 여러 가지 이런 부분들을
어 내용을 바꾸고 바꾸고 확장하는
걸 해요. 그게 바로 헌부대 세수를
담는 방식이 하난데 하나가 군자고
군자도
내용을 바꿔 버려. 군자라는 건
사실은 대단히 그 신분제 사회에서의
위계 질서를 나타내는게 군자
아닙니까? 요 소위 관료 지배 계급을
나타내는게 군자야. 임금이 아들이라는
건데 내용을 완전히 벗어버려. 내용을
그 그런게 아니고 인격이 성숙한
사람이 군자다라고 이렇게 바꿔
버린다.
또 하나가 예입니다.
보통 예하게 되면 그냥 딱딱한 예의
범죄 이미 굳어져 있는 예의 범죄를
이야기하는데 공자는 이걸 확장해
버려요.
음.
아름다운 인간의 관계 아름다운 질서를
예로 합니다.
극기 복리할 때 얘가 바로 그예요.
네. 아름다운 인간 실수인데
적어도 인간이 일어나는 어떤 온초적인
어떤 그런 감흥을 예로서
다시 말해서 아름다운 질서를
향한 인간의 어떤 그런
그런 것으로 이렇게 좀 정제되지
않으면이라는
뜻이 이래예요.
아 그렇게 보여 나한테. 그리고데
마침내
그게 완성으로 나타나는게 음악입니다.
흠. 이건 다 요새 아주 현대
현대하고 통화하는 공자의 감각 같아.
예.
요새 보세요.
예.
음악이 지금 얼마나 지금 뭐 어 내가
가끔 그 그런 이야기 저 하는데
요새 인무운동가 뭐 철학가들 나와서
100마디 하는 것보다
어 가수가 어 이렇테면 트로 말하면
임영웅이가 한번 노래를 하면이
사람들이 감성을 깨워버려. 어 근데
거기에 이게 이게 이게 중요한 거야.
거기에 내용이 담기는 가사 가사하고
어떤 음률 음률 자체가 이게 적어도
어 어떤 인간의 보편적
그 지향을 담올 수 있어야 돼이
얘야이이 현대적으로 말하면
어 요새 또 그 저 임영보다 더 요새
뜨겁게 되는게 저거잖아. 음.팝 데몬
헌터스
그 나도 그 봤어요. 봤는데 어
솔직히 나는 감각은 트로트가 더 맞아
살펴봤는데
그런데
굉장히 귀중한 여러 가지를 생각을
하게
지금도 근데 공자는 그 성어학이라고
하는게 나는
어 요새는 또 저 실제로
이론으로도요. 아 저 정치 이론이나
뭐 사회 이론으로도 정동 이론이라고
하는게 상당히 각광을 받습니다. 뭔가
하면 인간은 감동을 해서 정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실제로 일이 안
이루어져. 정동이야. 정동.
근데 그런 면에서 본다 그러면 어
어떤 성인보다도 어 공자는 그런면
뛰어나다고 보여지.
그렇죠. 그러니까
자 공장님은
우리가 이제 예전에 예도 조선 시대
어떤 성리학의 어떤 보수의 질서를
세우는 그런 예만 우리가 그 굉장히
꼰대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장유의서 뭐 어 사고리충 뭐 같은
부부 유별 이런 식으로 남녀 차별 어
또 뭐 윗사람에 대한 또 충성 하여튼
이런 거만 굉장히 예를 예로 알고
있는데 공자의 본질은 은 지금이
책에서도 우리농선님께서
얘가 서로의 관계 사이 좋음 쪽으로
아주 우리 현대적으로 굉장히 공자의
어떤 핵심적인 예를 풀어 주셨는데요.
그러니까 또 이렇게 더군다 어떤
감성적인 부분은 제가 보기에는 공자에
대해서이 부분을 사람들이 지금 엿목을
알면은 공자의 매력에 정말 엄청나게
빠졌다. 그러니까
저는 이제 예를 들면 예수님 같은
경우는 굉장히 뭐 격동적인 것도 있고
엄청난 사랑이 넘치고 정의를 세우는데
어떤 주한점을 줬어 뒀다면은 또
부다 같은 경우는 이제 고통의 소멸에
대해서 엄청나게 이렇게 중점을 두다
보니까 그 얘기를 하다 보니까 또
출가자들 이후에 전문 수행자들에게
대부분의 설법을 하다 보니까 어떤
감성적 적인 면은 상당히 거의 배제를
했거든요. 감성적인 면이 드러나는게
거의 없는데
이제 공자님의 경우는 굉장히 이렇게
감성적이에요. 너무나 어 이렇게 있고
그래서 아까 뭐 대중경 말씀도
하셨지만 저는 이제 공자님의 에의에
관점은 조금 그것과는 다른데 그러니까
예를 들면 이제 허무 정멸로
보기보다는
그 이제 운물교회에서도 저는
유무상이란 것을 오히려 좋아하는데
이제 물러설 때는 무지만은 유로 다
드러나듯이 우리가 이제 사랑하고
미워하고 뭐 이렇게 하는 일체 어떤
감성적인 것이 원래 아무것도
없다기보다는 이제 불교적으로 보면
연기론 쪽으로 보면은 단지 어떤 조건
그 상황에서만 미움이 있는 것이지
연구적으로 항시 내 미움이 고정적인
형태로 딱 가시와 어떤 철퇴와 창이
내 마음속에 항상 유지돼 있는 것이
아니고 미움이라는 것이 증심이라는
것이 갈등이라는 것이 그 항상 조건에
의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조건이
해주면 그 자체는 공이고 그건 자체는
무고
그 때문에 이제 유무상통을
다 넘나들면서
그것을 무라고 하기보다는 그렇게
카탈스 하는 그런 감성적인 것도 우리
삶이 아주 중요한 부분으로서 시도
쓰고 노래도 부부 부르는 것을 아주
배태하기보다는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서
인간의 감성들을 이렇게 공자님께서
이렇게 했다는데 대해서 현대인들의
감성과는 너무도 이렇게 딱 어울린다.
특히 가를 특히 좋아하는
한국인들에게는 너무나이 공자님의
공장님이 거의 매일 노래를 했다 그
매일 노래를 했다 할 정도로 감성적인
분인데
야 요즘 한국인들의 정서에
굉장히 부합된 분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그래 그 아 참 재밌어요 그게
공자 스스로가 상당한 정도 수준의 에
음악에 대한 초회가 대단하셨죠?
대단했어. 대단하고
자기도 악길 잘 다루고
그 저 자로가이
나오는 이야기데 자로가 한번 공장이
있는데 와서 그 설이라 악기 아마 그
검은고 비싼 거 뭐했는데 그걸 하는데
어떻게 네가 감히 이런 걸 하느냐
하고 나
아 잘오라 하는 제자는 사실은 보면
재밌는 제자 중에 하나야
스스름이 없이 그냥 공자하고 나의
차이도 제일 적어 아홉살 차이밖에 안
나 근데
공자와 제자들은 보 40 몇 살
차이나는 청년들하고도 막 그걸
하거든. 예제 그
어 제일 그 이제 그 허무 없이
이렇게 이야기하다 보니까 너 너 같이
그렇게 저 그런 정도 아기 하는 놈이
어떻게 우리 집에 와서 하느냐 하고
나무라는 이야기를 할 정도로 공자가
그 아 그리고
어 그 아까 이번 애하고도 관계되는
건데
순임금이 만든 음악을 제일 좋아했어.
그러니까 그게 돼 있는 거야.이데
네.이 그 인간이 그 추구해야 되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질서 안에 들어
있는 거예요. 그게 순임금의 음악을
듣고는
뭐 석달 동안인가
고기맛을 몰랐다고 할
소라는 음악을 듣고
그게 소화가 바로 이제 아마 순임금
거 그 그런 그 그런 식인데
내가 요새 그 좀 지난번 우연히 무슨
방송을 보다 보니까 아 그 말이 좀
그 연결이 돼서 하나 생각되는
거예요. 송창식.
네.
우리 나고 봐 비슷할 거야. 나이가.
송창식. 송창식이 KBS 사는 거
있어. 그
부의 거 그게 나와서
하데 마침 그때 송창식이 노래를
부르는 날인가 하는 노래를
이제여 가수가 송창이 노래 하는데
부르는가 하는 걸 박정현이가
불렀다고.
아하. 아 사실 내가 좋아하는 가수
중에 한 사람이 박정현입니다. 예.
근데 박정현이 콘서트 한번가 보는게
죽기 전에 하늘이
버디스
버디스
아 버
박정희 노래를 듣고 송창 씨가 딱
평을 하는데 이런 말을 하더라고. 내
정확하게 표현을 안 되는지 모르는데
요새 음악을 보면 자기가 볼 땐 너무
그 표현이 그래. 그게 좀 거칠다는
거야 이게. 근데 뭔가 음악의 표준이
있어야 될 거 표준이란 말을 하거든.
표준 표현이 정확한지 내가 기억을
못했는데 근데 박정희한테 최대히
찬사야.
나는 박정희를 볼 때 그 표준을 보는
거 같다는 거예요.
아하
그 내가 그 말을 듣고 송창식기도
굉장히 마음에 들더라고.
그 이럴 테면
예,
지금 음악
뭐 뭐야, 케팝 데모넌헌넌터스 같은게
지금 세계적인 각각을 받고 있지만 더
앞으로 어 하려고 그러면
세계가 지향해야 될 예,
세계가 지향해야 될 아름다운 질서를
그 안에 담을 수 있어야 돼. 이것이
아마 앞으로의 과제가 아닐까 이런
우리 공장한테서 크게 배우는 겁니다.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