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ember 07, 2025
이남곡(1945~)은
전남 함평 출신의 사회운동가로, 서울대 법대 재학 중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참여했으며, 1979년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으로 투옥되어 4년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이후 농촌운동, 교사운동, 그리고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한 사회운동을 이끌며 '좋은마을' 운동을 펼치고, 『논어』 연구 및 강연 활동을 해오고 있는 인물입니다. 주요 활동 및 이력
- 초기 운동: 서울대 법대 재학 중 반독재 운동, 농촌운동, 교사운동에 참여했습니다.
- 남민전 사건: 1979년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으며, 이 경험을 계기로 사상적 전환을 겪습니다.
- 사상적 전환: 옥중에서 불교에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후 '무아집·무소유·공자' 사상을 바탕으로 활동 영역을 넓혔습니다.
- 이후 활동: 법륜 스님의 정토회와 관련된 불교사회연구소 소장을 지냈고, 전북 완주에 '좋은마을'을 일구며 농촌운동과 공동체 운동을 이끌고 있습니다.
- 저술 및 강연: 『논어를 연찬하다』와 같은 저서를 출간하고, 『논어』를 통한 삶과 사회에 대한 강연을 활발히 하고 있습니다.
이남곡 씨는 남민전 사건의 투옥 경험을 바탕으로 이후 불교와 동양 사상을 접목시켜 사회 운동을 펼쳐온 실천적 사상가로 평가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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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전 사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의 깃발
남민전 사건(南民戰事件)은 1979년 대한민국 유신 말기 최대 공안 사건이자 논란은 있지만 일부 관련자들이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된 사건이다. 1978년부터 1979년 4월 동아건설 회장 최원석의 자택 등 서울 강남 일대에서 벌어진 강도·절도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확대됐다.
1976년 2월, 이재문, 신향식, 김병권 등이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를 비밀리 조직한다. 1977년 1월,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 민중의 소리를 여러 차례 배포하는 등 반유신 투쟁을 전개하고 민청학련을 위시한 학생운동권을 중심으로 청년학생위원회를 조직한다.
무장 혁명을 목표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과 연락을 시도하고 예비군 훈련장에서 총기를 밀반출해 비축하고 폭탄을 사제하던 중 민투위 강도 사건으로 수사당하게 된다. 1979년 10월 4일부터 11월까지 이재문, 이문희, 차성환, 안재구, 이수일, 김남주, 이재오를 비롯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조직원 84명이 구속당하였다. 공안 기관은 이것을 '북한 공산 집단의 대남 전략에 따라 국가 변란을 기도한 사건', '북한과 연계된 간첩단 사건', '무장 도시 게릴라 조직' 등으로 발표하면서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 등의 협의로 처벌하였다.
후일 KBS에서 방영되었던 인물현대사에서 당시 한나라당 국회의원과 늘푸른한국당 대표를 지낸 이재오나 당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관련자들이 한 증언을 보면,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맹목으로 추종하는 조직이었다기보다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등한 처지에서 협상하려고 했던 진보성을 띤 민족주의 성향 단체였다고도 한다.
-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을 역할 모델로 삼은 자생한 사회주의자, 진보성을 띤 민족주의자의 조직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맹목으로 추종하지는 않았더라도 냉전이 한창이었던 당시로서는 1970년대 민주화운동 세력들 중에서도 상당히 이질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재오 자신은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관련자가 아니고 한국민주투쟁국민위원회 소속으로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는데 유신정권이 비슷한 시기에 체포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와 엮었던 것일 뿐이라 주장한다.
2006년 3월, 노무현 정권에서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가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 관련자 중 29명을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했다. 남민전 주도자로 사형 선고를 받고 1981년 옥사한 이재문과 1982년 사형당한 신향식은 제외되었다.
홍세화는 이 사건이 알려지기 전 모 기업의 프랑스 파견 직원으로 프랑스에 갔다가 이 사건이 알려진 뒤 프랑스로 정식으로 망명하였다. 홍세화 처지에서 바라본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는 후일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에 실렸다.
사건
당시 내무부 장관 구자춘은 1979년 10월 9일 건국 후 반국가 활동 단일 사건으로는 최대 규모인 74명이 가담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의 총책 이재문(45)을 위시한 20명을 경찰이 검거한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잔당 54명에 대한 검거령을 내렸다고 하면서 이들이 "북괴의 적화통일 혁명 노선에 따라 폭력으로 대한민국을 전복하고 종국적으로는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전위대로서 지하에 반국가단체인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학생, 지식인, 긴급조치 위반 수형자 등을 포섭하여 대정부 투쟁을 선도 조종하고 도시게릴라 방법에 의한 납치·강도 행위를 자행, 학원 및 사회의 혼란을 조성하고 민중 봉기에 의한 국가 변란을 획책해 온 자들로서 이들이 사용한 사제폭탄 소총 및 실탄 도검류 통신 문건 공작 장비 등 증거물 1374점을 압수했다."라고 밝혔다.
구체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가 당시 대한민국의 군사독재정권을 전복하려고 점조직으로 지하조직을 구축하고 10대 강령, 9대 규약, 10대 생활 규범, 4대 임무 , 3대 의무 등을 제정한 후 인공기를 모방하여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깃발을 만들고 혁명 투사로서 가입할 때 선서하게 했다고 하면서 5명에서 12명을 일당으로 한 혜성대라는 결사 행동대를 조직하고 봉화산작전, 땅벌작전 등 암호를 사용해 서울시 강남구의 재벌 집과 동대문구 휘경동의 G모 사장 집에 침입하여 3회의 강도 행위로 당시 500,000여 원에 상당한 금품을 털고 추적하는 수위를 단도로 찌르기도 하였다.
구성
이재문 1964년 7월 인민혁명당 중앙상위조직부책으로 군사독재정권 전복 획책하다가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민청학련 사건을 주모한 여정남을 배후에서 조종했으며 1976년 2월 이만성(가명), 김병권(가명 김경인) 등과 함께 소위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를 결성,
위원장으로서 취임하여 점조직으로 학생, 교직자 등 74명을 포섭했다.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의 조직 기구로 중앙위원회와 그 아래에 총무, 조직, 교양선전선동, 출판, 통일전선, 무력, 대외연락, 정보, 재정 등 9부, 검열위원회, 서기, 서울과 경북, 호남 등 3개 지역책을 두고
중앙위원회 직속 하부 조직으로 민주투쟁국민위원회(한민성 가명)을 설치하여 산하에 청년,농민, 노동, 학생, 연합, 교양 등 6부와 지도요원 및 221개조 편성 암약하며
김일성에게 "피로써 충성을 맹세"라는 서신을 보냈다.
재판
대법원(주심 이일규)은 남민전 피고인 58명 중에 이재문 등 57명의 상고를 기각하고 신동규에 대해 원심파기 환송하였다. 이에 따라
신향식과 이재문 사형, 안재구, 최석진, 이해경, 박석률, 임동규 5명에게 무기징역,
차성환, 이수일, 김병권, 김남주, 박석삼, 황금수, 김종삼에게 징역15년 자격정지15년,
임규영, 노재창, 김부섭, 김영옥에게 징역10년 자격정지10년,
이문희, 윤관덕, 김봉권에게 징역7년 자격정지7년,
이계천, 이재오, 임준열, 심영호, 이학영, 김흥, 최광운, 김명, 백정호, 정만기에게 징역5년 자격정지5년,
임기묵, 전수진, 최평숙, 권영근, 김정길, 이강, 김재슬, 김특진, 황철식, 최강호, 권오헌에게 징역3년 자격정지3년이 선고되었으며
남민전 관련 전체 피고인 73명 중에서 김세원 등 6명은 상고를 포기했고
상고한 67명 중에 김승균 등 9명은 상고이유서를 기한 내에 제출하지 않아 항소심 형량이 확정됐다.
같이 보기
- 인혁당 사건
- 민청학련 사건
- 남민전 강도 사건
-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
- 남조선로동당
- 사회로동당
-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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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 (南朝鮮民族解放戰線 事件)
현대사 사건 1976년 반유신 민주화와 민족해방을 목표로 결성된 비합법 지하 조직.
정의
1976년 반유신 민주화와 민족해방을 목표로 결성된 비합법 지하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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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남민전은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의 약칭으로 1976년 2월 이재문, 신향식, 김병권 등이 결성한 비밀 지하조직이다. 1979년 10월 9일과 16일 그리고 11월 3일 등 3차례에 걸쳐 구자춘 내무장관이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남민전 결성을 주도한 이재문은 경북대를 졸업하고 민족일보 기자 생활을 하면서 오랫동안 사회운동에 가담해왔다.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고 1974년 민청학련과 제2차 인혁당 사건으로 수배자 신분이 된 상황 하에서 남민전을 결성한 것이었다.
남민전은 1977년 1월 반(半)합법 전술조직으로 ‘한국민주투쟁위원회’(민투)를 결성하여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 및 기관지 ‘민중의 소리’를 8차례에 걸쳐 배포하는 등 반유신투쟁을 전개하는가 하면 청년학생위원회와 함께 민주구국학생연맹, 민주구국교원연맹, 민주구국농민연맹을 결성하기도 했다.
주요 활동은 유인물 살포 등과 같은 선전전이었으나 혜성대라는 별동대를 만들어 자금조달을 위한 강탈 사건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이러한 활동이 꼬투리가 되어 1979년 10월 4일 공안기관에 의해 이재문(李在汶), 이문희, 차성환, 이수일, 김남주 등이 체포되고 그해 11월까지 84명의 조직원이 체포되었다. 체포된 이재문은 1981년 11월 22일 감옥에서 사망하였고, 신향식은 1982년 10월 8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안재구, 임동규, 이해경, 박석률, 최석진 등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김남주 이수일 등은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관련자들은 형 만기 등으로 1988년까지 모두 석방되었으며 2006년에는 관련자 중 최석진, 박석률, 김남주 등 29명이 반유신 활동을 했다는 점을 근거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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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현대한국 사회운동과 조직』(조희연, 한울,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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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 사건
제목(Title) :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 사건
Subject :
사건발생일 : 19791009
사건종료일 : 19801223
사건내용 : <사건경과>
1976.2.29 :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이하 남민전) 결성
1979.10.9 : 구차춘 내무부 장관, 남민전 사건 1차 발표
1979.10.16 : 구자춘 내무부 장관, 남민전 사건 2차 발표
1979.11.13 : 치안본부, 남민전 사건 3차 발표(이상 편집부 엮음, ??공안사건기록: 1964~1986', 세계, 1986, pp.103-104)
1980.2.4 : 남민전 1차 공판(동아일보 1980.2.2)
1980.2.7 : 남민전 사건 관련, 박현채(징역2년, 집행유예 3년) 등 항소심 선고(기쁨과 희망 사목연구소, ??암흑속의 햇불' 제4권, 1997, p31)
1980.4.14 : 서울형사지법, 이재문 등 8명 사형구형(동아일보 1980.4.14)
1980.5.2 : 서울형사지법, 이재문 등 4명 사형선고(동아일보 1980.5.2)
1980.9.5 : 서울고법, 남민전 항소심서 이재문, 신향식 사형선고(동아일보 1980.9.5)
1980.12.23 : 대법원 남민전 상고심 이재문, 신향식 사형확정(동아일보 1980.12.24)
<사건배경>
<남민전>은 1976년 2월 29일, 당시 반유신저항운동의 통일성과 지속성을 보장하기 위해 지하저항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이재문, 김병권, 신향식, 안재구 등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조유식, ?이재문과 남민전?, ??말' 1992.8; 신준영, ?남민전 중앙위원 안재구 교수?, ??말' 1991.3; 편집부 엮음, p116).
즉 <남민전>의 결성은 종속적 산업화가 본격화되면서 제기된 산업화의 ‘심화’기의 경제적 모순과 유신체제의 성립과 강화를 둘러싼 정치적 모순을 구조적 배경요인으로 하고, 이념적 급진화를 경험한 신혁명운동인자가 배출되었으나 독자적으로 혁명조직을 형성 운영할 수 있는 수준에 다다르지 못한 조건 속에서 성립하였다(조희연, ??현대 한국 사회운동과 조직', 한울, 1993, p180).
이들은 당시 ‘현장투신론’과 ‘전위조직건설론’이라는 이분법을 지양하고, 노동자?농민 스스로 조직을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하고, 선전?선동해야한다고 생각했으며, 기존 대중조직이 있는 경우에는 올바른 변혁운동 방향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활동하고, 기존 대중조직이 없는 계층?계급에게는 새로운 대중조직을 만들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기로 한다.
이러한 지향을 가지고 <크리스찬 아카데미>, <가톨릭농민회>, <농업신용협동조합> 등의 성원 중에서 선진분자를 조직원으로 가입시켜 활동하게 했다(최현숙, [이 사람에게 듣는다: 남민전의 안재구], ??우리사상' 창간호, 1991, pp.336-337). 그리고 반파시즘 대중운동이 학생운동을 선두로 하여 일정하게 발전해 감에 따라 그것을 조직적으로 반영하고 지도하려고 하는 외곽방계 부문조직을 분화시키려는 시도를 하는 과정에서 검거를 맞게 되었다(조희연, p343).
<사건내용>
검찰은 1980년 4월 14일, 논고를 통해 “이 사건은 북한공산집단의 대남전략에 따른 인민민주주의혁명을 기도하면서 그들의 전략을 교과서적 지침으로 활용한 전형적인 반국가 변란기도사건이며 북한공산집단의 남한 혁명단체로서의 정통성을 계승한 비밀지하당 사건일뿐 아니라 북한공산집단과 간접적으로 연관된 간첩단사건”이라고 규정했다(동아일보, 1980.4.14). 이외 내무부 및 치안본부 발표문은 편집부 엮음, ??공안사건기록: 1964~1986', 세계, 1986, pp103-104, 이재문 공소장은 대검찰청 공안부편, ??좌익사건실록' 제12권; 편집부 엮음, ??공안사건기록: 1964~1986', 세계, 1986, pp.129-2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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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마을’대표 이남곡 서혜란 부부
연재 [불교신문 2479호/ 11월26일자]
입력 2008.11.22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나란히 옥살이를 했던 이남곡.서혜란 부부. 당대 최고의 ‘엘리트 부부’로서 사회개혁과 농민운동을 주도했던 이들은 전북 장수의 ‘좋은 마을’에서 ‘둘도 없는 도반’이 되어 자연과 더불어 새로운 꿈을 지피고 있다.
“佛心 버팀목 삼아 행복한 세상 만들 겁니다”
사회 변혁 꿈꾸던 부부, 야마기시즘 실현위해 정진
전북 장수서 새삶…“생명 넘치는 행복공동체 꿈꿔”
때는 1979년 가을 서슬퍼런 유신시절. 6.25 전쟁 이후 최대 규모의 연북지하조직인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이하 남민전)서 활동한 부부는, 생후 6개월 된 갓난 아들을 남겨두고 철창에 갇혔다. 하루아침에 아들과 며느리를 빼앗긴 어머니는 홀로 남은 손자를 업고 무작정 집 근처 사찰을 찾아갔다. 당시 천막법당에 부처님을 모셨던 부천 석왕사는 가난과 공포에 떨고 있는 한 할머니를 따뜻하게 맞아줬다. 이남곡(66) 서혜란(56) 부부의 삶은 여기서 출발한다.
“어머님은 전쟁통에 아버님과 시동생을 잃고 오로지 남은 자식들 먹여 키우기 위해 사셨어요. 그 옛날 제 남편이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하늘을 얻은 듯 좋았고, 서울대 법대 들어가서 사법고시 자격시험에 덜컥 붙었을 때 세상이 다 당신 것인 양 행복하셨대요. 그러면서 ‘그 뒤부터 삐그러졌다’고 말씀해요…” 승승장구할 것만 같은 아들의 삶이 언제부턴가 더디고 굽어지고 있음을 느낀 어머니의 ‘삐그러졌다’는 말뜻을 알 것도 같다.
남편을 만나서 고생을 자초한 건 부인도 마찬가지. 경남 거창의 부잣집 외동딸로 태어나, 여성 엘리트계 산실과도 같은 이화여대서 역사학을 전공한 그녀는, 공동체적 삶, 혁명을 넘어 개벽을 지향하는 남편의 꿈에 자신의 인생을 걸었다.
잠시나마 남민전 활동을 했던 전력으로 남편과 나란히 형무소에 갇혔지만 그 역시 그녀에겐 후회와 고통의 시간만은 아니었다. “6개월만에 남편을 두고 저 혼자 석방됐지요. 어떻게든 먹고 살아야 했기에 아들을 데리고 친정에 가서 친정집 근처에 양품점을 차렸답니다. ‘여자는 공부 잘해도 소용없다’ ‘저 집 딸 봐라’ 동네사람들이 수군대도 아랑곳하지 않았어요. 내 삶은 내가 선택했기에 책임지고 또 짊어지고 살아야 하니까요.”
경기고에 합격한 1960년 봄. 처음 서울땅을 밟은 이남곡씨는 당시 4.19를 온몸으로 겪었다. “그 시절엔 4월1일이 입학식이었지요. 학교 들어간 지 얼마지 않아 4.19가 일어나는 바람에 유일하게 알고있던 길(광화문~안국동)이 막혀 그날 무척 고생했던 기억이 나요.” 4.19혁명은 그가 시대에 눈 뜬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훗날 대학에 가서도 사회적 부자유와 불평등을 근원적으로 해소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마르크스의 사상에 심취한 인연이 됐다. 급기야 1964년 한일회담의 반대서열에 앞장서고 지하운동에 가담하기에 이르렀다.
남모르게 혁명을 꿈꿨던 그가 다시 지상으로 올라온 이유 중 하나는 ‘불교’에 있었다. 당시 서울대 법대불교학생회에 가담해서 종교와 과학을 화두삼아 불교의 진정성을 탐구한 그다. 대학동기 중 출가한 휴암스님과의 인연도 작용했다.
그가 4년(1979~1983)이란 짧지 않은 복역생활을 끝내고 세상의 빛을 본 첫날, 휴암스님이 머물던 영천 은해사의 한 암자에서 사회구조와 더불어 인간의식 전환을 위한 ‘개벽’에 착안한 까닭도 거기에 있다. 정토회 법륜스님이 이끈 불교사연구소에서 새로운 인간과 사회, 새로운 문명을 고민하고 설계하기도 했다. “20세기가 낡은 집을 허무는 것을 주된 테마로 했다면 21세기는 새로운 집을 짓는 것이 핵심입니다. 억압과 착취, 빈곤의 긴 터널로부터 인류를 해방하는데 큰 획을 그은 지난날을 버팀목 삼아 이제 진정으로 자유롭고 행복한 사회로 가야합니다.”
‘자유롭고 행복한 사회’로 가기 위해 그는 안간힘을 썼다. 대안은 농촌운동. 교사자격증을 따서 농촌지역 학교에서 신바람나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반공이데올로기에 집착하는 교사들을 계도했다. 농업근대화연구회, 푸른들신용협동조합 등 여러 농촌운동단체와 손을 맞잡고 농촌변화의 필요성을 외쳤다. 농촌사회가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해야 총체적인 사회변혁이 실현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그 즈음 무아집 무소유 일체의 이념으로 집약되는 ‘야마기시즘’을 만났다. 야마기시즘 특별강습연찬회에 참여한 인연으로 8년여간 경기도 화성에 있는 ‘야마기시(山岸) 실현지’에서 새 삶을 꾸렸다. 소통의 방식(연찬)과 상생(무아집)과 나눔(무소유)이 공존하는 야마기시는 이들 부부와 더불어 두 아들과 고령의 어머니에게도 활력을 불어넣었다. “당시 화성의 야마기시 실현지에 살 때, 석왕사 주지 영담스님께서 몸소 찾아주셨어요. 석왕사 유치원을 나온 두 아들은 청년이 다됐지만 어려웠던 시절에 만나셨던 스님과 어머님의 인연은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 고단했던 삶 속에서 절망과 아픔에 스러져갈 때, 스님께서 우리 가족에 베풀어주신 자비와 사랑은 잊을 수 없지요.”
서혜란씨는 한때 불치병에 걸려 생을 장담할 수 없는 지경까지 갔었다. 이들 부부가 지난 2004년 화성을 떠나 전북 장수에 새 터를 닦아 둥지를 틀었던 이유도 그녀의 요양과 치유를 위한 방편이었다.
웬일인지 장수에 정착한지 얼마지 않아 병마는 기적처럼 사라졌다. 칠흑같은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그녀는 정성과 사랑, 감사를 오롯이 담아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된장과 고추장, 간장과 장아찌 등 맛깔스런 음식을 빚어냈다. 일주일에 한번씩은 마을사람들과 머리를 맞대고 논어를 ‘연찬’하고, 일상을 공유하고 내일의 흐름과 삶의 방향을 점검한다. 평생 한몸이 되어 울고 웃으며 새로운 꿈을 지피며 사는 이남곡 서혜란 부부. 이들과 같은 도반이 세상에 어디 또 있으랴.
이들 부부가 지향하는 공동체
품앗이가 아닌 ‘즐거운 노동’되게 해야
“의기투합해서 어렵게 만들어진 공동체가 왜 깨질까요? 단순해지려고 자연으로 돌아와 서로 내가 더 단순하다고 경쟁합니다. 누가 더 생태적인가 비교하기 시작하면 그 공동체는 무너지기 마련입니다.(이남곡)” 지난 1996년 경기도 화성에서 첫 귀농생활을 한 이들 부부는 8년만에 전북 장수에 새 터를 마련했다.
공동체 이름은 ‘좋은 마을’. 현재 세 가구가 살고 있고 내년에 두 집이 더 늘어난다. “우리가 이 작은 골짜기에서 ‘작은 마을’을 만들어가려는 것은 세상의 큰 흐름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고 이웃마을과도 사이좋게 지내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까, 힘과 지혜를 모아 검토하고 실천하는 장입니다.(이남곡)”
첫 조건은 서로 다른 사람을 침범하지 않도록 선을 정하는 것. 적절한 간격이 서로를 존중하고 발전시키는 약이 된다는 설명이다. “독립된 단위세포가 모여야 원만한 생명력을 갖추는 법입니다. 공동체라고 해서 모든 울타리를 걷어내고 알게모르게 희생을 강요하면 생명력 있는 집단으로 승화시키기 어렵지 않을까요?(서혜란)”
마을 성원들이 생활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물질이 보장되는 요건도 중요하다. 거래로서의 품앗이가 아닌, 자유노동에 준한 즐거운 노동의 필요성도 제기했다. 개인의 자율성과 공동체적 협동이 조화를 이루는 마을을 말한다. 이남곡씨는 마지막으로 “자본주의 이후에 도래하는 무소유의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장수=하정은 기자 tomato77@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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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 번암면 '좋은 마을' 이남곡 대표
김은정 웹승인 2011-06-14 전북일보
"제도·물질만으로는 안 되는 시대…의식과 생활 바꿔야"
장수 번암면 '좋은 마을' 에서 만난 이남곡 대표가 최근 자신이 주창한 신인문 운동에 대해 느릿느릿하고 부드러운 화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안봉주(bjahn@jjan.kr)
길을 잘못 들어 고생 꽤나 했다. 시골길이니 금세 찾을 수 있겠거니 했던 생각이 얼마나 당치않았는지는 자동차 겨우 한 대 지날 수 있는 산길을 서툰 운전솜씨로 되돌아 나오면서 절감했다. 세 차례의 통화 끝에 간신히 제 길 찾아 올라간 장수군 번암면 유정리의 '좋은 마을'은 아름다웠다.
녹음이 짙은 산길을 따라 올라간 그 곳, 낮게 내려 지은 작은 집들이 선하게 모여 있는 마을 입구에 이남곡 좋은 마을 대표(66)가 나와 있었다.
"20세기의 진보가 낡은 것을 허무는 것이었다면 21세기 진보는 새로운 것을 짓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짓는 것과 낡은 것을 허무는 것은 그 주체와 동력과 방법이 다를 수밖에 없어요. 새로운 인간 없이는 새로운 진보가 실현되기 어렵습니다."느릿하고 부드럽지만 단호한 화법. 마치 좋은 강연을 듣는 것 같았던 이 대표와의 인터뷰는 세 시간 가깝게 이어졌지만, 들을 이야기는 아직도 많이 남았다.
-마을이 참 좋습니다. 녹음이 아름다워서 눈을 어디에 주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도 나이 예순에 처음 와본 곳 이예요. 장수는 60년 살면서 지나본 적도 없었는데 묘한 인연이지요. 집짓고 살기 시작한 것이 2004년인데, 그때는 우리 집 달랑 하나만 있었어요."
-지금은 이웃들이 있던데요.
"네 집이 우리 인연 따라 들어왔어요. 여기서 결혼한 부부 덕분에 네 살짜리 아이도 있고, 바로 윗집에는 초중학생도 있어요.'마을에 애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감사한 일이죠."
-어쩌다 장수 이 산골까지 오셨습니까.
"2003년에 수원 야마기시 실현지에서 8년 공동체 생활을 마감하고 나오면서 집사람과 누구나 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일을 해보고 싶었어요. 마을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도 고립감이 있고 소통이 안 되니 적당히 거리가 있으면서도 작고 독립적인 마을을 만들고 싶었죠. 강원도 횡성부터 전남 해남까지 찾아다니다 만난 곳이 여기입니다. "
-선생님이 생각하시는'좋은 마을'은 어떤 곳인가요.
"공동체 생활은 무소유와 무아집이 중요한데, 관념은 있지만 체화 안 된 사람에게는 피곤한 일이예요. 부자유, 허위의식 이런 것이 발생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런 것으로부터 좀 더 자유로운 곳이 좋은 마을이라고 생각했어요. '좋은' 이라고 하는 것은 '좋은 생산력' '좋은 욕구' '좋은 소비', 이런 것들이죠."
-경험도 없으셨을텐데 곧 바로 회사를 차리셨더군요.
"처음에 항아리 열 댓개 들여놓고 장류사업 한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취미 생활 하는 줄 알더군요. 그 뒤 생협과 관계하다 보니, 차츰 커져서 지금은 큰 항아리만 300개 쯤 됩니다. 이제는 제법 꼴을 갖춘 사업장이 되었어요."
-요즈음 강의 때문에 바쁘실텐데 사업은 누가 합니까.
"사장은 집사람, 나는 종업원. 또 직원 한사람이 있었죠. 그런데 작년에 집사람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어요.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고 참 어려웠어요. 큰 아들이 어렵게 결단을 내리고 들어와 사업을 맡으면서 나는 자진 퇴사했어요."
-논어 이야기를 좀 해주시죠. '논어' 강의 활동으로 바쁘신데 언제부터 논어를 공부하셨습니까.
이남곡 대표가 본이니 만든 장류 생산 업체인 '좋은 마을' 에서 장류가 담긴 항아리들을 보여주고 있다. (desk@jjan.kr)
"논어도 예순이 넘어서 만났어요. 사실 내가 젊은 시절 사회운동으로 보낸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 시절엔 논어에 대해 반감이 깊었지요. 공자도 그렇고, 보수적이고 완고한 어떤 견고한 틀의 상징처럼 생각했어요. 그런데 여기 들어와서 사람들하고 소통하다보니 자꾸 얽혀요. 이해관계도 그렇고, 대화의 방식도 그렇고.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에 옛날분이라도 성현을 모시고 공부를 좀 해보자 했어요. 그때는 마을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을 때니까 장수는 물론이고 전국 각지에서 왔죠. 공동체 생활 같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죠. 새로 마을을 만들 때 사람들 심층의 의식이나 가치관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그 것 같다고 어설프게 같이 했다가는 크게 후회 하는 경우가 많죠. 심층의 의식이 서로 소통할 수 있어야 해요. 그 연습의 장으로 한번 해보자 해서 논어를 선택했죠. 2년 동안 매주 했어요."
-논어 읽기의 성과는 있었습니까.
"논어를 만난 것은 정말 행운이었어요. 공자라는 사람 자체가 대단히 인간적인 면모를 가진 성현이고. 우리는 논어 읽기를 '연찬'이란 말로 씁니다. '연찬'은 서로 대화하고 소통하는 하나의 방식이지요. 누가 강의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읽고 서로 생각한 것을 이야기 하는 형식입니다."
-선생님께서 강조하시는 '연찬'은 무엇입니까.
"연찬이란 어떤 것에 대해서도 단정하지 않고 무엇이 진리인가라든지, 지금 시점에서는 어떤 것이 가장 옳은 것인가를 끝까지 함께(선생은 '함께'를 강조했다) 탐구하는 과정이지요. 가장 중요한 연찬 태도는 상대의 말을 그대로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의 말을 잘 듣는 것, 그것 참 쉽지 않은 일 아닙니까.
"맞아요. '잘 듣는 것' 쉽지 않지요. 공자는 이순이라 해서 60에 이르러서야 얻었다고 했어요. 자기 생각과 다르면 보통은 다른 사람 이야기가 안들리죠. 자기 생각과 다르면 어떻게 저것을 반박할까 생각하느라 듣지 못하거든요."
-논어를 현대인들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열정이 각별하신 것 같습니다.
"논어에서 만난 공자는 무아집의 사람이더군요. 배울수록 완고해지지 않는. 이를테면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일관성인데, 배워도 완고해지지 않는 것은 유연함이지요. 아집이 없어서 오는 유연함이 중요해요. 유연한 일관성은 바로 현대에서 필요한 리더십이기도 한데, 내가 보기에는 지금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모습과 일치해요."
-요즈음 높아지고 있는 인문학에 대한 관심은 어떻게 보십니까.
"나는 우리의 지난 반세기 전체 과정을 혁명으로 봅니다. 실제로 신생독립국가 운동에서 한국만큼 민주화와 산업화, 이 두가지를 반세기에 성공시킨 나라가 없습니다. 그 결실을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 아닙니까. 물론 민주화에 대한 평가가 다를 수 있지만, 어찌됐든 적어도 절대 빈곤과 독재에서는 벗어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만큼 행복해졌냐 하면 그것은 별개의 문제거든요. 오히려 다른 요소들이 있죠. 빈부 양극화나, 환경 파괴 같은···. 그러다보니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인지, 어떤 것이 진정한 자유인지, 이것에 대한 물음이 시작된 것이죠. 이런 성찰이 인문학으로 나타난 것이지 않겠어요. 그런데 인문학은 잘못하면 거품이 될 수 있습니다. 지적 사치일 수 있어요. 그러니 그것을 진전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의식과 생활을 변화시키는 차원이어야 하고, 그 중심은 자기를 넘어서는 것이어야해요."
-그것이 선생님께서 최근에 주창하시는 신인문 운동인가요.
"예전 문예부흥은 중세부터 근대로 넘어오는 분수령이 된 사상문화운동입니다. 유물론자들은 그것을 별로 중시하지 않았지요. 그러나 역사를 보면 의식이 중시 되지 않는 운동은 다 실패했어요. 사회주의 다 실패했지 않아요? 그리고 결국은 지금 그 과제가 발생했습니다. 전쟁과 환경문제, 빈부 양극화를 해결하는데 이제는 제도와 물질만으로 안 되는 시대가 온 겁니다. 생활과 의식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나는 이것을 신인문운동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결국 공동체여야 된다는 뜻인가요.
"'공동체'라는 말을 쓰고 싶지는 않아요. 다만 그동안 너무 개인주의적인 이기심이 강하게 작동하면서 지나친 행위능력이 발휘되고 그렇다보니 전쟁이나 환경파괴, 빈부 양극화 같은 많은 갈등과 문제가 생겼죠. 그것을 해결하려면 생활혁명운동이 일어야 한다는 겁니다. 단순 소박한 삶의 가치를 회복하는 것이랄까요."
-단순 소박한 삶을 말씀 하셨는데, 귀농하신 분들의 지향이 그것 아닐까요.
"귀농하는 사람들 중에는 단순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많죠. 그런데 단순 소박한 삶은 도시에서도 할 수도 있는 일이거든요. 시골에 생태적인 삶을 살겠다고 온 사람들 중에는 누가 더 생태적인가 서로를 비교하며 비난하기도 해요. 이것은 단순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태도가 아니죠. 비교하고 경쟁하고 질투하는 의식을 없애야 합니다. 형태적으로 소박한 삶이란 욕구가 변하면 자연스럽게 옵니다. 정신적 욕구가 커지다보면 물질적 욕구는 자연스럽게 감소하죠. 내핍을 강요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녜요."
-귀농한 사람은 많은데 성공한 사람들이 많지 않은 이유가 그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큰 뜻을 품고 농촌에 온 사람일수록 실패하는 예가 많아요. 큰 꿈을 갖고 왔는데 그것이 실태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자기 머릿속의 꿈이었을 때는 백번 실패합니다. 내가 〈진보를 연찬하다〉를 펴냈을 때 그것을 비판한 글을 본 적이 있어요. 내가 실태를 강조했더니 자기는 실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에요. 왜냐면 실태, 현실을 인정하면 꿈이 사라지니까. 놀랄 일이죠. 진보를 추구한다는 사람이 현실을 인정하면 꿈이 사라진다고 하니. 그런 꿈은 이상도 아닌 환상일 뿐이에요."
-선생님의 귀농은 성공하신 겁니까.
"내 경우는 귀농이라기보다는 공동체에 들어간 것인데 만족했어요. 나는 사실 도시 생활도 부정하지 않아요. 무엇이든 차별심을 두고 하는 것은 스스로가 자유롭지 못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자연환경 때문에 시골로 오는 사람이 있어요. 6개월만 살아보세요. 별것 아녜요. 중요한 것은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이에요. 특히 부부가 뜻을 같이해 세운 삶이라면 그야말로 확실한 로망이랄 수 있는데, 그것은 남진이 이미 불렀잖아요. '저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웃음) 그런 로망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부부가 사이좋으면 이웃과도 좋아지고 마을이 화평해져요."
-명문고, 명문대를 나와 보다 성공적인 삶을 사실 수도 있었을 텐데 왜 무소유적 삶을 선택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선택하는데에는 환경적인 요소도 있지만 타고난 기질도 있는 것 같아요. 나는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살았습니다. 서울대 법대 들어가서 남들이 하는 것처럼 사법고시 예비시험도 보았어요. 그런데 현실을 보니 내가 일신의 출세를 위해 살 때가 아니더군요."
-결국은 남민전에 연루되어 감옥생활을 하셨지요.
"남민전과 관련해서는 3개월 활동했습니다. 주체적이거나 과학적이고 현실적인 운동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나왔어요. 그런데 1년 있다가 사건이 터져서 15년 구형을 받았지요. 그동안 실사구시 하지 않은데서 비롯된 내 삶에 대한 댓가라는 생각으로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5년 선고에 4년 살고 1년은 특사로 풀려났어요."
-그 안에서 무슨 변화를 겪으셨습니까.
"그 전부터 내 사상의 변화가 시작되었었는데 그 안에 있으면서 심화되었어요. 제도만을 변화시켜서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는 깨달음, 혁명에서 개벽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개벽은 총체적 변화지요. 제도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의식과 생활까지 바뀌어야 하는."
-선생님께서는 '역사의 대긍정'을 말씀하시던데요. 수긍하기 어려운 사람도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물론이죠.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태도 중의 하나가 문명 자체를 부정하는 태도예요. 나는 이것을 매우 위험하고 반지성적이라고 생각합니다.'대긍정'은 이루어진 현실 전체를 (실패한 경험이든 성공한 경험이든) 받아들여 그것을 바탕으로 새롭게 나가보자는 그런 의미에서 내놓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면 진보라고 하지요. 신자유주의 반대를 열심히 외치던 사람들이 생활에 돌아오면 어떻게 됩니까. 초자유주의예요 신자유주의도 아니고. 이런 것은 정치적 구호일 뿐이지 생명력이 강하지 못하죠. 사실 우리가 경쟁의 폐단을 이야기 하지만, 경쟁을 넘어서는 것에 대해서는 발견하지 못하고 있잖아요. 진보가 해야 할 진정한 '진보의 길'을 찾아야 해요. 그것은 결국 실사구시에 대한 이야기지요. 사회적 실천으로 사회적 진보와 인간 자체의 진보를 이뤄야 해요."
-어떻게 하면 이 시대를 잘 살아갈 수 있을까요.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한 말씀 전해주십시오.
"기개를 가져야 합니다. 이 시대는 젊은 세대들의 진정한 호연지기를 오히려 꺾고 있어요. 대학 만해도 어떻습니까. 대학은 새로운 문화 새로운 진보의 산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고루한 진보의 장이 되고 있지요. 시대는 순환하는 것이니 대학이 다시 창조의 산실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싶어요. 청년들이 그 안에서 호연지기를 기르며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세상을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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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남곡 대표는...
1945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를 나와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으나 4.19혁명을 계기로 사회의 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 사회변혁운동에 나섰다. 반독재 민주화투쟁에 앞장서면서 빈민운동에 참여하고 농촌학교 교사로 일했으며 1979년 남민전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다. 이때 사상에 큰 변화를 얻었으며 출옥 이후 법륜스님과의 인연으로 불교사회연구소에서 새로운 사회 새로운 문명을 연구했다. 이즈음 무아집 무소유로 집약되는 '야마기시' 사상을 만나 1996년부터 8년 동안 경기도 화성의 야마기시 실현지에서 생활했으며 이후 무소유 사회보다는 오늘의 실태에서 출발하는 보편적인 실천을 하고 싶어 장수군 번암면 유정리에 터를 잡고 '좋은 마을'을 만들어가고 있다.
논어를 통해 자기 성찰과 소통의 방식을 나누는 강연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으며 논실마을학교(장수군 번암면) 이사장을 맡아 실상사의 도법스님과 함께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운동을 시작했다.
최근에는 현대적 위기로부터 미래의 밝은 빛을 여는 운동을 의미하는 '신인문 운동'을 주창해 주목 받고 있다. 저서로 〈진보를 연찬하다〉를 펴냈으며 〈논어를 연찬하다(가칭)〉가 곧 출간될 예정이다. '좋은 마을'은 다섯가구가 사는 마을의 이름이면서 이 대표가 만든 장류 생산업체 이름이기도 하다.
입력 2008.11.22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나란히 옥살이를 했던 이남곡.서혜란 부부. 당대 최고의 ‘엘리트 부부’로서 사회개혁과 농민운동을 주도했던 이들은 전북 장수의 ‘좋은 마을’에서 ‘둘도 없는 도반’이 되어 자연과 더불어 새로운 꿈을 지피고 있다.
“佛心 버팀목 삼아 행복한 세상 만들 겁니다”
사회 변혁 꿈꾸던 부부, 야마기시즘 실현위해 정진
전북 장수서 새삶…“생명 넘치는 행복공동체 꿈꿔”
때는 1979년 가을 서슬퍼런 유신시절. 6.25 전쟁 이후 최대 규모의 연북지하조직인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이하 남민전)서 활동한 부부는, 생후 6개월 된 갓난 아들을 남겨두고 철창에 갇혔다. 하루아침에 아들과 며느리를 빼앗긴 어머니는 홀로 남은 손자를 업고 무작정 집 근처 사찰을 찾아갔다. 당시 천막법당에 부처님을 모셨던 부천 석왕사는 가난과 공포에 떨고 있는 한 할머니를 따뜻하게 맞아줬다. 이남곡(66) 서혜란(56) 부부의 삶은 여기서 출발한다.
“어머님은 전쟁통에 아버님과 시동생을 잃고 오로지 남은 자식들 먹여 키우기 위해 사셨어요. 그 옛날 제 남편이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하늘을 얻은 듯 좋았고, 서울대 법대 들어가서 사법고시 자격시험에 덜컥 붙었을 때 세상이 다 당신 것인 양 행복하셨대요. 그러면서 ‘그 뒤부터 삐그러졌다’고 말씀해요…” 승승장구할 것만 같은 아들의 삶이 언제부턴가 더디고 굽어지고 있음을 느낀 어머니의 ‘삐그러졌다’는 말뜻을 알 것도 같다.
남편을 만나서 고생을 자초한 건 부인도 마찬가지. 경남 거창의 부잣집 외동딸로 태어나, 여성 엘리트계 산실과도 같은 이화여대서 역사학을 전공한 그녀는, 공동체적 삶, 혁명을 넘어 개벽을 지향하는 남편의 꿈에 자신의 인생을 걸었다.
잠시나마 남민전 활동을 했던 전력으로 남편과 나란히 형무소에 갇혔지만 그 역시 그녀에겐 후회와 고통의 시간만은 아니었다. “6개월만에 남편을 두고 저 혼자 석방됐지요. 어떻게든 먹고 살아야 했기에 아들을 데리고 친정에 가서 친정집 근처에 양품점을 차렸답니다. ‘여자는 공부 잘해도 소용없다’ ‘저 집 딸 봐라’ 동네사람들이 수군대도 아랑곳하지 않았어요. 내 삶은 내가 선택했기에 책임지고 또 짊어지고 살아야 하니까요.”
경기고에 합격한 1960년 봄. 처음 서울땅을 밟은 이남곡씨는 당시 4.19를 온몸으로 겪었다. “그 시절엔 4월1일이 입학식이었지요. 학교 들어간 지 얼마지 않아 4.19가 일어나는 바람에 유일하게 알고있던 길(광화문~안국동)이 막혀 그날 무척 고생했던 기억이 나요.” 4.19혁명은 그가 시대에 눈 뜬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훗날 대학에 가서도 사회적 부자유와 불평등을 근원적으로 해소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마르크스의 사상에 심취한 인연이 됐다. 급기야 1964년 한일회담의 반대서열에 앞장서고 지하운동에 가담하기에 이르렀다.
남모르게 혁명을 꿈꿨던 그가 다시 지상으로 올라온 이유 중 하나는 ‘불교’에 있었다. 당시 서울대 법대불교학생회에 가담해서 종교와 과학을 화두삼아 불교의 진정성을 탐구한 그다. 대학동기 중 출가한 휴암스님과의 인연도 작용했다.
그가 4년(1979~1983)이란 짧지 않은 복역생활을 끝내고 세상의 빛을 본 첫날, 휴암스님이 머물던 영천 은해사의 한 암자에서 사회구조와 더불어 인간의식 전환을 위한 ‘개벽’에 착안한 까닭도 거기에 있다. 정토회 법륜스님이 이끈 불교사연구소에서 새로운 인간과 사회, 새로운 문명을 고민하고 설계하기도 했다. “20세기가 낡은 집을 허무는 것을 주된 테마로 했다면 21세기는 새로운 집을 짓는 것이 핵심입니다. 억압과 착취, 빈곤의 긴 터널로부터 인류를 해방하는데 큰 획을 그은 지난날을 버팀목 삼아 이제 진정으로 자유롭고 행복한 사회로 가야합니다.”
‘자유롭고 행복한 사회’로 가기 위해 그는 안간힘을 썼다. 대안은 농촌운동. 교사자격증을 따서 농촌지역 학교에서 신바람나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반공이데올로기에 집착하는 교사들을 계도했다. 농업근대화연구회, 푸른들신용협동조합 등 여러 농촌운동단체와 손을 맞잡고 농촌변화의 필요성을 외쳤다. 농촌사회가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해야 총체적인 사회변혁이 실현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그 즈음 무아집 무소유 일체의 이념으로 집약되는 ‘야마기시즘’을 만났다. 야마기시즘 특별강습연찬회에 참여한 인연으로 8년여간 경기도 화성에 있는 ‘야마기시(山岸) 실현지’에서 새 삶을 꾸렸다. 소통의 방식(연찬)과 상생(무아집)과 나눔(무소유)이 공존하는 야마기시는 이들 부부와 더불어 두 아들과 고령의 어머니에게도 활력을 불어넣었다. “당시 화성의 야마기시 실현지에 살 때, 석왕사 주지 영담스님께서 몸소 찾아주셨어요. 석왕사 유치원을 나온 두 아들은 청년이 다됐지만 어려웠던 시절에 만나셨던 스님과 어머님의 인연은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 고단했던 삶 속에서 절망과 아픔에 스러져갈 때, 스님께서 우리 가족에 베풀어주신 자비와 사랑은 잊을 수 없지요.”
서혜란씨는 한때 불치병에 걸려 생을 장담할 수 없는 지경까지 갔었다. 이들 부부가 지난 2004년 화성을 떠나 전북 장수에 새 터를 닦아 둥지를 틀었던 이유도 그녀의 요양과 치유를 위한 방편이었다.
웬일인지 장수에 정착한지 얼마지 않아 병마는 기적처럼 사라졌다. 칠흑같은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그녀는 정성과 사랑, 감사를 오롯이 담아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된장과 고추장, 간장과 장아찌 등 맛깔스런 음식을 빚어냈다. 일주일에 한번씩은 마을사람들과 머리를 맞대고 논어를 ‘연찬’하고, 일상을 공유하고 내일의 흐름과 삶의 방향을 점검한다. 평생 한몸이 되어 울고 웃으며 새로운 꿈을 지피며 사는 이남곡 서혜란 부부. 이들과 같은 도반이 세상에 어디 또 있으랴.
이들 부부가 지향하는 공동체
품앗이가 아닌 ‘즐거운 노동’되게 해야
“의기투합해서 어렵게 만들어진 공동체가 왜 깨질까요? 단순해지려고 자연으로 돌아와 서로 내가 더 단순하다고 경쟁합니다. 누가 더 생태적인가 비교하기 시작하면 그 공동체는 무너지기 마련입니다.(이남곡)” 지난 1996년 경기도 화성에서 첫 귀농생활을 한 이들 부부는 8년만에 전북 장수에 새 터를 마련했다.
공동체 이름은 ‘좋은 마을’. 현재 세 가구가 살고 있고 내년에 두 집이 더 늘어난다. “우리가 이 작은 골짜기에서 ‘작은 마을’을 만들어가려는 것은 세상의 큰 흐름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고 이웃마을과도 사이좋게 지내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까, 힘과 지혜를 모아 검토하고 실천하는 장입니다.(이남곡)”
첫 조건은 서로 다른 사람을 침범하지 않도록 선을 정하는 것. 적절한 간격이 서로를 존중하고 발전시키는 약이 된다는 설명이다. “독립된 단위세포가 모여야 원만한 생명력을 갖추는 법입니다. 공동체라고 해서 모든 울타리를 걷어내고 알게모르게 희생을 강요하면 생명력 있는 집단으로 승화시키기 어렵지 않을까요?(서혜란)”
마을 성원들이 생활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물질이 보장되는 요건도 중요하다. 거래로서의 품앗이가 아닌, 자유노동에 준한 즐거운 노동의 필요성도 제기했다. 개인의 자율성과 공동체적 협동이 조화를 이루는 마을을 말한다. 이남곡씨는 마지막으로 “자본주의 이후에 도래하는 무소유의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장수=하정은 기자 tomato77@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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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 번암면 '좋은 마을' 이남곡 대표
김은정 웹승인 2011-06-14 전북일보
"제도·물질만으로는 안 되는 시대…의식과 생활 바꿔야"
장수 번암면 '좋은 마을' 에서 만난 이남곡 대표가 최근 자신이 주창한 신인문 운동에 대해 느릿느릿하고 부드러운 화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안봉주(bjahn@jjan.kr)길을 잘못 들어 고생 꽤나 했다. 시골길이니 금세 찾을 수 있겠거니 했던 생각이 얼마나 당치않았는지는 자동차 겨우 한 대 지날 수 있는 산길을 서툰 운전솜씨로 되돌아 나오면서 절감했다. 세 차례의 통화 끝에 간신히 제 길 찾아 올라간 장수군 번암면 유정리의 '좋은 마을'은 아름다웠다.
녹음이 짙은 산길을 따라 올라간 그 곳, 낮게 내려 지은 작은 집들이 선하게 모여 있는 마을 입구에 이남곡 좋은 마을 대표(66)가 나와 있었다.
"20세기의 진보가 낡은 것을 허무는 것이었다면 21세기 진보는 새로운 것을 짓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짓는 것과 낡은 것을 허무는 것은 그 주체와 동력과 방법이 다를 수밖에 없어요. 새로운 인간 없이는 새로운 진보가 실현되기 어렵습니다."느릿하고 부드럽지만 단호한 화법. 마치 좋은 강연을 듣는 것 같았던 이 대표와의 인터뷰는 세 시간 가깝게 이어졌지만, 들을 이야기는 아직도 많이 남았다.
-마을이 참 좋습니다. 녹음이 아름다워서 눈을 어디에 주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도 나이 예순에 처음 와본 곳 이예요. 장수는 60년 살면서 지나본 적도 없었는데 묘한 인연이지요. 집짓고 살기 시작한 것이 2004년인데, 그때는 우리 집 달랑 하나만 있었어요."
-지금은 이웃들이 있던데요.
"네 집이 우리 인연 따라 들어왔어요. 여기서 결혼한 부부 덕분에 네 살짜리 아이도 있고, 바로 윗집에는 초중학생도 있어요.'마을에 애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감사한 일이죠."
-어쩌다 장수 이 산골까지 오셨습니까.
"2003년에 수원 야마기시 실현지에서 8년 공동체 생활을 마감하고 나오면서 집사람과 누구나 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일을 해보고 싶었어요. 마을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도 고립감이 있고 소통이 안 되니 적당히 거리가 있으면서도 작고 독립적인 마을을 만들고 싶었죠. 강원도 횡성부터 전남 해남까지 찾아다니다 만난 곳이 여기입니다. "
-선생님이 생각하시는'좋은 마을'은 어떤 곳인가요.
"공동체 생활은 무소유와 무아집이 중요한데, 관념은 있지만 체화 안 된 사람에게는 피곤한 일이예요. 부자유, 허위의식 이런 것이 발생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런 것으로부터 좀 더 자유로운 곳이 좋은 마을이라고 생각했어요. '좋은' 이라고 하는 것은 '좋은 생산력' '좋은 욕구' '좋은 소비', 이런 것들이죠."
-경험도 없으셨을텐데 곧 바로 회사를 차리셨더군요.
"처음에 항아리 열 댓개 들여놓고 장류사업 한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취미 생활 하는 줄 알더군요. 그 뒤 생협과 관계하다 보니, 차츰 커져서 지금은 큰 항아리만 300개 쯤 됩니다. 이제는 제법 꼴을 갖춘 사업장이 되었어요."
-요즈음 강의 때문에 바쁘실텐데 사업은 누가 합니까.
"사장은 집사람, 나는 종업원. 또 직원 한사람이 있었죠. 그런데 작년에 집사람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어요.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고 참 어려웠어요. 큰 아들이 어렵게 결단을 내리고 들어와 사업을 맡으면서 나는 자진 퇴사했어요."
-논어 이야기를 좀 해주시죠. '논어' 강의 활동으로 바쁘신데 언제부터 논어를 공부하셨습니까.
이남곡 대표가 본이니 만든 장류 생산 업체인 '좋은 마을' 에서 장류가 담긴 항아리들을 보여주고 있다. (desk@jjan.kr)"논어도 예순이 넘어서 만났어요. 사실 내가 젊은 시절 사회운동으로 보낸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 시절엔 논어에 대해 반감이 깊었지요. 공자도 그렇고, 보수적이고 완고한 어떤 견고한 틀의 상징처럼 생각했어요. 그런데 여기 들어와서 사람들하고 소통하다보니 자꾸 얽혀요. 이해관계도 그렇고, 대화의 방식도 그렇고.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에 옛날분이라도 성현을 모시고 공부를 좀 해보자 했어요. 그때는 마을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을 때니까 장수는 물론이고 전국 각지에서 왔죠. 공동체 생활 같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죠. 새로 마을을 만들 때 사람들 심층의 의식이나 가치관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그 것 같다고 어설프게 같이 했다가는 크게 후회 하는 경우가 많죠. 심층의 의식이 서로 소통할 수 있어야 해요. 그 연습의 장으로 한번 해보자 해서 논어를 선택했죠. 2년 동안 매주 했어요."
-논어 읽기의 성과는 있었습니까.
"논어를 만난 것은 정말 행운이었어요. 공자라는 사람 자체가 대단히 인간적인 면모를 가진 성현이고. 우리는 논어 읽기를 '연찬'이란 말로 씁니다. '연찬'은 서로 대화하고 소통하는 하나의 방식이지요. 누가 강의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읽고 서로 생각한 것을 이야기 하는 형식입니다."
-선생님께서 강조하시는 '연찬'은 무엇입니까.
"연찬이란 어떤 것에 대해서도 단정하지 않고 무엇이 진리인가라든지, 지금 시점에서는 어떤 것이 가장 옳은 것인가를 끝까지 함께(선생은 '함께'를 강조했다) 탐구하는 과정이지요. 가장 중요한 연찬 태도는 상대의 말을 그대로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의 말을 잘 듣는 것, 그것 참 쉽지 않은 일 아닙니까.
"맞아요. '잘 듣는 것' 쉽지 않지요. 공자는 이순이라 해서 60에 이르러서야 얻었다고 했어요. 자기 생각과 다르면 보통은 다른 사람 이야기가 안들리죠. 자기 생각과 다르면 어떻게 저것을 반박할까 생각하느라 듣지 못하거든요."
-논어를 현대인들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열정이 각별하신 것 같습니다.
"논어에서 만난 공자는 무아집의 사람이더군요. 배울수록 완고해지지 않는. 이를테면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일관성인데, 배워도 완고해지지 않는 것은 유연함이지요. 아집이 없어서 오는 유연함이 중요해요. 유연한 일관성은 바로 현대에서 필요한 리더십이기도 한데, 내가 보기에는 지금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모습과 일치해요."
-요즈음 높아지고 있는 인문학에 대한 관심은 어떻게 보십니까.
"나는 우리의 지난 반세기 전체 과정을 혁명으로 봅니다. 실제로 신생독립국가 운동에서 한국만큼 민주화와 산업화, 이 두가지를 반세기에 성공시킨 나라가 없습니다. 그 결실을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 아닙니까. 물론 민주화에 대한 평가가 다를 수 있지만, 어찌됐든 적어도 절대 빈곤과 독재에서는 벗어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만큼 행복해졌냐 하면 그것은 별개의 문제거든요. 오히려 다른 요소들이 있죠. 빈부 양극화나, 환경 파괴 같은···. 그러다보니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인지, 어떤 것이 진정한 자유인지, 이것에 대한 물음이 시작된 것이죠. 이런 성찰이 인문학으로 나타난 것이지 않겠어요. 그런데 인문학은 잘못하면 거품이 될 수 있습니다. 지적 사치일 수 있어요. 그러니 그것을 진전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의식과 생활을 변화시키는 차원이어야 하고, 그 중심은 자기를 넘어서는 것이어야해요."
-그것이 선생님께서 최근에 주창하시는 신인문 운동인가요.
"예전 문예부흥은 중세부터 근대로 넘어오는 분수령이 된 사상문화운동입니다. 유물론자들은 그것을 별로 중시하지 않았지요. 그러나 역사를 보면 의식이 중시 되지 않는 운동은 다 실패했어요. 사회주의 다 실패했지 않아요? 그리고 결국은 지금 그 과제가 발생했습니다. 전쟁과 환경문제, 빈부 양극화를 해결하는데 이제는 제도와 물질만으로 안 되는 시대가 온 겁니다. 생활과 의식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나는 이것을 신인문운동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결국 공동체여야 된다는 뜻인가요.
"'공동체'라는 말을 쓰고 싶지는 않아요. 다만 그동안 너무 개인주의적인 이기심이 강하게 작동하면서 지나친 행위능력이 발휘되고 그렇다보니 전쟁이나 환경파괴, 빈부 양극화 같은 많은 갈등과 문제가 생겼죠. 그것을 해결하려면 생활혁명운동이 일어야 한다는 겁니다. 단순 소박한 삶의 가치를 회복하는 것이랄까요."
-단순 소박한 삶을 말씀 하셨는데, 귀농하신 분들의 지향이 그것 아닐까요.
"귀농하는 사람들 중에는 단순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많죠. 그런데 단순 소박한 삶은 도시에서도 할 수도 있는 일이거든요. 시골에 생태적인 삶을 살겠다고 온 사람들 중에는 누가 더 생태적인가 서로를 비교하며 비난하기도 해요. 이것은 단순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태도가 아니죠. 비교하고 경쟁하고 질투하는 의식을 없애야 합니다. 형태적으로 소박한 삶이란 욕구가 변하면 자연스럽게 옵니다. 정신적 욕구가 커지다보면 물질적 욕구는 자연스럽게 감소하죠. 내핍을 강요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녜요."
-귀농한 사람은 많은데 성공한 사람들이 많지 않은 이유가 그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큰 뜻을 품고 농촌에 온 사람일수록 실패하는 예가 많아요. 큰 꿈을 갖고 왔는데 그것이 실태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자기 머릿속의 꿈이었을 때는 백번 실패합니다. 내가 〈진보를 연찬하다〉를 펴냈을 때 그것을 비판한 글을 본 적이 있어요. 내가 실태를 강조했더니 자기는 실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에요. 왜냐면 실태, 현실을 인정하면 꿈이 사라지니까. 놀랄 일이죠. 진보를 추구한다는 사람이 현실을 인정하면 꿈이 사라진다고 하니. 그런 꿈은 이상도 아닌 환상일 뿐이에요."
-선생님의 귀농은 성공하신 겁니까.
"내 경우는 귀농이라기보다는 공동체에 들어간 것인데 만족했어요. 나는 사실 도시 생활도 부정하지 않아요. 무엇이든 차별심을 두고 하는 것은 스스로가 자유롭지 못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자연환경 때문에 시골로 오는 사람이 있어요. 6개월만 살아보세요. 별것 아녜요. 중요한 것은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이에요. 특히 부부가 뜻을 같이해 세운 삶이라면 그야말로 확실한 로망이랄 수 있는데, 그것은 남진이 이미 불렀잖아요. '저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웃음) 그런 로망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부부가 사이좋으면 이웃과도 좋아지고 마을이 화평해져요."
-명문고, 명문대를 나와 보다 성공적인 삶을 사실 수도 있었을 텐데 왜 무소유적 삶을 선택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선택하는데에는 환경적인 요소도 있지만 타고난 기질도 있는 것 같아요. 나는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살았습니다. 서울대 법대 들어가서 남들이 하는 것처럼 사법고시 예비시험도 보았어요. 그런데 현실을 보니 내가 일신의 출세를 위해 살 때가 아니더군요."
-결국은 남민전에 연루되어 감옥생활을 하셨지요.
"남민전과 관련해서는 3개월 활동했습니다. 주체적이거나 과학적이고 현실적인 운동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나왔어요. 그런데 1년 있다가 사건이 터져서 15년 구형을 받았지요. 그동안 실사구시 하지 않은데서 비롯된 내 삶에 대한 댓가라는 생각으로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5년 선고에 4년 살고 1년은 특사로 풀려났어요."
-그 안에서 무슨 변화를 겪으셨습니까.
"그 전부터 내 사상의 변화가 시작되었었는데 그 안에 있으면서 심화되었어요. 제도만을 변화시켜서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는 깨달음, 혁명에서 개벽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개벽은 총체적 변화지요. 제도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의식과 생활까지 바뀌어야 하는."
-선생님께서는 '역사의 대긍정'을 말씀하시던데요. 수긍하기 어려운 사람도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물론이죠.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태도 중의 하나가 문명 자체를 부정하는 태도예요. 나는 이것을 매우 위험하고 반지성적이라고 생각합니다.'대긍정'은 이루어진 현실 전체를 (실패한 경험이든 성공한 경험이든) 받아들여 그것을 바탕으로 새롭게 나가보자는 그런 의미에서 내놓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면 진보라고 하지요. 신자유주의 반대를 열심히 외치던 사람들이 생활에 돌아오면 어떻게 됩니까. 초자유주의예요 신자유주의도 아니고. 이런 것은 정치적 구호일 뿐이지 생명력이 강하지 못하죠. 사실 우리가 경쟁의 폐단을 이야기 하지만, 경쟁을 넘어서는 것에 대해서는 발견하지 못하고 있잖아요. 진보가 해야 할 진정한 '진보의 길'을 찾아야 해요. 그것은 결국 실사구시에 대한 이야기지요. 사회적 실천으로 사회적 진보와 인간 자체의 진보를 이뤄야 해요."
-어떻게 하면 이 시대를 잘 살아갈 수 있을까요.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한 말씀 전해주십시오.
"기개를 가져야 합니다. 이 시대는 젊은 세대들의 진정한 호연지기를 오히려 꺾고 있어요. 대학 만해도 어떻습니까. 대학은 새로운 문화 새로운 진보의 산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고루한 진보의 장이 되고 있지요. 시대는 순환하는 것이니 대학이 다시 창조의 산실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싶어요. 청년들이 그 안에서 호연지기를 기르며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세상을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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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남곡 대표는...
1945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를 나와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으나 4.19혁명을 계기로 사회의 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 사회변혁운동에 나섰다. 반독재 민주화투쟁에 앞장서면서 빈민운동에 참여하고 농촌학교 교사로 일했으며 1979년 남민전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다. 이때 사상에 큰 변화를 얻었으며 출옥 이후 법륜스님과의 인연으로 불교사회연구소에서 새로운 사회 새로운 문명을 연구했다. 이즈음 무아집 무소유로 집약되는 '야마기시' 사상을 만나 1996년부터 8년 동안 경기도 화성의 야마기시 실현지에서 생활했으며 이후 무소유 사회보다는 오늘의 실태에서 출발하는 보편적인 실천을 하고 싶어 장수군 번암면 유정리에 터를 잡고 '좋은 마을'을 만들어가고 있다.
논어를 통해 자기 성찰과 소통의 방식을 나누는 강연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으며 논실마을학교(장수군 번암면) 이사장을 맡아 실상사의 도법스님과 함께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운동을 시작했다.
최근에는 현대적 위기로부터 미래의 밝은 빛을 여는 운동을 의미하는 '신인문 운동'을 주창해 주목 받고 있다. 저서로 〈진보를 연찬하다〉를 펴냈으며 〈논어를 연찬하다(가칭)〉가 곧 출간될 예정이다. '좋은 마을'은 다섯가구가 사는 마을의 이름이면서 이 대표가 만든 장류 생산업체 이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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